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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1341. [역경의 열매] 김현숙 (1-10) 한의사 집안 소녀의 ‘컬러테라피’ 인생 대역전
성공한 여성의 길 접고 뉴질랜드 이민… 주님 은혜로 시련 딛고 한의대까지 세워
김현숙 원장은 요즘 ‘컬러테라피’ 원리에 따른 넥타이와 스카프 생산 및 화장품 개발·출시에 힘쓰고 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선교의 도구로 사용할 계획이다. 강민석 선임기자
지나온 50년 세월을 돌이켜보건대 무엇 하나 허투루 이뤄진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충남 금산의 한의사 집안에서 자란 것도 그렇고, 그 덕에 한의학에 관심을 가졌으며, 더 큰 비전을 위해 2003년 4월 삶의 터전을 뉴질랜드로 옮긴 것까지….
솔직히 지금의 나는 뉴질랜드에서 새롭게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에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만났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분을 만나기까지의 과정은 정말 힘들었다. 현지에서 사기를 당했고, 온갖 협박에 시달렸다. 뉴질랜드 노농부나 이민성에 계속 불려다니며 조사 받았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전락되기도 했다. 모든 것을 극복하고 다시 시작하려고 하면 갑자기 닥친 화재로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정말 살기 힘들었다.
후회로 가슴을 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나온 허상에 사로잡혀 목 놓아 울었다.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기 전, 그러니까 하나님을 몰랐을 때의 나는 돈 잘 버는 소위 성공한 여성 사업가였다. 한방 화장품을 접해서 3개월 만에 투자한 돈을 다 벌고도 남았으니 말이다. 영업사원 30명을 두고 월 매출 4000만∼5000만원을 올렸다. 약품 회사들을 다니면서 건강 강좌에 미용 강좌까지 열었다. 하루에 나 혼자 500만원 이상의 화장품을 팔아본 적도 있다. 게다가 경매에까지 눈을 떠 당시 다섯 채의 집을 갖고 있었다. 콘도 회원권도 2개나 됐다. 그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까지 내 삶이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일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욕심이 과했던 것 같다. 특히 자녀에 대한 욕심이 컸다. 누구보다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에 뉴질랜드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돈이 있으니 탄탄대로일 줄 알았다. 한국에서의 삶이 그곳에서도 계속될 줄 알았다. 착각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라는 지면에서 내가 풀어갈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주어지는 ‘인생의 대반전’. 그건 은혜이고 축복이다. 기독교 박해의 선봉장이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라는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만난 뒤 어떻게 달라졌는가. 예수님을 전하는 복음의 선봉장이 됐다. 그렇게 사도 바울은 인생의 축복을 누렸다.
나 역시 그분을 만나고 뉴질랜드에서 한의학을 접목한 ‘컬러테라피’를 연구·개발하게 됐다. ‘컬러테라피’는 모든 종류의 색채 스펙트럼을 이용해 병을 치유하는 대체의학의 한 분야다. 이를 계기로 힐링센터와 한의원을 갖춘 ‘아큐플러스클리닉’을 설립했다. 또 뉴질랜드 한의대도 세웠다. 실제 우리 주변을 보면 주님을 믿고 반전의 삶을 사는 역전의 용사들이 참 많다. 그런 신앙의 간증을 들려주고 싶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사 55:8∼13)
정리=노희경 기자 hkroh@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현숙 (1) 한의사 집안 소녀의 '컬러테라피' 인생 대역전
* [역경의 열매] 김현숙 (2) 3대째 믿음의 가정… 장기자랑으로 요한복음 암송
* [역경의 열매] 김현숙 (3) 아버지 "딸은 공부 안해도 돼" 차별에 고교만
* [역경의 열매] 김현숙 (4) 한방화장품으로 대성공… 36세에 대학 입학
* [역경의 열매] 김현숙 (5) 아들 골프유학 위해 떠난 고난의 뉴질랜드 이민
* [역경의 열매] 김현숙 (6) "폐교 위기 해밀턴 한의대 살리자" 15만 달러 기부
* [역경의 열매] 김현숙 (7) 한의과대 위기로 하나님 다시 영접하는 은혜를
* [역경의 열매] 김현숙 (8) 잿더미가 된 이삿짐 속에서 발견한 성경 한 권
* [역경의 열매] 김현숙 (9) 내 복음 도구는 하나님 창조섭리 따르는 침술
* [역경의 열매] 김현숙 (10·끝) 이국 땅서 대체의학으로 쓰는 '사도행전 29장'
◇약력=1965년 전북 진안군 출생, 중국 남양중의대 졸업, 수원여대 피부미용과 졸업, 건국대 대학원 생물공학과 화장품공학 수료, 뉴질랜드 한의과대학 졸업. 저서 ‘24시간 건강 생활법’ ‘한방 성형 황후 침법’ ‘아큐플러스 오행침’ ‘컬러테라피’ 등. 뉴질랜드 한의과대학 이사장 역임, 인터콥 순회선교사, 뉴질랜드 아큐플러스클리닉 원장
***[역경의 열매] 김현숙 (2) 3대째 믿음의 가정… 장기자랑으로 요한복음 암송
농악 인간문화재인 한의사 할아버지 땅 3000평 기부해 초등학교 설립하셔
김현숙 원장은 한의사 할아버지 밑에서 한의학에 관심을 갖고 한의사에 대한 꿈을 키웠다. 중학교 때 모습.
