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충용백에 봉해진 위소보
놀라움으로 얼굴이 흙빛이 된 대장은 생각했다. (이 꼬마 녀석은 단검을 가죽신발 속에 숨겨 놓았었군. 정말 이상하다. 어째서 몸을 수색할 때 찾아내지 못했지?) 소비아는 물었다.
[도대체 나에게 투항하겠느냐, 안 하겠느냐? 나를 여사황으로 모시겠느 냐?]
대장은 말했다.
[내가 공주를 옹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 부하들이 결코 그 명령을 좇지 않을 것이오. 막사과에는 이십여 화창영이 있는데 우리는 일영(一 營)밖에 되지 않소. 설사 반란을 일으킨다 해도 나머지 십구 영을 이기 지 못할 것이오.]
소비아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위소보에게 설명 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그녀는 이십 영의 화창대를 표현하기 위해 열 손가락도 모자라 신발을 벗고 발가락까지 사용하여 이십이라는 수를 채 웠다. 위소보는 간신히 알아차렸다. 그는 이 일은 꽤 까다롭다고 생각 하며 침대에 앉아 생각해 보았다. (대장이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그를 죽여봤자 소용없다.) 그는 소비아에게 말했다.
[대장이 싫다면 부대장을 불러서 반란을 일으키도록 하시오.]
소비아는 말했다.
[부대장?]
위소보는 말했다.
[부대장을 불러 오시오.]
소비아는 대장을 문가로 밀어 내며 화창으로 그의 등을 겨누고 말했다.
[부대장을 불러 와. 그대가 만약 다른 짓을 한다면 나는 즉시 총을 쏘 겠다.]
대장은 할 수 없이 큰소리로 부대장을 불러서 들어오게 했다. 잠시 후 부대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쌍아는 이미 문 뒤에 숨어 있다가 부대 장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손가락으로 그의 등에 있는 혈도를 찍어 꼼짝 못하게 했다. 쌍아는 즐거운 듯 말했다.
[상공, 외국 귀신의 혈도도 매일반이군요. 저는 귀신들의 혈도는 다른 줄 알았어요.]
위소보는 웃었다.
[외국 귀신도 똑같이 눈이 있고 코가 있으며 손과 발이 있으니 자연 혈 도가 있겠지]
그는 부대장의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으며 소비아에게 말했다.
[그대는 부대장에게 대장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라고 하시오. 그가 응 하지 않는다면 소대장을 불러서 그를 죽이도록 하시오.]
소비아는 그 계책이 무척 묘한지라 부대장에게 말했다.
[그대가 대장을 죽이고 화창영을 이끄는 대장이 되어 나의 명령을 듣도 록 해라. 그대가 대장이 되지 않으려 한다면 나는 소대장을 시켜 그대 와 대장을 죽이고 소대장을 대장으로 삼겠다. 그대는 죽이겠느냐, 못 죽이겠느냐?]
위소보는 말했다.
[쌍아, 그대는 그의 혈도를 풀되 다리의 혈도는 풀지 말아요.]
쌍아는 그 말에 따라 읫몸의 혈도만을 풀어 주고 차고 있던 칼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소비아는 다시 한 번 물었다. 대장은 크게 욕지거리 를 하며 위협적인 말을 했다. 부대장은 평소 대장과 감정이 많았다. 그 는 군사를 데리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으나 대 장이 욕하는 소리가 너무 악독하여 불끈 화가 났다. (내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면 소대장이 대장이 되려고 반드시 너와 나를 죽일 것이다.) 그는 즉시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대장의 머리를 잘랐다. 한칼로 목을 자 르자 소비아와 위소보, 쌍아 세 사람은 일제히 잘했다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소비아가 부르짖은 것은 나찰말의 혁랍소(赫拉笑)이고 위소보와 쌍아가 부르짖은 것은 중국말로 띵호아였다. 소비아는 부대장의 손을 잡고 잇따라 그가 용감무쌍하고 승부욕이 강하 다고 칭찬했으며 즉시 화창영의 대장으로 승진시켜 주며 말했다.
[그대는 앉으시오. 우리 자세히 상의합시다.]
부대장은 눈살을 찌푸리며 위소보와 쌍아를 가리켰다.
[이 두 명의 어린애가 마술을 사용하여 나는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소 이다.]
소비아는 위소보에게 말했다.
[그대는 마술을 풀어 주시오.]
쌍아는 빙그레 웃고 부대장의 하반신 혈도를 풀어 주었다. 소비아는 부 대장에게 분부했다.
[그대는 삼 소대의 소대장과 부소대장들을 들어오라고 하시오. 나는 중 국 어린애들에게 마술을 써서 모든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게 하겠소.]
그녀는 위소보와 쌍아에게 그 말을 전했다. 부대장은 명을 받고 나갔 다. 잠시 후 여섯 명의 정부 소대장들이 문 밖에 나란히 섰다. 부대장 은 하나하나 방안으로 불러들였고 쌍아는 차례로 여섯 명의 허리에 있 는 지사혈(志舍穴)과 허벅지에 있는 환도혈(環跳穴)을 찍었다. 소비아 는 말했다.
[부대장은 나를 여사황으로 옹호할 것을 결심했소. 우리들은 군사를 데 리고 나가 태후를 죽일 것이오. 그대들은 복종하겠소, 못하겠소?]
여섯 명의 정부 소대장은 대장의 시체가 나뒹구는 것을 보고 일이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비아의 그 같은 말을 듣자 더욱 간담 이 서늘해져 서로의 얼굴만 쳐다볼 뿐 감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 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청나라가 중국의 강산을 가로챌 때 오랑캐들은 양주십일이라는 사건을 일으켰다. 살인과 방화는 말할 것도 없고 간음과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노황야는 그로 인해 황제가 되었다. 제기랄! 나는 그들에게 막사과십일 을 일으키도록 해야겠다.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면 어지러워질수록 좋 은 것이 아닌가? 무법천지를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떻게 황제 의 자리를 가로챌 수 있겠는가?) 그는 소비아에게 말했다.
[그대는 여러 사람들에게 막사과의 성으로 들어가 싸움을 하고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도록 명령하시오. 그들에게 장군이나 큰벼슬아치를 죽 이라고 명하시오. 그러면 많은 금과 은을 내리겠으며 눈에 띄는 미녀를 마구 가로채서 마누라로 삼아도 좋다고 하시오.]
소비아는 생각해 보니 그럴듯하여 부대장에게 말했다.
[그대는 가서 전체 화창수들을 불러 모으시오. 내 그들에게 말을 하겠 소.]
육백여 명의 화창수들은 엽긍의 광장에 모였다. 부대장은 열두 명의 화 창수들을 데리고 들어와 혈도가 짚힌 여섯 명의 정부 소대장들을 광장 으로 떠메고 나가게 했다. 소비아는 계단 위에 서서 큰소리로 말했다.
[화창수들이여! 그대들은 모두 나찰국의 용사들이며 나라를 위해 커다 란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대들의 월급은 너무나 적었다. 또한 그대들 에게는 아름다운 여인은 물론 돈조차 없고 마실 술도 부족하며 살고 있 는 집도 너무 비좁고 불편하다. 막사과 성 안에는 돈이 많은 사람이 있 는데 그들은 좋은 집에서 살고 있으며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고 아 름다운 여인을 많이 데리고 있으나 그대들에게는 없다. 이것이 공평한 가?]
화창수들은 그 소리를 듣자 일제히 부르짖었다.
