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연
이러한 시도가 가치가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확신하지만 나 혼자 설친다고 될 일도 아니라서 걱정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억지가 될지도 모르겠다.
도를 닦는다는 것이 초월을 하기 위한 것이거나 영생불사나 신선되어 초탈하고 싶은 생각으로 하기도 한다. 이러면 곤란하다고 말을 했으며 그 이유로는 당연히 도를 공부한다는 것은 학문을 닦는 것이고, 학문을 닦는 것은 그로 인해 세상에 이득을 주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직업교육이 대세인 이 시대에 이런 말 자체가 필요성이 적긴 하지만 그래서 지금의 자천하는 사람들이 해야 할 사명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잘못된 학문론이나 지식에 대한 전환도 해야 하고 수도에 대한 오해나 곡해되어진 것을 바로잡는 것도 해야 한다.
세상에 이득을 준다는 것은 경제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실존에 대한 의미를 알기 위한 것이 더 근원적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가 사는 의미나 이 세상에 대한 의미도 모르는 우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것을 알기 위해 수도하고 호흡하고 주문을 외우고 명상 같은 것을 해온 것이지 개인의 안락과 세속적 욕구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도의 의미가 비참할 것이다.
또 다른 자천하는 이유를 든다면 일종의 서양식 인식론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같은 것은 아니고 인식하는 방법은 다르다.
나는 ‘곤연’이라고 하는데, 곤연이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사물을 알 수 있을까?’ 하는 간단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궁구하는 것이며 그 행위이다. 우리가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고 합일이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질문은 간단하지만 대답은 결코 간단하지 않아서 생각할수록 어려운 문제다.
과학이 진리에 대한 추구라면 진리가 사물 자체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 이미 우리는 물질을 알 수 있다고 명확하게 주장할 수 없는 것에 별다른 거부를 못 느끼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구성되었고 이러저러하다고 말하지만 정말 그렇게 되어 있냐고 한 번 더 묻는다면 그것은 과학의 주장이지 그 진실에 대한 근거는 충분하지 않다.
과학적 방법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객관적이라고 해도 이런 말이 인간의 주관적 논리라는 한계는 넘을 수 없다. 과학이 우리에게 근원적 지식을 가져다주었을까? 신이 있는지 또는 무엇인지 하늘과 우주의 지식을 알려준 것이 정말로 나의 지적 추구를 만족하게 했나? 그저 위안을 삼은 것 정도이지는 않을까? 빅뱅이나 블랙홀을 말해도 우리가 우주에서 원하는 것이 그런 현상이나 사물의 해석일 뿐이던가? 이제는 이론 물리학으로 가설을 말할 뿐 확신은 없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주고 있는 것일까?
사물을 어떻게 구성되었다고 말한다는 것은 사물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모습을 형용하는 것이다. 구성된 것을 알거나 하는 행동을 따라한다고 해서 그 사물을 안다고 할 수는 없다.
안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H2O의 분자식과 이 분자를 더 세분해서 원자, 전자를 말하고 양성자나 중성자나 쿼크까지 들어가도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물일 뿐이다.
물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 그리도 힘든 것이었나?
물이 무엇일까? 마시는 것? 흐르는 것? 액체? 투명하고, 비도 되고, 강도 되고, 바다도 되며, 아래로 흐르고, 없으면 우리가 살 수 없는 필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이 물을 아는 것일까? 알고 싶지만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해야 안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사물이 우리의 앎의 대상인지도 헷갈리고, 과학이나 철학이나 그 많은 학문들이 우리의 앎의 지평을 넓히고 나아가게 하며 정말로 우리의 앎에 이바지는 한 것일까??
안다는 것은 우리에게 세상의 경이로움과 내적인 확연한 얻음이 있는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세상의 지식인데 나와 무관하거나 소외된 지식이어서는 안 되며 필연적인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자천은 우리가 알기 위한 것이고 누구나 알아가야 하는 것이며 세상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단순히 몇몇만이 하는 것도 아니고 모든 만물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과정이다. 알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다.
상식적으로 사람들에게 아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면 뭐라고 대답할까? 단순한 것이고 누구나 알려고 공부하며 학교도 다니면서 그 압박과 스트레스로 시달렸지만 정작 중요한 안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생각은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다.
인식론이 무엇이고 과학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내가 일일이 설명할 정도로 알지는 못한다. 나는 우리식, 혹은 내식의 사물인식에 대한 생각을 말하고 싶다. 이미 여러 곳에서 말을 했고 또 말할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늘을 안다고 하면 하늘과 합일하면서 내가 하늘이란 것을 체험해야 하고 그 전에 하늘의 경계와 한계와 역할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즉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가 될 그것의 최소한의 한계와 역할에 대한 이해는 있어야 한다. 합일은 그것과 같은 공간적 크기가 있고 또 그 하는 일이 같아야 하는 시간적 작용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완전한 합일이라고 할 때의 완전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한다면, 나는 완전과 합일해 보고 그 다음에 무엇인지 알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전이 무엇일까? 완전과 합일은 어떻게 하지? 이런 추상적인 것과 합일한다는 것은 물질과 합일한다는 것과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셨나요? 안 해봤다면 해보세요.
너무 보이는 사물에 대한 관심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도 하고요.
