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에서 흔히 보이는 나무 가운데 하나인 beech tree 열매를 보고,
밤처럼 생겼다고 했더니.. 생긴 건 비슷해도 독성이 강해서 먹으면 큰일이 난다고..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게 바로 너도 밤나무였다^^.
<반야심경>을 보면 처음에는 누구나 '심경(心經)'을 '마음 경'으로 볼 것 같인데..
반야심경을 좀 안다는 이들은 '마음경'이라 하면.. 큰일 난 듯 부정하며 그것은 마음이 아니라 몸의 중간인 중심으로..
반야부 사상의 핵심을 모아논 중심이 되는 경이란 뜻으로 '마음경'이 아닌 '중심 경'의 <심장경 Heart Sutra>이라 했다.
그 후 심경을 '마음경'이 아니라고 기억하며.. 누군가가 마음 어쩌구 하면.. 젊잖게 그건 말이지 마음이 아닌 몸의 중심인 심장과 같다는 의미의 경이라네^^ 하고 말해 주었다.
그렇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반야부 경인 <금강경>은 반야부 초기 경이 되고, <반야심경>은 반야부 사상을 뭉쳐 요약해 놓은 모습인 후기 반야부 경으로 반야부의 핵심 경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을 <지혜 마음경>이라 하면 아니 되는 걸까?
반야심경을 보면 '5온개공(五蘊皆空) ' 이라 하여 인간인 나를 이루는 색온을 포함한 수.상.행.식온 다섯 가지 모두가 공이라 하고 있다.
특별히 질량이 있는 존재인 몸, 색온을 비존재인 공이라 하는 것을 처음 본 자들에게는 쇼킹한 뉴스가 아닐 수 없으리라..
그러나 놀랄 일이 아니다. 왜냐면 평범한 사람 눈에 몸이 공이라는 게 아닌..
관자쟈보살님이 깊이 공부를 하고 관하니 몸은 존재가 아닌 공인 것이다.
당신은 아직 관자재보살 수준의 눈높이가 아니다. 그러니 5온은 존재인 5온으로 보인다.
고로 지금은 <심경> 내용이 무엇인지 따라가면서 이해를 점점 깊게 하면 충분하다.
몸[색온]이 존재든 비존재라 하든.. 그렇게 아는 것은 비존재인 마음이 아는 게 틀림없다는 점이다.
그 말은 '몸을 공으로 아는 것'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면.. 바로 마음이다. 마음 아니면 '몸은 공이다' 라고 하는 놈이 어디에 있다고 할까?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색즉시공'이라고 관해 아는 것은.. 당연히 마음이다.
임창정과 하지은 주연의 코믹 영화인 "색즉시공 Sex is Zero"을 보면..
섹스는 몸이 하는 것이요 사랑은 마음이 하는 것으로 아는데.. 섹스가 공이라면 섹스 역시 마음이라는 건가?..
존재인 색이 공이라면.. 공은 빔이지만, 비어있는 '존재'처럼 볼 수도 있다.
공인 숫자 제로는 있는 것은 아니나 없는 것도 아닌 비존재임을 보여준다. (수학에서 제로는 숫자가 아니라 기호다)
그러니 공을 비존재라고 하는 것은 존재가 아님을 강조하고 있는 게 된다.
따라서 '공'이라고 말하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마음일 뿐이다.
무 안이비설신의, 무 색성향미촉법..
12처에서.. '본다'는 뜻이 눈과 외부에 있는 색이 만나 생기는 것이라면.. 눈으로 보고 있으면, 보고 있는 것을 알아채야만 한다.
그러나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눈으로 보고 있어도 보는 게 아니다.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인도인들은 본다고 할 때는 아트만이 보는 눈에 들어간다고 한 것이고,
눈이 아닌 '내가 본다'고 우리는 말하는 것이다.
사진기는 우리 눈보다 훨씬 정교하게 대상을 담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인식하지는 못한다. 마음 작용이 없기에.
에이아이는 사진기와 달리 인식하지 않는가?. 미래에는 마음작용처럼 인식까지 할 것 같은데..
에이아이는 인식 이전인 판독하는 수준이다.
