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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아발다라보경
(楞伽阿跋多羅寶經)
송(宋)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 한역
최윤옥 번역
능가아발다라보경 제4권-1
4. 모든 부처님께서 마음에 대해 말씀하신 품[一切佛語心品]
이때 대혜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바라건대 저를 위해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시면 저를 비롯한 나머지 보살마하살들은 여래의 자성(自性)에 대해 스스로 깨닫고 다른 사람을 깨우치는 일도 잘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묻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물어라. 내가 너희를 위해 묻는 대로 말해 주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짓습니까[作], 짓지 않습니까[不作]? 사(事)입니까, 인(因)입니까? 형상[相]입니까, 형상이 나타내는 것[所相]입니까? 깨닫는 자[覺]입니까, 깨달은 것[所覺]입니까? 이와 같은 말의 구절들은 다른 것입니까, 다르지 않은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여래ㆍ응공ㆍ등정각은 이러한 말에 대해 사(事)도 아니고 인(因)도 아니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두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일 여래가 사(事)라면, 혹 짓기도 하고 혹은 무상(無常)하기도 할 것이니, 무상이기 때문에 모든 사는 반드시 여래이어야 할 것이다. 이는 나와 모든 부처가 원치 않는 것이다. 만일 지어진 것[所作]이 아니라면,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방편이 공(空)하여 토끼의 뿔과 같고 반대의 아들[般大之子:石女之子]과 같을 것이니,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일 사(事)와 인(因)이 없다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닐 것이며, 만일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면 4구를 벗어날 것이다. 4구란 곧 세상의 언설(言說)이니, 만약 4구를 벗어난다면 4구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이 취하는 것이다. 모든 여래의 구의(句義)도 이와 같다. 지혜로운 이[慧者]는 마땅히 알라. 모든 법은 무아(無我)라고 내가 말한 것과 같다.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아성(我性)이 없으므로 곧 무아라는 것이다. 모든 법에는 자성(自性)이 있고 타성(他性)이 없으니, 마치 소나 말과 같은 경우이다. 대혜야, 마치 소는 말의 성품이 아니고, 말은 소의 성품이 아닌 것과 같다. 그러나 실제로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그 자상(自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대혜야, 모든 법은 자상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무아는 어리석은 범부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닐 뿐이니, 망상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은 공해서 생기는 것도 없고 자성도 없으니,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여래와 음(陰)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만약 음과 다르지 않다면 무상(無常)이어야 할 것이며, 다르다면 방편(方便)이 공할 것이다. 만약 두 가지라면 반드시 다름이 있어야 하니, 마치 소의 뿔이 서로 닮은 까닭에 다르지 않으며 길고 짧은 차별이 있으므로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 모든 법도 역시 이와 같다. 대혜야, 마치 소의 오른쪽 뿔이 왼쪽 뿔과 다르고 왼쪽 뿔이 오른쪽 뿔과 다른 것처럼, 이와 같이 길고 짧은 것과 여러 가지 모습이 각각 다르다.
대혜야, 여래는 음(陰)ㆍ계(界)ㆍ입(入)과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이와 같이 여래와 해탈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와 같으므로 여래를‘해탈’이라는 이름으로 설명한다. 만일 여래가 해탈과 다르다면 물질의 모습[色相]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며, 물질의 모습으로 이루어지므로 무상해야 할 것이다. 만일 다르지 않다면, 수행자(修行者)가 모습을 얻어도 분별이 없어야 할 것이나 수행자는 분별을 본다. 그러므로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지혜[智]와 이염(爾炎)은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다.
