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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1279년 당대 최고 부국이었던 남송이 쿠빌라이의 손에 무너졌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역대 몽골제국 칸들이 염원했던 중국 통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17년간 몽골에 머물며 생생한 기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 그는 쿠빌라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난 군주다. 중앙 아시아 중동 유럽까지 천하를 호령하며 몽골제국 역사상 넓은 영토를 통치한 쿠빌라이, 그는 몽골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33번째 역사저널 그날 입니다. 오늘은 몽골제국의 칸 중의 칸, 쿠빌라이 칸의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데요. 우리가 칭기즈칸을 일등으로 꼽았는데 지금 마르코 폴로가 쿠빌라이가 인류 역사상 가장 훌륭한 군주라고 얘기했어요.
최태성/한국사 강사: 교과서에도 몽골하면 두 사람 밖에 안나와요. 칭기즈칸 하고 쿠빌라이, 이 두 사람이 다뤄지는 그만큼 유명한 사람이죠.
허준/방송인: 이게 낳은 건 칭기즈칸인데, 진짜 몽골제국을 기른건 쿠빌라이가 되거든요. 쿠빌라이 시대 몽골제국의 영토가 3,300만 ㎢, 한반도 면적의 150배!
최태성: 영토뿐만이 아니라 쿠빌라이 하면 업적도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무역을 통해서 경제를 활성화시켰고 몽골 고유문자를 만들기도 했던 왕이면서 어떻게 보면 칭기즈칸을 조선 태조 이성계로 본다면, 쿠빌라이는 조선의 세종대왕으로 보지 않을까.
이시원/배우: 마르코 폴로가 몽골에 갔을 때가 쿠빌라이 칸 때였잖아요. 제가 듣기로 마르코 폴로 친구들이 그 당시 몽골을 상상하기가 어려워 가지고 이게 다 뻥인 줄 알았대요. 그래서 마르코 폴로가 죽기 전에 너 지옥 가기 싫으면 거짓말 했던 거 회개해 그랬더니 마르코 폴로가 탁 하고 한 말, 나는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얘기하지 않았다.
이익주/서울시립대학교 사학과 교수: 이탈리아에서 마르코 폴로의 별명이 밀리오네 (Milione)~
일동: 밀리오네가 뭐예요?
이익주: 백만이라는 뜻이죠. 그냥 말만 하면 집이 백만 채, 사람이 백만 명, 백만 단위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믿기도 그렇고 안 믿기도 그렇고 참~
권용철/단국대 북방문화연구소: 그 믿기 어려웠던 그 모습을 우리가 지도를 통해서 한번 확인을 해 보겠습니다. 칭기즈칸이 정복 했던 영토보다 쿠빌라이 시대에 완성된 영토가 월등하게 넓다고 하는 걸 알 수가 있죠. 그리고 특히 나중에 남송을 정복하게 되면서 몽골제국이 중국 전체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 기록하기를 우리 시조인 아담이 태어난 이래로 쿠빌라이는 가장 권세 있는 사람이다.
이시원: 아니 신처럼 떠받드는 거 같은데요.
최원정: 서양에서도 그런 표현을 하는구나. 우리도 단군이래 치고~ 아담이래 최고~
이시원: 그런데 교수님, 저는 궁금한게 러시아도 정벌하고 유럽도 벌벌 떨게 만들었는데 남송은 그렇게 큰 땅은 아닌 것 같거든요. 그런데 왜 남송 정벌이 그렇게 의미를 가지죠?
권용철: 남송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느냐면 우선 남송의 수도는 중국의 임안(臨安) 지역에 있는 현재의 항저우(杭州)였습니다. 그런데 쿠빌라이 입장에서는 남송이 차지하고 있는 강남 지역에 있는 높은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습니다.
허준: 강남 땅 중국의 알토란 역세권 땅 남송을 칭기즈칸은 못 점령한 거예요.
이익주: 아마 그 시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곳을 꼽으라면 거기였을 거예요. 몽골족 인구가 백만 정도 됐을까요 몽골족 인구가 백만인데, 그 당시 중국 인구가 1억 정도되었고요. 100만을 가지고 1억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하는 것은 쿠빌라이에게 정말 중요한 숙제가 아닐 수 없었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쿠빌라이에 대해서 살펴 보면서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어떻게 갖추어 가는지~ 그걸 주의 깊게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최원정: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쿠빌라이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칭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고 손자죠?
최태성: 네, 칭기즈칸의 손자인데 (쿠빌라이 가계도-칭기즈칸 (1대 칸)/주치-차가타이-우구데이(2대 칸)/구육 (3대 칸)-툴루이/뭉케 (4대 칸)-쿠빌라이-훌레구-아릭 부케). 이제 우리가 쿠빌라이 칸을 얘기할텐데 칸으로서 어떤 모습이 있었느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아요. 그의 형 뭉케가 4대 칸이잖아요. 형이 칸이에요. 그러니까 칸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쉽지 않았다.
이시원: 그런데 어떻게 해서 칸이 된거죠?
권용철: 1259년 뭉케가 남송을 정벌하겠다고 지금의 사천성 쪽에서 전쟁을 하다가 갑자기 전염병에 걸려서 사망을 합니다. 그 이후에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쿠빌라이가 다음 칸의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거론 되기 시작되었죠. 그렇지만 과연 쿠빌라이가 진짜 칸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아직 미지수 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원정: 쿠빌라이가 차기 칸의 후보가 아니였단 말씀인데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이광용/아나운서: 몽골 귀족들의 선택, 몽골 5대 칸의 자리에는 과연 누가 오를 것인지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는 선거판을 제가 조목조목 짚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가장 유력한 후보는 2명 입니다. 기호 1번 아릭 부케, 기호 2번 쿠빌라이~ 두 후보 모두 사망한 뭉케 칸의 동생들입니다.
최원정: 뭉케는 아들이 없었어요?
이광용: 왜 없었겠어요. 4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어려요. 그래서 뭉케 동생 두명이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떠 오른 상황입니다.
최태성: 포스터 기호 1번을 좀 잘 그려 주시지~(기호 1번 아릭 부케-뭉케의 선택! 몽골초원의 수호자!, 기호 2번 쿠빌라이-언제까지 말달리기만 하시겠습니까! 중원을 넘어서 세계로!)
최원정: 포스터를 보니까 좀 흐리멍텅하게~
최태성: 포스터가 이미 선거결과를 암시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데~
이시원: 슬로건은 굉장히 멋있어요. 뭉케의 선택! 몽골초원의 수호자, 언제까지 말달리기만 하시겠습니까! 중원을 넘어 세계로! 내가 바로 적임지다 내가 정통을 잇는다.
이광용: 내가 바로 우리 형의 후계자다! 내가 뭉케 칸의 대를 이을 적통이다. 이런 느낌이잖아요. 이렇게 내세운 이유가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사망 소식이 전해진 뭉케 칸이 남송 정벌에 나서기 전에 기호 1번 아릭 부케에게 자신의 울루스와 몽골군대를 위탁했어요. 아릭 부케 입장에서는 우리 형이 나한테 다 주었어. 내가 적임자야 라고 내세울만 하지 않습니까. 그 영향으로 뭉케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몽골초원에 자리한 중요 귀족들이 다 자연스럽게 아릭 부케님이 차기 칸이 되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입장인 거죠.
최태성: 아릭 부케는 집권당 후보야
허준: 근데 중요한게 언제까지 말달리기만 하시겠습니까 하는 것은 신흥 세력들에게 한 말인거같애요. 언제까지 말젖 먹을꺼야 우리도 좀 제대로 먹어야지 이런 느낌~
최원정: 보수 진보 대결 같기도 하네요.
이광용: 지금 여론 조사를 통해서 제가 확보한 내용이 있는데요. 쿠빌라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꼽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초원의 전통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정주국가와 문화에도 우리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최원정: 지역별 지지도가 많이 다른가요?
