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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을 살아라 1-1편]
본래 있던 것이 지금도 있다 | 본유금유(本有今有) (33:11)
보통 우리들에게는
머릿속에 항상 무의식의 흐름이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가 온전하게 깨어서 살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팎의 나의 생각 감정과
또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온전히 깨어서 다 볼 수 있는 힘이 지금은 없어요,
가려져 있어요.
가려져 있는 핵심은
그러니까, 여러분, 내가 지금 무엇에 가려져 있는가?
왜 내 눈이 모든 걸 다 못 보고 있는가?
모든 걸 다 보는 것은 천안(天眼)이라 그러잖아요.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千手天眼) 그러잖아요.
천안이라는 말은 안팎에서 일어나는 걸 다 본다는
그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다 보면 다 대응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톨레가 무의식 상태가 아니라
내가 의식상태다 하는 말이나
'관세음보살은 천수천안이다.'
눈이 천 개라서 다 보고
그리고 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손이 가서 도와주고.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인간이 자기가 타고난 성품을 온전히 쓰고 사는 상태일 텐데
보통 우리들은 눈이 장막에 가려 있다.
톨레가 '장막'이라는 표현을 썼어요.
그래서 화두 들고 집중하는 화두 집중수행을 하잖아요?
그때 제가 자주 쓰는 말씀드리는 게
'이 집중의 힘을 가지고 이 정신적인 벽, 정신적인 장막을 뚫어서
본성을 한번 봐야 됩니다.'
이렇게 제가 표현하잖아요.
그때 집중하라고 제가 하잖아요,
생각하는 게 아니라 집중하라고.
그러니까 저의 경험도
집중했을 때 그걸 한번 뚫었다는 거예요.
그걸 장막을 뚫었다하든지
아니면 무의식의 흐름이 한번 끊어졌다고 하든지,
하여튼 그 본성을 찾아서 가다 보면
자기가 지금 눈이 장막에 가려져 있다는 것을
스스로 한번 알아채는 거죠.
그 장막,
우리 눈을, 심안을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100% 다 못 보게
정신을 흐리게 만들고 있는 우리 안에서 흐르고 있는 무의식의 흐름,
그 내용은 뭐냐면
정확히 말하면 분별심이에요.
그러니까 지금 장막이라는 것은 가린다는 거잖아요.
여러분께서 자기를 한번 돌아보세요.
지금 내가 어떤 느낌이냐면
'내가 이렇게 있고, 이 세계가 있다.'
그런 느낌이 있으면
나와 세계 사이에 장막에 있는 거예요.
그 장막이 뚫려 버리면 (나와 세계 사이에)~
이 분별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 분별이라고 하는 말은
나와 세계 사이를 나누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그 나누는 것이 벽이라는 거예요.
벽 혹은 장막
그거를 우리들이 가지고 살고 있다는 거예요, 일반인들은!
그걸 한번,
분별심을 극복하는 것,
그리고 분별심이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무명(無明)이에요.
무명의 내용은 분별심.
분별심이 미혹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불교에서는 무명이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창세기에 선악과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예요.
3:49
그분이 유대교를 소개하면서
그분 이야기 중에 에덴동산에 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하나는 본질인 생명의 나무였고
하나는 현상인 이 분별, 분별의 나무였는데
그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현상계로 떨어진 거죠.
근데
기독교에서는 이거를 원죄라고 보지만
유대교에서는 이걸 죄라고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건 인간의 선택이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공부도
본질을 깨닫는 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하고
그 입장에서 이 현상을 잘 살아가는 것,
천수천안을 가지고 잘 살아가는 평상심이라고 할 때,
선에서는 무심도 한 겹이 막혀 있다,
한 겹을 더 뚫고 나가야 한다.
그러면 그것은 본질에서 머무는 게 아니라
그 지혜를 가지고 현상에 나와서
현상에서 보살행을 하면서 남을 도와주면서 잘 살아가는 것,
그게 평상심입니다.
그래서 '무심보다도 평상심이 한 수 더 위다.'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실제로 우리가 이 본질을 깨닫자고 하는 이유는
본질을 깨달아서 본질의 입장에서 살자가 아니고,
'그 본질의 힘을 가지고 현상에서 똑바로 깨어서
안팎의 내외가 명철하게 안과 밖이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든 일에 아주 명(明), 의식적으로 깨어서 다 잘 살펴서
일을 잘 처리하는 그런 삶을 살자.'
