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모리스 신부의 영성강좌
1993년 7월 31일 이냐시오 영성 연구소 설립 강연회 제 1 차 영성강연회
존경하는 신부님, 수녀님, 그리고 강의에 참석하신 많은 형제자매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사람이 여러분들과 이렇게 이 자리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한가지 사과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의 아름다운 말을 모르기 때문에 옆에 있는 우리 형제 예수회 회원의 입을 빌리어 여러분들 나누고자 합니다.
이냐시오성인께서 누군가로부터 질문을 받았었습니다. 당신자신에 대해서 말씀을 해달라고 했을 때, 이냐시오 성인은 당신 자신을 하나의 순례자로 강조를 하셨습니다. 순례자라고 하면 두가지의 의미가 있는데, 첫째 의미는 하느님께서는 순례자를 당신의 벗으로 세우시려고 하시는 것, 그것을 말하고 동시에 순례자쪽에서는 모든 것에 있어서 하느님께 미친 사람(매료된 사람)이고, 하느님에 의해서 완전히 소유당했기 때문에 하느님으로 깊숙히 싸여 있고, 하느님께서 마음대로 하실 수 있는 이런 입장이고 또 자기가 그만큼 하느님을 추구하고, 하느님을 목말라하는 이러한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자기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성인은 1521년에서부터 이후 30년동안 완전히 자기 중심적으로만 살아왔고 모든 것이 자기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회고 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주장대로만 살려고노력했던 이런 존재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둘째, 이냐시오 성인이 자기자신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이 1555년인데, 그러니까 34년 후가 됩니다. 그때 자기자신에 대해서 묘사한 것은 이제는 매일 생활에서 뿐만 아니라 매순간에 있어서 무엇을 하든지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볼 수 있고, 하느님을 위해서만 살 수 있는 이러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를 볼 때, 그러면 이 전환점이 언제, 어떻게, 어떠한 상황에서 왔는가 이렇게 알수 있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정확하게 말씀하신 적도 없고, 그렇게 쓰신 적도 없고, 그러나 이분이 쓰신 여러문헌들을 볼 때 특히 그 중에서도 자서전을 보면 이냐시오 성인이 어떻게 이런 변화를 체험하시게 되었는지를 어렴풋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과 나누려고 하는 것은 이냐시오 성인의 삶이 전환 되는 이 과정을 어떻게 우리가 볼 수 있는가? 이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이렇게 간추릴 수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특별한 은혜를 하나 지니고 계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신 자신의 체험을 잘 성찰하실 수가 있었고 또 그에 따른 결과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고 또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이런 능력을 지니셨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은 당신이 하느님을 체험하신 것, 이것을 다른 사람들한테 전달할 때,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인의 체험을 통해 자기 자신의 체험하고 연결하면서도 자기 생활안에서 역시 그 체험을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신 자신의 체험을 이렇게 남에게 묘사 하시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저 역시 이 강론을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시도하고 싶은 게 이점이며,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를 듣고, 읽고 또 그 경험들을 통해서 우리 각자의 생활안에서 비슷한 하느님의 체험을 하실 수 있도록 유도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다음호에 계속)
예전에 이냐시오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이끄시는 것이 마치 초등학교 선생님이 한 아동을 인도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이끌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이 지도를 하시는 기선은 어디까지나 하느님쪽에서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먼저 이냐시오 성인을 인도하시고 이냐시오성인은 그저 따라만 가는 것, 거기에 응답하는 것, 이정도. 그래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이냐시오성인한테 보여 주시고, 이끌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이냐시오 성인은 따라가면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알게 되는 겁니다.
또 이냐시오 성인께서 보시는 것,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인도하시는 것, 보시는 것 하나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시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이냐시오 성인께 그런 인도를 주셨는데, 그것은 당신의 아드님, 그러니까 성부께서는 성자를 통해서 이냐시오 성인을 인도하셨습니다. 즉, 당신 성자께서는 당신 자신을 이 세상에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 원하는 것 까지도 성자를 통해서 이냐시오 성인께 말씀해주셨고, 성인이 성부께 응답을 하시는데 있어서는 언제든지 성자를 통해서 응답을 하시는 이러한 방법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성자를 통해서 오고 가고,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인도해주시는 것도 그렇고, 또 이냐시오 성인 그 응답하시는 것도 성자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 점점 더 명확하게 되어 갔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께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는 데 있어서, 제일 우선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순명입니다. 그러니까 성자께서 성부께 순명하시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정말로 하느님을 제대로 체험한다고 한다면, 하느님께 순명해야하고, 성자께서 성부께 순명하신 것처럼, 이 대해 이냐시오 성인 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공통점이 있지만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아주 대단히 강조를 하십니다. 내 자신이 하느님을 진정으로 체험하기를 원한다면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순명을 해야한다는 것, 즉, 이 순명이 가장 처음부터 아주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냐시오 성인께서 순명에 대해 말씀 하신 것을 언급할때,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순명은 상당히 딱딱하고 아주 굳어져 있고, 경직되어 있고, 이런 걸로 알려져 있는데, 그리고 아주 편협한 이러한 순명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이것은 오해입니다. 오히려 이냐시오 성인께서 강조하시는 순명은 언제든지 추구하는 겁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친교를, 통교를 시도하는 이러한 순명입니다. 그래서 장상과 아랫사람 사이에서도 언제든지 친교를 이루어야 되고, 오늘날 우리들이 보통 말하는 소위 분별 또는 식별한다고 하는 것이 이 순명하고 직결되는 겁니다.
