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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 마음에 들어오소서 / 마 21:1-11
고난주간이다. 이 고난주간을 어떻게 보내겠는가? 어버이날 하루 카네이션을 선물하는 것이 효도의 전부는 아니다. 효도는 어버이날 하루만 하는 것이 아니라 1년 365일 늘 해야 한다. 하물며 어버이날 카네이션 꽃 한송이 없이 지나가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고난주간을 맞는 우리의 마음이 그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금번 고난주간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이 주님께 한걸음 더 가까이 갈 수 있어야 한다. 옆의 분들과 웃으며 인사하자. ‘주께 쓰임받는 인생이 됩시다.’
여러분, 혹시 1988년 서울 올림픽의 탁구선수로 충전해서 금메달리스트가 된 영영자 선수를 기억하는가? 익산출신, 1995년에 사랑의 교회에세 행한 제자훈련 지도자반을 함께 수료했다. 영영자 선수는 현제 부부가 선교사가 되어 몽골 올란바트로에서 450km 동쪽으로 떨어진 동고위 지역에서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처음에는 몽골 현지인 한명과 예배드리는 것으로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주일이면 40여명의 현지인들이 와서 함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고 한다. 근래에는 탁구 선교도 겸해서 탁구를 지도함으로써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있다고 한다. 또 하나 참으로 감동적인 얘기는 금메달리스트이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다달이 받는 연금 100만원을 선교사로 떠날 때, 어느 노 목사님 앞으로 돌려놓아 그 분의 생계에 도움이 되도록 했다고 한다. 부부는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먹이시고 입히시는지 기대하면서 선교지로 나갔고, 하나님이 9년동안 한번도 먹는 것, 입는 것 때문에 걱정하지 않도록 채워주셨다는 간증을 들었다. 에릭 리델(2934년 파리올림픽 육상 금네달리스트)이라는 분은 중국에 가서 남은 생애를 선교사로 보낸 것처럼, 우리 양영자 선교사도 참으로 귀한 생애로 쓰임받는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 탁구로 세계에 돌풍을 일으켰던 그녀가 이제는 영혼을 살리는 선교사로서 몽골지역에서 요긴하게 쓰임 받고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장면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다. 평상시에는 그 길을 그냥 걸어서 들어가셨지만,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가신다. 그것은 바로 슥 9:9절에 예언된 내용이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메시야로 오시는 분이 겸손하여서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신다는 말씀이 예언되어 있기에 그 예언을 이루시고자 그 분은 나귀 사끼를 타고 입성하신다. 감람산 벳바게 지역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두명의 제자를 보내신다. 다른 성서를 참고하면 베드로와 요한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들을 보내서 ‘저 건너편 마을에 가면 나귀와 아직 사람이 한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는데 그것을 끌로 오라’ 하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주님이 덧붙이기를 ‘왜 끌고 가려느냐 하고 주인이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실제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건너 마을에 가니, 어느 집 앞에 나귀 한 마리와 나귀 새끼 한 마리가 매여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풀어 끌고 가려고 했더니 그것을 바라보던 주인이 ‘아니, 남의 나귀는 왜 끌고 가는 거요?’ 하고 물었다. 그때 제자들은 ‘예, 주께서 쓰시겠다고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눅 19:33절 이하에도 동일한 기사가 소개되고 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씀할 때 주인이 허락했다. 그 나귀를 끌고 와서 제자들은 자기들이 겉옷을 그 나귀 새끼 위에 얹고 예수님이 그 나귀를 타고 ‘호산나, 호산나, 주위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는 많은 사람의 영광과 찬송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입성할 수 있었다.
특별히 2월 21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는데 이제 마지막 주간이다. 사순절은 우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이 모든 과정과 행적을 살펴보면서, 부활의 아침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계절, 경건과 회개의 계절이다.
