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187
10월19일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은은한 꽃향기 같으신 분, 성령>
‘젊은 시절, 꼭 한번 이루어야 할 것이 지리산 종주’라며 젊은 형제들을 살살 ’꼬셔’ 조금은 무리한 산행을 다녀왔습니다.
제 젊은 시절의 여러 추억들이 긷든 지리산 자락 이곳 저 곳을 다시 밟으니 감회가 새롭더군요.
이름만 들어도 정겹고 마음이 훈훈해오는 노고단, 토끼봉, 연하천산장, 벽소령대피소, 세석평전, 장터목산장, 그리고 천왕봉.
거기까지는 좋았습니다만, 천왕봉에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를 생각했어야 했는데... 갑자기 왼쪽 다리에 쥐가 나는가 하면, 관절부위에 심각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내려갈 길은 까마득하고, 하산 시간은 빠듯하고, 우선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는 형제들을 먼저 내려 보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심각했습니다.
깎아 지르는 절벽 길을 계속 내려 가야하는데, 통증은 점점 심해오고, 스프레이를 뿌린다, 파스를 붙인다, 마사지를 해본다, 별짓을 다했지만 완화될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몇 백 미터 내려와 보니 상황의 심각성을 더 잘 알 수 있었습니다. 하산(下山)이 전혀 진척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고, 겁도 나기 시작했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제가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평소 부탁하는 분들에게도 ‘저는 별로 효과 없다’며 마다했던 안수기도를 했습니다. 주모경도 바치고, 성령송가도 바치고, 그리고 정성껏, 간절한 마음으로 제가 제 무릎에 안수를 했습니다. 웃기지요? 상황이 워낙 다급하다보니.
결과가 어땠는지 아십니까? 제가 기대했던 대로 통증이 완화되거나 씻은 듯이 낫기는 커녕 통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안수기도 하는 동안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생겼습니다. 쥐가 나고, 통증도 심각하고, 기진맥진한 상태인데다가 마음이 몹시 불안해져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그리고 ‘이까짓 것 별 것도 아니야’ 하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는 순간 성령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기도만 할 게 아니라 네가 스스로 노력도 해야지!”
마음이 안정되다 보니 요령도 생기더군요. 아픈 다리에 최대한 무게가 실리지 않게 뒤로 돌아서 게걸음으로 내려오니 훨씬 진도가 잘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끔 쉬어가며 마사지도 해주고, 다리를 쭉 뻗는 스트레칭도 해주니 그런대로 내려올 만 했습니다. 평탄한 오솔길로 접어드니 신기하게도 그렇게 극심했던 통증도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존재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을 것이나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실 협조자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박해를 받을 때, 고초를 겪을 때, 한계 앞에 부딪혔을 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께서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이고, 성령께서 알아서 다 알려주실 것이고, 성령께서 결국 우리를 아버지 품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성령께서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의 나날을 스쳐지나가는 미풍과도 같으신 분, 은은한 꽃향기 같으신 분, 가장 중요하지만 우리가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는 공기, 물, 산소 같으신 분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성령께서 우리 곁에 늘 현존하시면서 우리를 바라보시는데, 우리를 지켜주시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걱정 속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한 작은 생명으로 빛을 본 순간에서부터 세례성사나 견진성사, 성체성사 등 다양한 성사 때마다 우리 인생 안에 현존하셨던 당신의 존재를 환기시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주지 못할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갖은 세파와 인생의 고초 앞에서도 다시금 힘을 내고 살아갈 용기와 위로를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오늘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의 존재에 우리의 의식을 집중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일상의 다양한 순간 안에 함께 하시면서 우리를 진리와 사랑에로, 자비로우신 아버지의 품으로 인도하시는 성령께 우리의 존재 전체를 맡겨드렸으면 좋겠습니다.
###############
<(2)더 이상 기다리지(출옥을) 않으리라! 그 대신 매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리라!>
‘희망이 없어도 희망했던’성조(聖祖) 아브라함의 생애를 묵상하다가, 희망의 성자(聖者)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추기경님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1975년 베트남은 오랜 전쟁 끝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게 됩니다. 자연스레 공산정권에 반하는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축출되고 추방되고 구금되었습니다.
가경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구엔 반 투안 사이공 대교구 부주교님께서도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그 어떤 절차도, 이렇다할 설명도 없이 주교님은 순식간에 교도소 독방에 수감된 것입니다.
그리고 기약없는 수감 생활과 가택연금 생활이 13년간 계속되었습니다. 매일 사이공 대교구 부주교로서 활기차고 보람된 사목활동을 전개해 나가던 주교님께서 어느날 갑자기 교도소 독방 신세가 되었으니, 그 답답함과 참담함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처음에는 조만간 풀려 나리라는 희망을 안고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나 1년, 2년, 3년... 수감 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깊은 기도중에 주교님은 이런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기다리지(출옥을) 않으리라! 그 대신 매순간을 사랑으로 채우리라!”
