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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연도 | 1939 |
|---|---|
| 감독 | 빅터 플레밍 |
| 출연 | 클라크 게이블, 비비안 리, 레슬리 하워드,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외 |
| 관련 서비스 | 네이버영화 상세정보 바로가기 |
1부 : 대농장 타라를 소유한 오하라 가문의 장녀 스칼렛은 이웃에 사는 청년 애슐리를 사모해왔다. 그러나 애슐리가 친구 멜라니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스칼렛은 뒤늦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거절당하는데,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번 레트 선장이 이 모습을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무렵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전장으로 떠나며 멜라니를 부탁하는 애슐리에게 질투심이 생긴 스칼렛은 멜라니의 오빠 찰스의 청혼을 받아들여 결혼한다. 하지만 찰스는 전장에서 병으로 사망하고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스칼렛은 애틀랜타로 가서 멜라니의 가족들과 지내게 된다.
전황은 남군에게 불리해지고 애틀랜타도 북군에 포위된다. 피난을 떠나야 하지만 멜라니는 출산을 앞두고 있었고, 애슐리의 부탁대로 스칼렛은 그녀의 출산을 돕는다. 아기는 무사히 낳았지만 북군의 포격이 애틀랜타를 뒤덮은 상황. 스칼렛은 레트에게 도움을 청해 불길을 뚫고 구사일생으로 타라까지 피신한다. 하지만 북군이 휩쓸고 간 타라는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2부 : 전쟁이 끝나고 애슐리도 타라로 돌아온다. 이후 스칼렛은 농장에 매겨진 세금을 충당하기 위해 장사꾼으로 성공한 동생의 약혼자 프랭크를 가로채 결혼하고, 북부 사람들과도 손을 잡으며 재산을 모으기 시작한다. 동분서주하며 사업을 확대해가던 스칼렛은 어느 날 흑인 마을에서 성추행을 당하게 되고 애슐리와 함께 이를 복수하러 떠났던 프랭크는 살해된다.
또다시 과부가 된 스칼렛은 레트의 오랜 구애를 받아들여 그와 결혼한다. 레트와의 사이에서 딸 보니를 얻었지만 스칼렛은 여전히 애슐리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를 알고 있는 레트와의 불화로 스칼렛은 둘째 아기를 유산하는 사고를 겪고, 설상가상으로 보니마저 낙마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멜라니의 임종을 지키러 간 자리에서 레트는 여전히 애슐리를 살갑게 대하는 스칼렛의 모습에 그녀를 떠나려고 결심한다.
하지만 멜라니의 죽음으로 충격받은 애슐리의 모습을 본 스칼렛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그가 아니라 레트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뒤늦게 스칼렛은 레트를 붙잡으려 하지만 그는 끝내 떠나고, 남겨진 채 슬픔에 젖어 있던 스칼렛은 타라로 돌아가 레트를 되찾을 방법을 생각하겠다고 다짐하며 일어선다.
1. 원작과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마거릿 미첼이 1936년에 발표한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다. 여름에 출간된 원작은 그해 12월까지 100만부가 팔렸으며 이 작품으로 그녀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영화 제작자인 데이비드 O. 셀즈닉은 소설이 출간되기도 전에 영화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책이 발간되고 한달 만에 5만달러를 주고 판권을 구매했다.
원작자인 마거릿 미첼은 1900년에 미국 남부 애틀랜타주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녀는 남북전쟁 때 고난을 겪었던 할머니로부터 당시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으며, 미첼의 어머니는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하는 진보적인 여성이었다. 억척스러웠던 할머니와 자기주장이 강한 어머니의 모습을 스칼렛 오하라라는 주인공에 녹여냈던 것이다. 그리고 레트 버틀러라는 캐릭터는 미첼의 첫 남편이었던 베리언 ‘레드’ 업쇼로부터 따왔다. 미첼과 2년 만에 이혼한 그는 극중 레트와 마찬가지로 사관학교에서 자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설과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스칼렛이 16살이었던 1861년의 남북전쟁 발발부터 1865년 종전 이후의 재건 과정을 거쳐 그녀가 28살 되던 해까지를 아우르고 있다. 흔히 노예제 폐지가 명분으로 알려진 남북전쟁은 공업화가 활발히 진행되던 북부와 농업을 중심으로 노예제를 존속하던 남부의 경제적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쟁이었다. 북부의 공업화로 인해 남부의 노동력이 북부로 빠져나가고, 이를 보충하기 위해 면화 농장과 노예제도를 미국 서부로까지 확대하려다 충돌이 일어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발발한 남북전쟁은 최초의 현대전이라 평가받는 전쟁인 만큼 막대한 사상자를 낳았으며, 종전 이후에도 남부는 1877년까지 패전의 대가로 군부의 지배를 받아야 했다.
