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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72회.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 (2000.06.03.)
72회 :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
방송일: 20000603 조회수 : 5016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제71회
P.D - 허진/작가 -김정화
조선왕조 기피인물 1호, 허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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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책장 PAN 12 오백여년 조선의 역사가 기록된 조선왕조실록.
여기엔 당시 정치,외교,풍속 등 다양한 얘기가 생생하게 담겨져있다.
책장에서 한 권 빠지고 7 이 가운데 광해군 10년의 기록을 보면..
한 인물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자막 나올 때 16 그는 천지간의 한 괴물입니다.
그 몸뚱이를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면 악이란 악은 모두 갖추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던 인물은 과연 누구일까?
Z.I. '허균' 4 그는 바로 허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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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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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1
# 기본 세트에서
'허균'이라는 인물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아마도 '허균'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홍길동전]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있다시피 [홍길동전]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입니다.
이런 이유로 허균은 한국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로서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그가 살았을 당시에는 그다지 훌륭한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반교문》세트로 이동하며
이것은 반교문이라는 것으로 허균이 죽은 뒤 광해군이 내린 글입니다.
반교문은 왕이 백성들에게 발표하는 일종의 담화문 같은 것으로,
주로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내려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허균이 죽었다고 경축일에나 볼 수 있는 반교문이 내려졌다?
(고개 갸우뚱하며) 그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인용구절 뜨고, MC 읽는다.)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 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의 도리가 전혀 없었다.
죄인을 잡아서 동쪽의 저자거리에서 베어죽이고, 다시 기쁨을 누리고자 대사령을 베푸노라'
이처럼 당시 조정에서는 짐승보다 못한 패륜아요,
천지간의 괴물이라고 비난하면서 허균의 처형에 대해 기뻐하고 있습니다.
당시 허균은 왜 이런 평가를 받게된 것일까요?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조선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기피됐던 인물,허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최근 중국에서 당시 허균이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책 한 권이 발견됐습니다.
이번 취재를 통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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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1 - <조선시선>발견으로 본 허균;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6 중국 북경에 있는 중국국가도서관.
이 곳에서 최근 주목할만한 책이 발견됐다.
천화숙 SOV.--------------------------
기록으로만 전해져 내려오고 실물이 현존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이다.-----------
도서관 들어가는 PD와 천화숙 5 그동안 없어진 것으로 알려졌던 책이 이 곳에 소중히 보관돼 있었다.
[조선시선] 표지 15 그 책의 이름은 [조선시선].
1600년 중국 명나라 때 출판된 책으로, 여기엔 신라시대부터 조선 선조 때까지
우리나라의 한시 삼백서른두수가 실려있다.
『조선시선/명 오명제 집/1600』 6 책갈피엔 저자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명나라 사람 오명제.
오명제의 서문 보이고 11 오명제는 서문을 통해,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의 일행으로 조선에 갔다가 시를 소개받아 책으로 엮게 됐다고 밝히고 있다.
그에게 시를 소개해준 사람이 다름아닌 허균이었다.
자막 나오면 16 오명제는 허균이 수백편의 시를 술술 암송할만큼 영민했다고 적고있다.
따라서 [조선시선]에 수록된 시 대부분은 허균이 암송해준 것으로 보인다.
황유복 INT.------------------------------
조선의 많은 서적들이 불타버리거나 약탈해 가거나 그런 여건. 또 전쟁환경에서 설사 시골 같은데 책이 있다
하더래도 시를 수집하러 다닐 여유도 없던 시절이었는데 오명제가 이 시집을 편찬할 수 있는 계기가 바로
허균이 그 많은 시들을 암송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명제가 시 수집을 부탁했을 때 허균이 그대로 암송한 시를
적어준 것이다.------------------------------
중앙민족대학 전경 경원대학교와 함께 중국국가도서관에서 [조선시선]을 발견한 기경부 교수.
그는 [조선시선]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여기에서 그는
[조선시선]과 관련한 허균의 역할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기하고 있다.
기경부 교수 INT.--------------------------
여러 시각에서 봤을 때 이 책은 조선에서 출간됐는데, 오명제와 허균이 공동으로 편찬한 것이고
그 가운데 허균의 역할이 더 컸다고
생각한다.------------------------------------
[조선시선] 표지 13 우선 이번에 발견된 [조선시선]이 조선에서 출간됐다는 것이다.
표지에 적힌 '고려간본'이라는 글자가 그 증건데,
그 증거인데 명나라 때만 해도 조선판본을 기록할 때 흔히 '고려본'이라고 했었다.
책 넘기는 10 [조선시선]에 쓰여진 종이와 먹도 명나라 것과는 분명 다른 것이었다.
기경부 INT.------------------------------
[조선시선]의 종이는 명나라 종이와 틀리게 두껍고 색상도 희다. 책을 찍을 때 사용하는 먹도
중국 먹보다 유연하다.-----------------
책 넘기는 10 또 하나는 바로 책의 뒷부분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글자다.
여기엔 '조선장원허균서'라고 쓰여져있다.
