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주완 시집 /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시집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김주완
뭇 발들이 오가고
바람과 구름도 드나들었다
때로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손에 들려서 지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순한 신발도 흔적을 남기면서
갔다
닳아도 닳아도
입묵入墨 자국, 살 속으로 파고들어
족보처럼 꿈틀거리는 저 실핏줄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그늘의 정체를 보았다 1
김주완
회화나무 그늘에서 보았다, 그림자는 어둠이 아니라 목도장 자국인 것을, 머무르지 않는 빛이 땅에 찍어두는 도장, 오래된 도장에는 귀가 떨러져 나간 상처가 있고, 회화나무 그늘에는 듬성듬성 얼룩이 있다. 상처 같은 얼룩들이 설렁설렁 옮겨 앉는다, 몸통 큰 그늘의 다리가 짧다, 그러나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 있어 콩콩 외발뛰기를 하는 그늘의 태생은 창세기이다.
어머니 품은 그늘져서 아늑했다, 젖내 배인 어머니의 가슴앓이 아늘아늘 터서 얼룩졌다. 형에게서 내게로 옮겨온 그늘, 불안한 내 생을 버티어준 그늘
옮겨가는 것은그늘이 아니라 그늘의 흔적이다., 생전이든 사후든 어머니의 그늘은 늘 거기에 있었다, 회화나무 그늘처럼 그늘이 그늘이라고 명명된 이유가 그것이다, 그늘의 키가 작아졌다가 길어져진다, 흐리거나 비 오는 날엔 회화나무 그늘이 사라진다, 젖 뗄 때 가슴에 바른 어머니의 금계랍에선 젖내가 사라졌다, 사라져도 없어진 게 아니다, 그렇게 있는 것이다, 그늘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나이테가 없는 그늘의 단면, 아득한 졸음이 거기로 쏟아진다, 그렇게
돌부리
김주완
뾰족이 내민 돌부리는
사방을 향해 적의를 내뿜고 있다
누구든 와서 그에게 걸리면
살기 띈 눈을 치뜨고
순식간에 상대방을 쓰러뜨린다
얼굴이나 팔꿈치 혹은 무르팍
어디든 가리지 않고 생채기를 낸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일순에 무너지는 황당한 몰락,
그러나 돌부리는 멀쩡하다
놈의 뿌리가
굳건하게 땅속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돌부리를 지켜주는
돌의 뿌리
땅으로 기다 1
김주완
땅강아지는 땅 속에서 산다 넓적한 앞다리로 땅을 파서 흙집을 만들고 눅눅한 곳에서 잠을 잔다 부화한 애벌레는 알껍질을 아작아작 씹어먹으면서 겨울을 난다 눈이 부셔 낮에는 활동하지 않는다 해가 지면 흙집에서 기어나와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둠에 흥분하여 두 세 시간 날아다니기도 한다 햇빛보다는 약한 불빛, 시력에 딱 알맞은 거기로 날아가 순식간에 온몸을 덥히고자 한다 그러나 하얗게 부딪쳐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입기도 한다 온몸에 돋은 털을 벌벌 떨면서 땅으로 떨어져 실신을 한다 버둥거리다가 생을 마감하는 수도 있다
― 알맞게 보인 빛은 알맞지 않았다
강아지도 아니면서 강아지라는 이름을 얻은 것만도 감지덕지하며 그냥 흙집에서 살거나 두엄더미 근처에서 땅으로 길 것이지 다 늦은 시간에 날기는 왜 날았는지 몰라
― 땅으로 기는 놈은 기어야 한다
잠자리 3 - 교미
김주완
짝짓기를 하기 전에 잠자리는 수컷의 꼬리가 암컷의 목덜미를 부여잡고 물가를 저공비행한다 수면 위를 퐁퐁 뛰면서 즐기기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낚아챈 두 개의 개체가 일직선이 되어 편안한 동질감을 맛보는 시간이다 대를 이어 자기를 남길 곳을 함께 찾는 공중 탐색이다 뜻을 합하는 교감交感이다
본격적인 짝짓기는 수련잎 위나 풀잎 줄기에 자리 잡으면서 시작된다 먼저 다리를 구부리고 굳건히 자세를 잡은 수컷이 암컷의 목덜미를 움켜쥔 꼬리로 상대방에게 신호를 보낸다 암컷은 앞가슴마디를 벌려 세 쌍의 다리로 수컷의 꼬리를 끌어안고 등을 최대한으로 둥글게 구부린 후 뒤집혀진 온몸이 허공에 뜬 채로 꼬리 끝의 생식기를 수컷의 배에 있는 생식기에 들이댄다 말 그대로 꼬리와 꼬리가 둥글게 이어지는 교미交尾이다 변형되어 더욱 아름다운 하트 모양이 된다 공중급유를 하는 항공기의 파이프처럼 연결된 꼬리와 꼬리가 파르르 떨린다 생명의 벼름이며 교류交流이다 사랑의 완성인 교미의 떨림은 한참 동안 파문으로 번져나간다 먼 산이 가볍게 흔들린다
법열에 떠는 성스러운 짝짓기 의식이 끝나고 나면 암컷은 충만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생식물이나 물속에 알을 낳는다 쏟아내 듯 줄줄 알을 낳는다 그리고는 금방 죽고 만다 할 일을 다한 생生의 장렬한 종지부, 영원한 잠자리에 드는 잠자리, 온 데로 돌아간다
꽃과 열매의 거리
김주완
바다 아닌 곳, 안개 끼지 않은 앞길이 없다는 걸 알아
그럼…, 바다엔 늘 안개가 끼어 있지
기상 위성은 밤과 구름을 투시하여 지상으로 통신을 보내오지만
출항계에 찍히는 스탬프 그늘에는 늘 해신海神 부적이 숨어 있어
지금은 닻을 내리고 정박하는 수밖에 없지
지뢰처럼 터져 비산할 한 치 앞의 암초를 분별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조류潮流는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갈 거야
바다 깊은 아래서 바람은 불고
좌초는 우리의 선택을 넘어서 있어
바다의 생애가 훈증 너머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아야 해
