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관(Conception of Life)
사람에게는 누구나 꿈이 있다. 나도 사람이다. 그래서 꿈이 있다.
어릴 때 아버님 이화성(李化成)公을 여이고 홀어머니 김양금(金良琴)집사님의 따뜻한 보호아래 아무 생각없이 그러나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자라났다.
그러나 우여곡절이 내게도 스쳐지나가지 않고 내 발목을 쥐어 잡을 때도 있었다. 무엇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내가 오늘, 그리고 내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파란 하늘을 보면서 기도하였다.
그 누구도 내 심정을 정확히 알 수 없었고 나도 내일에 대한 나의 모습을 꿰뚫어 보지 못하였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나를 가리웠다.
그러나 생의 순간순간에 나는 매사 열심이었다. 초등학교 때 우등상을 받지 못하던 종업식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고 회전대 밑에서 울었던 때도 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나를 직원실로 데리고 가서 우등상을 만들어 주셨다. 그 후로 안 일이지만, 그것은 교장선생님 직인이 없는 가짜 우등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손에 쥐었을 때 밝은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보여 드릴 수 있었다.
중학교 때는 남이 하는 것은 다 하고 싶었다. 운동, 공부, 웅변, 연극 좌우간 학교에서 하는 일이면, 내 실력도 모른 체 나는 무조건 도전하였다.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군대에 갈 때까지 별로 풍족하지 못한 가운데 내 청년기의 삶의 도화지는 다채롭게 그려가고 있었다. 결국 이 때까지 나는 무엇이 되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였다.
이런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은 없다. 내가 무엇이 되고자 하는 그 순간 나는 이미 나의 본성을 떠나기 때문이다. 자연인 이덕휴는 그 무엇이 될 수는 없다. 의지의 자유로운 결정권은 오직 神만이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실로 일찌기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의 길은 내가 꾸며 나간다는 발상이야말로 대단한 카리스마를 가지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내지 못한다. 그러한 카리스마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것이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세상은 카오스(kaos, 혼돈)의 상태가 초래되고 나아가서 독재자를 낳는 법이다. 무엇이 되겠다고 하는 그 발상부터가 이미 남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인류를 위한 봉사의 길일지라도 결코 그것이 나의 의지의 결정으로 보아서는 않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한(kahdoshi, holly) 뜻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진정 남에게 봉사하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의지라고 믿어야 한다. 이러한 철저한 믿음이 없으면, 어느샌가 나의 일은 남을 위한 일이 아니고 오직 나를 위한 나에 의해서 일어나는 자아독존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철저히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행하심으로 나를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믿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나는 무엇이 되고자 해 본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나의 실존은 "~하고 있다(doing somthing)"는 현실자존에 있을 뿐이었다.
그것은 나의 포기가 아니라 관용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남도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남의 것을 훔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행하고 있는 것 그 자체일 뿐이다. 그것이 선하든 악하든 그 결정권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나는 한 번도 나의 의지를 관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다만 나일 뿐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지금도 믿고 있다.
나를 내세우고자 하는 자는 망할 것이요, 나를 죽이는 자는 흥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나의 인생 좌우명으로 살아 가고 또 그렇게 마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