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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고성 출생, 경기도 양주 성장, 신장은 167cm이고 체중은 66kg.
아시아 최초, 인류 역사상 8번째로 히말라야 8천미터급 14좌에 완등.
아울러, 8천미터급 위성봉 얄룽캉을 완등했고
2007. 5. 31., 8400미터 '로체샤르'도 완등하면서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완등에 성공한.,산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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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4.3. 네팔 오지에 12번째 학교를 지은.,엄홍길 산악인.
히말라야 16좌 등정기념으로 오지에 16 학교를 짓는 프로젝트.
'에베레스트 산간마을 푸룸부'는 네팔 카트만두에서 15시간 소요.
“좋은 시설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건강하게 잘 자라서
자신의 꿈도 이루고 네팔의 발전을 위해서 큰일을 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 엄홍길 / 휴먼재단 상임이사 -
엄홍길 휴먼재단은 지난 2009년 에베레스트 산 아래
팡보체 지역에 첫번째 휴먼스쿨을 세웠고 이어 타르푸,
룸비니, 비레탄티 등 11개 지역에 이어 이번이 12번째이다.
롯데홈쇼핑이 두 차례에 걸친 기부방송을 통해서
마련된 기부금으로 이번 사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번 푸룸부 휴먼스쿨은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
11개 교실을 비롯해 책걸상과 교육 기자재 등을 갖췄다.
4월 5일까지 네팔에 머물며 준공한 학교 두곳을 점검 예정.
2010년 5월 쿰부히말라야 팡보체 마을 휴먼스쿨이 제1호.
그곳은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으로 1986년 엄홍길과 함께
히말라야에 올랐다가 목숨을 잃은 셰르파 '술딤 도로지' 고향.
히말라야 현지인들은 자동차도 들어갈 수 없는 4060m 고지에
학교를 짓는 것은 말도 안된다며 손사래 쳤지만 공사 시작 1년만에
운동장 60평에 4개 교실, 강당, 도서실을 갖춘.,건평 80평 학교를 건립.
두번째 ‘휴먼스쿨’은 네팔 오지 중 오지 타르푸 지역에 세워졌다.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 랑탕히말라야 길목 트리슐리 25km 서쪽.
세번째 ‘휴먼스쿨’은 석가모니 탄생지 네팔 룸비니 비순푸라 마을.
엄홍길 휴먼재단은 학교신축뿐만 아니라
'부족한 교사지원, 간호사 지원' 프로그램,
휴먼스쿨의 학용품 지원사업도 펼치고 있다.
그와 함께 히말라야 16좌를 오르며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던 10명의 동료.
만약, 그 자신이 살아 돌아갈 수 있다면
히말라야16좌 만큼 16개 학교를 짓겠다는
히말라야에서 맹세한 자신과의 약속을 실천.
"살려서 내려보내 주신다면
이 산과 이 곳의 사람들에게
반드시 꼭 보답하겠읍니다."
그가 삶과 죽음의 기로마다
히말라야의 모든 신들에게
간절하게 염원했던.,약속.
"나마스테" "나마스테"
'히말라야 14좌 + 알룽캉. 로체샤르' 영광의 순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자'.,엄홍길 산악인.
2007. 5. 31 히말라야 16좌 대장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여기는 정상, 더 오를 곳이 없다.”
1977년 9월 15일 낮 12시50분.,고상돈.
산악인으로는 55번째, 국가로는 8번째였다.
그는 귀국 직후, '카 퍼레이드' 환영을 받았다.
1977년 고상돈 산악인의
에베레스트 등정을 계기로
'히말라야 꿈을 키웠다.'는 그.
그로부터 30년만에
그 꿈의 목표를 달성.
전문 산악인은 불가능에서 가능성을 찾아내
끊임없이 위험을 무릎쓰고 도전하는 직업인.
산악인이 도전을 멈추면, 직업인 수명도 마감.
그의 다음 목표는 히말라야 16좌 만큼
네팔에 16개의 학교를 설립하는 일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목표를 향해 도전하는 그.
2007.06.28 가족사진.
2017.3.13. 그의 부인에게도 많은 이목이 쏠리고 있다.
그가 산악인으로 잘 해나갈 수 있도록 내조를 잘한 인물.
남편이 원정 때마다 가정을 챙기고 아이들을 잘 보살핀 부인.
