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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요셉
말씀/창세기 37:1-36
요절/창세기 37:9
신년 수양회 주제 1강의 제목은 꿈꾸는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어린 나이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집트의 총리까지 되어서 오히려 그 가족들을 구원했습니다. 이런 요셉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가장 닮았다고 해서 그를 ‘예수님의 그림자’라고 까지 말합니다. 그럼 요셉이 어떻게 이런 놀라운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그의 삶을 이끈 동력이 무엇이겠습니까? 요셉을 통해 오늘 나의 삶을 이끄는 동력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리고 나의 삶도 꿈을 이루어가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1장. 꿈꾸는 자 요셉
야곱은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세겜, 벧엘, 숙곣을 떠돌아 다니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 야곱의 인생 이야기는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라는 이 한 절로 이제 안정화고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은 늙은 아브라함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고 하셨습니다. 또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겠다.”(창15:18)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꿈은 야곱이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것으로 그리고 야곱의 열 두 아들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거주하기만 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물론 내가 어디에 거주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거주하는 사람의 내면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학생이 학교에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마음 자세로 있느냐와 같습니다. 아침에 책가방 메고 다들 학교에 갔기에, 몸은 학교에 있지만, 모두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비록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거주하고 있지만, 야곱의 아들들의 내면은 장차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 되고, 또 이들을 통해 만민을 구속하실 하나님의 꿈을 이루기에는 부족했습니다. 부족해도 한참 부족했습니다. 공학적으로 설명하면, 하드웨어는 갖추어져 있지만, 소프트웨어가 준비되지 않은 격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요셉 한 사람을 통해서 이들의 내면을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으로 다듬어 가십니다.
2절을 보십시오. 요셉은 당시 17세 소년이었습니다. 우리로 하면 고등학교 1,2학년쯤 되는 나이입니다. 이 시기는 어떻습니까? 한국 고등학생들은 사춘기를 보내면서 장차 내가 어느 대학에 갈지? 어떤 진공을 선택할지? 진로에 대해서 많은 꿈을 꾸는 나이입니다. 또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청소년 시기이기에, 이들의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가정환경입니다. 그럼 요셉의 가정환경은 어떠했습니까? 요셉 위로 배다른 형이 무려 열명이나 있었습니다. 먼저 레아가 낳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이 있었고, 여종 실바가 낳은 갓과 아셀이 있었습니다. 또 여종 빌하가 낳은 단과 납달 리가 있었습니다. 반면 요셉과 동생 베냐민의 어머니 라헬은 죽고 없었습니다. 이 둘은 형제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한 지붕 아래 여러 형제가 살다보니,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레아의 아들들은 그들끼리 뭉치고, 여종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도 그들끼리 뭉쳤을 것입니다. 요셉은 어느 그룹에도 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린 동생 베냐민 돌보기에 바빴을 것입니다. 불쌍한 요셉입니다. 하늘 아래 엄마 없이 살다보니,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많이 의지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요셉은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일러 바쳤습니다. 왜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일러바쳤을까요? 고자질쟁이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관종이기 때문일까요?
한 목자의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를 닮아 굉장히 모범생 기질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럴까요? 그는 학원에서 친구들이나 형들이 숙제를 안 해오거나, 교실에서 라면을 먹는 등 규율을 어기면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다가 결국 선생님들에게 이야기 한다고 합니다. 고자질이라기보다는 “저러면 안 되는데?” 하는 친구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또 그들이 규율을 어기기 보다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 일러바친다고 합니다. 본문의 요셉도 그런 마음에서 하지 않았을까요? 형들이 무슨 짓을 하든 상관치 않는 것이 아니라, 형들에게 관심이 있으므로 형들이 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이런 관심은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도 드러납니다. 창세기 40장에 보면, 요셉은 같이 갇힌 관원 장들이 지난 밤 꿈 때문에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 그들의 안색을 살핍니다. 40:7절을 보면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당신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은 여종의 아들들입니다. 친자이기보다는 서자입니다. 그래서 더욱 빗나갔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를 통해서 이들의 잘못이 고쳐지기를 바랐습니다. 형들이 좀 더 성숙한 자로 변화되는 것, 이것은 형들에 대한 요셉의 바람이자, 곧 하나님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형들은 이런 요셉을 ‘아버지의 앞장이’ 정도로 생각하고 미워했습니다. 그런데 더욱 요셉이 미움 받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아버지 야곱의 편애였습니다. 아버지 이스라엘은 늘그막에 요셉을 얻었으므로 여러 아들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였습니다. 요셉은 야곱이 일생에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연인, 라헬의 큰 아들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셉의 탄생이후 야곱은 참으로 많은 부를 얻게 되었습니다(30:25). 그리고 라헬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아무튼 야곱이 요셉을 그토록 사랑했던 데에는 라헬에 대한 그리움, 고마움, 미안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야곱은 오직 요셉에게만 화려한 옷을 지어서 입혔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남대문 시장에서 그냥 사다 입히든가, 주로 대를 물려 입혔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만은 때마다 명품 매장에 가서 짝퉁이 아닌 정품을 사서 입혔습니다. 더구나 요셉이 입는 화려한 채색 옷은 일종의 예복이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허름한 작업복을 입고 양이나 칠 때에 요셉은 화려한 예복에 나비넥타이를 하고 왕자처럼 다녔습니다.