지연紙鳶처럼 펄럭이며 따라오던 바닷새는 모두 어디로 갔는지
수평선과 분분한 섬들이 사라지고 외로움의 그늘만 연기처럼 남았다
선수船首가 지워지고 사방 분간이 지워졌다, 자침磁針이 흔들리는 나침반
때 아닌 곳에서 우두커니 서 버린 시간
정적은 엄마가 보이지 않는 오후의 대청처럼 무서워
등대는 맑은 밤에나 소용에 닿는 불빛을 내지 달빛이나 별빛은 모두 솜이불 속으로 들어가 묻혀 버렸어 혹등고래의 혹 같은 돔을 뒤집어쓴 월드컵 경기장 백 미터 트랙에 땅강아지 한 마리 엎드려 있는지도 몰라 빗살처럼 하얀 수염의 방향을 잡아주던 북두칠성이 침몰했겠지 아무리 날아올라도 이미 그건 퇴화하는 날개일 뿐이야 해안은 이미 무너졌어
너의 옆엔 지금 너밖에 없어
우리가 너의 안개를 벗겨 줄 순 없어
안개 속에 내일이 있다는 건 시간을 건축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환상이야 네가 내일 살아 있다면 그것은 내일이 아니라 안개 낀 오늘인 거야 설령 내일이 실제로 있으면 뭐 해 네가 거기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걸 안개 속의 항해잖아
정박에 안간힘을 쓸 필요는 없어
출근길의 지하철 승강장처럼 우리는 모두 떠밀려 가는 거야
기껏 오늘에서 오늘로 가는 거야, 거기서 돌아오는 거야
기도는 안개 너머로 날려 보내는 종이비행기 같아
축축이 젖어서 내려앉은 자존심이 입 다물고 소리 내는 복화술이야
해무로 밀봉된 바다에서는 모든 일이 다 부질없는 짓이지
봄꽃 한 송이 피는 일은 곧 봄꽃 한 송이 지는 일인 거지, 뭐
제비꽃 1
김주완
제비꽃 피어도
제비는 오지 않는다
파르르,
배신감에 떨리는
자줏빛 얼굴
바람이 끈이다
김주완
엷은 웃음, 웃을 만큼 웃고 났는가 생의 절정에서 벚나무 가지를 떠난 꽃잎들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새잎 나올 무렵, 가장 아름다울 때 떠난 저들은 스스로 처할 자리를 안다 낮고 구석진 곳, 별리의 잔해가 떠도는 거기, 봄밤 명지바람에 여생을 의탁한 것이다 높은 가지와 낮은 꽃잎 사이, 하르르 나르는 꽃잎과 꽃잎 사이, 구르는 꽃잎과 쌓이는 꽃잎 사이, 거기 부드러운 바람이 한 올씩 묶여 있다 그랬구나, 낙화의 실마리는 바람이었구나 나비를 몰고 다니는 바람이 끈이다 곱고 감미로운 쫀드기 같은 끈이다 저 끈, 봄비 내려도 녹지 않을 점성粘性 있다
우산 1
김주완
붉은 꽃무늬 우산 하나 가지고 싶네
떨어지는 것은 떨어지는 대로 흘려보내고
남은 빗방울 몇 개 굵은 구슬처럼 달고
무지개거나 뭉게구름이거나 그런 것을 생각하는
비온 후의 목단 꽃잎 같은 누나
책가방 들고 우산 안으로 들어올 것이네
버짐 같은 물구덩이를 피해
발아래 굵은 지렁이 꾸물거리고 아릿한 흙내 사이
종아리 흠뻑 젖어도 좋으네
쇄골 위에 얹힌 그녀의 두 갈래 땋은 머리채
익은 머루처럼 까맣게 반짝이면 되네
비오는 날은 좋아
굵은 장대비 오는 날, 길갓집 양철지붕 부서져라 두드리는
빗소리 요란한 날은 더 좋아
싸한 토마토 잎 냄새가 났어, 포플린 블라우스 어깨에서
오래 머물고 싶은 향기 피었지
푸른 나뭇잎 같은 날개가 돋아 새가 되는 그녀를 보며
나는 비오는 날에 중독되었어
붉은 꽃무늬 우산 하나 가지고 싶어
오래
펼쳐 들지 않고 고이고이 접어 둘 것이야
아름다운 슬픔
김주완
꽃을 본다
만개한 꽃의 슬픔을 본다
앉은뱅이, 앉은뱅이
제 자리에 붙잡혀서 피는 꽃
바람이 와서 자주 흔들고 가지만
따라 나서지 못하는 꽃은 그저, 거기 서서
슬프게 몸을 떤다
자유를 꿈꾸는 낮은 신음, 감당할 수 없는
신열로 꽃은 속에서부터 몸부림치며 피고
춤, 춤추는 슬픔은 아름답다,고 우리는 명명한다
절정은 소실점이다
돌아앉아 흘리는 눈물 사이로 보이는
까마득한 소망의 증발 지점이다
남남으로 있는 모래알처럼 말라 있는 것이 아니라
수챗가에 선 분꽃은 발이 젖어 있어 꽃을 피운다
무릇, 만개한 꽃의 슬픔에는 오래 된 물기가 있다
물기에 젖어 있는 모든 것은 아름다운 법,
슬픔의 찬란한 물방울은
저만큼 밀어내 놓고 보아야 반짝인다, 투명해진다
꽃의 만개는 기쁨이 아니라 슬픔이다
처연하게 아름다운 슬픔, 슬픔으로 보인다
불길
김주완
사루비아 꽃처럼
타오를 수 있을 때 타올라라
살아있으니까 불타는 것이다
마당에서도 훨훨 타오르고
부엌에서도 화르륵 타올라라
밤의 상수리나무 밑에서도 불길은 인다
한적한 도로변 자동차 안에서도
불길 반짝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불똥이 튀어 올라 허공을 나르면 고추잠자리가 된다
하늘 높이 올라 머무는 가장 가벼운 눈물이 된다
하느님은 자상하시다
너무 거센 불길이 일면 물을 뿌리시는 하느님
숨 돌릴 틈새가 세상에는 있다
불타다 지치면 해바라기처럼 고개 숙이면 된다
타오를 수 있을 때 타올라라
초록의 바다에서 불타고 있는 석류꽃처럼
맹렬하게, 망설임 없이 타올라라
살아있으니까 불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불탈 시간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청로샘
김주완
왜관 구장터 쯤에 청로샘이 있었지
벽이 트인 사각의 양철지붕 천정에 녹슨 도르래가 걸리고
물이끼 축축한 돌벽 안, 보이지 않는 시커먼 바닥에서
줄에 매달린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렸지
동짓달 김장 담그는 날이나 장 담는 정월이면
하루 종일 물지개를 지던 어린 내가 있었지
저고리 섶 불룩하던 누나들 머리채 위에서
찌르륵 찌르륵 흔들리며 울어대던 도르래 소리, 정겹게
푸른 물빛에 녹아들던 젊은 웃음들
더러 투명하게 아늘거리는 물벌레가 따라 올라왔지만
궁해도 맑고 신나는 날들이 축축하게 불끈거리던
왜관 구장터 쯤에 청로샘이 있었지
나들목
김주완
거기, 줄장미가 있었네
도닥도닥 봄비 내리는데
방호벽 위 철망 가득, 초록
물감이 마구마구 기어오르고 있었네
