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0. 10
가계부채 관리 차원에서 최근 금융권의 대출 조이기가 이어지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이 전세 대출 실수요자는 어려움을 겪지 않게 살피라는 지시를 내렸다. 시중은행들의 전세대출 한도 축소 움직임에 수도권 곳곳에서 전세 실수요자들이 타격을 입자 긴급하게 정책 보완 주문을 낸 것이다. 다만 가계부채 증가세가 대부분 실수요자에 기인하는 상황에서 가계부채 관리, 실수요자 보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 게 만만치 않을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시장의 눈이 이달 중순 발표 예정된 금융당국의 가계부채 ‘보완대책’에 쏠리는 이유다. 추가 대책에서도 정책 실패로 부동산 가격이 먼저 올라서 이를 감당하기 위해 대출이 늘어났다고 보는지, 대출이 먼저 증가해서 집값·전셋값이 올라갔다고 보는지에 대한 정부의 판단이 성패의 핵심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서울 아파트. / 연합뉴스
시중은행 전세대출 조이기에 전셋집 계약 파기 속출
부동산 업계에 따르면 최근 시중은행들이 전세대출 한도 축소 움직임을 보이면서 전세 신규 거래나 갱신을 하려던 수도권 실수요자들이 승인을 거절당해 잇따라 타격을 입고 있다. 지난해 7월 임대차 3법 시행 이후 전세 매물이 급감하고 전셋값이 천정부지로 오른 상황에서 대출까지 막힌 것이다.
실제로 NH농협은행은 지난 8월 말부터 주택담보대출과 전세대출 창구를 한시적으로 닫았다. KB국민은행은 지난달 29일부터 일반 주택담보대출과 집단대출, 전세대출 한도를 모두 축소했다. 하나은행도 이달부터 일반 주택담보대출 일부 한도를 줄이고 전세대출 한도도 축소했다. 아직까지는 일부 1금융권만 대출을 조였지만 곧 2금융권을 비롯한 전체 은행권으로 번질 것이란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앞서 지난 4월 올해 가계부채 증가율을 5∼6%대, 내년 4%대로 낮춘다는 ‘가계부채 관리방안’을 발표한 바 있다. 가계부채 증가율 1%는 금융당국의 가계부채 데이터 기준으로 16조원가량에 해당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전세대출 불가 통보를 받고 전세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도 수도권에서 속출하고 있다. ‘전세대출이 안 되면 계약 파기 가능’ 특약을 거는 일도 흔한 풍경이 됐다는 후문이다. 집주인의 임차보증금 반환 목적 주택담보대출 역시 거절하는 사례가 속출하는 점도 세입자들이 불안해 하는 요인이다.
전세살이가 어려우니 이를 월세나 반전세로 돌리는 집도 늘었다. 서울부동산정보광장에 따르면 지난 8월 서울에서 아파트 임대차 계약 1만 2,567건 가운데 4,954가구(39.4%)가 반전세였다. 임대차법 시행 전 1년 간 반전세 거래 건수가 28.1%에 불과했다는 점과 비교하면 크게 늘어난 수치다. 공시가격 인상에 따른 보유세 인상도 반전세 거래 증가의 한 이유로 꼽힌다.
전세 대출은 막히고 있지만 전셋값은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은 지난해 7월 3.3㎡(1평)당 1,490만원에서 올 7월 1,910만 원으로 28.2% 급증했다. 법 시행 전 1년 상승률이 9.4%에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상승폭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文 “실수요자 어려움 겪지 않게 노력하라”
시중은행들이 이 같이 대출 조이기에 나선 것은 정부의 가계부채 관리 기조와 무관하지 않다. 현재 정부는 부동산 등 자산시장 과열을 막기 위해 시중 유동성을 반드시 관리해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친 상태다.