기경부 교수 INT.---------------------------
조선장원허균서라고 적혀져 있다. 그러면 이 책의 제일 앞에 있는 (오명제의 서문)외에는 전부 모든 문자가
허균이 직접 필사한 것을 갖고 목각판한 것을 말한다.---------------
조선시선上 페이지 36 이처럼 [조선시선]의 사실상의 편찬자는 허균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최치원, 백결을 비롯한 신라시대 문인으로부터 고려시대 이규보, 정몽주,
조선시대 정도전, 허균과 허난설헌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역대 문인 백여덟의 시가 실려있는 이 [조선시선]에는 허균의 숨결이 들어있는 것이다.
천화숙 INT.-------------------------------
다른 조선의 시들을 모아놓은 책과 비교해 볼 때 조선시선이 손색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시가 실려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허균은 시를 잘 알고 시를 가려뽑는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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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 26 [조선시선]을 통해서 우리나라의 시를 명나라 조정에 알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허균.
그가 명나라 사신을 수시로 맞이하고 조선의 사신으로 명나라에 세 차례 다녀온 것도 바로 이런 탁월한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허균이 오명제에게 준 시 T.S. 15 그런데 [조선시선]에는 특히 관심을 끄는 부분이 있다.
바로 허균이 오명제를 배웅하며 쓴 시. 이 시는 흥미롭게도 한시에 한글토를 달고 있다.
천화숙 INT.-------------------------------
한글 토를 달아준 것은 상당히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는 [홍길동전]이라는 한글소설도 제일 먼저 쓴 사람 아닌가?
그만큼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강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후서> 20 허균의 자긍심은 [조선시선]의 맨 마지막에 있는 <후서>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여기에서 그는 우리문화가 우수성을 언급하고 조선의 문화가 중국과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400년만에 나타난 [조선시선]은 허균이 우리 문화에 자부심을 가지고 중국에까지 인정받은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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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2
# 허균문학비 세트.
강릉에는 이처럼 허균을 기리는 문학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의 탁월한 재능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597년,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면서부터였습니다.
이 때문에 허균은 명나라 사신들을 접대하게 됐고 [조선시선]의 출판을 도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명제를 비롯한 명나라 사신들을 훌륭히 접대한 공로로 허균은 황해도사라는, 비교적 높은 벼슬을 받게 됩니다.
이 때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벼슬살이는 시작됩니다.
일찌감치 조정의 기대주로 주목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허균은 오십 평생 여섯번이나 벼슬에서 쫒겨났습니다.
조선시대 허균만큼 파직과 복직을 거듭한 인물도 드뭅니다.
# MC, [조선왕조실록] 펼쳐 읽는다.
허균이 첫번째 파직된 이유에 대해 선조32년 실록은 이렇게 적고있습니다.
'황해도사 허균은 서울에서 창기들을 데려다가 모아놓고 따로 관아까지 만들었습니다.'
관아에까지 기생을 끌어들였다..
공직자 신분으로 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 뒤에도 허균은 비슷한 이유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립니다.
선조37년 실록에 보면..
'일찍이 강릉 땅에 나갔을 적에는 기생에게 혹하여 그의 어미가 원주에서 죽었는데도 분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았다 해서 두고두고 비난을 받았는데,
모두들 경박하다, 막된 인물이다 하면서 허균을 손가락질했습니다.
이처럼 허균이 조선왕조에서 기피됐던 두 번째 이유는 바로 기생문제였습니다.
도대체 허균은 기생과 어떤 관계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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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2 - 기피이유①:기생과 놀아나는 경박한 인물이다?
국도 TR. (흘리고)
매창묘로 TR. 8 전라북도 부안읍 봉덕리.
이 곳은 일명 매창뜸이라고 한다.
부안사람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인물, 매창이 이 곳에 묻혔기 때문이다.
매창비 틸다운 17 (2~3초 흘리고)
계생, 계랑이라고도 불렸던 여인, 이매창,
그녀의 신분은 기생이었다.
그런데도 부안사람들은 지난 4백년간 자신의 조상 묘를 돌보듯 벌초도하고 묘비도 두 차례나 보수했다.
부안사람들은 왜 이처럼 기생의 무덤을 극진히 보살펴온 것일까?
부안문화원 원장 INT.-----------------------
매창은 한마디로 얘기해서 황진이와 버금가는, 어느 면에서는 황진이를 월등하게 뛰어넘는 유명한 여류문학가
이고 시인이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매창시비 TR. 5 매창은 황진이에 버금갈만큼 아름다운 시를 많이 남긴 기생이었다.
매창시비 틸다운 12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잡고 이별한 님'으로 시작하는 매창의 시는 한때 국어교과서에도
실렸을 만큼 우리에게 친숙하다.
매창의 초상화 틸업 7 매창이 서른일곱살에 요절하자 그녀를 애도하는 시가 지어졌다.
매창을 애도하는 시 (흘리고)
마지막 자막 '..허균작' 보이면 4 이 시를 지은 사람은 허균이었다.
'계생'으로 Z.I. 20 허균의 기록을 보면 서른두살에 처음 매창을 만났다고 한다.
당시 허균은 부안에 출장온 관리였고 매창은 허균의 수청을 드는 기생이었다.
그런데 매창과는 육체적 관계를 피한다.
그 후 두 사람은 10년동안 정신적 연인으로 남았다.
편지내용 자막 보이면 12 이 사실은 그가 매창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있다.
허균은 시를 잘 짓는 매창을 기생이 아닌 친구로 사귀었던 것이다.
