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식의 제주교안 서술
- 속음청사를 중심으로 -
김수태 (충남대 역사학과 교수)
구한말 외무대신을 역임하다 아관파천 후 제주도에 유배를 온 운양 김윤식(1835 – 1922) 이 쓴 ‘속음청사’ 에 제주교안 전과정을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체로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김윤식은 개신교와 천주교에 다른 인식을 갖고 있다.
개신교는 미국에서 숭상하는 종교로서, 국가의 금령을 범하지 않는데 비해,
찬주교는 프랑스에서 숭상하는 종교로, 천주교의 신부와 신자들은 성질이 강항(强項)하고 호승심(好勝心)이 많아서
본국에서는 군주와 투쟁하고, 타국에서는 그 나라의 정사에 반드시 간섭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자기 종교의 신자들을 보호한다고 하면서, 여러 가지 폐단을 만들어내고 종종 전쟁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는 제주교안의 원인으로 세폐(稅幣)와 교폐(敎弊)의 두 요인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제주교안이 일어나는 1901년 2월 9일자 속음청사에서 “교폐가 여기까지 이르렀다니 한탄스럽다.” 이 때 정의 성당의 천주교 신자들이 오씨 성을 가진 노인을 학살했다는 것이다.
2월 22일 자 일기에서는 천주교 신자들이 전 훈장인 현유순을 잡아가두고
5월 12일 자 일기에서는 대정민들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에게 처첩을 빼앗긴 사람이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제주 백성들이 ‘세폐와 교폐’ 에서 받은 아픔이 뼈 속까지 스며들었음을 알 수 있다. 고 서술하고 있다.
그 결과 천주교 신자들과 제주 향촌민들이 대립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의 훈장이었던 현유순이 세 읍에 통문을 보내 관덕정에서 천주교와 담판을 벌이려고 하자, 천주교 측도 신자들에게 모두 모이게 하여 대립하여 마침내 제주교안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광무(光武) 4년(1900년) 한성에서 제주로 파견된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은 내장원경(內藏院卿) 이용익(李容翊)의 뜻을 받든다고 하면서,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다.
공토의 마름과 어선, 어망에 세금 거두는 것을 교인(천주교인)에게 맡겼다.
어떤 사람이 10여 마리의 고기를 잡으면 교인(천주교인)은 그 반을 빼앗아 상납하였으며, 계란을 모아놓은 게 수십 개가 되면 그 반을 계란세로 빼앗았다.
본래 제주도 사람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는데, 이때부터 정기적으로 세금을 내게 되자 세금 징수 문제 때문에 앞으로 커다란 문제가 일어날 것으로 예견되었다.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은 1899년 말에 제주도에 들어와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봉세관(捧稅官) 강봉헌(姜鳳憲)은 자기 마음대로 가혹한 착취를 하였고, 천주교 신자들이 세금 징수에 협력하여, 세폐(稅幣)가 교폐(敎弊)로 연결되었다.
김윤식은 제주교안에서 학살된 천주교 신자 500 – 600명 (가톨릭 자료 700명) 중에 교폐를 일으킨 사람은 4명에서 많아야 13명까지라고 하면서 그 명단까지 언급하였다.
김윤식은 학살된 500 – 600명 대부분 천주교 신자들이 죄가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지방관의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천주교 신자가 된 경우를 기록하고 있다.
1991년 3월 4일 일기를 보면
제주도에서 백성들이 천주교를 믿게 된 동기가 제주 목사의 학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목사로부터 돈과 재물을 빼앗긴 백성들이 천주교가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퇴임하는 목사가 배를 기다리는데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예전에 돈과 재물을 빼앗겼던 백성들이 퇴임하는 목사에게서 돈을 찾으려고 하니정의 성당의 박 회장이 주도하여 수십 명의 신자들이 퇴임하는 목사를 막았다는 것이다.
김윤식은 5월 22일 자 일기에서 천주교 신부가 직접 민란 가담자에게 총을 쏴서 죽이기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윤식은 온건파인 구마슬(라크루Marcel-Lacrouts) 신부와 강경파인 문제만(무세 Mousset) 신부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다.
김윤식은 제주교안이 천주교측과 그에 대립하는 향촌 사회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프랑스 신부가 교안의 확산을 막기 위해 중재한 일도 적고 있다.