하는 게 우리 공부의 목표예요.
'본질에 가서 머무는 게 아니라 돌아 나와서 현상에서 잘 살자.'
이거거든요.
나도 좋고 남도 좋고 도와주면서.
그러니까 그렇게 본다면
그 분별 자체가 문제가 꼭 나쁜 건 아닌데
문제는 무심을 거쳐서 평상심을 해야 되는데
지금 우리는 무심은 잃어버린 상태라는 거죠.
본질을 잃어버리고 현상계에 떨어져서
현상계에서 이 벽, 분별의 벽,
여러분! 분별한다는 것은 나눈다는 말이고
나누면 그 사이에 벽이 있다는 거예요.
눈에는 안 보이지만 우리는 이미
나와 남, 좋은 거 나쁜 거,
크고 작은 거, 남자 여자, 뭐 우리나라 다른 나라,
온갖 이 분별의 벽이 우리는 습관화되어서
우리의 머릿속에 이 습관이 되어 있는 거, 분별심,
그래서 그 분별하기 때문에 분별해 놓고 좋다 나쁘다 하니까
좋은 것에 홀려 가지고 그걸 집착하다 보니까
현상계에 떨어져서
집을 나와서 헤매고 있는 '집 나간 거지' 같은 상황,
그게 지금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것의 내용이다~ 이거죠.
이걸 바로 잡는 게 지금 우리 공부의 목표예요.
7:01
그래서 하여튼
톨레의 경험과 저의 경험하고 이런 걸 다 비춰보면
결국에는 핵심은 뭐냐 하면
'지금 이 순간 내 정신이 나가 있는가? 정신 차려 있는가?'
이거 하나인 거예요.
'정신 차려 있다!'
이 말은 내가 안팎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의식이 깨어나 있어서 다 살펴서 처리를 하고 있다는 거고,
'깨어있지 못하다!' 하는 것은 무의식 상태로서
일어나긴 일어나는데 그냥 끌려가는 거,
경계가 나타나면
그냥 가서 마음이 그냥 붙어버리는 미혹되는 거,
이 분별심과 미혹, 그게 지금 무명이다. 이거죠.
여러분, 무명상태라면 이 상태가 반복되겠어요?
아니면 한 번으로 끝나겠어요?
반복되겠죠.
무명상태에서 반복되는 것이 행(行)이라는 거죠.
그래서 반복이 되면 행은 항상 업(業)이 같이 붙거든요.
행업(行業)
무명상태가 반복되니까 업이 되는 것이 무명!
행!
행업이 계속 반복된다. 습관화된다.
그래서 이 분별심의 주체인 이것이 에고라는 것이
'식'(識)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에고를 말한다.
그래서 분별심에 의해서 미혹되어서~ 계속
미혹된다는 말은 우리 마음이 '좋다, 나쁘다'라고 갈라놓고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려고 취사를 계속한다
이 말입니다.
그게 반복되니까 그 습관이 굳어 가지고
'식'이라고 하는 이거는 에고죠. 에고!
식중에서 칠식(七識)을 에고라고, 칠식이 핵심이니까,
식에서는!
팔식(八識)은 에고가 가지고 있는 정보들이고,
그 정보를 쓰는 건 에고라서 칠식
그러니까 식이 에고를 이야기하고
에고는 이 식은 말하자면 돼지 눈 같아서
돼지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게 명색(名色)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니까 제가 여러분께 기회에 있을 때마다 계속 반복해서
앞으로도 12연기를 말할 거예요.
무명에서 행이 일어나고, 행이 식을 에고를 만들고,
에고는 에고의 눈에 비치는 세계,
이 세계를 자기 식대로 해석한다 이거죠.
그래서 그 핵심은
이름을 모든 사물에다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핵심이에요.
우리가 이 세계를 볼 때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에고가 이름 붙인 대로 본다는 거죠.
이때 '이름 붙인다' 이 말은 관념이에요.
고정관념으로 비춘 상태에서 본다.
그래서 식(識)이 명색(名色)을 만들어내는 거예요.
이것두 굉장히 중요해요. 여러분!
