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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214권 / 전(傳) / 용암(龍巖) 민성전(閔垶傳)
민성(閔垶)은 여흥인(驪興人)으로 자는 재만(載萬)이다. 일찍부터 과거(科擧)보는 일을 포기하였는데, 문장과 사서(史書)에는 방종(放縱)하고 명예와 절개를 지키는 데 매우 힘썼다. 통진(通津)의 봉상리(鳳翔里)에 우거(寓居)하였는데, 봉상은 대체로 그의 10세조인 민유(閔愉)가 살던 곳이다. 민유는 고려(高麗)가 곧 망할 줄을 알고 부원군(府院君)으로서 향리(鄕里)에 퇴거(退居)한 다음, 아조(我朝)에 들어와서는 벼슬을 하지 않고 살다가 그대로 봉상리에서 죽었다 한다.
민성은 어버이를 섬기는 일과 제사(祭祀)를 받드는 데 있어 성심(誠心)을 다하였다. 네 아들이 있는데 큰 아들은 지박(之釙), 다음은 지옥(之鈺), 그 다음은 지핵(之釛), 또 다음은 지익(之釴)이고, 딸도 넷이 있는데 큰딸은 최여준(崔汝峻)의 아내가 되었다. 평소에 자녀들을 훈계(訓戒)하는 데는 반드시 옳은 방도로 하였다.
숭정 병자년(1636, 인조14)에 조정에서 의(義)를 들어 북로(北虜)를 척절(斥絶)하자, 사람들이 모두 금방 병화(兵禍)를 입을 줄을 알았다. 재만(載萬)의 큰 누이는 조씨(趙氏)의 아내가 되었는데, 재만에게 말하기를,
“만일 병란(兵亂)이 있게 되면 아우는 어느 곳으로 피하겠는가?”
하자, 재만이,
“나는 가난하고 몸까지 병든 데다 처자 권속이 매우 많아서 먼 곳으로 피난하기 어려우니, 강도(江都)를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하였다. 누이가,
“강도는 아주 안전한 곳은 아니니 어찌하겠는가?”
하므로 재만이,
“당금 국가(國家)가 믿는 곳은 강도입니다. 우리 집은 대대로 국은(國恩)을 받아 이미 임금의 녹(祿)을 먹어왔으니 의리상 당연히 존망(存亡)을 함께해야 합니다. 그리고 강도가 만일 무너진다면 국사(國事)는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판에 살기만 하면 또한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 겨울에 적병(賊兵)이 과연 대거 침입해 오므로, 대가(大駕)가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자, 재만은 가속(家屬)을 이끌고 강도로 들어가 아들과 함께 의병(義兵)에 예속되었다. 정축년(1637, 인조15) 1월 21일에 적이 육지(陸地)로 배[船]를 끌고 들어와 갑곶이[甲串] 동쪽 언덕에 이르자, 재만은 여러 아들과 노복(奴僕)을 모조리 거느리고 목적지로 나가 지켰다.
23일 아침에 적선(賊船)이 곧 건너오려 하는데, 우리 쪽은 방어하는 배가 한 척도 없었다. 잠시 후에 유수(留守) 장신(張紳)이 수사(水師)를 거느리고 당도하자 사람들이 모두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런데 장신이 기(旗)를 뉘고 북소리를 중지하므로 재만이,
“이는 반드시 싸울 뜻이 없는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장신은 배를 버리고 도주하였다. 어떤 사람이 재만에게,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내가 보니 배 한 척이 안변(岸邊)에 걸려 있었는데, 우리들이 힘을 합해 강(江)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도망칠 수가 있겠습니다.”
하자, 재만이,
“사부(士夫)가 의병(義兵)의 이름을 띠고서, 일이 급하다 하여 먼저 도망쳐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의장(儀將)은 도망가서 군사들이 모두 궤산(潰散)되었으므로, 재만이 가속(家屬)에게 말을 전하기를,
“일은 비록 급하게 되었지만 반드시 나의 지휘(指揮)를 기다려서 움직일 것이요, 경망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
하고, 또 세 아들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행조(行朝)가 어떻게 되었는지 소식을 듣지 못했고, 또 강역(疆域)이 얼마나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팔도(八道)가 모두 더러운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인데, 이제 탄환만한 한 섬[島]이 또 이런 곤경에 처했으니 비록 생명을 보존한들 어디로 가겠느냐.”