"아내가 히말라야든 어디든 산에 가는 것에 대해
한번도 반대하거나 가지말라, 그만하란 적이 없다."
.
등반 중 위기일 때마다 아내를 떠올렸다는 그.
산에서 오래 있었던 탓에 집에서도.,늘 등산복.
또한 잠을 잘때에도 항상 침낭을 덮고 있는 모습.
그만큼 그가 산에서 오랜 생활을
보냈다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이다.
"1년에 합치면 3개월 4개월 정도 네팔에 나가 있다.
한 번씩 갔다 오면 아이들이 자라고 또 자라고 그런다.
오래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한 마음은 항상 있다" - 엄홍길.-
2017.3.14. 엄홍길 산악인 & 딸.
.
엄홍길 산악인은 1997년 결혼
슬하에는 1남 1녀를 두고 있다.
1999년 안나푸르나 출정 때 득남.
엄홍길 상명대학교 석좌교수는 해군 특수부대 UDT 하사 출신이다.
해군 복무시절에 경북 경주 감포에서 울릉군 독도까지 5박 6일 수영.
1985년 9월에 에베레스트(8,848m) 남서벽 원정을 시도하였다가 실패.
1988년 9월에 다시 도전하여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하였고,
2001년 9월에 시샤팡마 등정에 성공하여 13년 만에 14좌 등정.
2004년 5월 5일 14좌에 속하지 않는 위성봉 얄룽캉(8,505m) 등정.
.....................엄홍길 로체샤르 등정기.........................
로체샤르는 히말라야 산맥중에서도 등정이 가장 어려운 산맥.
2001년 첫도전 실패, 2003년 정상 150m를 앞두고 판상 눈사태.
동료 두 명을 잃었으며, 2006년에는 3번째 도전 시도도 실패했다.
2007년 5월 31일에 4번째 도전에서 로체샤르 남벽을 통해 등정.
평균 각도가 70에서 90도에 이르는 남벽 높이만 3500미터나 된다.
오르다보면 눈쌓인 절벽의 눈을 깎아 두평 공간에 작은 텐트를 설치.
휴식을 취해야하는데 낙석, 낙빙 위험도 있으며
돌이 텐트를 뚫고 들어와 동료가 다친 적도 있었으며
드물게 텐트 전체가 절벽 아래로 쓸려가는 경우도 있다.
빙벽은 발 전체가 닿는 경우가 거의 없고
앞발로만 디디고 25시간씩 올라가야 한다.
대소변도 그 상태에서 벨트를 풀고 봐야한다.
8천미터의 산에서는 산소가 해수면의 1/3가량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두세발 움직이고 3~5분간 숨을 거칠게 쉬어야
다음 한 발을 겨우 내딛을 수 있기 때문에, 체력도 금방 고갈된다.
평균 영하 30~50도 기온 속에서 손발끝 감각이 사라진다.
거기에 환각증세가 일어나 옆에 동료가 말을 시키는 것 같은
환청이 들리며 꿈꾸기도 하는 상황에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도
자주 느끼지만, 그는 정신력으로 극복한단다.
로체샤르에 오르는 순간 38번의 히말라야 등정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숨진 동료들이 생각나 태극기를 꽂고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동료 변성호 대원이 설맹이 걸려 앞이 안보이는 현상이 발생.
대원들은 당황했으나 안보이는 대원을 데리고 하산을 결정했다.
서로 몸을 묶은 상태에서 내려가는 도중에 발을 헛디뎌 죽을 고비.
5시간이면 내려오는 곳을 무려 12시간이나 걸려, 베이스 캠프로 탈출.
그간 통신두절로 기자들이 실종기사를 내보내려는 순간 그가 나타났다.
그는 탈출하는 동안 먼저간 동료들과 가족을 생각하며 힘을 달라며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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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체샤르
2007년 5월 31일 오후 10시5분.
새로운 역사를 쓴.,산악인 엄홍길.
세계 처음 히말라야 14좌 + 로체사르·알룽캉' 등정에 성공.
‘죽음의 벽’으로 불리는., 로체사르 남벽 코스 3200m를 완등.
고상돈(1948~79)씨가 에베레스트를 오른 지.,30년 만의 경사.
‘2007 한국 로체사르 로체 남벽 원정대’
중앙일보· KT가 후원한 89일 일정에 정점.
제작진은 원정대의 처음과 끝을 함께 했다.
