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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속의 희망
함석헌
1.
여기 어떤 사람이 있어 인생의 의미를 찾다가 의심에 빠져 살까 죽을까 하고 번민을 하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
혹은 그것은 가장 진지한 생활태도에서 나오는 심각한 문제라 해서 매우 동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지금으로부터 4〜50십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젊은이들을 실지로 많이 볼 수 있었고 세익스피어의 햄릿이 지금도 읽히우는 것도 그 때문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또 혹은 반대로 그것은 먹을 걱정 없는 한가한 계급이 하는 사상의 장난이라고 해서 침을 뱉을 수도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의 눈으로 보면 그럴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해주는 것이 옳을까?
이런 때에 훈계나 설교가 거의 효과가 없는 것은 경험에 비추어 봐서 환하다. 그들은 결코 살자는 의욕이 없어서도 아니요 이론적으로 생각할 줄을 몰라서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그들은 다 돌이킬 수 없는 비관에 빠졌느냐 하면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다. 자살을 하려고 다 결심을 했다가도 정작 죽으려 하니 입에 넣었던 약이 삼켜지지 않아 뱉어 버렸다 하며 물가에 다 가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다시 돌아서고 말았다는 이야기 는 흔히 있는 이야기다. 희망이니 절망이니 하는 토론은 대개 이런 따위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다 사상의 유희냐 연극이냐 하면 결코 아니다. 다만 한가지 알 것은 그 마음이 진지하고 심각은 하면서도 뭔가에 가리워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벗겨줄 필요가 있다.
그 가리워져 있다는 것이 무엇일까? 삶의 있는 그대로의 참 모습이다. 의미가 없느니 길이 막혔느니 못견디겠다느니 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가리워져서 그 참의 모습을 못보기 때문이다. 가령 파우스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가 많은 학문을 하여 관념의 세계에 빠져 산 삶의 모습을 놓쳤을 때 풀 수 없는 모순에 빠져 번민하다가 죽으려 했다. 그러나 우연히 들려오는 부활절 노래를 들었을 때 마시려던 독약의 잔을 멈추고 말았다. '무엇 때문인가? 어렸을 때의 기억을 통해 단순한 삶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테 는 “온갖 이론은 재빛 뿐이요. 푸른 것은 오직 생활의 나무”라고 했다.
괴테가 푸른 나무에서 본것을 장자(莊子)는 나비에서 보고 매미에서 보았다. 봄바람에 너풀너풀 나는 나비를 볼 때 장자는 그 속에 자기를 보았다. 그러는 장자에게 생사의 모순이 있을리가 없었다. 또 그가 보니 푸른 잎 그늘에 매미가 노래에 취하고 있는데 그 뒤에는 참새란 놈이 그것을 쪼으려고 눈독을 드리고 있었고 그 뒤를 또 보니 사냥꾼이 그 새를 잡으려 활을 겨누고 있었다. 장자는 부귀 영화의 다툼으로 서로 얽히는 인간 관계의 갈등을 거기서 보려했다. 나더러 그 그림을 조금 보충하게 한다면 이렇게 하고 싶다. 그 참새에만 취하고 있는 사냥꾼의 발꿈치를 보니 팔둑 같은 구렁이가 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죽 음의 연쇄를 끊으려고 장자가 그 구렁이를 힘껏 잡아당기는 순간 펄쩍 깨니 쥐어진 것은 제허리에 감겼던 띠요 몸에는 식은 땀이 죽 빠져 있었다.
매미가 뭔가? 노래로 민족들의 숲을 모조리 찾아다니는 리틀 엔젤스 아닌가? 참새가 누군가? 그 뒤에 서는 종교가 아닌가? 사냥꾼이 누군가? 사업가 아닌가? 구렁이가 누눈가? 정치가 아닌가? 그것을 끊어버리려면 아마내 허리가 끊어지지 않을까?
식물 동물에는 희망도 절망도 없다. 자연에는 모순이 없다. 있는 것은 오직 사람에게뿐이다.
삶은 선택을 허락치 않는 것이다. 살 수 있으면 살고 살 수 없으면 마는 것이 삶이 아니다. 좋아도 살고 싫어도 사는 것이다. 살 수 있어도 살고 살수 없어도 살아야 하는 것이 삶이다.
생명이라 하지 않던가? 生은 命이다. 살아라 하는 명령이다. 살려면 살고 말려면 마는 내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살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 삶이다. 내가 있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라는 그 절대의 명령이 나를 낳은 것이다.
