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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흥동 마애삼존불상 (可興洞 磨崖三尊佛像/보물 제2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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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가흥동에서 서천이 내려다 보이는 거대한 암반의 최상부에 있는 마애삼존불상이다. 본존불은 좌상으로 수법이 응경하여 전신에 힘이 충만하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소담스럽다. 둥글고 풍만한 얼굴에 강한 의지가 풍기며, 눈은 장난꾼 손에 움푹하게 파여 버렸으나, 알맞은 코와 입이 솜씨있게 처리되었고, 어깨까지 드리운 긴 귀는 잘 묘사되어있다. 가슴은 당당하며 어깨에 굴곡도 생명이 넘치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게 나타나 잇고, 통견으로 두껍고 묵직한 법의는 옷주름이 앞에서 U자형으로 두가닥과 팔을 거쳐 늘어진 옷자락에 사실적이면서도 기운찬 의문의 선이 약동하는 생명력을 실감하게 한다. 오른선은 시무외, 왼손은 여원의 통인이고, 광배는 자연암석을 그대로 보주형을 쪼았으며, 원의 중심에는 연꽃이 있고, 둘레에 꽃모양과 화불 3구를 배치하고, 밖으로는 불꽃무늬를 조각했는데, 불꽃무늬는 파손이 심하다. 결가부좌한 무릎 밑에는 8잎의 겹잎 앙련대좌가 마련되었다. 본존불은 높이 3.2m이며,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정면을 향한 입상이며, 왼쪽 보살은 역시 두눈을 파 버렸으나 둥글고 풍만한 얼굴이며, 왼손은 어깨까지 들었고, 오른손은 배에 대고 있다. 묵직한 천의는 두가닥의 자락이 전면에서 옆으로 내려뜨리고 있는 수법은 율동감을 주기도 한다. 좌협시는 높이 2.01m, 무릎 폭 1.01m이다. 오른쪽 보살도 눈이 약간 파였으나 비교적 상태가 좋은편이며, 목에는 삼도가 없으며, 보관에 보병이 묘사되어 있고 두손을 모아 합장하고 있다. 천의의 자락은 앞에서 X자형을 이루고 있다. 불상 앞면 바위에 몇 군데 구멍이 마련되어 있음은 본래 지붕을 설치, 기둥을 세웠던 자리인 듯 하다. 우협시는 높이 2.31m, 무릎 폭 2.31m이다. 영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통일신라 초기의 불교조각양식을 대표하는 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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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리 마애불상(江東里 磨崖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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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평은면 강동리 왕머리마을에서 당곡골로 넘어가는 언덕 하단부의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마애불이다. 높이 5m의 자연암벽에 상체 어깨부위까지는 환조 형식으로, 가슴 아래는 선각으로 새겨졌다. 목의 잘린 부위로 보아 머리는 별석으로 조성하였다. 어깨 상단은 입체적으로 돌출된 상태이고, 통견의 옷주름선이 어깨 너머까지 연속되고 있다. 옷주름은 상체에서는 넓은 계단식 주름이지만 허리 아래로는 선이 전혀 보이지 않고 발가락을 새긴 것만 보이고 대좌 표현도 없다. 수인은 엄지와 검지를 맞대어 가슴께에 들었는데 손가락 방향이 모두 왼 어깨쪽을 향하고 있어 특이하다. 불상을 향해서 좌측으로는 2, 3 글자가 있지만 판독이 안되고 우측으로는 4개의 사각형 안에 일부 조각이 보이지만 용도를 알 수 없다. 두부를 별석으로 조성하는 안동 이천동 석불상 (보물 제155호)이나 봉화 봉성리 석조여래좌상(유형문화재 제132호), 구미 황성동 마애여래입상(보물 제1122호)과 같은 고려 초기 거불양식에 속하는 불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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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리 석불좌상(金光里 石佛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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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리사지에서 옮겨와 미륵당에 안치되어 있다. 불상 앞쪽으로 목재로 간단한 단을 내었다. 불신 전체를 호분으로 덮고 이목구비를 그려서 세부표현을 살피기는 어렵다. 상호는 방형에 가깝고 이목구비는 중앙으로 몰린 편이다. 결가부좌한 모습은 안정감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외형이 밋밋하고 특히 배 앞으로 보이는 왼손을 들고 있어 더 경직되어 보인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돌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옷주름은 고려시대의 퇴화된 계단식 주름이고 도식화된 경향이 뚜렷하다. 대좌의 하대석은 바닥에 거의 매몰된 상태이고, 상대석은 불상에 비해 높은 편인데 거꾸로 놓여있고 2단으로 연화문이 조각되어 간엽도 큰 편이다. 불상 높이는 96㎝, 대좌 높이 34㎝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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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월리 약사여래석불(斗月里 藥師如來石佛/문화재자료 제2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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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두월리 약사여래석불은 단일 암벽의 상부 동남면으로 상반신만 조각된 마애불이다. 어깨까지 늘어진 귀나 삼도는 세련되었다. 원형의 두광은 3단으로 넓고 큰 띠 모양인데 그 외곽은 불신 하부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조식이 없다. 대의는 통견의를 걸치고 있으며, 옥주름도 부드러운 편이다. 수인은 왼손을 가슴아래까지 올려 보주를 들었고 오른손은 아래로 드리운 듯 하다. 보주를 든 왼손의 팔굽 아래까지는 주름선이 보이고 조각했지만, 오른손 아래로는 조각이 없다. 암벽의 왼편 가장자리에서 불신의 복부 중간까지 반원을 연속시킨 듯한 조각이 있어 전체 조각이 불분명하다. 신체 외부로는 뚜렷한 조각 흔적을 찾기 어렵다. 신체 특히 상체만을 중시한 표현 기법이나 다소 얕고 넓어 보이는 주름선 처리등의 세부기법으로 보아 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암벽 높이는 250cm, 불상현고 110cm, 불신높이 95cm, 두고 42cm, 어깨 폭 50cm, 불신 폭 89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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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고려각판(浮石寺 高麗刻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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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에 전해 내려오는「대방광불화엄경」의 판목이다. 진본 육십화엄경 241장, 주본 팔십화엄경 275장, 정원본 사십화엄경 123장, 그외 법화경 수륙잡문 15장, 모두 639장의 판본이 보장각에 보관,전시하고있다. 이 화엄경의 제본은 거란본으로 보이므로 12세기경 이후 고려시대에 개판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원판본과 함께 선조1년(1568년)에 만들어진 보판도 포함되어 있다. 