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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 소백주 (81)향기로운 여인
“필경 서방님께서는 이제 고향에 가시면 늙은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자식들 때문에 다시는 이곳에 오지 못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살아온 날들이 지난 봄 화사하게 피어났다 시들어 버린 꽃들과 같이 추억이 되어버릴 것인데 그런 생각을 하오니 참으로 서러움이 밀려옵니다.”
소백주는 울컥 울먹이며 김선비의 빈 술잔에 술을 부어 채웠다.
“인생의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을 내 어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데 사람으로서 도리가 있다고 한다면 그 도리를 우선 지켜야 한다는 것을 내 잠시 망각했다는 것을 느꼈던 것뿐입니다. 내 비록 사람의 도리를 찾아 먼 길 떠난다 한다지만 우리 사랑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서방님, 그 말씀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그대를 내 품에 안고 살아온 지난 날 난 최초로 사람으로서 권력이나 지위나 돈에도 절대 걸리지 않는 인간의 참된 사랑을 알았던 것이지요. 자! 이별일랑 잊고 오늘밤 한잔 술잔을 기울입시다.”
“그래요. 서방님.”
김선비와 소백주는 이별에 대한 우울한 기분을 애써 털어버리려고 술잔을 부딪치며 술을 들었다.
김선비는 술잔을 비우고 나서 가슴에서 샘솟듯 솟아나는 시정(詩情)에 겨워 즉흥으로 시를 읊조렸다.
“지난 밤/ 쓸쓸한 귀향길/ 봄길 따라가다가/ 어여쁜 꽃향기에 취해/ 그 꽃 안고 잠 들었네./ 달게 한잠 자고 일어났더니/ 그새 천지에 세 번이나 /매미가 울었다고 하네./ 나그네의 발길 돌려/ 길 떠나려하니 /꿈속에서 만난 임 얼굴 /눈앞을 가리네.”
고요히 가슴에서 끓는 정한(情恨)을 읊고 난 김선비는 채워진 술을 단숨에 삼키고는 눈을 감고 한 송이 수선화처럼 정한 자태로 시를 듣고 있는 소백주를 바라보았다. 언제보아도 항상 향기로운 여인 소백주, 웬만한 사나이보다도 더 큰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 그 봄 동산 같은 푸른 생명 자라 오르는 따뜻한 마음의 단정한 뜰을 김선비는 호젓이 걷고 있었다.
기생 소백주 (82)기약(期約)
처음 만났던 그날 밤 한 동이 술을 마시고 한편의 시를 써서 그녀에게 보이고 그 시를 보고 조건 없이 자신을 선택해 주었던 소백주를 생각하고는 김선비는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이란 것도 그저 육체가 만나 타오르는 불꽃같은 것만은 아니었다. 그 사랑 안에는 세상의 잡스런 허위와 흥정을 대번에 휩쓸어버리는 가슴 짜릿한 통쾌함이 깃들어 있었고 또 은밀하고 달콤한 꿀맛과 같은 희열이 있었다.
“서방님의 시를 들으니 처음 만났던 그 밤이 생각나네요. 한 동이 술을 마시고 거침없이 써 내려가던 그 꾸밈없는 시가 참 마음에 들었지요.”
“나 같은 사람의 시를 알아봐 주고 또 거지나 진배없는 나를 받아들여 이렇게 화사한 꿈결에 살게 하였으니 비록 내 훗날 저승에 간다 하여도 그대 소백주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김선비와 소백주는 다시 술잔을 비웠다. 이제는 김선비가 술병을 들고 소백주의 술잔을 채워 주었다. 술잔을 든 소백주가 그윽한 눈빛으로 김선비를 바라보았다.
“멀리서 기약(期約) 없는 임이 오신다기에 오가는 사내들 혹여 임인가 그리워 대문을 열어놓고 임 기다리기 삼년 꽃소식 몰고 온 임 버선발로 맞았네 내 그 임을 모시고 꽃 속에서 삼년 어젯밤 무서리 내려 꽃잎 시드니 임은 그새 멀리 떠나려하네”
가슴속 끓는 이별의 슬픔을 시로 읊는 소백주의 눈가에 그새 뜨건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스미어 올랐다. 희미한 등잔불에 반짝이는 이슬을 대롱대롱 맺혔다가 주르르 소백주의 뺨을 타고 구르는 뜨건 것을 본 김선비는 순간 가슴이 미어터지는 듯 했다.