잘못은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생각하는 것이 사람이지만 또 사람을 사람에서 떨어뜨리는 것도 생각이다. 내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있어서 내가 나왔다. 그것은 내 생각이다 하는 순간 사람에서 떨어져버린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은 저울의 두판 같은 것이다. 상대적이다. 삶 없이 죽음 없고 죽음 없이 삶 없으며 희망없이 절망도 없고 절망없이 희망도 없다. 삶이 좋고 희망이 좋으면 죽음과 절망도 마찬가지로 좋게 여겨야 한다. 저울이 저울 되는 데는 두판이 다 있어야지 거기 어떤 경중을 붙여서는 아니 된다. 마찬가지로 삶이 삶되는 데도 삶과 죽음의 대립 없이는 아니 된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이 생명에서는 그렇다. 그러기 때문에 삶만이 좋다고 거기 달라붙어 버리면 잘못이다. 금만이 중하다고 금놓인 판만을 들고 추가 놓인 판을 버리면 금 무게를 알 수 없듯이 삶만을 취하고 죽음을 내버리면 삶의 뜻은 없어지고 만다. 그런데 희망이니 절망이니 하는 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삶만을 취하고 죽음은 버리자는 데서 나오는 것 밖에 될 것 없다.
나라는 생각을 내버려야 삶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다. 나의 창문을 확 열어 제치고 산 세계를 바로 볼 때 거기는 이도 해도 희망도 절망도 없다. 그저 생명의 피할 수 없는 명령 이 있을 뿐이다. 거기 복종할 때 즐거움이 있다. 그 즐거움은 즐거움 아닌, 즐거운 줄도 모르는 참 즐거움이 다.
2.
오스트리아의 유명한 심리학자 빅토르 프랑클〔Viktor E. Frankl)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스의 포로 수용소에 갇혀서 가진 고통을 겪으며 몇번을 죽었다 살아 나와 그 체험을 근거로 삼아 로고데라피 (Logotherapy)라는 하나의 학설을 세웠다. 그 요점을 한마디로 말한 다면 사람은 보람에 산다는 것이다. 그 참혹한 상황 속에서 보니 사람이 어떤 보람이 있다고 느낄 때는 도저히 말과 붓으로 그려 낼 수 없는 학대에도 견디고 살아나더라는 것이다. 그래 그는 그 원리를 이용해서 절망에 빠지려는 많은 환자를 고쳐 주었다. 로고데라피의 로고란 물론 성경에 나오는 로고스 곧 말씀이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이 곧 하나님 이요,그 말씀으로 만물이 지어졌다는 그 말씀이다.
사람이 절망하는 것은 제 삶에 아무 의미가 없다 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의미가 있다 확신한다면 사람은 죽는 것도 능히 달게 받을 뿐 아니라 도리어 한 없는 영광으로 기뻐한다. 그것은 많은 순교자들이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희망이냐 절망이냐 하며 울고 웃고 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할 것은 어떤 영원 부동하는 참을 붙잡는 일이다. 위에 말했던 저울의 비유에 다시 돌아간다면 그 가운데의 대를 똑바로 튼튼히 세우는 일이다. 그 대가 수직으로 튼튼히 서서 흔들리지 않는다면 조그만 저울판을 가지고도 천만 가지를 털끝보다도 더 세밀하게 다뤄낼 수가 있지만 그 대가 옳지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지각이 있고 감정이 있는 것이 사람이지만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확실한 증거를 하려할 때는 내 눈으로 봤고 귀로 들었으며. 내 속임 없는 심정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좀 더 깊이 반성해 보면 세상 믿을 수 없는 것은 우리 눈이요 귀요 마음이다. 우리 눈과 귀는 마음의 기분에 따라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요, 마음은 그보다도 더 쉽게, 저도 모르는 저 어느 깊은 속에서 올라오는 이름할 수 없는 것에 끌려 걷잡을 수 없이 헤맨다. 그 이름 할 수 없는 무엇이 해결되기 전에는 어떤 사람도 어떤 말도 상대가 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것을 할 수 있을까? 그 하나는 위에서 말한 단순한 삶의 참 모습을 보는 일이다. 그것은 알자, 하자 하는 생각을 버리고 텅빈 마음에 돌아가지 않고는 아니 된다.노자, 장자가 가르치는 것이 이 길이다.