구마슬(라크루Marcel-Lacrouts) 신부가 천주교 신자들이 제주 목사를 막았다는 소식을 듣고 쫓아가 이를 말려 퇴임하는 제주 목사가 배에 오를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신부는 제주 군수와 함께 백성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보고 효유하여 성안의 민심이 조금 안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4월 8일에 대정 상무회사가 만들어졌고 이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폭행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신부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교안이 확산되었다.
초기에는 민란 가담자들이 화해를 시도하였으나 천주교 신자들이 프랑스 군함을 요청한 사실을 듣고서 기세가 높아져 화해를 반대하였다고 한다.
한편 프랑스 군함이 제주에 들어오자 천주교도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은 프랑스 군함의 위세에 의지하여 팔을 치켜들고 큰 소리로 민란세력들을 죄다 죽여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는 억울한 원수를 통쾌히 갚겠다며 의기가 당당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군함이 가 버리는 것을 보고 천주교 신자들이 다시 간이 떨어질 정도로 기가 죽었다는 것이다.
김윤식은 천주교 신자들이 외세에 의지하려는 사람들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김윤식은 천주교만 비판한 게 아니라 민란 가담자들도 비판적이었다.
김윤식은 제주교안이 일어난 것은 제주 목사의 책임이 크다고 보았다. 백성들에게서 돈과 재물을 빼앗았기 때문이다.
5월 6일자 일기에 의하면 민란세력 상무회사 수백 명 대정민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폭행하면서 민란이 본격화하였다고 한다.
5월 17일에는 민란 가담자들이 천주교 신자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이는 천주교 측에서 광양의 무고한 백성들을 함부로 죽인 데에 대한 반발이었다.
황사평에서 민회가 열리고 “만약 천주교인을 만나기만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며 성안이 흉흉해져 천주교인들의 기세가 꺾여 몰래 도망하는 자도 있었다.
대정군수 채구석이 민란가담 세력에게 해산을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22일 일기에 의하면 천주교 신부도 강화할 뜻으로 편지를 써 두고 화친을 맺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란 세력이 보내온 글은 천주교 측 주동자들을 모두 잡아 보내라고 하였다.
김윤식은 대정군수 채구석을 통해 소식을 듣게 된다.
민란의 장두 (두목, 대장) 들이 화해하기를 깊이 원하였는데, 백성들이 듣지 아니하여 한층 격렬하여 졌다는 것이다.
민란의 우두머리인 장두의 형을 백성들에게 보내 화해를 요청해도, 백성들은 그 사람 역시 천주교 측 첩자라며 반발했다.
5월 26일자 일기 – 민란 세력들이 여러 동네로 돌아다니며 천주교 신자 1백여명을 살해하였다.
여러 마을에 있는 천주교인과 그 가족을 마음대로 잡아서 진 앞으로 압송하여 죽였는데, 부녀자와 어린아이도 모두 죽였다.
돌로 머리빡을 쳐부수어 잔학하기가 너무 심했다. 시체 냄새, 똥 냄새가 진중에 가득하고 차마 볼 수가 없었다.
5월 28일 민란 세력 가운데 서진이 들어오면서, 천주교인들을 칼로, 혹은 총으로 혹은 밟아 죽이니 여자들도 죽은 이가 4, 5명 되었다.
피가 도랑을 이루니 비참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총을 쏘며 “와 와!” 소리 지르고 몇 바퀴를 빙빙 돌리고 나서 죽였으며 욕설하는 소리가 밤새 그치지 않았다.
민란 세력 서진의 대장은 바로 이재수였다. 5월 29일자 일기에 의하면 이재수는 관노 출신이라고 한다.
이재수가 민란 세력의 장두 (두목, 대장) 으로 추천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김윤식은 이재수가 어리석고 우둔하여 지각이 없고, 성격이 살인을 좋아하는 인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난폭하고 방종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그를 따라다녔다는 것이다.
그가 천주교인을 잡아들일 때마다 조사도 물어보지도 않고 죽여 버렸는데, 그렇게 피살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고 한다.
그는 달아난 천주교 신자들을 샅샅이 수색하여 모두 죽이도록 하였다. 이는 천주교 신자의 집과 가산을 팔아넘겨 군자금으로 보충하고자 한 것이다.
5월 30일자 일기에는 백성들이 이재수를 영웅호걸이라고 하며 한라산의 정기를 타고난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재수는 안경을 쓰고, 손에 서양 우산을 잡고는 앞뒤에 호위를 두면서 위세를 부렸다.
읍안의 백성들은 그에게 하례하면서 “장군의 덕에 힘입어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없앰으로서 이제부터 3군의 백성들이 안도할 수 있게 되니 하늘처럼 감사히 받들겠습니다.” 하였다.