검자줏빛 설운 입술들 소복하게
폐지처럼 떨어져 젖고 있는
경부고속도로 왜관IC 출구
흑인병사가 운전하는 진초록빛 군용트럭을 타고
오래전에 빠져나간 기지촌의 여인들
말간 앞가슴 깊이 팬 장밋빛 원피스를 입고
양담배를 쉼 없이 피우며 떠난 그녀들
아무도 후일담을 모르네
굴뚝에서 갓 나온 족제비 같은 승용차들, 매끄럽게 드나드는
그곳 언덕바지에
하얀 충혼탑이 산정의 고사목처럼 서 있는데
며칠 전엔 이팝꽃이 만발했는데
지금은 공사 중
덧씌우기 포장을 하고 있는, 거기
방울방울 빗방울은
왜
연한 가시 끝에 집착하는지
가을안개가 지나는 왜관 점경
김주완
강을 품고 있는 이 도시엔 안개경보가 자주 내린다
말발굽 소리도 없이 야음을 틈타 도강한 기마군단의
젖은 갈기 사이로 뿜어내는 말馬들의 자욱한 숨결이
순식간에 도시를 덮어버리면
안개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모래알을 씹는 듯한 이름, 왜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혀에 박힌 생선가시 같은
담장 높은 캠프캐럴이 궁금해도 어쩔 수 없다
격전지 자고산과 구철교는 잠시 추안거秋安居에 들어간다
웃개와 아랫개, 갱빈에서는
맨발로 나선 사람들이, 사라진 과수원 길로
흘러내린 날들을 버려둔 채 달려가고 있을까
자갈이 뒹구는 비포장 도로 위로
덜컹덜컹 끌려오는 소달구지 소리가 들린다
구장터 쯤에서 날아오른 장꾼들의 우렁우렁 말소리가
안개 속으로 녹아내린다,
안개가 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정오쯤 되자
여우골에서 수도원 앞으로 뚫린 새길의 은행나무
줄지은 가로수가 샛노랗게 물들었다
안개 속에서 이루어진 은밀한 채색이다
금방 벗기 위하여 차려입은 곱디고운 성장盛裝,
노랗게 질린 얼굴로 떠나는 모습은 슬프다
순수를 향하는 눈부신 길목
떨어지기 직전의 자태는 그러나 성스럽다
밤실 사람들의 밤 수확은 끝이 나고
숲데미산의 숲 그늘은 가벼워졌을까
아카시아꽃 1
김주완
아카시아 나무껍질은 할머니 손등 같다
흙먼지 풀풀 날리는 멀건 언덕에서
땅 밑으로 질기게 뿌리 벋으며
모진 생명, 바람 앞에 마주 서는 강단剛斷,
홈실할매는 나이 스물다섯에 홀로 되었다 무오년戊午年을 휩쓴 스페인 독감으로 남편과 시어머니를 하루 사이로 먼저 보내고 4대 독자 한 살배기 외아들과 시아버지, 달랑 세 식구만 남아 쇠락하는 가문을 붙들고 버텼다 장하게도 꼬장꼬장 일으켜 세웠다 여든 해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시신을 염습할 때 꼬부라진 등뼈에서는 뚜둑뚜둑 소리가 났다 결빙된 고초가 구슬처럼 부서지는 소리였다 조선환여승람 이십삼 쪽에 효부 이 씨로 올라 아직까지 살아있는 홈실할매,
힘이 들었는가, 무겁게 늘어져 있는 아카시아 꽃 주저리, 그러나 무성한 밀원 이루고 있다 줄기 벌고 가지 벋는 자손들, 할머니의 결기와 노고가 저리 새하얀 꽃초롱 향초롱으로 오목조목 달린 것이다 멀리 가는 향 자욱하게 쏟아 놓는 것이다
갈피끈
김주완
그가 떠나면서 보내온 책
닳은 자주색 가죽 표지의 성경, 가운데 보다 조금 앞과 뒤에
선홍빛과 황금빛 두 개의 갈피끈이 끼워져 있다
지게에 얹혀 첩첩산중으로 실려 가는 어머니, 마른 솔가지처럼 늙은 손으로 청솔가지 꺾어 산길 군데군데 뿌렸다
아들 돌아갈 때 산중에서 길 잃을라
끝내 책갈피를 펼쳐보지 못한 나는
가을강으로 나가 상처 난 그의 일대기를 하얗게 빨아 버렸다
무덤은 파헤쳐도, 건드려도 안 되는 것
나는 이제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
되돌아갈 곳이 없어 앞으로만 간다
갈피끈을 끼울 데가 없어 주춤거리지 않을 수 있다
깃털처럼 몸이 가벼워진다
가름끈이 없는 가을강의 누렇게 뜬 강물이 된다
흐르는 대로 흘러간다
물비늘
김주완
강물의 피부가 매끄럽게 반짝일 때가 있다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그녀의 몸이 덥혀졌을 때, 숨 돌리며 일상으로 돌아갈 때 잠시 내뿜는 자족의 과시이다 지금은 아무도 필요하지 않아 아무도 품지 않을 거야 오는 대로 내치는 거야, 물비늘의 오만은 눈부시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부의 철편
팔뚝만 한 잉어 한 마리 강물을 박차고 튀어 오른다 누런 비늘이 털어내는 싱싱한 물방울들, 일탈의 자유가 우수수 비산한다, 비늘에서 떨어지는 비늘, 비늘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한낮, 천연한 강물 위 서성이는 햇살 집요하다
빨래를 삶으며
김주완
볕 좋은 날 후드를 열고 빨래를 삶으면
바람 찬 플레어치마처럼 뭉게구름은 부풀어 오르지
삶으면 살아나는 생, 풀어지며 스러지는 어제의 묵은 때
풍로의 좁은 주둥이로 쉬엄쉬엄 부채질하면 무희처럼 발갛게 춤추던 숯불꽃
펄럭이는 몸 위에서 폭폭 탕약을 달이듯
약한 불에서 남편의 속옷을 삶다 보면 뽀글뽀글
비누거품 속으로 뽀얗게 일어서는 어느 날의 생기
방울토마토처럼 팽팽했지, 언제나 반짝였지
옥상으로 다 빠져나가지 못한 김이 달무리로 부딪치는
통유리 창문엔 음각된 밤이 판화처럼 떠오르지
수묵처럼 번지는 야생의 얼룩은 아름다워, 젖어서 부드러워
초원 끝에 있는 용암온천의 풍경은 우윳빛이었지
한 손 가득 거머쥔
방울방울 물풍선 너머로 무지개가 서렸었지
새털구름을 분쇄한 가루비누 분말에선 여린 새소리가 났어
남편을 점령한
떨어지지 않는 점성을 씻어내는 데는 이만한 것이 없어
겨울 너머에서 봄이 오고 마음에 먼저 기포가 생겨나지
냉이 싹이 돋는 강둑에서 한 입 가득 침이 돌 거야
토마토 밭에는 눈이 매운 향기가 흐르고 있었지
찰랑찰랑 가슴에 달고 처음 교문을 들어서던 가제 손수건
빨간 색실로 수놓은 패랭이꽃이 팔랑거리는 시간 또는
목덜미가 파란 단발머리로 돌아가고 싶어, 나는 지금
불안한 천칭
김주완
