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역사의 진실을 알아보자.
태권도의 역사는 해방 이후 현대에 시작된 것으로 고대역사와는 무관하다.
태권도의 직접적인 뿌리는 가라테(= 당수, 공수도)이며,
고대로부터의 우리나라 무술이 순수하게 이어진 것이 아니다.
택견이 태권도가 된 것이 아니다. 택견과 태권도는 전혀 다른 무술이다.
택견은 특유의 품밟기와 유술기법, 발차기 기법이 있으며,
초기의 태권도와 기술체계가 확연히 다르다.
초기의 태권도는 일본의 가라테와 기술체계, 복장, 훈련방법 등이 흡사하다.
태권도가 애초에 가라테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본 글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 1 > 태권도 국기원 부원장 이종우 님의 증언
< 2 > 초기 태권도 9대관의 실상
< 3 >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고 최배달(최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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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태권도 국기원 부원장 이종우 님의 증언
태권도 국기원 부원장인 이종우 님이 증언하였다.
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4/nd2002040010.html
(-------> 이 주소가 신동아의 해당 기사이다.
기사 전문을 보실 분들께서는 복사 떠서 주소란에 넣고 들어가보면 된다.)
이종우 님의 증언에 따르면, 이종우 부원장은 일제시대에 가라테(당시에 불린 명칭은 당수, 공수, 권법)를 배웠다고 한다. 그 가라테가 그대로 태권도로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태권도’라는 명칭은 1955년 4월11일 고 최홍희 총재가 중심이 됐던 ‘명칭제정위원회’에서 결정됐다. 세계적인 권위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도 태권도의 창시자는 최홍희씨로 나와있다.
고 최홍희 님의 증언은 '태권도와 나'라는 회고록에 나와있다.
또한 무술잡지 '마르스'에서 고 최홍희 님을 인터뷰한 기사에도 태권도 창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그 인터뷰 내용은 '마르스' 잡지의 경영자였던 한병철 님의 저서 "고수를 찾아서"에도 실렸다.
최홍희 님은 가라테를 배운 가라테인으로, 택견의 발음을 따서 태권도라는 명칭을 만든 분이다.
최홍희 님이 '택견’을 한문으로 옮기면서 ‘태권(跆拳)’으로 했다.
태권은 지축 태(跆)와 주먹 권(拳)을 합한 뜻이다.
최홍희 님이 부대에서 여러가지를 조합해 무술을 만들었는데, 가라테를 기본으로 만들었다. 최홍희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태권’ 휘호를 신청했는데 대통령은 쉽게 써주지 않았다고 한다.
5·16이 나고 얼마 안 됐을 때, 최홍희가 태권으로 쓰자는 제의했다.
이종우 님이 태권이 뭐냐? 가라테의 변형인데’라고 대꾸했다.
가라테(= 당수·공수)와 태권도를 합해서 태수도라는 말이 나왔다.
광복 직후 한국 무술계엔 수많은 파벌이 존재했다.
그들이 저마다 도장을 열었는데, 상당수가 가라테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종우 부원장은 이들을 통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했고,
엄운규 전부원장 고 이남석씨 등과 함께 실무작업을 맡았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자세히 알고 있다.
광복 이후의 태권도 문파는 지도관 청도관 무덕관 송무관 창무관 오도관…. 거기에서 파생된 유파까지 합치면 9개가 주축이었다.
우선 협회 기준으로 9개관으로 정리했다.
이종우 부원장이 통합관을 주장했다.
을지로 6가에 9개 관이 함께 쓰는 총본관 사무실을 얻었다.
태권도의 역사를 기술한 책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전통무예에서 태권도의 원류를 찾는 부류고, 다른 하나는 광복 이후에 만들어진 신종 무예로 보는 관점이다.
한국태권도계는 오랫동안 전자를 대변해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전통무예와 태권도를 연결시킬 만한 구체적인 물증이 빠져 있다.
반면 후자는 최근 소장파 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들은 “가라테 유입설을 솔직히 인정하고, 그 위에서 가라테의 잔재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현대의 경기화된 태권도는 가라테와 분명한 차이가 있지만, 품세 등에 아직까지 가라테적 요소가 남아 있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많은 태권도 교본들이 태권도의 뿌리를 삼국시대 이전으로 잡고 있다.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하더라도 무리가 따른다.