하고, 이어,
“우선 우소(寓所)로 돌아가서 가속과 함께 처리해야겠다.”
하였다. 그런데 집에 당도하기 전에 복부(僕夫)가 맞이하면서,
“여러 내주(內主)께서 이미 여러 족친(族親)을 따라 마니산(摩尼山)으로 향하였습니다.”
하므로, 재만이 크게 놀라,
“왜 내 말을 듣지 않았단 말이냐.”
하고, 즉시 뒤따라 대청교(大靑橋)에 이르러 가속들을 만났다. 서로 이끌고 덕포(德浦)에 당도하여 말하기를,
“오늘날의 의리는 오직 정결(淨潔)한 방도를 택하여 조용히 죽을 뿐이다.”
하였다. 어떤 이가,
“우선 여기에 머물러 있다가 다행히 지나가는 배를 만나면 그나마 온전하게 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지박(之釙)이,
“비록 그런 요행을 만난다 할지라도 인심(人心)을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배에 오른 뒤에 살육과 약탈의 우환이라도 있으면 어찌하려 합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여기서 검도(劍島)까지의 거리가 멀지 않으니, 조수(潮水)가 물러간 뒤에는 비록 배가 없어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재만이,
“그런 진창을 건너는 즈음에 적기(賊騎)가 갑자기 쳐들어오면 비록 스스로 죽으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또 도로(道路)에 분주(奔走)하면서 구차하게 요행을 바라는 것은 본디 나의 뜻이 아니다.”
하고, 마침내 가족들과 함께 천등사(天登寺)로 향하였다. 재만의 큰딸인 최씨(崔氏)의 아내가,
“천등사로 가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자, 재만이,
“왜 그렇단 말이냐?”
하니, 그가,
“그대로 덕포(德浦)에 있으면 비록 배를 만나지 못할지라도, 적(賊)이 이르면 서로 이끌고 물로 빠져서 함께 죽기가 차라리 편리한데, 이제 이렇게 공연한 고생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하므로, 재만이,
“참으로 죽을 각오가 굳게 결심되었다면 어디로 가도 안 될 것이 없다. 하필 물뿐이겠는냐.”
하였다. 드디어 절[寺]에 당도하여 법당(法堂)에 올라 죽 늘어앉은 다음, 처녀(處女) 세 사람에게 각기 비녀를 꽂고 시집간 부인(婦人)의 의복(衣服)을 입도록 하였다. 이때에 피난온 사서(士庶 사대부와 서인)들이 절 안에 가득찼으므로, 재만이 그 시끄러움을 싫어하여 종에게,
“조용한 곳을 찾아보아라.”
하자, 종이,
“절 뒤에 서너 칸 되는 토우(土宇)가 있습니다.”
하므로, 즉시 그곳으로 옮겨 가 모두 앉아 있었다. 여러 아들이,
“이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할까요?”
하자, 재만이,
“모두 서자(庶姊)에게 붙여서 내보내는 것이 옳다.”
하고, 즉시 서자(庶姊)에게,
“우리들은 곧 죽을 겁니다. 자씨(姊氏)는 연로하여 반드시 욕(辱)도 당하지 않을 것이고 또 죽임도 당하지 않을 것이니, 모름지기 여러 비복(婢僕)들과 함께 이 어린아이들을 업고 나가십시오. 다행히 모두 살아남는다면 자씨의 공(功)이 어찌 크지 않겠습니까. 자씨는 꼭 그대로 잘하십시오.”
하니, 자씨가,
“의리상 함께 죽어야 마땅한데 어찌 차마 혼자만 살아남겠느냐.”
하고, 굳이 거절하여 듣지 않다가 강력히 권한 다음에야 승낙하므로, 즉시 그 아이들의 부모를 시켜 각기 사조(四祖 아버지ㆍ할아버지ㆍ증조부ㆍ고조부)와 아이들의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 및 그들의 이름을 적어달라 하여 의대(衣帶)에 차게 하였다. 또 옷속과 그들의 피부(皮膚)에 기록하여 표식으로 삼아 자씨에게 주었다. 이윽고 또 그의 첩(妾)인 우씨(禹氏)에게,
“너는 사족(士族)이 아니므로 반드시 죽지 않을 것이니, 이 자씨를 따라 갈 수 있겠다.”