김선비는 일부러 외면하며 술잔을 들었다. 이곳에 그냥 눌러앉아 지내며 꽃 같은 한 세월 지내버리면 그만이겠으나 그것은 아니 될 일이었다. 잠시 어느 풍경 좋은 곳에 취해 넋 잃고 앉아 있다가 갈 길을 잊고 있었으니 가는 길이 비록 고단한 길일지라도 이제는 또 그 길을 운명처럼 떠나가야만 했다.
“내 그대를 버리고 가는 게 아닙니다. 그대 내 마음에 꽃인 양 안고 갈 것이니 우리 좋은 시절에 다시 꼭 만납시다.”
김선비는 소백주 쪽으로 다가가 어깨를 와락 감싸 안았다. 소백주가 가늘게 흐느끼며 김선비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왔다.
기생 소백주 (83)순정한 사랑
서로 이름자도 모르고 만나 나누는 하룻밤 풋사랑 인연도 잊지 못할 것이라면 잊지 못할 것인데 삼년이나 한 솥밥을 먹으며 한 이불 덮고 맨살을 섞어 부비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서방님!....”
소백주는 김선비의 품에 안겨 다가올 이별에 북받쳐 오르는 슬픔을 토했다. 사람이 가더라도 아주 죽어 가는 막다른 길이 아니라면 서로 다시 만나게 될 것이었지만 소백주는 이번에 아주 김선비를 보내버릴 작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멀리 김선비의 고향 상주 땅에 어엿한 아내가 있고 또 자식들이 있으니 이렇게 저만 좋다하고 사내를 막무가내로 붙잡아 두는 것은 또 아니 될 일이었다.
언제고 김선비가 떠날 것을 알고 있었던 소백주는 이제 그날이 다가왔음을 마음속으로 확인하며 그것을 준비해온 마음의 슬픔을 스스로 달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별 앞에서 마냥 슬퍼만 할 것이 아니었다. 멀리 길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도 달래주어야 했다. 소백주는 묻었던 얼굴을 들고 환히 웃으며 말했다.
“서방님! 그동안 저와의 인연이 아름다웠다고 한다면 또 서방님이 가시는 길 앞에 아름다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기분 풀고, 자! 한잔 하셔야지요.”
밝게 웃는 소백주의 얼굴에 퍼진 미소를 보고 김선비도 무거워진 마음이 풀리는 듯 환히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인연생(因緣生) 인연멸(因緣滅)! 만나고 헤어지는 것이 항상 있는 세상의 일이거늘, 어찌 세상의 일 바깥에서 살자고 한 사람들이 궂은 눈물을 보여서야 되겠습니까! 내 그대와 살면서 늘 스쳐지나가는 저 바람소리와 뒤울안의 개울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의 일 바깥에서 사는 즐거움을 비로소 깨달아 알았습니다. 조선 최고의 여인 소백주여! 그대는 이미 바람과 개울의 만남과 이별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저 바람이나 개울물처럼 정처 없이 흘러가려 하니 그저 놓아두고 보시기 바랍니다.”
“서방님, 가는 바람과 오는 개울이 만나 이곳에서 잠시 빚어지는 저 소리를 우리 함께 들으며 살았지 않았나요. 저 바람은 개울의 몸의 흐름을 알고 이 개울은 바람의 가는 사연일랑 묻지 않음을 알지요. 이 가을 싸늘한 바람 부는 사연 또한 묻지 않고 도란거리나니 우리도 이 밤 저 바람소리 물소리와 함께 빈 마음으로 도란거려요. 마음조차도 텅 비어야 소리가 난다고 하잖아요. 서방님, 먼 바다로 가서 다시 못 오더라도 먼 허공에 흩어져서 다시 못 오더라도 그 깊은 가슴속엔 이 사연이 그대로 살아 숨 쉴 거니까요.”
김선비와 소백주는 서로의 깊은 눈을 응시하며 술을 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술잔을 내동이치고 서로를 와락 끌어안았다. 둘은 하나가 되어 깊은 입맞춤을 했다. 뜨거운 혀와 혀가 만나 서로를 깊이 탐닉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음속에 있는 순정한 사랑의 또 다른 형상이었다. 믿음과 사랑 그리고 헤어짐 앞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축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84)이별의 축제
입김을 훅! 불어 불을 꺼버린 김선비는 소백주를 끌어안고 따뜻한 비단 이불안으로 파고들었다.