이종우 님도 과거에는 그런 식으로 책을 썼다고 한다.
초창기에는 태권도를 해외에 보급하는 과정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한국의 전통무술이라고 하면 명분이 서고 보급이 잘 되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사성이 있더라도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것이다.
역사적 원류로 본다면 중국 것이 일본으로 들어갔고 일본 것이 한국으로 들어왔다고 해야 설득력이 있다.
광복이 되고 도장을 연 사람들은 모두 가라테를 했다.
기본기를 놓고 볼 때 이렇게 막는다 저렇게 때린다 하는 건 모두 가라테와 똑같다.
그렇다면 우리 전통무예와의 유사성은 없다는 얘기인가?
언뜻 보기에는 있는 것 같지만, 기본기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사실상 유사성이 없다고 봐야 한다.
광복 이후 태권도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영향을 끼친 무술은 가라테 뿐인가?
다른 것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는가?
그게 솔직한 대답이다.
이종우 님의 고백인즉,
"나도 별의별 것을 다 끌어들여서 책을 쓴 사람이지만, 이제는 밝힐 때가 됐어요. 가라테를 가르치는 관장들이 모여서 태권도의 형틀을 만들었고, 그 실무작업을 제가 했잖아요. 지금은 우리가 세계 정상에 있으니까 밝혀도 큰 문제가 없어요.”
잘 알려진 것처럼 택견은 한국 전통무예를 논할 때 1순위로 등장한다. 그래서 태권도의 역사성을 얘기하는 사람들은 택견과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국 택견의 마지막 명인으로 꼽히는 고 송덕기 옹에게 직접 사사한 도기현(현 택견계승회)씨는 당시 “태권도에 한국적 정서가 반영된 것은 사실이지만, 기술적 측면에서는 가라테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 바 있다.
우리 민족의 무예는 원래 3박자로 움직이는데 비해 태권도는 2박자 운동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태권도는 전통무예라기 보다 일본 무예에 가깝다는 주장이 있다.
택견 입장에서 보자면 올바른 시각이다.
태권도와 택견의 발차기 자세가 어떻게 다른가?
택견의 발차기는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고 곧은 발로 올라가는데 태권도에는 그런 자세가 나오지 않는다.
한국 전통무예 중에 주먹을, 그것도 정권을 지르는 무예가 있었느냐? 이것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기에 대해 이종우 님은 동의한다.
이종우 부원장은 태권도의 경기화를 가장 먼저 추진한 사람이다.
모든 스포츠는 경기화해야만 상품성이 있다는 생각에서 다른 도장들이 품세 수련에 매달릴 때 한발 앞서 겨루기를 도입한 것이다.
태권도에서 겨루기가 시작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겨루기에서는 주먹보다 발차기가 효과적인데, 발차기는 전통적인 일본 가라테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용인대 태권도학과 양진방 교수는 “가라테는 손 동작과 품세를 강조하며 겨루기가 없다. 따라서 발차기 겨루기 경기화 등은 현대 태권도와 가라테의 결정적 차이”라고 말했다. 즉 겨루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태권도가 가라테의 그늘에서 벗어났다는 설명이다.
이상의 글로 태권도와 가라테, 태권도와 택견의 관계를 알 수 있다.
태권도와 택견은 서로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기술이 다르고, 직접적인 전수관계 또한 없다.
반면에 초기 태권도와 가라테는 기술상 완전히 동일하며, 도복도 동일하고, 직접적인 전수(스승과 제자)관계가 있다.
초기 태권도 9대 관장들은 모두 일본 가라데인으로부터 전수한 정통 가라데인이었다.
태권도의 직계조상은 가라테이지 결코 택견이 아니다.
< 2 > 초기 태권도 9대관의 실상
태권도역사 - 태권도의 초창기 도장들
"우리 태권도의 역사"의 기록을 정리한 것이다.
* 태권도 기간도장
1.청도관
2.조선연무관
3.무덕관
4.YMCA권법부(창무관)
5.송무관
6.오도관
7.강덕원
8.한무관
9.정도관
* 태권도 기간도장 (基幹道場:母體館)
1946년 2월 27일 이원국(李元國. 당시35세)에 의해 최초의 태권도 도장인 '청도관(靑濤館)'이 세워진 이후로, 대한태수도협회와 대한태권도협회로 이어지는 태권도의 통합은 1973년 40여개로 난립되던 군소 도장(관)을 9개로 정비하면서 정리된다.
