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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를 휙 둘러본 후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유 감사님이 한쪽 구석에 박힌 화첩을 꺼내들었다. 비밀스럽게 간직한 보자기를 풀 듯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아, 이중섭의 그림이어서 그렇게 깊숙이 간수했나 보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사실 나는 이중섭의 진품 그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곳, 유 감사님의 수집품 중에서 이중섭을 만날 것은 그래서 뜻밖이고 행운이었다.
대향(大鄕) 이중섭(1916~1956)은 박수근(1914~1965)과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가 중 한 사람이다. 두 사람 다 '국민화가'라는 별명으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비평계 일각에서는 개인적인 가난과 불행이라는 미술 외적인 요소들의 개입이나 대중적 인기가 이들의 성취를 합당하게 평가하는 데 도리어 장애물로 작용했으며,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곤 하지만 이중섭이 우리의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인 것만은 분명하다.
유 감사님이 소장하고 있는 이중섭의 그림은 은지화다. 은지화는 담뱃갑의 은박지에 그린 그림으로, 한국전쟁 동안 피난지 부산에서 그림 그릴 도구와 재료가 없어서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유난히 담배를 좋아했다는 대향이 쉽게 구할 수 있던 재료인 은박지.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 했던가. 거장의 손에 잡히는 것은 모두 빼어난 창작의 원료가 되었다.
은지화는 담뱃갑 속의 은박지 종이를 반듯하게 편 다음 예리한 철필로 종이가 뚫어지지 않을 만큼 눌러 윤곽선을 그린 후, 검정이나 흑갈색의 물감, 혹은 먹물을 솜, 헝겊으로 문질러 선묘(線描)를 도드라지게 하는 방법으로 제작했다 한다.
위에 보이는 이중섭의 작품도 그 중 하나다. 상단 왼쪽에 'ㅈㅜㅇㅅㅓㅂ'이라는 낯익은 서명이 들어가 있고 물고기와 아이들이 서로 무심하게 뒤엉킨 동심의 세계를 잘 표현해낸 작품이다. 담뱃갑의 은박지화 그림들은, 유화로 치면 1호 크기 정도로 매우 작은 그림들인데,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색감과 질감으로 인해 커다란 매력을 발산해 낸다.
묘사된 대상이 야수파 화풍으로 묘사한 소였다면 하는 아쉬움은 있지만 대향의 슬픈 은박지화를 직접 손으로 만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유 감사님의 컬렉션에는 이중섭의 판화작품도 2점이 있었지만 2005년 사후 에디션으로 찍은 것들로, 오리지낼러티가 떨어지는 것들이어서 별도로 소개하지 않기로 한다. |
사진14, 15 - 추사 김정희가 사용하던 철제 낙관
아호를 완당(阮堂)으로 쓰기도 하고 추사(秋史)를 쓰기도 한(물론 禮堂이나 詩庵도 있기는 하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조선 후기 문화지형에서 매우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이다.
성리학과 금석문에 조예가 깊은 당대 최고 지성 중 한 사람으로, <세한도>와 <불이선란도>로 대표되는 사군자와
문인화, 추사체로 널리 알려진 서예에 뛰어난 기량을 발휘한 불세출의 학인 예술가다. 중인 개혁사상가들이나
위항 문인(委巷文人)들이 그의 문전에 성시를 이루어 수하에 3천을 거느렸다는 말이 전해질 만큼 영정조 르네상스
이후 문화예술계를 풍미했던 화성(畵聖) 김정희.
그 사람 완당의 체취를 유 감사님 컬렉션에서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섭철로 주조한 완당의 주문방(朱文方, 음양의 이치를 따라 사각의 테두리와 글자를 돋을새김으로 새긴 낙관을 말함,
그 반대로 새겨 찍는 것을 백문인방이라 한다) 아호인(雅號印) 낙관 실물. 세월의 연륜만큼 묵직했다.