“어흑! 서서 서방님!... 사랑해요.”
김선비는 소백주의 치마를 훌러덩 벗겨내며 재빨리 그녀의 알몸을 덮치고 들었다.
“내 그대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오!”
“아! 어윽!... 서 서방님!”
서로의 이별을 위로하는 축제는 그렇게 날이 지새도록 그칠 줄을 몰랐다. 아낌없이 서로를 위하여 서로를 불태우는 사랑의 행위는 서로에게 남아있을 아쉬움을 털어내는 행위인지도 몰랐다.
아낌없이 타올라버린 나무는 재도 남기지 않는 법이었다. 미련이나 아쉬움 따위를 남기지 않았기에 되돌아볼 걸림 따위는 없었다. 처음이 가슴 설레고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면 그 끝은 반대로 처음의 수천 곱절이나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것이 세상사의 이치였다.
‘사람들아! 지금 좋다고 자만하지마라! 그 끝은 참으로 참혹하리라!’ 인생무상(人生無常)! 그것을 김선비나 소백주는 알고 있었기에 하찮은 것들을 애초에 서로에게 따져 묻지 않았고 또 부러 가는 바람을 붙잡으려 하지도 않는 것이었다. 다만 서로에게 아낌없이 자신을 던지는 행위로써 먼 훗날을 다시 기약하는 것이었으리라!
뜨거운 이별의 축제가 끝난 다음날 아침 소백주가 걸게 차려준 조반을 달게 먹은 김선비는 말을 타고 드디어 고향집을 향해 길을 떠났다. 실로 6년여만의 일이었다. 벼슬을 사러 가서 3년, 소백주와의 3년 도합 6년의 세월 끝에 늙은 어머니와 처자식이 있는 고향으로의 귀향이었다.
그러나 3년 전의 귀향은 그야말로 실패한 자의 처참한 귀향이었다고 한다면 지금의 귀향은 그래도 조금 나은 편이었다. 벼슬 복은 없었어도 여자 복은 있었던지 그 소백주라는 절세미인의 덕으로 노자돈이나마 두둑이 등에 짊어지고 말 등에라도 기대어 가는 귀향길이었다.
“서방님! 부디 잘 가시어 여기 일랑은 절대로 돌아보지 마시고 건강하게 잘 사세요.”
대문 밖까지 따라 나오며 작별의 말을 하며 붙잡았던 소백주의 새하얀 손을 놓으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던 순간도 말이 달려가는 그 속력만큼이나 지금 재빠르게 과거가 되고 있었다. 돌아보면 아름답고 화려했던 지난날도 다가올 앞날 앞에서는 한낱 가을날 떨어지는 쓸쓸한 낙엽과 같은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85)고향산천(故鄕山川)
‘봄이 가면 여름, 여름이 가면 가을, 그리고 사나운 겨울이 오는 것이 세상의 길이거늘... 아! 어찌 내 좋다고 봄에만 살 수 있으랴!’ 사랑하는 소백주를 두고 가는 김선비의 마음속에 다시금 살아나는 어여쁜 소백주에 대한 마음을 애써 지워버리면서 앞을 향해 내달렸다.
지금 고향에 가면 다 굶어 죽게 생겼다던 늙은 어머니며 처자식은 잘 지내고 있을까? 그렇게도 가족들이 위급한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을 그리 깡그리 잊어버리고 오직 아름다운 여인네의 살 향기에 빠져 매일 고기에 흰쌀밥을 먹으며 비단옷을 입고 살았으니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그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원망을 해야 한다면 그것은 자신일 것이었다.
‘어허! 내 어찌 세상에 나와서 과거에 급제해 벼슬도 못하고 또 늙은 어머니마저도 보살피지 못하고 이처럼 슬픈 고향 길을 가게 되었단 말인가!’ 김선비는 달리는 말 등에 앉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생각에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김선비는 머릿속에 무성하게 자라나는 생각의 싹을 싹둑 잘라버리고는 멀리 눈길을 주었다. 가을걷이가 끝나가는 들판이 그새 겨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낙엽이 지고 앙상하게 겨울 맞을 준비를 하는 나무들 사이로 낯을 차갑게 쏘아대는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바람을 타고 차가운 하얀 눈발이 흩날릴 것이었다.
