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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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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상 스크랩 우리 역사의 인물들 75 - 바다싸움의 명장 이순신
보성(甫性) 추천 0 조회 0 11.10.29 20:45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우리 역사의 인물들 75 - 바다싸움의 명장 이순신

 

 

바다싸움의 명장 이순신

 

청군과 백군 두 편으로 나누인 아이들의 군사놀이는 마지막고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청군대장인 허우대가 큰 소년이 깃발을 흔들며 우렁찬 목소리로 돌격구령을 지릅니다. 이윽고 청군은 함성도 드높이 백군진영으로 몰려드는데 그 기세는 보기에도 무서운 것이었습니다.

 

아이 참, 저 대장아이를 좀 봐요. 언제나 한 모색이군요.”

 

그러게요. 전번 날 군사놀이에서도 청군이 이겼다우. 저 애가 지휘를 해대더군.”

 

앞으로 틀림없이 대장감이요. 나라에서는 저런 장수재목들을 뽑아 써야 할 텐데.”

 

정말 장쾌한 싸움이요. 실전과 거의 같소구려.”

 

사람들은 한 마디씩 모두가 되뇌며 혀를 찼다. 그리고는 그런 대장감이 기특하여 자리를 얼핏 뜨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그 소년대장이 바로 훗날 바다싸움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린 이순신이였습니다.

 

이순신은 154538일 서울의 가난한 선비인 이정의 셋째 아들로 태아났습니다. 이순신의 위로는 희신, 요신 두 형이 있었고 아래로는 남동생 우신과 누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거니와 매사에 부지런했으며 특히 글공부에서는 남다른 열성이었습니다. 그는 글읽기와 붓글씨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11살에 벌써 ?자치통감??대학?, ?중용? 등 사서삼경까지 완전히 떼고 났습니다.

 

그의 형들은 이순신이 유학에 크게 성공할 것을 바라면서 여기에 힘 쓸 것을 요구했지만 그는 칼과 붓을 함께 들었습니다.

 

이순신은 옛 장수들의 무훈담을 즐겨 탐독했으며 더욱이 ?울지문덕장군전? 같은 것은 완전히 통달했습니다.

 

이순신은 당시 나라에 조성된 환경과 그 운명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걱정하면서 무술을 익혔고 병법을 연구하는데 힘을 들였습니다. 그는 밤늦도록 병서를 탐독했으며 칼쓰기, 활쏘기,  말타기 훈련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순신은 27살이 되던 해에야 훈련원에서 과거를 본다는 방을 보았습니다.

 

반드시 장원으로 급제하여 나라 지키는 방패가 되리라.”

 

그의 생각은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과거시험이 시작되자 이순신은 여러 종목에서 첫 자리를 차지하여 마지막시험인 견마잡이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어이하랴. 그만 말에서 떨어지는 실수가 있을 줄이야.

 

부상을 입은 이순신은 아쉽게도 이날 시험에 입선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순산은 31살이 되던 해인 1576년 다시 시험에 응시하여 무과에 붙었습니다.

 

그는 병법, 지리, 천문, 역사 그 어디에나 막힘이 없었습니다.

 

시험에서는 뛰어나게 성적이 높았지만 집안의 권세가 없고 돈이 없는지라 뒷받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벼슬 때문에 허리를 굽히거나 자기의 뜻을 달리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함경도 국경지대인 동구비보에 발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병조판사로 있던 김귀엽이 이순신의 사람됨에 감동되어 자기 첩의 딸을 주려고 했지만 그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벼슬길에 들어서면서 권세 있는 집안에 의탁부터 하겠는가?”

 

이순신은 가정이 넉넉지 못하여 맏형의 처가가 있는 백암리로 이사를 했습니다. 여기서 그는 병진이라는 사람과 사귀게 되고 그의 외딸과 결혼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청렴결백했으며 나라재산에 손을 대는 양반사대부들을 끝없이 미워했습니다.

 

1580년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이때 그는 처음으로 바다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바다를 보니 가슴이 탁 트였습니다.

 

조국의 저 푸른 바다를 지켜 내 한생을 바치리라.”

 

그가 바다에 이르니 장부에는 수천 명의 인원이 적혀있고 무기도 함선도 약차한 수자였지만 실지로는 불과 몇 십 명의 노병들과 다 깨어진 배 몇 척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습니다.

