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동의 마음사용설명서
치유·평화·행복의 여정 ‘명상’
진정한 ‘나’로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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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에 들어가며]
명상은 동양의 마음 치료법이고
정신치료는 서양의 마음치료법이다.
양자는 모두
마음의 고통을 해결하여
평화와 행복에 이르게 한다는 점에서 같다.
불교 또한
마음을 잘 이해하고 다루어
마음의 모든 번뇌가 소멸된
니르바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위 둘과 같다.
따라서 명상, 불교, 정신치료는
마음공부(心學)라는 점에서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삼자 모두
우리의 마음이 공부와 노력에 의해서
우리 모두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신의학·심리학 통한 정립
명상의 불교 기원 조명 시도
마음의 사용방법도 함께 제시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헤쳐나갈 힘이 우리에겐 갖추어져 있는데
그걸 사용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뇌과학의 발전으로
변화할 수 없고 재생 불가능해보이던 뇌세포들이
신경 가소성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무한한 변화로
새로운 신경 회로들을 만들어낸다는 게 입증되었다.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내면을 조절 가능하다는 명상의 인식과 일치한다.
본고는
명상과 불교와 서양의 정신치료를 융합하여
마음을 잘 이해하고 잘 다스리고 길들이는
마음공부를 함께 배우고,
마침내 내면의 지혜와 자비를 일깨워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는 길을
차근차근 밟으려 한다.
마음이 아픈 이에겐 치유의 여정이
마음이 괴로운 이에겐 평화의 여정이,
마음이 불행한 이에겐 행복의 여정이 될 것이다.
[마음 사용의 첫걸음]
마음이 내 마음 같은데
내 마음대로 안 된다구요?
어떻게 하면
마음먹은 대로 마음을 사용할 수 있을까요?
자, 눈을 감고 자신을 들여다 봅니다.
마음이 어떤가요?
편안한가요?
아무 잡념 없이 고요하고 평화롭다는 분들은
눈을 뜨고 나가십시오.
여기 계실 분이 아닙니다.
(웃음)
아니라면 현재 내 마음이 어떤가요?
이제 편치 못한 분들도 눈을 뜨세요
(웃음)
복잡하고 수많은 걱정 근심과 상념들이 오가고
마음이 들끓고 뒤엉켜 실타래 헝크러진 듯하고
앞날이 불안하고 출렁이고
비탄, 슬픔, 분노, 원망, 후회, 비교, 질투,
실망, 절망, 그만 살고 싶고
살아서 무엇하나 회의하고
아무 의미를 못느끼겠고
암울하고…
이 중 어느 하나나 여럿이 해당되는군요.
또는 모두 다인 경우도 있군요.
괜찮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깨달음의 여정을 시작합니다.
현재 이 마음에서 깨달음은 시작됩니다.
내 마음이
이러하구나라고 아는 것 자체가
자각이요 깨달음입니다.
이 마음의 현주소에서 출발합니다.
좀더 명료하게
자신의 마음 상태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적을 알아야 이길 수 있듯이,
괴로운 마음을 극복하려면
괴로운 마음의 상세한 내용을
애매하게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명료한 앎은 깨달음의 기본입니다.
명료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외면하고
대충 보거나 흘낏 보는 것은
잘못된 앎으로 이끌기 때문입니다.
이제 깨달음으로 향하는
여정의 한 걸음을 막 떼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볼까요?
어떻게 보는 게 바른 ‘봄’일까?
우리는 삶 속에서
수많은 파도를 만나며 삽니다.
병들고 늙어가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아픕니다.
곁에서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은
안타까움이 아기의 아픔보다 더 아픕니다.
그러나 부모가 마음 아파한다 해서
아기의 병이 낫지 않습니다.
부모가 대신 아파줄 수 없습니다.
삶에서 만나는 파도도
모두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고
그 극복도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누가 대신 해결해주기를 기대하나
그것은 허망한 기대임을 우린 곧 경험하곤 합니다.
자 이제
‘마음 바라보는 이 한 길이
모든 해결책 가운데 으뜸이자 전부’
라는
달마 조사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괴로운 마음을 해결하려면
마음을 잘 보고 이해하는 게
우선 할 일인 건 분명합니다.
마음을
건성으로 보고 대충 봐서는 이해할 수 없지요.
자세히 들여다 보아야 하는 건
아기의 병을 잘 보고
정확히 진단하여 처방하는 의사의 자세입니다.
부처님을
대의왕이라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부처님도 마음의 괴로움을 겪었기에
마음의 대의왕이 되신 것이지요.
이제 현대의 정신의학 및 심리학과
동양의 심리치료인 불교의 명상법을
조화롭게 다루면서
마음을 잘 다루는 법을
함께 정립해나가기로 하겠습니다.
삶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다.
살면서
우리는 격정에 휩쓸리곤 합니다.
화를 걷잡을 수 없고
슬픔을 가눌 수 없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립니다.
왜일까요?
많은 고통이
관계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환경이나 직장 탓을 하고
부모나 배우자 탓을 하고
자식 탓을 하며 신세 한탄을 하지요.
모두 관계로부터 비롯된 고통이군요.
사실 경제적 고통이나 재난들도
관계에서 온 것이지요.
내 안의 단독 문제라기 보다
상호 관계, 상호 작용에서 발생한 것이지요.
그래서 자신을 잘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는
고통이 해결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상호 관계를 보기 위해서
남의 마음도 잘 보아야 하겠군요.
그래서 나홀로 편안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일시적 평화 속에 있다가
관계의 돌풍이 몰아치면
어느새 소용돌이로 휩쓸리곤 합니다.