이광용: 판세~ 지도를 보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몽골지역 판세~ 뭔가 분화된게 보이시나요. 몽골의 수도권을 포함해서 드넓은 초원 중심지역은 아직 부케의 지지도가 높습니다 .반면 2호 쿠빌라이는 남쪽 지역 특히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시원: 인구밀도는 오른쪽 (중원지역)에 있는 곳이 더 높을 테니까 판세가 어떻게 뒤집힐지 알 수가 없겠어요.
이광용: 컨설팅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분석하신대로 잘 몰라요. 속단할 수 없는 제5대 칸 선거판세, 그리고 선거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거든요. 지금 현재 판세는 뭉케 칸의 선택을 자부하는 기호 1번 아릭 부케~ 이 드넓은 초원을 바탕으로 뭔가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 같지만~ 기호 2번 중원을 바탕으로 내가 한번 우리 몽골 제국을 더 키워 보겠다. 이런 포부를 내세우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알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변수 하나가 생겼습니다. 여기에 (한반도) 무슨 나라가 있습니까?
일동: 고려!
이광용: 이 고려가 차기 칸 선거전에 캐스팅 보트를 쥐는 그런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고려 태자는 뭉케 칸을 만나기 위해 몽고로 향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태자 저하~ 뭉케 칸이 남송 정벌 중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고려 태자는 다음 칸으로 거론되는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는데~ 고려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고려는 더 이상 몽골에게 저항하지 않겠습니다. 고려 태자 신분이었던 원종과 쿠빌라이의 만남이 몽골 다음 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최원정: 하긴 일전에 우리가 다뤘지만 고려에게는 운명이 달라진 아주 결정적인 그날이에요.
최태성: 이때 쿠빌라이가 고려 태자를 만나고나서 너무 좋아하는 거에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당 태종이 침략했을 때 항복하지 않은 나라가 고려인데 이건 하늘의 뜻이다. 고려 태자 너 집에 갈때 내가 에스코트 붙여줄게~ 여기서 순간 쿠빌라이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습니다.
권용철: 훗날 쿠빌라이는 아릭 부케보다 정통성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부족했습니다. 그렇다 보니 사소한 업적 하나 하나가 굉장히 귀한 상황이었던 거죠. 그동안 몽골은 약 30년간 고려를 복속시키기 위해 전쟁을 이어 왔습니다만은 뚜렷한 결과를 얻어 내지 못했어요. 그렇게 강하게 저항했던 고려에서 태자를 보내서 지금 항복을 하러 온다. 이렇게 되었으니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내가 고려의 복속을 받아냈다 그렇게 과시하면서 칸으로 가기 위한 포인트를 하나 하나씩 적립해 나가는 거죠.
최원정: 쿠빌라이 칸 선거 캠프 입장에서는 최고의 복덩이가 굴러 들어 온 거에요.
이익주: 하늘의 뜻으로~ 이게 중요한 거에요. 그 당시 쿠빌라이는 뭉케를 따라서 남송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어요. 뭉케가 죽었으니 군대가 모두 본토로 돌아가는데 아릭 부케가 별일 없으면 다음 칸이 되는 건데 자기가 지휘하던 군대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북쪽으로 싸우러 올라간 것입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반란이에요. 그런 반란을 하는 명분 없는 행동에 고려 태자가 가서 하늘의 뜻을 전달하여 주었어요. 그리고는 수도였던 카라코룸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개평(開平)이라는 데가 있어요. 여기는 원래 쿠빌라이가 분봉 받았던 자기의 근거지입니다. 여기서 쿠릴타이를 열어요. 자기를 지지하는 사람만 자기 근거지에 모아 놓고 쿠릴타이를 해서 내가 칸이다.
최원정: 직접 선거를 한 게 아니라 완전 체육관 선거네요.
이익주: 체육관 선거뿐만 아니라 반쪽 짜리잖아요. 그래서 몽골 역사상 처음으로 반쪽 짜리 쿠릴타이를 해서 스스로 칸이 된 겁니다.
최원정: 절차상에 큰 하자가 있네요.
이시원: 이상해요. 고려의 항복까지 받아낸 마당에 당당하게 아릭 부케와 붙으면 되는 거 아녜요.왜 구태여 이렇게 야비하게~?
권용철: 아무리 그렇다 해도 뭉케 칸을 대신해서 초원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아릭 부케의 정통성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뭉케의 아들들을 비롯해서 주요 귀족들이 지금 몽골 본토에서 아릭 부케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몽골 초원에 가서 쿠릴타이를 연다 그렇다면 쿠빌라이가 이길 승산은 크지 않았을 겁니다.
허준: 거기에서 투표를 했다는 소식은 분명히 듣긴 들었을 거 아녜요. 그럼 이쪽도 뭔가는 해야 되잖아요.
권용철: 그래서 아릭 부케는 쿠빌라이가 불법적으로 칸에 오르고 나서 한 달 있다가 초원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최태성: 그러면 칸이 두명이 생긴 거예요.
권용철: 그렇죠, 그래서 몽골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대칸이 탄생하는 순간이 되는 거죠. 태양이 두 개가 떴으면 한 쪽이 없어져야죠. 결국에는 쿠빌라이는 1260년도에 4년 동안 내전을 치르게 됩니다.
허준: 그래서 누가 이겨요?
이익주: 전투는 막상막하였어요. 전투는 비겼다 라고 하는게 옳은데 전투가 끝나고 나서 외교전에서 쿠빌라이가 이깁니다. 쿠빌라이가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동지역 울루스에게 연락을 하는 거에요. 그래서 내편이 되어 달라. 자기 편으로 끌어드리는 데~ 그럼 뭔가를 주어야 되잖아요. 준게 뭐냐면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이에요. 여기 칸들이 그렇다면 내가 쿠빌라이를 지지하겠다. 이래서 아릭 부케는 고립이 돼요. 고립된 아릭 부케가 스스로 와서 항복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몽골제국이 완성되기도 하고 동시에 분열되는 것이기도 해요 (주치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 쿠빌라이 울루스).
권용철: 아릭 부케가 쿠빌라이에게 항복했을 때 했던 말이 참 인상적입니다. 뭐라고 했냐면 처음엔 내가 옳았다 그런데 지금은 형이 옳았다 딱 그렇게 얘기 합니다.
최태성: 그게 무슨 말입니까?
권용철: 처음엔 내가 옳았다는 것은 내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국은 쿠빌라이가 이겼기 때문에 승자가 옳은 것이다.
이시원: 이긴 사람이 옳은 것이다 이런 말이네~
최원정: 결국 그래서 동생이 독살당하지 않나요?
권용철: 네, 결국 의문사 당해요, 의문사지만 독살이지요.
이시원: 왜냐면 자기의 정당성이 캥기니까요.
허준: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게 이제 쿠빌라이가 칸이 되었어요. 여기에 분명히 도움을 많이 준 고려도 뭔가 가는게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최태성: 그런 거 보면 어쩌면 과정 자체가 합법적 모습은 아니잖아요. 어떻게 저 라인에다 (쿠빌라이) 선을 댔지? 그게 참 고려로서는 기가 막힌 장면이다 싶어요.
최원정: 그게 우연이에요 치밀한 계산이에요?
이익주: 두 가지 설명이 다 있어요. 첫째는 면밀한 정세 분석 끝에 쿠빌라이를 찾아갔다.
최태성: 고려는 그럴 수 있는 나라에요. 고려는 아트 외교 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이익주: 또 한 가지는 어떻게 할 줄 모르고 망설이고 있는데 그 지점이 쿠빌라이가 북상한 길하고 겹친다는 거에요. 그래서 우연히 만나게 됐다. 두 가지 설명이 다 있습니다.
이시원: 그런 입장에서 정말 쿠빌라이도 하늘이 도운 거지만 고려 입장에서도 하늘이 도운 게 아닌가요?
허준: 아니, 아니에요. 쿠빌라이는 하늘이 도운게 맞고 고려는 하늘을 스스로 돕게 만들었지~
최태성: 우리가 진짜 팔이 안으로 굽는다.