이재수는 말 위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스스로 득의하여 이대로 대정읍으로 금의환향 하는 것처럼 행동하였다.
더욱이 이재수가 관덕정에 높이 자리잡고 평상위에 앉아 엄숙하게 거만하게 말하기를 “서양 사람을 쳐 없애어 제주성을 회복하였으니 그 공은 막대하다” 고 어리광부리듯 거리낌 없이 행동하였다고 한다.
6월 3일자 일기에는 프랑스 군함과 정부군이 도착했는데도
민란 세력 이재수의 서진은 아직도 대정 땅에서 마을마다 천주교인을 수색하여 매일 죽이는게 수십 명이 되었다.
살육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오직 천주교인을 다 죽이지 못할까 염려하였다고 한다.
잔악한 이재수와 달리 민란 세력 가운데 동진 장두 오대현은 민병들에게 훈계하여 보리밭을 밟지 못하게 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와도 반복하여 자세하게 심사하니 살아서 풀려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6월 7일 자 일기에는 민란 세력 동, 서진이 죽인 천주교 신자가 모두 500 – 600명 (천주교 측 통계 700명) 되었다고 한다.
장두 (두목, 대장)가 놓아 주고 싶어도 여러 백성들이 ‘와 와!“ 소리를 지르고 일어나니 죽이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중에는 천주교인이 아니어도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고,
심지어 친족 형, 동생, 아저씨, 조카 까지 죽이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이재수는 일본 사람과 결탁하여 프랑스 사람인 천주교 신부까지 죽이려고 하였다. 또한 이재수의 군사들이 천주교 성당도 파괴한 사실도 서술하고 있다.
김윤식의 일기에 의하면 – 프랑스 신부가 민란세력 이재수의 서진에 불려가고 더욱이 살해가 시도되자 제주도의 지방관들이 크게 놀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대정군수 채구석이 제주군수에게 “서양 사람이 해를 입으면 제주군수 혼자서 어찌 살 수 있겠느냐?” 고 물었다.
프랑스 군함이 제주에 온 것은
프랑스 공사가 고종에게 제주에 민란이 크게 일어나 성당을 부수고 신자들을 살육하며 신부도 피해를 입은 것 같아 군함을 파견하여 보호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고 한다.
일본 어민의 제주교안 개입
5월 19일자 일기에 의하면,
민란 가담자들이 일본인들로부터 서양 소총을 구할 수 있었다.
조선 천주교인들이 일본 어민들에게서 어세(魚稅)를 가혹하게 거두어가
조선 천주교인들을 미워하게 된 일본인들이 이재수에게 총과 칼 등의 물건을 주면서, 민란 – 제주교안을 부추겼다고 서술하고 있다.
즉 조선 천주교 신자가 거두어 간 어세(魚稅) 때문에 이들 일본인들이 이재수와 연결되었다고 한다.
황천이라는 일본 사람이 민란 세력 서진의 우두머리인 이재수에게 프랑스 신부의 살해를 교사했다는 것이다.
이재수에게 “왜 신부를 죽이지 않소. 신부를 죽인다고 해도 후환이 없을 것이라는 걸 보장하겠소. 우리 일본에서는 외국인을 수 없이 죽였지만 조금도 별일이 없었소. 군수품이 부족한 게 있으면 당연히 돕겠소.”
또한 일본에서 서양인 신부를 처형한 일본 천주교 박해 내용까지를 들려 주었다고 한다.
5월 30일 일기에는 일본인 황천이 감언이설로 이재수를 꾀어 말하기를 “반드시 신부를 죽여라. 만약 일이 있게 되면 피해 있다가 일본으로 가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는가?”
이재수가 프랑스 신부를 죽이려고 잡아오자 대정군수 채구석은 크게 반발한다.
“너희들이 내 말을 믿지 못하고 신부를 해치려 하는데, 이렇게 되면 제주 3읍은 멸망한다. 먼저 나를 죽여라. 내가 죽으면 제주가 망하든 나라가 망하든 알 바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부를 해쳐서는 안 된다.” 그러자 이재수가 겨우 물러났다고 한다.
김윤식의 일기에는 6월 2일 프랑스 함대가 떠나자 6월 3일에 일본 군함이 제주에 들어와 정박한 사실을 서술하고 있다. 일본 군함은 프랑스 군함이 먼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의 동정을 살피려 온 것이다.
조선 정부군이 내려온 것을 보고 일본 군함도 떠난다.
첫댓글 잘 수정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