하자, 그 첩이,
“제가 어찌 차마 주군(主君 남편)을 버리고 살아남기를 탐내겠습니까. 설사 살아남기를 탐내는 마음이 있다 할지라도 나이 젊은 여인이 혼자서 어디로 간단 말입니까.”
하므로, 재만이,
“나는 네가 죽기를 아깝게 여길 줄 알았는데 너의 뜻이 이와 같으니 어찌 너의 뜻을 억지로 빼앗을 수 있겠느냐.”
하였다. 최씨(崔氏)의 아내가 된 큰딸이 나가서 그의 딸아이를 비복(婢僕)에게 부탁하는 즈음에 눈물을 줄줄 흘리므로 지박(之釙)이,
“자씨(姊氏)는 왜 우십니까? 혹 죽기를 슬퍼한 것이 아닙니까?”
하자, 최씨의 아내가 눈물을 닦고 대답하기를,
“죽음을 슬퍼한 것이 아니라, 자모(子母) 사이의 지극한 정(情)을 스스로 어찌할 수 없어서이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각기 띠고 있던 흰 면건(綿巾)을 풀어 모두 스스로 우내(宇內)에서 목을 매었다. 재만은 자결(自決)에 임하여 종에게 말하기를,
“어찌 우리를 선영(先塋)에 수장(收葬)하기를 바라겠느냐. 한집안 식구 10여 명이 이 한곳에 함께 있어야 거의 지하에서라도 서로 의지할 수 있으리니, 우리들이 죽은 뒤에는 즉시 이 토우(土宇)를 헐어서 덮어 버리고 너희들은 각기 나가서 살기를 도모해야 한다.”
하고, 또 한 폭(幅)의 흰 명주 수건에 글을 써 주면서,
“가지고 있다가 지옥(之鈺)에게 주든지 아니면 홍(洚)에게 주어라.”
하였는데, 홍은 곧 지박의 아들이다. 그 두 사람은 모두 딴 곳에서 피난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 글은 대체로 치명(治命 맑은 정신으로 하는 유언(遺言))이었을 터이나, 그 종이 적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 글이 전해지지 못하였다. 맨 처음에 비(婢) 대향(代香)이 지박에게 달려와서 말하기를,
“한때에 모두 돌아가시면 그 누가 시신(屍身)을 가려드리겠습니까. 시신을 가린 다음에 돌아가셔도 늦지 않겠습니다.”
하자, 지박이 대답하기를,
“내가 어찌 차마 부친(父親)이 돌아가시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겠느냐.”
하고, 드디어 그의 아버지보다 먼저 목을 매어 죽었다. 아이들을 등에 업고 나간 비복들이 모두 약탈당하여 최씨의 딸아이도 죽었다. 다만 재만의 자씨(姊氏)와 늙은 여종만이 죽음을 면하여 선원리(仙源里)에 이르게 되었는데 자씨는 한집안이 과연 모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면서,
“어찌 차마 혼자만 살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등에 업힌 아이를 늙은 여종에게 주면서,
“너는 이 아이를 데리고 있다가 일가(一家)의 살아남은 자를 찾아서 붙여주어라.”
하고는, 또한 마침내 자결하였다. 이리하여 대체로 일가의 죽은 자가 13인이나 되었으니, 재만(載萬) 및 그의 서자(庶姊)와 지박(之釙) 그리고 지박의 아내 이씨(李氏), 지핵(之釛)과 그의 아내 김씨(金氏), 지익(之釴)과 그의 아내 유씨(柳氏), 장녀(長女)인 최여준(崔汝峻)의 아내, 그 다음 처녀(處女) 세 사람과 첩(妾) 우씨(禹氏)이다. 재만의 숙부(叔父) 인전(仁佺)의 첩(妾)도 천등사(天登寺)로 가서 함께 죽기를 약속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고, 여러 시체 가운데 엎드려 있다가 살아나와 그때의 시말(始末)을 다음과 같이 자상하게 말하였다.