이런 요셉을 형들은 어떻게 대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 형들은 요셉만을 편애하는 아버지 야곱에게 “아브지, 와 우리는 무시하능교?”하면서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모든 불만과 미움의 창끝을 요셉에게 향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복동생인 요셉이 자신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고자질하는 것 때문에 미웠습니다. 거기다 아버지의 사랑까지 독차지하니 요셉을 눈에 가시같이 여겼습니다. 그들은 요셉에게 말 한마디 다정스럽게 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툭툭 치고 가거나 째려보았습니다. 더욱이 형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시므온과 레위는 ‘복수는 나의 것’을 외치며 세겜 족속 남자들을 다 죽인 복수의 화신들입니다. 또 다른 형들은 세겜 족속을 약탈한 약탈범들입니다. 한마디로 조폭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가운데 요셉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말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한번은 요셉이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꿈을 꾸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즘 우리로 하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의 형편은 무슨 꿈을 꾸거나 비전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어린 동생 베냐민과 함께 라헬이 낳은 자식들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세 명의 엄마에 이복형들이 열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요셉은 자기를 낳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자라는 동생 베냐민과 함께 엄마 없는 하늘 아래서 자라야 했습니다. 누구보다 이런 요셉을 위로하고 다정하게 해 주어야 할 형들은 오히려 요셉을 왕따 시키고 눈에 가시처럼 미워하였습니다. 또 아버지의 특별한 사랑이 담긴 명품 채색 옷도 그를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더 화만 불러 일으켰습니다. 요셉은 누구도 자신을 위로해줄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점점 센티멘탈한 소년으로 자라가 쉬웠습니다. 아니면 마음에 품은 가시 때문에 삐닥하게 자라든가? 형들 사이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요령과 눈치나 살피며 살기 쉬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런 가운데 어떤 꿈을 꾸었습니까? 첫 번째 꿈은 밭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는데, 요셉이 묶은 단이 우뚝 서고 형들의 단이 요셉의 단을 둘러서서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장차 형들이 요셉을 우러러 보며 섬길 것이라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을 꾼 요셉은 조용히 가슴에 묻어두지 않고 그대로 형들에게 가서 꿈 내용을 다 말했습니다. 이 꿈을 듣고 형들이 ‘아멘’ 하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형들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듣고 다 화를 내었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하면서 요셉을 더욱 미워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에 요셉은 또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또 형들에게 말했습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한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해와 달은 아버지 야곱을 비롯한 가족의 어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별 열 한개는 열한 형제를 말합니다. 그런데 온 가족이 요셉에게 절을 한다는 것은 장차 요셉이 야곱을 비롯한 모든 가족을 구원할 것이라는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꿈을 듣자 형은 물론이고 이번에는 아버지 야곱까지 열을 받아 요셉을 꾸짖었습니다. “네가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그러나 형들은 시기하였지만 야곱은 이 말을 마음에 두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고대근동에서 꿈은 특별한 계시의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꿈을 해석하는 전문가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꿈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동안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에게는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삶에 방향도 주고, 위로도 주고, 약속도 주면서 그들의 인생을 직접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께서 요셉에게는 직접 말씀하시는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나타나셨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있다면 유일하게 요셉이 꿈을 꾸었다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이 꿈을 통해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그럼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은 요셉이 장차 세상을 구원하고 섬기는 영적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에게 절하는 꿈을 꾸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은 직접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던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 때와 달리, 오늘 우리의 신앙은 요셉과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셉은 꿈이라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오히려 직접 말씀을 들었던 믿음의 조상들보다 더 완벽하게 완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계시를 하셨다고 할지라도 꿈은 꿈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 꿈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요셉이 처한 현실과 비교할 때, 요셉의 꿈은 전혀 현실상황과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이 꾼 꿈을 무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꿈을 무시하지 않고 그 꿈을 하나님이 주시는 꿈으로 영접했습니다. 