<해운대의 뿌리를 찾아서> 김녕 김씨 충의공파 좌동 문중
입향조 김복의 뛰어난 충의정신 해마다 기려
좌동마을은 장산에서 흘러내리는 춘천의 왼쪽에 있는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래는 ‘왼 좌(左)’ 자를 썼으나 지금은 ‘도울 좌(佐)’자로 변경되었는데,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북서쪽으로는 구곡산이, 북동쪽으로는 부흥봉이 자리하며, 남쪽에는 농경지로 이용되던 넓은 평지인 장자벌이 있었다. 김녕 김씨의 시조 김시흥은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의 39세손이며,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넷째 아들 김은열의 9세손이다. 김시흥의 아버지는 동정공 김봉기의 넷째 아들로 경상북도 의성에서 태어났다. 의성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 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에 봉하여졌으며, 명종 때 조위총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상락군에 봉하여졌다.
이에 그 후손들이 본관을 김녕으로 하다가 고려 후기 지명이 김해로 개칭되자 김해로 본관을 삼게 되었다. 그러나 김수로왕 계통의 김해 김씨와 혼돈되므로 김해 김씨를 선김으로, 김녕 김씨는 후김으로 부르다가 후손들이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자 1865년(고종 2) 김녕으로 본관을 확정하였다.
이 마을의 인물로는 임란호국 별전공신 김복이 입향조이다. 부친은 흥국이며 배인은 숙인 남평문씨로 세 아들을 두었다. 사육신의 한 분인 백촌 김문기 선생의 후손으로 부모를 모시는 효심이 깊고 또한 남보다 충의정신이 뛰어나 임진왜란 당시 동래지방 출신으로 내 고장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창의 모병하였다. 공은 1592년 4월 15일 동래성 전투에서 송상현 부사와 여러 장졸들과 함께 끝까지 왜구와 싸우다 순국하였다. 1605년 선무원종공신 2등의 녹훈이 내려지고 후에 첨정과 중훈대부선공감부정 이모장군훈련원정의관작이 추서되었다.
동래부사는 충렬비각에 공의 이름을 써서 게시하고 뛰어난 충절을 기리고 의용이란 두 자를 쓴 편액을 각인의 문 앞에 걸도록 하고 전(田) 1결을 내렸다. 충렬사지 별전청서문의 기록에는 별도로 관장하는 공신이며 숙종 임금은 공의 자손에게 세금과 노역을 면제하고 문간에 정포하는 급복정려를 내렸다. 나라에서는 공의 충의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렬사에 배향하고 해마다 동래 유림에서 춘추로 전통의식의 제향을 봉행하고 있으며 부산시장이 올리는 시민제향은 매년 양력 5월 25일에 봉행한다. 공을 모신 묘소는 해운대 좌동 창자골 간좌로 군부대 경내 선영에 안장하였으며, 김복의 묘소는 장산 기슭 도산소(都山所)[해운대구 좌동 산 96-1번지]에 있다.
2013년 현재 좌동에는 김녕 김씨 7가구가 살고 있고, 해운대 지역에는 10여 가구, 부산과 경상남도 지역에는 60여 가구가 산다. 2003년 ‘김녕김씨충의공파휘복후문중회’ 재실을 건립하여 위패 50위를 모시고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제향을 올린다.
/ 이광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