단순히 일상의 사물을 안다, 모른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도 들어가 궁구를 하다 보면 결국은 궁극의 근원적 무언가를 상정하고 그것을 알 수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하늘, 신, 우주, 초월되어 있어 초월되지 않은 이 세계를 창조하는 그 힘을 알려는 것인데 초월된 무언가가 초월되지 않은 것을 만들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 들긴 하는데 그래서 초월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이것은 의식도 초월로 볼 것인지 현상의 일부러 볼 것인지도 사람마다 다르게 보기도 한다.
나는 하늘이든 신이든 그런 것을 안다고 말하려면 그것과 합일하고 그것이 된 후에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이 된다고 말하면 가당치 않게 볼지도 모르지만 그러면 이미 자신의 가능성과 삶의 의미에 대한 추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선을 긋고 그것 바깥에는 결단코 나가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미련한 것인데도 대개는 이러고 있다. 얼마나 그 잘난 사람들이 엉성한지는 이런 한계를 어떻게 정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보이는 지를 보면 된다. 아무리 잘났어도 자기 한계를 정하고 산다면 어설픈 자일 뿐이다.
하늘이든 신이든 어떤 하늘과 어떤 신인지를 정하고 그것과 합일하고 서로 동화하면서 체인體認하고 하나가 됨으로서 알아가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인식론이다. 그러면서 근원을 무한히 올라가고 나 역시 알기 위해 무한히 자천하면서 내가 알고 내가 된 그것을 말하면서 그 이상은 내가 욕망하는 이상으로 꿈꾸는 곳이 된다. 항상 꿈꾸면서 나는 내 위를 보고 또 항상 내 아래로 내가 이룬, 즉 인식한 것을 베풀면서 이끌게 된다.
우리는 근원을, 본질을, 본체를 알고 싶으며 또, 알고 싶어서 우리 문명이 여기까지 온 원동력이 되었으며, 안다는 것을 합일이라는 새로운 관념으로 접근해서 다가가고 궁구하는 것이 바로 자천이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도 닦아서 초월하는 것도 아니고 판타지를 원하는 것도 아니다. 알고 싶고 이해하며 살고 싶은 것이다. 나는 애초에 사물은 인식할 대상이 아니라 내가 그것이 되어야 할 대상으로 본다. 모색이나 분별과 상식적이고 서양 철학적 분별과 지적 추구와는 구분해야 된다고 생각해서 서구식 인식론 자체에 대한 오류를 말하고 싶다. 인식은 가슴이 하며 그 방법은 하나 되기이고 머리가 인식한다는 것은 가슴이 인식하기 편하도록 모색하는 것이다. 이것이 분별이고 사물을 찾고 나누며 통합해가는 이유이다. 일반적으로 사물이나 대상을 받아들이는 작용으로 사용할 때는 머리가 한다고 보고 그 이상의 사물 자체나 궁극적인 인식은 가슴이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머리의 인식과 가슴의 인식과 배의 인식이 있으며 그 부위적으로 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해야 한다. 머리로 인식하는 것만 관심 있고 이것만 알기 때문에 가슴으로도 한다고 하고 싶은 것이며 이것이 더 근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배나 그 이상을 말하는 것은 어려우니 이렇게 만이라도 안다면 만족한다.
곤연에 맞추어서 그 실천적 작용인 인식의 반대 방향으로, 내 안으로 이끄는 것이 아닌 외부로 향해 나아가는 것도 설명해야 한다.
서구인들이 만든 지식체계가 있고 우리는 그것에 언제까지나 종속되어 살 수는 없다. 다른 식의 지적체계도 가능하고 또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을 우리가 지금 하지 않으면 늦거나 기회가 없을 수 있다는 절박함도 있다. 간단히 말해 차이나는 문헌도 많고 가진 학문체계도 방대하다.
하지만 우리가 가진 것은 무엇인가? 외국인이 볼 때 어차피 한국은 차이나의 아류이거나 차이나에 속한 문명일 뿐이다. 우리가 얼마나 다르고 얼마나 광대한 학문체계와 문명을 창출해야 과거에 남의 것을 베낀 전통이나 차이나의 영향에서 벗어나 근본부터 전혀 다른 국가와 문명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인식론이 중요한 것은 인식에 대한 중요성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관점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자천자는! 우리나라는!
세상을 이렇게 보고 이렇게 이해하며 인식하고 이렇게 알기 때문에 이러한 행동을 하고 이러한 말과 주장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것을 하기 위한 체계를 설정하고 이룬 것이 있는지 반문하고 철저하게 정신과 정신의 근저에서부터 전혀 다르고 아니면 더 월등한 정신체계와 지적체계와 인격으로 외국이나 앞으로의 미래에 제시할 수 있는 자세와 태도를 가졌으면 한다.
내가 자천자에게 자기의 생각을 정립하고 자기만의 가치관과 자기만의 독립을 영혼과 정신의 뿌리부터 하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라에도 해당한다. 우리식의 가치관과 우리식의 체계로 세계를 보아야 한다. 남이 시키는 대로, 남이 옳다고 하는 대로, 남이 보라는 대로 한다면 독립된 나라도 아니고 자주성이 있는 것도 아니며 강해지지도 않는다. 우리 것을 내세우고 우리 것을 주장하고 우리 것에 다른 것을 맞추는 자존심과 긍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름부터 곤연이라고 짓고 이렇게 하는 것이 정말 의미 있고 새로운 학문을 창출하는데 도움이 될지도 사실 의문이 든다. 수도라면 아직도 기나 호흡이나 특이공능으로 이해하거나 불교식 공덕이나 화두나 기복적인 것으로만 아는 세상에 이것이 뭐하는 허튼짓인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도가 과연 어디로 가고 있고 갈 것인가?
또 가야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