그 숭고한 깨달음 이후, 주교님은 놀랍게도 독방생활을 한없는 평화로움과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한 또 다른 성전이자 주교관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독방 생활의 스케줄을 짰습니다. 매일 새벽, 한 조각의 빵과 한방울의 포도주를 두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거룩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베트남 교회와 백성을 위한 지향을 두고.
아침 식사가 끝나면, 기억나는 성경구절을 독방 바닥에 써놓고,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렉시오 디비나를 시작했습니다. 매일 행하신 렉시오 디비나의 결실은 작은 담배갑 종이에 깨알같은 글씨로 적으셨는데, 퇴근하는 간수에게 전해졌고, 매일의 묵상 나눔은 베트남 교회 신자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 렉시오 디비나의 결실들은 후에 ‘희망의 길’ ‘희망의 기도’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고, 수많은 언어로 번역출간되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희망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상태에서도 주교님은 희망하고 또 희망했습니다. 칙칙한 교도소 독방을 자신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오는 사랑의 빛으로 가득채웠습니다.
비록 몸은 수감된 상태였지만 주교님은 독방 안에서도 사목자로서 품위를 끝까지 잃지 않고, 교구민들을 위한 활기찬 사목활동을 계속해나가신 것입니다.
혹시 오늘 절망과 좌절 무기력 상태에 빠져 계십니까? 깊은 포기의 나락에 떨어져 계십니까?
그렇다면 너무 위만 올려다보지 마시고, 한번 밑을 내려보시기 바랍니다. 너무 멀리 내다보지 마시고 오늘 하루만 산다는 마음으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삶에 대해 너무 큰 기대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대신 주교님처럼 오늘 하루만 사랑으로 가득 채워보자는 마음으로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매일 매일의 작은 희망, 작은 보람, 작은 사랑의 빛이 모이고 또 모이는 어느 순간, 어둡고 암담했던 내 삶은 기적처럼 빛나고 화사한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창문도 없는 어두컴컴한 독방, 딱딱한 밀집 매트, 지독한 습기로 인해 바닥은 이끼로 덮혀있었고 매트와 마루 위에는 버섯이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 모든 열악한 상황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던 혹독한 심문과 협박, 그리고 짙은 고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그래도 이게 어딥니까? 제가 갇혀 있는 감옥 근처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가끔씩 들려오는 성당의 종소리는 또 얼마나 큰 기쁨인지요.”
너무나 끔찍한 사건이요 트라우마였을텐데 주교님께서는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975년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에 사이공에서, 저는 체포되었습니다. 그렇게 새롭고 특별한 저의 긴 모험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저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시는 그분께서 제가 이 땅에 남아있는 동안 할 일을 제게 말씀해주실 것이리라 희망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사랑한다면 선물부터 뜯어보라>
어느 아담한 도시가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자리한 레코드 가게에서 일어난 이야깁니다. 그 가게엔 에메랄드 빛 눈을 가진 잘생긴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가게 사장입니다. 누구에게나 친절하며 클래식을 사랑하는 아주 멋진 청년이죠.
그리고 언제부턴가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날마다 가게 앞을 서성거리다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가씨가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옵니다. 물론 아가씨의 목적은 레코드가 아닌 청년이었죠.
“안녕하세요? 찾으시는 판이라도...?”
청년이 말을 걸어오자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옵니다.
“이 판 얼마예요?”
“5달럽니다”
이를 어쩝니까? 아무 말도 못한 체 레코드판을 들고 길을 나섭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레코드판만 사고 문을 나섭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기분이 좋았습니다. 청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어느 덧 삼년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아가씨의 사랑은 깊어만 가서 결국 상사병으로 쓰러지고 맙니다. 아무 가족도 없이 혼자 살던 아가씨는 유일한 친구가 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고 맙니다.
장례를 치르고 아가씨의 집을 정리하던 친구는 굳게 닫힌 작은 방문을 열게 됩니다. 이 방엔 무엇이 있을까요? 여기엔 포장도 뜯지 않은 레코드 판 수백 장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럼 왜? 레코드판을 뜯어보지도 않고 쌓아만 뒀을까요? 안타깝게도 아가씨에겐 전축이 없었습니다. 단지 청년을 보기 위해 레코드판을 사러 갔으니까요.
"얘는 듣지도 않는 레코드판을 왜 이렇게 사 모은 거야?"
아무 것도 모르는 친구는 무심결에 포장을 뜯어봅니다. 그 속에 쪽지하나가 떨어집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가씨에게 첫눈에 반했습니다. 저녁에 시간 있으세요? p.s. 제 이름은 존이라고 합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체 다른 판을 뜯어봅니다.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8시 가게 앞 카페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 오늘 안 나오시면 내일 모레 언제까지고 기다릴 겁니다.”
