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護國의 英雄 三世代 容安(三世代五忠烈) 考
金容도
1,머릿말
필자가 "삼세 오충열"[三世代五忠烈]의 위대한 삶의 실상을 알게 된 것은 삼세오충열이 모셔져있는 익산시 용안을, 이곳 출신인 이종화 선생과 종친 회장 오수만 선생의 안내 를 받아 답사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여러 문헌을 통해 이 호국의 영웅들의 생애를 간단하게 상고하고자 한다 이 글은 마한 향토사연구회 제 6차 월례발표회 (1998.6.20토)에서 주죄발표한 내용이다
[三世代五忠烈]이란 조선왕조 5백년사에 최대의 국난인 임진왜란,병자호란을 당해서 父.子.孫 3대에 걸쳐서 신명을 다하여 나라를 위해 침략자와 싸워생명을 바친 다섯분의 순국영웅을 말한다 해주 오씨인 응정 과 그의 아들 욱 .동량.그의 유복자 직 그리고 손자인 방언 은 우리민족과 국가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 추앙되는 애국과 애족의 사표로 남아있다
5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주변 외래민족의 그 숱한 침략속에 굴욕과 치욕을 겪으면서, 국가적 명맥을 이어온 것은 위기 때마다 민초들과 운명을 같이하면서 이들을 조직하고 멸사봉공했던 지도자의 역활이 컸다 이러한 군사지도자의 귀감으로 우리 역사에 혜아릴 수 없이 많다 임진 왜란때 왜적과 싸워 부자가 함께 순절한 분으로 이순신.조현.고경명.등이 있으나 한 가문에서 부.자.손 3대에 걸쳐 이어 다섯장수가 순국한 경우는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다 삼세 五충열들은 조선왕조를 개창한 왕족도,창업 공신들의 후예도 아니다.민초들과
호흡하면서 내고장에 대한 끈끈한 애착을 가지고 용안에 세거한 향토인들이며 특히 5충열의 중심인물인 응정은 언제나 강직하고 합리적인 무반관료로서 철저한 비 당파적 인물이였으며
선조임금에게 파당적 관료들의 추악한 싸움에대해서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밀려나 오랜세월을 초야에서 나라의 장래를 걱장하면서 내일을 준비했었던인물이었다
그리고 국가가 위기에 쳐했을때 .출사하여 목숨을 바쳐 순절했다 5충열은 우리가 이 땅에서 제한된 기간에 삶을 사는 우리 인간이어떻게 자기의 삶을 의미있게 마치는가를 보여주었다.특히정유재란 말기 남원성 혈전에서 응정 父 .욱.동량.3부자가 결사적으로 싸우면서 전세가 위급하자 같이 화약고에 뛰어들어 장열하게 순절했다 사실1579선조30년 8월16일 은 후세인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한다. '왜 당시 용정 父 자신은 왜적을향해 죽기로결심하고 항전하면서 자식들에게 너희는 살아서 애비의 원수를 갚고 후일을 도모하기위해 몸을 나려 피하라고 하지않고 같이 순국 했을까',여기에 대해서는 물론 여러해석이 있을 수 있겠으나.필자의 판단으로는 후세의 명성이나 자손의 안일을 염두에 두지않은 철저한 결사보국의 정신의 실천으로 생각된다.
二.빛나는 가계와 약전
五충열은 본관이 해주 오씨이다.
해주 오씨의 시조는 인유 이다 해주오히를 포함한 범오씨의 대동종문의 각파의 시조 들은 삼국시대 중기 중국의 五호 16국 남북조 시대 에 한반도에 집단적으로 이주 하였다 이러한 오씨문중은 고려 주기 이후 현신용장을 다수 배출하였다
그중에서 오연총 장군.오세재.오인택장군.유신 오희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오연총은 고려조 예종때 장군으로 문무를 겸전한 인물로 지추밀원어사대부 한림학사 승지 등의 정3품직에 있으면서 윤관 장군과 함께 여진토벌의 부원수로 참전하여 구가 방위에 수차 큰 공을 세웠으며
변방의 치안과 민생안정에 기여 하였다.