 

우리 군대의 상태가 이 모양인가? 언제쯤이면 이 나라의 군대가 백성의 참다운 방패로 될 것이냐?”

 

그날부터 이순신은 병사들을 모으고 군율을 세우는 데 힘을 들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군절도사로 있던 성박이 객사 뜰 앞에 있는 아름이 넘는 오동나무를 병사들을 시켜 찍게 하는 것입니다.

 

이순신은 댓바람에 그들을 비껴 세웠습니다.

 

너희들은 어디에 함부로 뛰어들어 나무를 베려 하느냐?”

 

저희들은 좌수사님의 분부로 나무를 베려 하나이다.”

 

그래, 좌수사님은 그 나무를 베어다 무기를 만드신다더냐?”

 

거문고를 만드시겠다고 하십니다.”

 

뭐라구, 고작 거문고나 만들어 퉁긴단 말이냐?”

 

이순신은 댓바람에 노기가 올랐습니다.

 

안 된다. 절대로 다치지 못한다. 이 오동나무는 나의 진영안의 물건이고 나라 재산이다.”

 

병사들은 좌수사님의 명을 어기면 혼이 난다고 울상이 되었지만 이순신은 추상같이 호령했습니다.

 

여봐라, 이놈들을 당장 내쫓아라.”

 

분노의 눈에는 핏발이 서고 식은 땀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는 나라의 귀한 재산을 사사로운 일에 쓸 수 없다고 단호히 막아버렸습니다.

 

수군절도사 성박은 성이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이순신의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에는 어찌하는 수가 없었으며 오동나무는 권세로 끝내 베이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41살이 되던 1586년 조산포 만호로서 녹둔도 둔전관(군대들이 자체로 농사를 지어 군량을 해결하는 일을 맡아 하는 관리)을 겸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곳에 내려오니 군사의 수가 적은 것이 제일 걸리는 문제였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인원을 보충해줄 것을 상부에 제기했으나 병마절도사라는 자는 이에 귀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밤 이순신은 자기의 애달픈 심정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한산섬 달 밝은 밤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어 놓느냐

 

 

이순신의 애국충정을 짐작케 하는 글입니다.

 

그는 자체로 병력을 꾸려나갔고 무기들을 제조해냈습니다.

 

이 시기 나라의 방비가 약한 틈을 타서 여진족들이 조산포에 기어들었습니다.

 

그때 이순신은 앞장에서 기묘한 전술로 적의 두목을 꺼꾸러뜨리고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일망타진했습니다.

 

이것은 장군이 나라 위한 싸움에서의 첫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이때 병마절도사는 이순신의 공로를 시기하여 그가 싸움에서 패했다고 조정에 거짓보고를 했습니다. 구실을 만들어 장군을 없애버리고 자기의 죄를 면하려 한 것입니다. 이로 해서 이순신은 죽음을 겨우 면하고 관직에서 떨어져 병졸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애국충정만은 누구도 허물 수 없었습니다.

 

이순신은 43살에 정읍현감으로 올라갔고 그 다음 진도군수로 되었다가 1591246살 때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이순신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되자 사간원의 편협한 자들이 이것을 반대해 나섰습니다. 벼슬이 올라가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사람됨을 잘 아는 우의정 유성룡이 인사문제를 보는 이조판서를 겸하고 있었기에 이것을 눌러버렸습니다.

 

이에 선조 왕도 딱 잘라 거절했습니다.

 

이순신의 사람됨을 뜯어고치라면 고칠 수 있겠는지는 모르겠다마는 좌수사에 임명한 벼슬만은 다시 고치지 못한다.”

 

이순신의 급제는 집안의 경사였습니다.

 

당시 그에 대한 평은 몸집이 크고 말이 없는 사나이, 아첨기란 조금도 모르는 것이 이었습니다.

 

이순신이 처음 임명되어 갔을 때 수군의 형편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함선들은 깨어져 거의 쓸모가 없는 것들이었고 그 수도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규율도 문란했습니다.

 

이순신은 바다로 기어드는 적은 바다에서 쳐야 한다는 주장 밑에 일부 관료배들이 육군만을 중시하던 견해를 바로잡고 수군강화에 낯을 돌리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수군의 규율을 강화하고 정연한 명령체계를 세웠으며 참모장격인 우후를 비롯한 지휘관들이 자기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엄격히 통제해나갔습니다.