중풍 앓은 60대 허씨의 걸음은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강의 둑마루길을 하루 한 번씩 뒤뚱뒤뚱 걸으며 운동을 한다
균형 잃은 몸을 받드는 무연한 허씨
힘 빠져 넘어질 것 같은 하루하루가 불안하게 안정되어 있다
지구의 자전축은 66.5도 기울어져 있다
기울어진 채 태양 주위를 돌면서 봄, 가을을 만들고
여름, 겨울도 만들면서
밤낮의 길이를 변화시킨다, 신통하다
기울지 않은 지구라면 천날만날 답답하고 따분할 것인데
나무는 가지가 어긋나서 제대로 서 있다
뿌리는 억세고 여린 것이 있어 흙을 깊이 악물 수 있다
산은 높고 낮은 곳이 있어 골짜기를 품고
외로워서 모인 물은 머물 곳을 찾아 흐르고 또 흐른다
반듯한 양 어깨의 무게가 같아
고요한 여자는 살아있는 여자가 아니다
걷잡을 수 없이 가슴 울렁거리는 것이 생이다
스스로 요동치니까 살아있는 것
기울어진 것이 꽃을 피운다
꽃처럼 사는 하루하루
우리는 저마다 하나뿐인 천칭이 되어
잊어버린
불안에서 나와 불안을 찾아가고 불안으로 돌아간다
기울어진 지구의 축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다
겨울원행
김주완
겨울은 길고 짧은 길은 멀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나섰습니다
문득 길에 던져져, 가지 않을 수 없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버리고 온 얼어터진 신발이 몇 켤레인지 모릅니다
어디쯤에게 아직도 헤진 그대로 있겠는지요
눈 쌓인 나뭇가지에 햇살이 내려와 뽀득뽀득
눈부시게 노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새 몇 마리 날아와 헤살을 놓는 것도 보았습니다
푸슬푸슬 떨어져 날리던 눈가루가 모래알처럼 슬펐습니다
강의 얼음장을 건너면서 미끄러져 넘어지기도 했고
탱자나무 울타리 길을 지날 때는
붉은 목도리가 가시에 걸려 내버려두고 왔습니다
만장처럼 펄럭이고 있을는지요
낮은 짧고 밤은 길었습니다
어둠 속 검은 숲의 침묵은 바다처럼 무거웠고
창날 같은 바람이 온몸으로 꽂혀 들었습니다
소리,
음산한 바람소리는 흉흉하게 날카로웠습니다
먼 불빛 가물거리는 방향으로
끝나지 않는 길을 작정 없이 혼자 걸었습니다
이가 떨리는 온 세상이 그저 추위뿐인데
옆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보여주는 것만을 보는 눈을 달고
사람들은 모두 어둠과 추위를 피해
공굴 속으로 몰려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어둠을 꿰뚫는 푸른 시력이
서걱서걱 얼어붙은 내 몸을 갉아먹었습니다
가는 일이 어디쯤서 끝날지 모릅니다
가슴에 넣어온 구운 돌덩이가 식어갑니다
남은 온기가 그렇게 다정하고 소중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의 품이 그랬을 것입니다
얼어서 떨어져 나가는
손도 발도 얼굴도 이미 내 것이 아닙니다
한 발짝씩 발걸음이 떼어져 나가므로
나는 아직 걷고 있습니다
내가 아닌 다리만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어둔 천막에 뚫린 잔구멍처럼, 별들은 까물가물 차갑게 웃고
보름달은 물끄러미 방관하고 있습니다
가심의 온기라 있는 대로 다 빠져 나가고
빈 벌판 어디쯤 마른 나무토막처럼 문득 툭 쓰러지면
바로 거기가 내 길의 끝이겠지요
시작이 내 것이 아니었기에
끝도 내가 내는 것은 아니랍니다
먼 길은 끝나지 않는 겨울 속으로만 나 있다지요
집 14
김주완
나는 있는데 나는 없다 모래사장에서 먹이를 찾는 깝짝도요는 두세 발 걷고는 머리와 꽁지를 까딱거린다 쇠물닭은 꽁지를 흔들면서 물풀 위를 걷는다 별꽃은 간밤에 가져온 하얀 별빛을 대낮의 밭이나 길가에 총총하게 뿌려댄다 이름값을 한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이름 없는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소용이 없다 나는 있는데 내가 없다 하다못해 무명초라는 이름이라도 가지고 싶다
오다가다 누가 문득 던져주는 말 한마디, 이름이다 그가 그로 서게 하는 명명命名, 그러나 말에는 무게가 없다 발화되어 나오면서부터 하등식물의 홀씨처럼 풀풀 날아가거나 비눗방울처럼 가볍게 떠다니다가 푹 꺼지고 만다 말의 종말은 무소霧消이다 말이 사라지면 이름 불린 것도 사라져 없어진다 말로 부른 이름 속에 이름 불린 것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말 속에는 존재가 들어 있다 말의 집에는 존재가 거주하고 있다 소라게처럼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간 것이 아니다 누가 그에게 이름 붙여 주었을 때, 너를 너라고 소리 내어 불러주었을 때 주술에 걸린 것처럼 존재는 말 속으로 빨려 들어가 거기에 거처를 정할 뿐이다 그때부터 말은 감옥이 된다
아직 이름 없는 것, 호명되지 않은 것은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 없는 듯이 있는 것이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은 것이다 빛 속에 있더라도 빛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다 명명만이 빛 속으로 불러낸다 어둠을 밀치고 나온 것의 무게가 말에 실린다 그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것의 크기와 꼭 비례하지는 않는 말의 무게, 무게를 넘어선 무게가 분명 말에는 있다 하늘이라는 말은 높이 올라가 있고 땅이라는 말은 낮게 엎드려 있다