2. 캐스팅
제작자인 데이비드 셀즈닉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판권을 구입한 뒤부터 약 2년에 걸친 캐스팅 작업을 거쳐야 했다. 셀즈닉은 레트 버틀러 역할로 처음부터 클라크 게이블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그와 계약관계에 있었던 MGM은 쉽사리 게이블을 놔주지 않았다.
차선책으로 셀즈닉은 배우 게리 쿠퍼를 접촉했는데, 그에게도 계약 문제가 걸려 있었으며 무엇보다 본인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내켜 하지 않았다. 결국 셀즈닉은 장인이었던 MGM 사장 루이스 B. 메이어와 담판을 짓고 125만달러에 클라크 게이블을 임대하는 데 합의했다. 참고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총제작비는 약 390만달러였다.
스칼렛 오하라 역을 캐스팅하기 위해 셀즈닉은 전국적인 공개 오디션을 열었다. 당시 오디션에 참석한 인원만 1400명이었고, 그중 대본 리딩까지 한 사람이 400명에 달했다. 그중 비비안 리, 진 아서, 수잔 헤이워드를 비롯한 31명이 스크린 테스트를 하게 되었다. 원작자인 마거릿 미첼이 스칼렛 오하라의 이미지와 가장 비슷하다고 이야기한 배우는 미리엄 홉킨스였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나이는 30대 중반이었기 때문에 영화 속 1부의 젊은 시절 스칼렛을 연기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평가였다. 결국 파울레트 고다드와 비비안 리가 최종 후보까지 오르고, 테크니컬러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 고다드가 거의 확정되는 상황이었는데, 그녀가 미혼임에도 찰리 채플린과 동거하면서 논란을 낳았다는 점 때문에 셀즈닉은 마침내 비비안 리를 선택하게 된다.
3. 프로덕션 과정
원작의 각색 작업도 많은 난항을 겪었다. 작가 시드니 하워드가 쓴 시나리오 초고의 분량은 영화 러닝타임으로 환산하면 6시간에 달하는 길이였다. 셀즈닉은 하워드에게 영화 촬영장에 머무르며 대본을 수정하라고 지시하지만 그는 거부하고 떠난다. 빅터 플레밍 감독이 새롭게 선임한 작가는 1927년 〈암흑가〉의 각본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벤 헥트였다. 이미 촬영이 시작된 후였기 때문에 셀즈닉은 그에게 단 5일 만에 대본을 줄이고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원작을 읽지도 않았던 헥트는 1주일 만에 각본의 1부 분량을 수정했고, 2부는 셀즈닉이 직접 손을 보았다. 벤 헥트 외에도 조 스월링, 올리버 H. P. 가렛, 바버라 키온 등의 작가가 대본 수정작업에 참여했는데 영화의 크레딧에는 시드니 하워드의 이름만 올랐다. 이것은 영화가 완성되기도 전에 사고로 숨을 거둔 하워드를 기리기 위한 것이었다.
1939년 1월26일에 시작되어 그해 7월1일에 끝난 촬영 기간 중에도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애초 감독으로 선임되었던 조지 큐커는 2년 동안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지휘했다. 하지만 촬영 3주차에 셀즈닉과의 의견 충돌로 현장에서 해고되고 〈오즈의 마법사〉를 연출 중이던 빅터 플레밍이 새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거칠고 남성적인 연출 방식으로 유명했던 빅터 플레밍 감독에게 호감이 없었던 비비안 리와 멜라니 역의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는 이후에도 주말마다 조지 큐커에게 따로 연기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과로에 시달리던 빅터 플레밍 감독 또한 5월경에 2주간 자리를 비웠는데, MGM 소속 감독인 샘 우드가 공백을 메웠다. 뿐만 아니라 데이비드 셀즈닉은 물론 프로덕션 디자이너인 윌리엄 카메론 멘지스도 영화의 일부를 연출했다.