조관기행 10 그런데 허균이 가까이 했던 기생은 매창만이 아니었다.
<조관기행>이라는 기행문에 보면
기생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
'낙빈' 기생들 이름 T.S. 15 (이름 나올 때마다) 광주기생 산월, 나주 기생 퇴부, 서울 기생 낙빈, 선래..
이 밖에도 춘랑, 향란, 옥일 등 허균이 출장길에 만난 기생은 한둘이 아니었다.
'서울기생 낙빈이~' 자막 20 여기에서 허균은 몇월몇일에 기생 누구를 만났다는 것부터,
무슨 얘기를 나눴으며 잠자리에서 있었던 일까지 기록했다.
심지어 자신의 방에 들었던 기생이 한 고을에 열두명이었다면서 이를 풍자해 시를 짓기도 했다.
허경진 INT.--------------------------------
허균이 광주에 갔을 때는 한주일 넘게 광산월 이라는 기생을 데리고 출장을 다닌다.
그것도 그 당시에는 용인됐던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많은 관원들이 실제로 그런 일을 하고도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또 그가 기행문에서 기생들과 전부 기록했다는 것도 솔직했기 때문이다.
솔직하다는 게 때로는 경박하다는 비평을 들은 것이다.----------------
죽서루로 TR. 15 이런 허균의 행실은 그의 관직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다.
황해도사 시절에는 서울의 기생을 불러와 관아에서 놀았다고 하여 파직되고 만다.
그러나 그의 자유분방한 행동은 그칠 줄 몰랐다.
기생들 춤추는 F.S. 15 급기야 모친의 장례를 치른지 며칠 지나지않아 기생과 어울리기까지 한 것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지내야했던 당시, 허균의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순암집] 넘겨보는 20 결국 이 사건으로 그는 평생 비난을 받는다.
허균은 총명하고 문장에 능했지만 행동을 절제하지 않았다.
상중에도 고기를 먹고 애를 낳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으며 더러워했다.
허균의 답변 자막 나오면 14 이에 대해 허균은 이렇게 답했다.
남녀의 정욕은 하늘이 주신 것이요, 인륜과 기강을 분별하는 것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높으니 나는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내려주신 본성을 어길 수 없다.
이가원 INT.------------------------------
성에 대해서 절제를 하고 이런 건 성인이 하는 건데. 이를테면 공자라든가.
그런데 성이라는 건 절제를 한다고 하는 건 성인이 말하는 거고 절제를 할 수 없는 건 이건 하늘이 내놓은 거라
이거야. 그러니까 성인보다 하늘이 앞서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그거에 대해서도 그렇게 구속을 받지 말라 이런 거지.----------------------------
기생끼고 노는 양반 풍속도 10 하늘이 내려준 본성에 충실하겠다고 한 허균.
그러나 조선시대는 이런 허균의 솔직함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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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3
# 초당생가 세트.
(MC, 대청마루 탁상에 놓여있던 편지 들어 읽어본다.)
'저는 일찍이 엄한 훈계를 받지 못하고..그래서 제멋대로 방탕하게 굴며..
저도 모르게 경박한 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허균이 쓴 편지로 스스로 경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MC, 편지 놓고 대청마루에서 나오면서)
이 편지에서 허균은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나이차이 많은 형님들과 누님 슬하에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
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허균의 누이는 바로 허난설헌입니다.
스물일곱살에 요절한 조선의 천재 여류시인, 허난설헌.
그런데 허균, 허난설헌 남매 못지않게 허균의 아버지와 두 형도 사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손꼽힙니다.
특히 아버지 초당 허엽은 당시 세력을 떨쳤던 동인의 우두머리로 허균의 가문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학벌과
문벌이 뛰어났습니다.
그런데 허균은 출세가도에서 역행하는 행동을 계속해서 일삼으면서 또 다시 파직되고 맙니다.
# 초당생가 세트 사라지고 기본세트에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의 영정 세트.
자, 여기를 한번 보시죠.
바로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영정인데요,
우리나라 불교계를 대표하는 고승으로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공을 세운 분들입니다.
이들이 허균과 무슨 관계일까 의문이 드는 분들이 계실텐데요, 사실 허균과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외에 다른 학문이나 사상이 설 자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허균은 이런 조선의 규율을 무시하고 승려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허균이 조선왕조에서 기피됐던 또 다른 이유, 그것은 바로 이단에 빠졌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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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3-기피이유②:천한 불교와 천주교를 신봉하는 이단이다?
홍제암 PAN 8 해인사 홍제암.
이 곳에는 허균과 사명당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이 있다.
부도탑과 사명당비 12 1610년 사명당이 이 곳에서 열반하자 제자들은 부도탑과 사명당비를 세우고
허균에게 비문을 의뢰했다.
사명당비 앞 스님과 PD 7 비문에는 허균이 왜 사명당비문을 쓰게 됐는지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스님 SOV.--------------------------------
'불영수유가자'라, 내가 비록 유가의 몸이지만 스님은 불가에 몸을 담고계신 분이시고...
'弟兄之交' T.S. '제형지교'라 형님처럼 모시고 동생처럼 지내는 그런 사이였다.
