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치며 단 한 번의 파열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지요. 소리가 빠져나간 유리잔, 그것은 꼭 혼이 빠져나간 몸뚱어리 같았습니다. 어쩌면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금관 역시 소리의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금덩이를 천 번도 넘게 두드려 펴던 소리, 연푸른 경옥을 쪼개어 갈고 갈던 소리. 그 많은 소리들을 고스란히 쌓아 빛으로 일으킨 나무, 그 위에 따로 가린 고갱이들을 곡옥과 영락으로 빚어 찰랑찰랑 늘어뜨린,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변용 말이지요.
빛의 몸을 입은 소리, 그것을 머리 위에 두신 임금님에겐 그 빛이 온몸을 휘돌아 마침내 세상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화했을 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쯤은 돼야 소리가 소리를 부른다는 이치 그대로, 여항과 저잣거리의 태평가에서부터 깊은 산 험한 골짜기 이름 없는 백성들의 작은 탄식 소리까지 비로소 그 사슴뿔 같은 입식 속으로 낱낱이 빨려 들지 않았겠습니까.
가볍고 얕은 소리들만 웃자라 오래고 실한 믿음들을 하나둘씩 허물어 가는 나날들, 나는 곧잘 박물관을 찾아 금관 앞에 섭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은하의 가장 빛나는 한 부분을 옮겨 온 것만 같은 빛무리에 휩싸여, 까마득 흘러간 저편의 소리에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곤 하는 것입니다. 마치도 행방이 묘연한 만파식적을 다시 찾아 듣는 듯.
2001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입니다. 아마도 경주의 금관을 보고 깊은 감상을 하고 난 후에 적은 글이겠지요. 그냥 박물관을 허투루 갔다가 어, 좋네! 멋있네! 하고 온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어떤 사물이든 그 안에는 깊은 사유와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것이지요.
실수로 들고 있던 유리잔을 떨어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유리잔은 바닥에 부딪치며 단 한 번의 파열음으로 산산조각이 나버렸지요. 소리가 빠져나간 유리잔, 그것은 꼭 혼이 빠져나간 몸뚱어리 같았습니다. 어쩌면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바로 그 소리가 부서진 유리조각들을 그때까지 하나의 잔으로 꽉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역시, 첫 연이 관심을 끌어냅니다. 유리잔을 하나의 유리잔으로 존재하게 한 것은 깨어지는 순간에 들린 소리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시각적 이미지를 청각적 이미지로 끌고 가겠다는 의지가 보입니다. 그렇다면 금관 역시 소리의 다른 모습일지 모릅니다. 금덩이를 천 번도 넘게 두드려 펴던 소리, 연푸른 경옥을 쪼개어 갈고 갈던 소리. 그 많은 소리들을 고스란히 쌓아 빛으로 일으킨 나무, 그 위에 따로 가린 고갱이들을 곡옥과 영락으로 빚어 찰랑찰랑 늘어뜨린,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소리의 변용 말이지요.
유리잔이 소리의 결정체이니 금관도 소리의 결정체여야겠지요. 금관을 만들기 위해 대장장이가 내리치던 소리, 경옥은 비취를 나타내는 다른 말이지요. 옥을 갈던 소리, 굽은 옥과 구슬의 찰랑찰랑 소리. 의성어의 사용이 다소 관념적으로 보이긴 해도 앞의 곡옥과 영락이라는 단어와 잘 어울립니다.
빛의 몸을 입은 소리, 그것을 머리 위에 두신 임금님에겐 그 빛이 온몸을 휘돌아 마침내 세상을 다스리는 자애로운 음성으로 화했을 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쯤은 돼야 소리가 소리를 부른다는 이치 그대로, 여항과 저잣거리의 태평가에서부터 깊은 산 험한 골짜기 이름 없는 백성들의 작은 탄식 소리까지 비로소 그 사슴뿔 같은 입식 속으로 낱낱이 빨려 들지 않았겠습니까.
자, 이제 유리잔 깨지는 소리가 금관의 소리로 바뀌고 금관의 소리는 임금의 음성으로 바뀌는군요. 임금의 음성은 다시 백성의 소리로 변합니다. 백성의 살림살이가 있는 여항과 시장인 저잣거리의 태평가 소리, 탄식 소리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소리'라는 측면에서는 일관성이 있어 보입니다.
가볍고 얕은 소리들만 웃자라 오래고 실한 믿음들을 하나둘씩 허물어 가는 나날들, 나는 곧잘 박물관을 찾아 금관 앞에 섭니다. 그러면 그때마다 은하의 가장 빛나는 한 부분을 옮겨 온 것만 같은 빛무리에 휩싸여, 까마득 흘러간 저편의 소리에 닫혔던 마음이 활짝 열리곤 하는 것입니다. 마치도 행방이 묘연한 만파식적을 다시 찾아 듣는 듯.
자, 원래 시란 돌고 돌아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법이지요. 이제 자신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시인은 가볍고 얕은 소리에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도 금관을 보면 먼 역사에서 알려주는 교훈을 듣는군요. 역시나 왕의 피리를 끌고 와서 현재의 자신에게도 그 영향력이 미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번 시는 다소 이해하기가 쉬운 시인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는 쉬워도 쓰려고 하면 이렇게 쓰기가 어렵습니다. 시인은 몇 날 며칠을 애태워가며 곱씹고 곱씹었을 겁니다. 단어 하나하나에도 신경 쓴 흔적이 보이잖아요. 옛말이 그 뜻을 선뜻 몰라도 묘하게 그 분위기만으로도 단어의 대강의 뜻이 느껴집니다. 정겹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