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목멱산)은 풍수적 측면으로 서울 도성에서 매우 중요한 산이다. 태조 이성계는 남산을 안산(案山·풍수학에서 터 앞의 낮고 작은 산)으로 삼으면 500년간 편히 지낼 수 있다는 주청을 받아들여 남산을 바라보도록 경복궁을 배치했다. 남산은 도성 안에 있어 궁궐까지 가까웠고 또한 청학동(靑鶴洞) 골짜기 등 경치가 빼어나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살았다. 성현은 수필집 용재총화에서 “청학동은 남학(南學)의 남쪽 동네로 골이 깊고 푸른 내(川)가 있어 놀만한 곳”이라고 평했다.
청학동은 남산의 북쪽 기슭인 남산 1호 터널 입구 일원을 일컫는다. 이런 남산에는 동래 정씨, 청주 한씨, 풍양 조씨 등 서울의 문벌가들이 터를 내리고 세거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에는 가난한 선비들이 남산골에 많이 몰렸다. 남산골은 오늘날 명동이다. 명동에는 ‘진고개’라는 작은 고갯길이 있었다. 현재 퇴계로 뒷길인 명동 8가, 8나길(옛 충무로 2가)이 이에 해당한다. 이곳은 비만 오면 흙이 질어져 통행에 불편이 컸다. 광무 10년(1906) 진고개에 현대식 도로를 깔리고 하수도를 묻으면서 진고개는 자취를 감춘다.
진고개 일대 선비들은 굶기를 밥 먹 듯 하면서도 과거에 급제하는 그날만을 기다리며 글공부에만 매달렸다. 권력을 쥔 세도가들이 과거도 독점해 가난한 양반이 시험을 통과하기란 불가능했다. 진고개 선비들은 비가 와 고개가 질어지면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 사람들은 딸깍, 딸깍하는 나막신의 소리를 본떠 오기만 남은 불운한 진고개 선비들을 ‘남산골 딸깍발이’ 또는 ‘남산골 샌님(생원님)’으로 불렀다.
필동에도 걸출한 인물들이 배출됐다. 지명이 ‘붓 만드는 고을’에서 유래했다고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마을에 한성부의 행정구획을 동·서·남·북·중의 방위로 구분해 설치한 관아 중 하나인 남부의 부청이 있어 부동·붓골(부의 고을)이라고 했다. 그런데 붓골을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 필동(筆洞)으로 와전됐고 이 한자가 고착화돼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것이다.
남산을 대표하는 명문가는 ‘동래 정씨’이다. 동래 정씨들은 회현동 우리은행 본점 근처(회현동 1가 14번지)에 대대로 살아왔다. 중종 때 삼정승을 한 정광필(1462~1538) 집안에서 정유길(대제학·좌의정), 정창연(좌의정), 정태화(영의정), 정치화(좌의정), 정지화(좌의정), 정재숭(우의정), 정석오(좌의정), 정홍순(우의정), 정존겸(영의정), 정원용(영의정), 정범조(좌의정) 등 12명의 정승과 함께 다수의 판서를 배출했다. 회현동이라는 지명도 동래 정씨 성의 현자들이 배출됐다고 해서 붙여졌다. 회현동에는 유교를 상징하는 은행나무도 다수 심어졌다. 세상에서는 회현동의 동래 정 씨들을 특별히 ‘회동(會洞) 정씨’라고 했다.
권력을 조롱하고 수많은 기이한 행적을 남긴 시인 정수동(1808~1858·본명 정지윤)도 회동 정씨이다. 그는 명동 진고개에서 한평생을 살았다. 격조 높은 문장으로 추사 김정희는 물론 세도대신인 김홍근, 조두순 등의 명사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1561~1637)과 척화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던 청음 김상헌(1570~1652) 형제도 이 회현동에서 태어났다. 이들의 외조부가 좌의정 정유길이어서 외가에서 출생한 것이다. 형제의 본가는 안동 김씨(신안동 김씨 또는 장동 김씨)가 주로 거주했던 경복고 옆 종로구 청운동에 있었다.