실제로 청와대는 지난 8월5일 고승범 금융위원회 위원장을 내정하면서 “가계부채 관리 등 금융 현안에 차질없이 대응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고 위원장 또한 8월27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가계부채 관리를 최우선 역점 과제로 삼고 가능한 모든 정책역량을 동원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고 위원장은 취임 뒤인 지난달 27일에도 경제·금융시장 전문가 간담회에서도 “총량 관리 시계를 내년 이후까지 확장하고 대책의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강도 높은 조치들을 단계적으로 시행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다음 날인 28일에도 8개 정책금융기관 기관장과 간담회를 한 뒤 기자들과 만나 “전세대출은 실수요자 대출이라 세밀하게 봐야 하는 면이 있는 반면 금리, 조건 등이 유리하다는 지적도 있어 (규제를) 종합적으로 검토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애꿎은 실수요자들이 피해를 입는 사례가 급격히 늘자 문 대통령도 결국 참모들에게 규제 완화를 주문했다.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 6일 문 대통령이 참모회의에서 “가계부채 관리는 불가피한 상황이지만 전세대출 등 실수요자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정책 노력을 기울여 주기 바란다”고 당부했음을 전했다. 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오전 참모회의에서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기숙사형 청년주택 전세대출 제도 개선안을 보고받으면서 나왔다.
이는 문 대통령이 사실상 금융당국에 보완책에 대한 우회적 신호를 준 것으로 분석된다. 문 대통령이 주택 문제에 대해 직접 메시지를 낸 건 지난 5월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기자회견 이후 사실상 5개월여 만이었다.
이와 별도로 박수현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지난달 26일 MBN ‘정운갑의 집중분석’에 출연해 ‘문재인 정부에서 아쉬운 점은 어떤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 “국민이 여론조사 등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부동산 정책”이라고 답했다. 박 수석은 “국민에게 권한을 위임을 받았으면 무한 책임을 지는 것이 정부”라며 “저희도 부동산 정책에 대해서 너무나 죄송하고 드릴 말씀이 없다. 다만 다음 정부가 이런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는 토대도 마련하는 것이 저희가 해야 될 일”이라고 말했다.
고승범 “상당히 어려운 과제”···이달 중순께 보완대책 발표
문 대통령이 전세 대출 메시지를 낸 6일, 고 위원장도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이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다. 이날 국감에서는 전세 대출 문제에 대해 여야 의원들이 한목소리로 우려를 표시했다. 고 위원장은 전재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출을 실제로 필요로 하는 실수요자들이 금융시장에서 굉장한 불만들을 내놓고 있다”고 지적하자 “최근 가계부채가 규모도 많이 늘고 늘어나는 속도도 빨라 걱정이 많다”며 “최근 늘어나는 것은 전세대출과 정책모기지, 집단대출 등 대부분 실수요자 대출”이라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실수요자는 보호하면서도 가계부채도 관리해야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과제”라며 “관련 보완대책을 만드는 중”이라고 말했다. “가계대출 증가율 6%대를 맞추기 위해선 전세 대출과 집단대출을 모두 막아야 달성 가능하느냐”는 유동수 민주당 의원 질의에는 “실수요자도 상환능력 범위 내에서 대출이 이뤄져야 한다”며 “결국 가계부채 관리는 강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앞으로도 이러한 관리 강화 추세는 계속 가져가려 한다”고 답했다.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경기순환 지표를 기준으로 보면 2017년 9월 이후 한국 경제가 계속 침체 상태인데 이 시점에 금융 긴축을 해 민간의 돈을 빨아들이는 게 맞느냐”고 지적한 데 대해서는 “자산 가격 급등과 부채 증가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취지로 반박했다.
정부는 가계부채 보완대책을 이달 중순 발표를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앞서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5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기재부 국정감사에서 “다주택자 등을 포함해 가계대출이 너무 급속하게 늘어나 총량적으로 관리할 수 밖에 없었다”며 “실수요자에게 영향을 최소화한 가계부채 대책을 이달 초중순 중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정부의 새 정책은 일단 ‘가계부채를 억제한다’는 큰 틀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 위원장 말대로 최근 가계부채 증가분 대부분이 실수요자 대출분인 상황에서 ‘실수요자를 상환능력 범위 내에서 보호’하는 것이 얼마나 가능하고 효과적일지는 미지수다. 유동성이 부동산 시장을 흔든 게 아니라 거꾸로 서울·경기 요지의 부동산 공급 감소로 가격이 먼저 올라 가계대출이 늘어난 것이라면 시장 혼란과 국민들의 불만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빚 내는 게 훨씬 자유로웠던 이전 정부까지는 시장 참여자들이 왜 굳이 각종 대출을 최대한으로 끌어모아 부동산 시장에 투척하지 않았는지도 다시금 생각해 볼 문제다.
※‘국정농담(國政濃談)’은 행정·외교안보·정치 관련 ‘농도 짙은’ 현장 이야기와 현안 소식을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윤경환 기자 ykh22@sedaily.com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