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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E> “6.25 전쟁과 육사10기(생도1·2기)”추모사업 소개-이효진
♧ 아래는 회고록 발간과정의 7월30일 편집회의에 참석한 이효진 동기가 대열 임관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6.25전쟁초기 생도신분으로 참전해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산화한 영웅적인 생도 1·2기 선배님들에 대한 추모 특별사업에 육사총동창회와 함께 대열이 앞장설 것을 제안하면서, 그 사안에 대한 설명으로 올린 글입니다.
회고록 발간경과 중간보고 말미에서 밝혔듯이, 대열도 그 의의와 필요성에 절대 공감하면서 사업전개 시 홍보활동 등에 적극 나서자는 의견을 모은 만큼, 여러 동기생들 잘 아시는 내용이지만, 이효진 동기의 애국의 진정과 열성이 담긴, 다시 읽어도 울컥할 이 글을 잘 읽어주시고, 사업 전개 시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편집진 註-
6.25 전쟁과 육사10기(생도1기,생도2기)
1950년 9월 21일을 아십니까
이효진
- 서언
1950년 9월 21일.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물론이고, 육군사관학교라는 거대한 공동체의 일원들에게까지도 이 날은 생소한 날일 것이다.
필자는 왜 하고 많은 6.25전쟁 중 이 날을 기억해야 한다고 했을까? 이날은 소중한 젊은 꽃, 육사 10기(생도1기, 생도2기) 선배님들이 최악의 조건에서도 사관생도로서의 명예를 지키며 마지막 투혼의 불꽃을 사르고 산화한 날이기 때문이다.
6.25 전쟁 첫날, 포천 부평리에서 밀려오는 적 정예 3사단과 맞선 육사10기 선배들. 최악의 조건에서도 사투를 벌이고, 일부는 후퇴 명령까지도 거부한다. 그리고 불명예스러운 생존보다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고자, 20여명은 불암산으로 들어가 항쟁을 펼친다. 이후 3번의 유격전을 펼쳐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고 1950년 9월 21일 진접면 내곡리에서 피랍되는 양민 100여명을 구하고 전원이 산화한다.
필자가 이 날을 기억하자는 의미는 단순히 유격전의 마지막 날이기 때문이 아니다. 1950. 6.26일 첫 전투부터 오늘까지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영원히 살아남는 법’을, 그날 우리의 선배님들이 우리 후배들에게 행동으로 가르쳐 준 시작의 날이기 때문이다.
‘약하고 적다고 하여, 부정하고 불의한 것에 결코 굴복할 수 없다’ 는 투혼의 불꽃,
교정에서 배운 육사의 혼, ‘불의에 꺾이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결사항쟁의 혼, 배운 대로 행하신 육사 10기 선배님들은 그렇게 서슴없이 단심의 불꽃들을 태우고 장렬히 산화하여 영원히 사셨다.
1950년 9월 21일이 우리 후배 육사생도들에게 주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 육군사관학교 생도1기, 생도2기 들의 투혼의 전투는 무슨 의미였는가?
6.25 전쟁이 발발하자, 우리나라는 적의 매서운 기습 공격 앞에 3일 만에 서울을 내주고 쫒기는 풍전등화의 운명 앞에 선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국군의 용전에 따른 반격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전선은 패퇴를 거듭했다. 적의 기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휘부, 육본의 갈팡질팡하는 전세 판단, 형편없는 열세적 전력, 적의 우세한 화력과 공격력 때문에 아군은 눈물의 후퇴만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은 절망에 빠진 채 무너진 한강다리를 건너 필사적인 피난길에 올라야 했고, 일본에 임시정부를 세운다는 적의 마타도어로 인하여 절망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다는 화랑도의 기개와 무서운 용전력을 보인 젊은 육군사관학교 생도 1,2기들이 있었다. 생도 2기는 입교(50.6.1)후 25일 여 만에 맞이한 전쟁이므로 아직 실전에 미숙했지만, 육사생도 1기생들은 이미 1년의 혹독한 훈련으로 일당백 투지의 냉정하고 무서운 전사로 변해 있었다.