이런 식으로 모든 판에 존이 쓴 쪽지가 들어있었습니다. 친구는 존이라는 청년을 찾아가 이 모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청년은 이야기를 듣고 밀려오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한 마음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분이 주시는 선물은 뜯어보지도 못한 채 상사병으로 죽어갈 수도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선물부터 뜯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은 ‘진리와 은총’입니다. 쉽게 말하면 ‘말씀과 성사’입니다. 성경은 들춰보지도 않고 성체는 공경하지도 않으며 그것들을 주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사랑하려면 그분이 주신 선물을 먼저 뜯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구원은 당신에 대한 사랑에 달려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한다면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할 것입니다. 만약 성당에 다니면서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언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제로는 그분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되는 이유가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을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당신이 주시는 선물은 ‘진리와 은총’입니다. ‘말씀과 성령(성사)’인 것입니다. 그분이 주시는 선물을 무시하면서 그분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을 사랑하지는 않더라도 당신께서 주시는 선물은 믿으라는 것입니다. 미사 때 말씀의 전례를 통해 예수님은 당신 진리를 선물하시고 성찬의 전례를 통해 당신 성령을 선물하십니다. 말씀도 지겨워하고 성체를 영하면서도 감동이 없다면 레코드판만 사고 그 안의 글은 읽지 않았던 여자와 같아집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뜯어보고 살펴보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분께 대한 사랑은 증가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면 선물부터 뜯어봅시다. 사랑은 선물에 담깁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2,8-12 : 어떻게 항변할까 걱정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수한 신앙의 힘에 대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8-9절) 영원한 생명은 구원을 주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복음이란 것은 어떤 부분은 흔들리고 어떤 부분은 굳건한 것은 아니다. 만일, 복음이 없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은 아무 은총도 입지 못한다. 반대로 복음이 깨어질 수 없는 것이라면 순교자들이 복음과 반대되는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순수한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자신의 믿음과 희망과 덕과 영광을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둔 사람은 누구도 그리스도를 거스르는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8절)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을 증거하면 받는 보상이 바로 이 말씀이다.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알까?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입술로만이 아니라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함으로써 아는 것이며, 그것이 증언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죄라고 가르치셨다.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용서받겠지만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인간이 저지르는 어떠한 죄들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이며, 이는 그분의 자비와 크신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을 거스르는, 그래서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무엇인가?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말한다. 이 사랑은 인간의 모든 것을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는 사랑이며, 그래서 항상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해 주시는 사랑인데 그것을 믿지 않아 하느님 앞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영원히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 모독죄이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주실 것이다.”(12절) 성령께서는 순교자들에게 그 위험한 순간에도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그리스도를 위한 순교자로서 그분을 증언할 수 없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1코린 12,3) 그러니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야 누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겠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고 이끌어주실 것을 믿고 이 사회에 신앙을 전파하고 생활로써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청하며 기도하자.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또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가운데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것까지 용서받을 수 있다면,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첫 번째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활동, 특히 기적들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루카의 사고방식 안에서 예수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무지에 의한 것이었기에 용서받을 수 있지만, 성령 강림 이후 사도들의 설교를 거부하는 것은 구원을 의도적으로 배척한 것이기에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인정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떨어져 나가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으면 아무도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라고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령을 모독하는 죄란 회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용서하십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란 하느님께 돌아가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받았고, 그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고백한 신앙을 내 마음속에만 간직할 것이 아니라 삶으로 드러내고 세상에 용감하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한국 본원)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자신감과 자만심>
자신감은 가난한 마음으로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고 자만심은 넘어지면 교만한 마음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자신감을 가지되 자만심을 버려야합니다. 기어 다니는 아이가 일어나려면 300번 넘어졌다 일어나야 서서 걸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가능합니다.
김연아가 세계적 피겨 선수가 된 것은 몇 천 번 넘어졌다 일어난 자신감으로 이루어진 성과입니다. 넘어진 다음 일어나지 못했으면 세계적 선수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가 수련 때 자주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고 수도자로 부적합하다고 수련장님에게 고백하니 “ 잘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하시며 위로해 자신감을 심어주신 것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종신서원을 하고 사제 되어서 60년 살면서 잘못한 일을 기록하려면 책 한권도 쓸수 있을 것입니다.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회복하고 다시 쓰러져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옛 말에 성인도 하루 일곱 번 잘못 한다고 합니다.
매일 회두의 삶을 통해 새롭게 변화됨으로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갑니다. 누가 옷을 한번 사서 옷이 더러워지면 버립니까? 세탁하여 다시 깨끗한 옷을 입듯이 자기 잘못을 씻어내는 사람은 인정하는 사람은 희망이 있습니다.
하느님 외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더구나 사람이 모여 사는 어떤 공동체도 화목하고 행복해야 할 가정도 잘못으로 인하여 갈등이 있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망가진 가정을 다시 세워갑니다.
종교라 해도 국가라도 해도 근본은 변함이 없지만 누가 나라를 다스려도 잘못이 있게 마련입니다.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자만심을 버리고 자신감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교회 안에 그가 주교인든지 사제이든지 실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마음으로 잘못에 대한 깊고 성실한 반성과 새 마음으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저는 요사이 오늘 복음에 말씀같이 내 안에 성령의 소리를 듣고 순종하면서 자신감 있게 살아갑니다.
