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西華八明堂(서화팔명당)
충북 옥천군 군서면 서화천 주변에 있는 8곳의 대명당 또는 대길지로 서화팔명당 또는 군서팔명당이라 한다.
함박꽃이 봉오리 피기 전 모양의 지형인 사정리 행정마을과 동평리 평곡마을 사이 홍산의 작약미발형(芍藥未發形) 명당,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모양의 지형인 은행리 상은마을 위쪽의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 명당,
신선이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의 지형인 서성골의 선인독서형(仙人讀書形) 명당,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의 지형인 사양리 논골 닭재에 있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명당,
선녀가 거문고를 타는 모습의 지형인 하동리 마을 뒷산의 옥녀탄금형(玉女 彈琴形) 명당,
오동나무에 달이 떠있는 형상의 지형인 오동리 무중골 앞산의 오동계월형(梧桐桂月形) 명당,
장군이 진영에 위풍당당하게 앉아있는 형상의 지형인 월전리 군전마을의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 명당,
짐을 실은 배가 움직이는 형상의 지형인 월전리 용복 뒷산의 적선행주형(積船行走形) 명당등 8곳을 말한다.
2. 芍藥未發形(작약미발형) 明堂(명당) 洪山(홍산).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정리에 있다.
사기점(沙器店) 마을의 사자와 행정(杏亭)의 정자를 한자씩 취하여 사정리라 하였다. 사기점은 이 마을에 고려 때부터 청자와 백자를 굽던 곳이기 때문에 사기점이라 하였고, 행정은 이 마을에 살구나무가 많고 살구나무 숲이 있어 “살구정”이라 하던 것을 한자로 쓰면서 살구 행, 정자 정자를 써서 행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사정리의 자연마을로는 사기점, 살구정이, 마전동, 구억말, 말래 등이 있다.
사정리 마을 이름이 있게 한 사기점은 고려 때부터 사기를 구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곳곳에 자기 파편이 흔한데 밭을 일구고 땅을 파헤쳐 지금은 사기를 구웠던 가마터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사기점에는 또 옛 절터가 남아 있다. 절터 흔적은 한 가정집에 남아 있는데 기록이 없어 절의 이름이나 창폐 연대를 알 수 없으나 현재 1개씩 남아 있는 탑 옥개석과 장대석으로 보아 고려때 유행하던 양식이어서 고려시대의 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행정에는 경주이씨(慶州李氏) 문중이 13대 이상 살고 있다. 행정마을 입구에는 마을에서 쓰던 연자 방앗돌이 있고, 청년들이 돈을 모아 만든 유래비가 오가는 이를 반긴다.
청년들은 또 군서-옥천읍간 37호 국도변에서 마을로 들어오는 진입로에 살구나무를 심어 마을의 옛 지명유래를 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마전동(麻田洞)은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가인 토정 이지함 선생이 얽힌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사정리는 전국의 어느 곳에서도 풍수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는 곳이다.
그 유명한 군서 8명당 중의 한 곳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군서면에는 군서 8명당이란 것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작약미발형(芍藥未發形, 함박꽃 봉오리가 피기 전 모양의 지형)’이고 사정리와 뒷산인 홍산의 형세가 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토정 이지함은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난 분이며 음양오행 풍수지리에 능통하여 앞날을 훤히 점치는 도사였습니다.
하루는 이토정 선생이 8도 강산을 두루 돌아 다니던 중, 어느날 옥천땅에 들어섰습니다.
갈증이 심해서 먹을 물을 찾던 중, 그는 작은 계곡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그 물을 마셨습니다.
그랬더니 이상스럽게도 그 물에서 작약(함박꽃)의 향취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게 어찌 된 까닭인지 그 원인을 찾아보려고 물줄기를 따라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뜻밖에도 ‘작약미발형’(芍藥未發形 : 함박꽃 봉우리가 피기 전 모양)의 천하대지가 그 곳에 있었습니다.
토정 선생은 기쁨을 참지 못하고, 즉시 그 땅을 죽은 뒤에 자신의 무덤으로 삼기로 하고는 땅에 표식을 해둔 뒤 자기 집이 있는 한산으로 돌아갔습니다. 그후 토정 선생은 이 일을 극비로 하여 일체 발설치 않고 지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토정선생같이 앞일을 훤히 점치고 사는 도사도 자기 죽는 날은 모르고 지내다가 급기야는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이때는 이미 혀가 굳어서 그는 자기가 지난 날 무덤으로 정해 놓은 땅을 자손들에게 알리지 못한 채 죽고 말았습니다.
토정선생이 항상 데리고 다니던 심복 하인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신개(慎凱)였다. 토정 선생은 자신이 죽으면 사정리 작약미발형 땅에 묻어줄 것을 하인인 신개에게 당부했고, 그는 작약미발형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토정이 죽은 후 자손들은 신개의 인도로 한산에서 상여를 메고 머나먼 옥천땅을 향했습니다. 그런데 금산을 지날 때였습니다.
오다가 그만 하인 신개가 갑자기 심장마비를 일으켜 급사해 버리고 죽고 만 것입니다. 상주는 당황하여 표식을 해둔 곳을 급히 물었지만, 신개는 벌써 혀가 굳어서 발음이 분명치 않았습니다. “개골‧‧‧‧‧개‧‧‧‧‧골, 삼밭‧‧‧‧‧골‧‧‧‧‧‧뒤‧‧‧‧‧”하고는 죽어버렸습니다. 토정의 상여는 결국 작약미발형 명당을 찾지 못하고 다시 돌아가고 말았다. 신개가 죽으면서 했던 말이 ‘삼밭’이었고, 그 말에 따라 마을이름이 삼밭, 즉 마전(麻田)이라고 했다는 전설이다.