내가 태어난 곳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는 깊은 산골 전북 진안군이다. 1965년 6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학교에 들어갈 무렵 도회지인 충남 금산 땅으로 이사했다. 할아버지 대부터 인삼 및 약초 농사를 지었는데 그 덕분에 어렵지 않은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다.
우리 집안은 3대째 믿음의 가정이다. 당시 우리 동네 한가운데에는 뾰족탑의 교회 하나가 들어서 있었다. 학교 외에는 놀 곳이 마땅치 않았던 작은 아버지들이 어렸을 때부터 그 교회에 열심히 나가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러다보니 할아버지도 자연스레 교회로 걸음을 했다.
그래서일까. 추운 겨울에 인삼 농사 재료 준비로 밤늦게까지 일하면서도 가족 모두의 표정은 밝았다. 찬양이 흘러나오는 라디오 방송을 항상 틀어놓았다. 어른들은 일하면서 찬양을 따라 불렀다. 나 역시 어머니, 언니를 따라 익숙하게 찬양을 불렀다.
할아버지는 지역에서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유학자에다 한의사였던 할아버지는 침을 잘 놓으셨다. 어려운 이웃에겐 돈도 받지 않고 침을 놓아주셨다. 내가 한의사에 대한 꿈을 꾸게 된 것도 할아버지의 영향이 크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금산농악 보유자로 지방 인간문화재로 등록된 분이다.
할아버지는 유독 나를 예뻐해 주셨다. 다른 형제들보다 공부나 여러 방면에서 좀 더 특출났다. 할아버지는 내게 농악 연주 기술을 가르쳐주셨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할아버지가 땅 3000평을 기부해 지어졌다. 농악을 특성화해 전주대사습놀이까지 나가는 작지만 유명한 학교였다. 물론 지금은 학생이 없어 폐교됐지만 할아버지의 공적 비석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농악 보유자의 손녀답게 수소고를 비롯해 수장고와 꽹과리도 잘 쳤다. 늘 앞에 서서 학생들을 이끌었다. 지금도 꽹과리 장구 등 농악에 필요한 것들을 연출할 수 있다.
이런 적극적인 성향은 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모든 행사에 열심이었다. 여름 성경학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어린이 찬양부르기 대회에도 나갔다. 특히 성경 암송을 잘했다. 오죽하면 학교 소풍 때 장기자랑 시간에 요한복음을 암송했을까.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온 가족이 등불을 들고 새벽송을 부르며 마을 이곳저곳을 다녔다. 불이 켜져 있는 집 앞에서는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힘차게 불렀다. 불이 꺼져 있는 집 앞에서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잠시 이 가정이 예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드렸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다보니 나는 어느새 말씀과 찬양에 친숙해졌다. 굳이 애쓰지 않고도 하나님을 자연스레 믿었다. 하지만 그것을 아는가. 오랜 시간을 통해 내 마음 밭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졌고, 하나님을 믿어왔음에도 그분을 잊는 건 순간이라는 것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믿지 않는 가정에 시집간 나는 20년 가까이 하나님을 등지고 살았다. 중요한 건 핍박과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신앙을 버린 게 아니라 가정의 평화를 위해 나 스스로 그런 길을 선택했다는 거다. 돌이켜보면 내 믿음의 분량이 그 정도밖에 안됐다. 그리고 다시 하나님을 만날 때는 정말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아왔다. 고난 가운데 피어난 믿음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런 강인한 믿음이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내 백성을 해가 뜨는 땅과 해가 지는 땅에서부터 구원하여 내고 인도하여다가 예루살렘 가운데에 거주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진리와 공의로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슥 8:7∼8)
***[역경의 열매] 김현숙 (3) 아버지 “딸은 공부 안해도 돼” 차별에 고교만
성적 상위권에도 수업료 제때 안주셔, 23세에 결혼… 시댁과 종교 달라 갈등
고등학교 졸업식 날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한 김현숙 원장. 자라면서 아버지로부터 온갖 설움을 당했지만 지금 그 아버지는 김 원장을 가장 많이 의지한다.
할아버지대부터 대대로 신앙을 지켜왔지만 아버지는 믿음이 약한 분이었다. 가부장적이고 유교사상이 강해 특히 딸들에게 냉정했다. 자라면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이 아들과 딸의 차별이다. 형편이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딸들은 공부를 안 시켜도 된다”며 상급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못마땅해하셨다. 수업료도 제때 주지 않으셨다. 딸들 수업료를 일꾼 품삯으로 내놓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설움을 당하며 살았다. 아버지는 돈을 벌면 무조건 땅을 사고, 교육에는 절대 투자하지 않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배움에 대한 열망이 컸다. 학교에서 성적도 늘 상위권이었다. 특히 그림을 잘 그렸다. 중학교 때 선생님이 미술을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권하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아버지는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됐지. 빨리 돈 벌어서 시집 가면 그만이야.”