제가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성숙한 순명에 대해서 말씀드리는데, 그럼 성숙한 순명이란 무엇인가? 이냐시오 성인께서 내포하고 계시는 이 성숙한 순명이란 하느님께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있게끔, 그렇지 않으면 있는 곳에 있을 수 있게 하는 것,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는 그러니까 사도직이던 다른 어떤 일이든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할 수 있는 것, 이것을 식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좀더 이것을 부연한다면, 이러한 순명이 어떠한 효과가 있는가? 하느님께서 내가 있기를 원하는 그곳에 내가 있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일을 내가 한다면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된 것이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통해서 하느님이 계시고, 나를 통해서 하느님이 일을 하시는 것, 그래서 나를 통해서 하느님을 몰랐던 사람들이 하느님을 접하게 되는 겁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러한 순명에 대해서 당신 특유의 표현을 쓰십니다. 이것을 이냐시오 성인은 분별있는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영어로 "Discerning Love", 그래서 분별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 이것은 내가 무엇을 할 때, 한없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바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우러나오면서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할 때, 시킴을 받을 때 그저 법적으로만 하라고 하는 것, 형식적으로만 하는 것 이런 것이 아니고, 더 주고 싶고, 더 하고 싶고, 더 봉사하고 싶고, 이러한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좀더 부연한다면, 분별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당신 자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셨는지 하는 걸 볼 것 같으면 이 강생의 신비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될 정도로 당신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무한 하신 분께서 이렇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면 나도 순명을 할 때 장소라든가, 시간이라든가 나의 여러가지 여건 속에 제약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제약안에서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놓는 것, 그래서 사랑을 하면 할 수 있는 만큼, 수단과 방법을 써서 할려고 할 때,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이 말씀하시는 분별있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이것을 성인은 분별있는 사랑이라는 것으로 말씀하신 것이고, 또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서 어느 분야에서든지 다 적용되는 것인데 제가 특별히 두가지 응용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번째로 말씀드리고 드리고자 하는 것은 주로 다섯 가지의 중요한 요소들을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통합을 시키는 이러한 작업을 해야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중요한 다섯 가지 요소라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아시는 겁니다. 첫번 째는 기도입니다. 기도가 중요하고, 그 다음에는 일하는 겁니다. 그리고 세번째로는 공부하는 겁니다. 즉, 연구하는 것, 그리고 네번째가 쉬는 겁니다. 그리고, 다섯번째는 recreation인데 이것은 즐겁게 휴식을 할 수 있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한편, 이것이 그대로 시간표에 따른 일과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균형이 잘 잡혀야 되고 조화를 잘 이루어야 됩니다. 그래서 이 다섯 개의 요소가 다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고, 우리의 이기주의와 이기심이 상당히 밀접하게 연관 되어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너무 일을 많이 하기 때문에 휴식을 잘 안 취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렇고 그리고 이 다섯 가지 중에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다고 할 때도 그렇고, 언제든지 거기에 내 이기심이 거기에는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이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고, 조화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이런 경우에는 이냐시오 성인의 분별있는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 다섯 가지를 말씀하실 때 주로 당신 자신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 인격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개성도 다르고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서 이 다섯 가지 조화를 이루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이냐시오 성인은 또 그것을 다른 사람한테 전달하고 받아들이고 하는 과정에서 그것이 다섯가지를 잘 조화를 이루게 할 때 사랑이라는 것도 느끼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응용의 예로 들고 싶은 것이 있는데 저 나름대로 강생적(incarnational)이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것 같습니다. 강생적인 갈등, 표현 자체가 좀 생소하시겠지만 이어서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강생적 갈등이라는 것을 몇가지로 예를 든다면, 우리 일상생활에서 기도하고 활동, 언제든지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우리 사도직에 있어서 효율성과 복음적 가난,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갈등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 다음에 또 우리의 공동 생활과 개인적으로 하는 여러가지 사도직 이것도 우리들한테서는 또 어려운 갈등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순명과 그리고 내 자신의 창의력이라고 할까 창의성 이것도 언제든지 갈등을 불러 일으킵니다. 그리고 또 우리들이 보통 정의, 사회정의 같은 것을 많이 말하게 되는데, 특별히 신앙, 믿음과 사회정의 문제에 있어서 역시 갈등을 우리는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의 예를 들면, 우리 교회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제도적인 교회하고 카리스마적인 교회와의 관계, 그러니까 교회 밖으로 나가려는 경향이 우리한테서 있지요. 그래서 제도적인 것과 제도 밖에서 일어나는 이런 모든 갈등들을 예로 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갈등이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기도를 하려고 하는 것하고 활동을 하려고 하는 것하고 다른 방향으로 서로 이끌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도 그렇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는 어떤 일 때문에도 그렇고 우리가 갈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갈등속에서 어떤 것을 포기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부딪혀있는 것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저는 이 두가지를 모두 있는 그대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되고, 그래서 이 갈등을 통해서 오히려 우리는 더 창조적인 그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생산적으로 이 힘들을, 이 갈등의 힘들을 유도해야됩니다.