촬영감독도 처음에는 아카데미 촬영상 수상 경력이 있는 리 가메스가 선임되었으나 1/3쯤 촬영이 진행된 5월경에 결과물이 너무 어둡게 나왔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레이 레너한과 어네스트 핼러로 대체되었다. 대부분의 촬영은 셀즈닉의 회사인 ‘셀즈닉 인터내셔널’의 16만제곱미터 부지 세트 ‘백 포티’에서 진행되었으며 야외촬영은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와 벤추라 카운티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영화에서 가장 스펙터클한 장면인 애틀랜타 화재 장면은 백 포티에서 촬영되었는데, 〈킹콩〉 등의 영화에 사용되었던 중고 세트들에 실제로 불을 붙였다. 이 장면을 찍기 위해 할리우드에 존재하는 7대의 테크니컬러 카메라가 모두 동원되었다. 테크니컬러는 색 재현력을 월등하게 높인 당시의 최첨단 컬러필름을 가리킨다. 뿐만 아니라 이 화재 장면에서는 40여대의 소방시설과 50여명의 소방수, 20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동원되었으며 촬영 뒤 불을 끄는 데도 1900리터의 물이 사용되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시대극으로서 의상에도 상당한 투자를 해야만 했다. 코스튬 디자이너 월터 플렁킷은 50명에 가까운 주요 배역을 위해 5천벌이 넘는 옷을 디자인했고, 영화에서 비비안 리는 44벌, 클라크 게이블은 36벌의 다른 옷을 입고 등장했다. 특히 플렁킷은 의상의 변화를 통해 스칼렛의 처지와 심리의 변화를 표현했는데, 1부에서 오건디, 망사와 면 재질의 옷을 입던 그녀는 점차 부유해지면서 실크와 벨벳 소재의 옷으로 바꿔 입는다.
4. 후일담
촬영이 마무리되고 1939년 9월9일 할리우드의 폭스 시어터에서 가편집본 시사가 있었다. 시각효과도 들어가지 않은 4시간25분짜리 버전이었지만 영화 상영 이후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15일 애틀랜타의 로스 그랜드 시어터에서 첫 공식 시사회가 열렸다.
배우들은 공항부터 극장까지 리무진 퍼레이드를 가졌는데 30만명으로 추산되는 인파가 11km를 늘어서서 행사를 구경했다. 하지만 스칼렛의 몸종 매미 역을 맡았던 흑인 배우 헤티 맥대니얼은 백인들과 함께 영화를 볼 수 없다는 조지아주의 법에 따라 행사에 불참했다.
클라크 게이블은 이를 부당하게 생각해 행사를 보이콧하려 했으나 맥대니얼의 만류로 그도 시사회에 참석했다. 당시 생존해 있던 남북전쟁 참전용사들도 시사회에 초대되었으며 조지아 주지사였던 유리스 D. 리버스는 12월15일을 공휴일로 선포했다.
1939년 개봉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상영된 4년 동안 미국에서만 총 6천만장의 티켓이 팔린 것으로 집계되었다. 이는 당시 미국 인구의 절반에 해당한다. 또한 이 영화는 1947년, 1954년(와이드 스크린 화면으로 재편집한 버전), 1967년(70mm로 블로업한 버전) 등 수차례에 걸쳐 재개봉했는데 그 과정에서 판매한 수익은 3억9천만달러에 달한다. 이는 인플레이션을 감안해 현재 가치로 산정하면 44억달러에 해당하며(2011년 기준), ‘영화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도 이 영화는 여러 기록을 낳았는데, 1940년에 열린 제1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13개 부문 노미네이트와 8개 부문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 두 기록은 각각 1951년 〈이브의 모든 것〉이 1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고 1959년 〈벤허〉가 11개 부문을 수상할 때까지 깨지지 않았다.
또한 이 영화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최초의 컬러영화이자 상영시간이 가장 긴 영화이기도 했는데(221분), 1962년 러닝타임 222분의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그 기록이 깨졌다. 아울러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를 제치고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헤티 맥대니얼은 최초의 흑인 아카데미상 수상자로 기록되었고, 각본상의 시드니 하워드는 최초의 사후 수상자로 남았다.