우리 마음이 이 세계를 비춰내고 있는 것!
우리 마음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세계가 물들어 있는 세계로 지금 보인다.
그게 명으로 물들어 있는 색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10:17
그러니까 12연기에서 요 네 가지 단계가 아주 핵심이고.
이 말은 뭡니까 여러분!
내가 지금 이런 상태다 이 말이에요.
내가 지금 이 세상을 흔쾌히 100% 통쾌하게
유쾌, 상쾌, 통쾌하게 못 살고 있는 이유는
내가 지금 막혀 있다 이거죠. 막혀 있다.
그 막혀 있는 내용이 지금
부처님께서는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요 상태로 지금 막혀 있다.
그러면 식과 명색 사이에 인간한테는 6입(六入)이 있어서
6가지 감각기관이 안, 이, 비, 설, 신, 의 6입이 있어서
6입을 통해서 식과 명색이 촉(觸), 접촉을 하고
접촉하자마자, 수(受), 수는 받아들이는 건데 뭐가 생기느냐?
좋다 나쁘다가 생깁니다.
접촉하자마자 모든 경계에서 좋다, 나쁘다가 생긴다.
왜 생겨요?
분별심에 쩔어 있기 때문에, 보자마자 좋다 나쁘다가 즉각 생긴다.
좋다, 나쁘다가 생기면
애증이, 수는 애증,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을 낳고
애증은 취사, 취하고 버리는 것을 낳고
그러면 그 취하고 버리는 이 갈등의 주체인 유(有)가 확립되어서
그 '유'가
내가 태어났다 생(生), 노(老) 내가 늙는다, 병(病) 병든다, 죽는다(死)
하는 고통을 다 고스란히 받고 있는
그 12연기를 계속 우리가 반복하고 있는 게
지금 일반적인 고해라고 하는
고해를 살아가는 중생의 삶의 모습이다.
이거 바로 잡자.
이게 가르침의 핵심이잖아요.
12:08
여러분, 이 가르침이 저는 고마워요.
한 분의 깨달음과 그 가르침이 지금도 새로운 거예요.
지금도 고스란히 모든 인류가 고해에 있고
어떤 식으로 고해에 빠져 있는가를
자기를 잘 돌아볼 수 있게 설명을 해 놓고
또 이제 무명을 명으로 바꾸는 거죠.
무명을 명으로 바꾼다.
무명은 분별심이잖아요.
분별심을 극복하는 것은
나의 본질이 하나인, 나눌 수 없는 의식이라는 걸
깨닫는 겁니다.
이게 지금 핵심이라는 거죠.
깨달음이 왜 중요하냐?
분별심을 치유하는 약이 깨달음이라는 거죠.
내가 누구인지를 못 깨달으면 천상 이 몸을 나라고 하고
몸하고 이 세계하고 분별하고.
이 첫 번째 분별로 안 끝난다 이거죠.
나도 내 안에서 또 분별하고
밖에도 계속 좋은 거 나쁜 걸 계속 분별해 가지고
지금은 완전히 파편화된 세상에서 살고 있는 상황.
이 분별의 어떤 장막,
분별이라는 말은 이것과 저것을 나눈다는 말이잖아요.
그건 나눈다는 고게 눈에 보이지 않는 장막이 되어 가지고
모든 것을 분별하고 있는 우리들은 이게 습관화되어 있다.
어떻게 그것을 타파할 것인가?
이 세상이 나는 몸이 아니고 의식이라고 하는 이 사실을.
의식은 분별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 점이 확실해질수록
이 분별심이 극복이 되어가는 그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무명을 명으로 바꾸는 것이 깨달음이라는,
거기서 무명이 명으로 바꿔지면 무명의 습관은
이제 그만, 이 업은 그만둘 거 아니에요?
이 업이 그만두면 에고라고 하는 것도 이제는 바뀌어진다.
전식득지(轉識得智)
이 식이라는 것이 지혜로 바뀐다는 거죠.
< 전식득지(轉識得智). 두산백과.
번뇌를 바꾸어 열반에 이르는 것을 뜻하는 불교용어.
중생이 미혹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번뇌와 잡념을 없애고 열반을 얻는다는 의미 >
지금 식은 하나하나 나눈다는 말이에요.