정상공격 15시간 만에 로체사르에 우뚝 선
엄홍길 대장의 모습을 망원렌즈로 촬영했다.
“히말라야 8000m급 등정에 38번을 도전했지만
이번 원정만큼 위험한 등반은 없었다. 시시때때로
죽음의 공포와 마주서게 한 난공불락의 산” -엄홍길.
2017.3.13., 히말랴야16좌 완등자
엄홍길 산악인이 뒤늦게나마 밝힌
그의 '마음 속 유서'가 눈길을 끈다.
“지은아, 현식아,
아빠가 결국엔 이렇게 히말라야 한 산자락에서
이렇게 등반 중에 높은 산을 도전하다가 산과 같이
함께 여기서 잠들게 된다. 너희들이 그 어린 나이에
성장하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겠냐. 그럴 때마다
얼마만큼 또 아빠를 많이 원망할 것이고 또 괴로워하겠느냐.
그래도 너희들 항상 건강하게 씩씩하게 잘 자라길 바란다.
훗날 너희가 성인이 됐을 때 어른이 됐을 때는 이 아빠의
도전 행위에 대해서 이해할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진짜 어머니
잘 모시고 잘 살길 바란다.”
그는 13일 오전 방송한 KBS1 교양프로그램 ‘인간극장’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산에 다닌다고 집을 많이 비웠다”면서 밝혔다.
“국내에 들어와서도
밖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가족들이 개의치 않아한다” - 엄홍길 -
그는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냈다.
이어 엄홍길은 목숨을 잃을 위기의 순간에
자신의 부인과 아이들을 떠올렸다고 회상했다.
그가 가족에 대한 고마움을 드러낸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3년 tvN ‘백지연의 피플인사이드’에서 마음 속 유언을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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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은 히말라야 14좌를 등반하면서
그중 스페인 산악인들과 5좌를 함께 했다.
그는 거봉 완등 레이스 중반기 95년부터
마나슬루, 브로드피크, 로체, 가셔브룸1봉,
안나푸르나를 스페인 바스크팀과 합동 등반.
성품이 호방한 그는 스페인 산꾼들과 호흡이 잘 맞았다.
그가 거봉 완등 행보에서 가장 자주 함께 했던 이는 바로
스페인 거봉 완등자 후아니토 오이아르자발로., 5개봉 등정.
엄홍길이 가장 자주 동행한 한국인 박무택, 나관주.
두 후배는 그와 각각 4회, 3회 함께 등정을 이루었다.
그외 민경태, 이인, 모상현, 구은수, 박주훈 등과 1~2회.
이렇듯 엄홍길은 특정 산악단체나 그룹에 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하게 이런 저런 산악인과 뜻만 맞으면 동행했다.
엄홍길은 총 34회 거봉 원정을 나갔고 그중 18회 성공했다.
'1985 ~2007. 5.31' 22년 동안.,히말라야 16좌 완등자.,그.
2005년에는 에베레스트에서 숨진 박무택, 백준호, 장민 대원들
그들의 시신수습을 위해 휴먼 원정대 팀을 꾸려 등정하기도 했다.
세명의 대원들은 엄홍길과 함께 한국에서 준비한 후 네팔에서 헤어져
에베레스트로 갔고 엄홍길은 얄룽캉 15좌에 등정하기 위해 흩어졌었다.
엄홍길 산악인은 정상에 등정 후 하산길에 후배들의 조난 소식을 들었다.
후배 박무택이 8750미터에서 설맹에 걸려 조난당했다는 소식.
이들 3명은 결국 에베레스트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사망했던 것.
고 박무택의 시신이 실종된 것도 아니고 산 절벽에 매달려 있어
원정대마다 지나치게 되는데 이를 그냥 둘수 없어 휴먼원정대 결성.
휴먼원정대는 산악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써 방송에 보도되기도 했다.
엄홍길은 컨디션이 아주 안좋아서 고생하기도했다.
박무택 시신은 눈에 얼어붙어 무게가 100kg이 넘었고,
결국 엄홍길은 그 시신을 데리고 하산하는것을 포기하고
그대신에 양지바른 동쪽에 박무택의 돌무덤을 만들고 하산.
그러나, 백준호, 장민 대원의 시신은
휴먼원정대가 끝내 발견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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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길 대장은 산에 오를 때 대원들에게 엄하게 대한다.