이후 고려 고조 고종 초에는 거란의 침략이 있을 때 당시 오씨문중의 다섯장군의 활약이 컸다 상장군 정2품 오응부.별초군대장.오응유.상장군.오인영. 상장군 오효정.상장군 오수기 등이다.이들은 거란과의 전쟁에서 우군병마사로.좌군병마사로 더러는 .유격장으로 중군병마사로 활약하다가 공을 세우고 장열하게 전사하기도 하였다.
또한 고려 고종때 .한림학사 오학린 의 가문은 대대로 업으로 유학을 삼았으나 그 손자 세공. 세문 .세재.의 암형제가 모두 큰 문장가 였으며 .맨끝 세재가 그중 가장 뛰어났다.(고종때의 주서시랑 평장사최자 1188~1260)의 보한집에 기록)그 가운데 오제세는 고려중기의 최충헌의 4대에 걸친 무단정치에 항절한 강좌 7현의 한 분이다.그는 청빈과 의기의 인물로 당대의 이규보도 그를 추모하는 추도문을 지었다 한다.이들 오세재는 본관이 다른 고창 오씨였다
고려말기에 이르러 공민왕때 해주오씨의 충절의 가통을 이은 인물은 오인택 장군과 오희 간관 이었다.
오인택 장군은 홍건적의 토벌.기용의 홍왕사역모를 진압하는 등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였으나 당시 지도첨의 정2품 )로서 요승 신동의 왕건전횡을 규탄하는 상소를 했다가누명을 쓰고 상주로 유배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한편 오희는 공민왕 4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간관으로 공민왕의 비정을 바로잡기위하여 극간 하다가 두차례나 파직을 당하고 귀양살이까지 당하였다.공양왕 2년에 (이때는 이성계가 궈녁을 장악한시기)다시 정 6품의 좌정언으로 부름을 받아 출사 했으나.고려 왕조의 몰락을 눈앞에보고 낙향하였다.이후 이성계가 고려 왕조를 멸하고 새 왕조를 개창하면서 거듭 출사를 요구했으나 이군분하의 절의를 지켜 끝내 응 하지 않자 오희릇ㄴ 서인으로 신분을 격하시키고 개경에서 전라도의 낭산형(지금의 익산군 낭산면)으로 추방했다.
오희 (1332~1401년 조선조 태종1년)가 바로 삼세5충열의 중심인물인 오응정 장군의 7대조이며..고려말 두문동 72충신의 한분이다.오희는 고려조의 정통유신의 한 사람으로.항절로서 71세의 생애를 마쳤다.그의 상례때 선산 금오산에 있던 길재 '야은'이 조문을 왔을 정도로 그의 이름이 당시에 높았다 한다.
오희는 그의 아들 이름을 사고 라 짓고 자는 무위라 지었다 이는 논어엣있는 '사의고정이무위'라는 뜻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옛조정의 의 를 생각하고 여기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뜻일게다 .또는 무위 효도의 뜻과 상고의 뜻을 합친 것으로도 해석된다.오희의 아들 사고는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향리에 은거하며 효행과 덕행을 쌓았으며 사서와 경악에 뛰어나.조선조 태종이 동궁의 강관으로 청빙할 정도였으나 끝내 춧ㄴ사하지않아 '오씨세절'로 세간의 추앙을 받았다.후에 태종은 그의 고절을 높이사 정포를 내렸다 한다 그가 사는 향리는 또한 호여동이라 불리워졌다.
오희의 증손인 석근 대에와서 낭산 에서 지금의 용안 익산군 용안면에 이주하고 문과에 응시해 급제하고 관직에 나아가게된다.벼슬이 시복시 정3품 당하관에 이르러 가문의 복권이 이루어진다.
그후 5대손 식은 사간원 정원을 지냈고 6대손 하몽은 무과에 급제한후 한양에서 무반직에 있다가 제주도의 정의현과 전라도의 무안 현의 현감으로 외관직을 역임하고 용안으로 은퇴했다.
하몽은 슬하에 응시.응운.응태.응기.응정.의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5형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각각 자기소임과 직분으로 국가에 봉사했다.