- 육사 생도1기, 생도2기 그들은 누구인가
1949년 4월 초 ▸수학연한 2년 ▸ 졸업 후 육군소위 임관 ▸초급대학 졸업자격 부여 ▸우수생도 미국유학 특전 등으로 파격적인 육사생도 모집안이 발표되었다. 이에 전국의 우수하고 야망 있는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4,100명 응시에 315명 선발. 이중 15명이 포기하고 300명이 선발된다. 당시 교장은 우리나라 군의 표징인 김홍일 장군. 1949년 7월 15일 합격자 300명은 육사생도 1기로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면서 군의 간성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그러나 입교식 일주일도 안 되어, 당시 건국 초의 어수선한 환경으로 말미암아 수업연한 2년을 1년으로 축소한다는 수정안이 발표되자 끝내 퇴교를 결정한 생도들도 있었다. 이후 철저한 학적관리와 내무반 생활 부적합 등으로 40여 명이 퇴교되고, 1명 病死로 263명이 육사생도 1기생으로 남게 된다.
이어 1950년 6월 1일. 육사생도 2기생이 경쟁률 16:1 이라는, 1기보다 더 높은 경쟁을 뚫고 334명이 최종 관문을 통과한다. 1기 생도들에게 미비했던 조건들이 채워지면서, 이들은 4년이라는 정규 육사생도의 학과 과정이 확보되어 황금의 생도시절을 기대한다. 그러나 입교 25일 만에 터진 6.25전쟁으로 인하여 그 어느 기수보다 많은 희생과 아픔을 겪게 된다.
- 이들이 참전한 포천 부평리 전투와 불암산 유격전은 어떤 전투였는가
그리고 운명의 6.25 전쟁.
바로 전날(50.6.24토) 졸업 행군 훈련 준비를 위해 휴가를 떠난 생도 1기생들은 25일 새벽 적의 침공으로 오후 2시 학교 교정에 완전 군장 후 모인다. 6.25일 오전까지 문산 개성 전선에서는 국군 1사단이 적과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포천으로 침공하는 적의 정예 3사단을 막을 부대가 없어 육군본부는 육사생도 1,2기들에게 이를 막을 막중한 임무를 맡긴다. 육본의 일부 장교들은 생도들의 투입을 반대했으나, 생도들은 당일(50.6.25) 오후 5시포천 부평리에 도착하여 진지를 구축하게 된다.그리고 익일(50.6.26) 10시적의 공세 앞에 노출되나 사력을 다해 용전한다. 그러나 워낙 부족한 병기와 적의 무서운 화력에 다음의 아까운 생도들이 희생하였다.
양한근,최정훈,김익룡,정의철,박성기,김한선, 한경와 조경래이영종 김석기김장삼,권영운,김상진, 심의헌,임봉균
50.6.26 오후 4시 ‘육사생들은 철수하여 육사로 집결하라‘는 육본의 지시로 생도들이 철수를 시작한다. 대책 없는 지휘부의 ‘후퇴’ 명령으로 육사생들은 소대별 혹은 개인별로 진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 후퇴과정에서 또 희생자들이 나온다.
장만근(자결)/ 양규승 임경일, 이광철 백문홍
그날 26일 자정까지 각자 퇴로를 정해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은 교정에 모여 울분을 터뜨린다. ‘육사에 패전은 없다’ 는 결기로 결사항전을 주장하나 전황은 계속 악화일로였다.
이형근 준장이 지휘하는 아군의 의정부 전선이 적의 맹공으로 무너진다. 적은 27일 오전 창동 수유리까지 거침없이 내닫는다. 그러자, 육사에 집결한 육사생도들은 육본의 지시로 27일 오후 4시 92고지 진지에 배치를 마치게 된다.