대혜야, 지혜와 이염이 다른 것도 아니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므로, 상(常)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며, 짓는 자도 아니고 지어진 것도 아니며, 유위(有爲)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며, 깨닫는 이도 아니고 깨달은 것도 아니며, 형상도 아니고 형상이 나타내는 것도 아니며, 음(陰)도 아니고 음과 다른 것도 아니며, 말하는 자도 아니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함께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함께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므로 모든 양(量)을 벗어난다.[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을 양(量)이라고 한다.] 모든 양을 벗어나면 말이 없고, 말이 없으면 생기는 것이 없고, 생기는 것이 없으면 적멸(寂滅)하고, 적멸하면 자성열반(自性涅槃)이다. 자성열반이면 사(事)도 없고 인(因)도 없으며, 사도 없고 인도 없으면 반연하는 것이 없고, 반연하는 것이 없으면 모든 거짓을 벗어나며, 모든 거짓을 벗어나게 되면 곧 여래이니, 여래가 바로 이 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이다. 대혜야, 이를 삼먁삼불타라고 하니, 불타란 모든 감관[根]과 양(量)을 벗어난 것이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감관[根]과 양(量)을 다 벗어나며
사(事)도 없고 인(因)도 없으며
깨달은 자와 깨달음을 이미 벗어났고
형상과 형상이 나타내는 것도 벗어났다.
음(陰)과 연(緣)과 등정각(等正覺)
그 같고 다름을 볼 자 없으니
보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분별할까.
짓는 것도 아니고 짓지 않는 것도 아니며
사(事)도 아니고 인(因)도 아니며
음도 아니고 음에 있는 것도 아니며
여러 다른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모든 성품이 있는 것도 아니며
저 망상(妄想)으로 보는 것들
또한 없는 것도 아닌 줄 알아야 하니
이 법은 본래 법 자체가 그런 것이다.
있는 까닭에 없는 것이 있으며
없는 까닭에 있는 것이 있으니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말고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말라.
나[我]라 하고 내가 아니라 하며
말로 헤아려 방황하다가
두 극단에 빠져서는
자신도 무너뜨리고 세상도 무너뜨린다.
모든 허물을 해탈하고
나를 바르게 관찰하여 통하면
이를 올바른 관찰[正觀]이라 하니
대도사(大導師)를 헐뜯지 않는 것이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수다라(修多羅)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받아들인다고 말씀하셨고, 또 불생불멸이 곧 여래의 다른 명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세존이시여, 성품이 없으므로 불생불멸이라고 하셨습니까, 아니면 여래의 다른 명칭입니까?”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모든 법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말한 것은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가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법이 생기지 않는다면, 법을 받아들인다는 일조차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름[名字] 중에 법이 있다면, 저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고, 훌륭하구나. 자세히 들어라.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내가 너를 위해 분별하여 설명하겠다.”
대혜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예,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여래(如來)는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며, 또한 생기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모든 법을 받아들이는 것 역시 연을 기다리지 않으므로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며, 또한 뜻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혜야, 나는‘뜻대로 태어나는 법신여래[意生法身]’라는 여래의 명호를 말하였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며[不生], 모든 외도와 성문과 연각과 7주(住) 보살은 그 경계가 아니다.
대혜야, 저‘생기지 않는 것[不生]’이란 곧 여래의 다른 이름이다. 대혜야, 이는 마치 인다라(因陀羅)와 석가(釋迦)와 불란타라(不蘭陀羅)와 같이 모든 물건들 하나하나 각각에 여러 이름이 있으나 또한 여러 이름에 따라 여러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자성(自性)이 없는 것도 아닌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대혜야, 나는 이 사가(娑呵)세계[사가는 번역하면‘참을 수 있다[能忍]’는 뜻이다.]에서 3아승기(阿僧祇) 백천 개의 명호가 있으나, 어리석은 범부는 제각기 내 이름을 말하는 걸 들으면서도 나 여래의 이름인 줄 알지 못한다.
대혜야, 혹 어떤 중생은 나를 여래(如來)로 알고, 어떤 중생은 일체지를 가진 이[一切智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부처[佛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세상을 구원하는 이[救世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스스로 깨닫는 이[自覺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인도하는 스승[導師者]이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널리 인도하는 이[廣導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모두를 인도하는 이[一切導者]라고 안다. 어떤 중생은 선인자(仙人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범자(梵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비뉴자(毘紐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자재자(自在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승자(勝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가비라자(迦毘羅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진실변자(眞實邊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달[月]이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해[日]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생자(生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무생자(無生者)라고 안다. 어떤 중생은 무멸자(無滅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공자(空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여여자(如如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제자(諦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실제자(實際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법성자(法性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열반자(涅槃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상자(常者)라고 안다. 어떤 중생은 평등자(平等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불이자(不二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모습이 없는 이[無相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해탈자(解脫者)라고 알며, 어떤 중생은 도자(道者)라고 알고, 어떤 중생은 뜻대로 태어나는 이[意生者]라고 안다.