이익주: (허준을 향해) 고려인 이시군요.
최태성: 이러면서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여섯 가지 조건을 내놓게 되는데 이거 보면은 이게 항복이 맞어 라고 할 정도로 결국 팔을 안으로 굽어 볼게요. 첫번째 요구입니다. 의관은 본국의 풍속을 따르며 고치지 않는다. 둘째로 개경환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지금 상황이 어떤 상황이죠?
최원정: 고려는 몽골의 공격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상황~
최태성: 그러니까 우리가 가고 싶을 때 갈게 너무 재촉하지마~ 세번째 고려에 있는 몽골군을 철수하라. 네번째는 고려에 머무는 몽골 관리인 다루가치 철수 (다루가치-몽골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민정담당자), 그리고 다섯번째 사신은 몽골 조정에서만 보낸다. 마지막 여섯번째 전쟁 중 몽골에 항복한 고려인들을 돌려 보낸다. 너무 당당하지 않습니까?
허준: 항복외교가 아니라 승전외교인데요?
이시원: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우리 일 우리가 알아서 할 게 손 떼~
허준: 보통 이긴 쪽에서 이런 거 요구하는데~
최원정: 과감하게 질러 본 거 아녜요?
이시원: 협상의 기술을 보여준 고려?
허준: 손님-동대문 가면 얼마요? 상인-10만원, 깎아서 5만원이면 굉장히 싸게 산 거 같아요.
이익주: 아니~ 고려외교를 동대문에서~
허준: 대한민국 패션의 시작입니다.
최태성: 교수님이 조심해야 돼요.
이익주: ??? (현실파악)
권용철: 놀랍게도 쿠빌라이는 마지막 조항만 조율하고 모두 다 받아들입니다. 마지막 조항이라 하면 전쟁 중 몽골에 항복한 고려인들을 돌려보내라 이거였는데 쿠빌라이는 몽골로 이미 들어온 사람들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는 받아주지 않겠다.
이익주: 마지막에 몽골에 들어온 사람들은 요즘 말로 하면 친일파, 친원파 처럼 친몽파였던 거에요. 이 사람들은 몽골에 항복한 다음 몽골군의 고려 침략을 안내했거든요. 이 사람들은 끝까지 우리가 보호하겠다.
허준: 전쟁이 끝난 후에 전투에선 졌지만 외교는 완벽한 승리했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네요.
이익주: 굉장히 중요한 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전쟁은 왜 하나? 전쟁의 이유가 전쟁은 전쟁 끝에 외교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하는 거죠. 고려는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리한 고지를 놓치지 않은 거에요.
최태성: 제일 좋은 외교는 서로가 윈-윈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때 좋은 외교라 하는데 지금 그 결과를 만들어낸 거죠.
해설; 1267년 쿠빌라이는 새로운 수도를 세울 것을 발표한다. 그 이름은 대도였다. 제국의 새로운 수도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을 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진귀한 물건들을 대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새 수도로의 천도가 완료된 1271년, 쿠빌라이는 몽골의 새로운 국호를 발표한다. 몽골의 새로운 국호를 대원이라 하라. 유목민의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몽골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최원정: 몽골의 새로운 시대 대원(大元)~ 이게 원나라의 시작인 거죠. 국호는 왜 갑자기 바꾼 거에요?
권용철: 쿠빌라이는 몽골식 나라 이름, 예케 몽골 울루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이 이름이 자신이 통치할 중국 사람들에게는 정확히 인식되기가 굉장히 어렵다.
이시원: 이름이 길어서?
권용철: 길고 어쨌던 낯선 언어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1271년에 중국 유학자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중국식 왕조 이름인 大元을 선택을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을 이용해서 국호를 만든 거다.
이시원: 저는 이게 이해하기 힘든 게 그러면은 몽골이 새로운 나라를 탄생한 게 아니라 그냥 중국에 흡수된 거 아닌가 그런 느낌이 들거든요?
이익주: 중국이 된다 이걸 한화(漢化) 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한가지 생각해 볼 게 중앙 아시아나 중동 러시아 지역 사람들이 대원이라는 이름을 이해 했을까요. 못했을 거예요. 그 사람들은 한문을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이 대원이라는 국호는 한문이 통용되는 지역에서만 사용되는 나라 이름입니다. 전체 나라를 위해 몽골 제국의 공식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로 가고 이걸 한문으로 번역을 한다면 大元이 될 것이다.
이시원: 그러면 한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건 틀린 거네요.
이익주: 그렇죠, 증거 하나를 보여 드릴게요. (건물사진) 이게 대도를 복원한 건데~ (몽골의 새로운 수도 대도 복원도) 사진으로 복원한 건데~
최원정: 자금성처럼 생겼네~
허준: 전형적인 중국성의 느낌이잖아요.
이익주: 그렇죠, 누가 봐도 저건 중국의 성이에요. 그런데 쿠빌라이가 여기 와서 살 때 어디에 거처했을까요?
이시원: 저기에서 제일 좋은 방~ 경치 좋은 좋은데~
이익주: 그런데 쿠빌라이는 방에 들어가지를 않아요. 마당에 게르를 만듭니다. 왜냐면 몽골 사람이었던 쿠빌라이는 방에서 사는 게 너무 불편한 거에요.
최태성: 말타고 초원 달리다가 저 안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럼 그 성에서 누가 살아요?
이익주: 공실~ 비워 놓는 거예요. 그러니까 몽골 사람들은 대도에 와서 생활할 때에도 게르에서 산다.
이시원: 아니 모델 하우스만 좋게 지어 놓은 듯~
이익주: 저건 정말 보여주기 위한 궁궐이에요. 그렇다면 쿠빌라이가 한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죠. 필요한 만큼 중국의 문화를 사용했을 뿐이에요. 쿠빌라이는 죽을 때 까지 한문도 중국어도 배우지 않았어요. 몽골 사람으로 살다가 몽골 사람으로 죽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몽골이 원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몽골이 중국을 한 부분으로 아우르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을 해야 몽골과 원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 할 수가 있게 돼죠.
이시원: 그리고 진짜 생활습관 식습관을 고치기 어려우네요. 왜 이민 가신분들 끝까지 한식 드셔야 되고~
허준: 부모님한테 돈 벌었다고 효도한다고 침대 사드리면 침대 옆에 요를 깔고 누우세요. 역시 여기가 편해~ 쿠빌라이로서는 절대로 몽골의 피를 포기할 수 없는게 안 그래도 분열의 몽골, 분열의 제국을 만들었다는 비난을 듣는데 만약에 저기다가 성 지어놓고 중국식 옷 입고 거기에서 정치한다 더라 그러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것 같애요.
이시원: 당장 쿠빌라이 너 몽골 사람아니네 그랬을 것 같애요.
최원정: 정통성의 문제가 있는데 그렇겠네요.
최태성: 황실을 지을 때도 몽골 초원의 풀 흙을 가지고 와서 지었다고 그러더군요. 어떻게 하든 나 이러고 있어. 초원의 DNA를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를 보여 주고 있어 이런 모습을 보여준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권용철: 그래서 중국식의 도성을 세운 것도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안정적으로 통치를 하려는 수단이었다 라고 이해를 해야 되겠죠. 그래서 쿠빌라이는 예전 몽골 제국의 군주들처럼 약탈하고 초토화시키고 그래서 영토를 넓히기만 하는 것 보다는 뭔가 윗 단계를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라고 생각할 수 있구요. 정복 이후에 그 지역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통치하느냐, 말에서 내려와서 어떻게 통치하느냐를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라고 볼 수 있죠.
최원정: 카라코룸 수도를 버리는 것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텐데~ 왜 대도 (현재의 베이징) 자리로 옮겨야 했을까요?
권용철: 쿠빌라이는 언젠가 자기가 남송을 점령을 하고 중국 전체를 지배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면 이 카라코룸이라고 하는 몽골의 수도의 위치가 과연 적당했겠느냐. 너무 초원에만 치우쳐 있기 때문이죠. 저기 지도를 보시면 대도 (지금의 북경)로 수도를 옮기게 될 때 대도의 전략적 지점으로서 중요한 이유가 뭐냐하면 유목지대와 정주지대의 경계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과 정주민 양쪽을 통치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지점인 거죠.