조선전기 문신 조말생(1370~1447)의 집도 회현동 2가였다. 조말생의 집터는 명당으로 소문 나 낙양명원(洛陽名園)이라고 했다. 그는 병조판서 등의 고위직에 있으면서 승진 등을 빌미로 논밭, 은괴, 비단을 뇌물로 받았다. 사헌부는 “조말생이 받은 뇌물을 합치면 780관이나 된다”고 비판했다. 탄원이 빗발치자 세종은 조말생을 귀양 보냈다. 실학의 선구자이자 대동법 시행의 주역인 잠곡 김육(1580~1658)도 회현동 2가에 머물렀으며 김육의 손자로 예송논쟁 때 남인 숙청의 선봉에 섰던 김석주(1634~1684)는 회현동 2가가 출생지이다. 조선후기 대표적 문인 서화가인 강세황(1712~1791)은 장충동에서 태어났고 만년에 회현동에 홍엽루(紅葉樓)를 짓고 유유자적했다.
서울시소방본부와 서울유스호스텔 사이의 예장동은 청주 한씨들의 세거지였다. ‘세조의 남자’ 한명회(1415~1487)의 옛집이 예장동에 자리했다. 한명회 이후 그의 후손들이 몰려 살면서 계모임인 난정수계회(蘭亭修契會)를 자주 열어 마을 이름이 ‘난정이문동’(蘭亭里門洞), ‘난정동’(蘭亭洞)으로 불리다가 ‘난동’(蘭洞)으로 약칭됐다. 난정수계회는 인조때 우의정으로 이괄의 난을 피해 왕을 호종한 한준겸(1557~1627)이 주도했다.
한명회의 집 옆 일제 통감관저 자리는 세조 때 공신인 권람(1416~1465)의 집이 있었다. 동국여지비고 제택조에 “권람의 집이 목멱산 비서감(秘書監) 동쪽에 있는데 그 곳은 무학대사가 정해준 암석 위의 집터이다. 세조가 이곳에 행차하여 그쪽 언덕 바 위 밑에 솟구치는 샘물을 마신 뒤로 어정(御井)이라 불렀으며 (중략) 지금은 녹천정(鹿川亭)이 되었고 박영원(1791~1854)이 차지하였다”라고 적혀있다. 녹천정에는 그뒤 일본공사관과 통감관저가 들어섰다. 권람은 계유정난 1등 공신으로 벼슬이 좌의정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났지만 권력을 남용하고 축재를 해 수차례 탄핵 받았다.
남산1호 터널 요금소와 국립극장 사이 필동2가에는 조선말 풍양 조씨 세력의 중심에 섰던 조만영(1776~1846)의 정자가 있었다. 조만영의 신정왕후 조대비의 아버지이다. 조만영의 집은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자리였지만 문우와 교유하기를 좋아해 남산에 정자를 짓고 주로 여기서 시간을 보냈다. 정자는 많은 노인이 항상 모였다고 해서 노인정(老人亭)으로 불렸다. 정자 뒤 바위에 ‘조씨노기’(趙氏老基)란 글자도 새겼다. 노인정은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을 위한 개혁안이 논의됐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오성과 한음’설화의 주인공 중 한명이자 선조대의 명신인 백사 이항복(1556~1618)은 회현역 일대 남산자락인 남창동에 집이 뒀다. 이항복은 집 주변에 수목과 화초를 심어 그윽한 풍광을 즐겼다. 이항복의 집터는 여러 사람에게 소유가 넘어갔다가 이항복의 후손으로 고종 때 영의정을 한 이유원(1814∼1888)이 철종 말년 다시 사서 수리해 ‘쌍회정’(雙檜亭)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쌍회정은 이유원 사후 일본인이 사들였고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명종 때 삼정승을 한 상진(1493~1564)도 남창동에 뿌리를 내렸다.
남창동은 그의 성을 따서 ‘상정승골’, ‘상동’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는 인품이 너그럽고 조야의 신망이 두터워 명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영조가 부근을 거동할 때 주위에서 “이곳은 상정승골”이라고 아뢰자 임금이 몸을 굽혀 경의를 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그밖에 명종 때 삼정승을 한 이준경(1499~1572), 4000수가 넘는 시를 남긴 이안눌(1571~1637)이 동국대 일원의 묵정동,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1562~1623)이 예장동 2번지, 영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조현명(1690~1753)이 필동2가, 성리학의 대가 일두 정여창(1450~1504)이 회현동, 우의정·대제학을 한 이행(1478~1534)이 예장동에 거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