집마다 문패를 단다 목각도 있고 대리석도 있다 더러 황금이나 옥돌 문패를 화려하게 달기도 한다 문패의 무게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 질식할지도 모른다 육중한 문패를 메고 다니느라 집의 등골이 휜다 그러나 그 이름으로 불리는 한 그들은 그 집에서 나오지를 못한다 이름 속에 유폐된 존재의 감옥
어느 날 참시인이 반신半神으로 온다 큰 망치를 휘둘러 낡고 굳어버린 말들을 깨트린다 헌 말을 새 말로 바꾸어 놓는다 새 말 속으로 새로운 존재가 빨려 들어가 말의 해방, 존재의 새로운 탄생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얼마큼 지나면 집은 또 헌 집이 되고 집 속의 존재 또한 헌 것이 된다 나는 이름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말집이 없어 갇히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자유다 낡을 일이 없다 내가 없는 채로 나는 이대로 가는 거다
■ 시인의 말
제3시집 이후 19년 만에 시집을 낸다. 잠이 너무 길었다. 문단에 이름을 올려주신 구상 선생님께 죄송하고 부끄럽다.
긴 시간 동안 나는 시의 반대 극점인 철학 속에 매몰되어 강단생활을 했다. 강의와 연구에 쫓기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본향인 시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희미한 소명이 늘 꿈틀거렸다. 대학 내에서 감당해야 했던 여러 보직과 짊어져야 했던 몇 개 학회의 책임 또한 나에게서 시를 강탈해갔다. 전공분야인 존재론적 예술철학에 천착하면서도 관심은 늘 시의 존재 해명에 머물러 있었다. 그나마 내가 얻은 아포리즘은 ‘철학이 말할 수 없는 것을 시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2007년부터 경북 칠곡군 왜관읍에 있는 구상문학관의 시창작반 강의를 맡게 되었다. 참으로 의미 있는 기회였고 가르치면서 다시 시를 공부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3년인 지금도 매주 3시간씩 연중무휴, 무보수로 시동인 ‘언령’을 지도하고 있다. 2009년부터는 고향인 왜관 낙동강 가에 작은 서재를 마련하고 들어앉아 시작에 전념하려 애쓰고 있다. 그 덕분으로 600여 편 가까운 시가 쌓였다. 그 일부를 골라 제4시집으로 묶는다. 굳이 특정한 주제로 한정하여 뽑은 것은 아니다.
여생이 얼마일지는 모르지만 앞으로도 수굿하게 쓰고 기회가 닿는다면 시집으로 묶어 세상에 내보낼 작정이다. 해설을 써주신 이승하 교수님과 추천글을 써주신 송희복, 박덕규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 시집을 내는데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다. 삶의 굽이굽이가 빚이다.
2013년 8월
김주완
=============== == = == ===============
김주완 詩集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 해설 -
존재의 집을 거듭 지어서 거듭 허무는 자
이승하 시인. 중앙대 교수
왜 우리 조상은 시를 잘 쓰는 사람을 관리로 등용했을까? 과거제도는 중국에서 흘러들어온 것인데, 고려 광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되어 구한말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무려 1,000년을 지속한 과거제도의 핵심은 문과에서는 제술업과 명경업이었다. 제술업은 시(詩), 부(賦), 송(頌), 책(策)을 잘 짓는 것이었고, 명경업은 유교 경전을 잘 외우고 해석하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시와 산문을 잘 쓰면 과거급제를 할 수 있었고, 시 짓는 재주가 없으면 과거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없었다. 예전의 고을 관리는 동장이면서 경찰서장과 세무서장을 겸하였다. 판사도 겸하였다. 시를 잘 쓰면 이런 능력을 고루 갖추게 되더라는 것이 우리 조상의 생각이었다. 즉, 시 짓는 능력 속에는 세상을 보는 통찰력, 인생의 깊이를 헤아릴 줄 아는 혜안, 지식의 축적, 지식의 현실 적용, 죄의 경중을 재는 능력 등 거의 모든 능력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고, 이는 잘못된 생각이 아니었다. 이 생각에 문제가 있었더라면 경전의 자구 해석을 놓고 밤낮없이 논쟁하는 사대부 양반들이 과거제도를 폐지하고 추천제로 바꿨거나 경전 암기력 같은 것을 테스트했을 것이다. ‘詩三百一言以蔽之曰思無邪’란 말을 공자가 한 이래 이 말은 동양권 전체에서 불변의 진리로 인식되었다. 동서양 공히 시의 역사가 3,000년이 다 되었지만 여전히 시를 쓰는 사람이 있는 것은 시가 갖고 있는 기막힌 ‘생명력’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언어도단이나 불립문자는 염화시중의 미소처럼 언어 부정의 경지를 추구하지만 시는 언어로써 언어를 초월한다. 언어가 없이는 의사소통과 정보전달이 불가능하지만 시적 언어는 그런 사전적 의미 차원이 아니다. 다의성과 애매성을 지닌 시적 언어는 그 뜻을 무궁무진 펼칠 수 있다. 한 편 시에 우주가 담긴다는 것은 그래서 나온 이야기다. ‘시적 표현’이란 것은 참으로 오묘하여 때로는 직설적이고 때로는 함축적이다. 형이상과 형이하의 세계를 다 아우르고, 관념과 실체를 포괄하며, 상상력과 체험의 멋진 하모니를 연출하는 시라는 것! 한용운의 시집 [님의 침묵] 전편 해설을 시도한 이가 송욱, 윤재근, 김재홍, 김광원 등이었는데 최근에 정효구가 [한용운의 '님의 침묵', 전편 다시 읽기]를 펴냈다. 시는 마치 우물 같다. 파고 또 파도 물이 나오는 우물 같은 것이 시다.