허준: 거기다 또 중요한 게 바다를 낀 게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카라코룸에서 바다까지는 너무 멀어요. 며칠 이상 걸리니까.
이익주: 저 대도까지 운하가 만들어져요. 그래서 바다 물이 북경 대도섬 까지 들어갑니다. 그래서 거기에 커다란 연못이죠. 그런데 우리 느낌으로 호수예요. 호수 같은게 북경성 안에 있고 바다물이 거기로 들어갑니다.
허준: 그러면 거기에 우럭 같은 게 살아요. 짠 물이니까 살겠죠. 대도에선 호수에서 우럭과 광어를 잡아요.
이시원: 아무튼 대도는 수도로서는 손색이 없는 곳인가요?
권용철: 그런데 사실 이 대도가 식량이나 물이나 이런 자원의 측면에서는 부족하다 라고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최태성: 겨울가면 영하 10도까지 떨어져서 돼게 추워요. 농사를 짓는 좋은 곳이 아니죠.
권용철: 그럼에도 대도를 선택한걸 보면 이건 추론이지만 남송을 정벌해서 부족한 자원은 거기서 끌어와서 통치하겠다.
허준: 유목민족 다운 생각이다. 그 지역에 쌀이 없어요. 괜찮아 그 옆집에 쌀이 많아~
이시원: 나름 계획적이네요.
최원정: 남송은 내 땅, 마음에 든든했겠죠. 국호도 세우고 수도도 옮기고 새롭게 굳혀 나가는데 드디어 역대 칸들이 염원했던 남송을 치기 위해서 나섭니다.
해설: 1268년, 남송군과 쿠빌라이군은 항서 중양의 요충지인 양양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10만 쿠빌라이 군은 본격적인 전투 대신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남송군이 손을 놓고 지켜 보는 사이 양양을 둘러싼 함성이란 흙벽을 쌓고 100km가 넘는 포위선이 이어졌다.
몽골 장수: 양양성에 쌀 한 톨 무기 한 자루도 공급할 수 없도록 포위하라.
해설: 포위작전은 무려 5년간이나 이어졌다.
최원정: 성을 포위 했는데도 5년간이나 버텼어요. 정말 대륙의 스케일은 다르네요.
최태성: 저는 초원의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애요. 이거 뭐야 전 계속해서 진행 사유를 볼 때 이거 아니지요. 계속 그럴 거 같애요.
이시원: 속도전을 중시하던 몽골군은 도대체 어디로 갔죠?
권용철: 몽골군은 이때 처음부터 속도전이 아니라 지구전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익주: 이 전쟁은 몽골의 전쟁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기병이 동원되지 않아요.
최태성: 몽골이?
이익주: 네, 몽골 기병이 동원되지 않았고 몽골군이 아니라 그때까지 항복한 여진족, 거란족 또 한족 이런 사람들로 보병부대를 만든 갑니다. 물론 기병이 있긴 하지만 몽골식 기병은 아닙니다. 그리고 에워싸고 고립시키고 하는 공성전을 하는데 몽골이 다른 나라에서 배운 전쟁방법을 그대로 반사시키고 있는 거죠.
이시원: 양양이 도대체 어떤 곳이 길래~
허준: 이곳이 우구데이가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뭉케가 여기 공격하다가 죽은 데예요.
최태성: 몽골군은 미지의 서방 세계도 다 뚫었는데 이까짓 거~뭐 그냥 마음만 먹으면~
권용철: 남송의 경우에는 굉장히 큰 하천들이 많이 흐르는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까지 몽골군이 정벌했던 루트를 잘 생각해 보면 다 건조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특히 몽골군의 가장 중요한 무기인 기마부대가 자기 역할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초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송은 지리적으로 습지와 숲들이 많았기 때문에 공략하기가 힘들었고 게다가 더위 습기 이런 것들 때문에 말들도 헐떡 댈 수 밖에 없었어요.
이시원: 한 마디로 몽골군은 자신의 장점은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곳에서 싸운 게 아니네요.
허준: 역사상 내가 누군지 알아 하고 전쟁을 했는데 기후 때문에 패배한 장군들이 굉장히 많아요. 나폴레옹은 러시아 추위 때문에 그랬죠. 삼국지에서 적벽대전 조조가 어마어마한 군대를 갖고 남송 이쪽 지역에서 전염병 걸리고 못 싸우고 결국 기후라는 건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죠.
최태성: 그것도 (기후) 중요하지만 남송 자체가 만만치 않은 나라일 수도 있어요.
이익주: 인구도 많고 오래 버틸 수 있는 경제력도 풍부하고 또 한 가지는 방어시설이 아주 훌륭했어요. 그래서 몽골군이 양양성을 함락하는 데에는 기존의 전술 가지고는 거의 불가능했을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아주 재빠르게 전술을 변화시키겠다는 것이죠. 양양성을 둘러싸요. 그리고 고립을 시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시장도 열도 연회도 하면서 계속 놀고 있는 거예요. 그 안에 갇혀 있는 남송 사람들만 답답해 지는 거고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모르는 상황이 돼요. 오히려 남송 사람들이 성문 열고 나와서 공격을 하죠. 그런데 왜 그랬을까 그것이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점도 있지만 한 가지는 쿠빌라이가 남송 지역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이시원: 왜요?
이익주: 그 지역에 그 번화한 도시들, 이런 걸 그냥 놔둬야지 이게 내께 될텐데~처음에 칭기즈칸 이나 우구데이 칸 때에는 다 짓밟고 나가고 파괴하고 그랬겠지만 여기는 그러면 안돼요. 여기는 나중에 내가 써야 되는 곳이거든요.
이시원: 있는 그대로 널 갖고 싶어~
허준: 쿠빌라이는 약간 피가 달라~
최원정: 몽골인 스럽지 않은~
이익주: 그래서 쿠빌라이는 칸 중의 칸이에요. 그 이전의 칸들하고는 달라요.
이시원: 다른 차원의 칸, 쿠빌라이
최원정; 결국 양군의 소모전이 너무 계속되니까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결단을 내립니다.
----------------이광용/아나운서: 쿠빌라이는 이슬람 교도인 기술자 두 명을 전장으로 파견합니다. 왜 쿠빌라이는 이슬람 교도들을 그 중요한 전장으로 보낸 걸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 중요한 분을 모셨습니다. 터키 출신 알파고 시다씨 기자입니다-----------------
일동: 안녕하세요?
알파고 시다씨: 안녕 하십니까? 터키에서 왔지만 민방위 경력이 4년인 알파고입니다. 오늘 군사적인 얘기를 해야 되니까~쿠빌라이 정부는 요직에는 이슬람 교도를 많이 등용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수학에 능통했기 때문입니다. 왜 이슬람 교도들이 수학에 있어서 능통했는지가 궁금하시죠.
최태성: 여기서도 이과 우대인가요? MC-패널 모두 문과 힘들어요.
이광용: 계속해서 우리는 문송할 수 밖에 없어요. 난데 없이 등장한 수학문제 sin? cos? tan?
알파고: 삼각형 그림 모서리 ABC 변 abc 단순히 abc로 보일 수 있지만 이건 수학입니다.
이광용: 저는 알아요. 저는 문과지만 이 삼각형 그림이 기본 아닙니까> 저는 아니까, 아세요?
최태성: sin cos tan ~ 역사 선생님도 아시네~!
이시원: 내각의 합이 180도인 세변의 삼각형에서~
이광용: 알파고씨는 아세요?
알파고: 저는 과학고 졸업해서 압니다.
최원정; 과학고등학교 졸업했어요? 그래서 이름도 알파고?
허준: 인생을 살면서 요정도만 알면 됩니다. 직각 삼각형이구나.