오하몽의 장남 응시는 성균관 향시에 급제하여 진사로 향리에남아 가업을 지켰고 둘째인 응운은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때 궁내의 봉상시 의 주부 종6품 로 선조의 의주 몽진시 어가를 보필한 공으로 선무원종 1등으로 포복 되었으며
그뒤 전의 현감을 지냈다.
섯째 응태는 무과에 급제하여 울주 진주 및ㅇ청주의 진영장을 두루 역임하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경원부사
정유재란시에는 함경도 북병마절도사 .남병사로 활약했으며 .전쟁중에 도총부 부총관 종2품 정원 5명으로 임명되어 정유재란시에 군사 총 감독이되어 전지를 동분서주 하였으며 남원성이 함락된 직후에는 전라도 병마절도사와 전주 부윤으로 위기에처한 호남을방어하는데 전력을다했다.전쟁이 끝난 후 무반으로서의 최고 영예인 효충보조위무공신으로 책록 되었으며 .넷째인 응기는 무과에급제 전란시에는 절충첨사로 변진에서 수장으로 활약했다.
그리고 다섯째로 태어난 응정은 하몽의 유복자이다
그는백힝응시의 후견으로 성장했다.응정이 바로 삼세 5충열의 중심 인물이다.
가계보
희ㅡ사고ㅡ영우ㅡ석근ㅡ치ㅡ하몽
응시
응 운
응태
응기
응정
1548~1597
욱
1569~1597
직ㅡ 방언ㅡ1594 ~1637
1574~1619
동량 ㅡ1572~1597
(2) 三世五忠烈의 약전
^@오응정 (1548~1597)
자는 문중 호는 완월당이며 명종3년(1548)에
용안 현 에서 출생하였다
유년시 부터 의표가 비범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장래 큰 인물이 될 것이 기대되었다.
선조 7년 27세때 무과에 등제 비변사의 랑관으로 선발 그뒤 사헌부 감찰 형조정랑.군기검정을 순차로
역임하는 중에 조정에 당파싸움을 중지할 것을 역설하는 상소르냈다가 흥덕현감으로 밀려나자 낙향하여 임진왜란 직전까지 8년을 야인으로 독서하며 삼남일대를 주유천하 하면서 유유자적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을 예상하고 스스로 결단하여 소관말직인 의영 고주부에서 시작하여 도총부도사.
강화부사.경기방어사를 순차로 역임하고 정유 재란시에는 순천부사로 남원전투에 출전하여 명나라장수 양원의 실행을 힐책하고 진두에서서 분전하였으나 아군이 괴멸하자 그의 장자 욱 과 동량 두 아들과 함께 화약 고를 터뜨려 장열한 최후를 마쳤다 이때가 선조 30년 (1597)8월16일 이었다.
(향년50세)초혼으로 용안에 귀장하였다.
조정에서는 예관을 보내어 치찰하고 병조판서로 증직하고 복절 장의영국공신으로 포충 하였다
불도의 사전으로 해마다 춘추에 제우를 하사하고
향리에 방상했다.조선조 중기의 거유 심암 송시열이 전기를짓고 현석 박세채가 신도비문을 엮었을정도로 그는 국가적 인물이였다.
용안을 위시하여 남원과 금산 충열사에 배향했다.
오욱(1569~1597)
응정의 장자 (이씨부인 소생)로 용안에서 출생하여
무과에 급제 하여 충무 위부사정이 되었다.정유재란때
부친 오응정을 따라 남원 전투에 참여 하였으나 .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위급해지자 부친과 함께 화약고에 뛰어들어 산화 하였다.조정에서는 호조좌랑을 중직하고 복절영국공신의 훈호를 추중.
향리에 방장되고 용안과 금산충열사에 배향되었다.
오동량(1572~1597)
용정의 아들(박씨부인 소생)로 용안에서 출생.자는 사운.호는 운ㅇ 무과급제하여 비변랑 겸 선전관.상의원주부를 지냈다.장성창의에 가담 하였으며 .정유재란시 순천부사로 부임하는 부친과 형 욱을 만나 남원성 싸움에 출전하여 부친과 형 욱과 함께 삼부자가 순절했다.(1597년8월16일).
조정에서는 선무원종일등공신 으로 포충했다.