일그러진 얼굴에 새끼를 등에 업은 암사자가 웅크린 채 억만겁의 시공을 응시하는 듯한
손잡이 조각도 예사롭지 않다.
밑면에 암각된 '金正喜印'은 추사의 전서를 본으로 삼아 새긴 게 분명하다.
밑변의 가로 새로 크기가 10cm 정도에 이를 정도로 크기도 제법 있어서 상당한 소장가치를 지닌
낙인이라 할 것이다.
사진 16 - 조선후기 작품으로 보이는 십장생도 병풍
역시 팔폭 병풍으로 된 십장생도다.
유 감사 님이 소장하고 있는 대부분의 병풍화들이 그랬듯이 이 작품 또한 보존상태가 매우 좋았다.
사실 유 감사님이 수집한 수십점(아마도 백 수십점?)의 병풍 그림들은 대부분 수리와 보존처리를 거친 것들이어서
제작연대를 헤아리기가 쉽진 않았지만, 사진의 <십장생도>의 경우 그리 오랜 연륜을 지닌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연대를 가늠하기 쉽진 않았지만 올려 잡아도 구한말이나 일제강점 초기 정도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인상이 스쳤을
뿐이다.
십장생(十長生)이란 도가의 영향을 받아 불로장생을 상징한다고 여긴 10가지 모티브를 말한다.
자연계에서 일월(日月)과 산천, 식물에서 대나무 소나무 영지(靈芝·불로초)에다가 장수의 상징으로 여겨진 거북 학
사슴이 그것이다. 여기에 혹은 돌 물 구름이 곁들여지기도 하고, 혹은 신선이 먹는다는 천도(天桃)가 포함되기도
한다.
십장생 그림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민간에 이르기까지 아주 널리 사랑받았다. 본디 궁중에서 유래한 것이나,
민간에서도 이를 본떠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잡아 병풍, 필통, 함, 장롱, 술병, 베갯모, 수저보, 도자기, 자수, 목공예,
병풍 등에 빈번하게 장식문 소재로 활용되었다.
유 감사님이 소장하고 있는 <십장생도>에도 화폭의 양 가장자리에 탐스러운 천도복숭아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달이 없는 대신 화면 중앙, 배경을 이루고 있는 산수 너머로 붉은 해가 자리하고 있으며, 산천과 거북 영지, 소나무
대나무(왼쪽 천도 사이에 푸른 잎이 보인다) 학과 사슴, 돌 물 구름 등 전통적인 십장생의 소재가
모두 어우러져 있다.
사진 17 - 팔폭 병풍 민화 문자도 중 제(悌) 자
민화 문자도(文字圖)를 아시는가?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시골장터에 가면 한쪽 구석에 어김없이 혁필화가들이 자리잡아 그림읋 그려 팔곤했다.
우리 전통사회의 몽마르트르 화가들. 이들이 민화의 전승자들이다.
민화 문자도는 효도·우애·충절·교신·예절·의리·청렴·부끄러움을 뜻하는 효(孝) 제(悌) 충(忠) 신(信) 예(禮) 의(義)
염(廉) 치(恥) 여덟 글자로 이루어진 그림을 말한다.
가령, '忠' 자에는 잉어가 용이 된다는 어변성룡(魚變成龍)의 그림과 가재 모양의 새우, 조개, 연꽃 등을 그려넣었다. '충'자는 나라와 백성들에게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새우와 대합을 그려넣었는데 새우를 뜻하는 하(蝦)는 화(和)로,
대합을 나타내는 합(蛤)은 합(合)의 발음과 같아 군신(君臣)간의 화합 또는 신하의 굳은 지조를 상징하게 하였다.
(새우와 대합이 딱딱한 껍질에 싸여 있으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유치한 발상이긴 하나 글자 하나하나에
뭔가 도덕적 상징성을 코딩(coding)하고 감계적(鑑戒的)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 글자 한자한자에 윤리적 의미를
부여했다.