알파고: 지금 여러분의 머리를 하얗게 만드는 수학 문제들을 이슬람 교도들이 7~8세기부터 누구나 술술 풀었거든요(삼각함수 등수학에 능통했던 이슬람교도들).
최태성: 이유가 뭘까?
알파고: 이유가 있어요. 이유는 종교였어요. 종교하고 수학이 무슨 관계냐고 궁금하시잖아요. 이건 너무나 단순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번 무함마드의 탄생지인 메카를 향해서 기도를 해요 (살라트-하루에 다섯번 몸을 깨끗이 하고 무함마드의 탄생지인 메카를 향해 행하는 이슬람의 예배로 무슬림의 5 가지 의무 중 하나). 언제해야 되는지 그리고 그 방향이 어디인지가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 삼각함수를 통해서 시간하고 방향을 이슬람 교도들이 계산을 했다는 거예요.
이시원: 요즘은 앱이 있대요. 메카를 향하는 앱이 있대요.
알파고: 저도 지금 그 앱을 쓰고 있습니다.
이시원: 그런데 당시엔 일일이 계산해서 했던 거예요?
최태성: 아니 그러면, 기도할 때 마다 사인 코사인 탄젠트 들어갑니다. 이런단 말예요?
알파고: 맞아요. 신학교에서는 이렇게 수학을 가르쳤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슬람 교도들이 수학 실력을 바탕으로 놀라운 기계까지 발명을 했습니다.
-------------(이상한 복장을 하고 무얼 들고 있는 이슬람 사람 그림이 등장)--------------
이광용: 오늘 이 색깔이란 비슷한 옷을 입고 오신 분들이 좋아하는 음료수를 따라서 마실 때 쓰는 건가요 그리고 지금 이 막대기는 수맥 찾는 중~ 닮았는데~
알파고: 이 거는 12세기 이슬람 교도들이 발명한 물 따르는 오토마타(자동기계장치) 입니다. 여기에 물이 있는데 여기 있는 물이 한 방울씩 한 방울 씩 떨어져서 여기 탱크에 담기면 7분 후에 인형 팔이 기울어져 물을 따르는 거예요. 그 시대에 있었던 AI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이광용: 이게 7분에 맞춰져야 된 거예요?
알파고: 네, 7분에
최태성: 저게 동력장치 없이 물로만 작동된다는 얘기예요?
알파고: 그렇죠, 구멍을 파서 일정한 양의 물을 일정한 속도로 떨어 뜨려서 작동시킨다.
최태성: 저게 우리나라 세종 때의 물시계 자격루의 원리인데요.
이광용: 그런데 세종의 자격루는 몇 세기입니까? 1434년 15세기 초반이죠. 이건 12세시란 말이에요.
알파고: 이분들이 이제 쿠빌라이 칸한테 연락을 받아서 양양성으로 갑니다. 가는 이유가 뭐냐면 양양성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쟁에 이길 수 있을까 하고 수학적으로 생각을 하고 기계를 하나의 신무기를 발명을 했다는 거죠 (투석기 그림 등장). 저게 바로 그 사진에 썼던 기계입니다.
이시원: 아~ 저게 알겠다. 던지는 것~ 돌을 던지는 투석기~
알파고: 예전에 있던 투석기 하고 이거와는 다릅니다. 이건 회회포 입니다.
이시원: 뭐가 다르죠?
알파고: 기존의 투석기는 사람이 줄을 끌어 당겨 돌을 던진 거죠. 투석기 였거든요. 근데 단점이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끌어 당겨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이 회회포 라는 기계를 발명함으로서 새로운 원리를 사용했습니다. 무슨 원리냐 하면 지렛대 원리를 이용했다는 것이죠. 한 쪽에 돌을 놓고 중심추 역할을 하는 이 부분을 무겁게 해서 내려오면 돌이 날아가는 거예요.
이시원: 그러면 힘을 덜 들이고 보낼 수 있겠네요?
알파고: 그렇지요.
이광용: 사람들이 당겨서 던지는 것 보다 더 멀리 갈 수 있겠네요.
알파고: 보통 기존 투석기를 통해서 돌 50kg 비거리 100m 정도 날아가게 만들 수 있어요. 회회포는 50kg 아니고 60kg 아니고 90kg 돌을 100m, 200m도 아니고 600~700m를 날려 보낼 수 있어요 (기존 투석기 50kg 비거리 약 100m VS 회회포 돌 90kg 비거리 600~700m).
이시원: 기술의 차이가 확 늘어났어요.
이광용: 600~700m요?
알파고: 네~
이광용: 확인 안된다고 대충 말한 거 아니에요?
알파고: 저는 기자 출신으로 대충 쓸 수가 없고 완전히 팩트로 판단했습니다. 이건 역사기록에 다 나와 있구요. 저를 못믿겠으면 녹화 끝나고 직접 확인해 보세요. 그러다 보니까 이 회회포는 양양성 전투에서는 어마어마한 역할을 했다고 기록들에 나와 있습니다.
이시원: 만물의 이치는 기본이 수학이라고~ 수학을 잘 하니까 이렇게 전쟁까지 잘 하네요!
최원정: 이슬람 사람들이 정말 수학 천재네요. 이슬람 사람들은 우리가 그때 몽골군에 짓밟히지만 안했어도 우리가 원자폭탄 먼저 만들었다는 그런 얘기를 널리 한대요.
권용철: 쿠빌라이가 이렇게 최고의 대칸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렇게 다양한 방면에서 인재를 알아봤던 그의 능력을 우리가 꼽을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은 쿠빌라이가 자기 측근 신료들과 사냥을 나갔을 때 그걸 그린 그림입니다 (유관도(劉貫道)가 그린 원세조출렵도 (元世祖出獵圖), 1280년).
이시원: 근데 보니까 분장을 한 건가요? 누구는 하얗게 칠하고 누구는 까맣게 칠하고~화장한게 아니에요?
권용철: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은 인도, 서역 출신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걸 봐도 쿠빌라이는 인종, 국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양 포위전을 할 때에도 위구르 사람, 중국 사람, 아랍 페르시아 사람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익주: 다민족, 다문화 이런 것들이 그때 실현이 됐죠. 특히 종교에서도 굉장히 유연한 모습을 보여요. 쿠빌라이가 마르코 폴로를 만나서 한 이야기가 지금 전해 오는데 기독교도들은 신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고, 이슬람 교도들은 마호메드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모세라고 한다. 또 우상숭배자들 (불교도)은 석가모니 부처라고 한다. 나는 이 넷을 모두 존경한다—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지난번에 얘기했던 플랫폼 국가 이게 진정하게 만들어졌던 거죠.
최원정: 당시 같은 시기에 다른 나라들은 다른 종교를 탄압할 때이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허준: 지금으로 따져도 저렇게 다민족들이 모여서 똑 같은 일들을 한다는 건 인종차별도 없었던 거구 아니 어떻게 천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지? 너무 신기해요.
이익주: 쿠빌라이의 정책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게 몽골 색목, 한인, 남인 이렇게 차별했다고 알고 있잖아요. 차별이 아니라 구별, 단지 얘기해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화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을 때 네 집단이 구별될 수 밖에 없다는 거죠 (교과서에서 배운 이 그림은 맞지 않습니다, 틀렸습니다). 이건 우리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고 이런 다양성이 살아있는 그야말로 플랫폼을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죠.
최태성: 양양성 전투를 다시 한번 들어볼게요. 양양성 전투에서 지금 뭐가 동원됐다고 그랬죠?
이시원: 회회포~
최태성: 20여 대의 회회포를 동원하여 남송을 격렬하게 공격합니다. 어떤 걸 날렸느냐 하면 돌만 날린게 아니라 여기에 벌집도~ 전갈도 날리고~그리고 죽은 동물의 사체도 날리고~ 동요를 시키겠다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데~ 결국 공격에 의해서 1279년 남송은 무너집니다.