제가 이것을 모두 생산적으로 사용하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이 강생의 신비에서 하느님께서는 무한하신 분이시고 절대자이시지만 인간이 되셔서 우리 시간속으로 오셨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무한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한한 존재로 동시에 존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다 보면서 동시에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고, 또 사람이 되셨기 때문에 천주성을 버리신게 아니고, 그리고 또 그렇다고 해서 천주께서 인간성을 뒤집어 쓰신게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이시면서 동시에 한 인간이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지금 겪는 이러한 모든 갈등에 있어서도,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제약 속에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과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에 또 다른 방향으로도 무한히 우리가 끌려가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여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분별있는 사랑을 말씀하실 때, 이렇게 강생적인 갈등마저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이것을 선용을 해야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배경에서 사도직으로 조금 들어간다고 보면 이냐시오 성인께서 사셨던 그 당시의 영성을 보면 우리가 수도자라고 할때, 수도승적인 이런 생활을 우리 연상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준주성범에 앞부분을 보면 내가 내 밖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내 자신은 덜 인간적이라는 것을 묘사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이점 만큼은 준주성범에서도 동의를 하시지 않을겁니다. 왜냐하면 이냐시오 성인의 영성은 세상에 들어간다고 해서 내가 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덜 하느님 닮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하는데서 하느님을 더 빛내드리고 하느님께 봉사해드리고, 그리고 하는일을 통해 더 성숙해져서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시기의 수도생활이라고 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주목하기”라고 할까요. 또는 ‘주의(내적인 경향, 흐름)’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장엄한 전례, 또 성무일도를 장엄하게 창으로 염하는 것, 창하는 것 이런 것 그러니까 이러한 기도 이외의 시간에서도 하느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또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내 주의가 온통 하느님으로,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거라면 좋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될 수 있으면 내 마음이 하느님께로부터 흐트러지지 않을 이런 일에만 몰두를 합니다. 그래서 주로 손으로 하는 일, 대부분이 여기에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간단한 일을 할 때에는 내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언제든지 하느님께 향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어려운 일이라던가, 위험한 일을 하게 될때에는 하느님으로부터 주의가 멀어질 것 같기 때문에 왠지 이런 것을 피하는 경향이 있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영어로 attention하고 intention은 상당히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주의를 하느님께 끄는 것, 주의를 하느님께 향하는 것, 이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intention입니다. 그러니까 지향입니다. 한마디로 달리 사고방식을 묘사한다고 하면, 수도승적인 그러한 사고방식에서 사도적으로 말한다면 너의 주의가 어디있느냐, 그러니까 너의 마음이 어디있느냐 이렇게 질문할 수 있는데,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역시 우리나라 말로는 역시 마음인데 heart, 즉 네 주의를 어디로 끄느냐 이것도 중요하지만 네 마음을 어디에다 주고 있느냐 하는 것, 이것이 더 중요하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구별한다고 할때, 사도직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일은 그 일의 성격상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주의가 하느님께로 향할 것 같으면 그일이 안될 수가 있습니다. 그럼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그일을 하기 위해서는 주의를 거기에 퍼 부어야 한다는 것이겠지요. 예를 들어서 바늘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할 때, 바늘이 어디를 찌르는지 분명하게 봐야지, 그러니까 주의를 그 일, 학생이면 공부하는데 노동자일 것 같으면 지금 톱질하고 망치질하고 그러는데 내마음은 하느님께 향할 수가 있지요, 지향은 하느님을 향해 있느냐, 그래서 이 수도승적인 이러한 차원에서는 내 지향을 어디에다 두느냐 이것이겠지만 이냐시오 성인의 사도직에 있어서 사고방식은 내 마음을 하느님께 얼마만큼 향하고 있느냐 이런 질문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구별하는 두가지 이것을 가지고서 이냐시오 성인은 또 충분하다고 생각을 안하십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상당히 현실적인 인격자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분은 다른 요소 몇가지들을 말씀하시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면 지속적으로 나의 지향을 순화시켜야 합니다. 나의 동기를 순화시켜야한다고 이렇게 강조를 하십니다. 둘째로 이냐시오 성인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공식 기도시간입니다. 공식기도시간이라는 것은 몇시간을 하느냐, 몇분을 하느냐 이것이 아니라 그러나 매일 반드시 꼭 기도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기도를 통해서 내자신의 동기, 내자신의 지향을 순화시키는 이러한 작업을 하고 또 순화시키는 것 뿐 아니라 심화를 시켜갑니다. 그리고 깊게 깊게 그렇게 해 나가는 과정안에서 분별이 가능하게 되는 겁니다.