'지사최심' 스승에 대해서는 내가 제일 많이 알고 있다, 그래서 허균이 비문을 짓게 되지 않았나..----------
사명당 영정 10 당대 불교계의 고승이었던 사명당과 당대 문장가였던 허균은 형제같은 긴밀한 사이로 깊은
교류를 하고있었다.
[사명집] 표지 10 특히 허균에게 불교의 오묘함을 깨닫게 한 사명당은 수시로 허균에게 깊은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허균이 서문을 쓴 사명당의 문집에는 허균의 경박함을 우려하는 시가 수록돼 있다.
'贈許生' 시 자막 나오면 12 사명당은 항상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주위로부터 비난받는 허균을,
형처럼 나무래며 충고하는 시를 지어줬던 것이다.
서산대사 영정 12 뿐만 아니라 사명당의 스승 서산대사도 문집의 서문을 허균에게 부탁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서산대사에게 쓴 편지 12 특히 서산대사는 허균과 나눈 편지에서 허균에게 입산할 것을 권유했다.
이것은 허균의 불교에 대한 관심이 깊었음을 보여준다.
허경진 INT.--------------------------------
허균의 마지막 편지를 보면 내가 벼슬을 마치고 스님께서 요구하는 대로 산에 가서 도를 닦겠다는 구절이 있다.
그 때까지는 나를 재촉하지 말라, 그런 것 보면 스님이 여러번 허균에게 벼슬을 그만두고 산으로 오라는 편지를
보냈던 것 같다.------------------
해인사 18 이들외에도 허균은 당대 많은 승려들과 사귀었다.
성리학이 모든 것을 통제하던 조선시대에 조정의 관리가 불교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런데 허균은 왜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승려들과 사귀며 불교에 빠져들었던 것일까?
장정룡 INT.-------------------------------
3번 유배가고 6번 파직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손에서 불경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평가한 말 중에 '불여세합'이라는 표현을썼다.
나는 세상과 잘 화합하지 못한다. 당시 유교사회가 갖고있던 조갑증에서 불교가 갖고 있던 명상성,
심오함에 매력을 갖지않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삼척동헌 터 PAN 10 결국 허균은 불교로 인해 시련을 겪게 된다.
수안군수에서 파직됐고 1607년엔 삼척부사로 임명됐지만 탄핵을 받고 13일만에 벼슬에서 쫒겨났다.
주춧돌 T.S. 12 그가 관아에 불상을 모시고 불경을 외며 제를 올리는 등 승려와 다름없이 행동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문파관작 페이지 보이면 5 그러나 허균은 불교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문파관작' 자막 13 내 분수 벼슬과는 벌써 멀어졌으니 파면장이 왔다고 내 어찌 근심할 건가.
인생은 천명에 따라 사는 것이니, 돌아가 부처섬길 꿈이나 꾸리라..
[어우야담] 페이지 10 허균의 관심은 불교에 그치지 않았다.
[어우야담]에는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 서적을 들여왔다고 밝히고 있다.
북경 거리에서 PAN하면 성당. 5 그렇다면 허균은 어떻게 이런 서적을 가져왔을까?
성당 입구 15 당시 명나라에는 마테오리치가 1605년에 세운 성당이 있었다.
허균이 세 번째 명나라 사신으로 갔을 때가 1614년. 이 때 허균은 1년간 명나라에 머무른다.
황유복 INT.-------------------------------
여기가 남당인데 160년에 마테오리치가 북경에서 최초로 세운 성당이다. 그런데 허균이 1614년, 1615년에
북경을 다녀갔다. 그러면서 '게12장' 천주교 찬송가를 갖고 갔다.
그럼 아마 여기 와서 구입해 갈 수 밖에 없다.
그 때는 책방같은 데에서 팔 리 없으니까.
아마 허균이 이 남당을 다녀갔으리라--------
성당 내부 20 허균이 천주교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더 이상의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허균이 게십이장을 들여왔다는 사실은 , 그가 조선의 성리할 체제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학문과 사상에
개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허경진 INT.-------------------------------
그 분이 살았던 시대가 17세기 초인데 아직까지 성리학이 최고봉인 시대다.
퇴계 율곡같은 분들이 다 그 분들인데 허균은 성리학 갖고는 그 시대를 규합할 수 없다고 봤다.
그래서 중국 갔을 때도 천주교 책들을 갖고 들어온 것이다.--
북경 유리창 PAN 22 당시 명나라는 새로운 문물의 집산지였다.
그렇기 때문에 허균은 사신으로 내왕하며 명나라로부터 수천권의 책을 조선에 들여온다.
1614년 당시 실록에 보면 허균이 만오천냥의 은을 가지고가 4천여권의 책을 사왔다고 적고있다. 그러나
대부분 이단에 관한 것들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유교반도 허균] 표지 13 조선 유교사회에서 이단이라고 금기시했던 것들과 끝없이 가까이 하고자 했던 허균.
이가원 F.S. 8 해방직후부터 허균을 연구했던 이가원 박사는 이런 허균을 한마디로 '유교반도'라고 규정한다.
이가원 INT.-------------------------------
그 사회가 너무 유교적인.. 지나치게 구속되고 그런 사회를 염증이 나서 벗어나자 이거죠.
그러니까 반유교죠. 그 당시에 반유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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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4
# 홍길동전 세트
'예절의 가르침이 어찌 자유를 얽매리오.