[불공평하오! 불공평하오!]
소비아는 말했다.
[돈 있는 자들은 뚱뚱하고 우둔하며 처먹기만 해서 돼지 같다. 따라서 만약 그대들과 무공으로 겨룬다면 그대들을 어찌 이길 수 있겠는가? 그 부자들의 총 쏘는 재간이 그대들보다 뛰어난가? 그들의 도법이 그대들 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들은 나라를 위해, 사황을 위해 공로를 세운 적이 있는가?]
그녀가 이 같은 질문을 던지자 화창수들은 큰소리로 대답했다.
[연특(年特).]
위소보는 화창수들이 연특, 연특하며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다. 나찰말 로 연특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을 알고 있었지만 소비아가 한 말을 이 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공주가 화창수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하는데 모두들 말을 듣지 않는 줄 알고 근심을 했다. 소비아는 다시 말 했다.
[그대들은 모두 마땅히 장군이 되어야 하고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대 들은 하나같이 벼슬이 오르고 재물을 모을 수 있어야 한다.]
화창수들은 큰소리로 환호했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소비아 공주, 그대는 무슨 방법이 있어서 우리들의 벼슬이 오르도록 하고 또 재물을 긁어모을 수 있다고 하시오?]
소비아는 말했다.
[그대들은 장군이 되고 싶지 않은가?]
화창수들은 부르짖었다.
[되고 싶소.] [그대들은 많은 돈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물론 가지고 싶소.] [그대들은 아름다운 여인을 품에 안고 싶지 않은가?]
화창수들은 와, 하고 환호성을 터뜨리며 부르짖었다.
[갖고 싶소. 갖고 싶소.] [좋다. 그대들은 모두 막사과 성안으로 들어가 다른 십구 영의 화창수 들에게 이 소비아 공주가 곧 여사황이며 전 나찰국에서는 모두 나의 말 을 듣게 되었다고 해라. 그대들 모든 화창수들이 돈 있는 집을 선택하 여 그 똥돼지 같은 부자와 더불어 무공을 겨루어 그를 죽일 수 있다면 그 부자의 커다란 집과 금과 은 그리고 아름다운 여인과 마차, 준마, 의복, 하인, 시녀, 맛좋은 술 등 모든 것은 용감한 화창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대들에게는 용기가 있는가? 사내 대장부인가? 아닌가? 감히 사람을 죽여 돈을 빼앗고 여자를 빼앗을 수 있는가?]
화창수들은 일제히 소리내어 부르짖었다.
[할 수 있소! 할 수 있소! 사람들을 죽여 돈을 빼앗고 여자를 빼앗는 것을 어찌 할 수 없겠소?]
소비아는 크게 기뻐서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매우 잘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대들이 겁쟁이로서 감히 큰일 을 저지르지 못할까봐 걱정이다. 빨리 복특가(伏特加:보드카 술)를 가 져오너라. 이봐, 그대들은 지하실로 가서 가장 좋은 복특카를 모조리 가져오너라.]
이 사황 엽궁의 지하실에는 수십 년 묵은 술들이 저장되어 있었는데 명 귀하기 이를 데 없어 사황, 황후, 공주, 왕자 및 왕공대신들만 마시는 것이었다. 이런 화창수들은 맛볼 수 없는 것이었다. 소비아의 명이 떨 어지자 병사들은 와, 하고 크게 기뻐하며 대뜸 수십 명이 달려가 술을 가져왔다. 병사들은 삽시간에 저장소에서 보드카 병을 들어 내와 다투 어 마셔대기 시작하며 환호성을 질렀다.
[소비아, 소비아 여사황, 오랍(烏拉), 오랍, 오랍, 소비아 여사황, 오 랍, 오랍, 오랍!]
나찰말로 오랍은 바로 만세라는 뜻이었다. 위소보는 잘 몰랐으나 병사 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통쾌히 술을 마시며 끊임없이 '소비아 여사황 오랍'이라고 부르짖자 열과 성의를 다해 옹호한다는 뜻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소비아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그들에게 여섯 명의 소대장들을 죽이게 하여 물러서지 않도록 하시 오.]
소비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낭랑히 부르짖었다.
[나찰국의 건장하고 준수한 용사들이여! 모두들 들어라! 나는 그대들에 게 부자를 죽이고 돈을 빼앗고 여인을 가로채도록 분부했다. 그러나 태 후는 허락하지 않고 이 나쁜 자들을 보내와 그대들의 죄를 다스리려 했 다.]
그녀는 여섯 명의 정부 소대장을 손짓했다. 그 즉시 십여 명의 화창수 가 차고 있던 칼을 뽑으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나쁜 자식들을 죽이자!]
그들은 십여 자루의 긴 칼을 휘두르더니 즉시 여섯 명의 정부 소대장을 쳐죽였다. 나찰국의 사람은 본래 성질이 급하고 사나우며 조야한 편인 데 보드카를 마시자 전신이 후끈 달아올라 여섯 명의 소대장의 피와 살 이 륑기는 것을 보자 더욱 그 성질을 누르지 못해 큰소리로 부르짖었 다.
[나쁜 자들을 죽이러 가자! 돈을 빼앗자! 여자를 가로채자.]
소비아는 말했다.
[그대들은 막사과 성 안으로 들어가 십구 영의 화창수들에게 말해서 모 두 함께 일을 처리하도록 해라. 어느 대장이 허락을 하지 않는다면 즉 시 죽여라. 어느 귀족 장군 대신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즉시 죽이고 그 집안의 금과 은, 아름다운 처와 딸을 모조리 데리고 와서 나누어 가지 도록 해라. 나쁜 놈들의 집은 불태워 버려라.]
병사들은 큰소리로 환호성을 지르며 다투어 긴 칼을 뽑아들고 등 뒤에 화창을 메고 말을 끌어내 올라타고 잠시 후에는 말발굽소리도 요란하게 떼를 지어 막사과 성으로 달려갔다. 소비아는 부대장에게 말했다.
[그대도 가서 빼앗도록 하시오. 겸손할 것 없소. 가장 중요한 것은 다 른 화창병들과 충돌하지 말고 함께 빼앗는 것이오. 그대는 사람들을 데 리고 극리모림(克里姆林:크리믈린) 궁으로 달려가서 사리찰과 피득을 잡으시오. 궁의 금은보화와 아름다운 궁녀들은 모두 빼앗도록 하시오. 그것들은 모두 내가 그대에게 내리는 것이오.]
부대장은 크게 기뻐서 명을 받더니 말을 타고 떠나갔다. 소비아는 한숨 을 내쉬며 전신의 기운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고 계단 위에 앉아서 말 했다.
[정말 피곤하구나.]
위소보는 말했다.
[내가 그대를 부축해 방으로 모셔가지.]
소비아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잠시 후에 말했다.
[우리 망루(望樓)로 올라가 봐요.]
이 엽궁은 마석(麻石)을 쌓아 만든 것이었다. 망루는 높이가 팔, 구 장 이나 되었으며 원래 적의 형세를 살필 때 사용했었다. 나찰국이 나라를 세우기 전에 막사과는 하나의 대공국(大公國)이었으며 막사과의 대공작 이 군웅들을 모조리 무찔러 스스로 사황이 되었다. 전조(前朝) 사황은 사냥을 할 때 적이 암습을 해올까봐 막사과성 밖에 이 같은 한 채의 엽 궁을 만들어 적을 막고 원군을 기다리려 했던 것이었다. 소비아는 위소 보와 쌍아를 데리고 주루로 올라가 서쪽을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막사 과 성 안에 등불이 점점이 켜 있는 것이 보였지만 어두운 밤이라 매우 조용했다. 소비아는 걱정을 하며 말했다.