"산에서는 조금이라도 긴장이 풀리면 죽을 수 있기 때문."
산에서 내려오면, 엄하던 모습이 온화하게 변하는.,엄홍길.
그는 슬하에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있는데
자녀는 아버지가 위험한 일을 하는지 모른다.
딸과 함께한 히말라야 4~5천미터 트랙킹 특집.
딸은 생각보다 잘 걸었고 불평도 하지 않아 놀랬단다.
미래사위가 산악인으로 로체샤르를 간다면 말리겠단다.
엄홍길은 피서철에 산을 찾을 만큼 산에 대한 애정이 각별.
바다로 갈 경우에도 산이 인접한 곳으로 간다는.,그.
전문산악인은 보험 약관에 전문 산악인은 가입할 수 없다.
년중 6개월 등정기간 탓에 가족 생계를 책임지기도 어렵다.
하여, 서양 국가들의 경우 정부지원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유럽에서는 국민들의 도전정신, 모험정신 고취를 위해
기업과 사회 역시 문화, 스포츠 분야에 대해 적극 지원.
우리나라에서는 전문산악인들에 대한 지원이 부족한 편.
현재, 히말라야 14좌 완등자는 전세계에 모두 12명
그런데, 유일하게 대한민국이 3명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인의 끈기와 근성이 있기 때문이다" - 엄홍길-
위성봉으로 8000m급 2봉(얄룽캉, 로체샤르)이 더 있다.
엄홍길 산악인은 히말라야 8천m급 봉우리를 모두 올랐다,
즉, 산악인으로서는 세계 최초 16좌.,완등자.
22년 동안 38번이나 히말라야에 도전한 산악인
20번 성공, 18번 실패하며 10명의 동료를 잃었다.
"나를 위기에서 살려 내려보내 주신다면,
이 산과 이곳 사람들에게 보답하겠읍니다."
그는 히말라야 8천m급16좌 만큼
네팔에 16개 학교 설립을 결심한 것.
위기때마다 스스로 한 약속을 지킬 결심.
.
그는 지금 또 한 번의 도전을 하려 하고 있다.
그를 받아주고 살려서 돌려보내 주었던 히말라야.
히말라야 네팔에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짓고 있는 것.
또 먼저 간 산악인들의 유가족을 지원하는 일.
청소년, 대학생들의 활동을 조직`지원하는 일.
"오로지 정상을 향해 올랐으나 언제인가부터
산 아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그의 말.
2004년 5월 계명대 산악부.,박무택 대장과 장민 대원.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지만 하산길에 조난 당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홀로 올라간 백준호 대원 역시 조난.
영화 <히말라야>는 이들 3인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엄홍길 손칠규 등이 결성한 휴먼원정대 실화를 그린다.
2016년 7월 10일 19시 38분., 매일신문 김병준 기사 대담.
엄홍길 "시사회 때 이야기이다. 10년도 더 된 일이
마치 한두 달 전의 일처럼 격하게 느껴졌다. 영화가
끝났는데도 몸이 의자에 붙은 듯 일어설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마치 그때처럼.,"
박무택 시신을 수습해 내려오려고 사투를 벌이다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돌무덤으로 안장했을 때다.
"무택아, 언제 너한테 다시 오겠나. 이제 모든 걸
내려놓고 네 갈 길 가라." 발길 떨어지지 않고 눈물만'
김병준 : '꼭 그곳에 가야 했었나?'
엄홍길 "그렇다. 특히 박무택은 친동생이나 다름없었다.
2002년 에베레스트를 비롯, 히말라야 4좌를 같이 올랐다.
그가 실종된 것도 아니고, 정상 길목에 자일에 묶인채 있다.
그냥 두면 영원히 그렇게 있을 것 아니냐? 태극 마크를 단채.
김병준: '가능하다고 생각했나?'
엄홍길: "8,750m 지점이다. 숨 쉬는 것조차 힘든 높이다.
그런 곳에서 시신을 수습해 하산? 모두들 포기하라 했다.
또 다른 희생이 있을 수 있다 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가지 않으면 평생 그 죄책감과 후회를 안고 살아갈 것 같았다.
김병준: '영화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언제 했나?'
엄홍길: "MBC가 휴먼원정대 전 과정을 찍어
<아, 에베레스트> 1부와 2부로 방영했었다.