그림을 한장한장 따로 떼내서 새로운 작품을 만들 듯 개비한 탓이겠지만 상태가 깔끔한 이 문자도 병풍 역시 연대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禮’ 자 위에 용 그림이 있는데 용의 등에 서양식 벽걸이 시계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연대를 아무리 거슬러 잡아도 일제감점기 이상으로 비정하기는 아무래도 좀 무리가 있을 듯하다.
사진 18 - 호작도(까지 호랑이 그림) 목판화 원판 판목
유 감사님은 반듯하고 완전한 것들만 손에 넣는 재주가 있으신가 보다. 호작도(虎鵲圖, 민화에서 주로 다룬 까치
호랑이 그림)를 찍어낸 원판 판목. 종잇장처럼 얇은 판목을 재료로 했는데도 그 흔한 균열, 갈라짐 하나 보이지
않는다.
대개 이런 판목용 재질은 소나무나 오동나무를 주로 사용하는데 사진의 재질은 괴목(느티나무)이었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과 비교해 결코 부족함이 없는 미더운 나무 느티나무. 괴목이어서 사진의 호작도
원판이 미더워 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예로부터 상서로운 동물로 존숭했던 까치 호랑이는 주로 민간에서 세화(歲畵, 새해맞이 그림)나 기복을 희구하는
의미로 그려 붙인 대표적인 민화의 소재다.
류가인 선생님이 배경을 이루니 판목이 한층 더 돋보이는 듯하다!
사진 19 - 장석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장
실용적 목공예의 대표적인 산물이 가구다.
어느 지방을 막론하고 여염집 공간에 말없이 자리하여 제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던 우리의 전통가구.
앞닫이 반닫이 뒤주 장롱 서안 상 서가...
사진에 보이는 유 감사님의 농은 장석의 기하학적 아름다움이 압권이다. 잘 생겼다.
좌우대칭의 시메트리가 완벽하고 각이 더없이 반듯하다. 지나치리만치 장식이 풍부하고 유려하다. 사치스럽지만
절제미도 겸비했다.
그러면서도 지나침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가장자리 장식에서 보듯, 한가운데 정사각형 형태를 하나씩 거르는
배려도 잊지 않았다.
암갈색 괴목의 퀘퀘묵은 색감 위에 대열을 이룬 은회색 경첩들이 도열하듯 늘어선 조형미가 참 정갈하고
맛깔스럽다.
사진 20,21,22 - 배게 등 각종 장식용 자수품
유 감사님이야 수석에서부터 서화, 현대미술, 도자기, 전적(典籍)까지 가리지 않고 그러모았지만,
민속공동품 수집가 중에는
베겟모만 따로 수집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우리 어렸을 때 만해도 누구집에서나 몇 개 씩 볼 수 있었던 전통 자수 베게.. 다 어디로 갔을까. 위 사진에서 보듯,
유 감사님도 (앞서 본 병풍 자수처럼) 감상용이 아니라, 실생활에서 사용하던 베게 등 자수 작품들을 상당히
수집했지만 내가 자수에는 무지한지라 인터넷에서 끌어온 내용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자수, 특히 베개에 대해 비교적 잘 정리된 내용이니 참고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베개는 헝겊으로 길게 만들어 속에 왕겨·메밀껍질 등을 넣고 봉한 다음, 흰색의 무명으로
호청을 만들어 겉을 싼 것이다. 양쪽의 모는 둥글게 하든가 각지게 하여 십장생문양이나 길상문을 바탕천에
수놓았다. 또, 오색을 맞춘 비단에 솜을 두어 누빈 것, 잣모양으로 천조각을 접어서 수백 개씩 돌려서 만든 것
등도 있었다. 높이는 각자의 습관에 따라 다르나 보통 10∼13㎝, 길이는 35∼40㎝ 정도이다.