오직(1574~1619)
선조7년(1574)용안에서 출생 .문장이 뛰어나 15세에
성균관 진사가되었으나 .남아가 할 일은 무반이라 생각하여 다시 무예를익히고 병법을 익혀 20세에 무과에급제 .이후 중부인 북도병마절도사 응태를 따라 군진에 참여했다.
22세때 내선겸 비벼낭(종6품)에 승진되어 의주에 선조를 ㅇ종하였다.
그는 일찍이 군기주부로 재임시에 남과 북에서 외침의 방어를 논하는 '남북 어적책'을 조정에 올리고 조정의 인정을 받아 44세에 도총부도사가 되었다.
45세 되던해 ㅁ ㅇ이 발호하므로 원사 강홍립이 호적에게 항복하자 격분하여 좌영장 김응하와 더불어
부차 에서 적을 무찌른 후 전사하였다.
이때가 광해군 11년 3월4일 (향년46)세였다.
小혼으로 용안에 귀장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순절을 높이사 선무원종일등공신으로 ㅇ충하고 병조판서를 증직하였다.현석 박세채가 묘지를즛고 용안과 금산의 충열사에 배향했다.
오방언(1594~1637)
선조27년(1594)오ㅇ의 장남으로 용안에서 출생 자는 길보 호는 순풍정.25세에 무과에 등과하였다.
인조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부친의 원수를갚고자 선전관으로 지원 .참전하여 남한산성에서 ㅇ화의 선보메섰으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자 '나라의 수치를 씻지 못하고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늘아래 살겠느냐' 고 통분한끝에 인조 15년 2월1일 샛강에서 투신 절사하였다.(향년44세)
인조는 이를 가상히 여겨 유해를 거두어 용안에 귀장케했으며 부인 진주정씨 또한 비통 끝에 관을 껴안고 절사하였다.
조정에서는 오방언을 좌승지로 증직하고 영국원종일등공신으로 포록하고 향리에 ㅇㅇ되었다
三.오응정장군의 위대한 생애
삼세오충열중에서 오응정 장군은 참으로 입지전적이고 영웅적이다.오응정의 생애는 50세의 짧은 세월이였다.인간적으로 지천명할 50세의 문턱에 들어서자마자 순절했기때문에 좀더 살아서 많은 일들을 하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갖게한다
더욱이 그가 27세에 무과에 등과 하기까지 준비하는 세월을 제외하면 그의 사회적 활동은 23년간이였고또한 자의반 타의반 재야에서 야인으로 청풍명월을 벗삼아 독서하고 주유천하했던 8년을 제하면 그의 공직생활은 불과15년 밖에되지않는다.
이 15년간의 공직생활을 추적해 볼때 그의 위대한 행적에서는 뚜렸한 몇가지 특징을 찾아 볼 수 있다.
쩟째 그의 공직생활은 스스로 결단하고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그것을 기반으로해서 개척한 철저한 전문 과뇨였다.그리고 무반이면서 보다폭넓은 유가적 식견과 .치국 방약을 터득한 경세가였다.
그러나 그의 행동반경을 무관으로 한정하였다.
그는 한성에 출몰한 호랑이를 직접 잡아 국왕으로부터
포상을 받을정도로 용력과ㅈ담력을 가졌으나. 문신이 주도하는 조정공론에 참여할 기회가 드물었지만 .당시 동서 붕당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속에서 애써 중도적인 입장에서 동인과 서인을 화합 시키려 했던 이율곡의 입장을 지지하고 흠모했다.
당파적 행위로 득세와 몰락의 희비가 교차될때 .항상 불편 부당한 입장에 있었기때문에 한때 반짝이는 정승판서의 반열에도 오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신조를 지키면서 권력에 편승하지않고 부유같은 세상을 객관화시켜 살필 수 있었다.둘째 그의 무반으로서 첫 임지는 북변의 반포진 에서 강계의 진루를 사이에두고 흐르는 압로캉의 지류인 독로강의 강구와 ㅇ진을 지키는 작은 보루의 책임자였다. 이른바 관료 18등급의 맨하위직인 종9품의 별장직이 였다.