그때 시청자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하지만
유가족들에게는 또 한 번의 큰 슬픔이 되었다.
나 자신에게도 그랬고….
그래서 그때 이걸로
마무리하자고 했다.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거절했다.
김병준: '그런데 이번에는 어떻게?'
엄홍길: "영화 <국제시장>의
윤제균 감독이 찾아와 설득했다.
안 된다고 버티다 결국 받아들였다.
이유는 하나. 생명의 존엄이나,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나
약속이 점점 더 가볍게 여겨지는
것 같아서였다. 영화를 통해 우정과
희생, 그리고 인간에 대한 사랑 등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김병준: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엄홍길: "영화를 만드는 분들에게 몇 가지 당부했다.
절대로 흥행이나 오락 위주로 흘러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유가족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등
.
<"산 아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김병준: 네팔에
학교를 짓고
있다고.,?
엄홍길: 그렇다. 지금까지 11개를 지었다.
일단 16개를 지을 계획이다. 히말라야 16좌를
모두 오르게 된 데 대한 나 나름의 감사 표시이다.
김병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나?
엄홍길: 늘 저 위쪽 정상만 보고 올랐다.
그러다 16좌 등정
목표가 가까워지면서
산 아래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보이고 동네가 보였다.
우리 역시 가난하게 산 적이 있어서일까.
특히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크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도 한동안 산에만 올랐다.
그러면서 산에 기원했다.
"16좌 등정 후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겠습니다.
저를 받아주시면 살아남은 자로서 이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특히 2007년 마지막 16좌, 로체샤르를 오르며 이를 간절히 기원했다.
김병준: 그만큼
어려웠다는.,?
엄홍길: 3번 실패를 한 곳이었다.
2003년 두 번째 원정 때는 동료 2명을 잃었다.
3,000m의 절벽, 정상을 직선거리로 20m 정도 남겨놓고
눈사태를 맞아 떨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그 공포와 두려움이 어떠했겠는가?
그러고도 다시 시작한 4번째 도전. 산에 간절히 빌었다.
살아 돌아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김병준: 정말
기적 같은 일들이
있었다고 들었다.
엄홍길: 70~80도 경사 3,000m
암벽을 거의 앞꿈치로만 올라갔다.
눈사태에다 낙석과 낙빙 등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다 셰르파가 약 300m 정도 떨어졌다.
그런데 눈이 쌓인 곳에 떨어져 무릎만 다쳤다.
기적이었다.
후배 한 명도 발가락 열 개를 다 잘라낼 정도로 고통을 앓았다.
그러고도 성공했고 모두 살아서 돌아왔다. 산이 도운 것이다.
김병준:
이제
그 약속을
지켜야
할 차례.,?
엄홍길: 사실 나 혼자 산에 한 약속이었다.
공표한 것도 아니었다. 돈도 없고 방법도 없다는
핑계로 슬쩍 접으면 그만이었다. 실제로
16좌 성공에 취해 잠시 잊기도 했었다.
그러나 곧 정신이 돌아왔다.
스스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분들과 상의를 했더니
함께 하겠다는 분이 나서기 시작했다.
"아하, 이게 될 수도 있겠구나."
용기가 생겼다.
김병준: 하지만 돈을 모으는게.,?
엄홍길: 맞다. 당장에 일을 시작하기
위해 드는 기초적인 비용부터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파라다이스 복지재단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각 분야에서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게 상을 주는데
내가 특별공로상을 받게 되었다는 거다. 본상이 아니고
특별공로상이니 상장이나 하나 받나 보다 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상당한 액수의 상금을 받게 되었다.
김병준: 다시 산이 도왔나 보다.
엄홍길: 받으면서 바로 말했다. 이 돈은 내 돈이 아니라
먼저 간 동료를 포함한 산악인 전체의 돈이라고…. 그리고
이 돈을 네팔에 학교 짓는 데 쓰겠다고. 그리고는 바로
엄홍길 휴먼재단을 설립 학교 짓기의 첫발을 내디딘 것.
<일은 점점 많아지고>
김병준: (벽에 걸린 제1호 학교사진)
저게 바로 처음 지은 학교인가?
엄홍길: 그렇다. 어디다 지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그러다 해발 4,060m 팡보체 오지 마을에 짓기로 했다.