‘이 추운 바람 불어오는 겨울에 우리 식구들은 잘 있을까? 참으로 무능한 가장이로고!...’ 멀리 다른 곳으로 생각을 돌려 먹어도 그새 또 그 자리로 생각이 돌아오는 것이었다. 부지런히 말을 몰아 길을 재촉하면서 길목에선 주막에서 끼니 때 요기도 하고 말 먹이도 먹이고 또 밤이면 주막집에 들어 한 사발 술을 들이켜며 여독을 달래며 드디어 고향 마을로 들어서는 산 어귀에 김선비는 이르렀다.
이 몸과 뼈와 정신을 길러준 고향산천(故鄕山川)! 산과 산이 빙 둘러쳐진 산 고개를 넘어가면 그 아래 멀리 평야가 열리고 지금쯤 하늘 끝에 까치밥으로 감 홍시가 붉게 달려있는 고을이 있었다. 집 뒤로 높이 솟아오른 산 계곡에서 사시사철 맑은 물이 굽이쳐 흘러와 마을 앞 멀리 평야를 향해 달려가고 추수가 끝나고 아이들은 방패연, 가오리연을 만들어와 하늘 높이 날리는 것이었다.
고향 떠나기 6년 전, 김선비의 줄줄이 낳은 어린 아들들도 천자문이며 사자소학에 사서삼경 등을 배우러 서당에 다녔고 또 겨울날이면 연을 만들어 형제간에 앞 다투어 날리기도 했던 것이다.
‘어흐! 그놈들은 다 잘 있단 말인가? 어흐! 그놈의 웬수 같은 벼슬자리에 눈만 아니 멀었어도 그놈들 잘 기르며 늙은 어머니 봉양이라도 잘했을 터인데… 이런 낭패가… 어흐 참!’ 마을 어귀를 들어서며 김선비는 늙은 어머니와 처자식이 건강하게 잘 있기만을 바라며 또 이런 상념에 젖어드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86)사라진 집
김선비는 마을길을 내려가면서 멀리 개울 건너 있을 자신의 집을 눈여겨보는 것이었다. 봄이면 분홍빛 살구꽃 피고, 여름이면 감나무 그늘 시원한 아래서 글을 읽던 집, 가을이면 들에서 집안일 하는 일꾼들이 벼를 추수해와 볏가리를 높게 쌓아놓고 벼를 훑어냈다. 그 전답을 벼슬 사러 팔지 않고 잘 보존했더라면 배불리 먹고 살았을 텐데 모조리 팔아 치워 버렸으니 그 풍요로운 가을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런 가을이 없어졌으니 아무래도 하얀 눈 펑펑 내리는 겨울날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나누던 식구들의 다정한 옛이야기도 사라져버렸을 것이고, 또 어린 아들놈들의 또랑또랑한 글 읽는 소리도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가지고 있던 모든 귀중한 것들을 다 잃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의 깊은 속을 깨닫게 된다고 하더니 문득 김선비 자신이 그런 꼴인 듯싶었다.
헌신적이고 자애로운 어머니를 가졌었고, 성실하고 부지런한 아내를 가졌었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들딸들을 가졌었고, 또 식구들이 배불리 먹을 논과 밭을 가졌었고, 그 일을 해줄 일꾼들을 가졌는데 그 가진 것의 소중함을 모르고 이 썩어문드러진 야비하고 험난한 세상에 벼슬을 사서 가지려다가 그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으니 참으로 자신이 어리석은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을 깨우쳐 알았다고 하나 무슨 의미가 있으랴! 제발 식구들이 건강하게만 살아있다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헛생각일랑 내버리고 배불리 먹고 살 일들을 찾아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김선비는 자신의 집이 있는 곳에 눈을 박고 그곳을 향해 바삐 말을 몰았다.
조그마한 초가집들이 있는 마을 어귀를 돌아 이윽고 김선비는 자신의 집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으로 향해 갔다. 이 골목만 돌아서면 거기 삼백년을 버티고 선 낯익은 김씨 종가 낡은 대문과 허름한 고옥(古屋)이 보일 것이었다. 그런데 기대하며 골목을 돌아서는 김선비의 눈앞에 있어야할 자신의 집은 그곳에 없었다.
