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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부선 완행열차는 추억 세대에겐 아련한 낭만으로 기억된다. 서울을 출발하여 조금 출출해 질 즈음이면 ‘천안명물 호두과자’란 행상들의 외침에 군침이 돈다. 천안에는 능수버들 축 늘어진 천안삼거리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호두과자로 더 유명한 고장이다. 지금이야 고속도로 휴게소마다 만나는 흔한 과자가 되어버려 아쉬움이 남을 뿐이다.
호두는 아득한 옛날 멀리 중동 지방에서 처음 중국으로 들어왔다. 기원전 139년 한나라의 무제는 장건이란 외교관을 오늘날 이란, 아프가니스탄쯤으로 짐작되는 대월지(大越氏)국으로 파견한다. 제휴하여 흉노를 협공하자는 특사였다. 외교는 실패했고, 오히려 흉노에 붙잡혀 13년간이나 포로 생활을 하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돌아온다. 그의 손은 빈손이었지만 괴나리봇짐 속에는 호두 몇 알이 들어 있었다. 이렇게 들어온 호두는 중국 땅에 널리 심겨진다. 오랑캐나라에서 온, 모양이 마치 복숭아씨처럼 생긴 이 과실을 보고 중국 사람들은 호도(胡桃)란 이름을 붙였다.
우리도 그대로 받아들여 원래는 호도다. 다만 오늘 날은 한글 맞춤법에 따라 호도가 아니라 호두가 되었다.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신라 때라고도 하고 고려 때라고도 한다. ‘신라민정문서’는 경덕왕14년(755)에 만들어진 충청도 어느 지방의 현황조사서인데, 호두나무를 심은 기록이 있다. 또 고려사에 실린 한림별곡의 가사에 나오는 당추자(唐楸子)란 구절은 호두가 벌써 당나라 때 들어왔다는 뜻이라고 풀이한다. 고려 말 천안 광덕면 출신의 유청신이란 문신이 있었다. 충렬왕 16년(1290) 원나라에 갔다가 임금님을 모시고 돌아오면서, 호두나무 묘목과 열매를 가져왔다고 구전으로 전해진다. 가져온 묘목은 천안 광덕사에, 열매는 자신의 고향집인 광덕면 뜰 앞에 심어서 오늘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때 심었다는 나무가 절 앞에 천연기념물 398호로 지정되어 보호 받고 있고 절 안에 들어와서도 노거수 몇 그루가 더 자란다. 언제 어떻게 들어온 지는 논란이 있지만, 유천신과의 인연으로 오늘날 천안일대는 호두나무가 많다고 한다.
호두는 지름 3~4cm, 탁구공보다 조금 작은 크기에다 딱딱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다. 우리가 먹는 부분은 씨앗의 속살, 배유(胚乳)라는 것이다. 호두와 비슷한 모습의 잣, 밤, 은행 등을 통틀어 견과(堅果)라고 한다. 정월대보름 날이면 이런 견과를 깨물어 먹는 행사가 부럼이다. 이가 튼튼해지고 부스럼을 앓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호두에는 지방과 단백질 및 당분이 많아 고소하고 약간 달콤하다. 그 외 무기질, 망간, 마그네슘, 인산칼슘, 철, 비타민 등 무기물도 풍부하다. 고단백 웰빙 식품으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춘 셈이다. 특히 성장하는 아이들의 두뇌 발달에 도움을 준다. 씨앗 표면의 몽실몽실한 작은 주름은 뇌를 그대로 닮아 머리가 좋아 질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도 한다. 강장제나 변비를 없애는데도 효과가 있다하며, 호도기름은 민간약으로 피부병에 널리 쓰이기도 한다.
호두는 실크로드를 타고 유럽에도 널리 퍼졌다. 영어이름은 ‘Persian walnut’, 서양인들에게도 맛있는 과실나무였다. 유명한 발레 호두까기인형(The Nutcracker)은 호두와 가까이한 그들의 문화를 읽을 수 있는 좋은 예다. 우리나라에는 토종 호두나무에 해당하는 가래나무가 우리 땅 여기저기에서 자란다. 삼국시대 초기의 발굴 터에서 흔히 가래가 출토될 만큼 과실을 애용하였지만, 호두나무가 들어온 이후는 영광을 뒤로 했다. 호두나무와 가래나무 종류는 과실만이 아니라 재질이 좋다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나무다. 북아메리카가 고향인 흑호두나무를 비롯하여 이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나 조각품은 앞에 ‘고급’이란 접두어가 꼭 붙을 정도이다.
호두나무와 가래나무는 비슷하게 생겼지만 잎의 개수로 서로 구분한다. 겹잎 대궁에 달린 잎의 수가 5~9개 이하이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없으면 호두나무, 잎 수가 이 보다 더 많고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으면 가래나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