“재만이 첩 우씨를 내보내려고 할 때, 우씨는 태연하게 담소하면서 종을 시켜 밥을 짓게 하여 자기도 먹고 다른 사람에게도 권하였으며, 인하여 말하기를 ‘주군께서 나를 사족(士族)이 아니라 하여 내가 죽기를 아깝게 여길까 의심하시니, 청컨대 나의 뜻을 먼저 드러내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서 그가 나머지 12인보다 가장 먼저 죽었다.”
재만의 아버지 인백(仁伯)은 문학과 덕행이 있었는데, 호는 태천(苔泉)이고 우계 선생(牛溪先生 성혼(成渾))에게서 수학(受學)하였으며, 책훈(策勳)되어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조부(祖父)인 사권(思權)은 벼슬이 부정(副正)에 이르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선묘(宣廟)가 서쪽으로 행행(行幸)하려 하자, 사권이 대가(大駕)의 앞에 엎드려 청하기를,
“종묘사직(宗廟社稷)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대가가 이를 버리고 떠나서야 되겠습니까. 바라건대 죽기로써 지키고 떠나지 마소서.”
하니, 상이 좌우를 돌아보고,
“이 일을 어찌해야 하겠느냐?”
하였으나, 시신(侍臣)이,
“국가의 큰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는데, 어찌 일개 미관(微官)의 말로 인해 중지할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상이 드디어 길을 떠났다. 외조(外祖)인 현령(縣令) 정희린(鄭姬隣)은 온양인(溫陽人)인데, 고행(高行)이 있어 율곡(栗谷)이 그를 대관(臺官)으로 천거하려 하였으나, 마침 율곡 선생이 졸(卒)하여 그 일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체로 그의 가세(家世)는 기개(氣槪)를 숭상하고 절의(節義)를 숭봉하며 행검(行檢)을 닦아서, 비록 부녀자나 어린아이들도 견문(見聞)이 풍부하였다. 모두 의리에 죽기를 마치 아주 낙원(樂園)으로 가는 것처럼 여겼기 때문에 당시 의리에 죽은 집안이 워낙 많았지만, 민씨(閔氏) 일가(一家)만큼 순전하게 죽은 가족은 없었다.
김홍보(金弘輔)의 아내가 된, 재만의 종매(從妹)도 강도(江都)로 들어갔다가 적(賊)을 만났으나, 항거하여 욕(辱)을 당하지 않고 끊임없이 적을 꾸짖다가 죽었다. 재만의 종제(從弟) 선(墡)은 익위관(翊衛官)으로서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갔는데, 그때 세자(世子)가 영선(營繕)을 일삼자 선이 항언(抗言)하여 극력 간(諫)하므로 세자가 노하여 배척하였지만 그래도 꺾이지 않았다. 그는 이 때문에 효고(孝考)에게 지우(知遇)를 받아 벼슬이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이르렀다. 또 재만의 종제인 난(堜)은 효고(孝考) 때에 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가 되어 남별전(南別殿)의 제관(祭官)에 임명되었는데, 기해년(1659, 효종10) 5월 4일에 효종대왕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는 전정(殿庭)에 내려가 성심(誠心)을 다해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있다가 거의 기(氣)가 막힐 뻔하였다. 수전관(守殿官) 곽문용(郭文溶)은 매양 이 일을 말하면서 그의 충심(忠心)을 감탄하였다.
아, 사람치고 그 누군들 천부(天賦)의 양심(良心)이야 없으리요마는, 유독 민씨(閔氏)만이 이렇게 한 것은 어찌 까닭이 없겠는가. 감사(監司) 민유중(閔維重)이 일찍이 나에게 재만(載萬)의 일을 일러 주면서 전(傳)을 지어 세상에 전할 것을 청하였는데, 내가 승낙만 해놓고 미처 못하였다. 그런데 도사(都事) 조세환(趙世煥)은 재만의 큰누이의 손자이다. 그가 와서 민 감사의 청(請)을 거듭 말하고 그 사건의 시말(始末)을 자상하게 말해 주었다. 항상 기억하건대, 주 부자(朱夫子)가 일찍이,
“사천(史遷 태사령(太史令) 사마천(司馬遷)을 말함)이 형가전(荊軻傳)을 만들 때는 의원(醫員)에게서 고증 받았고, 유후전(留侯傳)을 만들 때는 화공(畫工)에게서 고증 받았다.”