꿈을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로 알고 그 꿈을 자기의 꿈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둡고 답답한 현실에서도 요셉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며 비전을 품고 살았습니다. 요셉은 이 꿈을 꾸므로 형들의 왕따 속에서도, 상처받지 않고 구김살 없이 성장했습니다. 요셉은 엄마 없는 하늘아래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먹으며 자랐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꿈은 그의 삶을 이끌어 간 동력이요, 비전이요, 희망의 노래요, 오늘을 사는 이유였습니다. 요셉에게 꿈을 주신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꿈을 주십니다. 말씀의 감동으로, 또 성경이 주시는 비전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에게도 꿈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현실의 모습이 어떨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그 꿈을 붙잡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먹고 사는 사람과 함께 하시며 그 꿈을 키워가십니다. 우리가 나의 환경과 처지가 어떠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붙잡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루어 가는 삶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2장.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12절을 보십시오. 한번은 야곱이 요셉에게 세겜근처에서 양떼를 돌보고 있는 형들을 찾아가 보라는 심부름을 시켰습니다. 혹시 여러분이라면 늘 나를 왕따 시키고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그런 형들에게 가겠습니까? 복수의 화신이요, 조폭 뺌 치는 형들에게 혼자 가겠습니까? 결코 가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헤브론골짜기에서 세겜까지 3-4일은 족히 걸리는 80km의 길을 걸어서 찾아갔습니다. 가서 없으니 다시 물어물어 도단까지 찾아갔습니다. 세겜에서 도단까지는 약 21km 떨어져 있기에 하루는 족히 걸렸을 것입니다. 이를 보면, 요셉은 그냥 꿈만 꾸는 몽상가가 아닙니다. 또 아버지의 사랑에 취해서 사는 왕자병에 걸린 자도 아닙니다. 그는 순종하는 자요, 끝까지 형들을 찾는 성실한 사람입니다. 오늘을 착실하게 살며 내일을 꿈꾸어야 그 꿈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 건전한 꿈이 됩니다. 오늘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큰 꿈을 품는 것은 단순한 희망사항에 불과합니다. 정상을 정복할 꿈이 있다면 오늘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또 한 걸음을 내딛는 것입니다. 내가 성실하게 꿈을 향해 나아가는 만큼 꿈은 내게 다가옵니다. 혹자는 눈에 안 보이게 작은 것에 충성한 사람은 우주보다 더 큰 보화를 간직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아버지 심부름이라는 작은 일에 충성한 요셉에게 장차 애굽을 다스리는 큰 일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3)
그런데 그렇게 착착 모든 꿈이 이뤄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19,20절을 보십시오. 형들은 멀리서 요셉이 오는 것을 보자 그를 죽일 것을 의논했습니다. 형들이 왜 요셉을 죽이고자 합니까? 고자질하기 때문입니까? 아버지 사랑을 독점하기 때문입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요셉의 꿈 때문이었습니다. 형들은 꿈을 먹고 사는 요셉을 미워하고 심지어 죽이고자 할 정도로 증오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죽이고자 구덩이에 던져 넣었습니다.
내가 꿈을 꾸고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품을 때, 주변에서 박수를 쳐 주며 격려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의 꿈이 나의 삶의 동력이 되어서 힘차게 나아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오히려 나의 꿈이 때론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드러내는 교만이나 개인적인 욕심이나 야심으로 비춰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미움과 시기와 배척을 받습니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갖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론 절망의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슬픔과 외로움의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나중에는 견디기 힘든 고난이 시작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러할 때 과연 내가 꾼 꿈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과연 이것이 꿈을 꾸는 삶인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꿈꾸기를 두려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사실 꿈꾸는 녀석들이 만들어갑니다. 새는 수천년 동안 하늘을 날지만 혼자 날아다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수 백명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이 놀라운 일을 누가 했습니까? 꿈꾸는 녀석들이 했습니다. 한 번에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조금 씩 조금 씩, 그 꿈을 향해 나아갔고, 마침내 꿈을 이루었습니다. 비행기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것들이 다 꿈꾸는 녀석들이 이룬 꿈의 열매들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우리는 복음을 듣고 누립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며 나아온 믿음의 선배들, 꿈의 선배들 때문에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 꿈을 통해서 우리를 이끌어 가십니다. 시편에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81:10)고 하셨듯이, 우리가 꾸는 꿈만큼, 하나님은 채워주십니다.
