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 (109) 기인 조조(奇人 曺操)
수일 후, 국구 동승은 시종도 대동하지 않은 채 홀로, 유비의 공관(公館)에 남모르게 찾아왔다.
유비는 후원 텃밭의 채소를 가꾸다가 그를 맞았다.
"동 국구, 여긴 어쩐 일 이시오?"
유비가 놀라 묻자, 동승은 손수 문을 닫으며 말한다.
"유황숙, 어서 들어가서 애기 합시다."
평소와 다른 동승의 태도를 눈치챈 유비가,
"어서 들어가시죠."
하고 동승을 내실로 인도하였다.
이윽고 단 두 사람 만이 좌정한 뒤에서야 동승이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혈서의 밀지를 내리셨습니다."
하고 말하며 천자의 혈서를 내보였다. 유비가 자세를 바로 잡고 동승이 내민 천자의 밀지를 펼쳐보니, 그곳에는 혈서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짐이 듣건대, 인륜의 위대함은 부자(父子)가 우선이고, 존비(尊卑)가 다른 점은 군신(君臣)을 중하게 여기는 점이라고 하오. 근일(近日) 조조의 무리가 권세를 농단하며 사당(私黨)을 연결(連結)하여 조정의 기강(紀綱)을 어지럽히니, 이로써 나라가 크게 위태롭게 되었소.
국가의 원로인 경은 고조의 위업(偉業)을 생각하고, 충의(忠義)의 열사(烈士)들을 규합하여, 간당(奸黨)을 멸함으로써 사직을 다시 태평하게 하도록 하시오.
이에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 경에게 보내는 바이니, 재삼 명심하여 짐의 뜻을 저버림이 없도록 하오. 건안(建安) 사년 삼월 詔 >
유비는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써 경에게 보낸다>는 대목에 이르러선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눈물을 금 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눈물을 쏟으며 천자의 혈지 앞에 절을 하면서,
"선왕들이시어, 황손 유비가 명을 받드옵니다."
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결연히
"뜻 있는 지사(志士)들에게 황제 폐하의 혈지를 돌려보이고, 의맹서(義盟書)를 만들어 역적 조조를 멸(滅)하는 지사들의 결의를 서명받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니 동승이 즉석에서 찬성하며,
"그러면 내가 의맹서를 만들어 구국(求國)의 뜻이 있는 사람에게 서명을 받도록 하겠소."
하고 말하고 그날부터 사람을 가려 서명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좌장군 유비(左將軍 劉備)는 물론,
국구 동승(國舅 董承),
공부시랑 왕자복(工部侍郞 王子服),
소신장군 오자란(昭信將軍 吳子蘭),
장수교위 (長水校尉 ) 충집,
의랑 오석(議郞 吳碩),
서량 태수 마등(西凉 太守 馬騰),
태의 길평(太醫 吉平)등이 각각 손가락을 깨물어 의맹서에 혈서로 서명을 하였다.
한편, 유비가 공관(公館) 후원에 밭을 일구고, 틈만 나면 채소를 가꾼다는 소식을 듣고 관우와 장비가 함께 찾아와서,
"도대체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천하를 구할 생각은 아니하고, 밤낮 채소만 가꾸고 계시니,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나는 한심도 하고, 화도 나서 못 보고 있겠소."
하고 장비가 예의 투덜대는 소리로 말하였다.
때마침 유비는 채소에 물을 주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장비의 옆에 묵묵히 서 있던 관우에게 물었다.
"둘째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형님께서 어련히 생각하시고 하시는 일이겠습니까마는, 저 역시 어딘지 석연치 않은 생각이 없지 안습니다."
"그런가?...어쨌든 때가 오면 알게 될 것이니, 이 문제는 너무 마다 말고 내게 맡겨두게!... 자, 오랫만에 우리 삼형제가 만났으니 어서 안으로 들어가 술이나 한잔씩 나누세."
장비는 술을 준다는 바람에 감정이 다소 누그러지긴 했지만, 기본적인 불만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유비는 물론 마음이 편해서 채소를 가꾸는 것은 아니었다.