1977년 8월 1일에 태권도총본관이 탄생하면서 대한태권도협회 산하 중앙 본관들이자 기간도장(基幹道場:母體館)들이던 9대 관을 아라비아 숫자로 개칭하는 등 통합이 가시화 되는데, 결국 1978년 8월 5일에 총본관이 폐쇄되고, 이어 동년 10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 공문에 의해 각 관을 폐쇄하게되고 태권도계는 통합되기에 이른다.
태권도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초기 9대 기간도장(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바로 태권도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다.
1. 청 도 관( 靑 濤 館 )
청도관(靑濤館)'은 태권도 최초의 도장이다.
1944년 9월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에서 시작됐다고 하지만,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고 전수를 시작한 시기는 1946년 2월 27일부터라는게 정설이다.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李元國)은 19세 때인 1926년에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중.고교를 거친 뒤 일본 중앙대학 법학과에 진학하는데, 이때 일본 공수도(空手)의 본관(本館)인 '송도관(松濤館.쇼토칸)'에 입문하여 공수도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후나고시(船越)'선생으로부터 가라데를 전수받았다. 이곳에서 그는 '송무관(松武館)'의 창설자인 '노병직(盧秉直)'관장과 함께 가라데를 배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청도관 분관(分館)으로는, 인천을 중심으로 한 강서종의 국무관(國武館), 서울 서대문구 이용우의 정도관(正道館), 광주 고재천의 청룡관(靑龍館)과 최홍희의 오도관(吾道館) 등이 있다.
1대 관장은 이원국(한국전쟁 당시 일본으로 밀항), 2대 관장은 손덕성, 3대는 엄운규이다.
2. 조 선 연 무 관 (朝鮮硏武館.지도관 )
'지도관(智道館)'은 1946년 3월 3일 '전상섭'에 의해 '조선연무관 공수도부'로 출발하였다.
청소년 시절 유도(柔道)를 수련했던 전상섭은 일본 유학시절 가라데를 배웠는데, 1943년 귀국후 서울 소공동에 위치했던 유도학교 조선연무관에서 유도와 가라데를 가르치게 된다. 그 후 해방이 되자 전상섭은 지체없이 '조선연무관'이란 간판을 내걸고 관원을 모집한다.
한국전쟁시 전상섭이 행방불명되면서 조선연무관은 사실상 해체되는데, 당시 지도사범으로 있던 윤쾌병(尹快炳)이 이종우와 명칭을 '지혜로운 길'을 의미하는 '지도관(智道館)'으로 개칭한다.
지도관은 특히 다른 관에 비해 대련(對練:겨루기)을 중시해 70년대까지 각종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도관의 대표적인 분관은 이교윤의 '한무관(韓武館)'이며, 초대관장은 전상섭, 2대 윤쾌병, 3대 이종우 등이다.
3. 무 덕 관 ( 武 德 館 )
무덕관(武德館)은 해방 직후인 1946년 서울 용산역 부근의 철도국에서 '황기(黃
琦)'에 의해 '운수부우회 당수도부'로 출발했다.
황기 관장은 1935년 남만주 철도국에 입사해 그곳에서 국술을 수련했다고 주장
하지만 황기 관장의 무력(武歷)을 방증할 만한 사료가 없어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당시 수련생은 모두 철도국 직원들이었다.
1955년 서울시 중구 동자동 서울역 부근에 무덕관 중앙본관을 신설한 황기는
그해 전국에 9개의 지관(支館)을 신설하고 한중(韓中)친선 국제 당수도 연무대회
를 개최했다.
1960년 무덕관은 53년에 설립한 '대한당수도협회(大韓唐手道協會)'를 '대한수박도회(大韓手博道會)'로 개칭한다.
무덕관은 1965년 3월 김영택과 홍종수가 주축이 돼 황기를 제명하고 통합의 길을 걸었다. 그 후 이강익이 관장직을 맡았고 뒤이어 홍종수, 오세준이 이었다.
무덕관은 기간도장 중 관세(館勢)가 가장 컸다.
4. Y M C A 권 법 부 ( 창 무 관 )
창무관(彰武館)은 해방 후 경성농업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재직하며 조선연무관에서 전상섭과 함께 무도를 가르치던 윤병인(尹炳仁)에 의해 1946년 서울 종로에 위치한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 YMCA권법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었다.