이러한 변방의 말직에서 시작하여 종8품의 봉사 .정7품의참군.그리고 과거에급제한지 3년만에 비편사의 종 6품의 비변랑으로 승진하였다.
실로 북변의 최전방에서 벽지 근무를 하면서 국토방위의 실상을 철저하게 경험한 후 비변사의 실무 요직인 비변랑이된것이다
비변사란 명종2년에 창설된 국가 안보를 총괄하는 기관으로.전란시에는 의정부의 기능을 대신하는 역활을 했으며 그 총 책임자는 정 1품의 도제조 로 영의정이 직접 맡았으며 무반의 훈련대장 .어영대장.
팔도의병마절도사.수군통제사 등으로부터 직ㆍ간접적인 상황보고를 받고 또한 중앙에서 명령을 하단하는 기관이다.
비변사의 실무 핵심기관인 랑청에 근무하는 비변랑은 20 명 혹은 13명 이었으며 .비변랑은 무관이 9명 나머지는 문관이 임몀되었다. 27세에 급제해서 만3년이 채 안되어 국방실무핵심인 요직인 종6품의 비변랑에 오르는 것은 참으로 초고속 승진이다.
그의나이30세 이어 사헌부의 감찰 형조정랑중 하나 (4명의정랑중하나. 정5품직)으로 승진하였다.(32세)
응정은변방의 일선 군사지휘권직에서 북방주민의 민정을 직접 체험했고 또한 형조의 정랑으로 억울한 옥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여 민원을 없애고 형률을 공정하게 적용 하려 하는데 심혈을기우렸다.
또한 형조에 자리를 옮긴지 몣 달이 채 안되어 병조의 군기시 첨정종4품 으로 승진하였다.
이는 각종 병기를 제조 ㆍ관리하는 오늘의 무기제조창과 같은 기관이다.
응정의 나이 32세에 중앙에 아무런 배경도 없는 그로서는 파격적인승진이였다.이는 그의 탁월한 군사적 실천능력과 무기제조에 관한 전문적 식견 때문에 발탁된것이다.
임진왜란이 나기전에 일찍이 그는 화기나 화차.
유격용 병선 건설을 건의한 바 있다.
그는 병기나 군사대책에 관한 문제에서 한걸음 나아가 조정의 세도 싸움과 당파싸움에 대한 거로을 벽狀을 올렸다.
이것이 문제가 되어 홍덕 현감의 외관직으로 내 쫏겼는데 .그는 부임하지 않고 향리에 들어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수년 전에 병란을 예상하고
스스로 자리를 털고 국난 극복을 위해 관계에 복귀하기까지 8년간을 재야에서 준비하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이는 위대한 공인으로서 토인비(Toynbee)의 논리인 '引退(Withdrawal)와 복귀(Return)"를 참으로 잘 조율한 것이다.
섯조 21년 9월 그에게 다시 부여된 직책은 8년전 낙향할때의 종 4품보다 네단계나 하위인 종6품직 인데다가 호조의 의영고 주부 직으로 보직밭아 궁중에서 사용하는 식품류의 출납을 담당하는 자리여서 눅부신 활약을 해야할 그로써는 참으로 그의 능력에 걸맞지않는 어처구니없는 보직이였다.
또한 요새말로 정부 차관보급 정도 벼슬을 하다 그만둔 뒤에 8년 있다가 정부부처의 계장급 정도로 다시 발령받았다면 일반적인 통념으로 누가 일 하겠는가.이는 대단한 결단이요 용기와 자기 확신이 없으면 감히 할 수 없는일이다.
그러나 응정은 채 1개월도 안되어 오이도총부 종 5품의 직으로 발탁 되었으며 연말에는 그가 좌천당하여 퇴직할때의 직급인 종4품 경력 직으로 승진되어 삼남지역의 지방관료의 치적과 민정을 순검하는 일종의 암행어사의 직무를 수행했다.
지방을 순회하는 동안 충청의 ㅇ천 현감의 부정.영남의 거창군 저리 의 부패 등을 척결하고 하삼도의 민심을 크게 윙수하였다.
선조 25년 임진년에는 대동강의 수탄장 종3품으로 임명되어 왕성탄 여울의 전투에 참여 하였다.