우리가 사순절에 깨어서 기도할 수 있다면 더욱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본다. 이번 한주간 열심히 기도하며 경건하게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특별히 오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보면, 아주 귀중하게 쓰임받은 짐승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나귀 새끼이다. 참으로 미천한 동물에 불과하지만 누구보다도 귀중하게 쓰임을 받았다. 적어도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는 약 2백만명의 순례자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그런 수십만의 사람들 앞에서 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는 영광을 체험한 것이 바로 그 나귀 새끼이다. 다시 말하면 나귀 새끼는 아주 귀중하게 쓰임을 받았다. 그는 천한 동물이지만 그는 예수님을 태우는 영광을 맛보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 중 가장 축복된 인생이 있다면 무엇이겠나? ‘당신은 우리 집의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 공동체에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곧 내가 어느 공동체나 모임에서 쓸모있고 필요한 사람으로 요긴하게 쓰임받을 때 그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간이 가장 비참할 때는 언제인가? ‘당신은 필요없어.’ 당신은 쓸모없는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는다면, 굉장한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어느 젊은 부부가 미국에 유학을 갔다. 남편은 공부에 전념하고, 아내는 남편을 위해 뒤바라지를 다 했다. 미국생활이야 우리가 다 알다시피 시작하는 일이 세탁소, 슈퍼마켓 등의 일이다. 또 남의 빵집에 가서 일해 주고 하루 일당을 받는 등의 일을 해서 남편 뒷바라지를 했다. 무려 7-8년의 세월이 흐르고 남편이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다. 어느 날, 가족의 장래의 일을 의논하다가 부부가 뜻이 맞지 않아 언쟁을 벌이게 되었다. 목소리가 높아졌고 험악한 분위기가 되었다. 남편이 홧김에 부인을 향해 ‘이제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나가!’ 그 말은 아내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7-8년 동안 먹을 것 못먹고, 입을 것 못입으면서 갖은 고생, 식모살이 다 해가면서 남편 공부시켜 놓았더니 필요없다, 쓸모없다고 나가라고 하니 그 아내에게는 큰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해서 한동안 치료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여러분, 자기 상실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 내가 필요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상대로부터 듣게 될 때 그 충격은 말할 수 없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가장 축복되는 말은 ‘당신은 정말 필요한 분입니다.’, ‘당신은 참으로 소중하고 요긴한 분입니다’ 하는 말이다. 옆의 분들에게 축복해 주자. ‘당신은 참 소중한 분입니다.’ 그렇다. 우리는 이 공동체에서,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세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껴질 때 삶의 보람이 있고,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다. ‘나 같은 것은 이 집에서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지’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렇다면 우리도 이 나귀 새끼처럼 참으로 하나님 앞에 귀중하게 쓰임받는 인생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첫째는 하나님의 계획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 때 우리는 귀중하게 쓰임받을 수가 있다. 오늘 말씀 4-5절을 함께 읽겠다.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왜 예수님께서는 굳이 걸어가시지 않고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나? 그것은 바로 선지자가 오래전에 예언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었다. 슥 9:9절에는 이미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이 예언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이 나귀 새끼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왜 타셨을까? 말을 타면 되지 말이다. 그러나 나귀는 평화와 겸손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겸손한 종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신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것이 성서에 이미 예고되어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속에 있었다는 얘기이다.
여러분, 나귀 새끼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다면 우리야 말할 것도 없다. 저와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이 있다는 것을 믿기 바란다. 전도 소책자인 4영리 맨 앞에 보면 이런 말씀이 눈에 띈다.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게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옆의 분들에게 동일하게 얘기해 주자. ‘하나님은 당신을 향한 놀라운 게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나에게도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아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달라질 수 있다. 벧전 2:9절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어두운데 처해있는 자를 불러내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세었다고 한다. 우리는 택하신 족속들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이 있다. 엡 1:4절에 보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증거하고 있다. 길가에 있는 풀 한포기도 그냥 의미없이 존재하는 것이 없다.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과 십리와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계획이 있는 것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분명 달라질 수 있다. 여러분, 오늘날도 이 땅에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이 있다. 천여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당신은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목적을 아십니끼?’라는 물음에, 응답자의 6%만이 내 인생의 목적을 분명히 안다고 대답했고, 나머지 94%는 왜 사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인생이요, 바람불면 이쪽으로 저쪽으로 물처럼 흘러가는 유수와 같은 인생, 곧 대부분 많은 사람이 목적 없는 인새을 살아가고 있다.