셋째로는 이냐시오 성인이 여기서 강조하시는 것은 내가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을 누구와 함께 대화를 하면서 나누는 겁니다. 영어로 accountability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내가 지금 좋은 사도직을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지금 확실히 객관적으로 좋은 것인지, 그리고 또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나한테 속는 것은 아닌지 많은 경우에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이 천사의 탈을 쓴 악신을 종종 이야기 하십니다. 나는 좋은 것으로 알고 따라가지만 그런데 사실은 마귀의 장난일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일에 도취하게 되면, 거기에 빠져 버려서 정말로 좋은 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일이 끝난 다음에는 오히려 엉뚱한 결과가 올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수행하고 있는 사도직이라든가 모든 일에 있어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장상과 그러한 시간을 갖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지도신부하고 이렇게 대화를 하는데, 반드시 영적지도 신부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동료들한테도 어떤 때는 이야기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가 지금 하는 것을 더 분명하게 볼 수가 있고, 우리시대의 말로는 분별이라고 하는 것이지만, 적어도 이냐시오 성인 당시에는 이렇게 나눠야되는 것을 강조를 하셨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예를 들면 성실한 가정부부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어머니가 남편도 끔찍하게 사랑하고 자녀들도 끔찍하게 사랑하는 엄마가 집에 밥을 짓거나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무엇을 하든지 아주 거기에 열중하고 몰두한다고 해서 자기 남편에 대한 사랑, 자기 자녀들에 대한 사랑 이것이 방해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일을 열심히 하는 가운데서 이런 사랑이 더 뜨거워지고 더 깊어지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할때도, 이와 같은 주의를 퍼붓는 이것과 또 내 지향을 폭 쏟을 수 있는 이것하고 일치가 될 수 있는 것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여기서 말씀드리는 것들은 이렇게 뚝뚝 떨어져있는 개별적인 방법들을 소개해드리는 것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것들이 전체적으로 우리의 하루 하루와 연결되어서 생활전체가 하느님을 찾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니까 이냐시오 성인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우리들 생활자체가 하느님께서 당신자신을 우리들한테 제시해 주시고, 보여 주시고 표현하시려고 그렇게 초대해주시고 우리가 응답을 하기를 바라시는 것, 그래서 우리들도 생활 전분야에서 있어서 이러한 태도로 응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 2 차 영성강연회
제가 지난 시간에는 여러분들께 ‘주의’와 ‘지향’이라는 것을 이렇게 통합시키는 이 방법을 소개드리면서 좀 북돋아 드렸습니다. 이 시간에는 이냐시오 성인의 영신수련의 뒷부분에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관상하는 방법’에 대해 하나를 소개해 드렸는데, 그제목이 “사랑을 얻기위한 명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에 대한 설명을 이시간에 해드리겠는데, 사랑을 얻기위한 명상도 사실은 이냐시오 성인 당신 스스로의 삶의 체험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체험이지만 또 방법적으로도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고 그러기 때문에 저도 여기서 여러분들에게 하나의 기도하는 방법으로서 소개드리고 싶습니다.