지혜라는 말은 모든 것이 연기로 이어져 있다는
그런 뜻인 거죠.
12연기가 하나하나 바뀌어 가지고
우리가 정상적인 있는 그대로 모든 사물을 대하면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그런 상황으로 바뀌는 것.
그게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모습인데
톨레의 이야기는
지금 새삼스럽게 12연기를 돌아보게 해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여튼 지금 저희 입장에서는 어차피 한국인으로서
또 불교와 깨달음의 세계를 알고 있는데,
외국인 톨레가 자기 나름대로 깨닫고 하는 이야기가
매칭이 잘 되어서
부처님의 가르침과 톨레의 가르침이 조금도 모순 안 나고
서로 간에 잘 연결되고 있는
그렇게 읽는 것이 저한테 의미를 가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은 참고하세요.
저는 제 입장에서 그렇게 봐지니까
여러분은 참고하셔서 여러분 나름대로 보셔야죠.
여러분 나름대로 잘 소화를 하시기 바랍니다.
15:37
그러면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 연필이나 빈병 따위를 하나씩 집어 들고 들여다보면
그 활기찬 아름다움에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습니다. >
저 같은 경우는 그래 가지고 그렇게 도서관에 있다가
결국은 이제 집에 가려고 나왔을 거 아니에요?
그래서 나와 가지고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보도블록이 깨졌더라고.
그냥 돌멩이도 아니고 보도블록이 깨졌는데,
그게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이 그랜드 캐년처럼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장엄할 수가 없어.
여러분,
그랜드 캐년의 특징은 뭐냐 하면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크기.
지금 여러분,
우리 서울 사람한테는 도시 그러면 서울이 하나의 표준이에요.
근데 제가 뉴욕 갔을 때
서울의 이 모습에 익숙해져 있는 제가 뉴욕 갔을 때
뉴욕에서 록펠러 센터,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그런 백몇십 층 되는 거
거기 꼭대기에 딱 올라가서 보면
그런 식의 건물이 수천 개가 딱 펼쳐져 있으면,
지금 서울을 보던 도시 사이즈 개념하고
뉴욕 가면 이게 백몇십 층짜리가 그냥 쫙 펼쳐져 가지고 압도당해요.
그 스케일에.
그러니까 그럴 때 보면 한 번 깨지는 느낌이 오거든요.
기존의 관념이 깨지는 느낌.
그러니까 그랜드 캐년 가보면 그 스케일이 압도된다는 거예요.
기존에 있던 모든 사고방식이 깨지는 느낌이 온다 이거죠.
그러니까 그런 식의 체험이다 이거죠.
돌멩이 하나에서도 이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기적처럼 이게 대단한 일인가 하는 느낌이
이럴 때 이제 오더라.
그러니까 저 같으면 그랬어요.
근데 지금 똑같은 이야기를 톨레도 하고 있어 가지고
신비로운 거예요.
17:51
< 그날 나는 시내 곳곳을 헤매고 다녔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처럼 지상의 삶 전체가
내 눈에는 온통 기적으로 보였습니다. >
갓 태어난 아기, 또 다른 비유가 아까 같은 경우에는
누에고치 속에서 막 나온 나비, 이해되나요?
갓 태어난 아기 혹은 인두껍,
이 몸을 나라고 하는 이 인두껍을 벗고 나온 자이언트,
혹은 누에고치 속에서 성충이 되어서 드디어 나온 그 나비가
날개를 쫙 펴가지고 파르르 떨면서 날아오를 때의 그 느낌,
그런 것이 표현은 다양하지만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그 후 5개월 동안은
흔들림 없는 평화와 기쁨 속에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후로는 차츰 그 강도가 줄어들었습니다.
그런 상태가 너무도 자연스러운 나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행동을 하더라도
내가 이미 품고 있는 본래의 성품에
그 무엇도 더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세상에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
톨레는 좀 크게 깨어났어요. 사실은.
우울증에 바닥을 쳤기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람은 완전히 변했어요.
여기서 근데 저 같은 경우는
논문 쓰다가 그 체험을 했기 때문에 계속 논문을 썼죠.
그러고 석사학위를 받고 스페인 마드리드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같은 주제로 계속 박사 논문을 계속 썼어요.