5. 영화사적 의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한 찬사는 주로 제작 과정, 기술적 성취, 거대한 스케일에 집중되었다. 하지만 예술적인 성취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개봉 당시 〈뉴욕타임스〉의 프랭크 S. 뉴젠트는 “영화 산업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야심임은 인정하지만 사상 최고의 영화는 아니다”라고 했고 〈더 네이션〉의 프란츠 홀러링도 “영화 산업의 역사를 놓고 볼 때 대단한 이벤트이지만 영화 예술로서는 마이너한 성취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러한 논평은 원작을 최대한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던 데이비드 셀즈닉과 빅터 플레밍 감독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기도 했다. 군 홍보단의 카메라맨 출신이자 촬영감독으로 경력을 시작했던 빅터 플레밍 감독은 스튜디오의 요구를 가장 충실히 수행하는 감독으로 평가되었으며, 그와 셀즈닉의 목표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구도와 미술, 조명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당시로서는 가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물자와 인력을 동원하여 원작에 묘사된 스펙터클한 장면들을 화면으로 옮기겠다는 그들의 야심은 애틀랜타 화재 장면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멜라니의 출산을 앞두고 스칼렛이 의사를 찾아 헤매는 크레인숏도 마찬가지인데, 병동이 부족해 수많은 부상병과 사망자들이 길거리에 누워 있는 이 장면에서 총 800명의 엑스트라와 800개의 더미(죽은 사람이나 동물의 모습을 본뜬 일종의 마네킹)가 사용되었다.
이렇듯 원작을 최대한 충실하게 영화화했다는 점도 비평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중에서도 캐스팅과 연기에 대한 평가가 높았는데, 프란츠 홀러링은 비비안 리의 연기에 대해 “어떤 여배우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도 예술적으로 완벽하게 디자인된 연기로, 외모와 동작 모두에서 완벽하다”고 말했다. 특히 찬사를 받은 연기는 타라로 돌아온 뒤 저택에 침입한 북군 병사를 해치우던 장면에서 용기와 결단력을 표현한 장면이다.
그리고 결혼 이후에도 여전히 애슐리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하는 스칼렛에게 질투심을 느낀 레트가 그녀와 강제적으로 관계를 가진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만족감을 표현해낸 장면도 호평을 받았다. 그외에 레트 버틀러 역의 클라크 게이블과 애슐리 윌크스 역의 레슬리 하워드 또한 마거릿 미첼의 인물 콘셉트와 관객의 상상에 부합한다는 평가를 받았고, 매미 역의 헤티 맥대니얼은 극중에서 비비안 리 다음가는 연기라는 평가를 얻었다.
요컨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영화사에서 가지는 가치는, 새로운 기법이나 심도 깊은 주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대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역량을 활용해 최고 수준의 대중 엔터테인먼트를 완성했다는 점에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비평가들의 의견도 일치한다. 평론가 앤드루 새리스는 “지금껏 만들어진 엔터테인먼트 중 가장 사랑받은 단 한편”이라고 했고, 평론가 주디스 크리스트 또한 “할리우드의 공정이 낳을 수 있는 가장 대중적이고도 생명력이 강한 오락물이라는 데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평했다. 당시까지 이 영화의 총제작비였던 390만달러가 넘는 예산을 들인 작품은 1925년작 〈벤허〉와 하워드 휴스가 감독과 제작을 맡은 〈지옥의 천사들〉(1930) 단 두편에 불과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대사가 있는 배역만 50명이었고 동원된 엑스트라는 총 2400명에 달했으며, 배우들 오디션에만 10만달러의 비용을 투자했다. 그리고 제작 단계부터 전국적인 오디션과 “다시 볼 수 없는 명품”이라는 마케팅으로 작품을 홍보하고 물량공세로 대작을 만들어 고수익을 노린 이 작품의 전략도 향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범이 되었다. 이러한 대중적인 반향을 바탕으로 1977년 미국영화연구소(AFI)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영화로 선정했으며, 1998년 같은 기관에서 집계한 역대 100편의 영화 중 4위를 차지했다(2007년 개정판에서는 6위). 그리고 1989년에는 국립영화보관소에 의해 그 보존가치를 인정받았다.