성령이여 오소서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교회 안에 참 변화와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기도합니다.
넘어진 사람이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일어난 바오로 사도같이, 아오구스티노 성인같이 교회의 초석이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
[작은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성 안토니오 수도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자신 있습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친히 이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네가 외면하면 나도 너를 외면하겠다는 그런 뜻인데 예수님께서 그렇게 쪼잔하고 쩨쩨하신 분이십니까?
성서학자들은 이 말씀을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믿음과 신앙고백이 반영된 말씀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초대교회에는 몇 가지 신앙고백 형식이
“예수는 주님이시다.”나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같은 것이고, 이런 신앙을 소리를 지르며(환성을 지르며) 고백하였다지요.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안다고 고백하는 것이 희랍어로는 환성을 지르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주님을 안다고 소리 지르며 고백하는 거지요.
이것은 박해시대 주님을 모른다고 배교하지 않고 당당히 나는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고 지금 우리로 치면 사람들 앞에서 십자성호를 파리 쫒듯이 또는 부끄러운 듯이 긋지 않고 당당하게 긋는 것과 같은 거지요.
그러니까 여기에는 신앙인이라면 죄인인 듯이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라는 초대교회의 가르침이 있는 것인데 제가 불만스러워 하는 것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왜 이런 가르침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느냐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길거리에서 일부 개신교 광신도들이<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것과 뭐 다릅니까? 저는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나 얘기는 정말 싫고 짜증을 넘어 화가 납니다.
사랑하자고 얘기해야 되는데 미워하지 말자고 얘기하고, 사랑이 얼마나 좋은지 얘기해야 되는데 미움이 지옥이라는 얘기나 하고, 예수님 믿는 게 얼마나 복된지 얘기해야 되는데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엄포를 놓아 예수님을 지옥에나 보내는 분으로 왜곡시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구원이 그렇게 자신이 없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을 믿으라고 얘기하면 되지 뭣 하러 안 믿으면 지옥 간다고 굳이 얘기하는 것입니까?
며칠 전 젊은 부부를 만났습니다. 사업을 제법 크게 하였는데 사기를 당해서 어려움을 겪다가 건강이 아주 나빠지자 마음을 비우고 회사를 깨끗이 정리한 분들입니다.
매달 이자를 수천만 원씩 갚아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해도 해결 방법이 나오지 않자 비로소 그들은 기도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신앙생활을 얼마나 등한시하고 욕심에 눈이 멀었는지 깨닫습니다.
그래서 회사를 팔아 빚잔치를 한 다음 지금은 신앙과 행복을 되찾아 한 편으로는 신앙생활의 복됨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증거 하는 삶을 살고 다른 한 편으로는 남은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려하는데 아직 궁리중이지만 사회적 기업을 하는 것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분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을 안 믿는 것이 그 자체로 지옥이고 반대로 예수님을 믿는 삶이 얼마나 복된지 경험으로 깨달아 이제는 자기들이 사는 삶의 복됨을 스스로 간증을 한다고 합니다.
이래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과 삶에 자신이 있으면 그 복됨을 얘기하면 됩니다. 우리는 오늘, 사람들 앞에서 나의 믿음을 당당히 고백하고, 나의 복됨을 간증할 수 있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 성찰토록 해야겠습니다.
=====================
[수원교구 최영균 시몬 신부님]
<터부와 증언>
'증언’이라는 말은 보통 법정에서 많이 쓰는 말입니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그것을 목격하거나 직접적인 체험이 있을 때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 증언입니다.
일본에 가면 세 마리의 원숭이가 각각 귀를 막고,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있는 원숭이 상이 있습니다. 이 원숭이들은 인간사회의 터부(Taboo, 금기)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때로는 알고도 모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보아도 못본 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서는 안 되는 장소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묵시적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때론 진리를 말하는 것이 터부시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터부는 건강한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합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두려움과 인간 사회의 어둠으로부터 오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증언이라 함은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밝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귀를 막아서는 안 됩니다. 요한 복음 1장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진리로 간주합니다.
진리(진실)를 증언하는 것은 자기 자신의 두려움과 사회적 악과의 고단한 싸움입니다. 때론 이 증언 때문에 한 사람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터부시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이들에겐 진리 앞의 터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살아가다 보면 작은 이익과 작은 자존심과 또 작은 인간적 편안함을 위해 진실을 말하는 것을 주저할 때가 있습니다.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이 바로 신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증언>
루가 12,8-12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증언>
나 쓰러져야 할 때
그분 함께 쓰러지시리니
그분 쓰러지실 때
나 함께 쓰러지리라
나 일어나야 할 때
그분 함께 일어나시리니
그분 일어나실 때
나 함께 일어나리라
=====================
[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천천히 느리게…>
놀부가 죽어서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정하는 곳에 왔습니다. 놀부가 이래저래 둘러보니 여기저기 시계가 보였습니다. 놀부가 물었습니다.