같이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1,000m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셰르파가 살던 마을이다. 동네 처녀와 결혼한 지 불과 4개월,
빙하 속으로 떨어져 시신도 찾지 못한 동료였다.
그 죽음에 대한 빚을 갚고 싶었다.
김병준: 그 높은 오지마을에?
건축자재나 제대로 운반할 수 있나?
엄홍길: 가까운 비행장까지 22인승 쌍프로펠러 경비행기로 실어 와
거기서 다시 2박 3일을 걸어서 자재를 날랐다. 그뿐 아니다.
단열 시공 등 제대로 튼튼히 지으려면 외부 기술자가 필요한데
숨쉬기도 불편한데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게다가 서울서 돈을 구해야 하는
나는 그곳에 계속 있을 수도 없었다.
자재가 제때 못 오고, 또 돈 못 주면 공사 중단되고….
정말 8,000m 봉우리 올라가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김병준: 하지만 결국 해냈다.
지금도 계속 그런 고지에 짓고 있나?
엄홍길: 그다음부터는 주로 해발 500~700m 지역에 짓고 있다.
낮은 지역이지만 모두 저런 곳에 어떻게 학교를 지을까 하는 곳이다.
물론 교육수요, 생활환경 등 모두 고려해서 짓는다.
2호, 3호, 4호…이제 11호까지 지었다.
김병준: 주민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일이 될 것 같다.
엄홍길: 그들도 그냥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로 짓기만 한다.
땅은 그곳 정부나 지역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그리고 학부모들도 허드렛일 등을 같이 한다.
이렇게 참여해야 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학교로 여기게 된다.
김병준: 돈이 많이 들어갈 것 같다.
엄홍길: 잘 지으려고 노력한다.
예를 들어 기존 학교들은 창이 작다.
창이 깨지면 교체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밖을 잘 볼 수 있게 창을 크게 낸다.
또 지역의 특수성도 반영한다.
예를 들면 햇볕이 따가운 지역에는
햇살이 교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리개를 설치하고, 물에 잘 잠기는 지역은
기초를 그만큼 올려 짓는다. 여기에 현대식 화장실,
냉`온방 시설, 수도시설 등. 하나 짓는데 3억~5억원 소요.
김병준: 누가 크게 도와주지 않으면 못할 일 같다.
엄홍길: 다행히 기업이나 기관 등도 참여하고 있다.
아웃도어 옷 만드는 한국 밀레가 학교를 하나 지었고,
외교부 산하 국제협력단(KOICA), 신세계백화점, 현대오일뱅크,
그리고 대구에 있는 디케이락이라는 중소기업 등이 그렇게 했다.
대구시교육청도 하나 짓기로 했다.
김병준: 대구시교육청이?
엄홍길: 그렇다.
학생들이 사랑의 동전 모으기를 한다.
동전을 모아 여러 가지 좋은 일에 쓰는데,
그 일환으로 네팔에 학교를 짓기로 했다.
김병준: 교육청 교사들 재교육이나
학교운영 노하우를 전하는 일
등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엄홍길: 사실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짓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유지보수 등
지속적으로 운영하는 문제와 교육역량 강화 문제
등 할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런 문제에 있어
대구시교육청이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삶과 죽음을 넘어>
김병준: 히말라야에 오른 산악인으로
네팔을 위해 이런 일을 한 경우가 많은가?
엄홍길: 에베레스트를 처음으로 오른 힐러리경의 경우
히말라얀 트러스트(Himalayan Trust)라는 재단을 설립하여
자신과 같이 등정했던 셰르파들의 마을에 학교와 보건소를 지었다.
또 루크라 지역에 작은 비행장을 짓기도 했다.
2008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 이후로도 이 재단은
이런 일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그외는 없는 것 같다.
김병준: 엄홍길 휴먼재단도 계속
더 많은 일을 해 나갈 수 있었으면 한다.
엄홍길: 살아남은 사람으로서,
또 성공한 산악인으로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
김병준: 산악인으로 생활이
넉넉지 않은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이들의 문제를 고민하는 것도 큰 일 같다.
엄홍길: 후배들이 점점 줄고 있다.
원정을 가려면 직장을 그만둬야 한다.
휴직을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또 어려운 도전에 성공을 해도
다른 스포츠처럼 연금이 있는 것도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부분이다.
김병준: 끝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적이
수없이 많았듯.., 그 기분을 말해 줄 수 있나?