6. 영화를 둘러싼 논쟁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크게 두개의 쟁점 때문에 평론가들과 관객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 둘은 모두 원작 소설이 가지고 있었던 태생적 한계이기도 했는데 그 첫 번째는 남부중심주의적인 시각으로 노예제를 정당화한다는 지적이었다. 특히 극중 흑인 노예들의 묘사를 두고 여러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스칼렛 가문의 노예들을 예로 들면 매미는 맹목적으로 스칼렛만 바라보고, 남자 노예 빅 샘은 노예 생활을 즐기는 듯하며, 어린 몸종인 프리시는 머리가 나쁘다는 식의 편견으로 묘사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흑인 극작가인 칼튼 모스는 “〈국가의 탄생〉이 미국의 역사와 흑인들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다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후면 공격”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D. W. 그리피스 감독의 영화 〈국가의 탄생〉은 백인 인종차별집단인 KKK에 대한 긍정적인 묘사로 문제가 된 작품이다. 미첼의 원작은 남북전쟁 이후 레트 버틀러를 제외한 모든 남성 캐릭터들이 KKK 단원이 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데이비드 셀즈닉은 〈국가의 탄생〉 파문을 떠올려 영화에서는 이러한 설정을 삭제한 바 있다.
두 번째는 왜곡된 성적 판타지에 관한 쟁점이다. 질투에 사로잡힌 레트가 술을 마신 뒤 스칼렛을 강제로 안고 계단을 올라 침실로 향하는 장면은 부부 강간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성주의 영화평론가인 몰리 하스켈은 이 장면에 대해 “대부분의 여성들이 이 장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로 인해서 여성들이 강간에 판타지를 가지고 있다는 잘못된 관념을 유포할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7. 주제
애초 미첼은 소설의 제목을 스칼렛의 마지막 대사인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Tomorrow is another day)로 하길 원했다. 하지만 출판사인 맥밀란쪽의 의견에 따라 다른 제목을 고민하던 중 어네스트 도슨의 시구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채택하게 된다.
이 제목의 의미는 영화 도입부를 여는 자막에 잘 나타나 있다. “그곳은 신사도와 목화밭으로 상징되는 곳이었다. 이 아름다운 지방은 기사도가 살아 있는 마지막 땅으로, 용감한 기사와 우아한 숙녀, 그리고 지주와 노예가 함께 존재하는, 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꿈처럼 기억되는 과거가 오늘로 살아 있는 곳. 문명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일까?” 그러니까 전쟁으로 인해, 노예제를 바탕으로 지켜왔던 남부의 귀족적인 전통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음을 가리킨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들은 모두 과거의 가치에 집착하는 인물들이다. 스칼렛의 아버지 제럴드 오하라는 “일하고, 싸우고, 죽을 가치가 있는 건, 오직 땅 뿐이다”라는 구시대적인 신조를 가졌고, 애슐리는 전쟁이 현재의 평화를 깨트릴까 두려워 평화를 지지하는 인물이다. 그가 스칼렛에게도 끌리지만 끝내 멜라니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멜라니가 남부의 귀족적인 윤리와 가치의 화신과도 같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남부인으로서는 가장 먼저 상공업에 눈을 뜨고 자유분방한 삶을 살아온 레트 버틀러도 스칼렛과 함께 타라로 피신하던 도중 갑자기 스칼렛에게 군에 입대하겠다고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잊혀지는 명분에 약하기 때문일 거요”였다.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그러한 남자들과 달리 바람과 함께 사라진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첫 남편을 잃었을 때도 그녀는 애도 기간조차 무시하고 자선 무도회에 참석해 레트와 춤을 춘다. 두 번째 남편과 사별했을 때도 그녀는 오랜 고민 없이 레트와 재혼한다.
스칼렛은 남부의 가치와 명분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자신의 고향인 타라에 대해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농장을 지키기 위해 북부 사람들과 손을 잡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의 이러한 성향은 레트를 떠나보내고 난 마지막 장면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난다. 잠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슬픔에 젖어 있던 스칼렛은 땅의 가치를 역설하던 아버지의 말과 “당신은 타라의 붉은 땅에서 힘을 얻는 거요”라는 애슐리의 말을 떠올린 뒤 타라로 돌아갈 것을 결심한다.