“여긴 왜 이렇게 시계가 많죠?”
천사가 대답하였습니다.
“저 시계들은 자신이 나쁜 일을 많이 하면 할수록 빨라지는 시계입니다.”
그 말을 듣고 놀부는 자신의 시계를 찾아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놀부는 의아한 마음으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전 나쁜 일을 하나도 안 해서 시계가 없나 보죠?”
천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놀부님 것은 너무 빨리 돌아서 하느님께서 선풍기로 쓰고 있는데요.”
고운님들의 시계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참 궁금합니다. 그런데 안식년을 보내고 있는 저 두레박의 시계는 왜. 이렇게 느리게 가는 걸까요? ㅋㅋㅋ
그렇다면 고운님들의 시계는 느리게 갈까요? 빠르게 갈까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영인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사랑하고,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게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참을성 있게 하고, 서로 존경하게 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게 합니다. 고운님들 안에 성령이 함께하실 때, 우리 인생은 어렵고 힘겨울망정 살만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어찌 보면, 성령이 임하시는 세례의 마음, 측 첫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로마서 8장 28절에 보면, 사도 바오로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이 고운님들 안에 있고, 하느님의 은총과 생명이 고운님들 안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만이 고운님들에게 닥친 역경과 불행, 시련들이 내 눈에 보일지라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은 변하지 않으시지만, 고운님들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의 사람’이고, 나는 하느님의 햇살 담은 사랑 가득한 영혼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특히, 몸과 마음이아픈 이들과 아픈 이들을 돌보는고운님들, 그리고 자녀들에게 하느님의 햇살 담은 사랑으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정말 은혜로운 것은, 고운님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불행한 상황에 빠졌다 할지라도 하느님은 여전히 고운님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사실입니다.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행복하여라. 보십시오. 이제 고운님들의 시계는 천천히, 느리게 가고 있습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고운님들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이 하느님과 연관되어 있기에,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가 고운님들 안에 흐르고 있음을 감사하며 행복한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89)
♧♧ 시편 56편 2절….
"하느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사람들이 저를 짓밟고 온종일 몰아치며 억누릅니다."
* 사람들이 저를 짓밟고...
문자적으로는 ‘사람들이 내 뒤를 쫓는다.’라는 뜻으로 다윗을 미워하는 자들이 죽이고자 뜻을 가지고 추적하는 상황을 말합니다. 본 시편 56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필리스티아의 갓 임금 아키스에게 피한 때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사무엘 상권 21장 10-15절. 참조)
다윗은 이전에 필리스티아 사람 골리앗을 죽인 장본인으로서 필리스티아인들에게 있어서는 필리스티아의 국가적 발전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원수였습니다.(사무엘 상권 17장. 참조)
때문에 그들은 이전부터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다윗이 제 발로 그들을 찾아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하에서 볼 때, 다윗이 당시 처했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에 다윗은 그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게 위해 침을 수염에 흘리며 미친 척까지 해야 했습니다.(사무엘 상권 21장 13절. 참조)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필리스티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온 종일 몰아치며 억누릅니다...
문자적인 의미는 ‘온종일 나를 짓밟으며 나를 대항하여 싸운다.’입니다. 실제로 다윗이 필리스티아에 있는 동안에 필리스티아의 많은 제후들로부터 압박과 조롱을 받았었음을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사무엘 상권 29장 2-9절. 참조)
♧♧ 시편 56편 3절….
"저의 적들이 온종일 짓밟습니다. 정녕 저를 몰아치는 자들이 많기도 합니다. 지고하신 분이시여!"
‘저의 적들...’ 이는 팔리스티아 땅으로 피신한 다윗을 오히려 해치려 든 필리스티아인들뿐 아니라 다윗을 필리스티아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무고히 핍박한 사울까지도 의미하는 말로 이해되어 집니다.
♧♧ 시편 56편 4절….
"제가 무서워 떠는 날 저는 당신께 의지합니다."
다윗은 지금 이스라엘의 적인 필리스티아의 왕궁에서 미친 척하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비참한 신세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0-15절. 참조) 그러나 이 구절이 말해주듯... 다윗은 그러한 환난의 날에도 하느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결코 잃지 않았습니다.
실로 다윗은 하느님이 억눌린 이를 돌아보시는 분이시오, 환난 때에는 피신처가 되어 주시며(시편 9편 10절. 참조), 자기의 의지할 반석이시오, 산성이시오, 자신을 구원해주시는 하느님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시편 18장 2절. 참조)
뜻하지 않는 때에 어려움을 겪으면 하느님을 잊어버리기가 쉬운데 주님께 충실한 이들은 그 어떠한 형편 중에도 하느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의지하는 것이 생명의 근원이시며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게 되는 지름길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잠언 14장 27절. 참조)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만 모여 있다면 이 안에서 놀라운 성과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회사에서도 직원을 채용할 때 어떤 사람을 뽑습니까?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뽑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취업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많은 젊은이가 스펙 쌓기에 온 힘을 쏟습니다. 언젠가 요즘에는 스펙 7종 세트를 갖춰야 한다는 글도 본 기억이 나는데, 그만큼 취업에 큰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능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 대학 집단 지성 센터의 톰 멀론 교수는 각종 조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똑똑한 구성원들이 한자리에 모인다고 해서 능력 있는 팀이 구성되지는 않는다. 결정적인 요인은 각 구성원의 평균적인 사회 지각 능력. 즉, 인성이다.”
