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자의반 타의반 방콕을 했다. 혹한(酷寒), 빙판길, 감기를 핑계 삼아 집에 칩거했지만 정초부터 굳이 꼭 가야 할 곳이 없는 내 탓이니 정확하게 말하면 자의(自意)가 9할인 셈이다. 소인(小人)이 집에서 빈둥빈둥 한가해지니 온갖 잡념만 폭설이 되어 쏟아지고 눈보라 치는 벌판에 홀로 선 것처럼 허허롭다.
귀가 순해져 듣는 대로 모두 이해할 수 있다는 이순(耳順)을 넘기고 또 속절없이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지만 객관적인 이해는커녕 오해나 늘지 않을까 걱정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는데 이게 거짓말임은 그야말로 공지(共知)의 불편한 진실이다. 숫자 이상의 부정적 함의(含意)를 누구나 알고 있다. 자기최면을 걸기 위한 일종의 허세(虛勢)요 초조감의 발로라는 사실을 이심전심으로 감추고 있다. 그러기에 공자님도 인생 길목마다 불혹(不惑)이니 지천명(知天命)이니 이순(耳順)이니 하는 이정표를 세우며 나이 듦에 자부심을 부여했지만 아마 이 분도 이걸 후세 사람들이 믿고 따르리라 기대는 안 하셨으리라 믿는다.
나이 먹는 게 진정 좋은 것도 있다. 내려갈 길만 남은 등산길의 여유로움이랄까, 숨이 턱에 차게 올라갈 깔딱 고개가 없다는 안도감이랄까, 연초가 되어 거창한 결심을 하지 않아도 되고 계획의 포로가 되어 자괴감에 빠지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이 있어 좋다.
연초가 되면 덕담으로 “행복하세요” 란 말을 많이 주고받지만 올해는 유난히 행복이란 말이 지천(至賤)이다. 너도나도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나서고 감투에도 주택에도 기금에도 행복이란 말로 작명을 해서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 오히려 구체적이고 형이하학적인 정치용어가 된 것 같다. 아무튼 이렇게 나라에서 백성의 행복을 세세히 신경 써 주는데 감히 나는 불행해요 하면 무능력하거나 눈치 없는 사람이 되기 십상이다.
인간의 행동은 인식, 생각, 실행, 회고의 네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이제 이순을 넘은 하산길에 저 산 너머 행복이 있을까 하며 숨가쁘게 올라온 등산길을 창밖 흩날리는 눈발을 보며 복잡한 생각 따윈 제처 놓고 뒤 돌아 보는 것도 방콕의 조그만 즐거움이 아닐까 한다.
행복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행복한 사람은 무엇을 성취한 사람일까?
세속적이고 즉물적인 관점에서 보면 출세, 돈, 건강을 두루 갖춘 사람을 우린 흔히 행복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건 대형 서점에 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출세(성공), 재테크, 건강에 관해 따로 마련한 코너마다 수많은 책이 쌓여 있어 행복을 전시하며 팔고 있다. 마치 책 속에 성공과 돈과 건강이 가득 담겨 있어 책만 읽으면 제비가 물어다 준 흥부 박 속의 금은보화처럼 행복이 쏟아 질 것 같다. 시시껍절해서 이런 책에서는 활자화되지 않을, 내가 보고 들은 이야기 몇 가지를 하겠다.
첫째 이야기: 출세하기
나는 오래 전에 한 유명한 C.E.O.로부터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일찍 출세하여 드물게 오랫동안 현직에 있는 장수(長壽) 전문경영인이어서 그 성공의 비결을 청해 듣는 자리였다. 이런 자리라면 으레 나오는 진부한 성공담, 예컨대 성실해라, 창의력을 가져라, 외국어 실력을 길러라 등등 대신에 그는 놀랍게도 아주 솔직하게 단도직입적으로 그의 출세의 비결, 그것도 롱런(LONG-RUN)의 노하우 세 가지를 털어 놓았다.
먼저 적당한 실력을 가지란 것이다. 뛰어난 실력을 갖지 말고, 자랑도 말고, 그럴 필요도 없다는 거였다. 한 명의 천재가 십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요즘의 첨단 과학시대의 천재경영론과는 동떨어진 말이긴 해도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 남아야하는 샐러리맨에게는 충분히 공감이 가는 거였다. 실력이 탁월하면 자연스럽게 주위에 적이 많이 생겨 바짓가랑이 잡으며 질시하고, 험담하고, 심지어는 무고(誣告)까지 당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더욱이 배고픈 것보다 배 아픈 걸 못 참는 전통과 유구한 단일 민족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말이다.
두 번째가 끊임없이 아부하라는 것이다. 누구도 대놓고 공개리에 본인이 아부를 찬양하거나 아부하는 부하를 좋아한다고는 절대로 이야길 안 한다. 그러나 조직생활을 할 만큼 한 사람은 안다. 무덤덤하게 제 할 일만 성실하게 하는 부하보다는 약삭빠르게 비위 맞추고 아부 잘 하는 부하에게 정이 더 가고 승진 시에도 손을 들어 준다는 사실을.
세 번째가 영원한 오리발이다. 자기가 수행한 업무 결과, 특히 잘못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책임을 강조하는 신상필벌(信賞必罰), 책임경영이란 말이 오히려 진부한 수사(修辭)가 되었다. 하지만 짧고 길게 살아야 할 숙명의 샐러리맨, 그래서 우선 살아남는 게 최우선인 월급쟁이에게 책임회피란 오리발은 얼마나 편리한 피난처란 말인가! 욱하는 정의감에 “내 탓이요” 하는 것은 결국 가족에 대한 무한책임과 욕먹는 것은 순간임을 몰각한 어리석은 짓이다. 그리고 한번 오리발을 내밀었으면 끝까지 버텨야지 중간에 마음이 약해지거나 정에 끌려서 감춰 두었던 닭발을 보여줘서는 안 된다. 후안무치(厚顔無恥), 강심장(强心臟), 철면피(鐵面皮)가 필수적이다.
나는 이 이야길 듣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나의 못난 점을 감추고 분칠하고 자기합리화시켜주는 고마운 말씀이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던 아무도 그에게 그래서 행복하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 자리의 관심사는 오로지 성공, 그 뿐이었으니까.
첫댓글 아! 유 광현! 너 마저도~~~
내가 느끼기엔 회장님이 약간의 반어법을 인용한 것이 아닐까?
글쎄 요즈음 사회에서 독야청청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영특하신 종선 씨가 오해를 하셨네. 아부도 못하고 오리발도 없어 출세를 못 했다고 변명을 하는 내 자신에 대한 억지합리화를 되새김질한 것일 뿐.정옹을 비롯한 성공하신 분들의 오해가 없으시길!
어쩐지 방콕행 비행기에 빈 자리가 군데군데 눈에 띄드만...
수년전부터 특히 명절이나 휴가철엔 예외없이 방콕(?)엘 가다보니
이젠 별 느낌도 없어졌음다. 그저 소일거리로 읽을 만한 책이라도
곁에 있으면 그나마 다소 위안이 되지만...
플라톤의 행복의 조건에 보면
먹고 살기에 약간은 부족한 재산.모든사람이 칭찬하기엔 약간 부족한 외모.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절반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명예...등임다.
아마도 유형이 너무 넘쳐 못느끼는것이 아닌가 싶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