김주완 시인은 구상 시인의 추천으로 1984년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한 뒤 3권의 시집을 냈고 이번에 제4시집을 준비 중이다. 30년 동안의 3권 시집이라……. 철학박사를 받고 대학교수로서 학생들 가르치느라 시 쓰기에 전력투구하기가 어려웠던 듯하다. 퇴임 후 비로소 시를 본격적으로 쓰고 있는 김 시인은 아마도 시의 묘미를 뒤늦게 알게 되었기에 시를 쓰고 또 시작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제1부의 시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뭇 발들이 오가고
바람과 구름도 드나들었다
때로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손에 들려서 지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순한 신발도 흔적을 남기면서
갔다
닳아도 닳아도
입묵(入墨) 자국, 살 속으로 파고들어
족보처럼 꿈틀거리는 저 실핏줄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이다
― 「디딤돌 4」 전문
시인의 연세를 헤아려본다. 65세, 대학에서도 막 퇴임을 했다고 한다. 사람은 젊었을 때는 위만 보고 오르려 한다. 승진, 출세, 집 장만, 자식 교육……. 인생행로에는 오르는 길만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길은 내리막길이 되어 있다. “때로는 죽은 자가 산 자의 손에 들려서 지나갔다”고 하니, 노년기에는 장례식장 방문이 잦아질 수밖에 없다. 시인의 상상력은 제4연, 몸에 문신 새기는 일로 이어진다. 어느 누군가의 몸에 “족보처럼 꿈틀거리는 저 실핏줄”이 새겨진다. 하지만 인생은 삼천갑자 동방삭처럼 구르고 구르는 것이요 빌딩 회전문처럼 돌고 도는 것이다. 우리 인간에게 생로병사는 남의 일이 아닌데, 우리는 나 자신의 노환과 병고와 죽음이 너무 먼 곳의 일인 양 소홀히 생각하며 살아가다 봉변을 당한다. 오르는 길이 내리는 길임을 우리 모두 가슴에 새긴다면 나날을 이렇게 무미건조하게 살지는 않으리라.
뾰족이 내민 돌부리는
사방을 향해 적의를 내뿜고 있다
누구든 와서 그에게 걸리면
살기 띤 눈을 치뜨고
순식간에 상대방을 쓰러뜨린다
얼굴이나 팔꿈치 혹은 무르팍
어디든 가리지 않고 생채기를 낸다
길을 가다가 갑자기
일순에 무너지는 황당한 몰락,
그러나 돌부리는 멀쩡하다
놈의 뿌리가
굳건하게 땅속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돌부리를 지켜주는
돌의 뿌리
― 「돌부리」 전문
일종의 사물시이다. 길에 튀어나와 있는 돌부리는 행인을 넘어지게 하고 다치게도 하는 몹쓸 존재이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장면을 “길을 가다가 갑자기/일순에 무너지는 황당한 몰락”으로 묘사한 것이 재미있다. “그러나 돌부리는 멀쩡하다”. 왜? “놈의 뿌리가/굳건하게 땅속에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돌부리 하나를 보고 배운 것이 있다. 자신의 자존을 지킨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심지가 굳은 사람은 부화뇌동하지 않고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고꾸라지고 크게 다치는 동안에도 돌부리는 그냥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시인이 나름의 연륜으로 인생철학을 은유적으로 논한 시가 주로 제1부를 점하고 있다. 잠자리 최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기도 한다.
법열에 떠는 성스러운 짝짓기 의식이 끝나고 나면 암컷은 충만감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생식물이나 물속에 알을 낳는다 쏟아내듯 줄줄 알을 낳는다 그리고는 금방 죽고 만다 할 일을 다한 생(生)의 장렬한 종지부, 영원한 잠자리에 드는 잠자리, 온 데로 돌아간다
―「잠자리 3」 마지막 연
잠자리는 종족 번식을 위한 성스러운 짝짓기 의식을 끝내고는 알을 놓고 금방 죽는데 우리 인간은 어떤가. 자신의 몸을 보하겠다고 온갖 야생동물을 덫이나 올무로 잡아서 먹는 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의학의 발달은 인간한테서 자연사할 기회를 빼앗아가고, 갖가지 무리한 처방으로 목숨만 간신히 연명하게 한다. 안락사는 법적으로 안 되므로 수많은 인간이 산소호흡기와 여러 개의 줄을 몸에 붙이고서 연명만 하고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사할 권리를 줘야 하는데 안락사는 또 어찌 보면 살인이므로 허용되지 않고 있다. 어느 날 시인 김주완, 자신의 임종과 그 이후를 생각해본다.
그래도,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죽은 채로 죽지도 못하고 무망하게 살았다
이제는 사라지고 싶어
누가 나를 갈부수어 가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흔적 없이 하얗게 망각되고 싶다
― 「압화(押花)」 마지막 연
우리 모두 반드시 맞이하게 될 최후의 순간, 그 순간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날까? 시인은 상상해본다, “나의 질식을 신경 쓰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살아온 날들의 부피가 허공으로 빠져나가”고, “사지 멀쩡하던 굴곡진 몸체가 허망하게 무너”진다고. 잠자리는 생로병사 기간이 아주 짧지만 우리 인간은 이제 100년을 바라보고 있다. 아래의 시는 반드시 꽃과 열매만의 거리를 논한 것일까?
없는 완성을 찾아가는 길은, 멀고 슬프다
꽃피우지 말아야 한다
어쩌지 못해 꽃을 피웠거든
열매 맺지 말아야 한다
이래저래 열매 맺었더라도
완숙으로 가지는 말아야 한다
거리(距離)를 벗어나면 외톨이가 되는데
외로워야,
너는 너로 남는다
― 「꽃과 열매의 거리 5」 후반부
세상의 거의 모든 열매가 둥글다. 시인은 역설적이게도 꽃은 피우더라도 열매는 맺지 말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왜 시인은 “이래저래 열매 맺었더라도/완숙으로 가지는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열렬히 사랑하다 맞이하는 이별은 더 서러운 것처럼 차라리 그 사랑조차 행해지지 말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보다는 미완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은, 외로워해야만 너는 너로 남고 나는 나로 남기 때문이다. 단독자로서 자기인식이 필요함을 역설한 이 시는 현대인의 고독에 대해 논한 시이기도 하다. 어쩌면 산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지도 모른다. 멧돼지야 제 본능대로 노는 것이겠지만 인간의 관점에서는 “망치 같은 멧돼지 주둥이가 아버지 산소를 파 뭉개고 있는지 모른다/놈의 배신을 용서할 수 없”(「선잠 3」)는 것이다. 땅강아지가 땅으로 기면 제 목숨을 잘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불빛을 보고 날아가다(아, 날개가 없었더라면!) 떨어져 “버둥거리다 생을 마감하는 수도 있다”(「땅으로 기다 1」). 우리는 모두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인가.