선조 30년 오응정이 그의 생애를 마감하는 최후의 격전지 나원성 전투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오응정이 남해의 요충지인 순천 방어를 위해 순천 부사의 직함을 받고 부임 하는 도중에 순천이 적의 수중에ㅈ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남원 전투가 호남 방위에 대단히 중요 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남원성 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조강장.김경로 등과 합류했다.
그러나 남원성 전투를 총 지휘했던 명의 장군 양원은 주색을 탐 하면서 전투에는 소극적이였고 오응정 장군에게는 작전지휘상의 어떠한 책임부서도 맡기지않고 임의로 싸우도록 따돌렸다 .
당시 와적은 동쪽 운봉으로 쳐들어온 우희다수가 .봉주하가정.가등가명등 3만명의 병력과 서남으로 쳐들어온 소서행장 .도진의홍.동당교호 등의 군사 2만6천명 등 도합 6만명에 가까운 규모 였으나 .
이쪽은 명군이 3천명 .아군은 의병과 병사를 모두 합쳐 4천의 병력 이였다.
아군이 수적으로 아주 열세인데다가 남원 성은 동.북. 서 가 모두 야산으로 에워쌓인 낮은 분지 였으므로 지형적으로 수성하기에 매우 분리한데다가 .명.조의
연합 총사령관 양원의 전의 상실로 패전이 눈앞에 훤히 보였다. 이러한 정황속에서 지휘권도 없는 역전의 명장인 오응정은 오롭고 참담한 심정으로
그의 두 아들과 함께 분사ㆍ순절하였다.
역사에 가정이란 별 의미가 없지만 만일 그와 같은 명장에게 그의 능력에 합당한 상 위의 군 지휘권을 부여했다면 해전에서 마지막으로 마치 이순신에게 최고지휘권을 부여했듯이 남원성 전투의 결과는 달라질 수 도 있지않았겠는가 하는 가정도 해본다.
그렇다면 그는 충무공 이순신 이상으로 우리 민족의 정신에 더욱 깊이 더욱 크게 새겨졌을 것이다.
셋째 오응정이 27세에 무과 급제해서 50세에 순절하기까지 23년 기간 중에 8년의 재야생활을
빼고나면 무반으로서의 공직생활이 15년 밖에되지않는다.그처럼 치열하고 압축된 멸사봉공 의
나라사랑.계례 사랑의 삶을 산 사람은 우리 역사에 없을것이다. 이러한 오응정 장군의 삶은 사람이 얼마나 장수했느냐 보다는 얼마나 질 높은 강도높은 삶을 사느냐 하는것이 중요 하다는것을 우리에게 교훈적으로 말해주고있다.
四 .삼세오충열사의 복원 사업과 호국 성역화
오응정 장군과 그의 세 아들.한 손자의 순절에 대해서 순절 당시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높이 찬양하고 공신으로 ㅇ충하고 ㅇ시를 내리고 충열사를 나라에서 셰우고 오랜세월 추앙 하였으며.이후 애국심을 함양하는 도장으로 삼았다 .특히 용안을 위시하여 남원 금산의 충열사에 배향되었고 그 사적은 왕족의실록을 비롯하여 여지승람등 가가종 사록과 읍지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족적 유적이 조선조 말엽의 혼미한
시대상과 일제식민통치의 호국 정신 말살정책으로 사우누 크게 훼손되었다.이후ㅈ퇴락한채로 방치되어있어 뜻있는 사람들의 통분을 자아내게 했다.이러한 사정을 안타깝게 생각한 용안의 유지 유림들이 사우를 복원하려는 모임을 가졌으나.한 면의 힘으로는 힘이 벅찬 거대한 사업이었으므로 1980년 이 고장의 지도자이며 전북애향운동 총재 이춘기 선생이 삼세오충열사 복원사업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복원사업을 벌였다.그결과 정부의 배려로 묘역의 확장과 기념비와 기념관이 건립되어 면모를 일신하여 애국사상과 국민정신을 함양하는 만고에 비빛나는 도장으로 삼게되었다.
삼세오충열사 복원사업내역
1.1980년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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