[어째서 싸우지 않을까? 그들이 두려움을 느꼈을까?]
위소보는 위로의 말을 했다.
[두려워 마오, 두려워 마오.]
소비아는 다시 물었다.
[그대는 병사들에게 살인을 하며 돈을 빼앗고 여자를 가로채게 한다면 곧 태후를 죽이고 피득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중국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해왔소.]
그는 과거 양주성에 있을 때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서 청나라 군사들이 성을 공격해 왔을 때의 일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청나라 군사들 이 입관(入關), 즉 산해관 안으로 들어온 후에 강소성 등지에서 한인들 의 맹렬한 저항을 받았고 양주는 더욱더 한인들이 굳건히 지켜 함락되 지 않았다. 청나라 장수는 사병들에게 성을 깨뜨린 후 간음과 노략질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날이 열흘 동안이라고 미리 허락했다. 이리하여 양주십일이라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실로 참혹했다. 위소보는 어려서부터 양주에서 커 왔기 때문에 청나라 군사가 성을 공 격하다가 함락하지 못하자 장수가 어떻게 부하들에게 돈을 빼앗고 여자 들을 빼앗도록 허락했으며, 청나라 군사들이 어떻게 공격을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왔다. 나중에 북경에서 다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과 거 이자성의 부하가 어떻게 북경에서 돈을 빼앗고 여자들을 능욕했으며 장헌층(張獻忠) 등이 먼저 부하들에게 성을 함락시킨 후 사흘 동안 노략질을 허락했다 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려면 반드시 천하가 어지러워야 하며 천하를 어지 럽게 하려면 반드시 병사들로 하여금 돈을 빼앗고 여자를 강탈하도록 해야 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화창영의 사병들이 감히 반란 을 일으키려고 하지 않자 돈을 빼앗고 여자를 강탈하는 비결을 말하게 된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나찰의 병사들 역시 중국의 병사들과 다를 바가 없어서 그 한 마디의 비결은 귀신처럼 맞아 떨어졌다. 한참을 기 다리자 갑자기 막사과 성 안 어둠 속에서 한 무더기의 불꽃이 피어올랐 다. 소비아는 크게 기뻐서 부르짖었다.
[시작했다!]
그녀는 위소보를 껴안고 입맞춤을 하며 펄쩍펄쩍 뛰기도 했다. 위소보 는 기뻐했다.
[그들이 불을 질렀군. 그러면 됐소. 살인과 방화는 반드시 함께 행해져 야 하오.]
얼마 후 막사과 성 안에서는 불꽃이 사방에서 일었다. 동쪽에서 한 가 닥 검은 연기가 오르고 서쪽에서는 한 무더기의 화광이 피어올랐다. 소 비아는 손뻑을 치며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모두들 살인 방화를 하고 있군. 소보, 그대는 정말 총명해. 계책이 정 말뛰어나군.]
위소보는 빙그레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살인 방화와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 중국 사람들의 재간이며 그대 들 나찰 귀신들보다 백 배나 더 뛰어난 편이지. 그와 같은 계책이 뭐가 희한하다고 그래? 우리는 언제나 그렇게 해왔는데.) 소비아는 말했다.
[그대가 소대장을 죽이도록 했기 때문에 부득이 끝까지 일을 해낼 수밖 에 없으며 다시 돌아서려고 해야 돌아설 수도 없게 되었지. 어린애가 정말 총명해. 중국 대관은 정말 대단하다고!]
위소보는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투명장(投名狀)이지.]
소비아가 물었다.
[무슨 뜻이지?]
위소보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목숨을 떼어 놓고 달려든다는 뜻이오.]
그는 나찰국 사람들은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중국 사람들이 녹림으로 떨어져 도둑이 되려고 할 때 괴수는 새로 가입한 형제들에게 사건을 저 질러 한 사람을 죽이게 했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 후에는 밀고하지 않 기 때문이었다. 수호전에서 임충이 양상박의 패거리가 되고자 했을 때 그는 사람을 죽이는 사건을 저질러야 했던 것이다. 위소보는 그와 같은 이야기를 많이 들어 왔기 때문에 그 같은 계책을 알고 속으로 생각했 다. (우리 중국 사람들의 방법을 나찰 귀신들은 하나도 모르고 있다. 내가 보기에 나찰 군사들은 흉악하고 거칠기 짝이 없지만 상대하기는 어렵지 않은 것 같다.) 소비아는 막사과 성 안의 불길이 점점 거세게 치솟고 사방으로 퍼지는 것을 보고 걱정했다. 화창수들이 마구 약탈하고 사람을 죽이면 어떤 광 경이 벌어지게 될지 모르는 일이라 위소보에게 물었다.
[살인, 방화와 돈을 빼앗고 여자를 강탈하게 된 후에는 어떻게 되지?]
위소보는 멈칫했다. 그는 반란을 일으키려면 사병으로 하여금 살인 방 화와 돈을 빼앗고 여자를 강탈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만 알았지 그 후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그것 말이오? 충분히 빼앗지 않으면 멈추지 않고 충분히 죽이지 않으 면 멈추지 않지요.]
소비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러나 일시에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세 사람은 한참을 지켜보다가 침궁으로 들어가 조용히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튿날 이른 아침, 그 화창영의 부대장이 일소대의 인마를 거느리고 엽궁으로 달려와 소비 아에게 보고했다. 이십 영의 화창대가 어젯밤 여사황의 명령을 받들어 하룻밤 동안 금은과 미녀를 무수히 빼앗고 이미 태후 나달여아를 죽였 다는 것이었다. 소비아는 크게 기뻐서 벌떡 일어서며 부르짖었다.
[나달여아를 죽였다고? 피득은?] [어린 피득은 이미 잡아서 극리모림 궁의 지하실에 감금해 놓았습니 다.]
소비아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혁랍소. 혁랍소!]
이때 말발굽소리가 울려퍼지며 다시 많은 인마가 달려왔다. 소비아는 안색이 변해 놀라 물었다.
[무슨 사람들이지?]
부대장은 말했다.
[막사과 성 안의 왕공대신 장군들이 일제히 폐하를 모시고 가서 나찰국 의 여사황으로 등극케 하려고 오는 것입니다.]
소비아는 그 말에 흐뭇해져서 대뜸 위소보를 얼싸안고 그의 양쪽 뺨에 잇따라 입맞춤하며 부르짖었다.
[중국의 어린애! 정말 훌륭한 계책이군.]
곧이어 말발굽소리가 엽궁에서 멈추는 것을 들을 수 있었고 가죽신발이 땅을 밟는 소리가 저벅저벅 나면서 한 때의 사람들이 궁안으로 들어왔 다. 앞장을 선 사람은 대신 파다니자(波多尼玆) 친왕이었다. 그는 소비 아 앞으로 걸어오더니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왕공귀족과 대신 장군들은 의결했습니다. 아무쪼록 소비아 공주께서 궁 안으로 들어가 대국을 이끌어 주시고 난동을 평정하여 평화를 되찾 도록 해주소서.]
소비아는 얼굴 가득히 웃음을 띄우고 고개를 끄덕여 그 말을 받아들이 고 물었다.
[반역도의 수령인 나달여아는 죽였소?]
파다니자 친왕은 대답했다.