미타경을 조성한 것이 고려 고종 37년(1250년)당시 주지 충명국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화엄종의 종찰로 자리한 부석사에서 미타경에 비해 화엄경은 이보다 앞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1200년경에서 1250년 사이에 조판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방책판식(方冊板式)으로 좁은 판심(板心)대에 어미(魚尾)와 흑구(黑口)가 없어 권자(券子)형식에서 방책으로 넘어가는 초기의 특징을 보인다. 고려 화엄경의 14자, 혹은 17자본에 비해 부석사 각판은 34자본이라는 것도 한 특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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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 현판(浮石寺 無量壽殿 懸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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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셔진 부석사의 주 불전인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로도 불리는데 “무량수”라는 말은 이를 의미하는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정면에 걸려있는 편액(扁額)은 공민왕의 친필이다. 홍건적의 난(공민왕 10년, 1361년)때 공민왕이 안동에 피난해 있을 무렵, 안동웅부, 영천의 제민루와 함께 부석사의 무량수전 편액을 썼다고 전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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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 塑造如來坐像/국보 제4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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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견편단(右肩偏袒)의 대의에 촉지인(觸地印)을 하고 결가부좌(結跏趺坐)로 앉았다. 나발의 머리에 크고 둥근 육계가 올려졌고 상호는 살이 오른 풍만한 인상으로 이목구비의 표현이 뚜렷하다. 목은 긴편이고 삼도(三道)가 일정한 간격을 보인다. 신체표현도 넓은 하체로 인해 당당하고 어깨도 건장하고 넓다. 우견편단으로 걸친 대의에는 간격이 좁은 평행의 습성을 일률적으로 새기고 있다. 불상의 뒤로는 독립된 목조광배가 놓여있다. 신과와 두광을 2조선의 원으로 각각 구분하고 화염문을 돌려 주형거신광을 이룬다. 문양은 화영문과 당초문이 넓고 섬세하게 조각시켰던 흔적이 남아있다. 불단은 동향으로 설치되었고 안으로 폭 237㎝, 측면 200m, 높이 105㎝의 토석을 혼용한 수미단의 원형이 남아있다. 1916년 무량수전의 해체수리시에 발견된 묵서명에는 공민왕 7년(1358) 적병에 의한 화재로 불상의 두부가 분리되어 우왕 2년(1376) 원응국사(圓應國師)가 개금개조(改金改造)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무량수전 불상개금문에서는 조성 경종 3년 (1723) 통정 정상주를 비롯한 74명의 정성으로 불상을 개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견편단의 평행의 습성이나 촉지인을 한 자세 등에서 통일신라 8세기 이후의 양식을 보이기도 하나 작고 두툼해진 입술표현이나 근엄해진 표정, 굳은 인체표현이나 딱딱해진 옷주름 등에서 시기적인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고려시대 불상으로는 정교하고 소조상으로는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어서 매우 귀중한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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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浮石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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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목조불사어의 전형적인 형식으로 정상육계와 중간 계주까지 잦추었고 가슴 앞으로 길게 V형을 그리는 통견을 걸쳤다. 두부가 다소 큰 편이고 하체 무릎이 각이 진편이다. 조선 영조때 대비의 원당으로 지은 축화전에 모셔졌던 불상이다. 영조 22년(1746) 화재로 많은 전각이 소실된 후 중건하면서 조성되었다하므로 1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원각전에 모셨다가 1979년 보수하면서 원각전은 삼성각으로 고치고 이 불상은 보장각으로 옮겨 전사, 보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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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자인당 석조여래좌상 (浮石寺 慈忍堂 石造如來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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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자인당에 2구의 석조여래좌상과 함께 봉안된 지권이니의 석불조상이다. 석조여래 조상과 마찬가지로 동상사지에서 옮겨온 것이다. 광배를 잃었으나 적당한 신체 표현과 조각이 섬세한 대좌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시대 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체 표현이나 세부조각은 양옆에 있는 지권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좀 더 힘이 빠진 듯한 감이 잇고 신체에 비해 두부가 크고 동안에 가까운 상호(相好)이다. 육계는 넓게 퍼진 편이어서 구분이 모호하고 이목구비는 적당하게 자리하였다. 양볼은 다소 살이 오른 편이나 전체적으로 탄력이 줄어든 듯 하다. 대좌는 내곡하는 8각의 지대위에 복연의 하대와 8각의 중대 원형 중판암련의 연화상대석으로 구성되었다. 지대의 각 면은 사자로 보이는 동물상이 고부조로 조각되었다. 각 부의 받침은 몰딩으로 단을 내었는데 특히 하대상면의 받침은 사분원에 돌출된 층급이 있어 독특하다. 양편의 지권인상과 동일한 시기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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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 조사당 벽화(浮石寺 祖師堂 壁畵/국보 제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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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6폭으로 제석천(帝釋天)과 범천(梵天) 사천왕(四天王)등의 호법신장(護法神將)들이다. 제석과 범천은 풍만하고 우아한 귀부인의 모습이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보는 건장한 무장상(武將像)인데 이들의 위풍당당한 위세, 우아한 형태, 능숙한 필치 등에서 고려불화 가운데서도 독특한 품격을 볼 수 있다. 본래의 채색에 몇 번에 걸쳐 새로 덧칠한 것이 많아 원 모습은 많이 사라졌지만 그래도 고려불화풍이 꽤 간직되어 있는 편이다. 