그러니까 비슷한 주제로 계속했는데
문제는
톨레는 완전히 기존 생활은 다 버려버리고,
2년간 런던의 하이드 파크입니까?
그 런던의 공원에서 노숙자 생활했다는 거예요.
그 삶 자체가 지금 바뀐 거죠.
저는 그렇게는 안 되더라고요
어떤 경험의 강도 같은 것 차이는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그냥 뭐 순탄하게 그 뒤로 결혼도 했고
유학 가서 뭐 학위를 다 밟았고 돌아오고.
근데 한 가지 끝내 잊을 수 없는 것은 뭐냐면
툴레도 지금 제목이 "The Power of Now" 잖아요
'지금 현재의 힘'이잖아요.
저도 똑같은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어떻게 하면 그때 그 상태로 돌아갈까?' 하는 것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것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저도 있었다 이거예요.
그때가 너무나 진짜 신선한 난생처음 맛봤던
그런 어떤 순수한 절대 체험인데
그러니까 그때부터는 알겠더라고요.
절대가 뭔지 알겠더라고,
모르지만 알겠더라고!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하여튼
'아 이거구나!', '이 체험을 말하는구나.' 하고
확실히 알게 되었고
모든 것이 다 이해되더라고요.
그때 놀라운 것 중에 하나는 선어록이 읽히더라고요.
그때 선어록 보면 무슨 말인가 알겠더라고요.
그런 하여튼 변화는 있었어요.
근데 그 뒤에 문제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흐지부지 될 거 아니에요?
어떻게 하면 다시 순수한 그걸 회복할까, 돌이킬 수 있을까 하는
그 마음이 있었고
저는 저도 모르게 터득을 한 게 있어요.
터득한 게 뭐냐면
의식을 항상 지금 현재로만 돌이키면 다시 그 상태가 되는 거예요.
저절로 그게 터득이 되더라고요.
그리고 알고 봤더니
인문학의 주제는 항상 '지금 현재'라고 하는 시간이다.
그 뒤로 계속, 왜냐면
제가 석사 논문에서 안 끝나고 박사 논문을 발전을 했으니까
결국 인문학의 주제는 시간과 존재.
시간은 현상이고 존재는 본질이에요.
현상과 본질이 인문학의 주제예요.
근데 그중에서 우리가 어떻게 존재 체험을 하는가
모든 인문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이거예요. 줄이면!
존재 체험이 중요한데
존재 체험의 문은 현재라는 거예요.
우리가 의식이 산만하게 돌아다니다가
현재라고 하는 이 순간에 정말로 제대로 계합이라고 하는 것
현재라고 하는 거하고 딱 맞을 때 존재로 싹 들어간다는
현재가 존재의 문이다.
'시간은 존재의 문이다.'
이런 거는 하이데거 철학은 '존재와 시간'이라는 주저(主著)
대표작이 있잖아요,
이거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철학이든 문학이든 또 그 외에 인문학이든
인문학의 주제는 '존재를 어떻게 체험하는가 인간이?'
그때 존재 체험하는 그 문은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하는 '시간'이라는 '현재'라고 하는 것!
그래서 항상 의식을 현재로만 딱 가져와서
현재하고만 딱 맞으면 그때의 느낌이 쫙 살아나는 거예요.
근데 그게 하나 터득한 내용이었어요.
그래서 지금 포인트가 결국은 우리가 본질을 체험할 때
그 본질에 들어가는 문은 '지금 이 순간'이라고 하는
그래서 산만하게 과거 미래로 떠돌아다니던 우리 의식이
딱 현재에 한번 딱 초점이 현재에 딱 맞을 때
쑥 들어가면서
'별세계'가, '차원이 다른 세계'가 열리는
존재를 체험하는, 절대를 체험하는
그런 것을
지금 툴레도 계속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저도 그 체험은 똑같이 가지고 있어서
그런 점을 우리가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 참고로 하세요.
항상 현재로만 돌이키면 생각이 끊어지는 거예요.
그게 핵심이에요.
현재로만 돌이키면 생각이 끊어진다.
24:34
툴레 같은 경우는 체험은 왔지만 뭐가 뭔지 몰랐다가
< 영혼에 대한 다른 책들을 읽고
또 영적인 교사들과 숱한 밤을 함께 지낸 다음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토록 추구하던 그 깨달음(돈오)이라는 것이,
나 자신에게 이미 일어났다는 것을.