이 기도의 시작을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생각해 보라고 초대를 하시면서 시작을 하시는데 이냐시오 성인의 이 사고 방식은 하느님께서는 우리한테 끊이지 않고 선물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십니다. 그러니까 끊이지 않고 이순간에도 쉬지 않고 우리에게 주시기만 하신다는 이것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선물을 보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한가지의 방법은 상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상위에 여러 가지를 다양하게 늘어놓은 것처럼, 하느님의 선물들을 펼쳐 놓고, 한층이 있고 그위층에 선물이 있고, 그 위에 또 있고, 그래서 우리들이 성소를 받았든지, 결혼을 했든지 또 부모님들을 통해서 받는 것, 친구를 통해서 받는 것, 또 교회성사를 통해서 받는 것. 여러가지가 있는데 이 선물들이 널려 있는 것처럼 그럼 포개서 마치 시루떡을 갖다 놓는 것처럼, 제가 편집자, 통역자 주로 시루떡이 저에게 제일 먼저 들어오는데, 그렇게 층층이 있는 것, 은혜가 이렇게 많은 것처럼,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들이 이렇게 많은데, 그럼 이냐시오 성인은 두가지로 나누어서 또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는 전반적인 것, 너 나 할 것없이 우리가 공통으로 받은 선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든가 우리 대한민국 사람이 되었다든가 뭐 이런 것들은 우리 공통이지요. 그런데 거기에 반해서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받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형제들하고도 전혀 다른 선물, 또 옆에 있는 형제 자매가 받은 선물 중 내가 받지 않은 것, 이런 것들은 개인적으로 받은 것들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가지 측면으로 보고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의 한 부분이랍니다. 그리스도교 사도직의 한 부분이고,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은 것, 그리스도를 통해서 올라가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어지는 이 모든 것, 특별히 그리스도 교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이냐시오 성인께서 강조 하시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들을 자꾸 저울질 해보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더 무겁고, 어떤 것은 더 크고, 어떤 것은 더 많고 그래서 하느님께서 계속 이렇게 은총을 주시는데, 얼마만큼 하느님이 주실려고 하시는지 깊이 생각해봐라 이겁니다. 또 하느님께서 얼마만큼 당신 자신을 주려고 하시는지 줄 수 있는 것을 다 주시는 그 모습을 이렇게 저울로 달아 보는 것처럼 자꾸 재보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러면 이냐시오 성인은 여기서 둘째로 제안하는 것이 뭐냐하면, 그 다음에는 내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봐라 이겁니다. 즉 하느님께서 나한테 이만큼 주셨는데, 그리고 난 이만큼 받았는데, 나는 얼마만큼 또 주고 있는가, 또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소유하고 계신 것을 나한테 이만큼 주셨는데, 나는 내가 소유한 것 중에 얼마만큼을 드리는가 특별히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인데 그 중에서 얼마만큼 돌려 드리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몽땅 나에게 주셨는데, 나는 내자신을 하느님을 위해서 얼마만큼 바치고 있는가, 하느님께 얼마만큼 돌려드리고 있는가? 이것을 토대로 이냐시오 성인은 다음과 같은 아주 유명한 기도 “받으소서”이 기도문을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성인이 이 기도를 하시는 것은 내가 받은 것 하나도 빼놓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받았는데 나는 얼마만큼 주님께 내드리고 있는가? 그러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제안은 그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셈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인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시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선물을 주시는데, 이 모든 것이 선물이고, 이것이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선물안에 선물을 주는 인격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물자라고 할 수 있는데, 선물을 주는 그 인격이 그 선물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선물을 나에게 주시는 것이고, 그게 사랑입니다. 한 차원을 높여서 우리는 이 선물을 통해서 하느님의 인격을 여기서 체험하게 됩니다. 다른 한가지 예를 들면 어떤 은인이 서강대학교에 도서관을 지어준다고 합시다. 그러면 도서관을 짓고 사진이 하나 있으면, 많은 학생들은 그가 누군지 모르고, 붙어있는 은인의 사진, 그리고 희사하는 사람도 이 도서관을 누가 언제 어떻게 쓰려고 하는지 그것은 잘 모를 것입니다. 즉, 도서관을 이용할 학생들이나 은인의 깊은 마음을 다 헤아리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냥 막연하게 많은 학생들이 이용할 것이다 이정도겠지요. 여기에 반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은 선물 하나하나에 당신 자신이 새겨져 있고, 담겨져 있고 당신자신이 직접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적으로 우리는 선물을 통해서 그 인격을 대면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인격상 만남의 아주 기초가 되고 시작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린 현존의 차원에 대해서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현존한다고 하는 데, 현존하는 것도 차원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의 어머님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어머님께서 내 마음에 어떤 형태로든지 지금 현존하십니다. 그럼 그 현존하시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머님이 지금 여기 계셔요. 그런데 어머님이 편지를 쓰셨다고 합시다. 그럼 어머님의 편지를 통한 현존은 그저 우리의 막연하게 생각하는 현존보다 더 실감이 나겠지요. 그런데 한 발자욱 더 나아가서 전화를 받았다고 합시다. 이 순간에, 그럼 “아이구 엄마”하고서 음성을 들을 때 어머님의 현존은 심도가 깊지요. 이와 같이 하느님의 현존도 우리들한테 단계가 있고, 여러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현존하는 것 이러한 선물들을 통해서 현존하시는 것도 층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가 의식을 해야겠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렇게 현존에서만 그치지 않으시고, 현존한 다음에 모든 선물안에서 활동을 하시는 것. 이것을 또 강조를 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는 선물 하나 하나 안에서 하느님은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현존으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보시는데도 우리 또 한번 명심합시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내가 차고 있는 이 시계 하나만하더라도 수 백년을 일해 오셨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합니다. 시계가 발명된 것 그것을 어떻게 보면 내가 금방 가서 사오면 되지만, 이 시계가 생기도록 얼마만큼 오랫동안 하느님의 섭리가 모든 걸 돌보셨는가 그래서 내가 이순간에 여기서 이것을 차고 있을 정도로, 하느님은 지금 내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봐라, 내가 수억년 동안 너를 위해서 일을 했다. 그래서 이 시계하나 만들었다.”하고서 이렇게 주시는 것, 우리가 이것을 정말로 인식하는가?