그 다음은 절대자에 부딪치는 일이다. 사람은 우주 안에 사는 동시에 또 생각함으로 인하여 제 안에 우주를 가진다. 그리하여 내적 세계를 창조한다. 그리하여서 그는 의미에 살고 보람에 살려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절대자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이름이야 하나님이라거나 부처라거나 브라만이라거나 유신이라거나 무신이라거나 간에 생각하는 인간인 이상 어느 때에 가서는 자기가 인정하거나 말거나 어떤 절대적인 것이 내 존재 앞에 벽처럼 막아서고 막아 설뿐 아니라 절대의 권위로 명령하는 것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거 야말로 절망적이다. 그러나 그때에 비겁하게 피해서는 아니된다. 이 의미에서 말한다면 인간은 근본이 절망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서 살아난 모든 위대한 혼의 증거하는 바에 의하면 그때에 물러서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들은 죽음으로써 사는 것이 라고 한다. 그들의 생애를 보면 한결같이. 그 후에는 다시 희망, 절망의 물결에 흔들림이 없이 절대의 평화 속에 선다. 그것을 정말 산 희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1
그러고 보면 전날에 희망이라 했던 것은 참 희망이 아니라 도리어 절망이었고 이 절대자 앞에서 나와 내 생각이 완전히 부정을 당하고 절망에 빠짐에 의해서 얻은 이것이야말로 참 희망이다. 이것은 예수가 가르친 길이요 석가가 보여준 길이다.
위에 달한 두 길이 서로 다른 듯하나 다른 것 아니다. 그 근본은 하나다. 다만 그 식량이 다를 뿐이 다. 그 어느 쪽이나 다 나를 부정함으로 인해서 참에 이른다는 점은 마찬가지 다.
3.
위에서 말한 것은 사람의 개인적인 면을 보고 한 말이다. 그러나 사람의 살림은 그것으로 다되지 않는다. 그것을 인간의 횡적인 존재라 한다면 또 종적인 존재가 있다. 물론 산 인간에는 가로 세로의 구별이 있을리 없이 살아 있는 전체가 있을 뿐이지만 개체적으로 존재 해 있는 이 이유 때문에 이해를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말이다. 세로라는 것은 곧 역사를 가르치는 말이다. 우리는 횡적인 인생면에 있어서도 절망을 극복해야지만 종적인 역사 면에 있어서도 절망을 극복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실지로 오늘에 말 많은 종교에 있어서의 현실 참여 문제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인생면에서 이야기할 때에 사람의 모든 잘못의 근원이 어디 있느냐 하면 자기를 모르는 데 있다. 생각하는 인간이 제 생각에 붙잡힘으로 인해서 자기 아닌 것을 자기라고 한다. 몸과 거기 붙은 여러 가지 욕망을 자기인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의 참 나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자 연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 몸과 마음 사이, 삶과 죽음 사이의 어긋남이 생기고 그 어긋남 때문에 좋고 언짢고가 생기고 그 때문에 낙관, 비관이 생긴다. 이렇게 함으로 절망 상태는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극복하는 것은 나를 외적으로 대자연의 큰 조화속에 몰입시키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적으로 절대자 앞에 완전히 부정해 버리는 두 길이 있다. 그럴때 인생은 구원된다.
그러나 인생의 구원으로 구원이 완성됐느냐 하면 아니다. 다시 역사적으로 구원되지 않으면 아니된다. 옛날에는 인생의 구원만으로 만족됐던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그 이유는 역사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자랐기 때문이다. 이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역사의 발전 과정을 잠깐 살펴보는 것이 좋다.
인간 역사를 간단하게 설명 하려면 세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원시 공동체 시대로 둘째는 개인 시대 혹은 영웅시대로 셋째는 전체 시대다.
사람은 개체로 존재하기 때문에 개체를 스스로 완전한 것으로 보기 쉽지만 사실은 사람은 처음부터 종족적인 존재였다. 이것은 식물, 동물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인간은 생각하는 정의적(情意的)인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모든 생물은 종족적으로 흥하고 종족적으로 망한다. 그 종족이 멸망하는데 어느 개체만이 살아남았다는 실례는 없다. 신체적으로도 우리의 생리적 모든 기능과 그 유전은 종족적으로 되지만 정신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소위 인간성이란 홀로 개체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공동체를 이루어서 사는데서 나온 것이다. 우리 피가 하나인 것처럼 우리 마음도 하나다. 그러므로 너, 나 하는 것은 극히 긴요한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 삶의 극히 옅은 표면에 있을 뿐이요. 속에 들어가면 갈수록 인간은 하나다. 가장 알기 쉽게 말하려면 인간의 본질이라 하는 양심을 생각해 보면 잘 살 수 있다.