 

이와 함께 수군기지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군사들과 인민들을 동원하여 성을 쌓고 봉화대를 보수하고 항구를 정비했으며 적의 배가 바다에 들어서지 못하도록 쇠줄을 가로 매어 수중장애물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언제나 병사들과 자신을 따로 세워 본적이 없었습니다. 하기에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느 때고 내가 거처하고 있는 좌수영에 와서 여러분의 눈으로 확인하십시오. 여러분들이 보리밥에 나물국을 먹을 때 내가 쌀밥을 먹는다면 그것은 내가 곧 여러분을 배반했다는 증거로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명이불을 덮고 잘 때 나도 무명이불을 덮고 잘 것이며 여러분이 적과 싸운다면 나는 안전한 곳에서 호령만 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과 생사를 같이 한다는 것, 이것이 곧 나의 신념입니다.”

 

이 말은 병사들의 가슴을 울리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말로만 아니라 실지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언제나 수군병사들 속에서 그들과 함께 무기를 만들었고 적을 치기 위한 전술을 의논했습?다.

 

특히 이순신은 수군의 전투력강화에서 세계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을 건조했습니다.

 

그는 수공업자들과 수군병사들의 지혜와 기술을 모아 배우에는 송곳 같은 큰 쇠못을 세운 철갑이 씌워져 있고 여러 문의 화포로 장비된 위력한 전함인 거북선 건조에 성공한 것입니다.

 

거북선이 위력 있는 싸움배였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화약을 이용하고 여러 가지 포들로 장비된 철갑선이라는 것입니다.

 

거북선은 우에는 판자를 덮고 또 그 위에 열십자의 좁은 길을 내놓고는 전체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 발을 붙일 수 없게 했고 좌우 양쪽으로 각각 여섯 곳에 총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등에는 쇠못을 꽂았으며 배안에서는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되었으나 밖에서는 전혀 안을 들여다볼 수 없게 했고 수백 척의 적선이라도 뚫고 들어가 화포를 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구조를 자세히 뜯어본다면 나무판 10쪽을 잇대어 만든 본판(밑판)의 길이는 648치였고 좌우측 현판이 우로 올라가면서 길어지고 일곱 번째 판의 길이는 113자였으며 바닥의 높이는 75치에 이르렀습니다.

 

판자들의 두께는 어느 것이나 치였고 배의 머리, 허리, 꼬리부분의 너비가 각각 12, 145, 106치였습니다.

 

배의 길이와 너비 비율이 81이고 높이와의 비율은 21입니다.

 

그 모양은 포물선형태이며 앞뒤로 길쭉하고 높이는 낮습니다.

 

노가 좌우에 각각 10개씩 달렸고 그 속도는 당시 배들의 것으로 볼 때 가장 빠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운행 중의 안정성을 위해 좌우 쪽 2층판 가운데 아래 칸 방들에 무기와 철물 등 무게가 나가는 전투기재 들을 쌓아 두게 했습니다.

 

또한 각종 화포들을 26개나 싣고 좌우와 앞뒤 할 것 없이 마음먹은 대로 불벼락을 날릴 수 있는 배였습니다.

 

이런 특이한 배이므로 일본군의 한 병사는 이것을 자기 눈으로 보고 금시 두 눈을 크게 뜨더니 비명을 질렀다는 것입니다.

 

온통 철로 장비한 배가 있어서 일본의 포로써는 깨뜨릴 수가 없습니다.”

 

또한 명나라 군사기술책의 하나인 ?해방의?에는 조선의 거북선에 대하여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조선의 거북선은 배 돛을 세우고 뉘고 마음대로 하고 바람이 거슬러 불거나 밀물이 빠지거나를 막론하고 언제나 다닐 수 있다.”

 

이순신은 이런 위력한 전함을 여러 척 건조했고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여 전투조법과 사격에 익숙하도록 준비시켰습니다.

이러한 때인 1592413일 일본 놈들은 토요도미 히데요시의 총 지휘 하에 20만 대군으로 우리나라를 불의에 침공해 왔습니다.

 

이조봉건정부에서는 그제야 수습대책을 세우느라고 소동을 피웠으나 적의 대군을 막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선봉장인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거느린 일본침략군의 한 무리는 상륙한지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을 강점했습니다.

 

그리고 가도 기요마사(가등청정)가 이끈 한 무리는 함경도에 침입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악랄하게 감행했습니다.