[나달여아는 국가를 소란스럽게 하고 층신들을 살해하며 사사로이 권세 를 농락하는 등 엉큼한 마음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상제의 뜻을 받들어 처단했는데 모두들 시원하다고 한답니다.]
소비아는 말했다.
[좋소. 우리는 극리모림 궁으로 갑시다.]
대신들과 화창영의 병사들은 벌떼처럼 소비아를 모시고 막사과 성으로 달려갔다. 삽시간에 엽궁에는 위소보와 쌍아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 게 되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울화가 치밀어 욕을 했다.
[제기랄! 이 나찰 공주는 다리를 지나가자마자 판대기를 뜯는 격이군. 그리고 새 사람이 침대 위로 오르자 중매쟁이를 담장 너머로 던지는 격 이야. 그녀가 여사황이 되었으니 우리가 필요없다는 것이겠지.]
쌍아는 미소했다.
[그대는 여사황이 그대를 남자 황후로 봉해 주기를 바라는 거죠?] [아! 그대는 나를 조롱하는군. 어디 내가 그대를 잡지 못하는지 두고 보자.]
그는 쌍아에게 달려들었다. 쌍아는 쳇, 하고 웃으면서 몸을 날려 피했 다. 이때는 초여름이라 날씨가 따뜻했다. 엽궁의 많은 꽃들은 화사한 비단처럼 활짝 핀 모습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했고 수많은 새들은 다투어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나찰국의 꽃과 벌레, 그리고 새들은 중원의 것 과 크게 달랐다. 꽃은 화사하나 향기롭지 못했고 새소리는 괴이하면서 도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위소보는 시정잡배라 이 같은 차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쌍아와 더 불어 엽궁에서 노닥거렸는데 아무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서 꽤 흐뭇하 게 지낼 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칠, 팔 일이 지난 후 소비아는 갑자기 병사를 보내 두사람을 긍 안으로 맞아들였다. 위소보가 소비아의 침궁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머리카락을 마구 쥐어뜯 으며 발로 가구를 차 펑펑, 소리가 나도록 만들고 있었다. 신경질을 부 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위소보가 들어오자 대뜸 기쁜 빛을 띄우며 말했다.
[중국 어린애 빨리 와! 방법을 강구해 봐.]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대가 만약 어려운 문제에 부딪히지 않았다면 나를 생각지도 못했겠 군. 이번에는 한밑천 두둑하게 잡아야지. 이토록 쉽게 상대를 도와 계 책을 생각해 낼 수는 없지.) 그는 물었다.
[여사황 폐하, 무슨 어려운 점이 있소?]
소비아는 연신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나는 여사황이 아니야. 그들은 내가 여사황이 되는 것이 싫다고 해.]
반나절을 얘기하고 나서야 위소보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원래 나 찰국의 법도에 의하면 여자는 사황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황태후 나달여아는 이미 죽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장군들이 나이 어린 사황 피득을 옹호하고 있었다. 이때 성 안의 난은 이미 평정되었고 소비아는 화창영의 옹호를 받고 있 었지만 대신들온 이미 손을 써서 카자흐 기병들을 움직여 막사과 성 밖 에 주둔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언제든지 그들을 성 안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다. 소비아가 다시 화창영의 군사들을 불러서 난을 일으키는 것은 이미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극리모림 궁에서는 연일 회의가 열렸는데 왕공대신들은 두 파로 나뉘어 져 있었다. 한 파는 소비아를 옹호했고 한 파는 피득을 옹호하면서 서 로 다투느라고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사황 피득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모두 손에 실권을 귀고 있는 장군대신들로서 여사황이 등극하여 새로운 사람들이 권좌에 앉을까봐 두려워했다. 소비아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주 로 출세하지 못한 귀족과 군인들인데 그들은 새로운 주인이 등단하여 자기들에게 국물이 흘러들어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소비아는 다행히 화창영의 옹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병권을 손에 쥘 수가 있어서 황제 를 옹호하는 보황파(保皇派)에서도 감히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러나 보황파는 카자흐 기병들을 지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실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두 파가 만약 전쟁을 일으키면 승패는 말하기 어려울 지 경이었다. 위소보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국가대사를 나는 잘 모르는데 무슨 개방귀 같은 계책을 생각 해 내라는 말인가? 제기랄! 짠물에 담가 놓은 오리알을 굴리는거다. 그 래야 그들 두 파에서 혼전이 벌어지게 되었을 때 이 소보가 총탄에 맞 아 나찰국의 젓갈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 그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그거야 쉬운 노릇이며 방법도 있소. 하지만 나는....나는 한밑천 잡아 야겠소.]
그는 대신 조건이 있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나찰외 말을 몰라서 아예 중국말로 한밑천 잡아야겠다고 말했다. 소비아는 물었다.
[한밑천이 뭐지?]
위소보는 말했다.
[한밑천 잡는다는 것은....이것은....나의 방법을 그대에게 공짜로 줄 수는 없다는 것이오. 그대가 나에게 물건을 많이 주면 내가 방법을 그 대에게 알려주는 것이오.]
소비아는 크게 기뻐서 재빨리 말했다.
[무척 좋아. 좋구 말구. 한밑천 잡자고? 우리 한밑천 잡자! 그대가 무 잇을 요구하든 난 모두 응낙하지. 그대는 나의 남자 황후가 되려고 하 는 것이 아닌가?]
위소보는 깜짝 놀라서 속으로 생각했다. (마누라를 삼으려면 아가가 그대보다는 훨씬 낫고, 설사 쌍아라는 나이 어린 하녀만 하더라도 그대같이 전신에 털이 부숭부숭 난 나찰의 여자 보다는 한결 낫지.) 그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대의 남자 황후가 되는 것도 물론 좋지만, 그러면 그대는 여자 사황 이 될 수 없다오.]
소비아는 재빨리 그 이유를 물었다. 위소보는 말했다.
[왜냐하면....이건 빌어먹을! 꽃이 피지 않기 때문이오.]
그는 설명을 할 수 없자 아무렇게나 양주 지방의 상소리를 마구 지껄였 다. 소비아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어 다시 물었다.
[혹시 중국 남자가 황후가 되면 나찰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인 가?]
위소보는 재빨리 말했다.
[그렇소. 나찰국의 남자들은 스스로 자기가 준수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들이 남자 황후가 되지 못하면 그대를 미워하고 때릴 것이오.]
소비아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나찰의 남자들이 틀림없이 질 투를 하리라 생각하며 말했다.
[그대가 나의 남자 황후가 되는 것 말고 다른 무엇을 요구한다면 내가 응낙하겠어.] [첫째, 나는 나찰국의 대관이 되어야겠소.] [그건 수윌한 노릇이야. 내가 여사황이 된 후 그대를 백작으로 봉해 동 쪽의 타타르족을 다스리도록 하겠어. 그대는 싯누런 얼굴이고 코가 납 작한데 타타르 사람들 역시 누런 얼굴에 코가 낮아. 그들은 그대에게 잘 복종할 것이야.] [두 번째는 그대와 중국 황제가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오. 그대는 편 지를 쓰시오. 내가 그 편지를 북경으로 가져가겠소. 나찰의 여사황과 중국 황제가 친구가 되어 입맞추고 껴안아야 하오. 중국 병사들은 매우 무섭소. 하나같이 마술을 할 줄 알아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나찰의 병사들은 움직이지 못할 것이오. 싸우면 나찰인이 죽소. 나는 그대를 좋아하는데 그대가 죽으면 나는 울 것이오.]