특수한 것으로는 갓난아기의 베개, 신혼부부의 베개, 노인이나 환자를 위한 베개가 있다.
갓난아기의 것은 무게를 유지하여 밀려나지 않도록 조를 넣어 만든다. 신혼부부의 베개는 신랑·신부가 같이
벨 수 있도록 약 50㎝의 길이로 길게 만든다. 베갯모에는 7마리의 새끼를 거느린 봉황 한쌍을 마주보게 수놓고,
둘레에는 십장생문양과 완자문양을 수놓는다. 노인이나 환자를 위한 베개는 불로침(不老枕)이라고 하는데,
베개통의 사방과 양쪽 모의 중앙에 각각 직경 5.5㎝의 구멍을 뚫고 12쪽으로 연결하여, 6개의 구멍과 맞을 수 있는
연통을 만들어 속에 넣어 뚫어진 곳에 각각 바느질한다. 그리고 탄탄하게 속을 넣으므로 베개 속은 사방 6개로 된
통로가 새어, 장시간 베고 있어도 머리에 부담이 적고 상쾌한 느낌이 든다.
특히 자수는 바탕천에 여러 가지 색실로 무늬를 수놓아 장식하는데 많이 이용되는데 자수는 인류가 동물의 모피나
식물의 껍질과 잎 등을 원시적 재봉용구로 꿰매고 엮어 옷을 지어 입었던 선사시대에 기원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다 인류생활이 점차 문명화되면서 옷이나 직물제품에 계급 표시 등을 목적으로 장식 또는 자수를 도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수는 직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조형예술로 발전되고, 각 민족의 생활환경·풍습·신앙 등에 따라 독자적
양식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자수 역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시대의 변천에 따라 우리 민족의 미적 특질을
표현해왔다. 자수는 길쌈·바느질 등과 함께 바늘 한땀 한땀의 정성을 통해 일상생활 곳곳에 섬세한 솜씨로 아름다움을
가꿔왔으며, 아울러 민족의 정서를 그 속에서 꽃피웠다. (국가지식 포털에서 전재)
사진 23,24 - 각종 잡동사니 골동품
표주박 호리병에서부터 약 저울까지 말 그대로 온갖 아기자기한 잡동사니들이 다 모였다.
하나하나 다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법한 기묘한 물건들...
선인들의 손에서
혹은 실한 연장으로, 혹은 어여쁜 장신구로 제 몫을 다 했을 소도구들, 앚증맞다.
사진 25 - 수석 (산벗나무)
자연이 빚어낸 아름다움과 신묘함이 더 뛰어난 건지, 인간이 창조해낸 예술작품이 더 진기한 생산물인지를 둘러싼
고대의 논쟁은 사실 소모적이었다. 그 만큼 해답을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었으리라.
고대인들이 죽자살자 매달렸던 이 문제는 급기야 근대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지금이야 이런 해묵은 논쟁에 흥미를 보이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당시로서는 여러 세기를 두고 무수히 많은
학자들이 참여했던 거대 논쟁 중 하나였던 게 분명하다.
유 감사님 소장품 중에는 수석이 참 많았다. 웅장한 산천을 빼다박은 것에서부터 교교한 달밤 외로이 뜬 반달
문양이 기가 막히게 박힌 것까지 참 기이한 형형색색의 수석들이 즐비했다.
그 중 하나.
높이 15cm 정도 되는 한갓된 자연석 하나를 두고 그런 가슴앓이 숙제를 곱씹는 까닭은 이 돌의 문양이 너무도
오묘하다는 데 있다. 억겁의 세월 동안 풍화되고 마모되어 마침내 피워낸 산벗나무 한 그루.
어느 장인이,
어느 미술가가, 이런 나무를 그려낼 것인가.
단조로운 색채를 가지고도 극히 자연스럽게 만개한 벗꽃의 화사함과
풍요로움을 품어낸 작은 돌, 왜 그토록 선인들이 수석에 매료되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사진 26 - 수석 (남근석)
마지막 날 돌아오기 직전.
