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은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부산항 매립*을 위해 주변 산을 깎아서 사용했다. 그 산 주변이 바로 일본인들이 살던 왜관 일대다. 산을 허물면 일본 사람들의 묘를 이전해야 했으니 그것들을 옮겨간 곳이 바로 아미동이었던 것이다.
1966년 아미산 대성사大成寺 주지 김한순* 스님이 아미동 비석마을*의 한 가정집에서 문지방으로 사용되고 있던 일본인 묘지 비석을 절로 모셔 왔다. 저간의 사정은 이러하다. 당시 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땅 밑에 묻힌 보물을 찾아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마침 비석마을에 살던 한 주민이 집안에 우환이 있다고 집안을 살펴달라고 찾아온 것이다. 이에 그 집을 찾아가 보니 원형 기둥으로 된 비석이 그 집의 문지방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연꽃 모양의 기단은 뒷집의 축대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다.
김한순 스님은 묘지를 잃은 일본인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이 비석을 대성사로 옮겨 왔다. 비석은 원형을 그대로 살려 옮겨올 수 있었지만, 축대였던 기단은 옮길 수가 없어서 따로 만들어 설치했다. 이후 대성사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백중 때마다 제사를 올리며 갈 곳 잃은 일본인 영혼들을 위로하고 있다. 비석의 길이는 1m 20cm에 지름은 40cm로, 앞면에는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이라는 불교 경전의 제목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비석이 처음 묘지에 세워진 ‘대정 8년 7월 30일(大正八季七月三十日)’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다.
*부산항 매립
부산은 옛날부터 무역 요충지였다. 조선 시대에는 부산이 일본과 가장 가깝기 때문에 일종의 상공회의소와 대사관 역할을 했던 왜관이 설치됐고, 이곳에서 많은 교역이 이뤄졌다. 이를 바탕으로 동래 내상은 조선 시대 후기에 대표적인 상인 집단 중 하나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다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라 ‘부산항’이라는 이름으로 개항이 이뤄진다. 강화도 조약과 1877년 부산항 조계 조약을 통해 과거 초량왜관 자리에 일본인 전관거류지專管居留地(행정권·경찰권·자치권 따위가 단독으로 행사되는 지역)도 조성됐다.
부산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숫자가 늘어나고 무역량이 증가하자 새로운 항만 시설과 주거 구역의 증대와 함께 매립 공사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부산의 근대적 매축 공사는 1888년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주선으로 현재 부산데파트 동쪽 지역의 용미산 일대를 매립한 것이 그 시작이다. 이후 1902년 북빈北濱 매축埋築 공사를 시작으로 영선산 착평鑿平 공사, 부산진 매축 공사, 남빈 매축 공사 등이 진행되면서 부산의 해안선과 도시 공간은 큰 변화를 겪는다.
일본은 1898년 부산매축주식회사를 설립해 현재의 부산데파트와 부산우체국, 부산연안여객터미널, 중앙로와 세관 일대를 매립하는 북빈 매축 공사를 대한제국 정부에 요청했다. 그 결과 1902년부터 1908년 사이 1‧2기에 걸쳐 일대의 바다를 매립해 4만 1374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현재 중앙동 일대의 도시공간이 만들어진 게 이때다. 북빈 매축은 전관거류지에 한정돼 있던 일본인들의 생활 영역을 현재 원도심이라 부르는 동구‧남구 일대와 부산 북부 지역까지 넓히는 발판이 됐다.
일제는 북빈 매축에 이어 1909~1913년 영선산 착평 공사를 실시했다. 용두산 주변의 일본인 거류지와 조선인 마을인 초량 사이를 가로막는 해발 50㎡의 영선산과 영국영사관산을 무너뜨려 14만 8033㎡를 매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초량 정차장과 부산항 사이의 바다를 매축하는 공사로, 오늘날 중앙동 사거리 일대의 일명 ‘새마당’이라는 넓은 평지가 만들어졌다. 1983년 2월 부산직할시가 세운 새마당 ‘매축 기념비’가 있다.
일제는 북빈 매축과 영선산 착평 공사에 이어 부산 지역의 활동 공간을 동북쪽으로 확대하려 했다. 군사 시설, 철도‧도로 시설, 그리고 산업 시설의 공간을 만들기 위한 부산진 매축 공사가 그것이다. 1912년 매축공사의 시행 기업으로 설립된 조선기업주식회사는 부산항의 북부인 구관舊館(부산 동구 수정동‧두모포 왜관이 있던 곳)에서 부산진釜山鎭에 이르는 약 132만 2314㎡(40여만 평‧실제 측량 결과 55만 8150평)를 40만 원에 매입하고 조선총독부로부터 매축 허가를 받아 1913년 3월 31일 제1기 매축 공사에 들어갔다.
