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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축 우보만리 한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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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집 모음 스크랩 준경묘 濬慶墓
우보만리 추천 0 조회 120 12.08.16 07: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준경묘 濬慶墓

조선왕조 창업의 산실로 불리는 준경묘(지방기념물 제44호)에는 유명한 백우금관(百牛金冠) 전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목조 이안사가 삼척으로 이주하여 살던 중 아버지가 돌아가게 됩니다. 목조는 아버지의 묘자리를 찾기 위해 산 속을 헤매다가 나무 밑에서 잠시 쉬는데, 한 도승이 지나다가 길을 멈추고 주위를 두루 살피며 혼잣말로 "참 좋구나. 대지로다. 대지로다"하는 것입니다. 나무 밑에 있는 목조를 발견하지 못한 도승이 이처럼 탄성을 울리면서 떠나자 묘자리를 찾아헤매던 목조는 귀가 번쩍 띄여 도승을 따라가서 어려운 사정을 말하니 도승은 "5대손 안에 왕이 탄생할 명당인데 개토제 때 반드시 소 일백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야 하고, 관은 금으로 만든 것을 써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조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난한 살림살이에 소 백마리를 어디서 구하며, 금으로 만든 관은 더욱더 구하지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명당자리를 놓칠 수는 없어 곰곰히 생각한 끝에 좋은 계책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소 일백마리는 흰소 한 마리로 대신하고, 금관은 황금색의 귀리짚으로 대신하면 될 것같았습니다. 마침 처가에 흰소가 있었고, 흰소는 한자(漢子)로 쓰면 백우(白牛)이므로 일백백자 백우(百牛)와 발음이 같다고 판단하여 부인에게 다른 말은 일체 하지않고 "내일 밭갈이를 할 터이니 처가의 흰소를 빌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다음 날 부인이 친정의 흰소를 빌려오자 목조는 노동으로 몰고 가서 개토제의 제물로 사용하고, 귀리짚으로 관을 싸서 장사를 지냈습니다.

 

1231년 이렇게 장례를 치룬 목조 이안사 아버지의 묘가 지금의 준경묘인데 1899년 어머니 묘인 영경묘소와 함께 수축하고 정자각과 비각을 지었으며, 목조가 살았던 구거지에는 제실비각을 건축하고 1981년 8월 6일 지방기념물 제44호로 지정하였습니다. 준경묘는 남한에 있는 전주이씨 실묘 중 가장 오래된 묘소이므로 매년 4월 20일 전주이씨대종회에서 시조묘 제례를 올리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묘자리를 잡은 목조 이안사는 전주에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산성별감이 관동의 안렴사가 되어 삼척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삼척을 떠나게 됩니다. 일설에는 처가의 흰소를 제물로 쓰고 되돌려 줄 길이 없어 도피했다고도 합니다만, 목조의 일가 170여 호가 함길도(함경도) 덕원군 용주리로 이주하여 목조 이안사가 여진족의 천호 벼슬을 하였다는 것은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그 도승의 예언대로 5대만에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창업하고 왕위에 오른 것입니다.

 

미로면 활기리에 있는 목조의 옛 집자리는 돌담의 자취와 샘물터가 남아있는데 처음에는 택대(宅垈) 택정(宅井) 택전(宅田)이라 부르다가 이성계가 왕위에 등극한 후에는 임금왕자를 붙여 왕대 왕정 왕전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활기리는 지명유래상 왕조의 창업을 예조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활기리는 처음에 임금이 태어날 길지라는 뜻으로 황기(皇基) 즉 황제의 터로 불렀던 것입니다. 또한 인근의 말굴레산, 사임마골, 군사가 주둔한 것과 같다는 둔곡, 종묘사직을 잇는다는 의미의 직곡, 적을 막는다는 뜻의 방위재산과 같은 지명 역시 그러한 기상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준경묘의 좌청룡 우백호 중 우백호의 기운이 좌청룡을 압도하는 형국이기 때문에 조선왕조는 좌청룡에 해당하는 맏아들이 수난을 당하는 역사가 이어졌다는 것(27대중 7대만 맏아들이 왕위에 오름)과 준경묘의 좌청룡 우백호가 서로 마주 보며 대결하는 형국이라 조선왕조는 골육상쟁 즉 왕자들간의 피비린내나는 다툼이 계속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잇습니다.

 

준경묘는 우리 삼척지역 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일본의 극우 사학자들이 이성계가 여진족의 후예이므로 한국은 조선조 5백년간 여진족의 지배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준경묘는 이성계가 한민족의 후예임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물이 되고 있습니다. (글 . 삼척시립박물관)

 

 속리산 정이품 소나무와 혼례올린 소나무. 준경묘 입구 우측 산에 있다.

 

 나이 95살, 키 32 m, 가슴높이 둘레 2.1m

 

 

 

 

 

 

 홍살문을 지나면 제각과 비각이 있다. 

 

 

 

  제각.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민도리집.

 

 퇴칸.

 

 기둥위에 퇴량을 고정시키기 위한 산지가 꽂혀있다.

 

 사분합문.

 

 방형의 초석과 기둥.

 

 측면.

 

 배면. 중방이하는 화방벽이다.

 

 비각. 정면 1칸 측면 1칸.

 

  비각의 측면. 

 

 

 

 

 

  비각의 연등천장.

 

  

 

 

 

 묘에서 바라본 제각과 비각. 

 

  샘물.......꿀맛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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