 

그러나 왜놈들은 우리 군민의 불타는 애국심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순신은 왜적을 기어이 소탕하고야 말리라는 자기의 열화같은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바다를 두고 충성 맹세하니

바다고기와 용도 감동하고

산을 두고 큰 뜻 다짐하니

풀과 나무도 이 마음 알리로다.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거만한 놈들의 오산을 깨뜨리고 첫 승리의 개가를 올린 것은 15925월에 있은 옥포해전이었습니다.

 

왜구의 침공소식에 접한 이순신은 함선과 전투기재들을 정비하고 좌수영 관하 수군들을 총 동원했으며 바닷가 고을 장정들을 수군에 입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419일 하루사이에 이순신부대에 입대한 병사만 해도 700여 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경상도수군은 지휘관인 원균의 비겁함으로 해서 싸워보지도 못하고 싸움배와 전투기재들을 바다에 버린 후 모두 도망치려고 했습니다.

 

이순신은 54일 출전의 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판옥선 24척과 협선 15, 포각선 46척 등 모두 85척의 배를 이끌고 본영을 떠나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는데 거기에 적의 배 50여척이 정박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적은 육지에 올라 약탈한 물건들을 배에 싣고 있었습니다.

 

이순신은 맹렬한 공격으로 적선을 바다기슭으로 압축하면서 불화살을 쏘고 화포를 퍼부어 격침 격파했습니다.

 

옥포싸움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26척의 적선을 격침했고 동쪽으로 내려오면서 연이어 18척을 불살라 버림으로써 그날 싸움에서 44척의 적함을 바다에 처넣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적을 살상하고 쌀 300여 섬과 적지 않은 무기, 군수물자들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것은 임진조국전쟁에서 우리 군대가 거둔 첫 승리였습니다.

 

차출전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둔 이순신은 차작전에서 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529일 사천 앞바다에 도달한 조선수군은 거북선을 적선사이로 돌진시키면서 총통으로 포탄을 퍼부었으며 거북선의 뒤를 따라 학익진’(마치 학이 나래를 편 것과 같은 전투서렬)을 펴가면서 적진을 향해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결과 일거에 12척의 함선을 침몰시켰습니다.

 

당포와 당황포에서의 싸움에서도 74척을 격침시키고 적함과 적장 10여 놈을 비롯하여 수천의 적을 소멸했습니다.

 

이순신은 적선을 치는 데 유리한 계선까지 적들을 유인한 다음 양쪽 측면으로 포위진을 치면서 거북선을 앞세워 공격해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적의 주력인 구로시마함대를 전멸시키고 침략자들에게 만회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적의 우두머리인 고니시 유끼나가는 조선수군의 활동을 저지시켜보려고 이순신에게 이런 글을 보내어왔습니다.

 

일본의 장수들은 모두가 화친을 희망하여 무기를 걷어가지고 돌아가려 하니 당신들도 함선을 이끌고 속히 본거지로 돌아갈 것이며 일본 군사들의 군영에 접근하여 쓸데없는 싸움을 일으키지 말 것이다.”

 

장군은 이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적들이 있는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은 모두다 우리 국토인데 우리에게 일본군영에 접근하지 말라는 것은 무슨 이유이며 우리에게 본래 있던 지역에 즉시 돌아가라고 하니 돌아갈 곳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기지에 돌아온 이순신은 적들의 새로운 작전을 격파하기 위한 차출전을 단행했습니다.

 

그는 78일 조선함대를 이끌고 견내량으로 향했습니다.

 

좁은 해협인 견내량에서는 거북선이 자유로이 활동할 수 없으므로 한산섬 앞바다로 적들을 유인했습니다.

 

거짓 퇴각하는 조선수군의 유인술에 걸린 왜적들은 드세찬 수군의 공격에 도주할 구멍만을 찾았습?.

 

각종 포들이 세차게 불을 뿜었고 드넓은 한산 앞바다는 연속 적선을 삼켜버렸습니다.

 

바다의 거물인 거북선에 올라 적진 깊이까지 들어가 맹활약하는 이순신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수급을 따는 데 정신을 팔지말고 오직 싸우는 데만 힘쓰라!”

 

수군병사들은 적선에 뛰어올라 왜놈의 목을 가차없이 베어버렸습니다.