뜨고 가라앉는 것을 다만 천성에다 맡기노라.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을 쓰게, 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
일련의 반유교적인 언행으로 파직되자 허균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이런 시를 지어 응수했습니다.
그 후 허균은 한 해 세 차례 관리들끼리 겨루는 시험에서 세 번 연속 1등을 차지했습니다.
이런 경우는 조선왕조 역사상 극히 드문 일이었다고 합니다.
뛰어난 성적 덕분에 허균은 공주목사라는 자리를 얻게 됩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1년도 채 못 돼 탄핵을 받아 쫒겨났는데,
[홍길동전]을 쓴 시기는 바로 이 무렵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 '호부호형' 대목 나오고 MC 읽는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를 수 없다..
아마 [홍길동전]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대목일 것입니다.
그만큼 홍길동의 처지를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홍길동전]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서자라는 특수한 신분에 대해 알게 됐을 겁니다.
첩이 낳은 자식은 서자라 하여 양반사회에 끼일 수 없도록 제도적으로 막은 것이죠.
따라서 첩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서자는 평생 벼슬길이 막힌 채 시대를 원망하며 살아야했습니다.
[홍길동전]은 바로 이런 서자차별문제를 소재로 한 소설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허균은 명문 사대부 가문의 적자 출신입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서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게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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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4-기피이유③:서자들의 후견인이다?
정사암 터로 TR. 7 (2~3초 흘리고) 전북 부안의 선개골-
허균은 공주목사에서 쫒겨난 뒤 이 곳에 은둔하며 여러 편의 소설을 썼다.
정사암 터로 PAN 8 당시 그가 머물렀다는 곳이 바로 정사암이다.
부안문화원원장 SOV.------------------------
부안에 살았던 판관 김청이 정사암을 지어놓고 허균에게 통지를 내서 정사암이 낙성이 되었으니 이리 오니라,
이렇게 초청했다. 초청을 받아서 허균이 친구 셋과 더불어 이 정사암에 찾아온다.-----------------------
<정사암-홍길동전의 집필지> 10 이 곳 정사암에서 허균은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허균은 홍길동과 같은 처지의 서자와 긴밀하게 지내고 있었다!
공주관아 10 정사암에 동행했던 이재영도 허균이 공주목사시절부터 어울렸던 인물이었다.
허균은 공주목사가 되자마자 이재영에게 편지를 보내 관아에 불러들였다.
이재영에게 편지 내용 자막 10 허균은 고을 수령이라는 직책을 이용하여 서자와 그의 부모까지 거둬들였던
것이다.
당시 공주관아에 초청된 서자는 이재영뿐만이 아니었다.
실록 7 심우영과 윤계영도 식객으로 맞아들이자 주변에서는 그들 이름의 끝자 '영'을 빗대어
삼영을 두었다고 비난했다.
이이화 18 일찌감치 허균에 대해 연구해온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 그는 조선시대 명문 사대부 집안의 적자출신인
허균이 자신과 신분이 다른 서자들에게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이화 INT.-------------------------------
요즘도 그렇잖습니까? 재벌들은 재벌들하고만 어울리고 공직자들은 공직자들 자식끼리 어울리는 경우가 많은데
허균은 엉뚱하게 서자들과 어울려 지냈습니다...
이만큼 서얼중인들과 가깝게 지냈던 것이 오히려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손곡시비로 TR 8 허균이 서자문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스승 손곡 이달을 만나면서부터 비롯됐다.
PAN 손곡시비 14 조선시대에 이태백에 비유될만큼 뛰어난 시인 이달.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서자라는 신분 때문에 평생 벼슬을 하지 못하고 불우한 삶을 살아야만 했다.
손곡집 18 자신에게 시를 가르쳐준 스승을 위해 허균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시집을 엮어주는 것이었다.
허균은 이달을 통해서 서자의 아픔을 일찍부터 느낄 수 있었다.
장정룡 INT.---------------------------------
자연스럽게 손곡선생이 서자로서의 울분을 여러 가지로 토했고 난설헌 누님과 함께 시를 배우면서 그 분의 사상을
많이 배웠던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조선시대가 갖고 있었던 서얼금고법에 의해서 인재를 버리고 인재가 제대로 등용이 못되는 그런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정도전 영정 12 서자를 차별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 태종 때부터였다.
자신의 정적이었던 정도전을 제거한 이방원은 정도전이 서자였다는 이유로 그 때부터 서자들의 벼슬길을 막았다.
경국대전 10 그 후 성종 때에는 서자들의 차별이 더욱 강화돼 서자들은 자자손손 대대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됐다.
임진왜란 그림 30 임진왜란은 서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한다.
전쟁에 서자들을 이용할 필요가 있다고 절감한 조정은 서자들도 일정량의 재물을 바치면 벼슬을 주는 시책을 편다.
그러나 그것도 전쟁기간동안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서얼금고는 다시 강화되고 그나마 벼슬길에 올랐던 서자들은 다시 자리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전쟁에 임시방편으로 이용됐다는 것을 안 서자들은 분노하고 만다.
이이화 INT.-------------------------------
임진왜란을 맞이해서 국가의 재정이 텅텅 비어 있으니까 쌀 몇 섬씩 받아서 이들의 길을 열어준 적도 있고.