소비아는 그의 말을 듣고 크게 감동하였다. 쌍아가 손을 써서 혈도를 짚자 화창영의 부대장과 여섯 명의 정부 소대장이 즉시 움직이지 못하 는 것을 소비아는 친히 목격한 바였다. 그녀는 중국의 무공이 배우기 어렵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위소보 역시 모르고 있었지만 중국 사 람들은 하나같이 그와 같은 마술에 뛰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러니 중국 황제와 싸우면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중국 어린 애가 자기에게 진실을 토로하는 것이 가상하게 여겨져 그녀는 즉시 그 를 껴안고 그의 입에 입맞춤을 하고 말했다.
[중국 어린애, 나 역시 그대를 좋아해. 무척 좋아해. 나찰 병사는 중국 군사를 이기지 못해. 모두 싸우지 말고 친구가 되자.]
소비아는 쪽, 하고 다시 그에게 입맞춤을 하고 물었다.
[또 무슨 한밑천이 있나? 다시 잡아도 좋아.]
위소보는 잠시 생각해 보고 나서 말했다.
[없소.] [좋아. 그대는 나에게 빨리 여사황이 되면 어떻게 통치를 해야하는지 가르쳐 줘.]
위소보는 이 일이 수월한 노릇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녀는 조정의 일들 을 물었다. 위소보는 좋은 계책이 떠오르지 않아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소비아는 그가 요령을 부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굴에 불쾌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대가 나를 속인다면 나는 그대를 죽이겠어.]
위소보는 초조해서 재빨리 말했다.
[속이지 않소. 절대 속이지 않소.] [그렇다면 내가 여사황이 되는데 좋은 방법이 뭐지?]
위소보는 말했다.
[이거....이거....]
소비아는 화가 나서 말했다.
[뭐가 이거야? 조정의 한 파는 나를 옹호하고 또 다른 한 파는 반대하 며 두 파에서 싸움을 하려는 거야. 만약 우리 파가 지면 어떻게 해?]
위소보는 갑자기 소황제로부터 들은 말이 떠올랐다. 만주의 태종황제가 과거 네 명의 패륵을 세웠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패륵은 대선(代善), 두 번째 패륵은 아민(阿敏), 세 번째 패륵은 망고이태(망=初-刀+遞- , 褥古爾泰), 네 번째 패륵은 황태극(皇大極)이었다. 위소보는 물론 네 패륵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네 명의 패륵은 당시 모두 다 권세 를 쥐고 있었고 많이 다투었다. 그후 넷째 패륵이 대패륵의 지지를 받 아 상대방을 압도하고 대위(大位)를 이어받았다. 그래서 대선 집안의 자손들은 퍽이나 권세를 누리게 되었는데 강친왕 걸서는 바로 대선의 후예였다. 그는 이 일이 생각나서 말했다.
[싸우지 말고 천천히 해요. 그대와 피득이 모두 사황이 되는 것이오. 그리고 장래 그대를 반대하는 대신과 장군들을 하나 하나 천천히 제거 하는 것이오. 그대가 기회를 보아 피득을 죽인 후 재차 여사황이 되는 것이오.]
소비아는 그 계책이 무척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여자 가 사황이 될 수 없다는 말을 계속 하고 있으니 정말 울화통이 터질 지 경이라고 말했다. 위소보는 청나라 개국 초에 순치 황제는 여전히 소황 제였는데 대권은 모두 섭정왕 다이곤(多雨袞)의 수중에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말했다.
[그대가 여사황이 될 수 없다면 먼저 섭정왕이 되시오.]
소비아는 물었다.
[섭정왕이 뭐야?] [섭정왕은 사황이 아니오. 그러나 명령을 내려서 사람을 죽이고 사람의 볼기를 치도록 할 수 있으며 돈을 줄 수도 있고 그들의 벼슬을 올릴 수 도 있소. 사황은 가짜이고 힘이 없소. 섭정왕이 진짜이고 힘이 있어 사 람을 죽일 수도 있고 볼기를 때릴 수도 있으며 사람의 벼슬을 올릴 수 도 있고 돈을 하사할 수도 있으니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고 모두 섭정왕 의 말을 듣고 사황의 말은 듣지 않소.]
소비아는 크게 기뻐서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혁랍소, 혁랍소!]
소비아를 옹호하는 왕공장군들은 사람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소비 아는 그 중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위소보가 바친 계 책을 가지고 상의했다. 소비아는 막사과의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등극하여 여사황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 선례가 없었다 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신들은 섭정왕을 세우자는 계책이 모두 훌륭하 다고 생각하며 대권을 손에 쥘 수만 있다면 사황이 되고 안 되고는 별 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한참 동안 상의를 한 후 한 가 지 방법을 강구했다. 그것은 소비아의 친동생인 이범을 대사황이 되도 록 하는 것이다. 대소 사황을 나란히 세워서 피득을 옹호하는 일파의 반대를 없애고 소비아 공주는 섭정 여왕이 되어 모든 조정의 일을 처리 한다는 것이었다. 계책이 정해지자 소비아는 즉시 화창영의 군사들을 모으고 다시 전체 왕공대신들을 불러서 그 새로운 법을 모두에게 선포 했다.
그녀는 대신들을 임의로 파면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으며 그녀의 의견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일률적으로 벼슬을 올려 주고 상금 을 내리겠다고 했다. 왕공대신들은 자기의 권세와 이익에 손상이 없고 선조의 규칙을 깨뜨리지 않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소비아를 옹호 하는 파가 앞장 서서 소비아 섭정왕에게 절을 하자 나머지 왕공대신들 모두 그 뒤를 따랐다. 소비아는 크게 기뻐서 사람을 시켜 친동생인 이 범을 불러오고 다시 소사황 피득을 술창고에서 석방하여 두 사람이 대 소 사황이 되도록 했다. 그녀 자신은 두 아우의 아래쪽에 앉아 백관의 벼슬을 올리고 상을 내리는가 하면 쫓아내고 파면하는 일 등을 하기로 했다.
이때 이범은 열여섯 살이었고 피득은 열 살이며 나이 어리고 지식이 얕 아 모두 누님의 주장을 들었다. 소비아는 대권을 쥐자 중국의 어린애 대관이 아주 커다란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교묘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을 강구해내지 않았다면 지금 자기는 여전히 엽궁에 갇혀 있으리라. 그녀는 즉시 위소보를 불러서 크게 칭찬을 했다. 위소보는 그 방법들은 중국인의 눈으로 볼 때 조금도 대단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 으며 자기는 중국에 있어서는 못난 가죽 제품을 만드는 장인에 불과했 지만 나찰국에 와서는 제갈양으로 변했으니 정말 웃긴다고 생각했다.
그는 몇 마디의 허풍을 떨려고 했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나찰 공주가 나찰의 제갈양이 되라고 하면서 자기를 옆에 붙잡아 두고 돌려 보내지 않으면 그것도 야단이었다.
[섭정왕 마마, 그대가 섭정왕이 되었으니 장래 여사황이 되는 것은 수 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외다. 단지 한 가지 일만 지킨다면 모든 사람 들이 그대에게 복종할 것이오.]
소비아는 물었다.
[무슨 일인데? 빨리 나에게 들려줘.] [일단 한 마디가 떨어지면 삼두마차를 가지고도 쫓아갈 수 없다는 것이 오.]