하였으니, 이제 내가 증거한 바야말로 어찌 밝고 빛나서 더욱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삼가 상고하건대, 민이(民彝)와 물칙(物則)은 고금(古今)ㆍ현우(賢愚)로 인해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만 그 기질(氣質)의 품부된 것이 순수(純秀)한 곳에 한결같지 못하여, 형체(形體)가 이미 생겨나면 물욕(物慾)이 또 따라 그 양심(良心)을 유인하여 빼앗아 간다. 이러므로 비록 아무 일 없는 평상시에도 물욕의 정(情)이 우세하여 그 이른바 민이ㆍ물칙을 잃어버린 자가 많은데, 더구나 바로 인간의 가장 큰일이요 사람의 가장 싫어하는 일인 죽고 사는 것이 거기에 있었음에랴. 그토록 시급한 때에 웅어(熊魚 웅장(熊掌)과 물고기를 가리킴)를 분변하고, 그토록 황급한 때에 영욕(榮辱)을 선택해서 의(義)가 있는 줄만 알고 자기 몸이 존재하는 것은 몰랐으니, 민재만(閔載萬) 같은 사람은 고금 천하를 통틀어도 참으로 보기 드문 사람이다.
그 한집안사람이 다투어 서로 먼저 생명을 버렸으니, 비록 모두가 천성(天性)인 수오심(羞惡心 정의감(正義感))에서 비롯된 것이기는 하나, 또한 어찌 풍성(風聲)과 교화(敎化)에 감화된 소치가 아니겠는가. 그의 서자(庶姊)는 이미 그의 부탁(付託)을 저버리지 않았고 끝내 또한 구차하게 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조인(趙人) 저구(杵臼)의 유(類)가 아니겠는가. 그의 첩 우씨는 천(賤)한 사람이었으나, 주군(主君)의 말 한마디에 격동되어 맨 먼저 죽어서 그의 뜻을 밝혔으니 더욱 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다. 당시 사대부의 부녀들은 오욕(汚辱)을 달게 받았고, 심지어 귀가(貴家)ㆍ대족(大族)들의 경우도 추한 소문이 전파되어 심지어는 사람의 입에 담지 못할 일이 있었다. 그들의 평소에는 우씨(禹氏)를 하찮은 벌레보다 천하게 여겼겠지만, 이제 성취한 절개로 본다면 도리어 사람과 짐승의 차이보다 더 현격하게 되었다. 병이(秉彝)의 마음이야 어찌 귀천(貴賤)을 가지고 논하겠는가. 그리고 재만은 자기의 딸인 처녀 셋을 모두 비녀를 꽂고 죽게 하였으니, 옛날 송(宋) 나라의 형주(衡州) 윤곡(尹穀)은 성(城)이 함락되었을 때에 자기 아들에게 관(冠)을 씌워 주면서,
“너로 하여금 관디를 하고 지하에 가서 선인(先人)을 뵙도록 하려 한다.”
하였으니, 죽음에 임해서도 전혀 두려워하거나 허둥지둥함이 없이 일거일동을 예법(禮法)대로 한 것은 예와 지금이 똑같은 것이다.
조정에서는 민성(閔垶) 및 그의 여러 자녀(子女) 또는 여러 며느리와 첩(妾)까지 모두 12명을 정포(旌褒)하였는데, 유독 그의 서자(庶姊)인 민씨(閔氏)만 그 정포에 끼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재만이 일찍이 용암(龍巖)이라 자호(自號)하였기 때문에 내가 그의 사적을 기록하고서 용암전(龍巖傳)이라 한다.