어린 시절 만주에서 '주안파'를 익힌 윤병인 관장은 해방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하면서 가라데를 배웠는데, 무술의 경지가 높아 5단을 인정받는 것은
물론 일본인을 제치고 대학내 가라데부 주장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윤병인은 자신의 중국 무술을 보고 한눈에 매료된 가라데 창시자인 '도야마
간켄'과 서로의 무술을 교류하며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YMCA권법부는 한국전쟁이 끝나자 이남석.김순배가 주축이 되어 '창무관'으로 간판을 바꿔단다. 창무관은 영창고등학교의 '창'자와 무도인의 '무'자를 합해 명명(命名)한 것으로, 두 마리 용을 상징물로 삼았다.
5. 송 무 관 ( 松 武 館 )
송무관은 1946년 노병직(盧秉直)에 의해 개성에서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노병직 관장은 청도관 창설자인 이원국과 일본 유학생 시절, 송도관(松濤館;쇼토칸)의 후나고시 선생 밑에서 함께 가라데를 배웠다. 해방 직전 고향인 개성에 돌아온 그는 당시 궁사장(활터)이었던 관덕정에서 젊은이들에게 심심풀이 삼아 가라데를 가르친 것이 송무관을 창설한 계기였다고 한다.
노병직 관장은 수련생들에게 반드시 1백번 이상 권고대(※주먹단련대)를 치게 한 다음 본격적으로 지도했는데, 4급 이상이면 꼭 실전 대련을 시켰고, 추운 겨울에는 모한수련(冒寒修練)을, 더운 여름엔 모서수련(冒署修練)을 실시한 것으로 유명하다.
6. 오 도 관 ( 吾 道 館 )
오도관은 군(軍) 장성 출신의 최홍희(崔泓熙)와 남태희(南太熙)의 합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최홍희가 1954년 제3군단에 배속되어 있던 용대리 본부에서 오도관을 창설하기 까지는 부관 남태희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남태희는 해방 직후 청도관에 입문, 이원국으로부터 당수도를 배운 뒤 1947년 육군통신학교에서 당수도를 가르친 것이 계기가 되어 군과 인연을 맺는데, 1953년에 제주도 보병 제29사단에 있던 최홍희 장군과 만나게된다.
오도관에는 남태희를 비롯해 백준기.한차교.우종림.고재천.김석규.곽근식 등 청도관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했고, 지도사범도 손덕성.현종명 등 청도관 출신이 주류였다고 한다. 현종명은 1954년부터 10년간 오도관 관장직을 맡았다.(당시 최홍희는 명예관장)
1955년 '태권도'란 명칭을 창안해낸 최홍희는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 대통령의 휘호를 받아내어 본격적으로 전군(全軍)에 태권도를 보급하기에 이른다. 특히 오도관은 월남전쟁으로 1960년대 초부터 태권도 교관단이 파견된 것을 계기로 민간도장과 차별화를 시도하면서 관세(館勢)를 확장시켜 나갔다.
그러나, 오도관은 최홍희가 '국제태권도연맹(I.T.F)'을 창설한 후 일탈행동을 하면서 급격히 퇴조하게 된다. 현종명.곽병오(작고).백준기 등이 관장직을 맡았다.
7. 강덕원 (講德院)
강덕원은 한국전쟁직후 어수선하던 시기인 1956년 YMCA권법부에서 수련한 홍정표와 박철희 두 사람에 의해 창설되었는데 초대 관장은 홍정표다.
강덕원이 창설된 근본적인 배경은 YMCA권법부 창설자인 윤병인 관장이 납북된 이후 권법부를 재건하려던 이남석, 김순배와의 갈등으로 파생되었다.
1956년 서울 신설동에 도장을 마련한 강덕원은 베풀 '강(講)'에 큰 '덕(德)'자를
써서 '덕을 가르치는 집'을 표방했다.
강덕원은 50 중반에 창설된 신생관(新生館)이어서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초창기 관원은 이금홍(현 세계태권도연맹 사무총장)과 훗일 대한태권도협회 5대 회장을 맡아 태권도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김용채를 비롯, 정화.이정후.이강희.한정일.김병수.지승원.임복진 등이다.
