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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진천을 지나가다 평소에 궁금했던 신립장군 형제의 묘가 있다고 해서 찾았다. 신잡선생은 신립장군의 큰 형으로 임란 때 선조의 신임을 바탕으로 여러 관직을 누렸는데 많은 자료에서는 좋지 않게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진천 자료가 그래도 좋은 내용으로 나와서 이것으로 자료를 삼는다. 원래의 묘소는 서울 상도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이 개발되면서 지금의 노원영당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는 공의 부모 묘가 맨 위에 있고 신잡선생묘, 그 아래에 아들 묘가 있다. 신잡 묘역은 옮긴 묘 치고는 상당히 좋아 보이는데 청룡자락에 있는 후손들 묘는 묘라고 보기 어렵다. 영당에는 신잡 초상이 걸려 있는데 들어갈 수 없어서 외관만 보고 왔다. 이곳에는 천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있어 예전에 이 은행나무에 왜가리가 서식했었나 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은행나무 윗부분이 왜가리 분비물로 죽게 되어 왜가리도 자취를 감추었다. 인근에 평산신씨고택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는데 사람이 살고 있어서 잠깐만 둘러보고 나왔다.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백준(伯峻), 호는 독송(獨松). 고려의 개국 공신인 신숭겸(申崇謙)의 19세손이다. 아버지는 신화국(申華國)이며, 4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첫째 동생은 신급이고, 둘째 동생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결사항전하다 전사한 신립(申砬) 장군이며, 셋째 동생은 임진강 전투에서 추격해 오는 적을 막다 전사한 신갈(申硈)이다. 아들은 둘이 있었는데, 둘째아들 신경지(申景址)는 작은아버지인 신립을 도와 탄금대에서 전투를 하다가 전사하였다. 신잡(申磼)[1541~1609]은 1592년(선조 25) 이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을 무렵 정철(鄭澈)이 명나라 사은사(謝恩使)로 가게 되자 이를 모함하는 자에 대해 왕에게 정철의 강직함을 충언하여 사은사로 보내게 하였다. 이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비변사당상으로 활약하였으며, 서울에서 의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595년(선조 28) 관내의 철산군에서 죄수들의 탈옥 사건이 일어난 일로 파직되었으나 청렴결백하고 우국충정이 강하다는 평에 힘입어 4개월 후에 호조참판으로 기용된 뒤 1596년(선조 29) 특진관이 되었다. 1604년(선조 37) 개성유수가 되었을 무렵에 관료들이 권력을 이용하여 농민들을 괴롭히자 진상을 낱낱이 폭로하고 조정에 건의하여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농경지 등을 모두 돌려주게 하고 착취 행위를 막는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였다. 또한 송도유수로 재직 시 늙은 부모를 둔 자식들과 그 부모들을 위한 수연 잔치를 제안하여 대동수친연(大同壽親宴)을 열었다. 1568년(선조 1) 이월면 내촌리 당골 처조부(妻祖父)의 상례에 왔다가 지방의 향학이 발전되지 못한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다, 1608년(선조 41) 진천으로 낙향하여 지금의 이월면 노원리 서원마을에 서원을 건립한 뒤 이종학·김덕숭·이여·이부의 위패를 모시고 후진들에게 충효 교육을 하였다. 묘소는 서울특별시 동작구 상도동에 있었으나, 도시 계획에 의해 1975년 이월면 노원리 노은영당 뒷산으로 이장하였다.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디지털진천문화대전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미지정 |
문화재명칭 | 신잡 신도비 및 묘소 |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 산 110 |
관리자(연락처) | 평산신씨 충헌공파 종중 |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묘 원경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의 부친인 신화국(申華國) 사적비... 신화국(申華國)은 조선 명종(明宗)~선조(宣祖) 때의 유학자로 아들 신잡(申磼)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책록되자 평주부원군(平州府院君)에 추숭(追崇)되었다.
▼ 묘역은 신화국(申華國) 3대 묘역으로 조성되었다. 서울 상도동에서 1975년 이장된 묘역이다.
▼ 신화국(申華國) 묘비
▼ 신화국(申華國) 묘 석물
▼ 신화국(申華國) 묘역 후경.... 묘역이 높아서 바람이 우려되는데 전체적으로 잘 막혀있어 생각보다 바람이 없다.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의 신도비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묘는 부친 신화국 묘 아래에 있다.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묘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묘는 전순이 좁아 사진을 한꺼번에 찍기 어렵다.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묘비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묘 석물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묘 후경...
▼신잡(申磼)의 아들 신경희(申景禧) 묘... 신경희는 광해군 7년(1615년) 능창군을 추대하여 정변을 모의했다는 사건이 터져 결국 국문을 받던 도중 옥사(獄死)하고 능창군은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능창군은 능양군(인조)의 동생이다.
▼신잡(申磼)의 아들 신경희(申景禧) 묘비... 묘비에 보니 억울함을 풀어드리려고 묘를 세웠다고 한다.
▼ 진천 노원리 왜가리 번식지(천연기념물 제 13호)
▼ 지금은 왜가리가 뒷산으로 가고 이곳에는 천년 묵은 노거수만 남아있다.
노은영당(老隱影堂), 신잡 초상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에 있는 조선 후기 신잡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 신잡(申磼)은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전사한 신립(申砬) 장군의 형이다. 1583년(선조 16) 문과에 급제한 뒤 정언(正言)을 거쳐 의정부우참찬(議政府右參贊), 한성부윤(漢城府尹),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거쳐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 2등에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으로 봉해졌다. 1609년 사후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충헌(忠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노은영당(老隱影堂)은 1615년(광해군 7)에 건립되었으나 1818년(순조 18)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를 1856년과 1966년에 중수한 것이 현재 있는 사당이다. 노은영당에 보관된 「신잡 초상(申磼肖像)」은 1977년 12월 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로 지정되었으며, 17세기 초의 전형적인 원체풍(院體風) 양식과 기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디지털진천문화대전에서 발췌> |
문화재지정 |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5호 |
문화재명칭 | 노은영당(老隱影堂), 신잡(申磼) 초상 |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논실길 113-10 |
관리자(연락처) | 평산신씨 충헌공파 종중 |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초상 안내문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초상(한국학중앙연구원)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초상이 모셔진 노은영당(老隱影堂)...
▼ 노은영당(老隱影堂)...
▼ 평천부원군(平川府院君) 신잡(申磼) 묘역에서 바라본 노은영당(老隱影堂)...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는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1985년 12월 28일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후기 무신이면서 외교가였던 신헌(1810∼1884)이 살던 집이다. 신헌은 중요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강화도조약과 조미수호조약 등을 체결하여 조선의 개항에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집은 1850년경 신헌이 전통 한옥 형태로 지은 건물이다. 세울 당시에는 사랑채와 행랑채, 안채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안채와 광채만 남아 있다. 안채는 2층 기단 위에 세운 ㄱ자형 평면을 갖춘 집으로 오른쪽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고, 왼쪽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광채는 부속 건물로 곡식이나 여러 생활용품을 보관해 두던 곳이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
문화재지정 | 충청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호 |
문화재명칭 |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 |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논실안길 58-1 (노원리) |
관리자(연락처) | 평산신씨 종중 |
▼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
▼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 전경
▼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 대문
▼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 안채
▼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 안채와 광채
▼ 진천 신헌 고가(鎭川 申櫶 古家) 광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