“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그 자리에는 있어야할 자기 집은 없고 보기에도 웅장한 커다란 대궐 같은 기와집이 새로 지어져 있었다. 김선비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놀란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 집을 다시금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 집이 아니었다. 이게 바로 가장으로써 책임을 방기하고 혼자만의 쾌락과 호사를 누리기 위하여 헛꿈을 쫓아 살아온 대가란 말인가!
“허억! 이럴 수가! 우리 집은 도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필시 우리 식구들이 큰일을 당했단 말인가!”
김선비는 노란 현기증이 대번 눈앞에 아른거리고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려 그 자리에 짚단처럼 ‘풀썩!’ 고꾸라져 넘어질 뻔 했다. 김선비는 심장이 덜컥 멎는 듯 망연자실하여 벌린 입을 닫지 못하고 넋 나간 듯 멍하니 혼자소리를 하며 그곳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기생 소백주 (87)아내
하얀 말 등 위에 앉아 넋 나간 듯 망연히 자신의 집 있던 곳을 바라보던 김선비 앞에 머리칼이 눈 같이 허연 한 노인이 골목길을 지팡이를 짚고 내려오더니 반갑게 말했다.
“어허! 이게 뉘신가요! 분명 이 집에서 글을 읽던 김선비가 아니시던가요?”
한손에 지팡이를 짚고 서서 허연 수염을 날리며 김선비를 올려다보며 인사말을 건네는 이는 뒷집에 살던 최노인이었다.
“예! 어르신, 그동안 잘 계셨는지요?”
“아이구 맞네! 김선비가 맞는구려. 대체 이게 몇 년 만에 집에 오시는 것이오.”
최노인이 까마득한 옛날 김선비가 집 떠나는 것을 생각했던지 반가운 소리를 했다. 김선비는 말 등에서 훌떡 뛰어내려 최노인 앞에 서며 말했다.
“그런데 어르신! 도대체 우리 집이며 식구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가버렸습니까?”
김선비는 살던 옛 집이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그곳에 대궐 같은 커다란 집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보고는 떨리는 가슴으로 우선 급한 것부터 묻는 것이었다.
“아! 식구들이 다 어디로 가다니요. 지금 저 집에서 다들 잘살고 있지요.”
“예!... 그그 그게 정말인가요?”
그 말을 들은 김선비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길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최노인의 말에 고개를 자꾸 갸우뚱거리며 그 커다란 집을 다시금 쳐다보았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온 식구가 다 굶어 죽게 되었다고 하더니 어디서 많은 돈이 생겨 저토록 우람한 집을 새로 지었단 말인가? 하늘에서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도깨비 방망이라도 뚝 떨어졌단 말인가?
“어서 들어가 보시지요. 식구들이 얼마나 반가워 할 것 인가요!”
최노인이 멍하니 놀란 눈빛으로 그 집을 바라보며 서있는 김선비에게 말했다.
“어허! 이이 귀신이 곡할 노릇이로고!...”
김선비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말고삐를 잡고 우뚝 선 솟을 대문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대문 안에서 가을바람에 흩어지는 낙엽을 바라보고 서있던 김선비 아내의 귓전에 낯익은 서방님의 목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내가 잘못 들었겠지?’ 하고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니 정말 서방님의 목소리였다.
김선비 아내는 부리나케 달려 나가 대문 밖을 기웃거리게 되었고 눈 안에 하얀 말고삐를 부여잡고 선 남편 김선비가 뒷집 최노인과 인사말을 나누고 있는 것이 들어왔다. 김선비 아내는 반가움에 대문 앞을 뛰쳐나가며 지체 높은 양반집 부인네 체면도 버리고 크게 소리쳤다.
“서방님! 너무 여러 해가 되어서 자기 집도 잊어 버리셨나요? 어서 들어오시지 게서 무엇하고 계시나요?”
소리치며 대문을 나오는 여인을 보니 김선비의 아내가 분명했다.
기생 소백주 (88)가족상봉
아내가 저 집안에서 나오는 걸 보니 저 대궐같이 큰 집이 자기 집인 것만은 분명한 듯싶었다. 김선비는 황급히 말고삐를 잡아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김선비는 아내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부인! 그런데 그 옛날 우리 집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큰집은 도대체 어찌된 것인가요?”