그런 아버지가 싫어 수차례 집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결혼을 일찍 한 것도 아버지에게서 빨리 탈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1987년 10월 15일 결혼했다. 그때 나이 스물셋, 남편은 스물일곱이었다. 나와 달리 남편은 홀어머니 밑에서 어려운 가정형편 가운데 자랐다. 시어머니는 음식점 식당 주방에서 일하며 4남매를 키우신 분이다. 남편은 어머니와 누나의 도움으로 대학까지 공부를 마쳤다. 평생 남편 잘되는 것만 바라고 살아오신 분들이다.
우리는 우연한 기회에 각자의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가 서로 호감을 느껴 사귀게 되었고 결혼까지 했다. 당시 남편은 군에서 막 제대한 상황.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아들이 여자를 데려와 결혼하겠다고 하니 어느 어머니가 환영하겠는가. 물론 우리 집의 반대도 만만찮았다. 가장 큰 문제는 종교가 서로 다르다는 거였다. 사는 형편도 달랐다.
남편은 굉장히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착하고 성실했다. 결국 그런 남편의 모습에 감동한 부모님은 결혼을 하락했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여전히 나를 못마땅해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어머니께 최선을 다했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비롯한 대가족이 함께 살면서 나의 깊은 내면에는 어른께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는지 모른다. 성경에도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지 않은가. 남편 없이 외롭게 살면서 고생한 시어머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시외할머니도 90세에 돌아가실 때까지 모시고 살았다.
결혼하고 2년 정도 지나자 어머니는 교회 나가는 며느리를 반대하셨다. “네가 교회에 나가니까 남편이 승진도 안 되고, 집안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가정에서 종교는 하나여야 한다.”
승진 심사에서 몇 번 떨어지자 남편도 어머니와 합세했다. 거금을 들여 굿판까지 벌일 정도로 어머니는 남편이 잘되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 모습에 어떻게 대항하겠는가. 아니, 아예 할 마음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 한 사람이 종교를 바꿔 집안이 잘된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을까?’ 그 생각만 되뇌었다. 이 얼마나 한심한 믿음인가 말이다.
결국 교회를 스스로 나가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이 집안에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오히려 화장품 사업을 시작한 나는 승승장구했다. 시어머니는 “삼재(三災)가 들었다”며 사업을 반대했다.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도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돈을 많이 벌었다. 그땐 그게 성공인 줄 알았다.
***[역경의 열매] 김현숙 (4) 한방화장품으로 대성공… 36세에 대학 입학
1999년 여름방학때 영국서 연수 중 색으로 건강 지키는 ‘컬러 테라피’ 접해
2001년 당시 오산백합로타리클럽 회장이던 김현숙 원장(오른쪽 네 번째)이 우즈베키스탄에 우물 파주기 지원 성금을 전달하는 모습.1991년에 모 한방화장품 지사를 설립해 운영했다. 사업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투자한 돈을 모두 회수하고도 남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그 덕에 지역 로타리클럽 회장도 지냈다. 이때부터 기부나 봉사활동 등 사회적으로 많은 역할을 감당했다.
젊은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얕은 소견이지만 한의학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를 뵈면서 듣고 배웠다. 결혼 직후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한방으로 건강 체크하는 세미나’를 매주 한 차례 6개월 동안 빠지지 않고 참석해 침도 배웠다. 고객을 만나 한방화장품과 식품을 체질·병증별로 권유하니 신뢰가 높아져 매출도 올랐던 것이다.
사업을 하느라 바쁜 중에도 중국 남양중의대에서 통신 과정으로 한의학 공부를 마쳤다. 또 화장품 관련 일을 하다보니 사람들의 피부에 관심을 갖게 됐고 수원여대 피부미용과를 36세라는 늦은 나이에 입학해 20세 어린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다.
방학 중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피부와 건강 관련 연수를 받기도 했다. 특히 99년 여름방학 때 영국에서 컬러로 건강을 지키는 ‘컬러 테라피’를 처음 접했다. 우연히 넓게 펼쳐지는 라벤다꽃을 보면서 색의 원리를 깨달았다. 즉 모든 우주만물은 색을 담고 있는데, 그 색은 인간의 오장육부의 건강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보라색은 마음의 평안을 안겨주는데, 라벤다의 성향 역시 인간의 정신세계와 관련이 있다. 페퍼민트(푸른색)는 시원하게 만드는 작용이 있다. 근육을 편안하게 해준다. 한의학 기초 원리에서 푸른색은 간과 연관이 있다. 푸른색은 간담에 좋은 색이다. 엽록소 빛깔이 푸른색인데, 푸른 채소들은 체내에서 마그네슘으로 변한다. 흔히 마그네슘이 부족하면 눈꺼풀이 경련을 일으킨다고 하여 서양의학에서도 이러한 환자들에게는 마그네슘을 권한다. 또한 푸른색은 근육과 관련이 있어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근육이 뭉친다.