그 공동체 살림의 단계에서는 아직 개인은 없었다. 개체로서의 몸은 있었지만 개인 인격은 없었다. 마치 어린아이 시대와 마찬가지다. 기본적인 지능은 있었지만 아직 자아에까지 발달하지는 못했다. 그러므로 가정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고 개안의 소유란 것도 없었다. 인권 문제는 있을 여지도 없었다.
그러나 생명의 근본 성격은 자람이다. 마치 종자에서 큰 나무로 발전하듯이 점점 더 자람에 의하여 자아를 점점 더 실현해 간다. 그런데 그 자아의 발전은 공동체 안에서만은 완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그래서 공동체 안에서 기초적인 살림의 터가 어느 정도 잡힘을 따라 속의 정의(情意) 살림의 도가 차차 높아졌고 거기 따라 점점 나란 생각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개인의 반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여 시작된 것이 영웅시대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가지 가지의 영웅적 서사시는 이때부터의 산물이다. 옛날의 모든 위대한 인물이 절반 사람, 절반 신의 성격을 띤 것은 당초의 공동체 시대에는 개인이 없느니 만큼 모든 것이 신화적으로 됐던 전통에서 온 것이었다. 그때로는 이것이 당연한 일이요 별로 악이랄 것 없었지만 문물의 발달이 더딘 시대에 모든 것이 전통적으로 고정되어 왔기 때문에 이것이 벗겨져야 할 후대에 와서까지 그 신화적인 성격을 벗지 못하는 데서 모든 역사적 악이 일어나게 됐다.
마음의 교통이 잦아짐에 따라 말이 정돈되고 글자가 발명되고 법이란 것이 생기고 제도가 일어나고 이리하여 나라란 것이 생겨나게 됐다. 소위 역사시대라 하는 지금으로부터 7,8천년 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 개인의 시대라 할 것이다.
이 동안에 든든한 조직에서 오는 힘을 배경으로 하는 국가가 이루어짐에 따라 공동체시대에는 한낱 장로에 지나지 않던 지도자가 임금으로 승격이 되어 거의 절대권을 주장하게 되어 공동체는 깨지고 나라와 사람은 임금의 한 소유물이 돼 버렸다. 그리고 전쟁의 규모가 커지고 무기가 발달함에 따라 노예가 생기고 계급 사회가 되게 됐다.
그랬기 때문에 최근에 이르기까지 역사라면 제왕 영웅의 역사로 정치의 역사로 알게 됐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은 스스로 하는 인격에 있기 때문에 그 절대 지배의 그 제도하에서도 인간의 자아는 역시 자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겉에서 보면 역사는 지배자의 역사로 정치의 역사인 것 같으나 속에서 보면 자유의 역사요 문화의 역사였다. 지배는 언제나 끝이 오지만 생각하는 인간, 자유하려는 인간에는 끝이 없었다. 그러므로 가혹히 지배하면 할수록 민중은 깨어갔고 욕심있게 독점하면 할 수록 그것은 민중의 재산으로 남았다. 오늘 에집트, 로마에 가보고 런던, 파리에 가보면 일찌기 제 사유물로 제왕들이 독점하고 있던 문화재를 세계의 민중이 맘대로 보고 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본래 그것을 만들었던 것은 민중이요, 제왕 영웅이란 것들은 한때 그 소유권을 도둑질 해 가지고 있었던 것뿐이기 때문에 그것이 그 참 주인인 민중에 돌아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저 세째 시대가 오게 됐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이다. 아직도 세계의 구석진 곳에는 공동체의 시대가 남아 있는 곳이 없지 않으나 그것은 마치 5월이 다 됐어도 설악산 깊은 골짜기에는 눈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것이 봄된 것을 감출 수는 없다. 대체로 볼 때 이제 인간은 성인 시대에 들었다. 성인이란 몸과 마음이 다 성숙한 것이다. 이제 인간은 저를 충분히 알게 됐다. 그러므로 누구의 지배를 받을 필요없다. 어릴 때는 보호자의 감독이 사랑이 되지만 다 자란 후에도 감독을 계속하면 죄악이 되듯이 이제 지배주의와 국가는 성인된 인간에 대해 방해물이요 죄악이다.