대혜야, 이와 같은 3아승기 백천 개의 명호가 있으니,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다. 이 세계와 다른 세계에서 모두 다 나를 아는 것이, 마치 물에 비친 달이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는 것과 같다. 저 모든 어리석은 범부는 나를 알 수 없으니, 두 극단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 나를 공경하고 공양하지만 말이 뜻하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이름을 분별하지 못하며, 스스로 통할 줄을 모르고, 온갖 말과 글귀에 집착하여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말에서 ‘성품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여래 명호의 차별이 인다라(因陀羅)와 석가(釋迦)와 불란타라(不蘭陀羅)와 같은 줄 모르며, 스스로 통달해 마지막 도달해야 할 곳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는 모든 법에 있어서 말하는 데 따라 계착한다.
대혜야,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뜻은 말과 같아서 뜻과 말은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뜻은 몸체가 없기 때 문에 말 이외에는 다른 뜻이 없으므로 오직 말에 그치는 것이다.’
대혜야, 저들은 악(惡)이 지혜를 태워 말의 자성(自性)을 모르고, 말은 생기고 없어지지만 뜻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모른다. 대혜야, 말은 문자에 치우치나 뜻은 치우치지 않는다. 성품과 성품 아닌 것을 벗어나기 때문이며, 생김이 없고 또한 몸[身]이 없기 때문이다.
대혜야, 여래는 문자에 치우친 법을 말하지 않는다. 문자는 있음과 없음[有無]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문자에 치우치지 않는 경우는 제외한다.
대혜야,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는 문자에 치우친 법을 말한다’고 한다면 이는 망령된 말이다. 왜냐하면 법(法)은 문자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나를 비롯한 모든 부처와 보살들은 한 자[一字]도 말하지 않고 한 자도 대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은 문자를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익을 주는 뜻[義]과 말[言說]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말이란 중생의 망상이기 때문이다.
대혜야, 만약 모든 법을 말하지 않는다면 교법(敎法)이 무너질 것이니, 교법이 무너지면 모든 부처나 보살이나 연각이나 성문이 없을 것이며, 만약 없다면 누가 누구를 위해 말하겠는가?
그러므로 대혜야, 보살마하살은 말에 집착하지 말고,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적절한 방편을 써서 자세히 경법(經法)을 설명해야 한다. 중생들의 희망이나 번뇌는 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나를 비롯한 모든 부처는 저 갖가지로 다르게 이해하는 중생들을 위해, 모든 법을 설명해서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을 벗어나라고 할 뿐이요, 자각성지처(自覺聖智處)를 얻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대혜야, 모든 법에는 소유(所有)가 없으니,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인 줄 깨달아 두 가지 망상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뜻에 의지해야지 문자에 의지하진 말아야 한다. 만약 선남자ㆍ선여인이 문자에 의지하다면 스스로 제일의(第一義)를 무너뜨리고, 또한 다른 사람을 깨우치게 할 수도 없으며, 악견(惡見)에 치우쳐 상속(相續)하면서도 대중을 위해 연설하고, 모든 법과 모든 지위와 모든 모습을 명료하게 잘 알지 못하며, 또한 글의 장(章)과 구(句)도 알지 못한다. 만약 모든 법과 모든 지위를 잘 알고, 글의 장과 구에 통달하고, 성품과 뜻[意]을 충분히 알면, 이 사람은 올바른 무상(無相)의 즐거움으로 스스로 즐거워할 수 있으며, 평등한 대승(大乘)을 중생에게 세워 줄 것이다.
