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를 호위하던 병사들도 떼죽음을 당하고 잉카 사람들에게 신과 같은 존재였던 황제마저 스페인 원정대에게 사로잡혔다. 이로써 잉카 제국은 멸망해 버렸다. 가톨릭교회와 스페인 국왕에게 복종하는 식민지가 되었으니 황제에게 읽어 준 레케리미엔토가 현실이 된 셈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복 의지를 밝힌 레케리미엔토가 전쟁의 신호탄이었다면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에 가져간 전염병은 생물학 폭탄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아메리카는 스페인 사람들이 지나간 경로를 따라 마치 생물학 폭탄이 투하된 것처럼 각종 전염병이 극성을 부렸다.
100년 동안 스무 차례 전염병이 휩쓸고 간 결과 원주민 숫자는 10퍼센트 이하로 떨어져 9,000만 명의 사람이 몰살당했다. 스페인이 가장 먼저 발견하고 지배했던 히스파니올라 섬의 원주민 타이노족은 한 명도 남지 않고 모조리 죽고 말았다.
아메리카 사람들이 그토록 전염병에 취약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유력한 원인 중 하나는 환경과 면역력의 차이였다.
아메리카 사람들은 매일 목욕하며 몸을 깨끗이 했을 뿐 아니라 날마다 거리를 청소하고 쓰레기를 퇴비로 만들며 청결함을 유지했다. 이런 환경 때문에 병원균에 노출되는 경우가 적었고 대량 살상 능력을 가진 전염병도 거의 없었다. 이것은 전염병에 맞서 면역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드물었다는 뜻이었다.
이에 반해 스페인은 홍역, 천연두, 페스트, 황열, 콜레라 등의 전염병이 창궐했고, 이 환경에서 살아남은 스페인 사람들은 전염병을 이길 수 있는 면역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메리카 원주민끼리 살 때는 아무 위험이 없었지만 강력한 병원체를 가진 스페인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치명적인 위험에 빠져 버렸다. 원주민이 스페인 사람과 접촉하고 나면 너무나 쉽게 죽어 버렸기 때문에 마치 스페인 사람의 냄새만 맡아도 죽는 것처럼 보였다. 스페인 사람들은 전염병에 쓰러지는 원주민을 불에 타 죽는 빈대에 비유하기도 했다. (로널드 라이트 지음, 『빼앗긴 대륙, 아메리카』, pp.93~94.)
특히 급속도로 퍼졌던 천연두는 스페인의 한 병사가 원주민과의 전투 중에 전염시켜서 원주민들은 반격할 힘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천연두는 얼굴을 흉측한 곰보로 만들고 눈까지 멀게 했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원주민들조차 다시 절망에 빠졌다.
살아남은 원주민들은 예전과 같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가족과 친지가 세상을 떠나고 마을을 이끌던 어른도 없어졌으며 풍요로웠던 경작지는 돌보는 사람 없이 폐허가 되고 말았다. 눈앞에서 스페인 사람들이 땅을 차지하고 제멋대로 곡식을 심어도 저항할 원주민이 너무나 적고 힘이 없었다. <자료5>
자료5> 아스텍 원주민들이 1550년경 그린 그림으로 천연두로 고통받는 원주민을 묘사하고 있다. 원주민의 기록인 『샤일 연대기』에는 전염병으로 초토화된 아메리카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역병이 나타나 죽은 사람이 끔찍이 많았다. 시신에서 악취가 진동하고 개와 독수리가 시신에 달려 들어 뜯어 먹었다. 우리는 아직 철부지였고 우리 어른들은 한 분도 남김없이 돌아가셨다.”
스페인 사람들은 원주민만 골라 죽이는 전염병을 두고 “주 예수를 믿지 않는 이교도에 대한 신의 심판”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원주민의 눈에도 전염병에 끄떡없는 스페인 사람들은 신의 보호를 받는 것처럼 보였고, 겁에 질린 원주민들은 떼를 지어 가톨릭으로 개종했지만 곧 스페인 수도사들은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 원주민들이 예수를 믿겠다고 개종하고 세례까지 받은 후에도 여전히 전염병으로 죽어 나갔기 때문이었다.
1524년 중앙아메리카에서 선교하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은 원주민이 떼죽음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고 죽음이 곧 축복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곧 예수가 재림하고 세상이 끝날 것인데 종말을 앞두고 전쟁이 벌어져 큰 혼란에 빠질 것이다. 신께서 세례를 받은 원주민 신도들의 목숨을 거두어 가심은 임박한 종말의 때에 고통을 면해 주시려는 특별한 축복”이라고 했다.