둘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
본문 3절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자, 누가 ‘그거 왜 끌고 가느냐?’라고 말하면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말한다. 따라해 보자.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렇다. 주님이 쓰시겠다! 그러면 끝난다. 이 ‘주’라는 말은 영어로 ‘Lord’ 주인을 의미한다. 한자로는 임금 주(主)자이다. 주인이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한다는 얘기는 그 분을 내 주인으로 고백한다는 얘기이다. 우리의 주인되신 주님께서 쓰시겠다는 얘기이다. 이 ‘주인’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소유자‘이다. 주권을 가지신 분이다. 우리는 그 분께 소속된 인생들이다. 다시 말하면 만물의 주인되신 주께서 쓰시겠다 하신다. 그러니까 주인이 ‘아 그러십니까? 그러면 가지고 가십시오’라고 말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말은 아주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온 우주의 모든 것은 누구의 소유인가? 하나님 소유이다. 대상 29:11절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해와 달과 별도 주님의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주님의 것이다. 제가 묻겠다. ‘이 예배당은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가대가 입고 있는 가운은 누구의 것입니까?’ 주님의 것입니다. 다시 한번 묻겠다. ‘여러분들의 생명과 시간, 재능과 물질은 누구 것입니까?’‘ ’’주님의것입니다.‘ 그렇게 믿는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목회하셨다가 지금은 미국 수정교회(크리스탈 처치)에 까를로스 오르티즈라는 유명환 목사님이 계신다. 그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목회할 때 하신 설교 가운데 ‘여러분, 우리의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재능과 시간, 물질 다 주님의 것입니다. 종이를 나누어 드릴테니 여러분들의 가진 것이 누구의 것인지 다 표시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내 32평 아파트, 이거 내거 아니지 하나님 것이지, 내가 타고 다니는 자동차 이것 주님의 것이지, 내 통장에 있는 돈 얼마 이것 하나님의 것이지, 내 땅 다 하나님의 것이지’ 하고 교인들이 다 기록했다. 재산목록을 다 기록했다. ‘내 생명과 내 모든 것도 하나님의 것이지’ 하고 다 써서 제출하게 했다. 그랬더니 교인들이 집에 있는 땅문서까지 다 가져왔다. 그러나 그 교회 당회는 ‘이거 우리가 맏아서 뭐합니까? 다시 돌려드립시다. 하나님이 저들에게 맡기신 것인데 저들이 잘 관리할 수 있도록 돌려드립시다’라고 결정해서 돌려드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그 교회에 부흥회를 하는데 부흥강사가 오셨는데 호텔이 마땅하지 않았다. 그래서 ‘O 집사님, 이리 와 보세요. O 집사님 댁이 누구의 것이지요?’ ‘예,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부흥강사님을 집사님 댁에 모시길 원하십니다.’ ‘P 권사님, 이리 오세요. 권사님 차는 누구의 것이지요?’ ‘하나님 것입니다.’ ‘예, 주님께서 오늘 이 분을 위해서 이 차를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할 때 그 차를 내어드렸다고 한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소유권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특별히 누가복음 22장에 보면, 아주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주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유월절 잔치를 열어야 하는데 장소를 가지고 고민을 하신다. 그러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서 성안에 들어가서 다락방 장소를 예비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면 어떤 이가 물동이를 이고 지나갈 것이다. 그 사람을 따라가라. 그러면 집에 들어가서 여기 주님이 예비하신 방을 보여달라고 말하여라. 그러면 그 사람이 방을 보여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가니 진짜 물동이를 이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따라가서 ’우리 주님이 방이 필요하다고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이리로 올라와 보십시오. 여기 있습니다. 여기에 넓은 다락방이 있습니다. 혹시 음식도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그것도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쓰신다는데 제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요.’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집에서 유월절 진치를 하셨음을 성서에서 읽을 수 있다.
눅 12장에 보면, 한 어리석은 부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농사를 많이 짓는데 소출이 많았다. 창고를 지어놓고 곡식을 다 쌓아놓고 평생 떵떵거리며 살자고 생각했다. 그는 감사할줄 몰랐고, 이 모든 것이 자기 것인줄 알었다.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내게서 네 생명을 걷어간다면 이 쌓아놓은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자기의 것인줄 알고 착각했던 어리석은 자는 결국 하나님이 영혼을 거두어 가실 때, 쌓아놓은 재물은 자신을 위해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올 때 아무것도 없이 오지만, 생명도 주님이 주셨고, 건강도 주셨고, 육신도 주셨고, 재능과 시간을 주셨고 모든 필요한 것을 다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얼마든지 사용하다가 돌아갈 때는 다 두고 간다. 생명도 두고 가고, 육체도 두고 가고, 집도 두고 가고, 차도 두고 간다. 영혼만 돌아간다. 그것이 우리 인생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유주가 되시고, 그 분이 우리의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인생만이 쓰임받을 수가 있다. 사 1:3절에 보니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라고 이사야 선지자는 탄식하고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여러분이 귀하게 쓰임받기를 바란다.
셋째는 최고의 것을 드려야 한다.