대혜야, 대승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든 부처와 보살과 연각과 성문을 받아들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며, 모든 중생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정법(正法)을 받아들이고, 정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처의 종자[佛種]가 끊어지지 않게 하며, 부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사람은 수승한 깨달음을 얻는 것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 수승한 깨달음을 얻을 줄 아는 보살마하살은 항상 화생(化生)하고, 대승을 건립하며 열 가지 자재력(自在力)으로 여러 가지 몸[色像]을 나타내고, 중생의 종류[形類]나 희망하거나 번뇌하는 모든 모습에 통달하여 여실하게 설법할 것이다. 여실한 것은 다르지 않은 것이며, 여실한 것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모습이니, 모든 허위(虛僞)가 그친다. 이를 여실하다고 한다.
대혜야, 선남자ㆍ선여인은 말하는 대로 받아들여 계착해선 안 된다. 진실이란 명자를 벗어났기 때문이다. 대혜야, 마치 어리석은 사람에게 손가락으로 물건을 가리켜 보이면, 어리석은 사람은 손가락만 보고 진실한 뜻은 알지 못한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은 말이라는 손가락에 따라 받아들이고 계착하여 끝내 이를 버리지 못한다. 따라서 말이라는 손가락을 떠난 제일의 진실한 뜻을 끝내 얻을 수 없다.
대혜야, 이는 마치 어린 아기에게는 익힌 음식을 먹여야 되고 날 것을 먹여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만약 날 것을 먹이면 곧 탈이 나게 된다. 이는 차례대로 방편을 써 성숙시켜야 한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혜야, 이와 같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은 방편을 써서 수행하지 않으면 불선(不善)이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방편을 잘 닦아야 하니, 손가락 끝을 보는 것처럼 말을 좇진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대혜야, 진실한 뜻을 얻으려면 방편을 잘 닦아야 한다. 진실한 뜻은 미묘하고 적정(寂靜)한 것이며, 이는 열반의 인(因)이다. 말은 망상과 합하고 망상은 생사를 모은다. 대혜야, 진실한 뜻은 다문(多聞)으로부터 얻는다.
대혜야, 다문이란 뜻을 잘 아는 것을 말하지, 말을 잘 하는 것이 아니다. 뜻을 잘 알면 어떤 외도의 경론(經論)에도 떨어지지 않으니, 자신도 떨어지지 않고 남도 떨어지지 않게 한다. 이를 대덕다문(大德多聞)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뜻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들은 것이 많은 사람을 가까이해야 하니, 이는 뜻을 잘 아는 사람을 말한다. 반드시 많이 들어서 뜻을 잘 아는 사람을 가까이해야 하며, 이와 어긋나 말에 계착하는 사람은 멀리해야 한다.”
이때 대혜보살이 다시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을 받아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생김도 없고 없어짐도 없음을 드러내 보여 주셨으나, 특별할 것도 기이할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외도가 말하는 인(因) 역시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며, 세존께서도 허공은 수(數)ㆍ연(緣)ㆍ멸(滅)이 아니고 열반계(涅槃界)는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외도도‘인(因)으로 모든 세상이 생긴다’고 하고, 세존께서도 ‘무명(無明)과 애착[愛]과 업(業)과 망상(妄想)이 연(緣)이 되어 모든 세상이 생겼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인이라 하고 우리는 연이라 하여 이름의 차이는 있으나, 외물(外物)의 인연인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는 외도의 논과 차별이 없으십니다.
외도도‘미진(微塵)ㆍ승묘(勝妙)ㆍ자재천(自在天)ㆍ중생주(衆生主) 등, 이와 같은 아홉 가지 물질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하고, 세존께서도 ‘모든 성품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외도도 ‘4대(大)는 무너지지 않으며, 자성(自性)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4대는 항상 존재한다. 이 4대가 모든 중생 세계에 두루 흐르는데 자성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고, 세존께서 하신 말씀도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특별하고 기이할 것이 없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해 모든 외도보다 더 훌륭하고 기이한 이유를 차별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만약 차이가 없다면, 모든 외도도 역시 부처일 것이니,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세존께서‘한 세계에 여러 부처가 출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으나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라면, 한 세계에 많은 부처가 있어야만 할 것이니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대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한 것은 외도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다. 왜냐하면 저 모든 외도들은 성자성(性自性)이 있다 여기고서 생기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 모습을 얻으나, 나는 이와 같은 있다거나 없다는 견해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 말은 있다거나 없다[有無]는 견해를 벗어나고, 생김과 없어짐[生滅]을 벗어나며, 성품도 아니고[非性]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非無性] 것이다. 마치 온갖 환(幻)과 꿈이 나타나는 것과 같으므로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성품이 없다는 것인가? 물질[色]에는 받아들일 만한 자성상(自性相)이 없는 것을 말하니,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기도 하며, 받아들이기도 하고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품은 성품이 없으며, 또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자심(自心)의 현량(現量)인 줄 깨닫기만 하면 망상이 일어나지 않아 안온하고 쾌락하며, 세상의 여러 가지 일이 영원히 그칠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이 망상으로 일을 만드는 것이지 모든 현성(賢聖)은 그렇지 않다. 진실하지 않은 망상은 건달바(乾闥婆)의 성(城)이나 요술로 나타난 사람과 같다.