심소장(심장소장)은 붉은색, 비위장은 노란색, 폐대장는 흰색, 신장방광은 검은색이다. 한의학에서 말하는 오행원리 중 다섯 가지 색깔을 들어 설명한 것이다. 토마토 수박 자두 복숭아 등 여름에 나는 과일은 대부분 붉다. 이는 심장에 좋고, 붉은색을 띠게 하는 성분인 라이코펜이 피를 맑게 해준다. 무 배 도라지 배추처럼 가을에 나는 채소나 과일은 흰색인데 이는 인체의 기와 관련 있다. 계절에 나는 모든 색들 역시 오행에 배속돼 다 다른 것이다. 한의학의 원리로 볼 때 이 모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과학이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만나기 전에는 여기까지, 그러나 뉴질랜드에서 그분을 만나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만물의 이치가 모두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뉴질랜드 이민을 생각한 건 오로지 아이들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더 나은 환경에서 교육시키고 싶은 엄마의 욕심이랄까. 나는 연년생으로 1녀1남을 뒀다. 둘째가 운동을 참 좋아했다. 특히 축구를 잘해 초등학교 축구부에서 선수로 뛰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때 코치와 축구 관계자들의 폭행, 폭언에 시달려 아들은 더 이상 합숙을 못하고 그 좋아하던 축구를 포기했다.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을까를 염려했는데, 아들이 골프에 소질을 보인 거다. ‘골프의 천국’이라는 뉴질랜드로 아이들을 유학 보내며 ‘길’이 열렸다. 비로소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 힘든 고난의 길이 시작됐다.
***[역경의 열매] 김현숙 (5) 아들 골프유학 위해 떠난 고난의 뉴질랜드 이민
비자 내준다는 한국계 기업 믿고 결심… 도착하자 상가는 물론 돈도 안돌려줘
김현숙 원장(왼쪽)이 아들과 뉴질랜드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프로 골퍼 강동우씨가 그의 아들이다.사업을 하다보니 골프 모임이 많았다. 회원권을 끊어 아들을 데리고 같이 다녔는데, 골프에 흥미를 보였다. 하루에 공을 2000개 이상 칠 정도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골프 연습장에서 살기도 했다. 축구를 하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아들을 위해 더 나은 환경에서 골프 수업을 받게 하고 싶었다. 두 아이의 뉴질랜드 유학을 결정했다.
6개월 뒤에 아이들을 보러 뉴질랜드에 갔는데, 그간 내가 들어온 현지 상황과 너무 달라 당혹스러웠다. 교민이 아이들을 도와준다고 해서 골프 레슨비며 생활비 등을 주급으로 풍부하게 보냈다. 그런데 편안하게 돌봐준다는 그 사람의 말과 달리 아이들이 힘들게 생활하고 있었다. 특히 아들은 골프장에서 제대로 마음 편히 공을 치지 못했다.
“부모 없이는 우리 아이들을 성공시킬 수 없겠구나.” 오로지 아이들밖에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뉴질랜드 이민을 결정했다. 때마침 일할 수 있는 비자를 주겠다는 한국의 기업도 있었고, 모든 게 척척 진행되는 듯했다.
하지만 남편의 반대가 심했다. 3개월 동안 설득한 끝에 일단 남편은 한국에 남고, 나만 가는 것으로 결정했다. 2003년 4월 1일, 아이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삶의 터전을 뉴질랜드로 옮겼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펼쳐졌다.
지인을 통해 상가를 하나 얻기로 하고 건물주인 한국인에게 돈을 보낸 상태였다. 그러나 막상 도착해보니 그는 상가도 내주지 않고, 돈도 돌려주지 않으며 오히려 뉴질랜드에 거주할 수 있는 비자를 갖고 압박했다.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나의 불안함은 아이들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여기서 이런 난관도 헤쳐가지 못하면 앞으로 무슨 일을 감당할까. 죽기 살기로 다시 한번 밀어붙이자.” 건물주를 찾아가 투자한 돈 회수를 당당히 요구했다. 물론 그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돈 줄 날짜를 계속 어겼다. 결국 변호사를 찾아갔고, 법에 호소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사람이 어쩌면 그렇게까지 간사할 수 있을까. 그 소식을 들은 건물주가 투자한 돈을 모두 돌려주는 게 아닌가. 대신 비자를 더 이상 내줄 수 없다고 우격다짐했다. 급한 대로 취업비자를 알아보기 위해 신문을 뒤적이던 중 해밀턴 한의대 소개글과 직원 채용 광고를 보게 됐다.
동국대 출신의 한 교수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러면서 학교 내부의 상황을 알게 됐다. 결론부터 말하면 학교는 문 닫을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사장이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들의 수업료를 가로채 사용한 게 들통 난 것이다.