요즘 기업에서는 이 인성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뛰어난 사람이 모여 있어서 더 좋은 성과를 낼 것 같지만, 서로를 인정하지 않고 부정적으로만 보고 있어서 더 나쁜 결과가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소중한 것처럼 남 역시 소중하게 여기면서 인정하고 지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서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스펙이라는 것이 대부분 부모가 만들어 준 것이 많아서(각종 정보력을 이용한 부모의 힘으로 스펙을 쌓는다고 합니다)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자기소개서 같은 개인의 인성을 볼 수 있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쫓아왔던 이들 중에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면서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트집을 잡으면서 예수님 곁에 다가오는 사람들을 떼어놓으려고 합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서 예수님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었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선하신 하느님은 누구든지 회개하면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들은 처지가 달라집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아예 인정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반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능력은 뛰어나다고 인정받는 종교지도자들이었지만, 하늘나라에서는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능력이 부족한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시지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을 새기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들이 완성됩니다.
###############
{행복은 어디에?}
신부가 되기 전, 신학생 때만 해도 산에 참 많이 갔었습니다. 갈 곳이 특별히 없었기 때문도 있지만, 산 정상에서 느끼는 성취감으로 인해 푹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정상을 빨리 올라가는 것이 늘 제 목표였습니다.
한 번은 북한산 정상인 백운대까지 올라가는데,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뛰어 올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이 역시 정상의 기쁨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덧 저도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습니다. 지금도 지방에 강의하러 갔다가 시간이 허락되면 혼자서 산에 오릅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쉬지 않고 뛰어서 산을 오를까요? 아닙니다. 지금은 그런 체력도 없어서 할 수 없지만, 정상에만 기쁨이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정상까지 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지도 않습니다.
답답한 이 세상과 분리되었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만 오릅니다. 이것만으로도 아주 기쁘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는 정상에만 행복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조금의 노력만 있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행복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행복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기다리던 거주자 등록증이 나왔습니다. 2019년 미국에서의 생활이 비로소 시작된 것 같습니다. 미국 생활에서는 꼭 필요한 서류이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과정을 거치면서 받았던 것들이 있습니다. ‘주민등록증, 운전면허증, 학위증서, 졸업장, 여권, 본당 신부 임명장, 신용카드, 성직자 신분증, 외신 기자증’ 어떤 것은 나이가 되면 받았고, 어떤 것은 과정을 거치고 시험을 봐서 받았고, 어떤 것은 국민이기에 받았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주민증은 어떻게 받을 수 있을지 생각해 봅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는 길이 있습니다. 신앙인이 되었다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할 책임과 사명이 있습니다. 신앙인답게 살아야 할 책임은 무엇일까요? 복음 삼덕의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첫째는 순명입니다. 나의 뜻과 나의 욕심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겁니다. 성모님께서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길이 비록 고난의 길이라도, 그 길이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을지라도, 그 길이 자존심이 상할지라도 따라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재물도, 명예도, 권력도,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려놓을 수 있는 의지가 순명입니다.
둘째는 청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재물을 섬기기 때문에 친구를 배반하고, 법을 어기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지상의 창고에 재물을 쌓기 보다는 하늘의 창고에 재물을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기 때문에 재물의 축복을 받을 수 있지만, 재물을 섬기기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는 없습니다. 부유하면서 겸손할 수도 있지만, 가난하면서 그걸 즐기는 삶도 있습니다.
세 번째는 정결입니다. 수도자와 성직자가 독신으로 사는 건 육체적인 정결을 지키는 의미도 있지만 삶의 중심에 하느님을 모시기 위해서입니다. 수도자와 성직자가 독신으로 살면서 위선과 가식으로 살아간다면 정결의 삶이 아닙니다. 독선과 교만으로 살아간다면 정결의 삶이 아닙니다. 혼인하여 가정을 이루지만 삶의 중심에 하느님이 있다면 정결의 삶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준다면 정결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생활 속에서 실천한다면 정결의 삶입니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다면 정결의 삶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용서를 청한다면 정결의 삶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받아 주시고, 잔치를 벌여 주십니다.