대혜야, 건달바성과 요술로 만든 사람인 갖가지 중생들이 사고팔고 들고 나는 것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망상으로 정말로 들고 난다고 생각하나 실제로는 나가는 사람도 없고 들어오는 사람도 없으니, 그것은 망상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대혜야, 어리석은 범부들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다’는 견해를 일으키지만 그들 역시 유위(有爲)도 무위(無爲)도 없다. 마치 요술로 만든 사람이 생긴 것처럼 실제로는 생김이나 없어짐이 없고 성품도 성품이 없음도 없으니, 무소유(無所有)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도 이와 같아서 생김과 없어짐을 벗어난다. 어리석은 범부는 진실이 아닌 것에 떨어져 생기고 없어진다는 망상을 일으키지만 모든 성현은 그렇지 않다. 여실하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성자성(性自性)과 같은 경우 망상과 또한 다르지 않다. 만약 다르다고 하면 모든 성자성에 계착하여 적정(寂靜)함을 보지 못하고, 적정함을 보지 못하면 끝내 망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대혜야, 모습이 없다는 견해[無相見]가 모습이 아니라는 견해[非相見]보다 훌륭하다. 모습이란 생(生)을 받는 인(因)인 까닭에 훌륭하지 않은 것이다. 대혜야, 모습이 없으면[無相] 망상이 생기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으며 없어지지도 않으므로, 나는 열반이라고 말한다. 대혜야, 열반이란 진실한 이치에 대한 견해와 같으니, 이전의 망상과 심법(心法)ㆍ심수법(心數法)을 벗어나 여래의 자각성지(自覺聖智)를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열반이라고 말한다.”
이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저 생긴다는 논(論)을 없애려고
생기지 않는다는 뜻을 건립(建立)하였으니
나는 이러한 법을 말하나
어리석은 범부는 알지 못한다.
모든 법은 생기지 않아
성품도 없고 소유(所有)도 없으니
건달바성ㆍ환ㆍ꿈과 같아
성품이 있다고들 하지만 인(因)이 없고
생김이 없고 자성도 없으니
무슨 인으로 공(空)을 설할까.
화합을 벗어나면
깨달아 아는 성품도 나타나지 않으니
따라서 공하여 생기지 않는 것을
나는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낱낱이 화합해
성품이 나타나지만 있는 것 아니니
분석하면 화합도 없어
외도의 견해와 같은 것이 아니다.
환이나 꿈이나 눈병에 아른거리는 머리카락
아지랑이나 건달바성처럼
이 세상 갖가지 일
인(因) 없이 모습이 나타난다.
인이 있다는 논(論)을 꺾으려고
생김이 없다는 논리 편 것인데
생김이 없다고 선언하는 자들
법의 흐름 영원히 끊어지지 않는구나.
인이 없다고 맹렬히 주장하며
모든 외도를 두렵게 하니
어떻게, 무엇을 인하여
저것은 어떤 까닭으로 생기며
어느 곳에서 화합하는가 하며
인이 없다고 주장한다.
유위법(有爲法)을 관찰하면
인이 없는 것도 있는 것도 아니니
저 생멸을 주장하던 사람들
그들의 소견(所見)이 이로써 없어진다.
왜 생김이 없다고 하고
성품이 없다고 하는가?