양식적으로는 12세기 내지 13세기의 불화양식과 근사하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서 고려시대 회화 중 가장 중요한 대표작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양식적으로 12세기내지 13세기의 불화양식과 근사하며 우리나라에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彩色) 그림중 하나로 고려시대 회화 중 가장 중요한 대표작의 하다로 평가되고 있다. 조사당 벽화는 원래 조사당의 입구 좌우 벽에 그려져 있던 것을 1918년 떼어내어 유리 상자에 넣어 보관하여 유물전시관(보장각(寶藏閣))에 전시 보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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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지리 석조여래좌상(北支里 石造如來坐像/보물 제2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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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편의 상은 나발에 육계가 높고 크게 퍼져 머리와의 구분이 어렵다. 상호는 비교적 조용하고 안정된 감이 있고 목은 짧은 편이며, 삼도(三道)가 약하게 조각되었다. 두 손은 없어졌던 것을 보수하였다. 통견으로 걸친 듯하지만 상체의 옷주름이 마모되어 확실치 못하다. 옷주름은 평행의 계단식 주름이며 상체에서는 거의 일정한 간격을 보이고 있다. 하체는 상체에 비해 넓어 안정감이 있고 무릎으로 퍼져나가는 계단식의 주름표현은 폭을 달리하여 상체 주름에 비해 정교한 편이다. 다리 아래로 부채꼴 주름을 넣었는데 결가부좌한 다리를 덮어 내린 대의 주형에 가까운 거신광(擧身光)이다. 두광(頭光)은 원형의 구조선인데 중심에 연화문이 있고 그 사이에는 보상화문(寶相華文)이 조각되어 있다. 두광 위와 신광의 양쪽으로 삼존화불이 조각되어 있으며 신광 양쪽의 삼존화불 아래는 굵은 양각의 구조선으로 안팎을 구분하여 안쪽에는 큰 화문을 새기고 바깥으로는 화염문이 새겨져 있다. 대좌는 3단의 8각대좌로 4각형의 지대석을 두고 8각의 하대석에 팔각면의 안상속에는 천부(天部)로 보이는 조상을 새겼다. 상대석은 2중원이며 중앙에 8엽의 연화문이 있고 사이에는 하엽문(荷葉文)을 넣었다. 신광도 구조선으로 구획 짓고 안쪽에는 아무런 문양이 없다. 하단은 보상화문을 새겼고, 두광위에는 삼존화불이 있고 신광 양쪽에 3구씩의 화불이 조각되었다. 대좌는 동쪽 대좌와 동일한데 세부 조식은 차이를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양식을 보이면서 세부 표현에서는 다소 헤이해진 조각경향을 보이고 있어 통일신라 9세기 이후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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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 석아미타 및 석조비로자나불좌상(毘盧寺 石阿彌陀片및石造毘盧蔗那佛坐像/보물제9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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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 격광전에 봉안되어있는 2구의 석불좌상이다. 아미타불상과 비로자나불상이 나란히 봉안된 것은 신라 화엄불교의 한 특성을 보여주는 자료로, 즉 8세기의 화엄종 주불인 아미타불과 9세기의 화엄종 주불인 비로자나불이 동시에 신앙된 것이다.
○ 아미타불상...형식과 양식이 비로자나불상과 거의 같다. 머리의 육계-나발이 비로자나불상과 흡사하며, 얼굴은 비로불상보다 약간 갸름한 편인데, 코와 입이 비로불상보다 약간 작다. 어깨는 건강하며, 가슴은 두드러지게 표현했는데, 옷은 비로불상이 통견이고 오른쪽 어깨를 벗고 있다. 두손은 다리 위에 올려서 미타정인을 하고 엄지와 둘째 손가락을 맞대어 마주 보게하고, 다른 손가락들은 서로 사이사이에 끼우고 있다. 오른 다리가 왼 다리 위에 있는 결부좌의 모습이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벗었고, 다리의 옷주름은 비로불상과 같이 무릎 안쪽에서 내려오는 선과 발목에서 내려오는 선이 무릎 바깥쪽에서 끊어지고 있는데, 이들은 또한 서로 엇갈리게 표현되고 있다. 팔이나 기타 옷주름은 역시 층단을 짓고 있으며, 일부는 볼록형을 이루고 있다. 아미타불은 현고 115cm, 두고 41.5cm, 어깨폭 57cm, 무릎폭 84cm이다.
○ 비로자나불상...거의 온전한 상태로 머리 정상의 계주는 후보된 것 같다고 하며, 머리와 육계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고 나발은 약간의 손상을 입은 것 같다. 둥근 얼굴에 진하게 칠한 호분으로 하여 개성있는 표현을 알아 볼 수 없다. 백호는 1cm로 수정이 박혀 있는데 근자의 것으로 보인다. 귀에는 얼굴에 견주어 비교적 긴 편이고, 턱에는 군살이 표현되었고,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몸매는 어깨나 가슴등을 단정히 처리했고 두손을 가슴 앞에 아래 위로 포개어 전형적인 지권인을 하고 있다. 다리는 왼 다리 위에 오른 다리를 포갠 가부좌의 자세인데, 두발은 다 노출시켰다. 옷은 통견의로 가슴은 넓게 드러났고, 왼손에 걸쳐 띠매듭이 보인다. 옷주름은 팔이나 다리 등은 얇게 빚은 듯한 평행계단식 주름무늬를 이고 있다(호분을 입혔던 불상에 지금은 도금을 입혔음) 비로자나불은 현고 112cm, 두고 41cm, 어깨폭 53cm, 무릎폭 83.5cm 대좌폭 106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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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사 아미타후불탱화(毘盧寺 阿彌陀後佛 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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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기(畵記)에 따르면 도광(道光) 12년 (1832)에 화담당(花潭堂) 교화(敎和)와 동월당(東月堂) 행만(幸晩)에 의해 조성 봉안되었다. 비로사 적광전에 있는 아미타후불탱화이다. 연화좌(蓮花座)에 앉은 아미타불을 화면 정중앙에 두고 관음(觀音)과 지장(地藏)의 두 보살을 협시(脇侍)로 제자 2인, 동자 2인을 주변에 배치한 비교적 간단한 구도이다. 전체적으로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나 부분 탈락이 많고 화기(畵記)는 일부만 확인된다. 본존(本尊)은 연화좌 위에 앉았지만 대의 자락에 가려 연잎은 확인이 안 되고 연 줄기만 보인다. 세장한 상체에 비해 하체가 큰 편이다. 협시는 지장과 관음의 입상으로 지장상은 화물이 새겨진 석장(錫杖)을 지니고 오른손으로는 보륜(寶輪)을 들었던 것으로 보이나 손상이 있어 확인이 안 된다. 관음은 화불이 있는 화려한 화관을 쓰고 목이 긴 정병(淨甁)을 가슴 앞으로 들었다. 동자는 본존 무릎 아래에 겹쳐있는데 하체는 손상으로 명확치 않고 붉은 천의 자락이 머리를 돌아 흐른다. 화면의 여백은 어두운 청색조이며 상단은 채운(彩雲)을 일부 배치하여 전체 화면이 좌우대칭을 이룬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도광(道光) 12년 (1832)에 화담당(花潭堂) 교화(敎和)와 동월당(東月堂) 행만(幸晩)에 의해 조성 봉안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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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망동 석불좌상(上望洞 石佛坐像/문화재자료 제2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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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사내에 석굴형의 공간을 마련하고 대좌까지 갖춘 석불좌상을 봉안하였다. 