신앙인답게 살아야 할 사명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베드로 사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 나를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내 양을 잘 돌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3번 같은 질문을 하셨습니다. 신앙인답게 사는 사명은 바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건 ‘향주삼덕’의 길을 따라가는 겁니다. 믿음, 희망, 사랑의 길입니다.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가지 못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서 말씀은 우리에게 용기와 위로를 줍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을 믿었습니다. 너희는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갈 때, 어떻게 답변할까, 무엇으로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령을 사랑하십시오>
-성령과 믿음-
형제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새삼 놀라는 것이 무지의 병임을 알게 됩니다. 바로 이는 나를 바라보는 반면교사의 역할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은 내 문제로, 나는 어떤가? 바라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동방영성에서 늘 말하는 마음의 병 제1호가 무지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 자기를 아는 자기인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가장 쉬운 것이 남 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힘든 것이 자기를 아는 일이라 합니다. 자기를 몰라서 남을 판단하지 정말 자기를 아는 사람들은 절대로 남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여 우리 영적 삶도 하느님을 알고 나를 깨달아 알아가는 평생 배움의 여정이라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 때 지혜와 겸손이요 자유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중요한 평생공부가 이런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가는 공부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리 똑똑하고 학식이 풍부해도 자기를 몰라 겸손과 지혜가 부족하다면 헛똑똑이요 똑똑한 바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역설이 모르면 알려줘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모두 나를 아는데 나만이 나를 모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아는 데 대화와 경청의 소통이 얼마나 절대적인 깨닫게 됩니다.
무지의 어둠이요 무지에 대한 답은 회개뿐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말씀의 빛입니다. 끊임없는 회개와 더불어 함께 가는 겸손과 믿음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바 성령의 역할입니다.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면 성령의 은총입니다. 정말 영성생활에 성령께 마음을 열고 경청하고 배우는 겸손한 자세가 필수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성령을 사랑하고 공부하는 것입니다. 성령따라 살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진리입니다. 성령은 사랑입니다. 성령을 사랑할 때 성령의 은총으로 회개와 겸손이요 자기를 아는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은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선포하라는 내용입니다. 어떻게? 바로 성령의 은총으로 가능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하는 자는,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담대히 주님을 증언하는 삶 역시 성령의 은총입니다. 성령께서 용기와 지혜를 주셔야 담대히 주님을 증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도 이와 일맥상통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진리의 영이 나를 증언하시고 너희도 나를 증언하리라”, 주님을 증언하는 성령께 귀기울여 경청할 때 우리 역시 증언의 삶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슬러 말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니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모두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이래서 성령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무지의 어둠을 밝혀 주셔야 성령을 모독하지 않고 성령에 따라 주님께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자명한 영적 현실을 보면서도 무지로 인한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언행으로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지에 대한 책임에서 결코 면제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어떤 곤경에 처하더라도 어떻게 답변할까, 또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 때에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지에 대한 답은 성령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걱정없이, 두려움 없이 담대히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것도 성령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는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믿음을 통해 실현되는 하느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두의 믿음의 조상입니다. 참으로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죽은 이들을 살리시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불러 내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믿음의 절정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믿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총이 아니곤 이런 믿음은 불가능하니 결국은 성령의 은총, 믿음의 은총입니다.
끊임없이 우리를 무지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우리의 믿음을 북돋아 주시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그래서’의 믿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입니다. 결코 성령의 은총으로 하느님을 믿는 성령의 사람들은 결코 원망, 절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들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곤경과 역경중에도 찬미와 감사, 감동, 감탄으로 그 믿음을 표현할 수 있으니 이 또한 성령의 은총입니다.
주님은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어 주님을 담대히 증언하며 두려움 없이 복음 선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하늘은 이미 지상에서 열립니다>
가끔 낯선 곳을 가면 다른 사람이 먼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소개하며 인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방도 편안해 합니다.
그리고 어떤 처지에서든지 당당히 자기를 알리고 그 이름에 걸 맞는 품위를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신자로서 신자임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간다면 나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손길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사람의 아들도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할 것이다.”(루카12,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면 예수님께서도 그를 안다고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잇속을 차리려고 누구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손해가 오더라도 그를 안다는 마음에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히고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을 모른다고 한마디만 하면 자유를 누릴 수 있는데도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랑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해드리지 않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내 놓았습니다.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을 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믿음을 드러낼 때입니다. 간혹 식당에서 보면 십자성호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이 볼까 조심스럽게 가슴에 열 십자를 긋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표현은 확실히 해야 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고 성호경을 하면서 십자가를 긋는 것은 신앙의 고백입니다. 따라서 십자성호를 할 때 믿음을 담아 바르게 해야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18장 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셨습니다. 우리가 땅에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늘나라가 결정된다는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천사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의 삶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순간을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마태16,27)
하늘은 이미 지상에서 열립니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지상에서의 삶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성령을 모독하는 때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영이 뜻하는 바를 삶으로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의 품위를 지금 여기서부터 지키며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은 "증언"을 이야기합니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루카 12,8) '안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은 그분을 사랑한다고,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그분은 당신을 안다(사랑한다)는 증언에 목마르십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그분이 한낱 보잘것없는 우리가 당신을 알아 주기를(사랑해 주기를), 그래서 안다고(사랑한다고) 말해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열렬히, 또 애절히 우리 사랑을 구걸하며 기다리시는 하느님이십니다.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12)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로 끌려가더라도 답변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인간적 언어로 미리 극본을 짜놓고 대비하다가 자칫 증언이 아니라 변명 혹은 논쟁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요. 진실로 "증언"이 되려면 영의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의 원리로 설명해야지 세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마음과 입술을 열어주실 "그때"까지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그런데 "그때"는 그분께 달렸습니다. 괜한 조급증이 조잡한 내 것과 성령의 진리를 뒤섞어 버릴 수 있으니 신뢰와 인내를 다해 "그때"까지 견뎌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지요.
