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14
춘천시 정월대보름 축제 기줄다리기
<엄청난 규모의 정월대보름 축제, 기줄다리기>
“아랫말 꼴레꼴레 윗말뛰~ 윗말 꼴레꼴레 아랫말뛰~”
이 언사는 춘천에서 정월대보름에 기줄다리기를 할 때 상동(上洞, 윗말)과 하동(下洞, 아랫말)이 부르던 구호이다. 이 구호를 외치면서 자기 편의 사기를 북돋고, 상대편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비웃으며 약을 올렸다.
춘천의 정월대보름 기줄다리기의 기록은 변희천이라는 서양화가가 자신이 본 상황을 춘주지1호(1986)에 기고해서 남았다. 1920년 전후까지 열렸던 춘천의 풍속이다. 왜 없어졌는지는 기록이 없다.
이 행사는 1월 15일을 전후해서 3일간 행해졌다. 장소는 서부시장 앞의 비석거리였다. 비석거리에는 누구 비인지는 모르나 두 개의 비석이 50m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기줄다리기를 할 때, 유명인을 초청해서 응원단장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이때 상동과 하동 팀은 소양로 사창고개 아래 옛 한국은행 자리와 서부시장 부근을 중심으로 갈라졌다. 상동은 소양로 이북인 우두동, 사우동, 후평동, 신북읍, 서면, 사북면, 화천, 양구까지 해당하였고, 하동은 사창고개 아래 춘천시 일대와 신남면, 신동면, 남산면, 남면, 동산면과 가평까지 해당하였다. 소요경비는 춘천의 재산가와 음식점에서 찬조했다. 남녀노소 모두 모여서 3일간 잔치하며 즐겼다. 춘천의 모든 농악대와 기생들이 총출동하여 흥겨운 놀이마당을 열었다. 기줄다리기 싸움이 격해지면 돌을 던지는 석전(石戰)까지 행해졌다.
줄은 보통 7주일 이상 틀었는데, 중앙 줄에 곁줄을 설치해서 한 줄에 5~6명이 잡아끌 수 있도록 했다. 줄 길이는 보통 1km정도 되었다고 한다. 남쪽은 춘천고등학교 운동장 끝에까지 이어졌고, 북쪽은 춘천역으로 가는 소양강 인근 삼거리까지 이어졌다. 기줄다리기는 원래 게줄다리기였다. 게처럼 여러 개의 발이 옆으로 뻗어있듯이 줄다리기 곁줄이 옆으로 뻗어있어서 게줄이라 불렀는데, ‘게’가 ‘기’로 바뀌어 현재 기줄다리기로 부른다.
<앞두루 솔밭의 단오 줄다리기>
소양의 맥(1982)에 의하면, 춘천의 기줄다리기는 정월대보름에만 행해지지 않았다. 단오 때도 줄다리기를 했다. 물론 정월대보름 때처럼 큰 행사는 아니었다. 보통 춘천역 부근의 공터인 솔밭에서 행해졌는데, 단오 그네를 타고 난 뒤 모든 그넷줄을 거두어서 다시 기줄다리기 줄을 만들었다.
이때도 상동과 하동 대항의 줄다리기가 행해졌고, 외바퀴 수레 싸움인 차전놀이도 춘천역 솔밭에서 열렸다. 아울러 씨름 등의 전통문화도 행해져서 흥겨운 단오를 보냈다.
<삭전으로 전하는 노랫말>
소양의 맥에 의하면 춘천의 줄다리기를 삭전(索戰)이라고도 했다. 삭전은 기줄다리기의 한자식 표현이다. 동아줄 삭(索)자에 싸움 전(戰)자를 쓴다. 그런데 이때에 쾌지나칭칭나네를 불렀다고 했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청천 하늘엔 잔별도 많고(쾌지나칭칭나네-후렴)/ 솔밭 가운데 송구(松毬)도 많고/ 부르는 노래엔 구절(句節)도 많다./ 농부들이 놀던 터엔 산짝이 안 떨어졌나/ 처녀들이 놀던 터엔 댕기가 안 떨어졌나/ 할아버지 쉬던 터엔 담뱃대 안 떨어졌나/ 할머니 돌던 터엔 안경이 안 떨어졌나”
노랫말이 그 시대의 정감을 잘 담아내고 있다. 기줄다리기를 하면서 흥겹게 놀던 옛사람들이 참 좋아 보인다. 이때만 해도 삼시세끼 먹고 살기 힘들었을 텐데, 그래도 흥이 있고 놀이가 있었으니, 각박하지 않고 넉넉한 인심을 볼 수 있다. 기줄다리기 전통을 이어 다시 해 보는 것도 좋을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