1912~1917년 1기 공사 때 조성된 부지 중 약 10만 평 규모의 공터는 1918년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당시 조선으로 이동한 일본군이 머무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2기 공사는 1926년부터 1937년까지 실시됐는데 현재의 자성대 앞쪽 범일동 일대와 우암동 앞바다 30만 5000평을 매립해 부지를 조성했다. 이곳에는 미곡 창, 철도 관사, 경찰서, 우체국, 초량역, 부산진역, 학교 등의 생활시설이 들어섰으며 1930년대 이후에는 대규모 공업단지가 조성됐다. 부산 동구 수정2동에 위치한 동부경찰서 정문 우측에 ‘부산진 매축 기념비’가 있다. 화강암 재질의 비 앞면에 ‘釜山鎭埋築紀念碑’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는데, 1939년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중앙로는 남포동에서 서면까지 이어졌다.
이와 함께 부산항에 제1 잔교와 제2 잔교를 설치하는 공사도 진행됐다. 이렇게 만들어진 잔교를 통해 부산항은 대륙 운송과 해상 운송을 연결하는 중요 시설로 변모하게 된다.
이들 지역뿐만 아니라 영도 지역의 공업용지 확보를 위한 대풍포 매축공사(1916~1926)와 현재의 자갈치‧충무동‧남포동 해안 일대를 매립하는 남빈 매축 공사(1925~1940)도 실시됐다. 대풍포 매축은 본격적인 영도 개발의 시작이었다. 대풍포 일대는 매립 이전에도 거친 파도를 피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는데, 매축 이후 조선소와 포구 등이 들어서면서 번창했다. 광복 후인 1947년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지길 바라는 뜻에서 풍風을 평平으로 바꿔 ‘대평동大平洞’이라 했다. 남빈南濱은 일제강점기 매립된 부산 중구 남포동 해안인 남포南浦를 가리킨다. 광복 이후 일본식 지명을 바꿔 남포로 개칭했다. 부산항은 북항 제1 부두가 매축‧건설되기 전에는 부산포였는데 부두가 건설되면서 북빈으로 불렸다. 여기에 더해 영도와 부산을 잇는 절영도 대교 가설 공사까지 완성됨으로써 현재 부산 원도심의 모습이 거의 형성하게 된다.
북빈 매축과 부산진 매축, 영선산 착평 공사 등을 통해 부산의 해안선은 크게 달려졌다. 그 배경에는 전관거류지의 확장을 일본의 식민지 확장과 동일하게 생각했던 일본 정부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과거 동래로 대표되는 부산의 공간은 전근대 공간으로 바뀌었고 부산포, 즉 현재의 원도심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부산이 근대의 공간으로 재편됐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시행된 부산의 여러 매축 공사는 전근대의 공간 부산포에 근대의 공간 부산 즉 일본의 전관거류지를 확장하려는 일제의 야욕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만들어진 근대 문명의 혜택은 대다수 식민지 조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일본인과 미래의 일본을 위한 것이었다.
*비석마을
부산 아미동 산 19번지 일대. 감천고개에서 산상교회 주변으로 이어지는 지역으로,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공동묘지가 있었던 곳이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열차로 부산에 도착한 피란민들은 부산역 일대를 중심으로 피란촌을 꾸려 나갔다. 아미동의 경우 16, 17, 18, 19동 일대에 집중적으로 피란민들이 분포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의 공동묘지였던 이 지역은 피란민들의 움막으로 채워져 나갔는데 공동묘지의 비석들은 건축 자재로 사용됐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산속이든 묘지 위든 가릴 게 없었던 사람들은 경사가 심한 아미동에서 집의 축대로 사용할 수 있었던 묘지 터 위에 집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집을 지을 마땅한 재료가 없던 시절이라 비석과 상석은 축대를 쌓고 계단을 만드는 건축 자재로 쓰였다. 지금도 아미동 일대의 계단이나 담장, 바닥, 문지방에는 이때 피란민들이 사용한 비석들이 곳곳에 박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비석마을은 한국 근대사의 큰 아픔이 새겨진 곳이다. 죽음과 슬픔의 장소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났다. 도시재생, 산복도로 르네상스 사업 등이 펼쳐지면서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고 소통과 화합의 밝고 희망적인 문화마을로 바뀌고 있다.
*김한순
김한순(1936~2006) 전 한국불교전통문화예술원장은 반승반속半僧半俗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1980년 제6호 부산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부산농악의 뿌리인 아미농악을 정리한 이다. 풍물패를 따라 전전하던 김한순은 1963년 부산 아미동에 대성사라는 절을 세우고 정착했다. 승려로서 절을 세운 것이지만, 김한순은 대성사를 자신이 속한 풍물패의 사무실과 연습 장소로도 활용했다. 그의 평생소원은 당시 아미동 일원에 전해지던 아미농악의 온전한 복원과 전승이었다. 생과 사가 교차하고 아픔과 치유가 엇갈리는, 지난한 삶이 있는 곳에는 그 한을 풀어내는 소리와 몸짓이 있기 마련이다. 굿이라 해도 좋고 풍물이라 해도 좋을 그것을 아미동 주민들은 농악으로 표현했다. 김한순은 당시 제각각 흩어져 있던 아미동의 농악을 아미농악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했고, 이후 부산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거듭나게 해 마침내 문화재가 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