나귀는 최선을 다해서 예수님을 모셨다. 만약 이 나귀 새끼가가 저항을 했다든지, 뒷발을 들고 사람을 친다든지, 이리 기우뚱 저리 기우뚱 했다면 예수님은 그 나귀를 이용하실 수가 없었다. 이 나귀 새끼는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을 그 등에 태우고 순순히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을 향해서 걸어 들어갔다. 여러분, 순종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드려라. 그리고 최고의 것을 드려라. 우리의 주인이신 주님께 드리는데 가장 보잘 것없는 것을 드릴 수 있겠나? 가장 최고의 것을 드려라. 최선을 다하여 드려라. 그것이 성도의 자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무디 목사님이 계신다. 이 무디 목사님이 살던 동네에 한 젊은이기 있었다. 목사님은 이 젊은이를 만나면 ‘여보게, 자네도 예수 믿고 나와 함께 교회에 가세’라고 권한다. 그러면 이 젊은이가 뭘 좀 안다고 나서며 ‘성서에 보면 예수님 우편에 있던 강도는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해서 1분 전에 구원받앗는데 나고 그럴겁니다. 나도 자유롭게 평생 재미있게 살다가 마지막 죽기 1분 전에 예수 믿고 나 구원받을 겁니다‘ 하더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무디 목사님이 얘길 들으니 이 젊은이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젊은이에게 꽃 화환을 보내는데,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을 보낸 게 아니라 다 시들어서 이파리가 떨어지는 시들시들한 것을 보냈다고 한다. 젊은이가 보니 이해가 안된다. ‘아니 목사님, 보내려면 똑바른 것을 보내야지 왜 이런 것을 보냅니까? 쓰레기통에 들어갈 것을 왜 나한데 보냅니까?’ 하고 말했다. 목사님은 ‘여보게 어떤가? 자네도 시들어가는 꽃을 보니 기분이 안좋지? 그래 싱싱하고 아름다운 꽃이 좋을거야. 하나님이 자네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네. 자네는 젊고 싱싱할 때 자신을 주님께 드리지 않고 늘고 쭈글쭈글할 때 주님께 드리려고 생각하는가? 주님은 자네의 생각을 아시고 얼마나 슬퍼하시겠나?‘ 그때서야 그 젊은이가 깨달았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젊으면 젊은대로, 연로하면 연로한대로 주님 앞에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가능하면 지금, 조금이라도 젊을 때 주님 앞에 더 많은 것을 드리고, 드리려고 노력하라. ‘나중에 세상 일의 분주한 것이 다 끊어지고 직장 퇴직하고 이제 한가해지면 주님의 일 하지요.’ 여러분, 그때에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못한다. 우리가 젊고 힘이 있을 때 주님을 위해서 더 봉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지금 최고의 것을 드려라. 지금 여러분의 소명이 무엇인지 깨달으라. 여러분의 은사와 재능이 무엇인지 여러분 분별하라. 스펄전이란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각기 주신 재능이 있다고 했다. 우리는 그 재능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해야 한다. 그 재능이 무엇인가? 내가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일이다. 여러분이 쉽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충성하기 바란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사용하기를 원한다.‘
제가 언젠가 소개한 적이 있는 소망교회 장로이고 참존화장품을 창업한 김광석 장로님이 계신다. 이 분이 지금도 소망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만, 한번은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미국 풀러신학원을 졸업하셨는데 다녀오시더니 걱정을 하나 하더란다. 풀러에 가니 장학기금이 많이 필요해서 일본교회에서 100만 달러를 내고, 한국교회에서 100만 달러를 내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교회는 이미 100만 달러를 냈지만, 한국교회에서 내기로 한 액수를 약속한 목사님은 아직 준비를 못하고 계시다고 걱정이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10억이 넘는 큰 돈이다. 장로님도 그 말씀을 듣고 고민을 하며 기도하게 된다. 그때 그가 아침에 일어나 성서를 읽었는데, 그 말씀이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갖고 끌고 오게 하라.’ ‘왜 끌고 가느냐?’ 대답이 뭡니까? ‘주가 쓰시겠다 하라’였다. 그는 가슴에 감동이 왔다. 주가 쓰시겠다는데, 하나님이 필요해서 내 재물을 쓰시겠다는데 내가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하며, 그는 100만불을 기꺼이 내서 풀러신학대학원의 장학기금으로 드릴 수 있도록 했다는 일이 국민일보 간증란에 수록되어 있다. 그는 지금도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면 내 모든 것을 다 내어드릴 수 있다고 간증하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시간을 주님이 필요로 하신다면, 여러분의 재물과 여러분의 가정을 주님께서 쓰고자 하신다면 우린 기꺼이 드려야 하지 않겠나? 롬 12:1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6:13절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과 재능과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나? 우리는 이 사순절에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는 일에 여러분 자신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온전히 예배의 제단을 쌓는 일에 여러분 자신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일에, 봉사하고 충성하는 일에, 전도하는 일에 여러분 자신을 드리지 않겠나? 주가 쓰시겠다고 하신다. 놀라운 결단과 순종의 삶이 이어지기를 바란다. (2007, 종려주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