엄홍길: 8,000m 이상 봉우리만 38번을 도전했다.
셰르파 4명, 한국 동료 6명, 모두 10명을 잃었다.
위험한 상황이 되면 매 순간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님을 알았을 때는 오히려 편안해진다.
오로지 산에 나를 맡긴다.
삶도 죽음도 넘는 것이다.
김병준: 돌아가는 길에
그 뜻을 새겨 보겠다.
오늘 감사하다.
히말라야 8000m급 중에서 첫등반지.,안나푸르나 제1봉,
1950. 6. 3. 프랑스 모리스 에르조그와 루이 라슈날이 등반.
히말라야 14좌 첫 등정인.,이탈리아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
1986년 10월 16일 첫 완등에 성공했고
1987년 폴란드 예지 쿠쿠츠카가 두 번째.
메스너는 14좌 모두 무산소로 등정에 성공.
1995년, 에르하르트 로레탕이 두번째 무산소 완등.
대한민국에서는 박영석이 2001. 7. 22.,14좌 첫완등.
2007년 엄홍길이 위성봉 포함 세계 최초 16좌 첫완등.
2013년 김창호가 한국인 최초로 무산소 14좌 완등.
2010. 4. 27. 오은선이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14좌 완등.
대한산악연맹 등은 칸첸중가 등반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스페인 여성 산악인 에두르네 파사반은
2010년 5월 17일에 14좌 완등에 성공했다.
2011년 8월, 오스트리아의 게를린데 칼텐브루너는
여성으로는 오은선 다음 2번째로 14좌 무산소 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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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여름에 만난 엄홍길은 전사(戰士) 같았다.
허벅지 인대가 땅긴다며 잠시도 앉아 있지를 못하고
거실을 어정거렸다. 뜨거운 심장과 혈액을 히말라야
고봉 능선의 어디쯤에 두고 온 듯 했으며 그때는
로체샤르(8400m) 3차 도전에 실패한 직후였다.
머리에서 산이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편안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 만남이 있고
9개월 후 엄홍길은 4차 도전을 했고, 성공했다.
동시에 세계 최초의 ‘히말라야 16좌 완등’ 주인공.
10년이 흘러 쉰여섯 살의 엄홍길은 산을 닮아 있었다.
허예진 머리카락에 여유를 담은 미소. “돌아보니 산이
품을 내주어 내가 그 정상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말했다. 작은 거인의 깨달음은 겸허함이었다.
1977년 9월 15일. 네팔 현지시간 낮 12시 50분에
고상돈(1948~1979) 선배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신문을 보는데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고상돈’이라는
이름 석자는 나에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고상돈 선배의
세계 최고봉 정복은 고1 우리 반 교실에서도 화제가 됐다.
대부분 친구들은 “뭐하러 그 추운 데까지 날아가서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지만, 나는 달랐다.
이미 나는 산잘 타는 학생으로 려진 터였다.
그걸 아는 한 친구가 말했다.
“홍길아, 너도 나중에 한 번 해 봐.”
-그로부터 일주일 정도가 지나 산소마스크를 쓰고
오른손에 태극기를 든 영웅의 모습이 신문에 실렸다.
사진을 오려 내 방 벽에 붙였다.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머릿속에는 온통 히말라야
빙벽을 올라가는 내 모습뿐이었다.
당시 나의 산악 등반 능력은 이미 수준급.
다른 사람들이 앞에서 깔아 준
줄을 잡고 암벽을 오르는게 아니라 내가
선봉에 서서 루트를 개척하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경남 고성에서 농사꾼으로 살던
아버지는 시골살이를 답답해하셨다.
1960년 첫째인 나를 낳고
3년 후 과거에 군 복무를 해서
익숙했던 경기 의정부로 이사오셨다.
그런데 하필 터를 잡은 게 등산로였다.
도봉산을 찾는 등산객들을 상대로 작은 매점을 차렸다.
불교신자 부모님과 도봉산 망월사와 인연이 계기가 됐다.
산은 집이기도 했고 놀이터,
호암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아침에 학교에 갈 때는
1시간을 뛰어서 내려갔고,
오후에는 1시간 30분 동안
산길을 올라왔다.
그 어릴 적부터 하루에 2시간 30분씩 산을 탔던 셈인데,
처음부터 힘들다는 불평도 없이 잘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에서 나는 ‘산에 사는 아이’로 통했다. 지금처럼 컴퓨터나
스마트폰 같은 게 없던 시절, 친구들에게 우리 집은 인기 많았다.