“그야 당신이 돈을 많이 보내주면서 새로 큰 집을 지으라고 하여 이렇게 큰 집을 지었지 않았나요. 그 덕분으로 지금 어머니랑 식구들이 모두 다 잘 먹고 잘살고 있지요.”
아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무어라고! 지금 자신이 돈을 보내주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것도 이렇게 큰 집을 새로 지을 만큼이나!…’ 김선비는 어안이 벙벙했다. 조선 최고의 미인 소백주를 만나 굶주려 죽는다는 늙은 어머니도 처자식도 다 내팽개쳐 버리고 죽건 말건 3년 동안이나 꿈결 같은 나날을 보내고 왔건만 대체 이 무슨 말인가?
김선비는 자꾸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마구간에 매어두고는 어머니가 앉아 있는 큰방으로 들어가 6년 만에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백발이 허연 늙은 어머니는 그래도 생활이 넉넉했던 탓인지 얼굴이 밝아 보이고 매우 건강했다.
“불효자, 이제 돌아와 어머니께 문안 여쭈옵니다. 어머니 그간 강녕하셨는지요?”
고개를 깊이 수그려 절을 하는 김선비는 참으로 그 순간이 부끄럽고 민망했다.
“어서 오너라! 아범아! 객지에 나가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 나는 네 덕에 큰 집에서 살며 잘 먹고 잘 지냈느니라. 너는 혹여 끼니라도 굶지 않았느냐?”
“어머니, 소자 가슴에 품은 뜻도 세상에 펴지 못하고 이렇게… 어머니, 볼 낯이 없습니다.”
김선비는 진심으로 어머니에게 사죄를 드렸다. 어머니에게 문안 인사를 드리고 나온 김선비는 안방에 들어 차례로 아들딸들의 절을 받았다. 6년 전 병아리 같았던 녀석들이 훌쩍 자라 그새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간 아버님! 객지에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검은 턱수염이 쫑긋쫑긋 돋아난 큰아들이 말했다.
“고생은 무슨… 그래, 그간 못난 애비를 대신하여 할머니와 어머니 모시고 고생이 많았구나.”
김선비는 아랫목에 앉아 아이들의 절을 받고는 그들을 물리쳤다. 그리고는 도대체 이 새로 지은 큰집에 대하여 어찌된 영문인지 곰곰 생각해 보는 것이었다.
기생 소백주 (89)돈의 정체
‘이토록 이 집에 많은 돈을 보내 새로 큰 집을 짓게 하고 그동안 별 고통 없이 잘 먹고 잘살게 해준 이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김선비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은 아마도 벼슬을 사러가서 돈 삼천 냥을 바쳤으나 벼슬을 내려주지는 못했으니 그간 가져간 돈이나마 도로 돌려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그렇다면 그는 필시 이 나라 조종의 우의정 이정승일 것이었다.
그 욕심 많은 간악한 위인이 그 삼천 냥을 그냥 날로 꿀꺽 삼키지는 못하고 이처럼 뒤늦게라도 사람을 시켜 돌려주었으니 인간의 탈을 쓴 사람으로서 겨우 병아리 눈곱만큼이라도 양심은 있었구나 싶었다.
김선비가 그 집을 돌아 나오던 3년 전 그해 봄, 먼 길 떠나는 사람에게 노자 돈 한 푼 인심 쓰지 않았던 이정승의 괘씸한 처사를 생각하면 당장에라도 쫓아가서 ‘네 놈이 인간이냐? 괴물이냐?’고 호통을 치며 귀뺨이라도 서너 대 올려붙여 버려야 속이 시원할 것이었다. 그것을 못내 참고 탈탈 굶고 빈손으로 떠나오던 그날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속에서 부아가 끓어오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뒤늦게라도 사람을 시켜 이처럼 벼슬자리를 좀 봐 달라고 바쳤던 돈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고 생각하니 김선비의 굳었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이었다. 그 돈이 없었다면 늙은 어머니며 처자식은 한기(寒氣)에 내몰려 굶어 죽었을 지도 모를 것이었으니 그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아찔했다.
김선비는 이정승에게 벼슬자리 사려고 바친 돈 삼천 냥이 그대로 집으로 돌아온 줄로만 생각하고 마음속으로 딱 그렇게 믿고는 부엌에서 먼 길을 달려온 서방님에게 드린다고 술 거르고 씨암탉 잡고 전 지져 음식 걸게 장만하는 아내를 불렀다. 아무래도 아내는 6년 만에 돌아온 서방님을 위하여 일가친척들을 모두 불러 뜨거운 고기국물에 안주를 가득 마련해 놓고 쓰디쓴 술이라도 배불리 먹일 생각이었다.