토정같이 천문에 능하고 지리에 통달했던 분도 아마 이리될 줄은 몰랐던 모양입니다. 일행은 할 수 없어 “개구리가 우는 삼밭뒤‧‧‧‧‧‧”라는 뜻으로 알고 삼밭(마전) 뒷산으로 갔지만 아무리 찾아 보아도 그럴 만한 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상여를 돌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지금도 신개가 죽었다는 곳은 '신각'이라고 하여 군서면 은행리 쯤에 아직도 지명이 전해진다. 신개는 죽을 당시 '삼밭'이란 말만 남기고 죽었다는데 이 말은 지금의 사정리 마전동과 지명이 일치해 마전동이 그 위치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남았다.
또한 지명과 관련해서는 훗날의 얘기이겠으나 마전동 국도변에 함박꽃상회라는 상호가 있어 구색을 갖추고 있다.
지금도 옛부터 전해오는 작약미발형의 명당을 찾으러 오는 전국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도 흥미로운 얘깃꺼리다.
예컨대 작약미발형 천하대지는 토정(土亭) 이지함(李之涵)이 직접 자신의 산소자리로 잡아놓은 곳이지만 그런 당대 최고수도 결국 이곳을 차지하지는 못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산천초목도 물각유주(物各有主)라더니 작약미발형지의 명당은 아직도 공지로 남아 있다고 합니다.
풍수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토정이 서거한 뒤에도 여러 백년간, 답사하여 찾아 보았지만 아직까지 그곳을 찾았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후 신개가 죽은 곳을 “신개들”이라 하고, “삼밭골”은 지금은 마전동이라 하니, 한산에서 옥천으로 오는 도중에 이런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 위치는 서대산 줄기 군서면 어느 산록이라고 한다.
「마을 부근에 신선이 글을 읽고 있는 모습의 명당(仙人讀書形)이 있어 글 읽는 소리가 늘 끊이지 않았으므로 서성동(書聲洞, 지금은 西城洞으로 표기함)이라 불렸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사정리의 자연마을 중의 하나인 마전동에 위와 같은 얘기가 전해오듯 향정, 마전동, 사기점, 구억말, 말래 등 5개 자연마을마다에는 저마다의 유래가 깃들어 있다.
3. 芍藥未發形(작약미발형) 明堂(명당) 沃川(옥천) 先塋(선영) 洪山(홍산).
충북 옥천군 군서면 사정리 산2-1에 소재하는 홍산(洪山)은 풍산홍씨문경공계도정공파종중 선산이다.
유명한 군서 8명당 중의 한 곳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군서면에는 군서 8명당 또는 서화팔명당 이란 것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작약미발형(芍藥未發, 함박꽃 봉오리가 피기 전 모양의 지형)’이고 사정리와 뒷산인 홍산의 형세가 그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토정 이지함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오는 작약미발형의 명당으로 전국 풍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풍산홍씨 14세 휘 중인할아버지(도정공)께서 충북 옥천군 서화에 소재하는 선산을 구입하여, 도정공의 생전에 며느리가 사망하자 1714년 6월 풍산홍씨 15세 휘 정보할아버지(증참판공 또는 정언공)의 비인 증정부인 나주정씨의 묘역을 조성하였고, 도정공의 생전에 외아들 정보할아버지(증참판공 또는 정언공)가 사망하자 1745년 11월 풍산홍씨 15세 정보할아버지(증참판공 또는 정언공)의 묘역을 조성하였고, 도정공 사후인 1792년 8월 풍산홍씨 15세 정보할아버지(증참판공 또는 정언공)의 계비인 증정부인 창원황씨의 묘역을 자손들이 조성하였다.
증참판공(또는 정언공)과 증정부인 두분의 묘소를 조성한 후 풍산홍씨문경공계도정공파 종원과 풍산홍씨 문경공계 교리공파 첨한할아버지(출계한 증참판공 또는 정언공의 4자)의 후손들이 증참판공(또는 정언공)의 벌초. 성묘. 시제에 참석하기 위한 선영 방문과 후손들의 분묘 조성을 위한 선영방문이 빈번해지면서 선산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풍산홍씨 문중의 선산임이 알려지고 인식되면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옥천 지역 주민 및 행정관청에서 풍산홍씨 문중의 선산 즉 洪山(홍산)으로 불려지면서, 지도에도 洪山(홍산)으로 등제되었고, 인터넷에도 洪山(홍산)으로 등제되었다. 이와 같이 산의 명칭이 어느 성씨를 기준으로 붙여진 사례는 유일무이하고, 전국 어느 곳에도 없다.
첫댓글 기택 총무이사님 !
오랜만에 풍홍에대한 참고 자료
보내셨군요 건강을 되 찾으신것
같아 정말 축하 드림니다
건강 관리 잘 하셔서 좋은 조상님의 유묵 많이 올려 주시길
기대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좋은 소식 감사합니다
편히 쉬십시요
카페에 글을 게시 할 정도로 몸이 정상궤도로 올랐음을 직감 합니다.
빠른 시일내 쾌차 하시어 저랑 같이 선조님의 유적을 찾아 다니고, 종사를 위하여
한 몸을 던져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