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급의 가짜 친구들
"가짜 친구는 때때로 최악의 적이다"
자본의 좌파와 공동전선
이른바 ‘사회민주주주의’ 정당들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 "민족(조국)의 수호"를 외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이탈했다. 사회민주주의는 1918년과 1923년 사이에 혁명적인 노동자 봉기를 분쇄하고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포함하여 수천 명의 코뮤니스트를 살해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으로 강력한 계급투쟁의 시기에는 ‘노동자당’을 표방하면서 자본주의의 방어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계급평화의 시기에는 노동자들에게 의회주의, 선거주의 환상을 확산시킨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중요한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으로 현실에서는 개량 없는 개량주의의 옹호자로 행동한다.
이러한 제2 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한 ‘코뮤니스트’ 정당들은 코민테른의 타락과 스탈린주의 반혁명으로 국제주의를 포기함으로써 다시 자본주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코뮤니스트당(공산당)의 ‘일국사회주의’ 이론 수용은 부르주아의 재무장화에 참여, 인민전선에 참여, 그리고 전후 국가재건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결국 민족자본의 진정한 협력자가 되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현재에도 자본의 정치기구에서 좌익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그동안 ‘노동자/민중’ 또는 ‘진보/좌파’의 이름으로 부르주아 정치에 참여해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당과 경쟁하고 협력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부르주아 선거 서커스에 ‘노동자’의 이름을 팔아 참여해 선거 환상을 퍼트리고, 결국 부르주아의 한 분파, 즉 ‘자본의 좌파’로 자리 잡은 세력이다. 이외에도 ‘사회주의자’ 또는 ‘코뮤니스트’를 자임하며, 노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본의 좌파도 있다. 그들은 여전히 ‘사회민주주의’를 재창조하려 하거나 ‘스탈린주의’를 부활시키려고 시도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맑스주의’의 이름으로 계급 운동 전반에 악영향과 심각한 혼란을 주고 있다. 이들은 ‘국유화’를 사회주의와 동일시하면서 '국가자본주의를 사회주의'로 둔갑시켜 스탈린주의 체제를 방어하고 있는데, 이것은 맑스주의와 무관하다.
인민전선과 공동전선은 노동자 정부 수립을 위해 다른 계급에 기반을 둔 정파와 동맹을 맺는 전술이다. 이렇게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와 혼합하는 시도는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제하고 잠재워 결국 계급의 자립성을 저해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전술의 현실은 ‘노동/진보’의 가치를 사용하지만, 사실상 부르주아 정파인 자본의 좌파와 기회주의 세력에 이른바 ‘노동자의 벗’이라는 환상을 유지해줄 뿐이며, 더욱이 노동자들이 그것으로부터 단절하는 것을 지연시킬 뿐이다.
한편, 노동자 운동 내의 공동전선은 부르주아지에 맞선 특정 사안에 대한 투쟁에서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목표를 위해, 개량주의나 중도주의 조직과 공동으로 투쟁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과 계급 연대의 표현인 ‘공동행동’을 벗어난 정파 간의 상층부 공동전전은 인민전선과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의 자립성을 저해하는 요소이다. 계급투쟁에 임하는 혁명가들의 원칙은 아래로부터의 공동행동을 통해 계급투쟁을 확산시키고, 계급의식의 발전을 이루는 것이지, 자기 정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적 야합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전선을 통해서 계급적 원칙이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훼손하는 세력을 허용하게 된다.
노동자주의, 조합주의, 민족주의, 사민주의 등의 관점에서 노동계급 자립성은 단지 노동계급으로 자칭하기를 원하는 정파로써 자신의 종파성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에 계급 자립성이란 사회 내부의 모든 다른 계급에 대한 ‘독립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나의 전제조건을 나타내는데, 코뮤니스트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유일한 혁명계급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계급적 연대와 독자적 정치세력화는 공동전선과 노동자정당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공동행동’과 ‘노동자 자기조직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코뮤니스트와 전투적 노동자는 노동계급 독립을 위해 계급투쟁이 일어나는 모든 곳에서 부르주아 정치로부터의 단절을 실현하고, 노동자평의회와 혁명당이라는 계급적 무기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파시즘과 반(反)파시즘 인민전선에 대하여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 이후 계급 운동 강화에 대해 부르주아지가 대응하는 방식의 하나로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급진화된 소부르주아 운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투쟁이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위기로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는다고 느꼈다. 파시즘은 전투적 행동과 공격적 민족주의, 반(反)유대주의, 사회적 선동이 혼합된 기괴한 선전을 통해 이러한 범위 밖에서도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 일부를 움직여 파시스트 운동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활용한 것은 반동적 절충주의 강령이라기보다는 노동자 운동 조직에 대한 테러였다.