권용철: 어쨌던 정통성 논란, 계속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고 있던 쿠빌라이에게 이건 정말 엄청난 포인트였다고 볼 수 있는데요. 결국 중국 전체를 장악을 한다 이건 대몽골 제국의 쿠빌라이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였고 사실 예전 유목제국이 중국 전체를 점령했던 최초의 업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다.
이익주: 또 한 가지는 몽골제국이 바다를 차지하게 된 거예요. 남송을 차지하면서 바다까지 가지게 된 겁니다. 이러면서 말을 타던 사람들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게 된 겁니다. 그러면서 그야말로 세계제국 이런 모습이 완성이 되는 거죠.
최태성: 정복자들에게 바다는 뭔가 자극을 주는 것 같애요. 예전에 알렉산더 대왕도 정복의 끝은 바다였거든요. 그런데 몽골 역시 드디어 바다를 장악하게 되는 그런 모습이 나오네요.
최원정: 몽골제국 역사상 최초로 중국 전역을 통일하고 역사상 제일 큰 영토를 차지한 시기를 봤는데 오늘 어떠셨는지 한 마디씩 들어볼까요?
허준: 요즘 보면 갈등의 사회라고 많이들 얘기하잖아요. 세대간 갈등도 불과 몇 년전 10년전 20년전의 문화도 저건 우리 받아들이지 않어 그랬는데 쿠빌라이가 가장 강력했던 이유는 받아들일 건 다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는데 역사를 배우면 이런 갈등도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겠구나~
권용철: 이제 몽골제국의 역사에서 보면 가장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사람이 역사적 인물이 쿠빌라이 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다양한 통치 방식을 활용하고 다민족 인재를 등용하면서 이른바 몽골에 의한 평화, 팍스 몽골리카 (Pax Mongolica) 시대라는 번영기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는 분명 우리가 역사적인 의미를 충분히 발견해 낼 수 있을 겁니다.
이익주; 우리가 몽골 제국을 원나라라고 하고 중국 역사에서 요, 금, 원, 명, 청 이런 왕조 교체 속에서 원을 자리매김하고 이 몽골이 중국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사람들은 중국을 일부로 가지고 있는 더 큰 나라였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능하다면 더 넓은 몽골 제국을 계속 보려고 하는 노력을 해야 중국 인식의 역사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최원정: 우리가 몽골 얘기 다음 시간에 고려와 접목시켜서 계속 이어져 나갈 거죠. 다음 시간 또 기대가 되는 데 이 시간 마무리 하기 전에 안내 말씀드리겠습니다. 역사저널 그날이 화요일 밤에 여러분 찾아 가셨잖아요. 앞으로는 토요일 8시로 시간대가 변동이 됩니다. 주말에도 역사저널 그날 잊지 마시고 꼭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끝. (KBS 역사저널 그날 칭기즈칸의 나라, 몽골제국 [제5편] 쿠빌라이, 최대 몽골제국을 이루다에서 정리).
① 1279년 당대 최고 부국이었던 남송이 쿠빌라이의 손에 무너졌다. 칭기즈칸을 비롯한 역대 몽골제국 칸들이 염원했던 중국 통일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17년간 몽골에 머물며 생생한 기록을 남긴 마르코 폴로, 그는 쿠빌라이를 이렇게 기록했다. 지금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뛰어난 군주다. 중앙 아시아 중동 유럽까지 천하를 호령하며 몽골제국 역사상 넓은 영토를 통치한 쿠빌라이, 그는 몽골제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몽골제국을 낳은 건 칭기즈칸이지만, 진짜 몽골제국을 성장시킨 건 쿠빌라이다. 쿠빌라이 시대 몽골제국의 영토가 3,300만 ㎢, 한반도 면적의 150배! 영토뿐만이 아니라 쿠빌라이 하면 업적도 어마어마하게 많다. 무엇보다도 무역을 통해서 경제를 활성화시켰고 몽골 고유문자를 만들기도 했고 칭기즈칸을 조선 태조 이성계로 본다면, 쿠빌라이는 조선의 세종대왕으로 본다. 칭기즈칸이 정복 했던 영토보다 쿠빌라이 시대에 확장된 영토가 월등하게 넓다. 특히 나중에 남송을 정복하게 되면서 몽골제국이 중국 전체를 손아귀에 넣은 사건은 굉장히 중요한 사실이다. 그래서 마르코 폴로가 동방견문록에 기록하기를 우리 시조인 아담이 태어난 이래로 쿠빌라이는 가장 권세 있는 군주다.
② 남송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느냐면 우선 남송의 수도는 중국의 임안(臨安) 지역에 있는 현재의 항저우(杭州)였다. 그런데 쿠빌라이 입장에서는 남송이 차지하고 있는 강남 지역에 있는 높은 경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다. 지혜로운 칸이다. 그 시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곳을 꼽으라면 거기였을 거다. 몽골족 인구가 백만인데, 중국 인구 1억이었다. 100만을 가지고 1억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쿠빌라이에게는 중요한 숙제였다. 오늘 우리가 쿠빌라이에 대해서 살펴 보면서 통치자로서의 모습을 어떻게 갖추어 가는지~ 그걸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손자다. 쿠빌라이 가계도-칭기즈칸 (1대 칸)/주치-차가타이-우구데이(2대 칸)/구육(3대 칸)-툴루이/뭉케 (4대 칸)-쿠빌라이-훌레구-아릭 부케). 그의 형 뭉케가 4대 칸이었다. 칸의 자리에 오르기에는 쉽지 않았다. 1259년 뭉케가 남송을 정벌하겠다고 지금의 사천성 지역에서 전쟁을 하다가 갑자기 전염병에 걸려서 사망했다. 형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던 쿠빌라이가 다음 칸의 후보자의 한 사람으로 거론 되기 시작되었다.
③ 몽골 5대 칸의 자리에는 가장 유력한 후보는 2명,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두 후보 모두 사망한 뭉케 칸의 동생들이다. 뭉케는 아들이 4명이 있었다. 그런데 너무 어리다. 그래서 뭉케 동생 두명이 강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떠 오른 상황이다. 뭉케 칸이 남송 정벌에 나서기 전에 아릭 부케에게 자신의 울루스와 몽골군대를 위탁했다. 아릭 부케 입장에서는 내가 적임자다 라고 내세울만 하였다. 그 영향으로 뭉케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몽골초원에 자리한 중요 귀족들이 다 자연스럽게 아릭 부케를 차기 칸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신흥 세력들은 쿠빌라이를 지지하였다.
④ 몽골의 수도권을 포함해서 드넓은 초원 중심지역은 부케의 지지도가 높다. 반면 쿠빌라이는 남쪽 지역 특히 중원지역을 중심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중요한 변수 하나가 생겼다. 고려가 차기 칸 선거전에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는 상황이다. 고려 태자는 뭉케 칸을 만나기 위해 몽고로 향했다. 30년 가까이 이어진 몽골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뭉케 칸이 남송 정벌 중 사망하였다. 고려 태자는 다음 칸으로 거론되는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 사이에서 고민하던 중 남쪽으로 방향을 돌리었다. 고려 태자는 쿠빌라이를 만났다. 고려는 더 이상 몽골에게 저항하지 않겠다. 고려 태자 신분이었던 원종과 쿠빌라이의 만남이 몽골 다음 칸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이때 쿠빌라이는 고려 태자를 만나고나서 너무 좋아하였다. 당 태종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항복하지 않은 나라가 고려인데 이건 하늘의 뜻이다. 순간 쿠빌라이는 전폭적인 몽골 세력의 지지를 받는다. 쿠빌라이는 정통성의 측면에서는 아릭 부케보다 확실히 부족했다. 그렇다 보니 사소한 업적 하나 하나가 굉장히 귀한 상황이었다. 몽골은 약 30년간 고려를 복속시키기 위해 전쟁을 이어 왔지만 뚜렷한 결과를 얻어 내지 못했다. 그렇게 강하게 저항했던 고려에서 태자를 보내서 지금 항복을 하였다. 쿠빌라이의 입장에서는 내가 고려의 복속을 받아냈다 라고 과시하면서 칸으로 가기 위한 포인트를 하나씩 적립해 나갔다.