그리고 거기서 레트를 되찾을 방법을 생각할 거라고 말한다. 그녀에게 과거(타라)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힘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뒤늦게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이상 스칼렛에게 레트는 과거의 남자가 아니라 새로운 사랑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로도 해석된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애초 마거릿 미첼은 생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것을 이겨내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가진 진취적인 성격이 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그 진취성을 가진 여성 스칼렛 오하라가 남자들보다 강한 의지로 생존하며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 타라 농장주의 장녀. 뛰어난 미모로 많은 청년들로부터 구애를 받아왔지만 다혈질이며 자기주장과 생활력이 강하다. 이웃 청년 애슐리를 사랑했으나 전쟁 중에는 애슐리의 임신한 아내 멜라니를 끝까지 보호하며 의리를 지킨다.
애슐리 윌크스(레슬리 하워드) : 스칼렛이 연모해온 이웃의 청년. 선량하고 이성적인 인물이나 다소 우유부단하다. 종전 뒤에는 타라로 돌아오지만 바뀐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스칼렛의 제재소를 맡아 일하며 생계의 도움을 받는다.
레트 버틀러(클라크 게이블) : 남북이 대립하는 상황에서 해상봉쇄망을 뚫어 무역으로 재산을 축적한 인물. 전쟁 발발 직전 애슐리의 집에서 스칼렛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급히 피난해야 하는 상황에 마차를 훔쳐와 스칼렛과 멜라니를 구했으며, 이후 스칼렛의 두 번째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그녀를 기다린다.
멜라니 해밀튼(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 애슐리의 아내. 선량하고 관용적이며 이해심이 많은 인물로, 심지어 스칼렛이 남편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안 뒤에도 그녀를 옹호한다.
솔직히 그건 내 알 바 아니오(Frankly, my dear, I don't give a damn).
- 레트스칼렛과 이별하는 장면에서 “그럼 나는 어떻게 하죠?”라는 질문에 대한 레트의 영화 속 마지막 대사. 미래의 일은 스칼렛 스스로 고민하도록 촉구하는 것이기도 한 이 말은 AFI의 조사 결과 영화 역사상 최고의 대사 1위로 뽑힌 바 있다. 애초 이 대사는 ‘damn’이라는 비속어 때문에 검열기관인 PCA로부터 수정 요구를 받았다. 하지만 영화 개봉을 앞둔 1939년 11월1일에 “비속어가 역사적이거나 문학적인 표현으로써 필요할 경우 쓸 수 있다”고 검열 규약이 개정되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Tomorrow is another day).
- 스칼렛타라로 돌아가 레트를 되찾는 방법을 생각하겠다고 결심한 스칼렛의 마지막 대사. 원문은 “내일은 또 다른 날이 될 거야”라는 의미지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국내에 소개한 장왕록 교수의 이 번역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 스칼렛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사.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6)
• 1939년 제5회 뉴욕비평가협회상 여우주연상(비비안 리)
• 1940년 제12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비비안 리), 여우조연상(헤티 맥대니얼), 촬영상(어네스트 핼러, 레이 레나한), 각색상(시드니 하워드, 사후 수상), 편집상(할 C. 컨, 제임스 E. 뉴컴), 미술상(라일 휠러)의 8개 부문과 특별상(프로덕션 디자이너 윌리엄 캐머런 멘지스), 기술공로상(셀즈닉 인터내셔널 픽처스) 2개 부문 수상
• 1939년 제12회 어빙 탈버그 기념상(데이비드 O. 셀즈닉)
〈타라의 테마〉(Tara’s Theme)
막스 스타이너가 작곡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메인 테마이자 영화음악의 고전. 이 스코어를 만들기 위해 막스 스타이너는 휴고 프리드호퍼, 레지널드 바셋을 비롯한 다섯명의 오케스트라 작곡가를 고용해 12주 동안 작업에 몰두했다. 1940년대 초 작곡가 맥 데이비드는 〈타라의 테마〉에 가사를 붙이고 재즈 발라드로 편곡한 노래 〈My own true love〉를 발표하기도 했다.
〈콜드 마운틴〉(2003) : 남북전쟁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사랑 이야기
〈게티스버그〉(1993) : 남북전쟁 중 가장 치열했던 게티스버그 전투의 4일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