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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6장 두 번의 패배 (1)
-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
관중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한 말이다. 그랬다.
사형수의 몸에서 포숙의 천거를 받아 재상이 된 관중은 제환공과 3일 밤낮을 얘기하면서 바로 이 '부국강병책'을 진언하였던 것이다.
이런 사상과 정책이 하루아침에 정립되고 입안될 리 없었다.
관중(管仲)은 청년시절부터 부국강병책에 대해 많은 생각과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것을 포숙이 알았고,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올라야 할 자리에 관중을 올려 놓은 것인지도 몰랐다.
<관자(管子)>라는 책이 있다.
관중의 저술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후대 사람이 썼음직한 글들도 많이 보이는 책이다. 하지만 역시 관중의 사상을 가장 잘 전하고 있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관자>의 첫 편은 <목민(牧民)>인데, 그 모두(冒頭)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백성들은 곡식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며, 의식이 풍족해야 영욕을 알게 된다.
관중(管仲)의 부국강병책을 한마디로 응축한 말이라 할 수 있다. 예절도, 영욕을 아는 마음도, 준법정신도 모두 내 배가 불러야 생겨난다는 것이다. 관중이 진언한 '부국강병책'의 이면에는 끈끈하고도 도도하게 흐르는 기본 상상이 있다.
바로 '베풂'이다.
주는 것이 곧 얻는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정치의 비결이다.
<사기열전>을 쓴 사마천(司馬遷)은 관중의 정치사상을 한마디로 이렇게 요약, 평가했다. 심히 공감이 가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후의 관중의 정치스타일을 보면 그는 재상으로 있는 동안 내내 '베풂'의 정책을 펼쳐냈기 때문이다.
관중(管仲)의 부국강병책을 좀더 세분해서 살펴보면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농업 정책이요, 둘째가 경제 정책이고, 셋째가 군사 정책, 넷째가 인사 정책이다.
이 중 관중(管仲)의 치밀하면서도 냉정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인사 정책이다. 포숙은 어릴 적부터 친구요, 목숨을 살려준 은인이요, 자신을 재상에까지 오르게 해 준 사람이다. 게다가 제환공의 심복이자 일등공신이요, 자타가 인정할 정도로 지혜와 인격을 겸비한 당대의 지성인이다. 당연히 그를 요직에 앉혀야 할 것이었다. 그래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그는 자신을 도와 정치를 펼쳐나갈 인재를 추천하는데 포숙(鮑叔)의 이름자 하나 거론하지 않은 것이었다.
왜 그랬을까?
관중(管仲)은 포숙의 능력을 알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포숙에게 정치적, 행정적 능력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아니다. 단언하건대, 관중은 그 누구보다도 포숙의 능력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일찍이 포숙은 제환공에게 말했다.
- 나는 정해진 예와 법을 따를 뿐입니다.
그랬다.
정해진 예와 법을 따르는 데에는 포숙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하지만 각 부 장관은 예와 법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예와 법을 만들어 나가야 할 사람들이다. 관중은 이러한 포숙의 성품과 능력을 너무나 잘알고 있었기에 개혁정치의 주도세력에서 제외시켰던 것이 아닐까. 아니, 좀더 정확히 말하면 개혁의 실천자로서의 역할을 포숙에게 부여했음이 틀림없다. 따르고 실행함에는 포숙을 능가할 사람이 없으므로.
- 관중(管仲)은 정책을 입안하고, 포숙은 그 입안된 정책을 충실히 따른다.
이런 무언의 약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관포지교라는 말을 낳았을 정도의 두 사람의 우정이 아니던가.
관중(管仲)의 치밀함 중 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이러한 정책들이 각 분야마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상호 보완체제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또한 제(齊)나라의 지리와 풍토를 기가 막힐 정도로 잘 이용했다는 점도 관중이 이루어낸 업적 중 하나이다.
관중(管仲)은 제나라 시조 태공망 여상의 영향을 상당히 많이 받은 듯싶다.
이 점을 역사가 사마천은 간과하지 않고 <사기열전> 중 <화식열전(貨殖列傳)>편에서 정확하게 끄집어 내고 있다.
태공망이 영구(임치의 옛 이름, 여기서는 제나라를 가리킴)에 봉해졌을 때 그 곳의 땅은 소금기가 많고 인구가 적었다. 이에 태공망은 방직 등 부녀자의 일을 장려하고, 공예의 기술을 높이 끌어올리고, 생선과 소금을 유통시키고, 물자와 사람들을 그 곳으로 끌어들이니, 마치 그것들은 엽전 꾸러미가 꿰진 듯 모여들었다. 이리하여 제(齊)나라는 천하에 관과 띠, 옷과 신을 공급하게 되었고, 동해와 태산 사이에 있는 제후들은 옷깃을 여미고 제나라에 조회하였다.
그후 제나라는 한때 쇠약해졌으나 관중(管仲)이 재상으로 등장하여 태공망의 정책을 재정비하여 산업을 발달시키고,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시키니 제환공은 마침내 패자(覇者)가 되어 천하를 바로잡았다. 관중은 비록 지위가 신하였으나 그 존귀함과 부유함은 다른 나라의 임금들보다 더 높고 풍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업적이 어찌 말과 생각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으랴.
또 어찌 아무런 고난없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첫 시련이 닥쳐왔다. 그것은 제환공(齊桓公)이 관중을 절대적으로 신뢰하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