동승으로 부터 천자의 혈지를 받고나서 부터는 조조의 의심을 살까 두려워, 그들 일파에게 딴 뜻이 없음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채소 가꾸기에 더욱 열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니 장비와 관우의 불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 따듯한 봄날, 유비는 이날도 혼자서 채원(菜園)을 가꾸다 말고, 일 손을 멈추고 망연히 앉아서 골똘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언제쯤 어떤 방법으로 조조에게 맞 설 세력을 규합할 것인가?....)
이렇듯 설왕설래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대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는 소리가 났다.
순간, 유비는 텃밭의 흙을 손으로 주워, 얼굴에 문질렀다. 불현듯 찾아오는 사람에게 다른 생각 없이 농사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유 황숙!"
유비의 등 뒤에서 그를 부른 사람은 조조의 심복 맹장인 허저(許楮)와 장요(張遙)였다.
그들은 수십 명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아무 예고도 없이 돌연 찾아왔다.
유비는 그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허저와 장요를 알아보고,
내심 크게 놀라면서도, 겉으로는 반갑게 영접하였다.
"장군들께서 어인 일 이시오?"
그러자 언제나 그렇듯이 허저의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온다.
"승상께서 찾으시니 같이 좀 가시지요."
유비가 그 말을 듣고 대답한다.
"승상께서 나를 부르신다고요? 무슨 일로 나를 부르신답디까?"
"우리는 그것까지는 모르겠소. 그냥 곧 가서 모셔오라고만 말씀하셨소."
유비는 마음속으로 매우 괴이쩍게 생각하였다.
(그 눈치 빠른 조조가 동승이 연계된 천자의 밀지 하사건을 눈치채고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느닺없이 부를 턱도 없겠지만, 설사 부른다 하더라도 허저와 장요같은 두 장수에게 군사까지 딸려 보낼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유비는 생각이 이에 미치자 모골(毛骨)이 송연해 왔다.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기다리시지요. 가서 옷 좀 갈아 입고 오지요."
그러자 허저가 곧바로,
"승상께서 급히 오시라고 했으니, 갈아 입을 것 없습니다. 가시죠."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알겠소."
유비는 어쩔 수 없이 허저와 장요를 따라 나서면서도 겉으로는 어디까지나 태연자약한 빛을 보였다.
그러나 두 장군에게 잡혀 가듯이 조조를 만나러 가는 유비의 심중은 형용하기 어렵도록 불안하였다.
이윽고 허저, 장요와 그들이 이끄는 군사들과 함께 말을 타고 승상부에 도착한 유비는 두 장수와 함께 승상부 대문앞에 이르러 문안으로 들어서려 하니, 병사들 넷이 들 것에 칼에 맞아 죽은 사내 하나를 들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유비는 가뜩이나 불시에 자신을 부른 조조의 심중이 꺼려지던 차에 젊은 사내 하나가 죽어서 들려나오는 것을 보니, 기분이 섬뜩하였다.
그리하여 발걸음을 멈추고 죽은 사내가 실려나가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니, 허저가 재촉한다.
"가시죠."
이윽고 유비가 중문에 이르니, 그곳에는 뒷짐을 지고 화사하게 꽃을 피운 매실나무를 바라보며 서 있는 조조가 보였다.
유비가 조용히 조조의 뒤로 다가가 말을 꺼냈다.
"유비가 승상을 뵈옵니다."
그러자 조조가 뒤로 돌아서며,
"집에서 굉장한 일을 벌였다던데, 내가 모를 줄 알았소?"
조조는 언제나 그렇듯이 냉철한 어조로 말했다.
유비는 그 소리를 듣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국구 동승(國舅 董承)을 비롯하여 지사들과 의맹서를 만들고 있는 일을 조조가 알고서 그런 말을 물어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굳은 표정으로 애써 태연히 대답하였다.
"승상께서는 무얼 말씀 하시는 건지요?"
그러자 조조는 ,
"채소밭! ... 당당한 황숙의 몸으로, 후작 장군인 당신이 어째서 농부처럼 채소나 키우고 있냔 말이오?
내가 보내주는 양식이 모자라오?"
하고 묻는 것이 아닌가?