인식이란 스스로 보고 생각해 판단하면서 [판독]..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까지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 것을 인식이라 한다.
그와 같은 인식이 있기에 그전까지 없었던 것을 넘어선 창작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12처에서 판단과 인식 기능인 의와 법을 존재라 하면.. 존재하는 것이라면 과학이 언젠가는 만들 수 있으니.. 에이아이는 그런 능력까지 갖출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아니라, 내가 본다고 하듯.. 비존재인 나 마음이 보는 것이라면.. 에이아이에게 비존재인 마음이 생성될 수 있을까?.
사람이 태어날 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영혼을 불어넣어 준다 했고,
윤회를 가르치는 힌두교는 전생의 아트만이 부모의 수수작용에 관여하는 것으로,
불교는 과거의 업이 관여하여 태어남이 결정된다고 했다. 그와 같은 생명의 태어남이 에이아이에게도 가능할까?.
각설하고..
12처를 상좌부에서는 존재인 6근 6경과 같은 것으로 취급해 에이아이가 인간과 같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지만,
석가세존은 12처는 비존재인 마음에서 일어나는 2법6쌍으로, 비존재인 마음 작용이 생길 수 없는 에이아이라면 결코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마음은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나듯' 홀로 존재가 아니기에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그렇듯이 동시에 일어나는 작용이다. 잠을 자거나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을 때 대상이 있어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반야심경>에서 보듯 12처는 6근 묶음과 6경 묶음으로 설명하고 있으면.. 그것은 각각의 존재인 6근6경으로 보이니..
관자재보살님이 관찰했듯이.. 비존재인 마음인 공 가운데는 있을 수 없는 게 된다.
므로 공 가운데는 무 안이비설신의, 무 색성향미촉법.
18계는 처에서 계로 이름이 바뀌듯 입장이 다르다.
처는 마음에 생긴 것이라 하면, 계는 마음에 생긴 것이 존재로 변하는 시작점이 되기 때문이다.
<심경>을 보면..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라 했는데..
그것은 무안계, 무이계 내지 무색계, 무성계, 내지 무안식계, 무이식계, 내지 무의식계라 하여..
18계 각각이 '무'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18가지 각각을 존재로 여기고 있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으나, 18계는 완전한 존재는 아니기에..
18계 역시 3사화합이라 하듯.. (안계와 색계와 안식계), (이계와 성계와 이식계), 내지 (의계와 법계와 의식계) 로 3계6쌍으로 묶어 설명해야 바른 설명이고 바른 이해가 된다. 만일 18계가 존재라면 그것들은 비존재인 마음에 있을 수 없으므로
<심경>에서는 비존재인 공 안에 존재로 아는 18계는 없다고 했다.
밤하늘을 수놓고 있는 수많은 별들은.. 수천, 수만 년 전에 빛[색]이 출발해 지구에 이른 것으로 그 빛을 보낸 별은 지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다. 곧 보이는 것[색]과 존재인 물자체는 다르다는 것. 당연한 것이나 우리는 보이는 것이 곧 물자체라고 여긴다. 트릭이나 마술은 그런 점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석가세존은 물자체라 불리는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서양 철학자 칸트가 우리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없다고 하여 물자체와 그것이 인식된 것의 다름을 보아야 하듯..
세존은 마음공부를 바르게 하기 위해 12처는 마음에서 생긴 것이고, 마음에 인식되는 존재로 넘어간 18계의 접촉을 강조한다.
하여 부처님처럼 마음을 강조하고픈 관셈보살[관자재보살]은 새삼 마음인 공에는 존재인 12처는 없고, 심지어 존재인 18계 마저 없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내 눈[안계]과 당신의 모습[색계] 그리고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경험인 앎[안시계]이 결합해 내린 변할 수 없는 결과랍니다."
그러기에 상대에 대한 지금 내 사랑은 조건이 변하면 퇴색될 수도 있다.
관셈보살님이 18계가 없다고 하는 이유는 사랑을 부정하는 게 아닌.. 조건이 변해 사랑을 잃고 번뇌하는 당신을 위해 18계는 없음을 강조하는 것일 수 있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무명진(無明盡)이란.. 무명이 다하여 없다는 뜻으로.. 무명을 양파껍질 벗기듯 모두 벗겨낸 것을 말한다.