죽음이 곧 축복이라는 개념은 원주민에게 생소했지만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거라는 말은 원주민도 실감할 수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십자가 배를 타고 찾아온 뒤로는 악취 나는 그 배에서 바퀴벌레와 쥐가 튀어나와 해안에 흩어져서 바이러스성 질환을 퍼뜨리고 있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가져온 돼지, 소, 양, 염소 같은 낯선 동물들이 운하와 들판을 엉망으로 만들자 예전에 없었던 인수 공통 질병(人獸共通感染病, zoonosis)이 창궐했다. 어디를 봐도 종말과 같은 고통과 혼란뿐이었다.
가톨릭 수도사들은 개종하지 않은 원주민이 전염병으로 죽는 것도 신의 뜻으로 설명했는데,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제로니모 데 멘디에타는 이렇게 적었다. “원주민이 겪는 전염병을 보며 나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걸 느낍니다. ‘너희는 이 종족을 어서 절멸시켜라. 나는 좀 더 빨리 그들을 절멸시키도록 너희를 도울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Stannard, 『American Holocaust』, 219쪽.)
개종을 거부하는 원주민을 말살시키는 것은 예수의 뜻이었고, 예수가 전염병을 통해 종족 학살을 돕는다는 것이었다. 신이 전염병으로 신도들을 돕는다는 생각은 가톨릭뿐 아니라 개신교에도 있었다.
영국 왕이었던 조지 3세(1738~1820)는 “축복의 천연두가 우리를 도와주었다.”고 했다.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를 차지하기 위해 침입했을 때 원주민 마을은 대부분 비어 있고 경작지는 죽은 원주민의 뼈로 뒤덮여 있었다. 천연두가 수차례 퍼지면서 뉴잉글랜드 지역 원주민의 94퍼센트를 학살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천연두로 원주민 종족이 말살을 당하고 영국인이 아무 저항 없이 원주민의 땅을 차지한 것을 두고 조지 3세가 ‘축복의 천연두’라고 칭송한 것이었다.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와 조지 3세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들이 믿는 신은 축복의 천연두를 통해 예수를 믿는 사람도 죽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도 죽이는 셈이었다. 죽음을 선사하는 신의 손길을 경험한 신도들은 신의 도움을 마냥 기다리지 않고 직접 나서기 시작했다.
1763년 영국의 제프리 암허스트 장군은 북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천연두에 오염된 담요를 선물로 주었다. 암허스트 장군은 그들이 믿는 신이 허락한 대로 “지긋지긋한 종족을 절멸시키기 위해서” 천연두를 전염시켰다고 했다. 선물 받은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던 원주민들은 얼마 안 가 무시무시한 종기와 함께 죽음의 대열에 휩쓸려 버렸고 암허스트 장군은 그가 믿는 신의 도우심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자료6>
자료6> 1763년 제프리 암허스트 장군이 원주민에게 천연두에 오염된 담요를 선물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사진 출처 : http://www.doomsteaddiner.net)
현재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산탄젤로 성에는 전염병을 퇴치해 준 미카엘 천사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가톨릭의 전설에 따르면 페스트가 창궐하던 590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는 산탄젤로 성 위에 천사 미카엘이 칼을 들고 있는 환상을 보았다고 한다. 이 꿈을 꾼 뒤로 페스트가 사라졌기 때문에 교황은 미카엘이 천사의 칼로 페스트를 물리쳐 준 것이라고 믿었다. <자료7>
자료7> 이탈리아 로마의 산탄젤로 성에 세워진 미카엘 동상 (사진 출처 : http:// www.all-free-photos.com)
그러나 미카엘 동상이 우뚝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페스트는 계속해서 유럽에 창궐했다. 1331년부터 20년간 계속된 페스트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였고 1500년대에도 여러 번 유럽에서 재발했다. <자료8>
자료8> 6세기경 페스트로 죽어가는 유럽 사람들 (사진 출처 : https://www. abc.com.py/ciencia/) 페스트는 유럽을 공포에 빠뜨린 전염병이었다. 6세기부터 100년 넘게 기승을 부렸고 다시 1331년부터 20년간 유럽 전 지역에서 창궐했으며 1550년대에도 여러 번 재발했다. 선 페스트에 감염되면 살결의 부드러운 부분이 부풀어 오르고 고열에 시달리다가 피부가 시커멓게 변해 버렸고, 폐 페스트에 감염되면 치사율 100%로 몇 시간 내에 숨을 거두었다.
특정한 경우 치사율이 100퍼센트에 이르는 치명적인 페스트에 대해 교황도 만족스런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아메리카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는 신도들만 골라서 학살하던 신이 왜 유럽에서는 충성스러운 신도까지 죽였던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인간의 의심일 뿐 그 신은 2,000년간 일관된 태도를 유지했는지도 모른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시체를 종교의 상징물로 내세운 이래로 시종일관 죽음을 축복으로 내려 준 신이 아니었던가.
첫댓글 종교인이 어떻게 저렇게 악독한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
악마를 보았다
악하다..
🥶
너무 잔인하네요
잔인하다는 말로도 표현이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