또 성령께서 우둔한 내 입을 통해 말씀하시는 순간 그분께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의 증언을 내 식대로 판단해 왜곡, 과장, 축소, 변형하거나 고집으로 입을 다물어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 순간에는 내 자신이 그저 투명하고 유순한 통로가 되어 성령의 언어가 나를 통해 흘러나오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내 것이 끼어들거나 오염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아브라함은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약속은 믿음에 따라 이루어지고 은총으로 주어집니다."(로마 4,16)
자손이 없던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자손과 민족 약속을 믿었기에 결국 은총으로 "우리 모두의 조상"(로마 4,16)이 됩니다.
"그는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 말씀에 따라 ... 믿었습니다."(로마 4,18)
통계와 논리의 결과를 통해 희망이 생긴다면 그건 희망이라는 단어를 덧입었을 뿐 진정한 희망이 아닐 겁니다. 그저 기대치, 예상치를 조망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봐야겠지요. 희망은 희망할 수 없는 깜깜한 상황에서 희미하게 새어드는 한 줄기 빛이 일으키는 힘입니다. 그 빛이 곧 믿음이지요.
아브라함 자신이 곧 믿음의 "증언"입니다.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지킨 그의 존재와 행위가 통틀어 곧 "증언"입니다. 증언은 세상 눈으로는 미련해 보이기까지 한 믿음, 충직하고 충실한 믿음의 열매입니다.
우리의 말은 물론, 우리의 존재도 아브라함처럼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내면에 불질러주신 사랑의 고백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표정과 존재 전체가 무심하고 냉랭한 세상을 향해 "나는 주님을 압니다, 나는 그분을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는 증언이 됩니다. 생생하고 진실된 증언, 믿음과 희망이 묻어나는 증언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목소리를 담은 증언, 믿음과 희망의 존재로 선포하는 증언은 우리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으로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천사들, 하느님 앞에서 예수님이 말과 행동과 온 존재로 "나는 ○○를 압니다! 나는 ○○를 사랑합니다!" 하고 외치실 것입니다. 바로 그분 자신이 우리를 위한 증언이고 보증이십니다.
오늘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 나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고 고백하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신부님의 영성의샘물※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하여 외로움이 상처가 아니고 선물
〔고독과 고독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중요한 세 단어가 있다. 혼자라는 말과 외로움이라는 말과 고독이라는 말이다. 모든 인간은 혼자다. 혼자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세상을 나처럼 느끼고 경험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나는 혼자다. 그렇다면 혼자라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외로움으로 받아들인다. 혼자라는 것을 상처로, 즉 나를 아프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으로 경험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 도와줄 사람 없나요?”하고 절규한다. 외로움은 오늘날 고통의 가장 큰 출처 중 하나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질병이다.
- 헨리 나웬,「꼭 필요한 것 한 가지 기도의 삶」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외로움을 상처로 받아들지 않고 선물-하느님의 선물-로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이다. 그래야 우리는 자신이 혼자이면서도 하느님께 얼마나 깊이 사랑받는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상동
_____________________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매력 발산>
"너희는 가서 모든 사람들을 제자로 삼아라."
기쁜소식을 전하는 이의 발걸음은 가볍습니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감수하고 꾸준히
선교할때 복음의 씨앗이 쑥쑥 자라지요.
성당 같이 가 볼래요? 하며 ~
내가 복음 선포자라는 의식을 갖고 생활한다면
파견받은 사람의 향기가 자연스레 납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 매력있어
뭔가 달라 ~ 나도 가볼래ᆢ하고 당신에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신앙의
빛이 되어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매력이 교회의 매력이 되고
교회의 매력이 나의 매력으로 풍기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복음은
폭발적으로 전파됩니다.
'예수님 닮은 매력 발산'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루카 12, 12)
성령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이 길을 끝까지
갈 수 없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삶을 성령께
맡기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할 것입니다.
거스를 수 없는
성령의 섭리입니다.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이십니다.
모든 순간에
우리를
맡기게 하는
성령께 두려움과
걱정까지 봉헌합니다.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를 감사로이
받아들입시다.
맡기지 못하며
살았던 지난 시간을
뉘우칩니다.
모든 걸
맡기길 바라시는
성령께 우리의
아픔 또한 맡겨드립니다.
서로 다른 우리를
소통으로 만나게
하시는 성령의
하느님께 화합을
간절히 청합니다.
가장 알맞은
때를 주시고
가장 알맞은 때에
화해와 용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
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시면 함께 나누겠습니다.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