서얼뿐 아니라 중인 무사급에게도 이런 방법을 썼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나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던 것이죠.
그래서 많은 서자들이 사회 불만세력으로 등장해서 조선후기에는 여러 변혁사상, 변혁운동과 손을 잡고 행동을
벌였습니다.---------------------------
칠서 이미지 8 칠서사건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발생됐다.
서양갑을 비롯한 일곱명의 서자들이 거사를 도모한 것이다.
실록 12 1613년 당시 광해군 실록에 따르면 서자들은 무력으로 궁궐을 장악해서 광해군을 제거하고 스스로
벼슬자리에 오르려 했다고 한다.
이가원 INT.--------------------------------
소양강을 중심으로 해서 그 사람들 파가 모두 모여서 그 당시 유교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거다.
심지어 소양강에서 연결해서 문경가는 조령에까지 아지트도 만들고. ----------------
솔밭 TR. 12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돼 모두 처형됐다. 그런데 이 칠서들과 허균은 아주 특별한 관계
였다.
실록 '기준격의 상소문' 15 특히 공주목사 시절 가까이 지낸 심우영과 칠서의 두목 서양갑과의 관계 때문에
허균은 칠서사건의 배후로 의심받게 된다.
이이화 선생 INT.---------------------------
허균이 젊을 적부터 이들과 어울리며 친구로써 살았으니까 어떤 면에서는 당연히 주목받게 돼있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단순하게 어울린 정도가 아니라 맨날 머리 맞대고 그랬으니까 변란,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었겠
느냐 그런 면도 있었죠.-------------
[홍길동전] 페이지 10 허균이 칠서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였다는 것은 소설 [홍길동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율도왕' 으로 Z.I. 10 칠서들은 무력을 동원해 벼슬을 얻으려 했는데 홍길동 역시 도적떼를 이끌고 무력으로
율도국의 왕에까지 오른다.
'문경'으로 Z.I. 15 또한 칠서들이 주로 활동했던 문경새재는[홍길동전]에서 나오는 활빈당의 주요무대이기도
하다.
허경진 INT.--------------------------------
홍길동전을 두 가지로 추측합니다. 정확하게 쓰여진 연대가 안나왔지만 허균이 그들의 거사가 실패한 것을 보고
그것을 소재로 썼다고도 볼 수 있구요,
또 하나는 거사 준비하는 친구들을 위해 격려하기 위해 홍길동전을 썼다고도 생각합니다.-------------
[홍길동전] 14 이처럼 [홍길동전]은 허균과 칠서들이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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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5
# 창덕궁 세트
일곱명의 서자, 즉 칠서들이 일으킨 사건은 왕조에서 보면 반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칠서는 물론이고 이 사건의 관련자로 밝혀지면 누구든지 처형되거나 유배됐습니다.
그가 누구보다 칠서들과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은 그들과 나눈 편지를 비롯해 여러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허균이 사건에 연루되지 않았던 이유는 칠서들이 끝까지 그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신변의 위협이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결국 허균은 당시 최고 실력자인 이이첨에게 벼슬을 부탁하면서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불안하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가 생전에 아꼈던 부인 인목대비를 눈엣가시로 여겼습니다.
허균은 광해군의 이런 심정을 대신해서 그 전과는 다르게 인목대비를 폐출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 시작했습
니다.
이것을 계기로 허균은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허균의 변신에 대해서는 지금도 의견이 분분합니다.
단지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권력에 아부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종의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기
위해 광해군의 신임을 얻는 제스츄어를 취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칠서사건이 있은지 5년 뒤 허균은 비극적인 죽음을 맞습니다.
바로 조정을 뒤엎으려는 역모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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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5-기피이유④:이씨왕조를 뒤엎으려 했다?
용인문화원장 INT.--------------------------
이 분이 바로 초당 허엽선생 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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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씨네 묘로 가는 PD와 원장 경기도 용인에는 허균의 아버지 허엽과 그 자손들의 묘가 있다.
허엽의 묘 10 허균의 아버지 초당 허엽은 동인의 우두머리로 경상도관찰사라는 높은 벼슬까지 지냈다.
깨진 흔적 T.S. 그런데 허엽의 비석에는 두 동강났던 흔적이 뚜렷하다.
누군가 사후에 인위적으로 부순 것으로 보인다.
용인문화원장 INT.--------------------------
아들이 역적으로 몰려서 화가 부친 분묘에까지 미치는 경우다. 비록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조상에 대한 비석
이라든지 깨버리는 경우가 있다. 심지어는 파묘를 한다든지 부관참시하는 형벌도 받는 경우가 있다.---------
허균묘 Z.I. 13 지금 있는 허균의 묘는 가묘다.
허균은 역적으로 처형돼 시신조차 수습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 걸까?
실록 10 허균이 처형된 그 해,
실록에는 무려 그의 이름이 백여든다섯건 등장한다. 허균으로 인해 거의 매일 조정이 들끓었던 것이다.
창덕궁 3 이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은 기준격의 비밀상소였다.
'기준격의 상소' 자막 7 허균은 역적의 뿌리로 광해군을 내쫒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면서 낱낱이 폭로한
것이다.