우리는 하느님께서 모든 선물, 모든 현실 안에서, 이렇게 활동하시는 것을 볼 때, 우리들도 그런 것을 반영하면서 느끼는 이유는 우리들한테 펼쳐진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당신자신을 계속해서 우리한테 보여주시는 과정이라고 할 수가 있기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펼쳐 주시고, 보여 주시고, 들려 주시고, 그런데 우리들이 보는 것,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어떤 한계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들의 어머님의 사랑을 느낀다고 할 때, 그럼 어머님의 사랑도 그 무한한 사랑의 한정적인 한 반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반짝 하고 빛나는 것에 지나지 않지, 사랑 자체가 아닙니다. 사랑 덩어리가 아니란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볼 수 있는 이 사랑의 표시를 통해서 그 뒤에 무한히 뒤에, 궁극적으로는 사랑자체이신 그 분을 감지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냐시오 성인은 우리를 그곳으로 이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 강론을 시작한 게,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느님을 발견하는 거라고 해서 시작을 했는데, 이렇게 여러가지 장황하게 이야기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지금쯤은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이냐시오 성인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모든 선물안에서, 모든 현존안에서 존재하는 것, 그안에서, 하느님의 모든 행동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활동 많이 하시고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하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을 뵐 수 없고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는가? 라는 이런 질문도 나올 법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정말로 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십니다. 사랑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에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여러가지 모양으로 보여주시는데 그것은 행동하는 거죠. 그런데 이를 말로 하게 되면 말과 행동이 일치가 되어야합니다. 앞에서도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attention하고 intention가 일치가 되는 것을, 통합이 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랑이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합니다. attention하고 intention하고 융합을 할 수 있는 것이 뭐냐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말로 보다는 행동으로 표시 되어야한다는 결론이 나올 수 있고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둘째로 사랑에 대해서 말하시는 것이 뭐냐면 사랑은 언제나 일방적인 것이 아니고, 언제든지 주고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쪽에서 갖고 있는 것을 주고 사랑 받는 쪽에서는 주는 걸 다 받습니다. 여기서 주고 받고 이런 것들을 친교를 한다 통교를 한다 그럴 수 있고, 우리시대의 좋은 말로는 나누는 것 무엇이든지 갖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하고 나누게 됩니다. 가진사람이 사랑을 한다고 할때 자기 가진 것을 더 많이 줄 수록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지요. 또 주기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상대방이 주는 것을 그 사람이 나에게 정말로 사랑스러우면 주는 만큼 그 이상으로 또 받습니다. 그래서 주고 받는 것이 깊으면 깊을 수록 그 사랑도 깊어진다는 것을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둘째로 강조하는 점입니다.
주고 받는 것은 상호적이어야 하며, 일방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형제에게 날씨에 대해서 물어보게 되면, 대답을 무척 무뚝뚝하게 하는 사람도 있고, 대답을 전혀 안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는 거라든지 받는 거라든지 이것이 실례하는 것하고도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례를 하면 할 수록 더 많이 나눠줄 수 있고, 더 많이 받을 수가 있고 또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나누는 것이 더 깊고 양적으로도 더 크고 한데, 중요한 것은 정말로 서로 주고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내 마음 속에서부터 주는 것인가. 그래서 쌍방 통행이라고 할까요 상호적인 이러한 주고 받는 관계, 이것이 사랑에서는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강조를 하고 계십니다.
이냐시오 성인께서는 상호적인 이 관계를 이미 말씀하신 네가지 요점에서 다 또 적용을 하시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끊임없이 선물을 주시려고 하시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고 말한다면, 나역시 하느님께 계속해서 드려야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받고 그에 따른 응답을 드려야 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이해하기가 좀 어렵게 되는 건가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것이 뭐가 있는가? 그런데 우리가 조금만 생각해보면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받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느님께로부터 받는다고 한다면, 받는 순간에 이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니까 나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하나의 선물인데, 여기에 더 보탤 것이 있다면 이 선물안에 나를 담아서 하느님께서 드리게 되면 하느님께서 나에게 선물을 주신 것을 내가 또 하느님께 선물을 드리는데, 나를 담아서 드리니까 내 자신이 또 하느님께 선물이 됩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의 존재인데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선물안에는 하느님이 현존하십니다. 내가 또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안에는 나도 자꾸 의식적으로 내 자신이 현존하도록 노력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하느님께 그저 선물이니까 선물드린다고 내어 던지는 식으로 드리는게 아니라, 내가 그 선물 속에 현존해야 됩니다. 하느님께 드린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애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효율적인 애덕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데, 이 효율적인 애덕이라는 것, 이것은 내 자신이 하느님을 계시는 그대로 인식하면서 내가 내 자신의 전체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그러한 행위로서 내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노력과 현실을 매번 의식하려고 한다면 여기서도 상호적인 관계가 성립됩니다.