원래 나찰의 마차들은 세 필의 말을 매달아 끌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네 필의 말이 끌게 하는 것과는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사마난추라 는 말을 삼두마차라고 고친 것이었다. 소비아는 이해할 수 없어서 물었 다.
[삼두마차가 쫓아갈 수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지라는 것이오. 우리 중국에서는 황제의 입을 금구(金口)라고 하는데 이것은 한번 말한 것은 저버리지 않는다는 뜻이 오.]
소비아는 웃었다.
[내가 그대에게 약속한 것을 저버릴짜봐 두려운 것인가? 사랑스런 중국 의 어린애! 나찰 섭정왕이 보석 같은 입으로 한 말이니 그대들 중국 황 제의 금으로 만들었다는 입보다 더욱 귀중하다.]
그녀는 즉시 대소 사황의 이름으로 유시를 내렸다. 위소보를 동방의 타 타르 지방을 관리하고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백작에 봉하고 다시 대신에 게 명해서 한 통의 국서(國書)를 써서 중국 황제 앞으로 보내면서 이 국서를 위소보가 전하도록 했다. 거기다 다시 한 명의 사신을 파견하되 기병들이 호송토록 했으며 금은 재물도 적지 않게 내렸다. 위소보가 그 녀에게 뇌물로 준 십여 만 냥의 은표도 찾아서 모조리 되돌려 주었다. 이 밖에도 중국 황제에게 보내는 많은 예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초피와 보석 등 나찰국의 귀중한 특산물이었다. 이때 소비아는 이미 몇 명의 준수한 남자들을 뽑아서 주변에 두었기 때 문에 더 이상 위소보에게 다정하게 굴지 않았다. 그러나 위소보가 작별 을 고하는 날 소비아는 몇 달 동안의 정을 생각하고 또 그가 제의한 계 책으로 큰 공을 세웠으므로 고마움을 표시하는 뜻에서 뜨거운 밤을 보 냈다.
러시아의 역사 기록에 의하면 화창수들이 난을 일으킨 것은 오 월 십오 일에서 십칠 일까지의 삼일 동안이었다. 오 월 이십구 일 화창영은 소 비아의 지시 아래 글을 올려 이범과 피득이 나란히 사황이 되고 소비아 공주가 섭정왕이 되어 군국대사를 처리해 달라고 간하였다. 그러므로 큰 소란이 평정된 것은 유 월 중순 경이었다. 이때 날씨는 매우 따뜻했다. 위소보는 준마를 타고 2대의 카자흐 기병 의 호위를 받아 서백리아(西伯利亞:시베리아) 대초원의 동쪽에서 질풍 같이 말을 몰게 되었는데 잔잔한 바람이 얼굴을 스쳤으며 말발굽 소리 는 귓가에 울려퍼졌다. 왼쪽으로는 예쁜 하녀 쌍아가 눈같이 희고 고운 살결과 앵두같은 입술을 하고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파란 눈에 노란 수 염을 한 나찰국의 사신이 동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초피와 재물을 잔뜩 실은 수레들이 뒤를 따르고 있으니 의기양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길은 죽음에서 목숨을 건진 셈인데 조그만 목숨을 보전하였을 뿐 아니라 나찰 공주를 도와 큰 공을 세웠으니 이 모두 내가 평소 이야기 꾼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연극을 많이 본 덕택이 아닐 수 없구나.)
중국은 나라를 세운 지 수천 년이나 되었으며, 황제의 자리를 놓고 반 란을 일으켜 서로 죽이고 죽는 경험이 풍부하여 온 세계를 통틀어도 견 줄 수 있는 나라가 없었다. 위소보는 민간에 전해져 내려오는 약간의 지식밖에 몰랐으나 놀랍게도 그 알량한 지식으로 외국땅에서 위세를 떨치고 소비아를 도와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나라를 안정시킨 것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일은 희한할 것도 없었다. 청나라 개국공신들은 조잡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들이었고 학문이라고 는 별로 없었다. 군사를 통솔하여 싸우는 여러 가지의 모략은 주로 삼 국연의(三國演義)라는 소설에서 얻은 것이었다. 과거 청태종이 반간계 로 숭정 황제를 속여서 만리장성을 스스로 망가뜨리듯 원숭환을 죽인 것은 바로 삼국연의 가운데 주유가 계책을 써서 조조로 하여금 자기의 수군도독의 목을 베어 죽이는 고사를 응용한 것이었다. 실제로 주유가 조조를 속여 수군도독을 죽인 사실은 역사에 없는 일로 소설가가 만들 어 낸 것이었다. 소설가의 말이 후세에 이르러 사실처럼 되고, 그 얘기 가 중국 수백 년 동안 영향을 미쳤으니 세상일은 소설보다 더욱 이상하 다고 하겠다. 만주인들이 입관한 후 강토를 개척하여 중국의 국토는 명나라 때보다 세 배나 되었고 멀리 한나라와 당나라가 크게 성하게 되었을 때보다 훨 씬 큰 편이었다. 그런 여음(餘蔭)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니 이야기꾼 의 공로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위소보는 나찰국의 사신을 데리고 이윽고 북경에 도달하였다. 강친왕과 색액도 등 왕공대신들은 그가 돌아온 것을 보고 놀람과 기쁨에 휩싸였 다. 그날 그가 수군을 이끌고 바다로 나간 이후 종적을 알 길이 없어 조정에서는 수 차례 사람을 보내어 조사해 보았으나 한 척의 병선도, 한 명의 사병도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강희는 커다란 바다에서 태풍 을 만나 모두 사망한 줄 알고 언제나 울적해 했다. 따라서 위소보가 돌 아은다는 소식이 궁 안에 전해지자 강희는 즉시 불러서 만나기를 청했 다. 위소보는 강희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띄우고 있는 것을 보고 큰절을 하며 지나간 일을 대충 이야기했다.
강희가 이번에 그를 바다로 내보낸 주요 목적은 신룡교를 섬멸하고 가 짜 태후를 잡으려는 것이었다. 신룡교는 이미 공격하여 깨뜨렸다. 가짜 태후는 잡지 못했으나 나찰국과 친구 사이가 되었다. 강희는 몽고에서 곤명에 파견한 사신 한첩마를 심문한 후 오삼계가 나찰국, 몽고, 서장, 세 곳의 강한 세력들과 결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근심을 했었 다. 따라서 상,경의 두 번왕 및 대만의 정씨에 대해서는 오히려 둘째 문제로 치게 되었다. 그는 위소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기뻐서 어쩔 줄 몰라했는데 나 찰국의 사신이 수교를 하려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더 기뻐서 자세 한 사정을 물었다. 위소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했다. 어떻게 소비아를 시켜 화창영의 병사들을 꼬여 반란을 일으켰으며 어떻게 그녀를 섭정왕이 되도록 했는 지 이야기하자 강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제기랄! 그대는 우리 대청나라의 요령을 배워 나찰여귀(羅刹女鬼)에게 가르쳤구나.]
이튿날 강희는 조례 때 나찰의 사신을 불렀다. 조정에서 나찰의 말을 아는 사람은 위소보 한 사람뿐이었다. 나찰의 말은 배우기가 매우 힘들 어서 위소보가 짧은 몇 달간 배운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나 찰 사신의 한바탕 칭송하는 말 열 마디 가운데 아흡 마디 반은 이해하 지 못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자기 나름대로 멋대로 씨부렁거렸는데 과거 육고헌이 지은 비석문의 글을 도용하게 되었다. 천 년이 지나도록 대청나라가 유지될 것이라느니, 위엄과 영기를 함께 받으니 위세와 능력이 놀랍더라는 등 몇 마디를 그대로 써먹었다. 그는 한 마디를 말하면서 한 번씩 강희의 안색을 살폈다. 강희는 싱글벙글하고 있었다. 위소보는 그 비석문의 글이 효과가 있다 고 생각하여 낭랑히 읊었다.