 

한산도해전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적선 73척 가운데서 59척을 격침시키고 적병 천여 명을 소멸하는 대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싸움을 역사에서는 한산대첩’(한산에서의 큰 승리)이라고 합니다.

 

조선수군은 이어 안갈포해전에서 40여척의 적함을 격침시키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8월말에 4차로 출전했으며 91일에는 470여척의 적선이 집결되어있는 부산항으로 166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대담하게 공격해 들어갔습니다. 

 

이 전투에 대하여 이순신은 정부에 올린 보고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전후 네 차례 전쟁에 참가하여 열 번 접전에서 매번 승리했다고는 해도 장병들의 공로로 말하자면 이번 부산 앞바다 싸움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전번 바다싸움에서는 적선의 수효가 많아야 70여척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번에는 470여척의 적선이 늘어선 가운데로 위풍당당하게 뚫고 들어가서 온 종일 공격하여 적선 100척을 격침하여 적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했으며 겁에 질려 목을 웅크리게 했습니다.”

 

부산항전투에서 조선수군은 적들에게 만회할 수 없는 타격을 안겼습니다.

 

이순신의 지휘 하에 조선함대의 승리는 일본침략자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완전히 파탄시켰으며 평양과 함경도 일대에 기어든 일본 육군이 더 견지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의 명망이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원균은 그를 모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원균으로 말하면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로서 일본군의 침입 시 겁에 질려 도주했다가 이순신의 배에 붙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자였습니다.

 

원균은 이순신을 걸어 그는 해상에서는 안하무인의 왕이 되려한다느니, 1차해전 때에는 마지 못해 움직였다느니, 하는 등 터무니없는 죄를 들씌워 그를 통제사로부터 해임시키는 동시에 서울로 압송하려 했습니다.

 

이순신이 죄인으로 몰려 한산도를 떠날 때 수군병사들은 그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흐느껴 울면서 놓지 않았고 인민들은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절도사님, 우릴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우린 누구와 싸운단 말입니까?”

 

그리고 조정의 많은 관리들도 이를 반대했으며 함경도에서 과거를 보려고 서울로 올라온 문인들과 무인들은 자기들은 벼슬자리를 하지 않고 병졸로 살겠으니 장군을 석방해달라고 상소했습니다.

 

한편 이순신을 걸고 늘어져 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은 싸움마다 패했습니다. 1597월 원균은 칠천도 앞바다에서 적들에게 크게 패하여 조선함대를 전멸상태에 몰아넣었을 뿐 아니라 자신도 죽었습니다.

 

적들은 다시금 3개부대로 맹공격을 해왔습니다.

 

조정에서는 8월에 이순신을 3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순신의 재임소식에 접한 장병들과 인민들은 여수로 가는 길가에 서서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들 중에는 철룡이라는 청년과 그의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그들 부자는 모두 이순신에게 참전을 요청했습니다.

 

철룡은 수군에 참전하라. 하지만 아버님이야 그 나이에 군역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저는 바다에서 잔뼈가 굵어왔소이다. 그러니 이 난시에 수군에 나서기를 주저한다면 어찌 이 땅에 태를 묻은 인간이라 하겠소이까?”

 

그렇다면 부자간이 모두 참군하도록 하라.”

 

이렇게 철룡이의 부자는 참군이 허락되었습니다.

 

이순신은 이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슬픈 소식을 받았지만 조금도 흔들림 없이 국난을 먼저 생각하여 마음을 다잡고 수군영을 향해 걸음을 다그쳤습니다.

 

이순신이 당도하니 전함 12척과 120여명의 수군병사들이 그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다시금 함대를 일떠세우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력을 다했습니다.

 

이조봉건정부에서는 수군의 형편을 걱정하여 당분간 육지에 오를 것을 권고했습니다. 그러나 이순신은 이런 편지를 왕에게 올렸습니다.

 

임진년(1592)으로부터 5~6년 동안 적들이 감히 전라, 충청 두 도를 공격하지 못한 것은 그 중요한 이유가 우리 수군이 그 길목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의 전함이 오히려 12척이 있사오니 죽을힘을 다하여 싸워 막는다면 아직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만일 수군을 전폐하면 이는 적이 다행으로 여길 바이며 그것은 장차 충청도를 거쳐 한강에 다달을 것이니 이것이 저의 걱정입니다. 전함이 비록 적으나 변변치 못한 제가 아직 죽지 않은 조건에서 적들은 감히 우리를 없이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순신은 수군대열을 수습하는 한편 수군기지를 진도로 옮겼습니다. 따라서 수군대열은 늘어나고 무기와 군량도 점차 확보되어갔습니다.