(통역자 주) 여기서 신부님은 영어로 effective라는 단어를 쓰시고 affective라는 단어를 쓰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나라말로 번역하기에는 무지하게 어려운 것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면 effective라는 단어는 제가 조금 전에 설명드렸던 것처럼, 효율적인 것, 능률적인 것 이것이 더 강조가 된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affective라는 것은 정감적인 것이라고 저는 이렇게 번역하고 싶습니다. 감정하고는 조금 다릅니다. 이 느낌이 여기 포함되는 겁니다. 여기까지가 하고 다시 통역에 들어가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얘기하는 것, 주님께 내 현존을 선물로 드리는데, 그것이 그저 effective한 차원에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고 아주 affective한 차원까지 올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것은 말하자면 내 온 마음으로다 온 마음을 다해가지고 사랑을 하는 것, effective한다고 할 때는 효율만 효과만 내면 됩니다. 그런데 affective한다고 하면 내 있는 마음을 다 쏟아서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께 선물을 돌려 드릴 때 내 자신의 현존도 돌려 드리는데, 이 때 모든 마음을 다해서 드리는 내 자신이 거기에 포함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좀전에 말씀드렸던 intention하고 attention하고도 여기 관련이 되는 것인데, 정말로 우리가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하고, 효율만을 생각하면서 하는 사랑하고 이것을 합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실 하느님안에는 이 두가지 사랑의 구별이 없습니다. 사랑 자체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서는 intention도 attention도 구별이 없으십니다. 사실은, 그럼 우리들도 우리 생활에서 이것을 어느정도까지는 체험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들 자신의 현존을 정말로 차원을 높임에 따라서 어느 단계에 가서는 effective한 것하고 affective한 것을 하나가 되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다음 단계로는 활동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활동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하느님을 위해서 일을 해야됩니다. 즉, 활동을 해야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 활동하는 것, 정말로 우리들이 가끔가다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지요. 일을 사랑하는 사람, 그렇지 않으면 사랑하는 사람의 일, 이것이 구별이 됩니다. 일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 하는 사람의 사랑 이게 똑같은게 아니죠. 그러면 하느님께서는 활동하시는 것 자체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그것을 표현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우리들이 아파서 누워있는 거나 밖에 나가서 일을 많이 하는 거나 하느님 쪽에서는 다 같은 위대한 선물로 받아들이실 수가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어떠한 일을 하느냐 이것이 대수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조금 전에 제가 말씀 드렸던 것, 선물을 위한 선물, 현존을 위한 현존이라고 보았을 이 차원에서는 내가 활동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활동인 것처럼 즉 하느님의 모든 활동은 사랑인 것처럼 그럼 나도 그 차원으로 갈 것 같으면 내가 하는 행동은 아무리 미미한 거라 하더라도 이건 사랑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선 활동을 위한 활동이라고 하느님을 위한 활동이라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넷째 요점에서는 이냐시오 성인은 관점을 좀 바꾸십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본 것하고는 관점이 조금 다를 겁니다. 넷째번에서는 여기 경외심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존경심 그래서 이 셋째 요점 까지는 모든 것이 하느님 당신 자신의 표시라고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즉, 당신 자신을 우리한테 보여주시는 사인(sign)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것 안에는 하느님의 발자취가 그렇지 않으면 흔적이나 손자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존경심이 우러나와야됩니다. 그래서 이 넷째 요점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예배심이라고 할까요 경외심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모든 선물을 보면서 우리들은 그 선물안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발자취 그렇지 않으면 손자욱을 보고 거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까 선물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한 없이 초월하는 어떤 존재 그 선물을 만들어 주시고 나에게 주시는 그 분까지도 우리가 바라볼 수가 있고, 그분에 대한 존경심, 사랑이 우러나와야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어야 됩니다. 나도 하느님의 선물인 이상은 나를 통해서도 하느님이 나타나야되겠지요. 나를 통해 하느님의 경외심을 받아야 되고, 나를 통해 하느님이 사랑받아야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는 어떠한 양식의 어떠한 형태의 자존심이라던가, 자만심이라던가 이기주의가 틈을 낼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통해서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사랑, 존경심 이런것이 발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것은 나의 하나의 의무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나타내야 되고, 나 자신을 통해서 하느님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져야되겠지요. 그래서 이만큼은 나의 의무입니다. 