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 프랑스계 미국인(1887-1968)
프랑스계 미국인(1887-1968) 현대미술 역사상 가장 독창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뒤샹은 파리 입체파 그룹의 일원으로 1911년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화가로 유명세를 타던 뒤샹은 약관의 나이인 25세에 회화와 결별하겠다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발명하는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뒤샹에게 붙여진 수식어.
가장 난해한 작가. 천재작가로 알려졌고
초현실주의기법의 대가.
전시회를 보면서 무슨 이야기인지, 무엇을 전달하려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료를 보니 그래도 이해가 조금 되는것 같다.
입체파의 영향이 밑바닥에 깔린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로 유명세를 타게 된다.
"예술가라면 진정한 대중이 나타날 때까지 50년이고 100년이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대중만이 제 관심사입니다.“
1912년 뒤샹은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를 위한 기나긴 창작 과정에 나섰다. 이 작품은 예술을 시각적인 것에서 개념적인 것으로 바꾸려 했던 뒤샹의 목표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1년 뒤, 뒤샹은 평범한 기성품을 예술적 맥락에 배치하고 때로는 언어를 기입해 예상치 못한 의미를 얻게 하는 ‘레디메이드’작품을 최초로 만들어내며 예술에 내려진 여러 관습적 정의들을 완전히 뒤집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 뒤샹은 자신이 미술을 포기하고 체스에 전념한다는 신화를 꾸며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기 뒤샹은 에로즈 셀라비라는 또 다른 여성 자아로 자신을 위장하고 새로운 작업에 착수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명성을 더해가던 시기에도, 뒤샹은 규정할 수 없는 페르소나와 비관습적인 예술 활동에서 비롯한 신비로운 아우라를 지켜나갔다. 말년에는 조용히 <에탕 도네>를 만들었다. <큰 유리>라는 작품을 돌아보는 한편 그가 주요하게 다루어온 여러 주제를 함축한 마지막 작품이었다.
뒤샹은 1950년에 자신의 주요 후원자인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가 빼어난 컬렉션을 필라델피아미술관에 기증하는 과정을 도왔다. 이를 통해 본인의 작품 대다수가 한 기관에 함께 머물 수 있게 하였다. <<마르셀 뒤샹>>전은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의 뒤샹 소장품을 통해 예술적 행위에 대한 생각, 그리고 예술 그 자체에 관한 생각을 바꾸어놓은 뒤샹이라는 인물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1.화가의 삶
뒤샹은 1902년 여름 청소년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당시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던 혁신적인 미술 양식들 사이를 오가며 8년을 보냈다. 모더니스트로서의 그림을 배우던 이 기간은 파리의 입체파 그룹과의 짧지만 대단히 독창적인 교류로 이어졌고, 이때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NO.2)>를 포함한 많은 핵심작품들이 생산된다. 이 그림은 아모리 쇼에 전시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913년 미국 관객에게 현대미술을 각인시킨 이 기념비적인 전시로, 뒤샹은 미국에 도착기도 전에 이미 누욕에서 유명 인사가 되었다.
2.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2년 가을, 뒤샹은 회화기법과 화가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예술가로서 작업하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하기 시작했다. 기념비적인 구조물 <그녀의 독신남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 조차도(큰 유리)>의 개념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1913년에는 <자전거바퀴>를 만들었는데, 이는 평범한 기성품으로 만든 예술품, 즉 레디메이드의 첫 번째 작품에 해당한다. 레디메이드는 그 무렵 뒤샹이 자신의 노트에 쓴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예술적’이지 않은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1915년 여름, 뒤샹은 전쟁에 휩싸인 파리를 떠나 뉴욕으로 향했고, 수집가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 부부 주변에 모인 재능 있는 예술가, 작가, 지식인 무리에 합류했다.
루이즈와 월터 아렌스버그는 이후 뒤샹의 주요 후원자가 되었다. 1917년, 뒤샹이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논쟁적인 오브제가 전시회에 출품되면서 레디메이드라는 개념과 그것의 의미에 대한 대중적 논의가 촉발됐다.
3.에로즈 셀라비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다시 파리가 뒤샹의 창작 근거지가 되었다. 뒤샹은 이 시기 초반에 미술에서 체스로 직업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했고, 이후 근 20년간 직업정신을 가지고 체스 활동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동시에 에로즈 셀라비라는 여성 자아를 만들어 새로운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회전하는 광학기계로 아이디어를 표현하면서, 그 영역이 미술에서 공학 및 기구 쪽으로 한층 더 옮겨가기도 했다. 또한, 작품의 미니어처 복제판을 담은 이동식 미술관을 선보여 예술에 대한 급진적 문제제기를 이어나갔다. 그가 만든 이동식 미술관은 <여행가방 속 상자>라는 제목으로 1941년 여름, 이번에는 2차 세계대전을 피해 파리를 떠나 다시 뉴욕으로 갔을 때 뒤샹의 망명자 처지를 상징하게 되었다.
4.우리 욕망의 여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뒤샹은 자신이 아방가르드 예술의 원로로 널리 알려졌음을 깨달았다. 여러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했고, 특히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1950년 월터와 루이즈 아렌스버그 부부가 기증한 현대 미술 컬렉션의 일부로 뒤샹의 전작 중 다수를 입수했다. 급격히 늘어난 전시, 출판, 잡지 및 신문보도 역시 그의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뒤샹이 기본적으로는 은퇴한 상태이며 그의 예술에 대한 이야기도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런 유명한 예술가로서 공인의 이미지가 널리 퍼지는 동안 뒤샹은 20년에 걸쳐 아무도 모르게 최후의 예술적 선언에 힘을 쏟았다.
1968년 그가 사망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의 만한 크기의 디오라마 작품<에탕 도네>가 공개되자, 그가 말년에 남긴 작업의 통일성이 확연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