불두는 1985년 새로 만들어 올리고 옷깃을 포함해서 가슴 부위까지 보수하였다. 통견의 대의는 양 어깨에서 팔 아래로 흘러 결가부좌한 다리를 덮어 내렸다. 왼손은 펴서 오른 발목 위에 올리고 오른손은 촉지인하였다. 배 아래 옷주름의 처리나 불신 뒷면에 대의 끝선을 S자형으로 끝맺음 한 것등은 상당히 뛰어난 조각술로 보인다. 대좌는 지대석없이 3단 8각의 일반형으로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하대석은 최하단의 안상부분과 간엽을 넣은 복련부분을 한 돌에 새겼다. 하대 상단의 중대받침은 몰딩 위에 높임 고임을 두고 다시 2단의 층급받침을 올렸다. 팔각의 중대석은 각 면에 상하로 긴(20cm) 안상을 넣었다. 상대석은 원형으로 이중앙련을 새겼는데 연잎 내부에 화문을 넣어 화려한 편이다. 신흥사로 옮겨 오기 전에는 휴천동 동부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휴천1동 조산마을 위 광승사지(위치불명), 혹은 문수면 적동리의 탑거리 사지에서 옮겨 온 것이라 한다. 불두와 광배를 잃고 보수과정에서 원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으나 유연한 옷주름 처리나 삼단팔각의 대좌 등으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총고 201cm, 불상고 107cm, 무릎폭 75cm, 대좌높이 94cm, 하대석폭 97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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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교리 석불상(石橋里 石佛像/보물 11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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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교리 석불상은 승림사지로 알려진 야산의 계곡에 있다. 불두는 목부위가 절단된 것을 보수하였다. 손상이 심하나 비교적 잘 남아 나발(螺髮)이 크고 넒은 육계가 올려졌고 양 귀는 하단이 파손되었으나 크고 길게 내렸던 듯 어깨 위로 귀가 닿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상호는 이목구비가 적당하게 배치되었고 코 부분을 깊게 새겨 살이 붙은 얼굴이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남아 있고 통견의 옷깃이 넓은 띠처럼 어깨와 가슴위쪽으로 돌려졌다. 옷주름은 왼팔 위에서 시작해서 우측 하단으로 방사선식으로 흐르고 하체에서는 두개의 동심타원형이 새겨졌다. 옷주름은 거의 평행선을 이루는 계단식 주름이다. 왼손은 옷자락을 잡은 듯 보이고 오른손은 팔꿈치 부근에서 파손되었다. 두터운 대의(大衣)표현에 비해 신체굴곡의 표현은 좋은 편이다. 조성시기는 8세기 후반으로 순흥면사무소에 있는 석불 입상과 거의 비슷한 시기로 동일 조각가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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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石造毘盧蔗那佛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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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는 육계가 뚜렷하고 나발(螺髮)이며 결가부좌(結跏趺坐)인데 양쪽 무릎이 약간 깨어져 나갔다. 통견(通肩)으로 주름은 평행의 계단식이 얕게 구분된다. 양발이 노출되는 주름으로 어깨, 발목, 팔꿈치, 발목 부근에 옷주름선이 밀집된 편이다. 목조불단에 가린 대좌는 8각의 3단대좌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대좌형식으로 추정되지만 파손이 심하고 목재불다너에 가려 확인하기가 어렵다. 눈, 코, 입 등이 작고 단정한 편이어서 얼굴 전체의 감정노출이 없으며 턱에는 살이찌고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귀는 짧고 넓은 편이다. 지권인 (智拳印)이나 오른손은 보수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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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사 신중탱화(聖穴寺 神衆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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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단부로는 상태가 상당히 불량하고 탈락도 많은 편인데 상부로는 비교적 양호하다. 화면 우측에 제석천을 배치하고 좌측으로 위타천을 두었다. 제석이 정면을 향한데 비해 위타천은 약간 측면으로 몸을 틀어서 가슴 앞으로 칼을 들었다. 위타천 쪽으로 신중들이 배치되고 제석 쪽은 양옆으로 대신을 두고, 아래는 동자를 배치하였다. 위타천은 화염광배를 하고 있어 제석의 원형광배와 구분되고 제석 쪽에 좀 더 치중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화면이 어둡지만 화려하고 정교한 편이다. 18세기 19세기경의 불화양식이라 하겠다. 화기에 따르면 건륭(乾隆) 40년(1775) 에 다른 절에 봉안한 것으로 원래부터 이 성혈사에 봉안되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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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혈사 후불탱화(聖穴寺 後佛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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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팔대보살과 사천왕과 다른 권속들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적색과 녹색을 많이 쓰면서 전체 화면은 상당히 어두운 편이다. 보살은 모든 본존을 향해 합장한 수인이고 본존아래의 두 협시는 연화와 여의(如意)를 지물로 하였고 빈 여백이 거의 없는 편이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광무 년간(1897~1906)에 소백산 성혈암(聖穴庵)에서 조성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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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리 석불좌상(韶川里 石佛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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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주름이 뚜렷한 우견편단을 하였는데 옷깃이 3선으로 왼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직선으로 내리면서 중앙에서 뒤집어졌다. 그의 옷주름들은 평행선을 이루고 양손이 촉지인 처럼 무릎위에 놓았는데 왼손은 팔목까지 옷주름이 이어지고 뒷면에까지 옷주름이 있어 양식적인 퇴보단계를 보여주는 상이다. 두부도 결실되었고 대좌도 없어졌던 것을 부석사로 옮겨오면서 보수하였다. 형식에 치우친 옷주름 표현이나 힘이 빠진 신체 표현 등은 고려시대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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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암리 마애삼존불상(新岩里 磨崖三尊佛像/보물 제6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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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이산면 신암리 마애삼존석불은 내성천에 접한 미륵당들의 북서편 가장자리에 위치한다. 