상좌부 불교에서는 12연기법의 환멸문을 무명진 내지 노사진이라 하여.. 무명을 열심히 멸해가면 언젠가는 한 게도 남김없이 멸할 수 있는 존재처럼 설명하는 것에 대해..
관자재보살님은 당신들이 가르치는 존재하는 무명진이나 노사진이라면 공에는 없어 말이 안 된다고 한다.
그렇기에 일체를 존재로 가르치는 상좌부식 불교는 시작이 잘못된 것으로 꿈과 같은 것이니 꿈에서 깨어 열반에 이르라고 한다.
故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고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그런가 하면 위 내용에 나오는 반야바라밀이나 공포나 전도된 꿈속 이미지는 물론 열반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마음이 아니라면 어디일까?
기독교 <성경> 안에 이런 내용이 있단다.
"나는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은 내 안에 계신다."
여기에 나오는 나와 하나님, 둘 다 마음 아닌가?..
단 존재하는 '내 마음'은 아니다.
열반은 비존재로 존재하는 몸과 정신으로는 구할 수 없는 게 되니.. 상좌부에서 참 열반은 죽어서만 얻을 수 있는 게 되었다. 그럼에도
그것에 대해 반대 주장을 하지 못한다.
살아서 열반을 성취한 이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열반은 비존재이기에 스스로 보거나 남이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달마대사를 찾아온 혜가는 절실한 자세로 물었다.
"저는 지금 너무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고통에 시달린 처절한 모습을 보며 대사는 담담히 말했다.
"그 고통을 보여다오."
본인이 열반을 성취해도 얼마든지 모를 수 있다. 비존재이므로..
"석가 부처님 이래 부처님이 된 자가 있느냐?"라고 묻는 자는 심중에 있으면 자기에게 증명해 달라는 할 것인데..
다시 말하지만 불교 일은 모두 마음 작용으로 보여주고 말 수 있는 게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수행을 하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을 지나면 아라한에 이른다고 하셨지만.. 그것은 눈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게 처음부터 아니다. 부처님께서 50여 명의 제자들 앞에서 전법을 떠나보낼 때 하신 말씀은..
나는 이미 인간과 천상의 속박에서 벗어났다.
너희들도 인간과 천상의 속박을 벗어났으니,
너희들은 인간 세상에 나가 많은 사람을 제도하고 많은 이익을 주어
인간과 하늘을 안락하게 하되,
짝지어 다니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씩 따로 다니도록 하라.
나도 지금 울비라(鬱羅) 마을로 가서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인간 세간을 유행하리라. <잡. 1 096. 승삭경(繩索經)>에서
라고 전하지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인간과 천상의 속박을 벗어난' 상태를 볼 수 없다.
하여 <경>에는 인간의 눈과 천상의 눈과 부처님의 눈을 구별하여 설명한다.
수행이 깊어지면 인간이지만 인간의 눈을 넘어 천상의 눈높이가 될 수 있다면서..
그러기에 살아있으면서 열반을 성취한 분이 옆에 있어도 인간의 눈높이인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없다.
수행의 핵심은 무얼까?.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눈이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이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듣고 있는 귀가 듣는 게 아니라, 마음이 듣고 있는 것이다.
보는 마음.. 듣는 마음을 관하자..
<반야심경>은 철저히 마음공부인 경이다.
마음은 비존재이므로 '와서 보라'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로 <심경>에는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한 주문이고 밝은 주문이며 위없는 주문으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이니,
온갖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음을 알지니라.
라고 하지 않는가.
만일 그것이 존재로 누구에게나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신비하고 밝고, 위없고.. 하는 꾸밈처럼 보이는 설명을 할 이유가 없다.
바로 보고 알 터이니..
결론은 <반야심경>은 "최고의 마음경"이 틀림없으니..
<반야심경> 제목에 나오는 '심장인 심(心)'은 마음으로 듣고 알아..
<심경 Mind Sutra>라 하여도
결코 잘못이 아니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