한국에서 한의학을 배우겠다고 유학온 학생들이 마흔 명이나 됐다. 그들을 잘 가르쳐보겠다고 먼 곳까지 오신 교수님도 7명이나 됐다. 학교가 문을 닫으면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되는가. 문득 배우고 싶어도 배울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유학생들의 마음이 바로 이러지 않았을까. 그런 긍휼함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그래도 마음 속 저 깊이 작게나마 자리한 예수님을 닮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나님께서 나를 불러내려고 하신 첫 사인으로 이 일을 기록하고 싶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주를 경외하는 자들이 나를 보고 기뻐하는 것은 내가 주의 말씀을 바라는 까닭이니이다.”(시 119:71∼74)
***[역경의 열매] 김현숙 (6) “폐교 위기 해밀턴 한의대 살리자” 15만 달러 기부
이사장 취임후 의료봉사 등 최선 불구 대학 재정악화·투서로 긴급 감사까지
김현숙 원장이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열린 ‘2004 한인의 날’ 행사에서 교민들을 대상으로 의료 상담 및 침 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뉴질랜드 해밀턴 한의대를 살리기 위해 15만 달러를 기부했다. 하마터면 건물주에게 사기당해 날릴 뻔한 돈이었다. 2004년 2월, 나는 이사장으로 취임하며 학교 이름도 ‘뉴질랜드 한의과대’로 새롭게 변경했다.
감사한 건 교수님들이 다시 학교를 시작해 보자는 열의를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실 문제가 발생한 학교를 새롭게 운영한다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런데 뉴질랜드 교육국에서 이례적으로 단시간 내에 학교 인사를 정식 승인해줬고, 모든 게 원활하게 진행됐다. 솔직히 그때는 내가 열정을 갖고 학교를 경영하면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젊은 나이에 한방화장품 사업을 하면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이다. 내가 잘하면 돈을 벌 수 있으리라는 확신에 꽉 차 있었다.
학부형들에겐 수업료를 뉴질랜드 교육법인 통장으로 꼭 넣어줄 것을 요청했다. 투명하게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또 우리 학교가 한의학의 세계화를 위해 한걸음 더 전진할 수 있도록 중국 허난성에 있는 하남중의대와 MOU도 맺어 공동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2006년부터 20여명의 중국 학생들이 뉴질랜드에 와서 공부하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는 교환학생 방식으로 학생 교류도 시작했다. 또 한국에 한약학과나 피부미용과가 있는 대학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유학생 모집에도 나섰다. 2005년 1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하지만 좀처럼 학생들은 모이지 않았고 재정 상태는 날로 악화됐다. 결국 찾아간 곳이 뉴질랜드의 한 교회였다. 교민들을 대상으로 학교를 홍보하려는 마음에 해밀턴순복음교회를 처음 찾아갔다. 2006년 1월의 어느 날이었다. 수요 예배를 마치고 담임 목사님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교회 밖에서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한참 지나도 목사님의 설교가 계속 이어졌다. 참다못해 슬그머니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만에 다시 교회 문턱을 밟아보는 것인가. 감회가 새로웠다.
어찌된 일인지 강대상 중앙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마주한 순간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말았다. 기도하고 싶었고, 눈물이 계속 흘렀다. “학교 홍보를 해야 하는 중대한 일을 앞두고 내가 이러면 안 되지”라며 계속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 자리를 피해 밖으로 뛰쳐나왔다. 세워둔 차 안에서 울었다.
이후로 교회 건물이나 십자가만 봐도 눈물이 났다. 무엇인가 큰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이 불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분명 하나님이 나에게 “빨리 돌아오라”는 강권적인 사인이었다. 그럼에도 왜 계속 그것을 거부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비로소 그 불안함과 마주했다.
2006년 3월, 뉴질랜드에서 한국 사람이 경영하는 유일한 침구학교인 우리 대학을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의료봉사를 계획했다. 해밀턴을 시작으로 로토루아, 오클랜드 등 3개 도시 교민들을 대상으로 한국에서 10여명의 한의사들을 초청해 열기로 했다. 그런데 뉴질랜드에 입국한 한의사들에게 밤새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선생님 한 분과 그의 사위만 남겨놓고 모두들 한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분들과 우리 학교 학생들 그리고 나까지, 남은 기간 동안 열심히 의료 봉사를 펼쳤다. 그리고 7일간의 봉사활동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다. 뉴질랜드 교육국에서 긴급 감사를 하겠다고 통보가 마침 도착했다. 잠시 학교를 비운 새 나에 대한 투서가 교육국을 비롯한 이민성, 노동부에 들어간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현숙 (7) 한의과대 위기로 하나님 다시 영접하는 은혜를
투서 사건 등으로 학생 6명만 남아, 그러나 주님은 내게 또다른 계획을…
뉴질랜드 한의과대 이사장 때의 김현숙 원장. 학교를 운영하며 숱한 어려움을 겪었고, 그 어려움은 다시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됐다.말도 안 되는 투서를 조장한 이는 학교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A교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의 눈에 영주권자도 아닌 사람이 이사장이랍시고 앉아 있는 게 보기 싫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시 A교수는 이민성에 ‘이사장이란 사람이 직원들에게 워크 비자를 돈 받고 팔고 있다’고 편지를 보냈다. 노동부에는 ‘직원들 월급을 착취하고 제때 돈을 주지 않는다’고 써 보냈다. 또한 유학생 관리기관에는 ‘학생들 관리도 안 하면서 돈만 받아 챙겼다’는 식으로 편지를 썼다.