원래는 4면에 모두 불상이 새겨져 있었으나 지금은 동향으로 있는 삼존불 외에 남면으로 불상의 외곽선이 확인되지만 마멸되어 형체를 거의 알아 볼 수 없다. 이 삼존은 결가부좌한 본존불과 좌우에 합장시입한 보살상이다. 이 삼존불은 그 조상형식이나 삼존의 지체?수인이 이 고장 가흥리 마애삼존상과 비슷하지만 그 세부의 조각수법이나 형식은 그보다 옛스러우며, 특히 두광 형식이 그렇게 보인다. 통일신라 초 영주지역에서 유행한 지역적인 불교양식을 따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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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원 독성탱화(安養院 獨聖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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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두루마리였던 것을 액자로 수리하였다. 화면의 왼편에 붙여 노송을 그리고 그 아래 책상을 두고 앉은 독성(獨聖)을 화면에 가득 차게 그렸다. 배경은 어두운 색조의 바위상인데 다소 원근감이 보인다. 독성은 좌안칠부면으로 깡마른 얼굴에 머리가 벗겨지고 눈썹과 수염은 흰색선으로 짧게 표현하였고, 입술은 주색으로 앞니가 빠진 윗니를 드러내고 있다. 이마와 목 아래로는 깊은 주름살이 그려졌다. 복장은 녹색 장삼에 적색의 가사(袈裟)를 걸쳤는데 왼쪽 어깨 앞으로 등 뒤에서 넘어온 가사 매듭이 있어 다소 화려한 편이다. 왼손에 깃털부채를 들고 오른팔은 책상에 걸쳐 기대어 앉았다. 책상에는 책이 펼쳐져 있고 향로로 보이는 기물이 놓여있다. 화면 바깥으로는 화기(畵記)가 있는데 탈락이 심함 편이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가경(嘉慶) 17년 임신년(壬申年)(1812)으로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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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원 석조여래좌상(安養院 石造如來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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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철탄산 안양원내의 수광전 앞 정원에 있는 파불이다. 원래는 영주동 석불입상과 함께 영주초등학교 앞에 있던 것을 1971년 안양원으로 옮겨 왔다. 두부를 잃고 왼팔, 오른 어개, 무릎 아래의 부채꼴 주름까지 곳곳에 불을 맞은 듯 크게 파손된 상태이다. 불신은 삼도의 일부까지 남았고 우견편단으로 걸친 대의는 계단식 주름이고, 가슴은 약하지만 젖가슴 표현까지 보인다. 오른손은 배 앞으로 결가부좌한 발목 위에 놓았고, 오른팔은 파손되어 손등 부위 일부만 무릎위에 남아있어 촉지인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체 주름은 돋을선으로 상체와는 차이를 보인다. 오른팔 아래 겨드랑이 부분이 드러나 측면까지 옷 주름선이 연결되고 있다. 옷주름은 다소 형식적인 부분도 있으나 간격에 차이를 주고 있어 유연한 편이다. 불상 아래에는 이중앙련의 대좌 상대석으로 보이는 연화대석이 놓여있는데 뒤집혀진 상태이다. 연잎 안으로 화문이 있어 상당히 화려하다. 규모나 조각수법으로 보아 석물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나 확인할 수 없으나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불상 현고 84cm, 어깨 폭 58cm, 무릎 폭 95cm, 연화대석 높이 20cm, 지름 101cm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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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원 신중탱화(安養院 神衆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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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원이 대법당내에 신중단(神衆壇)을 마련하여 봉안하였다. 붉은 바탕에 금색과 흰색, 청색으로 그린 금선묘화(金線描畵)이다. 광배 일부에 금색선이 남아 있고 초본의 먹선이 약하게 드러나 있다. 제석천(帝釋天)과 위타천(韋陀天) 그리고 2명의 무장한 권속(眷屬)이 상하 차이를 보이면서 일렬로 배치되고 화면좌측 상단으로 번(幡)과 보수(寶珠)를 든 보살형 권속을 배치하였다. 좌측 무장상(武裝像)만 좌향이고 나머지는 모두 약간 우향으로 몸을 틀고 있다. 위타천과 제석은 합장하였고 드러난 부위만 흰색을 입히고 먹선으로 윤곽과 이목구비를 그렸다. 화기(畵記)에 따르면 광무 10년 병오(丙午) (1906)에 상주 운달산 두솔암에서 조성 봉안한 것이다. 증명비구로는 만암(약)눌 (卍庵(若)訥)과 함께 취허상순(就墟尙順)이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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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사 석불입상(靈田寺 石佛立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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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전사 풍기포교당의 약사전에 봉안된 석불입상이다. 1923년 욱금동 영전마을의 영전사지에서 발견되었으며, 원래는 대좌와 불신, 광배, 그리고 양쪽의 협시상까지 한돌에 새겼다고 하는데 1949년 소백산지구 전투를 피해 옮겨오면서 본존만 남기고 인위적으로 파손시켰다고 한다. 광배는 전혀 남은 부분이 없고 연화대좌도 뒤쪽은 없는 편이다. 원형의 연화대좌 위에 직립한 불상으로 통견의에 계단식 주름이 상당히 유연한 편이다. 두부는 이마와 오른쪽 위 코, 귀끝 부분이 파손된 것을 보수하였고, 높고 둥근 肉위로도 후보한 것으로 보이는 주가 남아있다. 상호의 윤곽은 살이 오른 타원형이고 턱 아래로 턱선을 약하게 넣었다. 가슴은 U자형으로 열어 대각선의 승각기가 보이고 띠매듭이 아래로 나타난다. 양손은 가슴 아래로 모아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오른손은 펴서 바닥을 배쪽으로 붙이고 있다. 다리는 직립으로 다소 경직된 감이 있다. 반원형으로 남은 대좌는 큰 연잎을 1단으로 돌렸다. 불상이 대좌의 중심에서 앞쪽으로 쏠린 편이어서 이 불신 외에도 광배등의 다른 조각이 불상의 좌우로 함께 조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히 유연한 옷주름선의 처리나 신체 비례가 적절한 점으로 보아 조성 시기는 통일신라시대로 볼 수 있다. 총고 176cm, 불상현고 155cm, 두고 31cm, 견폭 41cm, 대좌높이 20cm, 지름 116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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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동 석불입상 (榮州洞 石佛立像/보물 제6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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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룻배 형상으로 화강암에다 광배와 두광을 첨걱한 불상을 부각하였다. 