그날 밤 고통이 극도에 달하자
나 자신을 불행과 두려움의 대명사처럼 여겼던 가짜 나는,
(에고지요?)
에고는 고통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물러난 것입니다.
(악몽에서 깬 거다, 이거예요. 악몽에서 깬 것이다.)
모두가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속아 왔지만,
고통이 심해지자 거짓된 나는 물러나지 않을 수 없고,
그 순간 지금까지 쌓아 올린 거짓된 성이
일시에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눈에 보이는 내가,
나 자신이라고 믿기 이전의 본래 순수한 내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
그러니까 지금 요 라인이 무너졌다는 거예요.
'무명, 행, 식, 명색' 요 라인이 이때 무너졌다.
왜냐하면 그 압박이 너무 심했기 때문에,
에고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그런 시련이 왔기 때문에
에고가 그걸 못 견디고 무너지는 거다.
이렇게 자기는 지금 해석을 했다.
그랬더니 에고가 무너지니까 ‘무명’에서 ‘명’으로 바뀌는.
‘명’이라는 말은, 그냥 한마디로 말하면 ‘의식’이에요.
‘무명’이라는 말은 ‘무의식’.
그냥 딱, 톨레 식으로 말하면,
‘무명’은 ‘무의식’이고 따라서 ‘명’은 ‘의식’이다, 이거예요.
깨달음이란 것은, 지금 의식이 깨어나는 것이다, 이거죠.
자기의식이!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는 깨달음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왜냐하면 누구나 다 의식을 가지고 이미 쓰고 있기 때문에!
‘아, 이거구나!’ 하고 발견하는 거예요.
‘아, 이거구나!’ 하고.
26:56
의식이 뭐냐, 자, 여러분!
처음 오신 분도 계시고 하니까 바로 직지해 봅시다.
‘직지’라는 말은, ‘이거다!’라고 하는 거잖아요.
지금 여기에, 지금 바로, 이 순간,
여기 인사동 선방에서 여러분이 앉아 계시지요.
그런 지금 이 공간에 육체를 포함해서 물질들이 있죠.
물질이 없나요? 있죠, 그죠! 분명히 있죠, 그죠!
지금 요 공간에 물질이 이렇게 있잖아요.
내 몸도 물질이에요, 그죠? 이렇게 물질이 있어요.
여러분, 물질만 있나요? 지금 요 공간에?
물질만 있어요?
아니면 물질이 있다는 걸 아는 무언가가 있어요?
신령스러운 무언가가 있어요, 없어요?
있잖아요! 그거예요.
그러니까 이 의식을 알아채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이렇게 직지, 딱 이거라고 일러드리니까.
자기 몸이 있습니다, 그죠?
근데 몸만 있나요?
지금 이걸 의식이라고 하건, 정신이라고 하건,
정신 있지요? 정신없어요? 여러분! 정신 놀러 갔어요?
지금 있지요?
그걸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게.
언제나 이거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반드시 여러분, 깨달음은 반드시
그러니까 중요한 거,
28:51
따라 해 보세요. '본유금유(本有今有)'
마조는 6조 혜능의 손상자예요. 손자예요.
마조는 8조에요. 마조의 이야기예요.
이게 뭐냐면, 본래 있던 것이 지금도 있다!
자, 다시, 본유금유!
본래 있던 것이 지금도 있다!
요게 지금 깨달음의 기준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이 의식이 지금 의식 있어요, 없어요?
있죠? 물질만 있는 거 아니잖아요.
이렇게 지금 신령스럽게 깨어있는 것이 이렇게 있잖아요.
요게, 지금 있는 거예요? 과거에도 있었던 거예요?
있었잖아요! 본래 있는 거죠? 본래 있었던 거지요!
또, 나만 있어요? 다 같이 가지고 있어요?
다 같이 가지고 있죠!
요거는 '중중무진(重重無盡)'이라고, '중중(重重)'.
여러분의 이 정신,
이 의식하고 저의 의식하고, 지금,
있는 사람들마다 그만큼 의식이 있잖아요?
요것이 중중,
서로 겹쳐 있다 이거예요.