 

914일 이순신은 200여척의 적선이 전라도로 향하고 있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이순신은 울돌목(명량해남군과 진도사이의 바다)에서 적들을 칠 작전구상을 무르익히고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때 철룡이 부자가 찾아왔습니다.

 

수군통제사님, 바로 울돌목에서 적을 쳐야 한다고 생각하나이다.”

 

철룡이 부자는 자기들의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신통히도 그것은 이순신의 작전구상과 꼭 같았습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요. 내 생각과 꼭 같구려.”

 

이순신은 철룡이 부자의 두 손을 굳게 잡아 쥐었습니다. 이렇게 찾아온 그들이 한없이 고마웠던 것입니다.

 

이순신은 울돌목에 쇠사슬을 늘이는 등 싸움준비와 함께 병사들을 결사전에로 불러일으켰습니다.

 

916일 아침, 330척의 적함과의 대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조선수군의 역량을 염탐한 적들은 기세등등하게 달려들었으나 이순신은 거북선을 앞세워 일자형으로 대형을 짓게 하고 포화를 들씌웠습니다.

 

적장 구로시마가 탄 적 지휘함을 일격에 격침시킨 이순신은 썰물 때를 기다리면서 적함을 맹렬히 공격했습니다.

 

썰물이 시작되자 좁은 물목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적함들은 이미 앞서 걸어 놓은 쇠사슬에 걸려 부딪치고 깨어지며 일대 혼란에 빠졌습니다. 이날의 울돌목해전에서 이순신은 10여척의 전함으로 30여척의 적선을 격침시키고 4,000여명의 왜적을 소멸하는 대전과를 거두었습니다.

 

이순신은 15982월 지휘처를 고금도로 옮기고 함대재건을 다그치면서 연속 적군을 들이쳐 승리를 안아 왔습니다.

 

여기에 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 이순신은 운극당에서 지휘관들과 함께 함대를 강화하기 위한 일을 의논하다가 늦게야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런데 휘영청 밝은 달밤, 순찰장교들의 말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오늘밤은 우리 수군이 편히 보낼 수 있겠네. 달이 이처럼 휘영청 밝으니 말일세.”

 

이순신은 금시 자리를 차고 일어났습니다. 이런 밤이면 적들이 준동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순신은 순찰장교들을 불러 싸움준비를 하도록 하며 구체적인 임무를 주었습니다.

 

웬 일이야. 이런 좋은 밤에

 

병사들과 장교들은 이순신의 의도를 모르고 머리를 기웃거렸습니다.

 

이때 척후로 나갔던 배들이 급히 달려와 적들의 기동에 대해 보고하는 것입니다.

 

이순신은 금시 전함들에 임무를 준 다음 때를 기다리게 했습니다.

 

야음을 이용하여 불의습격으로 조선수군을 요정 내려던 적들은 거침없이 달려들었으나 만단의 준비를 갖춘 우리 수군은 포를 쏘고 불화살을 날려 순식간에 모두 물귀신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싸움은 우리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정말 우리 통제사 어른은 귀신보다 더 신묘하단 말이야.”

 

글세. 적의 래습을 어떻게 미리 알았을까?”

 

병사들은 이순신에게 물어왔습니다.

 

통제사님, 어쩌면 그렇게 귀신처럼 알아맞혔소이까?”

 

이순신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그거야 지난 밤 자네가 순찰을 돌면서 나에게 귀띔해주지 않았나.”

 

제가 말이오이까?”

 

그렇다네. 내가 귀신보다 더 신묘해서 싸움에서 이긴 것이 아니라 자네들이 일깨워준 덕분에 지난 밤 해전에서 이긴 것이지.”

 

15988월 연전연패에 울화가 치밀어오른 도요도미 히데요시가 죽어버리자 왜놈들은 500척의 함선을 들이밀어 총 퇴각을 기도했습니다.

 

이순신은 한 척의 적선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을 작정을 했습니다.

 

빠져나갈 길을 찾던 선봉장 고니시는 몇 척의 배에 뇌물을 실어 이순신에게 보내면서 귀로를 열어달라고 애걸했습니다.

 

이순신은 이에 크게 분개했습니다.