불상의 머리 위에는 보관의태가 두개 부각하였으며, 풍만한 얼굴 윤곽에 긴 귀를 역시 광배석에 접각하고 오른편 어깨를 노출한 통견의의 의문이 선명하며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시무인을 현양하고 왼손은 내려 왼편 무릎 옷자락 을 잡는 득 하다. 두광의 원안은 보상화문이, 원 밖은 불꽃 문이 조각되었고 불상이 선 대석에는 복연 대석 위에 앙연화 대석위에 불상을 세웠는데, 이 모두 동일석이다. 유래는 이 불상의 조각형태나 조각수법에 의하면 신라 통일기인 6세기 전반에 조각된 것으로 추정되며 불상 본래의 소속 사찰은 미상이나 구성산 남쪽 기슭에 3층으로 보이는 석탑의 기단석 일부와 옥개석이 있었다.1917년 영주시 가흥동 남산들 제방공사 중에 발견되어 영주초등학교 알 도로 중앙에 세웠다가 다시 영주공공도서관에 별도의 보호각을 세워 보관하고 있다. 총고 258cm, 불신 188cm, 두고 42cm, 어깨 폭 66cm, 연화대석 지름 102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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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리 미륵불상(梧溪里 彌勒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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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계리 보치골마을 뒷산에 미륵불로 불리는 석상 1구가 땅에 절반 가량 묻혀 있다. 두부가 체구에 비해 큰 입상으로 보인다. 마모가 극히 심해서 세부형태는 전혀 알 수 없고 가슴 아래까지 매몰되어 있다. 머리는 아래가 좁아진 타원형으로 코 부위는 갈아내어 없어졌고 눈과 입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귀도 없어졌다. 양손은 가슴아래 모아서 가늘고 긴 지물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뒷면은 곡선지게 마감하고 있다. 하체는 매몰되어 확인할 수 없으나 전하는 말로는 발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었다고 하며 30여년 전까지는 세워져 있었고, 동리에서는 미륵불로 통칭하고 있다. 현고는 96㎝, 어깨폭 43㎝, 두고 28㎝, 두폭 29㎝, 몸폭 30㎝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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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대리 석불(玉帶里 石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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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 아래가 단절되었고 목도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붙여 놓았다. 전체적으로 표면마모가 심하고 상반신 뿐이어서 확인이 어려우나 평판적이고 투박한 수법으로 보인다. 보관(寶冠)을 쓴 듯한데 외형은 확인되지 않고 백호(白毫)자리는 뚜렷이 남아 있다. 이목구비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입술주변으로 깊게 누른 흔적이 약하게 나온 정도이다. 오른팔은 굽혀서 손을 가슴에 대고 엄지와 검지를 제외한 세 손가락을 굽힌 것으로 보이고, 팔목과 손목에 장신구가 확인된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개와 팔을 감싸 오른쪽 허리로 비스듬히 걸쳐내려 왼손은 알 수 없다. 고졸한 조각과 단순한 처리를 들어 조선시대로 상정하지만 관련 사찰이나 연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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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호리 마애석불좌상(月呼里 磨崖石佛坐像/문화재자료 제2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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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수면 동산골로 들어가는 도로에서 좌측 언덕으로 20m 지점에 위치한다. 독립한 바위의 동면에 새긴 마애불이다. 불상은 전체적으로 얕은 조각이나 양손과 두부의 양감은 좋은 편이다. 머리는 나발로 보이고 육계는 구분이 되지 않으며, 두 눈과 코, 입은 윤곽이 희미하고 귀는 보이지 않는다. 목은 짧고 삼도가 뚜렷하며, 대의는 왼쪽 어깨만 걸치고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복부로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면서 왼 팔을 덮어 내렸고 배 앞으로는 3~4개의 주름이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왼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하복부에 대었고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하도록 하여 가슴 오른쪽 앞으로 들었다. 대의 유무는 확실하지 않다. 불신 부위만을 조각하고 여백 처리를 무시한 기법이나 세부표현이 미흡한 점 등의 특진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된다. 바위 높이는 150cm, 동면너비 240cm, 불신현고 95cm, 두고 27cm, 견폭 45cm, 무릎 폭 75cm 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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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리 미륵불상 (柳田里 彌勒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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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유전리 미륵불상은 미륵당에 안치되어 있는 작은 석불입상이다. 17세기경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마을 주민들이 1940년 1월에 미륵당을 세우고 이곳에 안치했다고 전한다. 현고 71cm의 작은 상인데 머리가 크고 길쭉하며 신체는 가는 편이어서 4등신이라 할 수 있다. 얼굴도 좌우가 비대칭으로 양쪽 귀가 크게 차이를 보인다. 우측 위는 파손되었고 코도 파손된 상태이다. 주변을 시멘트로 마감하면서 불상의 하단이 매몰되어 전체 형상을 파악할 수 없으며 조선 후가에 유행하던 민불로 생각된다. 현고 71cm, 폭 33cm, 두고 34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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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 사천왕상(邑內里 四天王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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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면사무소내에는 2구의 사천왕상이 보관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1구만 전하고 있다. 사천왕상은 기둥재인 단면 사각의 석재모서리에 고부조로 새긴 신장상이다. 두부가 큰 편이고 가슴 앞으로 손을 모아 지물을 들었다. 자세는 왼쪽다리를 약간 굽혀 왼쪽으로 치우치는 2굴 자세라 할 수 있다. 팔꿈치부분이나 팔 아래로 보이는 복식은 갑옷이 뚜렷하고 머리가 커서 바튼 목 주변으로는 천을 돌려 앞으로 매듭한 장식이 잘 남아 있다. 하체도 갑옷을 입고 발목으로 2조선의 돌출선으로 갑옷의 끝단을 표현하였다. 