구덩이에 던져진 요셉은 꿈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유다의 제안으로 죽지 않고 사막을 지나다니는 상인들에게 은 20냥을 받고 노예로 팔렸습니다. 상인들은 이집트까지 요셉을 끌고 가서 바로의 경호대장에게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결국 요셉은 꿈을 꾸다가 졸지에 아무도 없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전락하였습니다. 요셉의 꿈은 시련을 만났습니다. 꿈이고 뭐고 다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이를 통해 요셉의 꿈을 이루어가는 출발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론 내가 꾼 꿈이 나를 절망의 구덩이에 던져 놓고,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을지라도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로 시작되는 ‘삶’이란 시가 있습니다. 이 시를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꿈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가노라면 머지 않아 꿈을 이루는 날이 오고야 말리니.” 또한 니체는 “살아야 할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도 견딜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 조금 덧붙이면 “꿈이 있어 살아야 할 이유는 아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도 견딜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꿈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 꿈을 이루어주시는 분이십니다.
2023년을 돌아보면, 굉장히 힘든 삶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힘든 삶을 살았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늘 현실에 매이고 치여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 싶어 장차 10년 뒤, 5년 뒤 내가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를 상상하며 꿈꾸기 시작했습니다. 영어를 잘 해서,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부터 별의 별 생각을 다 꿈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저는 꿈꾸던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캠퍼스에 나가 양들을 피싱하여 얻는 것도 좋지만, 원룸을 해서 원룸에 사는 학생들을 피싱해서 양으로 얻는 것입니다. 즉 캠퍼스 바다에서 피싱하여 양을 얻었다면, 이제는 원룸이란 가두리 양식장에서 양을 얻고 제자양성하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실제로 김열국 목자가 학부와 대학원 시절 원룸에서 살았고, 지금도 고월자매가 살고 있습니다. 여기다 아예 야곱목자님 가정이 원룸에 이사를 왔습니다. 같이 복음역사 동역하기가 참 편해졌습니다. 또 예전에 박해범, 이재용 학생이 원룸에 살면서 예배에 나왔습니다. 원룸을 통해 양들을 얻고 제자양성하는 것을 꿈꿉니다. 그리고 저는 엄기성 목자님을 통해, 제3세계 대학을 세워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자는 꿈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땅 사는데 물질도 냈고, 올해는 예솔자매랑 카렌족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미얀마에 갑니다. 예전에는 선물전달하고, 페인트칠해주는 등 육체적 봉사를 했다면, 올해는 창세기 말씀잔치와 연극을 한다고 합니다. 이미 병원이 세워졌고, 또 메딕이란 간호조무사 학교가 생겼습니다. 아마도 간호조무사 학생들을 모아 말씀잔치를 할 것 같습니다. 또 몇 년내에 IT위주의 전문대학도 생길 예정입니다. 아무튼 한국과 미얀마 카렌에서 양들을 만날 것을 꿈꾸니, 제 스스로가 10년 이상은 젊어지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카렌족에서 그리스도의 청년들이 일어나는 것을 꿈꿉니다. 저는 동역자님들이 저와 같이 다 이 꿈을 다 같이 꿈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꿈이야말로 내 인생을 새롭게 하고, 위대하게 하는 새로운 동력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결국 자기가 생각하고 꿈꾸는 것과 같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꿈을 먹고 사는 인생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삶이요, 가장 위대한 삶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말세에 모든 사람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젊은이는 환상을 보고, 늙은이는 꿈을 꾸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젊은 우리의 마음에 환상을 주십니다. 꿈과 비전을 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이 주시는 꿈이 임할 때,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꿈과 비전을 함께 나누는 꿈의 공동체요, 비전의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꿈으로 가슴이 설레며, 이 꿈으로 인해서 뜨거운 자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이 꿈을 먹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 자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