“여보! 부인!”
김선비가 다급하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부엌에서 일하는 아낙과 함께 음식을 만들고 있던 아내가 방으로 들어왔다.
“무엇이 그리 급하신가요?”
“어 어흠! 무엇이 그리 급한 것이 아니라…” 김선비가 머뭇거리며 아내의 얼굴을 올려다보니 6년 전보다 주름이 많이 늘어 그 곱고 화사하던 꽃 같던 얼굴도 세월 속에 시들어가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사내 손길 끊어지고 아이들 기르랴, 어머니 봉양하랴 6년을 홀로 궂은 집안 일 헤쳐 오며 살아왔으니 고단한 나날을 보냈을 것이었다.
“먼 길 오셨으니 따뜻한 아랫목에서 한잠 푹 주무시지 그러세요. 소식 한 장 없던 서방님이 이렇게 돌아 오셨으니 소식 궁금해 하던 일가친척 어르신들을 모두 불러 모아 인사를 드려야하지 않겠어요.”
“그 그건, 그래야지요... 그 그런데 부인, 그 이정승집에서 돌려보내온 돈이 삼천 냥이었나요?”
기생 소백주 (90)죽을 죄
김선비는 이정승에게 바친 돈 삼천 냥이 그대로 되돌아왔느냐고 궁금하던 것을 얼른 확인해 물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인가요? 이정승집에서는 지금껏 코빼기도 비친 일이 없습니다요.”
아내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느냐고 김선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뭐! 뭐라? 그렇다면 부인, 이렇게 큰집을 지을 돈을 도대체 누가 보내주었단 말인가요?”
김선비는 자신의 예측이 빗나간 것을 알고는 펄쩍 뛰며 깜짝 놀란 얼굴로 말하는 것이었다.
“서방님이 한양에서 크게 사업을 일으켜 대 성공을 해서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어 보낸 것이 아니었던가요?”
아내는 되려 김선비에게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이 이런?….”
김선비는 어안이 벙벙했다. 김선비 자신이 지금까지 했던 일이라고는 고작 집안 전답 죄다 팔아 벼슬 살 돈 삼천 냥을 마련해 이정승에게 고스란히 다 바치고 그 집 사랑방에서 식객 노릇을 하며 기다리기를 삼년, 식구들이 굶어 죽게 생겼다고 해서 집으로 급히 내려오다 수원에 사는 조선 최고의 기생 소백주 집에서 꿈결 같은 나날을 지내기를 삼년 그러다가 지금에야 고향으로 내려 온 것, 그것이 전부가 아닌가!
“그렇다면 서방님이 큰 사업을 일으켜 돈을 벌어 새 집을 지으라고 돈궤미를 보낸 것이 아니란 말씀인가요?”
아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김선비를 바라보았다.
“으음!… 그 그러니까, 그 그게 말이요…”
김선비는 순간 속으로 끙! 앓으며 입을 열지 못했다. 벼슬을 사려고 집안 전답을 모조리 팔아 삼천 냥을 이정승에게 바치고 벼슬도 얻지 못하고 늙은 어머니가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부랴부랴 노자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탈탈 굶고 돌아오다가 수원 기생 소백주에게 빠져 꿈결 같은 나날들을 흠뻑 누리다 왔으니 사람의 탈을 쓴 모양으로 그 사실을 차마 입 밖에 곧이곧대로 실토하기가 김선비는 영 부끄럽고 낯이 서지 않아 저어되었던 것이다.
늙은 어머니와 처자식을 나 몰라라 팽개친 사실에 김선비는 사람으로서 해서는 아니 될 짓을 했다고 깊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김선비가 무슨 중대한 결심이라도 했는지 벌떡 일어나 어머니 방으로 가서 아내며 아이들을 다 모이게 해놓고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찬찬이 입을 열었다.
“실은 어머니, 제가 어머니나 처자식에게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실은...”
김선비는 그간의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온 가족들에게 솔직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벼슬 사러 가서 삼년, 그리고 수원에서 기생 소백주와 함께 살다가 온 삼년을 숨김없이 낱낱이 이야기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