⑤ 그 당시 쿠빌라이는 뭉케를 따라서 남송에서 전쟁을 하고 있었다. 뭉케가 죽었으니 군대가 모두 본토로 돌아가는데 아릭 부케는 별일 없으면 다음 칸이 되는 건데 자기가 지휘하던 군대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북쪽으로 싸우러 올라갔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는 반란이다. 그의 명분 없는 행동에 고려 태자가 쿠빌라이에게 가서 하늘의 뜻을 전달하여 주었다. 쿠빌라이는 수도였던 카라코룸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개평(開平)이라는, 원래 쿠빌라이가 분봉 받았던 자기의 근거지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그를 지지하는 사람만 자기 근거지에 모아 놓고 내가 칸이다. 몽골 역사상 처음으로 반쪽 짜리 쿠릴타이를 해서 스스로 칸이 되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뭉케 칸을 대신해서 초원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아릭 부케의 정통성에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뭉케의 아들들을 비롯해서 주요 귀족들이 지금 몽골 본토에서 아릭 부케를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식으로 몽골 초원에 가서 쿠릴타이를 연다면 쿠빌라이가 이길 승산은 크지 않았다. 아릭 부케는 쿠빌라이가 불법적으로 칸에 오르고 나서 한 달 있다가 초원에서 쿠릴타이를 열고 칸의 자리에 올랐다. 몽골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두 명의 대칸이 탄생하였다. 결국 쿠빌라이와 아릭 부케는 1260년도에 4년 동안 내전을 치렀다. 전투는 막상막하로 비겼다
⑥ 전투가 끝나고 나서 외교전에서 쿠빌라이가 이긴다. 쿠빌라이가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동지역 울루스에게 연락을 하였다. 내편이 되어 달라고, 그러면 그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주겠다. 칸들은 그렇다면 내가 쿠빌라이를 지지하겠다. (주치 울루스, 훌레구 울루스, 차가타이 울루스, 쿠빌라이 울루스). 이래서 아릭 부케는 고립이 되었고 고립된 아릭 부케는 스스로 와서 항복을 하는데 이것은 몽골제국이 완성되기도 하고 동시에 분열되는 것이다. 아릭 부케가 쿠빌라이에게 항복했을 때 했던 말이 있다. 처음엔 내가 옳았다 그런데 지금은 형이 옳았다. 처음엔 내가 옳았다는 것은 내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국은 쿠빌라이가 이겼기 때문에 승자가 옳은 것이다. 아릭 부케는 결국 의문사 당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게 이제 쿠빌라이가 칸이 되었다. 여기에 분명히 도움을 많이 준 고려도 뭔가 가는게 있어야 되지 않을까. 어떻게 쿠빌라이에다 선을 댔지 그게 고려로서는 기가 막힌 장면이다. 고려 입장에서도 하늘이 도왔다 밖에,
⑦ 원종이 쿠빌라이에게 여섯 가지 조건을 내놓는다. 첫번째 요구, 의관은 본국의 풍속을 따르며 고치지 않는다. 둘째로 개경환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고려는 몽골의 공격을 피해 강화도로 천도한 상황이었다. 세번째 고려에 있는 몽골군을 철수하라. 네번째는 고려에 머무는 몽골 관리인 다루가치 철수 (다루가치-몽골이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해 설치한 민정담당자), 다섯번째 사신은 몽골 조정에서만 보낸다. 마지막 여섯번째 전쟁 중 몽골에 항복한 고려인들을 돌려 보낸다. 놀랍게도 쿠빌라이는 마지막 조항만 조율하고 모두 다 받아들인다. 마지막 조항이라 하면 전쟁 중 몽골에 항복한 고려인들을 돌려보내라 였는데 쿠빌라이는 몽골로 이미 들어온 사람들은 어쩔 수 없고 앞으로는 받아주지 않겠다. 마지막에 몽골에 들어온 사람들은 요즘 말로 하면 친일파, 친원파 처럼 친몽파였다. 이 사람들은 몽골에 항복한 다음 몽골군의 고려 침략을 안내했었다.
⑧ 전쟁의 이유는 전쟁 끝에 외교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하는 거다. 고려는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고지를 놓치지 않았다. 제일 좋은 외교는 서로가 윈-윈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때이다. 1267년 쿠빌라이는 새로운 수도를 발표한다. 그 이름은 대도였다. 제국의 새로운 수도에는 온갖 진귀한 물건을 들고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진귀한 물건들을 대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새 수도로의 천도가 완료된 1271년, 쿠빌라이는 몽골의 새로운 국호를 발표한다. 몽골의 새로운 국호를 대원이라 하라. 유목민의 국가를 넘어선 새로운 몽골제국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몽골의 새로운 시대 대원(大元), 이게 원나라의 시작이다. 쿠빌라이는 몽골식 나라 이름, 예케 몽골 울루스를 이야기 하는데 이 이름이 자신이 통치할 중국 사람들에게는 정확히 인식되기가 굉장히 어렵다. 길고 낯선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271년에 중국 유학자의 제안을 받아들여서 중국식 왕조 이름인 大元을 선택한다.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을 이용해서 국호를 만든 거다. 지혜로운 군주다.
⑨ 몽골의 새로운 수도 대도에 살 때 쿠빌라이는 방에 들어가지를 않았다. 마당에 게르를 만들고거기에서 살았다. 몽골 사람이었던 쿠빌라이는 방에서 사는 게 너무 불편하다. 말타고 초원 달리다가 방 안에서 산다는 게 얼마나 답답했을까. 몽골 사람들은 대도에 와서 생활할 때에도 게르에서 살았다. 쿠빌라이가 한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필요한 만큼 중국의 문화를 사용했을 뿐이다. 쿠빌라이는 죽을 때까지 한문도 중국어도 배우지 않았다. 몽골 사람으로 살다가 몽골 사람으로 죽었다. 우리가 몽골이 원이 되었다 라고 생각하지 말고 몽골이 중국을 한 부분으로 아우르게 되었다고 생각을 해야 몽골과 원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 할 수가 있다. 중국이 된다 이걸 한화(漢化) 라고 한다. 그런데 한가지 생각해 볼 게 중앙 아시아나 중동 러시아 지역 사람들은 대원이라는 이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 사람들은 한문을 모르니까 대원이라는 국호는 한문이 통용되는 지역에서만 사용되는 나라 이름이다. 전체 나라를 위해 몽골 제국의 공식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로 가고 이걸 한문으로 번역을 한다면 大元이다.
⑩ 궁궐을 지을 때도 몽골 초원의 풀 흙을 가지고 와서 지었다. 몽골 초원의 DNA를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보여 주고 있다. 그래서 중국식의 도성을 세운 것도 한족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안정적으로 통치를 하려는 수단이었다. 쿠빌라이는 예전 몽골 제국의 군주들처럼 약탈하고 초토화시키고 영토를 넓히기만 하기 보다는 뭔가 윗 단계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혜로운 칸이다. 정복 이후에 말에서 내려와서 그 지역을 어떻게 안정적으로 통치하느냐를 고민했던 인물이었다. 카라코룸 수도를 버리는 것도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왜 대도 (현재의 베이징) 자리로 옮겨야 했을까요. 쿠빌라이는 언젠가 자기가 남송을 점령하고 중국 전체를 지배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면 이 카라코룸이라고 하는 몽골의 수도의 위치가 과연 적당했겠느냐. 너무 초원에만 치우쳐 있다. 대도 (지금의 북경)로 수도를 옮기게 될 때 대도의 전략적 지점으로서 중요한 이유는 유목지대와 정주지대의 경계에 위치해 있다. 그래서 유목민과 정주민 양쪽을 통치할 수 있는 중요한 전략적 지점인 거다. 거기다 또 중요한 게 바다를 낀 게 굉장히 중요하다. 카라코룸에서 바다까지는 너무 멀다. 며칠 이상 걸린다. 대도까지 운하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바다 물이 북경 대도섬 까지 들어간다.
