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봉암사 극락전보물 1574호
봉암사는 지금부터 약 1100여년전 신라 헌강왕 5년에 _지증국사께서 창건한 고찰로서 선종산문인 구산선문의 일맥인 희양산문으로 그 사격이 매우 당당하다. 당시 이곳은 신라 문화의 정수인 선풍을 크게 일으켜 구산선문 가운데 희양산파의 주봉을 이루었던 곳이다. 특히 신라 제 49대 헌강왕은 화풍으로 소폐하고 혜해로 유고할 유신정치를 뜻하고 이었는데 이런 헌강왕의 개혁 의지에 이념을 제공한 것이 지증대사의 선이었다. - 봉암사 홈페이지에서 발췌 -
▲ 경내로 들어서니 일찍부터 공양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1982년 6월 종단은 봉암사를 조계종 특별 수도원으로 지정하여 성역화 의지를 표명하였다. 1982년 7월 문경군에서는 사찰 경내지를 확정 고시하였다 그래서 희양산 봉암사 지역은 특별 수도원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막아 동방제일 수행 도량의 분위기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 봉암사 홈페이지에서 발췌 - ▲ 대웅보전 앞에서 경내를 내려다 본 전경 문경 봉암사 극락전(보물 1574호) 봉암사 극락전은 신라 경순왕이 피난시 원당으로 사용한 유서 깊은 건물로 전하고, 현재 극락전 내부에는 어필각(御筆閣)이란 편액이 걸려 있으며, 일제강점기 때 옥개보수가 있은 듯 망와에 소화16년(1941년)이란 기록이 남아 있다. 장흥 보림사와 함께 유이하게 현존하는 선문구산인 봉암사에서 극락전은 가장 오래되고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전각이다. ▲ 극락전 천정 모습 그 형태나 위치로 보아 조선 중후기에 세워진 왕실 원당일 가능성이 높으며, 기단과 초석은 고려조의 것으로 볼 수 있다. 높은 단층 몸체에 차양칸을 둘러 마치 중층건물 같은 외관을 구성했고, 몸체와 채양칸의 기둥열을 다르게 한 독특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독특한 외관과 건축수법 및 단청에서 조선 중·후기의 건축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과 탑비는... ▲ 예전 사진에는 보호각이 없던데, 아마도 근래에 답과 탑비의 보호를 위해서 보호각을 세운 것 같습니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보물 137호) 기단은 2단으로 이루어졌으며 평면 모양은 8각이다. 밑 단에는 각 면마다 사자를 도드라지게 조각하였으며, 윗단을 괴는 테두리 부분을 구름무늬로 가득 채워 두툼하게 하였다. 윗단은 각 모서리 마다 구름이 새겨진 기둥조각을 세우고, 사이 사이에 가릉빈가를 새겨 넣었는데 그 모습이 우아하다. ▲ 가릉빈가의 모습 가릉빈가는 불교에서의 상상의 새로, 상반신은 사람 모습이며, 하반신은 새의 모습이다. 가운데받침돌의 각 면에는 여러 형태의 조각을 새겨 넣었는데,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다. 윗받침돌은 윗면에 탑신을 괴기 위한 굄대를 두었으며, 모서리마다 작고 둥근 기둥 조각을 세워 입체감 있는 난간을 표현하였다. 탑신은 8각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고, 앞뒤 2면에는 자물쇠와 문고리가 달린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다. 그 양 옆으로는 불교의 법을 지키는 사천왕(四天王)을, 나머지 두 면에는 보살의 모습을 돋을새김 하였다.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보물 138호) 조사전과 내부 전경은... ▲ 조사전 내부의 단청은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 조사전 좌측의 출입 통제 구역의 건물... 삼층석탑 좌측에 있는 범종각 전경... 봉암사 삼층석탑(보물 169호) 감로수 있는 방향에서 바라 본 봉암사 경내 전경... 봉암사 마애보살좌상(경북 유형문화재 121호) 경내의 감로수가 있는 방향의 계곡을 건너서 등산로를 따라서 10여분을 오르면 작은 못(沼)이 보이고 그 좌측으로는 경사가 완만한 굉장히 넓은 마당 바위가 보입니다. 바위 우측 한 켠으로 흘러내리는 계곡 물은 작은 소를 만들었습니다. 마당 바위 좌측 한 켠에는 큰 바위가 하나 서 있는데, 이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습니다. 일반 관광객인 저 같은 사람들은 봉암사의 하이라이트는 이 곳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주변 경관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바당 바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아침 햇살을 받으며 좌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신선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경상북도 문경의 봉암사(鳳巖寺) 근처에 있는 마애불이다. 