왜 이것이 최근에 와서 급속히 발달됐나? 과학의 발달로 인해 교통 통신이 잦아짐으로 그렇게 됐다. 왜냐하면 사람의 정신은 서로 주고 받을 수록 발달하기 때문에 인간은 외면으로는 만년 전 인간이나 별 다름이 없지만 그속을 말한다면 아주 달라진 인간이다. 그러나 달라졌다는 것은 결코 없던 것이 새로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본래부터 씨로 있던 것이 이제 자라서 줄기로 되고 잎과 꽃으로 됐다는 말이다. 처음부터 그것이 참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자라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옛날에도 나라의 주인, 역사의 주인이 민중인 것은 다름이 없었지만 다만 싹틀 시기가 되지 못해 잠잠히 있었을 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옛날에 있어서도 잘난 임금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사람들은 곧 다른 것 아니고 백성을 나라의 주인으로 알아 대접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점에서는 아직도 잘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을 세계적 위기와 혼란시대라 하지만 그 까닭은 오로지 여기 있다. 옛날식와 임금 영웅으로 대표되는 국가주의는 물러가야 할터 인데 시대를 거스릴 수는 없어서 그 제도로는 민주주의라 세계주의라 하면서 도, 사실 정치가의 심정은 옛날 지배주의 시대의 생각을 창신하지 뭇하고 있어 아직 침략주의를 창신하지 못하고 권위주의를 탈피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오는 고민이다.
이 시대를 전체주의 시대라 하는 것은 이제 인간의 역사는 어떤 잘난 인물의 이끔으로 될것이 아니고 제 일을 제가 아는 민중이 개인으로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 생각해서만 될 것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다만 파시즘과 혼등해서는 아니 되는 것을 주의 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사실 히틀러, 뭇소리니의 전체주의가 나왔던 것은 테이하가 말했듯이 진짜 전체주의 시대가 오려는 예표이었다. 언제나 참것이 오러면 먼저 가짜가 먼저 나타나는 법이다. 다만 그들은 시대를 예감만 했고 그것을 참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낡은 시대와 심정과 방법을 가지고, 즉 폭력과 강제로 그것을 실현하려 했던 것이 어리석은 잘못이었다. 성인이 된 인간은 강제와 폭력을 극 복하고 난 인간이므로 그 전체주의는 사랑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일 것이다.
개인의 절망 극복에 있어서 산 희망의 원천이었던 절대자의 모습을 역사에서 찾으면 전체 민중에 있다. 그때에 거짓 자아가 자기를 그 앞에서 완전히 부정함에서만 구원이 이루어졌던 것같이 여기서도 역사의 가짜 주체인 국가가 전체 민중 앞에 완전히 자기 부정을 행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예로부터 인심이 천심이라 했던 것은 결코 빈말이 아니다. 민중이 전체로 생각할 때 절망은 절대 없다. 또 그 밖에 세계구원의 길은 없다.
4.
이점에서 가장 좋은 증거가 되는 것은 우리 민족과 유대 민족이다. 둘 다 세계역사에서 수수께끼다. 나는 우리 역사를 고난의 역사라고 하지만 그 점에서는 유대도 마찬가지다. 그 강대국 사이에 끼이는 지리에서 같고 그 망국의 쓰라린 경험을 자주한데서 같고 그 가난한 데서 같다. 부국강병, 침략정복을 경쟁하는 6,7천년 역사에서 무엇으로 멸망을 면하고 이날까지 살아남았는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날까지 비통 속에 걸어왔는데 이상하게도 의욕은 놀랍게 왕성하다. 무엇 때문일까? 구태여 대답을 한다면 아마 미래에 할 사명이 있어서라고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그 장차 할 것이 무엇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아마 강대국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흔히 나라의 새 요소로 땅, 사람, 주권을 들지만 세계에 땅이나 주권 없이도 민족이 될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은 유대다. 우리는 유대 같지는 않지만 땅도 크고 부한 것이 못되고 주권도 강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쓸 것이 있다면 오직 사람뿐이요 사람에서도 민중뿐이지 각별히 위대한 영웅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또 마침 세계 역사의 대세를 보면 앞으로도 강대국의 시대는 아닐 것이요 영웅도 있을 수 없다. 그러면 그 어간에서 무슨 생각 할 것이 있지 않을까?
미래는 단순한 민중의 시대일 것이다. 근래에 오면 유럽, 미주 모든 나라 인물의 지도 능력이 내려 간다는 것은 그 징조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도 위대한 지도자나 놀라운 철학도 없다. 언젠가 어느 친구가 어떤 외국인 한데서 너의 나라의 고유한 철학은 뭐냐 하는 질문 을 받고 부끄럽지만 대답을 못했노라면서 나더러 물어 나도 대답을 못 했던 일이 있다. 철학 없는 것이 자랑은 될것 없지만 미래가 단순한 민중의 전체로 생각하는 시대라면 그대로 좋지 않을까? 그럼 그건 씨철학이지 씨철학에 절망은 없다.
기독교사상 1975년 3월 19권 3호
저작집30; 17-163
전집20; 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