8. 한무관 (韓武館)
1956년 8월 이교윤 관장이 창설한 한무관은 50년대 중반부터 생기기 시작한 신생관의 선두주자라 할 수 있다.
당시 권투, 유도, 레슬링, 역도, 펜싱 등을 가르치는 종합체육관이던 한국체육관
의 부관장인 이상묵의 허락을 얻어 당수도를 가르친 이교윤은 1년만에 2백명 이
상의 수련생을 확보했는데, 이 과정에서 지도관 관장이던 이종우와 갈등이 증폭
되자 이상묵의 제의로 지도를 중지하게 된다.
그 후로 이교윤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 강문고등학교 뒷편 공터에 한무관 간판을 내걸고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는데 이 것이 한무관이 생기게 된 발판이었다고 한다.
1969년에는 중앙도장을 서울 왕십리에 개관한다.
9. 정도관 (正道館)
정도관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청도관 출신인 이용우(현 국기원 심사위원)에 의해 서울 서대문 로터리에 중앙본관이 개관되었다. 정도관은 모체관인 청도관과 이렇다 할 마찰없이 관을 개설했다는게 여느 신흥관의 파생과정과 다른 점이다.
'나는 떳떳하고 부끄러움이 없는 무도인이다'라는 관훈의 정도관은 1960년대 중반부터 마산, 울산, 차원, 목포, 김제 등지에 지관을 개관하며 관세를 확장해나갔다.
< 3 > 극진 가라테의 창시자 고 최배달(최영의)
태권도 역사와 관련되어 거론되는 인물로 극진가라테의 창시자 고 최배달(최영의, 일본명 오오야마 마쓰다츠) 선생이 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에서 반일감정으로 인하여 최배달 선생의 극진가라테를 태권도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최배달 선생이 수련하고 창시한 무술은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테였다.
최배달 선생이 집필한 극진 가라테 교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가라테 기술과 일본 가라테의 전통적인 훈련법들이 나오고, 가라테의 역사, 세계 무술의 역사 등에 대한 논술이 자세히 나온다.
일본의 쇠나막신(게다) 훈련법도 그 중의 일부이다.
바로 이 최배달 선생의 극진 가라테 교본이 우리나라에서 태권도 교본으로 둔갑하여 출판된 시절이 있다. 초기 태권도와 가라테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게다 훈련법처럼 일본색이 확연한 부분은 삭제했다)
초기 태권도와 오늘날 태권도는 품세가 확연히 다르다.
초기의 가라테에서 우리만의 태권도로 진화한 그간의 사정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최배달 선생의 무술의 기본은 역시 가라테일 수 밖에 없었다.
최배달 선생은 일본에서 살면서 가라테 도장에 입관하여 정식으로 가라테를 수련한 정통 가라테인이다.
최배달 선생의 아들인 범수화 님의 저서 "This is 최배달"에 따르면, 최배달 님은 1942년 타쿠쇼쿠 대학에 입학하여 근대 가라테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후나고시 키친(송도관 창시자)의 사설도장에서 2년 동안 운동을 했다.
그 무렵에 미야기 초주뉴(1888-1953)의 제자인 조선사람 조형주를 만나 강유류 가라테를 접했다.
최배달 선생은 실전경험과 무술연구를 통해 가라테를 발전시켜 극진 가라테라는 자신의 유파를 창시했다.
최배달 선생은 한 때 우리나라 태권도와 극진 가라테를 통합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도 있다. 통합 도복까지 준비한 상황에서 우리나라 태권도계의 분열상황을 보고 통합을 포기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초기 태권도와 가라테가 유사한 무술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시도였다.
이상의 글은 다음의 도서를 근거로 작성했다.
"우리 태권도의 역사"
강원식, 이경명 지음 | 상아기획
"택견 연구" - 개정판 이용복 | 학민사
"태권도철학의 구성원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펴냄 | 1999년 04월 01일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도기현 지음
동재 펴냄
"실전 공수도 교범"
최영의(최배달) 지음 /서림문화사
만화 "바람의 파이터" 방학기 작화.
만화 "대야망" 고우영 작화.
만화 "무한의 파이터"(국내 발간명) 지로 쯔노다 작화. 이끼 카지와라 스토리.
"This is 최배달" 범수화(최배달의 아들) 지음.
찬우물.
"고수를 찾아서" 한병철 지음
영언문화사
출처 : 신동아 기사 http://www2.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4/nd200204001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