[주-D001] 저구(杵臼) : 춘추 시대 진(晉) 나라 조삭(趙朔)의 문객(門客)인 공손저구(公孫杵臼)를 가리킨다. 진(晉) 나라 대부(大夫) 도안가(屠岸賈)가 조삭의 일족(一族)을 살해하자 공손저구는 조삭의 친구인 정영(程嬰)과 함께 조삭의 고아(孤兒)를 세울 일을 도모한 나머지, 정영에게는 조삭의 유아(遺兒)를 잘 보호하도록 하고, 자신은 다른 사람의 영아(嬰兒)를 취하여 산중(山中)에 숨어 있으면서 거짓 그 아이가 진짜 조삭의 유아인 척하면서 대부 도안가에게 그 영아와 함께 살해되고, 조삭의 진짜 유아는 정영이 온전하게 보호하도록 하였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태현 (역) | 1983
閔龍巖垶傳
閔垶驪興人。字載萬。蚤抛擧子業。跌宕文史。砥礪名節。寓居于通津之鳳翔里。鳳翔蓋其十世祖愉所居。愉知高麗將亡。以府院君退居。入我朝不仕。仍沒于鳳翔云。垶事親奉祭。盡其誠心。有四子。長之釙。次之鈺。次之釛。次之釴。女亦四人。長爲崔汝峻妻。居常訓誡。必以義方。崇禎丙子。朝廷以義斥絶北虜。人知朝夕被兵。載萬長姊爲趙氏婦。謂載萬曰。脫有兵亂。弟避於何地耶。曰。吾貧且病。家累甚多。難以致遠。捨江都何往乎。姊曰。江都非萬全奈何。曰。卽今國家所恃者江都也。吾家世受國恩。自在胎息中已食君祿。義當與之存亡也。且江都若破。則國事無復可望矣。生亦何爲乎。是冬。賊兵果大至。大駕入南漢。載萬挈家屬入江都。與子屬義旅。丁丑正月二十一日。賊曳船于陸地。至甲串東岸。載萬盡率諸子及奴僕。出信地把守。二十三日朝。賊船將渡。而我船無一隻防禦。俄而留守張紳。率舟師至。人皆喜躍。已而紳偃旗止鼓。載萬曰。此必無戰意也。紳果棄船走。或謂載萬曰。事無可爲者。我見一隻船罣在岸邊。吾輩並力曳入于江則可以走矣。載萬曰。士夫以義旅爲名。事急先逃可乎。言未訖。義將去而師徒遂潰。載萬傳言於家屬曰。事雖急。必待吾指揮。愼勿輕動也。顧謂三子曰。已不聞行朝消息如何。又未知疆域餘存者幾何。八路想盡爲腥膻之地。而今此彈丸一島又如此。雖獲保存。將安歸乎。乃曰。姑還寓所。與家屬處之耳。未至。僕夫迎謂曰。諸內主已隨諸族。向摩尼山矣。載萬大驚曰。是何不聽吾言也。卽追及於大靑橋。相携至德浦曰。今日之義。惟向潔淨處從容就死而已。或言姑且留此。幸逢過去船則庶幾生全矣。之釙曰。雖或遇此僥倖。人心難測。上船之後有殺掠之患。奈何。又曰。此去劍島不遠。潮退之後。則雖無船。亦可以跋涉矣。載萬曰。跋涉泥濘之際。賊騎猝至則雖欲死。不可得也。且奔走道路。苟冀倖免。本非吾志也。遂同向天登寺。載萬長女崔氏婦曰。此來非計也。載萬曰。何也。曰。仍在德浦則雖不遇船。賊至相携投水。甚便於同死。今徒爾辛苦何也。載萬曰。苟能死計堅決。無往不可。何必水哉。遂至寺。升法堂列坐。使處子三人幷笄。各服其衣服。時避亂士庶彌滿寺中。載萬厭其紛擾。謂奴曰。討一靜處。奴曰。寺後有三四間土宇矣。卽移就皆坐。諸子曰。此稚兒輩。何以處之。載萬曰。皆付庶姊出送可也。卽謂其庶姊曰。吾等卽將死矣。姊年老。必不見汚。且不見殺。須與諸婢僕。負此幼稚而出。幸而得全。姊之功豈不大哉。姊其勉之。姊曰。義當同死。豈忍獨生。堅拒不聽。強而後可。卽令兒輩父母。各書四祖及生年月日時及其名。佩其衣帶。且書于衣裏及其肌膚以識之以授姊。旣又顧謂其妾禹姓曰。汝非士族。不必死也。可以隨姊去矣。妾曰。