여러분 지금 형광등이 여러 개 있죠, 지금 여기에.
형광등이 여러 개 있어도 이 빛이 중중무진이다.
겹쳐도 서로 방해되지 않고,
마치 하나의 빛인 것처럼 지금 같이 있죠.
그거랑 같이 비슷하게
우리들의 의식도 하나하나가 완벽하지만,
완벽한 것이 또 이렇게 중중무진,
- 중중은 이중삼중 할 때 중(重), 겹치고 겹쳐서 무진(無盡) -
끝이 없이 많다.
왜냐?
무한은 무한히 많아요.
그게 무한의 생존 전략이에요.
그러니까 개체가 죽어도 생명은,
자, 온 생명의 생존전략은,
- 온 생명은 뭐냐면
모든 생명이 다 한 개 생명으로 가득 차 있는 것 -
근데 낱 생명이 있잖아요. 개인 개인의 생명!
그러니까
온 생명하고 낱 생명의 관계가 중중무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낱 생명이 자꾸 나고 죽으면서
온 생명은 자기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다.
이 말도 이해되세요?
그러니까 개인의 나고 죽음은
온 생명 입장에서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낱 생명이면서 온 생명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거예요.
낱 생명이면서 온 생명이다.
낱 의식이면서 온 의식이다.
나는 누구냐?
그러니까 결국에는 온 의식인 거예요.
온 의식이면서 또 낱 의식이야.
공즉시색 색즉시공 이런 식으로
개체와 전체가 완전히 호환되는 그런 관계다, 우리가.
이걸 연기라고 한다 이거예요.
부처님은 이 연기를 깨달으셨다.
이런 말들이 이렇게 소화가 되는 겁니다.
32:11
자, 그러면 방금 제가 왜 이 말을 했는가?
부처님이 그렇고 톨레가 그렇고 뭐 저도 마찬가지고,
결국은 깨닫는다는 것은
지금 깨어 있는 '이거' 깨닫는 거다 이거예요.
깨닫고 보니까 허무한 게, 처음부터 있었다.
처음부터 있는 게 지금도 있다.
그리고 여러분, 여기에
이 자기의식을 지금 우리가 새삼 알아차렸다고 해서
의식이 커집니까? 새롭습니까? 어떻게 변합니까?
새로 얻은 거예요?
본래 있는 거잖아요, 새로 얻은 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거 잃어버릴 수 있어요? 없잖아요.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잃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
이미 이렇게 갖춰져 있잖아요.
그래야만 진리예요.
이게
시간적으로도 보편이고, 공간적으로도 보편이고,
개체한테도 다 보편인 것!
그래야 진리예요.
그리고 잃어버릴 수도 없잖아요, 앞으로도.
그래야지, 아니면 지금 새로 얻었다?
그건 경계예요. 이해되세요?
새로 얻은 것은 반드시 또 사라진다 이거예요.
그러면 톨레나 이런 사람이 지금 경험했잖아요.
경험을 했을 때,
다이아몬드처럼 신선했고, 깨끗했고,
모든 것이 빛났고, 또 뭐 장엄했고,
이런 것들은 다 지나간다 이거예요.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은 다 경계 현상이다.
세월이 흐르면 다 지나간다.
34:00
그래서 정말 지금 의식화한다는 건 뭐냐?
결국 내가 체험한 것은,
지금 이 말짱한, 너무 당연한, 이 의식을 깨닫는 거다 이거예요.
그래야지 이것이 영원히 유지되는 거지,
그게 아니라,
그 어떤 경험이 났을 때 그때 어떤 특별하게 좋았던 것,
막 환희심도 넘치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거는 경계다 이거예요.
그래서 지금 가닥을 잘 잡으셔야 될 게,
그걸 잡아버리면 깨달았는데 놓쳤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그러면 안 된다.
그게 아니라,
그 정말 깨달음의 내용은 의식이 되어야지.
여러분, 의식은 크기가 있어요, 없어요?
모양이 있어요, 없어요? 남자예요, 여자예요?
분별이 의식한테는 해당되지 않아서
내가 의식이 진짜 정말 확실히 깨어날 때,
내가 의식이란 걸 알 때,
이 분별심이, 이 무명이 여기서 무너진다.
내가 의식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자기가 확인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