모든 연(緣)을 돌아보면
무생(無生)이라 이름붙일 법이 있는가?
이름에는 뜻이 없을 수 없으나
오직 분별하는 말일 뿐이니
성품이 없으므로 생김이 없다는 것 아니고
또한 모든 연을 돌아본다는 것도 아니며
성품이 있어 이름을 붙인 것도 아니고
이름 역시 뜻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일체 모든 외도와
성문과 연각
7주(住) 보살의 경계가 아니니
이를 무생(無生)의 모습이라 한다.
모든 인연을 멀리 벗어나고
또한 모든 사(事)도 벗어나며
오직 미세한 마음[微心]만 머물 뿐
생각하는 자와 생각하는 대상 모두 벗어나
그 몸이 이에 따라 전변(轉變)하는 것
나는 이것을 무생이라 한다.
바깥에 성품도 성품 없음도 없고
또한 마음이 받아들이는 것도 없어
모든 견해를 끊어 없애면
나는 이것을 무생이라 한다.
이와 같이 자성은 없는 것이니
공(空) 등을 잘 분별해야 한다.
공하므로 공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생김이 없으므로 공이라고 말한다.
여러 인연이 화합하여
생김이 있고 없어짐이 있으니
모든 인연을 벗어나면
따로 생김과 없어짐도 없다.
인연을 버리고 벗어나면
다시 다른 성품이 없으니
같음과 다름을 말하면
이는 외도의 망상이다.
있음[有]과 없음[無]의 성품 생기지 않으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수(數)가 전변하는 것을 제외하면
이는 모두 얻을 수 없다.
단지 모든 세속법이 있어
전전하며 사슬이 될 뿐이니
저 인연의 사슬을 벗어나면
생긴다는 뜻을 얻을 수 없다.
생김은 성품이 없어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외도의 허물을 벗어나지만
연(緣)의 사슬만 말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확실히 알지 못한다.
연의 사슬을 벗어나
따로 성품의 생김이 있다고 하면
이는 곧 무인론(無因論)이니
사슬[鉤鎖]의 뜻을 깨뜨리는 것이다.
등불이 여러 형상을 비추듯
사슬이 나타남도 그러하거늘
이는 곧 사슬을 벗어나
따로 다시 모든 성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성품도 없고 생김도 없어
허공(虛空)의 자성과 같으니
사슬을 벗어나면
지혜[慧]가 분별할 것도 없도다.
다시 다른 무생(無生)이 있으니
현성(賢聖)이 얻는 법이다.
저 생김이란 무생이니[‘저 생김’이란 4상(相)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곧 무생인(無生忍)이다.
만약 모든 세상 사람이
사슬을 관찰하여
모두 사슬을 벗어난다면
이로부터 삼매(三昧)를 얻으리라.
어리석음과 애착과 모든 업 등
이는 곧 안의 사슬이며
찬(攢)ㆍ수(燧)ㆍ진흙덩이ㆍ바퀴
종자 등을 바깥의 사슬이라 한다.
만약 다른 성품이 있어
인연으로 생긴다면
저 사슬의 뜻이 아닐 것이니
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일 생기는 것이 자성이 없다면
그것이 누구에게 사슬이 될까?
전전하며 서로 생기기 때문이니
인연의 이치인 줄 알라.
생긴 것에 다른 성품이 있어
인연으로 생긴다면
저것은 사슬의 뜻이 아니니
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딱딱함ㆍ축축함ㆍ따뜻함ㆍ움직임 이런 법은
어리석은 사람이 망상을 내는 것
수(數)를 떠나 다른 법이 없으면
이를 성품이 없다고 말한다.
의사가 많은 병을 치료함에
여러 가지 논(論)이 없으나
병이 각기 다르기에
온갖 치료법을 쓰는 것과 같다.
나도 저 중생을 위해
모든 번뇌를 없애려고
그 근기의 우열을 알아
저들에게 건너는 문[度門]을 말한다.
번뇌의 뿌리가 다를 뿐
갖가지 법이 있는 것 아니기에
오직 1승법(乘法)만 말하니
이것을 곧 대승이라 한다.
[출처] 능가아발다라보경-제4권-1|작성자 byunsd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