정재흠, 유가인, 유윤상 선생님과 내가, 사모님이 내온 수박을 나눠먹고 있을 때
식탁 근처에서 유 감사님이 뭔가를 꺼내들었다. 굵직하고 기다란 돌맹이.
남근석 수석임을 한 눈에 알아는 봤지만, 아서라, 대체 어쩌자고 자연은 저런 물건을 만들었단 말인가!
우리 네 사람은 이 돌이 연출하는 이런 모습을 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순식간에 폭소를 터뜨렸다.
안 웃을래야 안 웃을 수가 없게 하는 돌 하나.
거참, 민망하다고 해야 할까, 그 놈 잘생겼다고 해야 할까.
어쩌자고 저리도 자연스럽게 제 자리에서 제 역할에 딱 들어맞게 생겼을꼬.
사진 27 - 유 감사님 집에서 조망한 풍경
유 윤상 감사님 집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참 고즈넉하기만 하다.
뒤로 병풍처럼 둘러쳐진 산, 앞으로는 탁 트인 평야, 게다가 아늑한 동남향까지.
길지(吉地)로 이만한 데가 또 있을까.
더 바랄 게 없다.
허나, 만사에 옥의 티는 있기 마련, 바로 인근의 개 사육장.
어쩌랴, 모두가 제 몫의 삶을 살 권리가 있을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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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기
안성에도 수집가들이 제법 있었다.
민속품만 모으거나,
자수만을 모르거나,
음향기기만을 모으거나,
전통 술 관련 자료만을 모으거나,
조선시대-개화기-일제강점기-한국전쟁으로 이어진 시기의 교육 관련 자료만 모은 수집가들이 꽤 있다.
지역의 문화적 풍토가 척박한 탓이겠지만
이중 술 관련 자료처럼 애써 들어온 자원을 내팽개치듯 다른 지역으로 보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소장가치가 그리 높지 않은 그렇고그런 농기구들 잔뜩 그러모아 놓고서
수십억의 세금을 쏟아붓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 중 돈좀 되고 쓸만한 것들은 기증받은 단체의 관계자들이 빼돌려 팔아먹기도 했다.
심지어 개인이 사사로이 쓰던 물건들을 모아놓고
황당하게도 세금으로 박물관을 짓겠다고 관변단체 대표자가 앞장서
억대를 들여 타당성 용역을 발주합네 하면서 호들갑을 떨기도 했다.
(지금은 아까운 세금만 날린 채 한 대학 건물 구석에서 쳐박혀 있다)
문화적 자산이 있어도 이를 올바르게 활용하지 못하고
사회적 공유와 공익적 가치로 승화시키는 데 많은 한계와 시행착오의 취약점을 드러내기도 했다.
한 지역의 문화를 가늠할 척도는
그 지역이 품어 기른 자산을 어떻게 활용하여 공익적 가치를 실현하느냐에 달린 문제다.
안성은 나름대로 인적 물적 자원을 상당히 지니고 있는 지역이다.
유 감사님이 안성에 둥지를 튼 지 이제 3년.
평생 수집한 값진 자료들을 지역사회의 공익적 자원이 될 수 있게 할 방도가 참 아쉽기 그지없다.
첫댓글 당장 인터뷰 가고 싶어지네요. 괜찮을는지 모르것슴다. 조선일보 등 유명한 신문에 나가셨는데 벼룩시장이랑 오마이뉴스가 인터뷰 한다 하면 하실지..... 김선생님. 그래도 괜찮다면 중간다리 좀 써 주이소^^ ㅎㅎㅎㅎㅎㅎ 연락주이소 일해 010-7309-9214 (번호 쪼매 바꼈심더)
그러시라고, 그럴만한 대상이라고 이곳으로 퍼온 글입니다. 본인이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습니다만, 한번 연락해 보지요. 결과, 전화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