그날 밤 22시,육사 건물이 적의 맹폭에 무너진다. 육사생도들은 분노의 눈으로 불타는 교정을 볼 수밖에 없었다. 6월 28일 새벽 돈암동 고개가 북한군 특수부대에 의해 점령되자 정부는6월 28일 새벽 3시에 한강인도교과 광장교를 폭파하고 만다.
6월 28일 새벽 4시 육사생도에게도 “각 중대는 중대장 지휘 하에 은밀히 진지를 이탈 도하하라”는 후퇴 명령이 내려진다. 하지만, 집결지나 후퇴 방법 등 아무 정보도 주어지지 않고 단지 “지금으로서는 각자 최선을 다해 일단 도강하라”는 명령만 전해진다.
이에 92고지에서는 무책임하고 계획 없는 철수에 대한 분노가 터진다. “여기서 남아 싸우다 죽자!!! 끝까지 항전하자.“ 이렇게 하여, 20여 명의 생도와 기간병이 불암산으로 들어가 항전을 결심하게 된다
6월 28일 오전부터 철수 명령에 따라 후퇴하는 육사생들에게는 무서운 시련이 닥친다. 지방 공산 프락치들에 의해 후퇴로가 차단되고, 위장 국군복장을 한 적에게 속아 희생되거나 적의 기습에 희생되기도 한다(이들의 희생자 명단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부는 서울로 잠입하여 적의 거처를 공격하였으며, 항전 과정에서 13명의 생도들이 산화한다.
불암산 유격대
28일 새벽 4시 후퇴 명령에도이를거부하며 불암산으로 들어간 육사 생도 1,2기와 기간병사 포함 20명. 이들은 일단불암산 불암사 윤용문 주지의 협력을 받아 은신처를 이곳에 둔다, 김동원, 조영달, 박인기, 박금천, 김봉교 등 1기생 10명, 2기생 3명, 하사관 2명 및 사병 5명 총 20명이었다. 윤용문 주지는 독실한 인근 신도들의 협조를 얻어 보금품을 조달해 준다. 당시 유격대원들이 소지한 총기는 M1 소총 15정, 카빈소총 3정, 기관단총2정, 경기관총 1정, 수류탄 50발, 실탄 3천발, 휘발유 3통, 건빵 5궤짝 등이다. 또한, 이들은 빈병과 솜뭉치를 구해와 화염병을 만들고 유격전에 만전을 기한다.
그리고50.7월 11일 새벽 1시 40분 제1차 기습으로 퇴계원 보급물자창을 기습 공격한다. 혼비백산한 적들은 치밀한 유격전술에 걸려 30여명의 많은 사상자를 내고, 유격대는 많은 보급품과 휘발유를 불태우고 유유히 사라진다. 그러나 이때 박인기와 김봉교 생도가 희생된다
2차 기습은 50.7월 27일 새벽 0시 45분에 이루어졌다. 앞서의 제1차 기습공격으로 인하여 삼엄해진 경비 속에서, 유격대는 불암산 밑의 창동 수송대와 내무서를 공격한다. 이 공격은 지리에 능통한 김만석 중사가 지휘한다. 밤 10시 창동국민학교 부근 숲에 도착한 이들은 0시 45분을 기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마을 한 복판에 있는 보안서를 급습, 보안서원 2명을 사살했으나 용전하던 김중사가 산화하고 만다. 이 공격 중에, 삼풍제지 공장에 감추어둔 많은 보급품을 실은 차에 접근, 폭파하여 적의 전방 보급에 심대한 타격을 준다.
50년 8월 15일 오후 6시에 감행된 3차 기습은의용대로 끌려갈 청년들이 모여 있는 육사를 공격하는 것이었다. 모교 육사를 공격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었으나 지리를 훤히 알기 때문에 효율적인 공격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희생도 컸다. 여기에서 유격대장 김동원 생도, 전희택, 홍명집 생도가 아쉽게도 산화하고 만다. 이제 남은 유격대원은 9명.