[요마를 항복받으니 그 존재는 떠오르는 해와 같더라. 아랫사람들이 보 좌하여 옛 것을 물리치고 새 것을 채용하리라. 줄기 줄기 뻗은 상서로 운 기운은 온누리에 뻗뻗치리라. 온 세상이 존경하고 선복을 영원히 누 릴 것이며 수명은 하늘처럼 길고 문무에 뛰어난지라 인자하고 거룩하여 라. 이는 하늘이 인정하니라....]
이런 말을 한참 동안 거기까지 지껄이다가 말머리를 돌렸다.
[나찰국의 소사황과 섭정 여왕은 삼가 중국 대황제 만세야의 성궁(聖 躬)이 만강하심을 여쭈나이다.]
이 말들은 본래 육고헌이 홍 교주를 칭송하기 위해 지은 글이었다. 이 때 위소보가 읊자 약간 잘 맞지 않은 대목이 있었으나 온 세상이 존경 한다는 등, 문무겸전하고 인자하고 거룩하다는 등의 낱말은 칭송하는 글들이라 대신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강희는 위소보에게 학문이 전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아름다운 문장과 고아한 귀절은 결코 그가 아무렇게나 옮길 수 없 는 것이니 나찰국의 사신이 그런 소리를 했을 거라고 믿었다. 나찰국의 사신은 곧 예물을 바쳤다. 나찰국은 요동보다 추운 곳이라 그 곳의 특산물인 현호(玄狐)와 수초(水貂)따위의 털가죽은 요동에서 나는 것보다 더욱 화려하고 따사로워 보였다. 만주의 대신들은 물건을 알아 보고 모두 칭찬을 했다. 강희는 즉시 위소보에게 접대사신(接待使臣)을 맡겨 나찰국의 사신을 대접하게 하는 한편 중화의 예물을 사신들에게 내렸다. 조정에서 물러 나자 강희는 탕약망과 남회인 두 사람을 불러서 그들이 나찰의 사신을 만나도록 했다. 남회인이 말하는 언어는 법란서(法蘭西:프랑스) 말과 같았는데 나찰 사신은 프랑스 말을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언어가 서 로 통했다. 남회인이 강희가 똑똑하고 인자한 분이며 고금에 보기 드문 제왕이라고 칭송하자 그 사신은 크게 탄복했다. 이튿날 강희는 탕약망과 남회인 두 사람을 시켜 남원(南苑)에서 대포를 시험하도록 했다. 그리고 위소보로 하여금 나찰 사신을 데리고 관람케 했다. 그 사신은 폭발력이 크고 사격이 정확한 것을 보고 탄복해 마지 않았다. 그들은 남회인에게 청하여 나찰국의 섭정여왕이 중국과 수교하 여 영원히 형제의 나라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의 말을 전했다.
나찰의 사신이 작별을 고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강희는 위소보가 출정하여 한꺼번에 오삼계의 강한 동조자를 없애 버렸으니 공로가 적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성지를 내려서 위소보를 일등 층용백(忠勇伯)으 로 봉했다. 왕공 대신들은 외소보에게 축하의 인사를 했다. 위소보는 시랑과 황 총병 등이 한 사람도 살아 돌아와 보고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았다. 황제의 가장 총애를 받는 원수격인 자기가 바다에서 실 종되자 황제가 진노하여 그들을 처벌할까 두려워 통흘도 부근의 섬을 떠돌아다니며 감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것 같았다. 만주가 군사를 처음 일으켰을 때는 군율이 지극히 엄했다. 싸움을 하여 우두머리가 전사하고 그 부하들이 퇴각하면 종종 전원을 죽이곤 했는데 강희 때만 해도 과거의 법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청나라 병사 들은 무척 용맹하여 적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위소보는 두 명의 사자를 통흘도와 신룡도에 파견하여 시랑 등을 북경으로 돌아오게끔 조치를 취 했다. 이 날 강희는 위소보를 서재로 불러서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세통의 상 소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계자, 이 제 통의 상소문은 세 곳에서 온 것인데 그대는 누가 올린 상소문인지 짐작해 보게.]
위소보는 목을 길게 빼고 세 개의 상소문을 들여다보았으나 뾰족이 단 서를 얻을 수가 없어서 말했다.
[황상께서 약간의 실마리를 주셔야 소신이 알아맞추기 쉬울 것 같습니 다.]
강희는 빙그레 웃으며 오른손을 쳐들고 내리쳐 잇따라 세 번 목을 자르 는 시늉을 한 것이었다. 위소보는 웃었다.
[아, 그렇군요. 바로 대....때간신 오삼계, 상가희, 경정충, 세 녀석이 올린 상소문이군요.]
강희는 웃었다.
[그대는 총명하기 이를 데 없군. 그대는 이 세 상주문에 무슨 내용이 담겨져 있는지 짐작을 해보게.]
위소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것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세 상주문이 함께 온 것입니까?] [어떤 것은 먼저 오고 어떤 것은 뒤에 왔지만 날짜는 크게 차이가 없 네.] [세 대간신들은 좋은 뜻을 품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도 똑 같은 심산이겠지요. 소신은 그들이 하는 말이 거의 비슷하리라 생각합 니다.]
강희는 손을 내밀어 탁자 위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바로 그렇네. 첫 번째 상소문은 상가희 늙은 녀석이 올린 것인데, 그 는 자기의 나이가 많으니 이제는 요동으로 돌아가서 은거하고 싶으며 자기의 아들 상지신(尙之信)을 남겨 괌동을 지켰으면 하는 내용을 적었 네. 나는 허락을 내리는 동시에 상가희가 요동으로 되돌아갈 때 아들을 광동성에 남길 필요가 없다고 했네. 오삼계와 경정층은 그 소식을 듣고 차례로 상소문을 올렸네.]
강희는 하나의 상소문을 들고 말했다.
[이것은 오삼계 늙은 녀석이 보낸 것인데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네. '신이 한평생 황은을 받은 것을 돌이켜볼 때 이 몸을 다 바친다 해도 보답하기가 어렵사오나, 이제는 다 늙은 몸이라 번왕의 자리에서 물러 나고자 하며 감히 청하오니 저의 두 어깨의 짐을 내려 놓게 해주시기 바라옵니다. 오늘 들으니 평남왕 상가희가 진정을 해서 이미 허락을 받 아 군사를 모조리 철수하기로 했다는군요. 크게 인자하신 점을 믿고 감 히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드리오니 아무쪼록 번왕에서 물러나게 하시어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해주십시오.' 흥! 그는 나를 시험해 보려는 것일 세. 감히 내가 그를 번왕에서 물러나도록 할 것인지 아닌지 보려는 것 이지. 그는 상가희와 경정충 세 사람과 짜고 세 사람이 함께 나를 놀라 게 하려는 것이지.]
강희는 다른 한 장의 상소문을 들고 말했다.