왼발은 완전히 측면이고 오른발은 정면을 향하고 있어 무게 중심을 오른발에 두고 있음이 잘 표현되었다. 석탑의 상층 기단의 우주석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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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 석불입상(邑內里石佛立像/도유형문화재 제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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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면사무소에 있는 읍내리 석불입상은 머리가 결실되고 대좌도 없어졌을 뿐 아니라 왼손은 떨어져 나가고 오른손도 파손이 심한 파불이다. 그러나 넓은 어깨와 양감있는 신체에서는 강건함과 탄력성이 느껴진다.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여원인(與願印)을 짓고 있으며, 왼손은 팔의 잘렸지만 앞으로 등이 시무위인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목에는 뚜렷하게 삼도(三道) 표현이 남아 있고 통견(通肩)으로 신체를 완전히 가린 대의(大衣)는 배까지 일정한 간격으로 “U”자형 주름을 이루고 내려와 다리에서는 양쪽으로 두개의 동심타원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옷주름의 표현은 인근의 석교리 석불입상이나 예천에 있는 동본동 석불입상 등 통일신라시대 불상에서 보이는 특징들이다. 왼팔을 돌아내려간 옷주름 표현은 특히 입체감이 있고 유연하게 묘사되었으며 두 발 사이의 대의 하단에 나타나는 지그재그식의 옷자락의 끝선처리는 다른 불상에 볼 수 없는 독특한 표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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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 석조여래좌상(邑內里 石佛坐像/문화재자료 제14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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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두를 잃어 목부위까지 없어졌는데 지금은 자연석을 얹어 시멘트로 붙여 상태이나 전체적인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우견편단(右肩偏袒)으로 걸친 대의(大衣)에 주름은 평행선을 이루는 계단식 주름이고 배앞에서는 거의 음각선으로 보인다. 오른손은 가슴 높이에서 손가락 하나를 세워 들었고 왼손은 촉지인(囑地印)인 듯 무릎위에서 손가락 끝이 바닥을 향하게 얹었다. 결과부좌를 한 하체는 크고 둥근 편이어서 신체 비례는 안정감을 지니는 편이다. 하체는 크고 둥근 편이어서 신체 비례는 안정감을 지니는 편이다. 세부조각 수법은 계단식의 평행선 주름이 나타나고 상 하체의 비례가 적당하게 잡힌 점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조성으로 판단되지만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해이해진 양식이 뚜렷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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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리 석불좌상(邑內里 石佛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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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과 광배를 한동에 새겼는데 불신에 비해 광배가 상당히 두껍게 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마멸이 심해서 원형을 많이 잃고 있다. 상호는 거의 확인이 안되고 살이 오른 계란형의 머리에 삼도는 없고 목이 부푼 듯 표현되어 있다. 우견편단으로 결기부자를 하였다.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하였다. 광배에는 아무런 문양도 보이지 않아 통일신라시대 말기의 양식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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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곡리 석불입상(林谷里 石佛立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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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권인(智拳印)을 한 석조의 입상으로 특이한 경우라 하겠는데 이절의 조사에서 확인된 불두는 보관불(寶冠佛) 형식을 띠고 있어 교리적인 입장에서도 더욱 중요한 조상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육계와 백호를 갖춘 불두를 새로 만들어 올렸다. 이전 조사 자료에 따르면 신체에 비해 두부가 ㅋ넓게 트인 통견으로 옷주름은 간략한 편이며 지권인을 한 수인(手印)도 명확치 못한 면이 있다. 지권인의 입상으로는 국립경부박물관 소장의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이 있으나 보관까지 잦춘 지권인의 입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를 찾기 어려운데 일본의 예를 들어 대일여래(大日如來)의 조상(造像)일 것으로 생각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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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천동 마애여래좌상(休川洞 磨崖如來坐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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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전문대학 교정의 북편 구릉에 있는 높이 352cm 가량되는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바위 옆에는 관수대라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1961년 홍수 이전에는 이 앞으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불상의 외곽은 깊게 부조하였으나 내부는 선각에 가까운 마애상이다. 불두 주변은 깊게 파서 광배 처럼 보이는데 의도적인 광배 표현이라 보기는 어렵다. 대의와 내의 표현은 극히 간결하고 세부 표현도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목에는 삼도가 없고 법의 표현을 몇 줄의 선으로 간단하게 처리했다. 하체가 둥근 편이고 대좌 표현은 생략되었다. 황씨 성을 가진 영주의 한 부호가 자식이 없어 마애불을 조성하고 자식이 태어나기를 정성껏 빌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어 조선 민간신앙과 관련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마애여래좌상은 총고 78cm, 신고 48cm, 두고 30cm, 어깨폭 35cm, 무릎폭 66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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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마애삼존불상(黑石寺 磨崖三尊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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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본당 뒷편 암면에 조각한 마애삼존상이다. 