감정의 격랑이라 할 수 있겠군요.
사실 감정이 평온하게 늘 유지되는
평정심에 도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감정이 요동치는 경우를 잘 보아야겠지요.
이런 것들을 함께 공부해 가노라면
어느새 마음의 힘이 커지면서
웬만한 자극에
감정이 무너지는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마음의 힘 배양하기]
그 마음의 힘은 어떻게 배양할 수 있을까요?
참아야 할까요?
참으면 병이 되지요.
표출해야 될까요?
그 즉시 표현하면 시원하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그 감정이 꺼지긴 커녕 더 드세집니다.
인류가 생존한 이후 사용했던 방식이
바로 피하거나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호랑이와 맞닥뜨렸습니다.
어떻게 하나요?
도망치거나 돌아서서 싸우거나
두 가지 방법 밖에 없어 보이는데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 삼의 방법이 있을까요?
예. 호랑이와
대화 나누고 친구가 되는 길입니다.
쉽지 않겠지요.
선사들은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집어넣어라.’고 말합니다.
온몸이 삼켜지는 길인데요.
(웃음)
잡아먹으려 으르렁거리는 호랑이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길입니다. 가능할까요?
호랑이가 무엇인가요?
고통입니다.
머리를 드민다는 것은
고통과 피하지 않고 직면함이고
삼켜진다함은
고통을 충분히 경험한다는 것이지요.
고통스럽다고 피하거나
무지하게 참기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호랑이 아가리에 삼켜지기 위해서는?
그렇습니다.
바라보는 힘- 관찰력이 커져야 합니다.
관찰을 잘 하려면 집중력이 커져야 합니다.
명상 시작 무렵엔
호흡에 집중하려 해도
금방 잡념으로 빠지곤 합니다.
호흡을 놓치지 않고 잘 보려면
호흡에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집중력과 관찰력을 키우려면
역시 명상하는 게 으뜸입니다.
많은 서구 학자들이
동양 명상에 대해 연구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집중력과 관찰력이 늘어나면
창의력까지 키워진다는 연구이지요.
[명상의 기원]
이제 명상의 기원에 대해 살펴볼 차례입니다.
인더스 문명 유적지에서
좌선하는 조각이 발견됩니다.
인도에서 명상은
5천년 역사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리안 족이
서쪽으로부터 도래하여
원주민들 위에 군림하며
토속 사상과 서구 사상을 융합하여
브라마니즘이 형성되고 그 경전이 베다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이미 우파니샤드철학이 꽃을 피웠구요.
바가받기타 등을 보면
그 내용이 불교와 방불함에 놀랍니다.
부처님은
불교를 기존의 힌두이즘(인도 사상)과
요가 명상을 배제하고 새롭게 만든 게 아니라
기존의 사상과 명상체계를
충실히 공부하고 마스터한 후
그 토양 위에다가 새로이 하나를 추가했으니
바로 연기관법입니다.
연기관법은
불교 명상의 핵심이니
차차 상세히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명상이라는 단어는
라틴어 어원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명상(meditation)은
라틴어(meditatio)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심사 숙고, 묵상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심신 수련의 뜻도 있다고 합니다.
명상을
불교에서는
선(禪)이라는 표현으로 쓰기를 좋아하는데
선은 산스크리트어 dhyana를
소리나는 대로 선나(禪那)로
중국 역경학승들이 번역했고
이 선나가
나중에 나자가 탈락하여 선이 되었지요
(일본에선 zen).
dhyana를 뜻으로는
정려(고요히 생각함)
사유수(사유하며 닦음)로
역경승들은 번역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언어를 떠난 생각을 없애는 명상과는 거리가 있지요?
[집중·관찰, 명상의 두 날개]
명상은
인도나 불교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는 묵상이나 관상,
이슬람교에서는 수피즘,
유대교에서는
카발라 등으로 표현하는 수련법이 있지요.
물론 인도의 요가,
중국의 기공이나
우리나라의 단학 수련 등도 포함되지요.
요가도
신체적 수련을 주로하는 핫타요가와
정신적 수련을 강조하는 라자요가가 있지요.
그러니
선은 불교명상을 지칭하고
명상은
모든 걸 포함하는 명칭이라고 보면 되겠군요.
이러한 다양한 명상 유파를
일일이 다 배울 수는 없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명상은 두 날개라 할만한
집중의 요소와 관찰의 요소가 있는데
전자를 지(止)
후자를 관(觀)이라 하여
예로부터 지관병수(止觀竝修)라 하였습니다.
새가 날려면 두 날개가 동시에 저어야지요.
생각을 멈추고
고요히 관찰함이 함께할 때
마음은 밤하늘의 별처럼
밝고 반짝반짝 깨어있는 상태로 이릅니다
(惺惺寂寂).
정혜쌍수(定慧雙修)라고도 하지요.
집중을 통해 선정(삼매)에 들고
관찰을 통해
지혜와 통찰(깨달음)에 이르는 길이 명상입니다.
최훈동 원장은
50년 간 불교 공부와 명상 수행을 하고
38년간 정신치료를 해왔다.
서울의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에서
수련을 마친 정신과 의사로
현재 한별정신건강병원장이자
서울의대 외래 교수로 있다.
주요 저서로
〈정신건강교실〉 〈나를 넘어선 나〉
〈나를 안아주는 명상연습〉
주요 논문으로
〈유식사상과 심층심리학의 비교 시론〉
〈무아사상의 정신치료적 의미〉
〈사무량심과 치료적 자질〉
〈불교와 정신치료〉 등이 있다.
밴드 〈휴앤심〉에서
불교를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현대불교신문
최훈동
/ 한별정신건강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