인정전 PAN 6 당시는 곧 난리가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으로 민심이 흉흉한 상태였다.
'남대문 흉서'자막 6 남대문에 광해군을 비방하는 흉서가 붙자 허균이 지목된다.
'김개' 자막 9 결국 허균은 투옥되고 마는데, 그를 따르던 부하들이 난동을 부렸다고 한다.
창덕궁 인정전 국청 10 그러는 과정에서 허균의 심복들이 줄줄이 잡혀 들어가면서 허균에게 불리한 증언들이
나오게 된다.
'승군과 포수..'자막 6 허균이 궁궐을 치기 위해 승군을 조직했다, 이들을 이끌고 거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의창군..' 자막 10 처음에는 의창군을 추대하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허균 스스로 왕이 되려고 했다...
망나니 11 결국 1618년 8월26일 허균은 역모죄로 능지처참됐다. 심복들이 자백한지 삼일만에 기다렸다는 듯
허균을 처형한 것이다.
나무 사이 13 허균은 과연 혁명을 계획했던 것일까?
실제로 이씨왕조를 뒤집으려 했던 것일까?
이 부분은 아직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허균을 제거하는데 급급해서 판결문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이화 INT.--------------------------------
판결문을 제대로 작성해 처형된 것이 아니라 신문 도중에 사형시켰다 이런 뜻이다...
아무튼 허균이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에 판결문없이 처형했다는, 그런 역사적 비난도 받고 있어요.----------
허균묘비 18 5년 뒤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 당시 역모죄로 처형됐던 인물들이 대부분 복권된다
그러나 허균만큼은 예외였다.
그리고 조선왕조가 끝날 때까지 허균은 역적으로 남아있어야 했다. 왜 그랬을까?
이이화 INT.-------------------------------
정몽주의 경우는 고려를 받드는 충신인데 조선에서도 충신으로 바꿔준 것이다. 그게 유교이념이 갖고 있는
특성이죠. 허균의 경우에는 정면으로 유교에 완전한 반대.
그러니까 정몽주와는 다르다 볼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념면으로도 인정해줄 수 없다 이거죠.
그리고 이게 당쟁이 아니다 말이죠. 단순한 개혁적 차원에서 당쟁에 희생된 것이 아니고 계획적으로 일을 벌였
다는 그런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에 허균은 복권을 시키지 않았습니다.-------------
후손 집으로 트래킹. 10 허균이 역적으로 죽자 그의 가족들은 처형되거나 뿔뿔이 흩어졌다.
멸문지화를 당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허균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가첩 갖고오는 후손. (흘리고)
족보 펼치고 가첩 보이면 8 이들은 족보를 정리하다 우연히 나온 가첩에서 허균이 직계조상이라는 사실을 발견
했다는 것이다.
가첩 보며.. 교산공파 후손 SOV.------------------------
자는 단보고 호는 교산, 또는 성소라 하셨다. 중시에 합격했다. 원직은 참찬. 말년 무오에 필화를 당하셨다.------
'조령 넘어..' 자막 10 이 가첩에 따르면 당시 허균의 아들은 허균이 처형당한 무오년 그 해에
조령을 넘어 영천으로 숨었고 후에 울산에 가서 정착했다고 한다.
'봉례공파에 두탁' 자막 15 그러나 허균이 계속 복권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남의 가문에 들어가 허균의 직계
후손임을 숨겨왔다고 한다.
교산공파 후손 INT.------------------------
3대 구족을 멸할 죄목이니까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차피 그대로는 안되는 거다.
교산의 아들이라고 해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고, 그러니까 봉례공으로 끼어서 우리 아버지는 봉례공이다, 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설명하는 후손 F.S. 7 살아남기 위해 300년 이상 남의 족보에 끼어, 큰소리 한번 낼 수 없었던 이들.
펼쳐진 가첩 10 이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 가첩은 허균이 얼마나 오랫동안 조선왕조에서 기피돼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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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6
# 허균 묘 세트에서
허균이 과연 조선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려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허균만큼은 조선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위험한 인물로 여전히 기피됐고 끝내 복권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허균이 유교이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입장을 보여 조정에 허균의 적이 많이 있었던 데다가,
계획적으로 일을 도모했다는 인식이 사회저변에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허균과 함께 역모죄로 처벌받은 자들은 서자와 승려, 무사, 중인 등 모두 낮은 신분계층의 사람들이었습
니다.
이들이 손잡고 역모를 주도했다는 것은 왕조체제를 거부하는 정면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허균은 어떤 사회를 꿈꿨던 것일까요?
그것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허균의 문집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당시 역적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허균의 글은 모두 불태워질 뻔 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일부가 남았던 것입니다.
이 문집에는 조선왕조가 왜 그토록 오랫동안 허균을 위험하고 불손한 인물로 치부했는지 그 이유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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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CR6- 역적 허균:그가 꿈꾼 세상
이필진 후손 집 마루 F.S. 16 허균은 처형되기 바로 직전 그자신의 가문이 망할 것으로 예상한 듯,
자신의 사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사위 이사성의 아들, 즉 외손자 이필진에게 자신의 문집을 남겼다.