파시즘은 위기에 처한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이 체제의 토대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경제의 부흥이라는 이름으로 협동조합주의나 중앙집권적 조직에 맞는 권위적 통치 형태였다. 파시즘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뿌리째 뽑고, 모든 반대 시도를 분쇄하며, 사회 모든 영역을 국가 통제에 종속시킴으로써, 특히 자본 독재의 권위적 형태임을 입증했다.
파시즘의 야만적 범죄 행위는 위기와 전쟁의 제국주의 순환에서 자본주의가 얼마나 비인간적으로 잔혹한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었다. 이런 이유로, 부르주아지의 일부 도덕주의자가 파시즘을 반(反)부르주아 반란 또는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기꺼이 표현하려고 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홀로코스트 공포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주장은 언뜻 그럴듯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파시즘과 민주주의 사이 공생 관계를 숨길 신비화는 남아 있다. 의심할 여지 없이, 파시스트는 인종주의를 심화하고 확대했다. 그러나 인종주의도, 반유대주의도, 민족주의도 파시스트만의 발명품은 아니며, 반대로 자본주의 사회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파시스트는 자본주의 밖에 서 있지 않으며 자본주의 지배질서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지배자가 일상적으로 퍼뜨리는 원망과 이데올로기를 손에 들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강화한다. 이러한 이유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는 다른 모든 형태의 부르주아 지배와 마찬가지로 파시즘과 투쟁한다.
파시스트의 출현과 그들의 공격에 맞선 노동계급의 저항이 필요하다. 그러한 투쟁은 명확한 계급 기반에서 시작할 때만 승리할 수 있다. 파시즘에 대한 저항은 모든 형태의 부르주아 지배를 파괴하기 위한 포괄적인 반(反)자본주의 투쟁의 일부이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캠페인과 다양한 반(反)파시스트 동맹에 대한 모든 참여를 거부한다. 이들은 노동계급을 ‘민주적’이지만, 여전히 부르주아 국가 굴레에 묶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반동적인 막다른 골목을 나타낸다. 반(反)파시즘 전체 논리는 ‘민주주의’ 국가를 덜 나쁜 것으로 방어함으로써 파시즘에 저항하는 것이다. 민주주의 수호라는 개념은 계급 중립적 실체로서 국가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며, 결국 굴복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부르주아 국가를 강화하고 국가권력에 복종하며 자기 활동에 대한 모든 가능성이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국가에 속박하고 억압에 무방비 상태로 넘겨주는 것 이상을 의미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반파시즘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는 곳에서는 항상 실패한다. 국가가 최고의 반파시스트라고 자처하는 환상 속에서 또는 ‘반파시스트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혁명을 포기한다면, 국가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려는 모든 시도는 재앙으로 빠지게 된다. 반파시즘은 국가를 미화하는 이념이자, 혁명을 포기하는 실용적인 경로로서,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공격이다.
국제주의 코뮤니스트로서 우리는 파시즘과 거리낌 없이 싸우며, 동시에 어떤 형태의 부르주아 권력과도 싸운다. 역사적으로 파시즘은 계급투쟁과 코뮤니스트 운동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났다. 그것의 뿌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부르주아 권력 내부에서 낱낱이 드러난다. 그들은 필요하거나 기회가 있을 때, 실제로 반동적 민낯을 드러내기 위해 민주주의 가면을 벗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반(反)파시즘 연합을 위해 부르주아 권력과 동맹을 맺는 것이 잘못된 것이며, 심각한 패배로 이어진다고 믿는 이유이다. 사실, 모든 파시스트 정권의 지지 기반을 구성하는 것은 부르주아지 자체이다. 대신 우리는 ‘아래로부터의 계급 단결’, 즉 모든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방어하고 부르주아 권력에 대적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 연합을 지지해왔다.
파괴적 발전을 위한 자본주의의 힘에 비추어 인류 앞에 서 있는 대안은 ‘민주주의냐 파시즘이냐’가 아니라 ‘코뮤니즘이냐 야만이냐’다.
국제주의코뮤니스트전망((IC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