9.28 서울 수복을 일주일 앞둔 50. 9. 21. 4차 마지막 기습을 시도한다
후임 유격대장으로 선정된 조영달 생도는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 수복이 머지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랍되는 주민들을 구하기 위해 진접면 내곡리로 마지막까지 출동, 전원이 산화한다. 이때 이들이 소지한 것은 탄환 17발뿐이었다.
후퇴하지 않고 남은 유격대는 이렇게 끝까지 항거를 하며 산화했다. 후퇴 명령에 따라 한강을 도하한 생도 1,2기들 역시 수원에 집결, 금곡리 전투를 치루면서 아까운 희생자를 내고 육본의 결정에 따라 대전으로 후퇴한다. 1950년 7월 10일 충남도청광장에서 1기생 263명 입교생 중 생존자 134명이 (20명 입원자+ 30명 낙오자 나중 복귀/ 필자 주) 눈물의 소위 임관식을 가지고 시급한 신병훈련을 위한 지휘관이나 전투에 투입되어(다부동, 포항, 안강, 군위, 강구, 영덕, 낙동강, 봉화등전투) 48명이 전사하는 등, 총 120여명이 전사 또는 실종자가 있었다.
한편, 생도 2기생들은 동래종합학교에서 6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1950년 8월 15일 175명이 소위로 임관하였다. 이후, 전투에 투입되어 6.25기간 동안 총 138명(생도 신분에서 91명, 임관 후 47명 희생)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다.
안타깝게도, 이분들이 어떻게 산화하였는지에 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앞으로 반드시 밝혀야 할 숙제이다.
이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습니까
육사생도 1,2기 선배님들의 국가사랑과 투혼의 모습을, 최근 뜻있는 작가가 영화와 웹툰으로 제작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작가는 당시 전투의 주역 육사 생도 1기 고 양창식 3선 의원(예비역 준장) 회고록을 직접 집필하며, 위와 같은 소중한 이야기와 자료를 양 선배님에게 직접 들었다고 한다. 이에, 생생한 상황 이해를 바탕으로 영화 제작과 웹툰 제작에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이는 국가에서 먼저 시작해야 할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晩時之歎의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이러한 시도에 육사 총동문회에서 육사 전 동문들이 힘을 모아 지원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단 육사의 명예와 위상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관생도로서 국가를 위해 몸을 던진 육사 선배들의 투혼은 육사뿐 아니라 전 군과 국민들이 함께 공유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풍전등화 같은 나라의 운명 앞에 의연히 맞선 젊은 육사 생도 1기, 2기 선배님들은 열악한 장비도, 무책임한 지휘체계도 탓하지 않았다. 오직 나라를 지키기 위한 단심으로 과감히 죽음으로 뛰어들었다.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매서운 전투력과 강인한 군인정신은 나약해진 오늘의 국민들과 젊은 세대가 반드시 알아야 할 명제다.
6.25전쟁의 승리는 미국, 유엔 등 외부의 도움이 큰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치열하게 싸움으로써 그 도움의 기회를 잡은 우리 자신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보았으면 한다.
미미하고 작은 힘으로 출발한 우리 군의 역사. 이제 우리는 세계 최강의 군대로 성장했다. 이는 나라를 사랑하고 군인의 명예를 소중히 한 선배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위난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싸워 이기는 정신력, 용맹함과 끈끈한 전우애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하여 국가 수호의 간성인 60만 국군 장병들의 자긍심을 높여야 한다. 또한, 코로나19라는 위기로 한껏 위축된 오늘의 20-30대에게는 70여 년 전에 같은 세대였던 선배들의 정신이 연결되었으면 한다.
아울러, 북한과 주변 강대국의 위협을 슬기롭게 대처하여야 하는 국가 현실에 ‘우리는 각자 위치에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국민들은 물론 국가 지도자들도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불씨를 지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고민과 공감의 시발점이 바로 육사10기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에 대한 기억의 공유이다.
이제 남은 우리 후배들의 할 일은 이러한 선배님들의 고귀한 희생과 투혼을 우리 육사동문뿐 아니라 많은 국민들과 함께 공유할 길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난을 극복하는 국민정신으로 육사정신을 세우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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