며칠 뒤 교육국에서 긴급 감사를 나왔지만 별다른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너와 학교 관계자 간 다툼으로 생각하고 종료했다. 그런데 오히려 문제는 다른 데서 불거졌다. 편지 내용에 ‘뉴질랜드는 6년제 한의대도 아닌데 유학생들을 불법으로 받았다’고 한 부분이 교육국과 학생들에게 혼란을 안겨줬다.
감사팀은 일일이 학생들을 면담했다. 분명 중국 허난중의대와 우리 학교가 교환학생 형태로 교류하고 학위를 서로 인정하기로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를 신뢰하지 못하는 학생들은 몇 명을 빼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학부모들도 있었지만 학생들의 결정이기 때문에 어쩌지 못했다.
결국 A교수는 자신의 잘못이 탄로 나자 학교를 피해 도망갔다. 학교는 학교대로, 나는 나대로 힘을 잃었다.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까지 막다른 길에 몰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날마다 노동부, 이민성을 불려다니며 조사받으면서 수차례 ‘살고 싶지 않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되뇌었는지 모른다. 그 감정을 억누르고 참았던 건 아이들 때문이다. 훌쩍 커버린 아들은 이미 프로골퍼로 언론에 보도되고 있었다. 그런 아들이 있는데, 어떻게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가. 힘든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한 변호사가 영어 공부도 할 겸 외국인 교회에 나오라고 권면했다. 뉴질랜드에 온 날부터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상담하면서 알게 된 나이 지긋한 변호사였다. 그분에 의해 교회를 다시 나가게 됐다.
2006년 5월 현지인들이 다니는 성공회교회에서 영어로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생겼다. 교민 교회를 찾아갔다. 해밀턴교회를 다니며 비로소 교민들과 교제하고 성경공부도 시작했다.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교민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나였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교회 행사에도 적극 참여했다. 야유회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현재 내가 처한 억울함과 분노, 미움, 원망, 다툼을 성도들이 알기 시작했다. 자기 일처럼 여겨준 그들이 나를 위해 중보기도를 드렸다. 목사님께 건의해 금요 철야기도회도 드렸다.
나의 기도제목은 오로지 학교와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얻었다. 모두 떠나고 남은 학생 6명을 끝으로 2006년 11월 최종 학교 문을 닫기로 결정했다. 더 이상의 회생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혼자 감당하고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새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를 한번 생각해봤다. 다시 생명의 주님이 내 마음에 자리잡고 계셨다. 학교를 정리하는 것을 기점으로 하나님은 나를 향한 또 다른 계획을 하나 둘씩 세워가고 계셨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실 때에 그들의 고통을 돌보시며 그들을 위하여 그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크신 인자하심을 따라 뜻을 돌이키사 그들을 사로잡은 모든 자에게서 긍휼히 여김을 받게 하셨도다.”(시 106:44∼46)
***[역경의 열매] 김현숙 (8) 잿더미가 된 이삿짐 속에서 발견한 성경 한 권
한의과대학 문 닫은 뒤 한의원 개원, 병원 잘될수록 악소문… 주님께 기도를
2011년 2월 요르단 시리아 난민촌에서 침을 놓아주며 의료 봉사를 하고 있는 김현숙 원장.뉴질랜드 한의과대 문을 닫은 뒤 해밀턴을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한의원을 개원할 생각이었다. 2006년 12월, 해밀턴 집을 그대로 비워둔 채 오클랜드로 이사했다. 집이 팔리면 큰 짐들은 그때 옮기기로 하고 우선 한의원 설립에 필요한 짐만 싣고 오클랜드로 향했다.
그런데 이삿짐을 실은 차가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불이 났다며 연락이 왔다. 이삿짐센터 사장님이 밤 11시쯤 전화해 “차에 불이 났는데, 차량 뒤편에 실은 짐이 조금 탄 것 같다. 괜찮은 것 같다”며 안심시켰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다음 날 불난 장소에 가봤다. 조금밖에 손실이 안 됐다는데, 이삿짐 5톤 트럭에 가득 실은 물건 전체가 모두 재로 변해 있었다.
설움이 복받쳤다.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뒤로하고 ‘혹시라도…’ 하는 심정으로 재를 뒤적였다. 그러면서 “내가 이 안에서 무엇을 찾으려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은 정말 계시기나 한 것인가?”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때 뉴질랜드 마오리족 한 남자가 타다 남은 캐리어 하나를 절단해주었다. 가방을 열어보니 물에 젖은 성경책 한 권이 들어 있었다. 한의원 설립에 필요한 의자며 책상, 책들, 각종 의료기기 등은 모두 불타 재로 변했는데 성경책 한 권만 받아들었다. 그 순간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뭔가 뜨거운 것을 느꼈다. 하나님 음성이 가슴속으로부터 들려오는 듯했다. “네가 말씀과 침만 있으면 되지 무엇이 필요하냐.”