마애불은 절벽의 거대한 바위면이나 돌에 선이나 돋을새김 기법 등으로 조각한 불상을 말한다. 이 불상은 머리 주위의 바위면을 얕게 파서 불상이 들어 앉을 자리를 만들어 머리 부분만 돌출시키고 몸체는 가는 선으로 새겼다. 이 마애불은 전체적으로 탄력과 힘이 감소되고 형식화되어 가는 고려말 조선초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보물 172호) 정진대사 원오탑과 탑비 그리고 몇 기의 부도는 봉암사 경내를 들어서기 조금 전에 우측 산길로 접어들어 안 쪽에 있어서 일반인들이 찾기는 조금 힘듭니다. 일행과의 만나는 시간에 ?겨서 산 중턱에 있다는 정진대사 원오탑(보물 171호)을 못 보고 돌아 나온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봉암사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 전기의 사리탑으로, 정진대사의 사리를 모셔놓고 있다. 정진대사(878∼956)는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활약한 승려로, 효공왕 4년(900) 당나라에 들어가 25년간 유학하고 경애왕 1년(924)에 돌아와 신라 경명왕의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고려 태조 18년(935)에는 봉암사를 두번째로 크게 짓고, 불교의 중흥에 이바지하기도 하였다. 특히 고려 전기의 태조·혜종·정종을 선문(禪門)에 들게 한 장본인으로,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왕은 ‘정진’이라는 시호와 ‘원오’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리돌을 올린 모습으로, 거북의 등 중앙에 마련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이 두드러지게 커 보인다. 꼭대기에는 불꽃무늬에 휩싸인 보주가 또렷하게 조각되어 우뚝 솟아있다. 고려 광종 16년(965)에 세워진 비로,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화되었으며 조각 기법이 퇴화하였다.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이몽유가 짓고, 명필 장단열이 글씨를 썼다.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보물 171호) 봉암사에 있는 정진대사 긍양의 사리탑으로, 경내에서 벗어나 사찰 입구 북쪽 산중턱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경승지를 택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환적당 지경탑(경북 문화재자료 133호) 봉암사 뒤쪽 기슭에는 3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부도도 그 중 하나로, 조선시대 중기의 승려인 환적당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환적당(1603∼1690)은 ‘지경’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16세에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고 팔공산 동화사에 들어가 성현대사의 가르침을 받았다. 21세에는 청량산에 들어가, 그 곳에서 31년간 곡식대신 솔잎·밤·대추 등을 먹으며 지내었다. 88세에 해인사의 백련암이라는 암자에서 생을 마치었다. 탑신의 몸돌 한 면에는 ‘환적당지경지탑(幻寂堂智鏡之塔)’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다. 함허당 득통탑(경북 문화재자료 134호) 봉암사 뒤쪽 기슭에는 3기의 부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부도도 그 중 하나로, 조선시대 전기의 승려인 함허당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함허당(1376∼1433)의 호는 득통으로, 21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세종의 부름을 받아 4년동안 대차어찰에 머무르며 교화를 하였고, 봉암사를 새로이 보수하기도 하였다. 이 절에서『금강설의』를 지었으며, 세종 15년(1443)에 입적하였다. 탑신의 몸돌에는 ‘함허당득통지탑(涵虛堂得通之塔’이라 새겨 그 주인공을 밝히고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액자 모양의 윤곽을 두른 후 그 위아래에 조각을 두어 장식하였다. 경북 문경 관광지도에서 봉암사 찾아보기 |
출처: 관광천국 원문보기 글쓴이: 중원경/김광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