마애상 앞으로 석조여래좌상을 안치하고 전체를 약사전으로 구성하고 있다. 삼존불상은 가슴부분 위로는 비교적 잘 남아 있으나 아래 부분은 마멸되고 여래좌상을 그 앞에 안치하기 위하여 시멘트로 단을 설치해서 묻혀버리고 말았다. 큼직한 육계에 머리는 소발이며, 두 귀는 어깨까지 늘어졌다. 눈은 내려뜨고, 코는 비교적 작으며, 입은 일자로 다물었다. 너비 1m의 두 어깨는 치켜 올린 듯 하며, 목에는 삼도가 희미하다. 가슴 에서 양편 보살의 턱 부위에 걸쳐 가로 틈이 생겼다. 손 모양과 옷주름은 분명치 않으며, 그 아래로는 조각 자체가 명확치 않다. 둥근 두광의 윤곽이 보인다. 옷은 통견인 듯 한데 분명하지 않다. 좌우 협시보살은 본존 뒤에 서 있으며, 모두 둥근 두광이 있으며 삼면관을 쓰고있다. 눈은 가늘며 콧날이 서고 두 귀가 길다. 이 마애불상은 신라말에서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바위의 두 끝은 좌우보살의 일부를 가리키며 여래좌상의 지붕을 설치했기에 마애삼존불의 전모를 볼 수 없다. 본존불은 암면 너비 320cm, 높이 570cm, 본존높이 310cm, 얼굴 너비 90cm이다. 양 협시보살상은 높이 270cm, 머리높이 87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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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병 복장유물(黑石寺 木造阿彌陀佛坐像幷 腹藏遺物/국보 제28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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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은 계란형의 좁고 살이 바진 상호에 전체 불신 표현도 아담하고 다소 세장한 감이 있어 고려 후기의 화려하고 우아한 불상과는 차이를 보인다. 머리는 나발이 뚜렷하고 중간 계주와 정상 계주가 있으며 수인은 아미타중생인을 하였다. 옷주름은 신체 표현에 비해서는 높고 큰 편이나 유연하고, 세장한 신체에 동감을 주고 있다. 상체에 비해 하체는 좀더 살이 오른 편이다. 승강기는 수평의 띠처럼 끊어지게 처리되었고 그 아래로 매듭이 처져 내렸다. 왼쪽 팔굽에도 Ω형의 접친 표현이 있으나 고려후기의 불상이 새롭게 변한 새로운 양식의 불상이라 할 수 있다. 확인된 복장유물은 아미타삼존복장기(阿彌陀三尊腹臧記)와 백지묵서법천사아미타불삼존조성보권문(白紙墨書法阿彌陀佛三尊造成普勸文) 불설대부모은중경목판본(佛設大父母恩重經木板本), 백지묵서불조사마경합부(白紙墨書佛造三經合部), 백지금니묘법연화경권제이변상도(白紙金泥妙法蓮花經卷第二變相圖),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花經) 3권 등의 전직과 사리보, 번(幡) 등 직물, 복장용 사리, 칠약, 오곡 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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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석조광배편(黑石寺 石造光背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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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종루 곁에 석조광배편 2점이 있다. 왼쪽의 광배편은 광배의 상부로 두광과 두광 중앙의 연화문이 확인되고 전면을 조식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좌측으로 20°가량 기울어져 있고 파손 부분도 많은 편이다. 오른쪽에 있는 광배편은 2조의 양각선과 화염문, 비운문이 보이는데, 완전히 측면으로 기울였다. 전체는 구획이 약한 주형의 거신광배일 것이다. 두광은 이조양각선으로 구획되어 있고 중앙에는 지름 약 55cm의 팔엽연화문을 두고 연화문과 2조의 두광 외곽선 사이로는 비운문을 채우고 있다. 왼ㅉ족 광배편에서는 두광과 신광의 구분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데 오른쪽 광배편은 신광 부분으로 보인다. 역시 이조선으로 구획짓고 내부는 비운문을 두었는데 중앙불상의 후면에 접한 부분은 별다른 조식이 없다. 두광과 신광의 둘레 가장자리로는 화염문을 둘렀다. 왼쪽 석조왕배편은 현고 92cm, 현폭 153cm, 두광지름 65cm이고, 오른쪽 광배편은 현고 67cm, 현폭80cm로서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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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석조여래좌상(黑石寺 石造如來坐像/보물 제6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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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석사 석조여래좌상은 마애삼존상과 산신각, 칠성각을 연결하여 만든 콘크리트 구조물인 약사전에 3면이 개방된 상태로 봉안되어 있다. 머리는 나발에 육계가 크고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고, 검게 색을 입혔다. 사각형의 얼굴은 적당이 살이 붙어 뚜렷한 허리 표현, 부드러운 윤곽과 함께 양감이 잘 나타나고 있다. 코나 중간 육계는 후보하였고, 가늘고 긴 눈, 적당한 크기의 입 등이 방향의 상호에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어 전체적으로 정적이고 양감있는 분위기를 띠고 있다. 양 귀는 길게 늘어져있고 목에는 희미하게 삼도가 있다. 불신의 상하비례가 알맞아 안정감이 뛰어나다. 옷주름은 평행선을 이루나 자연스럽게 흐르고 신체의 양감에 비해서는 얇게 보인다. 발 앞에 부채꼴 모양으로 모아진 옷주름의 특징이 뚜렷하다. 촉지인을 하였지만 오른손은 가부좌한 정강이 위에 얹은 정도이고 배 앞에 둔 왼손에는 지물이 있었던 흔적이 있는데 후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우수한 양감 처리나 신체 비례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석불상으로 추정된다. 여래좌상은 높이 160cm, 무릎너비 130cm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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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사 동종(喜方寺 銅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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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쌍룡으로 구성된 용뉴아래 포탄형의 중신이 연결되었는데 종신부는 볼록한 종정으로부터 구연부를 향해 벌어지면서 내려오고 있다. 용뉴에는 도시화된 용두마리를 반대방향으로 배치하였는데 극히 기능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종의 신부(身部)는 중앙에 쌍줄로 된 띠장식을 두고 위로는 둥근 모양의 범자로 된 상대(上帶)를 돌리고 그 아래 연화당초문으로 채운 유곽대와 연화문의 유두(乳頭)로 구성된 4개의 유곽(乳廓)과 연화가지를 지물로 든 4구의 보상입상이 교대로 배치되었다. 아랫부분에 종복(鍾腹)근처에 명문이 배치되어 있다. 구연부에는 연화문과 당초문의 2단으로 된 하대(下帶)가 둘려 있다. 이 동종은 전통적인 수법에 외래 요소인 쌍용(雙龍)구성의 용뉴와 띠장식이 가미된 조선후기 범종의 한 유형인 혼합형식의 종으로 비교적 안정감이 좋은 범종이다. 희방사 동종은 원래 조선 영조 18년 (1742)에 조주된 충북 단양의 대흥사 종으로 승장(僧匠)이었던 해철(海哲)과 초부(楚符)등이 제작한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