해밀턴 집으로 돌아와 가장 빛이 잘 드는 곳에 성경책을 펴놓았다. 서재를 정리하던 중 책상 서랍에서 낡은 책 한 권을 찾았다. 그동안 학교를 운영하면서 여러 명의 침의 대가들을 만나 다양한 종류의 책을 선물로 받았었다. 그러나 바쁘다는 핑계로 그대로 책장에 꽂아둔 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날 발견한 오행침에 관한 책도 그중 하나였다. 관심 있게 책을 읽어나갔다. 침을 놓는 다양한 위치들, 침의 원리가 깨우쳐졌다. 그리고 며칠 뒤 성경책과 침 가방을 챙겨 오클랜드로 왔다. 이후 날마다 새벽기도를 드리며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했다. “말씀과 침만 있으면 되지. 내가 침으로 너를 높이리라.”
오클랜드에 아큐플러스클리닉을 개원해 2007년 새해부터 운영을 시작했다. 한의원과 힐링센터를 겸한 클리닉에는 많은 환자가 찾아왔다. 찬양을 하루 종일 틀어놓았다. 환자를 대할 때는 ‘왜 이러한 병이 왔는지’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들어 설명해줬다. 그리고 침을 놓았을 때 환자들이 놀랍게도 병을 치료했다.
하지만 클리닉이 잘 될수록 근거 없는 소문이 돌았다. 원장이 해밀턴에서 사기를 쳤다, 원장이 한의사 자격증도 없이 한의원을 차렸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었다. 오히려 사기는 내가 당했다. 단 한 명도 피해를 보지 않게 하기 위해 9억원이 넘는 집을 담보로 각종 세금과 교수들 월급, 학생들 지원에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 덕에 나는 빈털터리가 됐다.
또 중국 남양중의대를 졸업했고, 뉴질랜드 침구사협회의 서류 심사를 거쳐 한의학 시험도 치렀다. 당당하게 뉴질랜드 침구사 자격증 및 한의원을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나라에서 환자에게 지급하는 보조금으로 클리닉을 열심히 운영하는데도 불구하고 소문은 끊이지 않았다. 어느 순간, 이런 이야기를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계신데 무슨 걱정을 하는가? 걱정할 게 아무 것도 없었다.
***[역경의 열매] 김현숙 (9) 내 복음 도구는 하나님 창조섭리 따르는 침술
침 하나 들고 무슬림지역 의료선교… 하루 100∼200명 진료, 전도 은사까지
김현숙 원장이 2013년 9월 러시아 다게스탄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하나님은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있어 귀한 것을 깨닫게 하셨다. 병이 생긴 것을 우주의 자연 법칙과 연결지어 설명할 수 있다는 거다.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흙으로 만들어 생령을 불어넣고 간단하게 창조하신 것 같지만 인간의 몸 안에는 엄청난 우주의 비밀이 숨어 있다. 게다가 몸 스스로 일할 수 있는 자가재생 기능도 있다.
동의보감을 보면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라고 한다. 즉 인체의 창조원리를 천지와 상응해보면 참 신비하다. 하늘에 사시(4계절)가 있듯, 사람은 사지(손발)가 있다. 하늘에 다섯 개의 행성(목성 화성 토성 금성 수성)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땅에 육기, 즉 풍(바람) 한(차다) 서(덥다) 습(축축하다) 조(말리다)가 있듯이 인간은 육부가 있다. 하루가 24시간이듯 우주는 소한 대한 입춘 등 24계절로 돌아간다. 우주가 12달로 돌아가듯 사람에게는 십이경락이 있고, 하늘에 해와 달이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다. 우주가 흙으로 덮여 있듯 사람은 살(피부)을 갖고 있고, 초목이 있듯이 털도 있다. 지표의 3분의 2가 바다이듯 인체의 70%는 수분이고, 지구가 오대양 육대주로 구성되어 있듯이 인체도 오장육부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인간은 대우주의 분신이자 소우주이다. 우주 공간에 많은 생명들이 있지만 오직 인간만이 우주의 유전인자를 골고루 균형 있게 받았다. 그러니 의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하더라도 우주의 변화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현대에 발병하는 병들을 쉽게 고칠 수 없다.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사 45:18)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히 돌아가는 지구와 우주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말씀이 절로 이해된다. 하나님의 창조원리와 우주 원리를 깨닫게 되니 침을 놓았을 때 효과도 커졌다. 나는 환자와 마주하면 일단 하나님의 창조섭리부터 전한다. 그리고 병이 왜 생겼는지 창조 원리를 들어 설명한다.