이필진 후손 SOV.---------------------------
허균선생의 사위가 이사성 할아버지인데 이 할아버지의 자제이신, 말하자면 허균선생의 외손자인 필자 진,
자제분을 통해서 직접 문집이 전수가 된 것 같다.---------------
연대 도서관 들어가는 4 현재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이 책의 필사본이 보관돼 있다.
진열장의 [성소부부고] 10 시,소설,논설,기행문 등 여덟권으로 구성된 [성소부부고]에는 허균의 생각이 고스
란히 담겨져 있다.
'외손 이필진' 8 이필진은 발문에서 허균이 죽은지 50년이 지나서야 겨우 주변 사람들에게 공개한다고 적고
있다.
이후 이 책은 몇몇 선비들 사이에 비밀리에 돌려 읽혀졌다.
11권 논부 페이지 넘기는 7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논설부분.
허균은 여기에서 조선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관론> 18 <관론>에서는 조선의 행정개혁에 대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중국에 비해 조선에는 관원들이 너무 많아 권한만 분산되고 녹만 허비된다고 하면서,
먼저 중앙에 집중된 정부기구와 관원들의 수부터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경진 INT.--------------------------------
임금의 술과 음식을 맡은 관청의 광록시라는 곳이 있다. 이 관청 하나면 되는데 실제로는 내자시, 내섬시,
예빈시..일곱 관청이 임금의 음식을 맡는다.
그러니까 그만큼 건물도 많아야 하고 관원도 많아야 하고 중복되고 예산이 낭비된다는 거다.
요즘 표현으로 한다면 400년 전에 벌써 구조조정을 주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재론> 25 <유재론>에서는 신분제도 철폐에 대한 그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재론>을 통해 그는 서자라고 등용하지 않고, 어머니가 개가했다고 해서 그 자식의 재능을
쓰지않는 조선의 제도를 개탄했다.
하늘이 재주를 낼 때 누구에게나 고르게 냈는데 남녀와 신분을 차별하는 것은 있을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조선시선] 20 중국국가도서관에서 발견된 [조선시선]에서도 허균의 이런 생각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내노라하는 문인들의 시를 소개한 [조선시선]에, 첩이나 기생의 시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천화숙 INT.---------------------------------
[조선시선]에는 신라부터 조선까지 대표적인 문인들의 시가 실려있는데 그 속에 놀랍게도 누구의 첩이라든지,
처라든지 명칭을 갖고 시가 실려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것은 허균이 신분에 관계없이 재능을 인정해주는
의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호민론> 25 허균사상의 핵심은 바로 <호민론>이다.
그는 <호민론>에서 허균천하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오직 백성뿐이다,
정치의 목적은 백성을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 만일 임금과 지배세력이 백성을 업신여기고 착취하면,
궁예나 견훤같은 호민이 나와서 선동하고,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이화 INT.--------------------------------
우리가 호민을 주시해야 되지 않느냐, 위정자들은 참으로 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들의 불만이 무엇인가 살펴봐야 한다는 그런 뜻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도 없고 감히 그런 글을 쓰지 못한다. 그런데 허균은 호민론에서 그런 변혁적인
민중의 성향을 분석해서 썼던 것이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명문으로 꼽힌다. ---------------------
[홍길동전] 15 [홍길동전]에 허균의 이런 개혁사상이 가장 잘 드러나있다.
허균은 홍길동이란 호민을 통해 신분 차별이 없는 사회를 꿈꿨던 것이다.
장정룡 INT.--------------------------------
역적의 누명을 썼습니다만 교산선생이 그런 폐단을 해소해보려고 노력했던 점들이 어떻게 보면 역부족이 아니
었나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런 분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400년이 지난 새로운 평등의 사회, 개혁의 사회를 맞고있다고 보는
것이거든요. 그런 씨뿌림의 작용, 노고가 없었다면 이만큼 나올수도 발전될 수도 없었지 않을까..----------
하늘에서 마을로 PAN 15 강릉시 교산은 산세가 이무기를 닮았다 해서
이무기 蛟자, 교산이다.
허균은 이 곳에 머무르면서 이 곳 지명을 따서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고 지었다.
교산시비 T.S. 12 교산 허균.
그는 당대 최고의 개혁적 인물 이었지만, 조선왕조에서 끝까지 배척됐다.
PAN해서 교문암 25 교산 바로 앞 바닷가에는 이무기가 떠나면서 두 동강 냈다는 전설의 교문암이 있다.
바위 밑에 엎드려 때를 기다렸지만 끝내 용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는 이무기. 허균은 시대를 앞서가다 좌절당한
이무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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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7
# 교문암 세트.
자신을 세상에 맞추는 대신, 세상을 자신에 맞게 고치려고 했던 허균.
그는 세상과 잘 화합하지 못하는 자신을 일컬어 '불여세합'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습니다.
'불여세합'!
허균은 성리학으로 획일화된 사회에 반발해서 사상과 행동의 자유를 추구했다는 이유로 조선에서 거부됐습
니다.
조선사회의 문제점을 들추고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많았습니다.그러나 허균처럼 소외된 자들과 호흡하면서
실제로 행동까지 한 사람은 드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허균에게서 평등의 씨앗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내내 천지간의 괴물이요, 개 돼지와 같은 짐승이라며 극단적인 평가를 받았던 허균.
허균은 비전을 가진 인물이 시대를 앞당기려 한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왜 그렇게 필요한 일이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