여기서 또 쉽게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선물이고, 나를 통해서 하느님이 드러나야 되고, 그리고 하느님이 존경을 받으시고 사랑을 받으셔야 하는 차원에서 본다면 나 이외에 다른 신자들도 하느님과의 사이에 내 자신이 그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도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그러한 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는 하느님의 도구인 동시에 나로 인해서 우리 이웃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존경할 수 있게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들이 이러한 태도를 키워가게되면, 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이 하느님께 갈 수 있게 되고,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이웃들을 하느님이 원하시는 만큼 또 그대로 성숙하게 도와주는 것이 되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알 뿐만 아니라 또 내안에서도 또 상대방 안에서도 하느님이 현존하신다고 이렇게 믿고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나에게 오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스스로 잘할 수 있고, 성숙할 수 있고, 하느님 안에서 자유로와 질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기 때문에 내쪽에서는 경외스러울 정도의 자유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요약하면, 선물을 받았기 때문에 선물을 돌려드리고, 또 현존하시기 때문에 내가 또 주님께 현존하고, 또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니까 나도 활동하고 이런 것이지만, 이 단계들이 다 지나간 다음 나중에는 이런 것들보다는 하느님 자체 때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게 온통 내 자신을 바쳐드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모든 것 안에서 우리는 네가지를 다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조그마한 것,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거기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하느님은 거기에서 활동하시고, 하느님은 거기서 찬미, 영광, 예배를 받으셔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 네가지를 우리는 볼 수 있고, 나도 그것을 보면서 내 자신을 드릴 수 있는 상호적인 작용을 여기서 우리는 관찰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방향을 여기서 생각할 수 있겠지요. 즉,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이고 현존이고 활동이고 당신의 표징인 것처럼 또 그것을 통해서 내 자신이 하느님께 선물로 드리고, 내 자신을 현존시킬 수 있고 내가 활동하고, 또 피조물로부터 창조주에게까지 올라갈 수 있는 이러한 단계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네 요점은 두 가지 방향을 쉽게 볼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 한 방향이고, 모든 것을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로 올라는 가는 또 한 방향을 여기서 깊게 볼 수가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께서 “모든 것 안에서”의 “모든 것”을 원어인 스페인어로 깊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every, each는 따로 따로, 모든 것 안에 따로 따로, 그러니까 개별적으로 보는 겁니다. 이렇게 한주머니에 넣어서 보는 것도 되지만 개별적이라는 뜻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네가지 관점이 하느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하는 이 네가지 관점이 매사에 있어서 개별적으로 그 의미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이냐시오 성인에게는 하루종일 하느님을 안 만날 수가 없고,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야 된다는 것이지요. 모든 것 안에서, 매 순간, 내가 의식하는 매 순간 언제든지 하느님을 뵐 수가 있고 하느님을 대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싸인이고 내가 하느님께 드리는 선물이기에 이 양방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 사소한 것들이 다 포함 되어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지 못한다고 하면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한다고 하는 이 표현 이것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볼 수 있으면 그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이 관상을 영신수련이 끝날 때 쯤해서 피정자가 보도록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매일 매일, 제가 첫번째 강론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끊임없이 기도해야되고 끊임없이 우리 동기를 순화 시켜야 되고, 또 지향을 순화시키는 이러한 작업이 지나간 다음에 물건들이 있는 그대로 보이기 시작을 하게되는 것이지요. 그러면 영신수련을 30일 동안 하게 되면 이러한 순화작용을 상당히 심도 있게 마치는 단계에서 모든 물건들이 있는 그 자리에서 있는 그대로 보기 시작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데, 그래서 다른 말로 모든 것을 하느님을 발견한다고 하는 것, 이것은 우리들이 모든 것 안에서 물건을 보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봐야된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로만 보게 되면 절대로 하느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사물에 대해 무엇이든지 볼 때마다 거기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이것이 조금 전에 말씀드린 지향의 순화, 동기의 순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무엇을 볼 때, 또 그 물건을 찾으려는 의도로 내가 원하는 것만을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은 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순화된 지향과 동기의 순화가 이루어진 다음에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면 나도 볼 수 있고, 물건도 볼 수 있고, 하느님도 제대로 볼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 시간도 그렇고 지금시간에도 이렇게 장황하게 얘기해서 미안한데 사실 따지고 보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께서 지금 까지 얘기한 것 모두를 제쳐 놓고서라도 하느님께서 내안에 마음 놓고 들어오실 수 있게 열어놓고, 또 하느님께서 마음대로 일하실 수 있게만 하실 수 있다면, 제가 수차례에 걸쳐 구별했던 intention이니 attention이니 이런 것 구별하지도 않아도 되고, 저절로 다 소화되고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내안에 마음 놓고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한번 하느님을 한번 허락해보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마음대로 일하실 수 있게, 하느님이 원하시는대로 일하실 수 있게 내 자신을 한번 개방해 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이렇게 보이고 하느님께서도 쉽게 보일 겁니다.
이 신부하고, 저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때문이고, 여러분들도 하느님 때문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서로 안에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하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도 그분을 쉽게 뵐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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