[이것은 경정충의 것인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네. '신은 작위를 두 번이나 받았으나 마음은 황제의 궁궐에 있습니다. 그러나 천하의 기 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혜아릴 길이 없어 감히 군사를 거두자는 제의 를 하지 못했습니다. 최근에 보니 평남왕 상가희는 상소문을 올려서 허 락하시는 성지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신의 부하 관병들이 남쪽을 정벌 한 지 이십 년이나 된 점을 살피시어 황송하옵게도 황제의 인자함을 간 청하는 바이오니 아무쪼록 불러 주시어 평안한 삶을 살도록 해주시옵소 서.' 한 사람은 운남에 있고 한 사람은 복건성에 있으니 그야말로 만 리를 격하고 있는데 어째서 두 상소문의 말이 비슷할까? 군사를 거둘 수 없다는 점을 슬쩍 비추면서 철수하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 하지 않는가? 이 녀석들이 어찌 나를 안중에 두고 있다 하겠는가?]
그는 기분이 상했다는 듯이 상소문을 탁자 위로 던졌다. 위소보는 말했 다.
[그렇군요. 이 세 개의 상소문은 대역무도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기실 은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전서(戰書)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황상, 우리 는 곧 군사를 보내 세 명의 반적들을 모조리 서울로 붙잡아 올리도록 하지요. 그리고 온 가족을....온 가족을 전 집안의 남자들은 죽이고 여 자들은 공신들에게 내려 노예로 삼도록 하십시오.]
그는 본래 만문초참(滿門抄斬)이라는 말, 즉 온 가족을 몰살하자고 주 장하려다가 갑자기 진원원을 생각하고 중도에서 말을 슬쩍 바꾸게 된 것이었다. 강희는 말했다.
[우리가 먼저 군사를 내려 보낸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내가 공신들을 죽 인다고 할 것이고, 새들이 사라지니 화살을 숨기고 토끼가 죽으니 개를 잡아 먹었다고 욕할 것일세. 그러니 차라리 번왕에서 물러나도록 한 이 후 세 사람의 동정을 엿보는 것이 좋겠네. 만약 성지를 반들어 번왕에 서 물러나고 공손히 명령을 받든다면 그만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군 사를 보내 토벌한다면 명분이 설 것이 아니겠는가?]
위소보는 말했다.
[황상께선 귀신처럼 일을 혜아리시니 소신은 탄복해 마지않는 바입니 다. 이것은 연극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황상께서는 다음과 같이 물 으셨습니다. '아래 끓어 엎드린 자는 누구냐?' 그러면 오삼계는 대답하 지요. '신 오삼계가 삼가 배알합니다.' 황상께선 호통을 치죠. '이 대 담한 오삼계야! 어째서 고개를 들지 않느냐?' 오삼계는 말하죠. '신은 죄가 있어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황상께선 호통쳐 물으시조 '너 는 무슨 죄를 지었는가?' 오삼계는 말하죠. '신은 번왕에서 물러나지 않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황상께서는 호통을 치시죠. '쳇! 대담한 것 같으니! 위소보!' 그러면 저는 한 걸음에 달려나와 엎드려서 대답하겠죠. '소신이 여기 대령했나이다.' 그러면 황상께선 외치시는 거예요. '영전(令箭)이 이곳에 있다. 그대에게 십만 대군을 내려 반적 오삼계를 토벌할 것을 명하노라.' 그러면 소신은 영전을 받고 외칩니 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발을 들어 오삼계의 엉덩이를 걷어차 서 그가 오줌과 똥을 마구 갈기면서 '오호, 애재라!' 하고 죽도록 하는 것이죠.]
강희는 껄껄 웃으며 물었다.
[하하! 그대는 군사를 거느리고 오삼계를 공격하고 싶은가?]
위소보는 그의 눈초리에 야유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소황제가 장 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말했다.
[소신이 어찌 어린 나이에 재간도 없이 대군을 거느릴 수 있겠습니까? 가장 좋기로는 황상께서 친히 대원수가 되시고 저를 황상의 선봉장으로 세우시면 산을 만나면 길을 닦고 물을 만나면 다리를 세우면서 당당히 운남으로 공격해 가는 것이죠.]
강희는 그의 말에 약간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친히 오삼계를 정벌하는 것은 퍽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했다.
[나증에 다시 자세히 생각해 보기로 하겠네.]
이튿날 이른 아침 강희는 왕공대신들을 불러서 태화전(太和殿)에서 군 국대사를 상의하게 되었다. 위소보는 연달아 계급이 오르기는 했지만 조정에서는 여전히 직위가 낮은 편이라 태화전에 나가서 군국대사를 논 할 자격은 없었다. 그런데 그날 강희는 특벌히 유시를 내려 그가 사신 이 되어 운남으로 갔었기 때문에 오삼계 번왕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므 로 태화전에 참석하도록 했다.
소황제는 한가운데의 용의(龍椅)에 앉고 친왕, 군왕, 패륵, 패자, 대학 사, 상서 등 대신들이 차례로 서게 되었다. 위소보는 대신들의 가장 아 래쪽에 섰다. 강희는 상가희, 오삼계, 경정충 등이 보낸 상소문을 중화전(中和殿) 대 학사겸 예부상서인 파태(巴泰)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세 번왕이 상소하여 번왕에서 물러나게 해주십사 청하는데 어떻게 했 으면 좋을지 여러분들이 각기 말씀을 해주기 바라오.]
왕공대신들은 서로 돌아가면서 상소문을 읽었다. 강친왕 걸서가 먼저 말했다.
[황상께 아룁니다. 소신의 의견으로는 세 번왕이 번왕에서 물러나겠다 고 청을 한 것은 본심이 아니고 아무래도 조정의 뜻을 알아보려고 하는 수작 같습니다.]
강희는 물었다.
[어째서 그러하오? 경이 먼저 설명해 보시오.]
걸서는 말했다.
[세 상소문에서는 모두 그곳의 군무가 무거워 함부로 떠날 수 없다는 말을 비추고 있습니다. 군무가 그토록 바쁘다면서 번왕에서 물러나겠다 고 요청하니 모순이 아니옵니까?]
강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화전(f封口殿) 대학사 위주조(衛周祚)는 백발에 허연 수염으로나이가 무척 많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의 의견으로는 조정에서 마땅히 좋은 말로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해 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왕의 공로가 뛰어나 황상께서 의지하고 중 시하고 있으니 마땅히 애써 일을 처리하고 왕실의 울타리 노릇을 해 달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번왕에서 물러나도록 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 다.]
강희는 말했다.
[경이 볼 때 세 번왕을 물러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위주조는 말했다.
[성상께서 굽어살피옵소서. 노자(老子)께서 일찍이 가병불상(佳兵不祥) 이라 했습니다. 즉 아무리 좋은 싸움이라 해도 불길하다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은 가(佳) 자를 유(惟) 자의 잘못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사옵 니다. 그렇게 되면 유병불상(惟兵不祥)이 되니 더욱 분명하게 설명되는 셈이지요. 또 노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병(兵)이란 불길한 그릇이며 군자의 그릇이 아닌 즉 부득이할 때 사용할 뿐이다.']
위소보는 속으로 답답하게 생각했다. (저 늙은이는 정말 당돌하구나. 황상의 앞에서 감히 노자가 어쩌고 저 쩌고 하는구나. 그런데도 황상께서는 화를 내지 않는군.) 이 노자라는 말은 강호에서 스스로 자기를 올려 말할 때 쓰는 용어이기 도 했다. 위소보는 위주조가 말하는 노자가 바로 옛날의 성인인 이이 (李耳)를 말하는 것인 줄 모르고 시정 무뢰배들이 자기를 높여 부르는 말로 잘못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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