吾豈忍舍主君而偸生乎。設有偸生之意。年少女人。獨將安之。曰我以汝爲愛死耳。汝志如此則何可奪也。崔婦出付其女之際。潸然出涕。之釙曰。姊何泣也。無乃慼死乎。崔婦拭淚而答曰。非死之慼也。子母至情。自不能不爾也。遂各解所帶白綿巾。皆自經於宇內。載萬臨決。謂奴曰。豈望收葬先壟乎。一家十餘人同此一處。庶得相依於地下。我輩死後。卽毀此宇以掩之。汝輩各出圖生可也。且授一幅白紬書曰。持以授之鈺。否則授洚。洚卽之釙之子也。二人皆避兵于別處故云爾。其書蓋其治命而其奴被虜。故不得傳焉。始。婢代香趨謂之釙曰。一時皆死則誰將掩尸。掩尸之後死未晩也。答曰。吾豈忍目見父親之亡乎。遂先其父而經焉。婢僕之負兒輩出者。皆見掠。而崔女死焉。獨姊與老婢得免。獲至仙源里。姊聞一家果皆死之。痛哭曰。何忍獨生。遂以所負兒授老婢曰。汝以此尋一家之餘存者而付之。亦遂自決。蓋一家死者十三人。載萬及庶姊。之釙及其妻李氏。之釛及其妻金氏。之釴及其妻柳氏。長女崔汝峻妻。其次處子三人。妾禹姓也。載萬叔父仁佺之妾。亦往天登。約與同死而不果。伏於衆尸中得脫。詳語其顚末曰。當載萬之使禹姓出去也。禹談笑自如。使婢炊飯自喫。亦勸諸人。仍曰。主君以我爲非士族而疑我惜死。請先暴我志也。故其死最先於十二人云。載萬父仁伯。能文有行。號苔泉。受學於牛溪先生。策勳封驪陽君。祖思權。官副正。壬辰倭變。宣廟將西幸。思權伏駕前請曰。宗社在此。大駕其可棄此乎。請效死勿去。上顧左右曰。何如。侍臣曰。國家大計已決。豈可以一微官之言而止哉。上遂行。外祖縣令鄭姬隣。溫陽人。有高行。栗谷將薦爲臺官。會先生卒。遂不果。蓋其家世尙氣槩。崇節義。礪行檢。雖其婦孺。習熟見聞。皆視其死。如赴樂地。當時死義之家固多。而無如閔氏一家之純者也。載萬從妹爲金弘輔妻者。亦入江都遇賊。拒不受汚。罵賊不絶口而死。從弟墡以翊衛官。隨昭顯世子至瀋陽。世子事營繕。墡抗言極諫。世子怒斥而猶不挫。以是受知於孝考。官至水使。堜。孝考朝爲都摠都事。差祭于南別殿。己亥五月四日。聞大內大漸。下殿庭叩地推胸。幾於氣塞。守殿官郭文溶。每說此而嘆其忠赤。噫。人誰無天賦之良心。獨閔氏如此者。豈無所以也。閔監司維重。嘗爲余道載萬事。請立傳以傳於世。余諾而未能也。趙都事世煥。實載萬長姊之孫也。來申監司之請。而詳語其始末。嘗記朱夫子嘗以爲史遷傳荊軻徵藥醫。傳留候徵畫工。今余所徵。豈不焯焯然愈可信也。
謹按。民彝物則。不以古今賢愚而有間。惟其氣質之稟。不能一於純秀之會。而形旣生矣。則物慾又從而誘奪之。是以雖在平常無事之時。蔽交情勝而失其所謂彝則者多矣。況於死生是人莫大之事。而人之大惡存焉。其能辨熊魚於倉卒之際。擇榮辱於蒼黃之間。知有義而不知有其身。如閔載萬者。古今天下儘乎其鮮有矣。其一家之人。爭先舍生。雖皆根於善惡之天賦。而亦豈其風聲敎化之所感也。其庶姊旣不負所託。而卒亦恥其苟生。其趙人杵臼之流乎。其妾禹姓。賤者也。激於主君之一言。首先取死。以明其志。尤非人之所能及也。當時士夫婦女。甘受汚辱。至有貴家大族醜說流播。至使人不欲言者。其平日視禹。不翅壤蟲。而顧今所就。反不翅人獸之懸。秉彝之天。其可以貴賤論哉。載萬使其處女三人。皆笄而死。昔宋之尹衡州穀城陷。冠其子曰。欲令冠帶而見先人於地下。臨死而無恇怯錯亂。從容於禮法者。其事古今一轍也。朝廷旌褒垶及諸子女諸婦與妾人凡十二人。而獨其庶姊閔氏不與焉。惜哉。載萬嘗自號龍巖。故余記載其事。而名之曰龍巖傳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