⑪ 대도가 식량이나 물이나 이런 자원의 측면에서는 부족하다. 겨울엔 영하 10도까지 떨어진다. 농사를 짓기 좋은 곳이 아니다. 그럼에도 대도를 선택한걸 보면 이건 추론이지만 남송을 정벌해서 부족한 자원은 거기서 끌어와서 통치하겠다. 드디어 역대 칸들이 염원했던 남송을 치기 위해서 나선다. 1268년, 남송군과 쿠빌라이군은 항서 양양의 요충지인 양양에서 맞붙었다. 하지만 10만 쿠빌라이 군은 본격적인 전투 대신 토목공사를 시작했다. 남송군이 손을 놓고 지켜 보는 사이 양양을 둘러싼 함성이란 흙벽을 쌓고 100km가 넘는 포위선이 이어졌다. 포위작전은 무려 5년간이나 이어졌다. 몽골군은 이때 처음부터 속도전이 아니라 지구전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전쟁은 몽골의 전쟁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기병이 동원되지 않았다.
⑫ 몽골군은 그때까지 항복한 여진족, 거란족 또 한족 이런 사람들로 보병부대를 만들었다. 기병이 있긴 하지만 몽골식 기병은 아니고 에워싸고 고립시키고 하는 공성전을 하는데 몽골이 다른 나라에서 배운 전쟁방법을 그대로 반사시키고 있었다. 양양은 우구데이가 공격했다가 실패하고 뭉케가 공격하다가 죽은 데다. 남송의 경우에는 굉장히 큰 하천들이 많이 흐르는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 까지 몽골군이 정벌했던 루트를 잘 생각해 보면 다 건조한 지역이었다. 몽골군의 가장 중요한 무기인 기마부대가 자기 역할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초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남송은 지리적으로 습지와 숲들이 많았기 때문에 공략하기가 힘들었고 게다가 더위 습기 이런 것들 때문에 말들도 헐떡였다. 몽골군은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곳에서만 싸운 게 아니다. (기후도 중요하지만 남송 자체가 만만치 않은 나라일 수도 있다. 인구도 많고 오래 버틸 수 있는 경제력도 풍부하고 또 한 가지는 방어시설이 아주 훌륭했다. 그래서 몽골군이 양양성을 함락하는 데에는 기존의 전술 가지고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쿠빌라이가 놀라운 것은 아주 재빠르게 전술을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양양성을 둘러싸고 고립을 시킨다. 그리고 자기들은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시장도 열도 연회도 하면서 계속 놀고 있다. 그 안에 갇혀 있는 남송 사람들만 답답해 지는 거고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오히려 남송 사람들이 성문 열고 나와서 공격을 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점도 있지만 한 가지는 쿠빌라이는 남송 지역을 파괴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결국 양군의 소모전이 너무 계속되니까 쿠빌라이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결단을 내린다. 두 명의 이슬람 교도 기술자를 전장으로 파견한다.
⑬ 이슬람교도들은 하루에 다섯번 무함마드의 탄생지인 메카를 향해서 기도를 한다. 언제해야 되는지 그 방향이 어디인지가 중요한 요소다. 이 삼각함수를 통해서 시간하고 방향을 이슬람 교도들은 계산을 했다고, 당시엔 일일이 계산해서 했다. 신학교에서는 수학을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까 이슬람 교도들이 수학 실력을 바탕으로 놀라운 기계까지 발명을 했다. 12세기 이슬람 교도들이 물 따르는 오토마타(자동기계장치)를 발명했다. 오늘날 AI (인공지능)을 이용한 장치이다. 우리나라 세종 때의 물시계 자격루는 1434년 15세기 초반에 발명했다. 이제 쿠빌라이 칸한테 연락을 받고 양양성으로 간다. 가는 이유가 뭐냐면 양양성을 보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전쟁에 이길 수 있을까 하고 수학적으로 생각을 하고 하나의 신무기를 발명을 했다는 거다. 돌을 던지는 회회포이다. 기존의 투석기는 사람이 줄을 끌어 당겨 돌을 던지는 건데 많은 사람들이 끌어 당겨야 했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런데 회회포 라는 기계는 새로운 원리 지렛대 원리를 이용해서 한 쪽에 돌을 놓고 중심추 역할을 하는 부분을 무겁게 해서 내려오면 돌이 날아가는 거다. 힘을 덜 들이고 보낼 수 있다. 사람들이 당겨서 던지는 것 보다 더 멀리 갈 수 있다. 보통 기존 투석기를 통해서 돌 50kg 비거리 100m 정도 날아가게 만들 수 있다. 회회포는 50kg 아니고 60kg 아니고 90kg 돌을 100m, 200m도 아니고 600~700m를 날려 보낼 수 있다 (기존 투석기 50kg 비거리 약 100m VS 회회포 돌 90kg 비거리 600~700m).
⑭ 이 회회포는 양양성 전투에서는 어마어마한 역할을 했다고, 만물의 이치는 기본이 수학이다, 수학을 잘 하니까 이렇게 전쟁까지 잘 한다. 이슬람 사람들이 수학 천재다. 이슬람 사람들은 우리가 그때 몽골군에 짓밟히지만 안했어도 원자폭탄을 먼저 만들었다는 얘기를 한댄다. 쿠빌라이가 이렇게 최고의 대칸이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다양한 방면에서 인재를 알아봤던 그의 능력을 우리가 꼽을 수 있다. 쿠빌라이는 인종, 국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했다. 그래서 양양 포위전을 할 때에도 위구르 사람, 중국 사람, 아랍 페르시아 사람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민족, 다문화는 그때 실현이 됐다. 특히 종교에서도 굉장히 유연한 모습을 보였다. 쿠빌라이가 마르코 폴로를 만나서 한 이야기가 지금 전해 오는데 기독교도들은 신을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고, 이슬람 교도들은 마호메드라고 하고, 유대인들은 모세라고 한다고. 또 우상숭배자들 (불교도)은 석가모니 부처라고 한다. 나는 이 넷을 모두 존경한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당시 같은 시기에 다른 나라들은 다른 종교를 탄압할 때였다. 그런데 쿠빌라이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지금으로 따져도 저렇게 다민족들이 모여서 똑 같은 일들을 한다는 건 인종차별도 없었던 거구 어떻게 천년 전에 이런 일이 있었는지, 너무 신기하다. 쿠빌라이의 정책에 대해서 우리가 한 가지 오해하고 있는 게 몽골 색목, 한인, 남인을 차별했다고 알고 있다. 차별이 아니라 구별이다, 단지 얘기해서 각자가 가지고 있는 문화를 그대로 인정해 주었을 때 네 집단이 구별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오해를 하고 있고 이런 다양성이 살아있는 플랫폼을 우리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거다.
⑮ 양양성 전투에서 20여 대의 회회포를 동원하여 남송을 격렬하게 공격한다. 결국 1279년 남송은 무너졌다. 남송 정벌은 쿠빌라이에게 정말 엄청난 포인트였다. 중국 전체를 장악을 하였다. 유목제국이 중국 전체를 점령했던 최초의 업적이다. 또 한 가지는 몽골제국이 남송을 차지하면서 바다를 차지하게 되었다. 말을 타던 사람들이 바다로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야말로 세계제국이 완성되었다. 몽골제국 역사상 제일 큰 영토를 차지하였다. 이른바 몽골에 의한 평화, 팍스 몽골리카 (Pax Mongolica) 시대라는 번영기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우리는 역사적인 의미를 충분히 발견해 낼 수 있다. 우리가 몽골 제국을 원나라라고 하고 중국 역사에서 요, 금, 원, 명, 청 왕조 교체 속에서 원을 자리매김하고 이 몽골이 중국 역사의 일부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 사람들은 중국을 일부로 가지고 있는 더 큰 나라였다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더 넓은 몽골 제국을 계속 보려고 하는 노력을 해야 우리는 중국 인식의 역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