우리 몸은 흙으로 되어 있고, 각각의 오장에는 계절이 있고 컬러도 있다, 성격도 왜 건강상태에 따라 변하는지 등 한의학의 원리로 설명해준다. 실질적으로 침을 통해 치료해 보면 다방면의 병증에 모두 효과가 있다는 것을 경험한다. 대장의 혈자리를 통해 치료하면 치과와 관련된 치료를 할 수 있다. 결막염, 각종 피부질환, 난치성 질환 등도 침으로 얼마든지 치료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을 깊게 만난 이후 한 일이라곤 기도하고 말씀 읽고 예배드리기, 환자 진료가 전부였다. 그러다 우연히 2010년 5월, 한 집사님의 권유로 선교단체인 인터콥 비전스쿨에 참여했다. 더 큰 하나님의 비전을 발견함과 동시에 선교사로 헌신하는 계기가 됐다. 라오스 팔레스타인 요르단 시리아 러시아 등 무슬림 지역에 침 가방 하나 들고 의료선교를 다녔다. 십자가 없는 그 땅에서 복음을 전했다. 침이 복음의 도구였다. 침 두 개로 오수혈 자리(팔꿈치 아래부터 손끝, 오금에서 발끝)에 놓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다. 선교지에 가면 하루에 100∼200명은 치료한다.
2013년 9월 러시아 다게스탄에서 일어난 기적들은 결코 잊지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 장애가 있었던 15세 소년은 침을 맞고 복음이 같이 들어가자 입술이 열렸다.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한 러시아 여성은 눈앞이 환해졌다며 “할렐루야”를 연방 외쳤다.
***[역경의 열매] 김현숙 (10·끝) 이국 땅서 대체의학으로 쓰는 ‘사도행전 29장’
우주 법칙 좇는 컬러테라피 연구 개발… 주님이 주신 재능으로 봉사의 삶 살것
2010년 김현숙 원장의 딸 강나루씨 결혼식 때 아들 동우씨와 함께한 모습. 2007년 이혼한 김 원장은 “내 욕심 때문에 우리 가정을 지키지 못한 게 안타깝다”고 회상했다.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했던가. 자녀들을 잘 키워보겠다는 생각으로 유학과 이민을 꿈꿨지만 우리 가정이 깨지는 아픔을 겪었다. 2007년 남편으로부터 ‘헤어지자’는 이별 통보를 받았다. 가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남편의 마음이 정리된 뒤였다. 사실 요즘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많은 가정이 위기의 순간을 넘기며 살고 있는가. 특히 자녀 유학 등으로 부부가 헤어져야만 하는 상황이 된다면 나는 꼭 충고한다. “부부는 같이 있을 때 부부다. 또 가족은 함께 있을 때 더 아름답다.”
남편은 없지만 하나님은 주위에 많은 사역자들을 붙여주셔서 그 고통을 감당케 하셨다. 다른 은혜를 누리게 하셨다. 자녀들을 한국으로 돌려보낸 뒤 틈틈이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바탕으로 한의학을 공부하고 환자 치료법을 연구했다. 그 결과물이 아큐플러스 오행침, 자율신경계와 한방성형에 대한 책들이다.
2012년에는 ‘컬러테라피’(대원사)도 출간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4)는 말씀을 바탕으로 썼다. 빛의 파장은 보이지 않지만 우주의 만물, 특히 인간의 몸에 가장 큰 영향을 준다. 컬러 역시 한의학에서도 오장육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인체를 대표하는 5가지 색, 즉 흰색과 검정색, 빨강색, 노랑색, 녹색으로 설명할 수 있다. 자신의 오장육부의 허와 실에 따라 몸이 원하는 색상이 달라지는데, 예를 들어 간이 안 좋은 사람은 녹색을, 심장이 안 좋은 사람은 붉은색, 위장이 안 좋은 사람은 노란색, 신장 방광이 안 좋은 사람은 주로 검은색에 끌리거나 그런 색상의 옷을 입는다. 그 이유는 신체의 오장육부에 문제가 생기면 스스로 회복을 위해 선호하는 색상에 끌리기 때문이다.
대체의학의 한 분야인 컬러테라피를 통해 나는 ‘사도행전 29장’을 쓰려고 한다. 솔직히 이국땅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내 부모, 형제자매, 가족이 있는 우리나라로 오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국땅에 혼자 있게 만드시고, 그곳에서 온갖 어려움을 감당케 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 일을 하기 위한 훈련 과정이었음을 고백해본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됐음에, 새로운 사역의 길을 열고 계신다.
요즘 나는 자연 발효 화장품 연구 및 생산에 나섰다. 컬러테라피 원리에 따른 컬러힐링 건강 넥타이, 스카프 등의 생산도 앞두고 있다. 특히 컬러테라피를 강의할 수 있는 기회들이 열려 전국을 다니며 건강 강의를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선교사님들이 침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훈련의 장도 마련 중이다. 잠깐이지만 경기도 오산시 메디컬센터 요양전문병원에서 불치병 연구원으로 봉사하며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때에, 하나님이 주신 재능으로 평생 아픈 이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 그리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병상에서 일어나 그분을 찬양하기를 오늘도 기도해본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편 2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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