제2부는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기록부 같은 시편이다. 자연의 변화를 보고 자신의 감정을 이입해 일종의 전원시나 목가풍의 시를 쓴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이법에서 인간세상의 모습을 그리거나 모순을 파악해내고 있다.
개의 혀가 붉은 능소화처럼 늘어졌어
숨을 헐떡이는 소의 눈동자가 풀어졌어
해가 지지 않는 오늘 같은 날은 싫어
도대체 밤이 오긴 오는 거야
설레는 한 주를 보내도 푸른 행운은 번번이 빗나가고
이제 기다리는데 이력이 났어
설레지도 않아
그럼, 내게 왔을 때만 너는 내 여자야
문을 나서고, 꽃잎처럼 날려 가는
지구 끝에서 온
너를 붙들고 있으면 안 되지
새는 날아야 새가 되는 거야
정말, 왜 이리 긴 거야 오늘은
옛날
싫은 과목의 끝나지 않는 수업시간 같아
― 「하지 1」 전문
연중 낮이 제일 긴 하지 하루를 이런 식으로 풀어내고 있다니, 참으로 신선한 느낌을 준다. 제목이 ‘하지’가 아니라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시이다. 상상력의 진폭이 매우 커 읽는 재미를 만끽하게 한다. 즉, 이런 시는 독자의 이해력과 분석력, 추리력을 요하고 있다. 「우산 1」 「맨드라미」 「갤러리에 갇힌 풍경」 「파지」 「아궁이」 「불길」 등 흥미롭게 읽은 시 가운데 비교적 짧은 시를 한 편 보자.
어탁을 뜨듯 마음의 윤곽을 받아쓰기만 했다
보태거나 뺀 것은 없다
그러나 나는 찢어져, 끝내 버려졌다
부서진 내 몸속, 파편으로 남은 그녀의 한때가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 잘못이 아니라 그녀 잘못이다
― 「파지」 전반부
화자가 파지(破紙)가 되었다. 이 시에서 그녀의 정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어서 시 전체의 의미 파악도 쉽지 않은데, 일단 ‘무너진 사랑탑’쯤으로 이해를 해본다. 그녀는 나를 버린 매정한 여인인가? 나로 하여금 자꾸 파지를 내게 하는 잊지 못할 여인인가? 시와 음악의 여신 뮤즈인가?
자기가 자기 맘에 들지 않았던 그녀의
먹점
그녀가 버린 어제인, 내가
바람벽의 철지난 광고지처럼 휴지통에서 탈색하고 있다
떨어져 썩어가는 꽃잎 같다
꽃이고 싶어 꽃으로 피는 꽃이 있겠는가
낙화이고 싶어 낙화인 꽃이 있겠는가
― 「파지」 후반부
버림받은 화자의 처지가 휴지통에서 탈색되고 있는 바람벽의 철지난 광고지 같다고 한다. 어느 종이인들 파지가 될 꿈을 갖고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인들 버림받은 신세가 되고 싶어 연애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꽃이든 “낙화이고 싶어 낙화한 꽃이 있겠는가”.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몇 장의 파지를 내는 시인의 고뇌에 동참하고 싶다. “샐비어 꽃처럼/타오를 수 있을 때 타올라라/살아 있으니까 불타는 것이다”(「불길」)라며 생명체의 생명력과 생명현상에 대해 연구를 거듭한다.
시인은 제3부에 가서 고향 왜관의 과거를 연구하고 현재를 탐색한다. 지명이 왜 ‘倭館’인가를 생각해보라. 왜관은 6·25 때 ‘왜관전투’로도 유명하다. 우리의 아픈 과거사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도시인 것이다. 시인은 왜관 구장터에 있던 청로샘 주변의 광경을 스케치하기도 하고, 기지촌 여인들의 모습을 떠올려보기도 한다. 왜관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한다.
구왜관이 있던 백포산성터는 강 건너에 있고 이쪽에 있는 소읍 왜관의 시가지도 저 아랫니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바라보는 곳이라 하여 ‘관터’라고도 불리는 이곳에서 벽진 이씨, 광주 이씨 양반네 선조들은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왜인들을 보며 망연했을까, 왜인들이 물러가자 뒤이어 미군들이 널널이 들어오고 기지촌이 자리 잡을 때 그들은 또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 「돌밭 가는 길 3」 제2연
한 편 시 속에 왜관의 100년 역사가 일목요연하게 전개된다. 지나치게 산문적으로 쓴 것이 흠이긴 하지만 구한말과 일제 강점기, 미군정기, 6·25와 전후시대가 한 편 시 속에 펼쳐진다. 왜관의 옛 모습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다음과 같이 이뤄지기도 한다.
격전지 자고산과 구철교는 잠시 추안거(秋安居)에 들어간다
웃개와 아랫개, 갱빈에서는
맨발로 나선 사람들이, 사라진 과수원 길로
흘러내린 날들을 버려둔 채 달려가고 있을까
자갈이 뒹구는 비포장도로 위로
덜컹덜컹 끌려오는 소달구지 소리가 들린다
구장터쯤에서 날아오른 장꾼들의 우렁우렁 말소리가
안개 속으로 녹아내린다.
― 「가을 안개가 지나는 왜관 점경」 중반부
흡사 옛날 필름을 보고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원로도 없는 세상, 시인은 이런 식으로 시로써나마 왜관의 옛 광경을 복원하여 보여준다.