 

임진년이래로 적을 무수히 잡아 이미 얻은 총검도 산같이 쌓였는데 또 원수의 물건을 무엇 하랴?”

 

우리나라 사람은 왜놈의 대가리를 보물로 치는데 이따위 총검이 무슨 보물이냐?”

 

이순신은 적의 요구를 일축해버렸습니다.

 

1119일 아침 이순신은 500여척의 적선이 있는 노량(전라남도 남해군)으로 출격했습니다. 이순신은 불 붙는 배들을 적진 속에 돌입시켜 적선들이 화기를 피해 관음포에 몰려들게 했습니다. 이리하여 적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고 해전사에 없던 대격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수군은 적들에게 연속 무리죽음을 주었고 적선을 불 태워버렸습니다.

 

그러나 최후 발악하는 적들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싸움은 처절했습니다.

 

적들은 저들의 수적 우세만을 믿고 덤벼들었습니다. 이순신은 거북선의 재빠른 기동과 위력한 포화의 힘으로 적진을 혼란에 몰아넣었고 점차 포위망을 좁히면서 드센 공격을 들이댔습니다.

 

싸움은 바야흐로 조선수군의 승리로 끝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이 순간 왜구의 흉탄이 이순신의 옆구리를 꿰뚫었습니다. 이순신은 넘어지면서 곁에 있는 맏아들과 조카를 시켜 방패로 몸을 가리게 했습니다.

 

지금 싸움이 한창이니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은 지휘기발을 조카인 이완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때 리순신의 나이는 53살 한창이었습니다.

 

이날 노량해전에서 조선함대는 무려 200여척의 적선과 만 여명의 적병을 바닷물 속에 처넣었습니다. 승리의 함성 드높이 병사들은 이순신을 찾았습니다.

 

통제사님이 돌아가셨다는 이완의 대답에 병사들은 땅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통제사님이 가시다니. 아 쇳덩어리 같은 사람도 과연 간단 말인가.”

 

우리를 두고 정녕 가셨단 말이오이까?”

 

병사들은 주먹으로 두 눈을 문지르며 이순신을 마구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머리를 들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7년간이나 계속되던 임진조국전쟁은 노량해전의 대승리로 막을 내렸습니다.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 왕도 통곡했습니다.

 

그대가 이 나라를 건졌도다! 하건만 이 땅에 이미 그대가 없으니 이 원통함을 어디에 하소한단 말인가.”

 

선조 왕은 이순신의 장례를 국장으로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조국에 바친 명장 이순신의 애국지성은 역사에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실학자 이수광은 ?충무사?에서 이순신을 찬양하여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거룩하여라 이 나라 구원하신 장군이시여

백절불굴하여 우리 조선 살렸구나

 

 

1905년 노일전쟁 당시 러시아의 발트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해군제독 도고 헤이하찌로는 ?전승기념연회?에서 당신이야말로 트라파르가해전에서 연합함대를 격파한 영국의 해군제독 넬슨을 능가하는 군신이라고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알기에는 넬슨은 군신으로 될 만한 가치가 없다. 진짜 군신이라고 말할만한 사람은 조선의 이순신장군이다. 나는 그에 비하면 그의 하사관에도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이순신은 세상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한 바다싸움의 명장이었습니다.

 

이순신의 봉분은 그의 고향인 아산에 있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로서는 ?이충무공전서?(14)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칼이 바로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의 시조에 있는 장검으로 부르는 대도이다. 이 칼은 임진전쟁 증 선조 27(1594) 4월에 진중에서 만들어진 칼이다. 당시 칼을 만드는 대표적인 명가로 이름남 태귀련과 이무생이 만든 것입니다.

칼의 길이는 각각 197cm, 196.8cm이고, 칼집을 빼고 잰 무게는 4.32kg, 4.205kg이다.

칼집은 끝부분에 은으로 된 장식이 붙어있으며 칼을 찰 수 있는 끈이 붙어있다.

장검의 손잡이에는 남색 천을 열십자로 감겨있다. 칼날 끝에는 덩굴무늬를 새기고, 칼등에는 홈이 파여 있다. 손잡이부분은 두 손으로 잡을 수 있도록 길고 약간 휘어져 있다.

장군의 친필 검명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三尺誓天 山河動色

一揮掃蕩 血染山河

석자 칼로 하늘에 맹서하니 산하가 빛이 변하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로써 산하가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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