그 말을 듣고 유비가 적이 안심하면서,
"아, 아닙니다. 승상부에서 아주 세심하게 돌봐주시는 덕분에 생활에 불편함이 없는데, 딱히 할 일도 없는데다가 갑자기 신선한 부추가 먹고 싶어서 조금 심어 본 겁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유비가 다른 뜻이 없음을 느낀 조조가 웃으며 유비에게 한발짝 다가오며,
"부추는 잘 자라나?"
하고 묻는다.
"그럼요, 잘 자랍니다."
그러자 조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부추를 수확하면 내게도 좀 나눠 주시오. 나도 맛 좀 봅시다."
"네. 그럼 저야 영광이죠."
유비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자 조조는 유비의 한 팔을 잡아 이끌며 말한다.
"갑시다."
"예."
조조는 후원 정자로 가면서 후원 가득히 꽃 핀 매화나무를 가리키며 말한다.
"내 매화나무를 보니 지난날 장수(張繡)를 정벌할 때의 일이 생각나서 당신을 오라고 불렀소.
그 당시 우리 군사들이 폭염으로 인해, 갈증이 심해 진군 조차 못 하기로, 갑자기 떠오른게 있었소.
그래서 내가 채찍으로 산너머를 가리키며,
<봐라! 저 산을 넘어가면 매화 열매가 얼마든지 있으니 빨리 넘어가서 마음껏 따먹어라! >
했더니, 병사들이 그 말을 듣고 모두들 입에 침이 가득히 고여, 죽을 힘을 다해, 산을 넘어가게 되었소.
그런데 사실 그 산너머에는 매실 한 그루 없었지만 말이오. 하하하핫! ... 그래서 요즘, 승상부 후원에 가득히 꽃핀 매화를 보니, 그때 생각이 나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현덕을 부른거요."
그러자 유비가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보이며 말했다.
"대단하신 지혜입니다. 승상의 그 매실 사건은 분명히 후세에 길이 전해 질 것입니다."
"하하하하!..."
조조는 유쾌한 웃음을 크게 웃어졌혔다.
조조의 뒤를 따라가는 유비는 이제서야 마음을 완전히 놓고 매화나무 숲속에 있는 정자에서 조조와 더불어 마주 앉게 되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유비가 조조에게 말한다.
"승상, 조금전에 제가 승상부로 들어 올 때, 시신 한 구가 들 것에 실려 나가던데, 이곳에 들어와 알았지만 승상께서 잠결에 참(斬)하셨다고 하더군요. 승상은 정말 기인(奇人)이십니다. 주무시는 중에도 한 쪽 눈을 뜨시다니오?"
그러자 조조가 단박에 호쾌하게 웃으며 말한다.
"우헤헤헤!... 현덕!.. 당신한테만은 솔직히 말해주지, 내가 잠결에 죽인 것은 아니오. 자면 그냥 자는거지... 어찌 그럴 수가 있겠소. 허나, 내가 잘 때 누가 날 해칠까, 두려운 것은 사실이오."
"그럴리가요? 괜한 걱정을 하십니다."
"아냐, 그렇치 않소. 과거에 나는 동탁이 자고 있을 때 그를 죽이려 했고, 내가 하려 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지. 때문에 나는 잠을 자는 동안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소."
"그럼 어떻게 경계를 하십니까?"
"음!... 일부러 소문을 내도록 만들었지, <잠결에 살인을 한다고>.. 누구든 내가 잘 때 옆에 오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이야.
그런데 하인들이 반신반의 하기에 안되겠더군.
그래서 오늘 낮에는 침상에서 자는 척 하면서 잠꼬대를 하니, 하인들은 내가 부르는 줄 알고, 내 옆으로 왔고, 나는 소리를 지르며 검으로 찌르고는 태연히 계속해 잠을 잦지.
그리고 깨고 나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며, 비통해 한거요.
우하하하! ...아마 지금쯤은 <조조가 잠결에 살인한 애기>가 널리 퍼지고 또 퍼질거요.
그래서 앞으로는 그 누구든 내가 잘 때에는 감히 접근하지 못 할거요."
유비가 그 말을 듣고,
"알고보니 승상이 잠든 것이 아니라 세인들이 잠든거군요."
하고 말하니, 조조는,
"응? 그러나 유황숙은 제외요! 자 듭시다."
조조는 이렇게 말하며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유비와 함께 잔을 비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