제2부의 뒤편 시는 시인의 어린 시절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기억은 「손의 비밀 2」 「신발 3」 「똬리 2」 「탈 6」 「갈피끈」 「가을밤에 찍는 느낌표 3」 등 한두 편이 아니다. 집안의 내력은 「아카시아꽃 1」 「착시, 울안의 돌배나무 2」 「분꽃 일가」 등이다. 이야기시의 특징을 잘 살려, 집안의 내력과 가족사적 이력이 소상히 펼쳐지는 시편인데 쉽게 이해가 되므로 따로 해설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제4부에는 시인이 생애 내내 팠던 학문이 ‘철학’이었던 것이 반영되어 상당히 철학적인 시가 많다. 안 좋게 말하면 관념적이고 좋게 말하면 형이상학적인데,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거의 우물 파기의 수준이다. 「빨래를 삶으며」 같은 시의 제목만 보면 일상적 차원의 시 같지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아주 긴 시가 많고, 어떤 철학적 명제에 대한 시인의 사고가 깊고도 길다. 꽤 난해한 시도 보인다. 아마도 철학으로 설명해야 할 것을 시로 풀어낸 탓이리라, 이해한다.
시작이 내 것이 아니었기에
끝도 내가 내는 것은 아니랍니다
먼 길은 끝나지 않는 겨울 속으로만 나 있다지요
― 「겨울 원행」 마지막 연
빛깔과 빛깔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에서 홀로 돌아앉은
적요의 빛깔은 버려진 자의 탈색, 혹은 텅 빈 무색이다
시간이 정지한 지대에서 말없이 바라보는 허공의 빛깔
―「적요의 빛깔 1」 마지막 연
일상의 차원이 아니라 관념의 차원이어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떤 시는 지나치게 길고 어떤 시는 내포가 무진장 깊다. 제4부의 시는 거의 다가 철학서의 한 장(章)이 한 편씩의 시가 되었다.
말 속에는 존재가 들어 있다 말의 집에는 존재가 거주하고 있다 소라게처럼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간 것이 아니다 누가 그에게 이름 붙여주었을 때, 너를 너라고 소리 내어 불러주었을 때 주술에 걸린 것처럼 존재는 말 속으로 빨려 들어가 거기에 거처를 정할 뿐이다 그때부터 말은 감옥이 된다
― 「집 14-존재의 집」 제3연
시를 가리켜 ‘존재의 집’이라고 한 이는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였다. 김주완 시인은 65세 나이에 무당이 대나무를 붙잡고 있듯이 시를 붙잡고 있다. 지금까지는 대학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철학으로 사고했겠지만 지금은 시로써 생로병사의 진의와 희로애락의 실체가 무엇인지 풀어나가려고 한다. 자신의 시론을 가장 명징하게 전개해본 시가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다. 말로써 존재의 집을 만들어보려는 자, 바로 김주완 시인이다.
시인은 과거 한때 ‘말의 감옥’에 갇혀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했던가 보다. 하지만 지금은 “얼마큼 지나면 집은 또 헌집이 되고 집 속의 존재 또한 헌것이 된다 나는 이름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말집이 없어 갇히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자유다 낡을 일이 없다 내가 없는 채로 나는 이대로 가는 거다”라며 시에 대한 각오가 예사롭지 않음을 이런 식으로 피력하고 있다. 존재의 집에 안주하지 않고 완공된 집을 허물고 또 짓고, 또 허무는 자유인의 방황과 방랑이 시인의 앞날이 될 것이다.
해설자는 김주완 시인이 우리 시단에서는 드물게, 연륜만으로 한몫 보려는 시인이 아니라 <삼국지>의 황충처럼 ‘노익장’의 시를 쓸 것을 믿는다. 우리 시단은 요절한 천재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첫 시집에 최고점을 주는 나쁜 관행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젊은 시를 쓰는 시인이 한 분 왜관에 계시다. 그분의 성함이 ‘김주완’ 시인이다. 생을 완주하고자 하는 마라토너의 심정으로 시를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이 이름을 기억하기로 하자.
◆ 표사의 글 ◆
한때 철학교수로서 아름다움의 가치를 학문적으로 꿰뚫어보았던 김주완 시인은 요컨대 미와 추의 경계를 안다. 그리곤 이 경계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는 인생과 우주의 견자(見者)이다. 자연은 그에게 시각적인 풍경 묘사에 안주케 하지 않는다. 거기엔 오묘한 이치가 있다. 이를테면 고요는 하얗고, 쓸쓸함은 잿빛 같다. 이러한 유의 경인구(驚人句)는 시집 곳곳에 즐비해 있다. 자연에서 우리는 이치만 얻는가? 아취도 있다. 누나가 비 온 후의 목단 꽃잎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개의 혀가 붉은 능소화로 늘어지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꽃에 대한 그의 비유적 표현은 다채롭다 못해 환혹적(幻惑的)이기까지 하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그의 시적 언어는 무엇일까? 아름다움의 가치를 빛내는 존재의 집이 아니겠는가. 김주완 시인은 그만의 언어로 된 존재의 집을 보기 좋게 만들어가고 있다.
― 송희복(문학평론가, 진주교대 교수)
물비늘 같다. 잔잔한 호수를 무심코 보고 있다가 잠깐잠깐 황홀경에 젖는 듯한 그런 기분이다. 눈 비비고 눈 비빈다. 내면이 복잡하지 않으면, 너무 복잡해 맑아지지 않으면 저게 저렇게 눈부실 리 없다. 처연하게도 제 색깔 드러내지 않으려고 속을 식혀온 긴 나날 없었으면 저럴 리 없다. ‘시골’스럽게 살아와 오늘에 이른 삶의 모양을, 가까이는 우리네 풍속사에 대한 인식으로, 멀리는 사물의 근원을 따지는 형이상학적 관점으로 새로이 투시하는 김주완의 진면목을 만난 기쁨! 이로써 이즈음 나의 실의를 견딘다.
― 박덕규(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김주완 시인∥
∙ 1949년 경북 왜관에서 태어나,
∙ 1984년 구상 시인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등단했다.
∙ 시집 『구름꽃』『어머니』『엘리베이터 안의 20초』, 카툰 에세이집『짧으면서도 긴 사랑 이야기』, 저서『아름다움의 가치와 시의 철학』등이 있다.
∙「문인수 시 ‘간통’에 대한 미학적 · 가치론적 고찰」은 시 한 편을 분석하여 220매로 쓴 철학논문이며
∙「시의 정신치료적 기능에 대한 철학적 정초」는 시치료에 대한 국내 최초의 철학논문이다.
∙ 경북대학교 졸업 후 계명대학교에서 예술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 대구한의대에서 정년보장 교수로 명예퇴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