봄에는 버찌를 따려 벛꽃나무에 오르고, 진달래를 따 먹었다.
여름에는 계곡물을 막아 물장구를 치며 고기나 가재를 잡았고,
가을이면 다래·밤·잣 겨울에는 눈길을 헤치며 토끼잡으러 다녔다.
중학교 2학년이 되면서 클라이밍(암벽 등반)에 관심이 생겼다.
주말이면 산악회 사람들이 많이 왔는데 도봉산 두꺼비바위에서
등반하던 산악인들에게 클라이밍의 기초부터 배웠다. 그러나 내가
그들보다 더 산을 잘 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상에, 어쩜 그렇게 산을 빨리 올라가니.”
어른들은 일주일이 무섭게 늘어가는 나의
빠른 실력 향상에 혀를 내두르곤 했다.
-1980년 2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설악산으로 들어갔다.
전문 산악인이 되기로 한 이상 대학에 대한 미련은 없었다.
한 선배가 대청봉 밑에서 ‘희운각’ 산장을 운영했는데
그 일을 도우며 산을 탔고 그때 만난 사람이 정양근 형.
그가 1983년 스물일곱 나이에
안나푸르나에서 눈사태를 만나
세상을 뜰 때까지 그는 나에게
정신적 지주였다.
하도 설악산을 헤집고 돌아다니다 보니
나중에는 능선들이 손금 보듯 훤했다.
일반 등산객들은 대청봉까지
2, 3시간이 걸렸지만 나는 1시간.
일반 등산객들이
5시간이 걸리는
설악동 코스도
2시간 30분이면
충분했다.
사람들은 나를 ‘축지법 청년’이라고 불렀다.
체력이 절정에 달해 어떻게든 발산을 해야만 했는데,
그것이 아무리 험준한 산도 한달음에 내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집에 있는 부모님은 한숨이 늘어갔다.
“그렇게 대학도 안 가고 등산만 하면
도대체 나중에 뭘 해 먹고 살려는 거냐.”
그런 걱정과 반대에도 당시 벌이는 꽤 쏠쏠했다.
등반객들 때문에 산장 운영은 꽤 벌이가 되는 장사.
명절이나 휴가철에는 ‘돈을 라면박스에 쓸어 담는다’며
즐거워했다. 군대 가기 전 1년 반 정도의 설악산 산장 생활은
전국 산악인들과의 인연을 맺는 귀한 시간이기도 했다.
일반인 등반객들이 뜸한 비수기가 되면
보름 정도씩 지리산, 오대산, 소백산 등
다른 산을 찾아가 그곳에서 활동하는
산악인들과 만나 등반도 하고 식사도 했다.
얼마 후 전국적인 인맥이 형성됐다.
-내가 도달하지 못한 산 정상이 하나씩 둘씩
줄어갈수록 가슴 속에 있던 히말라야에 대한 꿈은
점점 더 커져갔다. 그러기 위해 꼭 해결할 숙제가.,군대.
십수년을 산에서 보내서였을까.
몸으로 하는 거라면 자신이 있었던 시절.
육군은 재미가 덜할 것 같았다. 해군에 입대.
인천에서 작은 군함을 탔는데 3개월 만에
배의 엔진에 불이 나서 대기발령을 받게 됐다.
그때 지체 없이 해군특수전단(UDT)에 지원했다.
석 달간의 수병 생활도 지루했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UDT 훈련은 산악인으로서 나의 능력을
몇 단계 끌어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엄청난 양의 수영은 폐활량과 근력을 키워 주었다.
경주 감포에서 독도까지 5박 6일 헤엄쳐 간적도 있었다.
6개월 동안 다이빙, 수중 폭파, 수중 침투, 육상 침투,
낙하산 공중침투 등 훈련을 다 견뎌내야 했는데,
1주일간 단 한숨도 잠을 안 잔 적도 있었다.
1984년 9월 제대를 하고 나서
그해 연말부터 에베레스트 원정준비.
박영배 대장이 나를 원정대원으로 뽑아 주었다.
대원선발 때 등반 기술, 체력도 중요하지만
정신력과 인간성도 중요한 심사 요소로 본다.
1년가량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다.
무거운 배낭을 지고 속보 산행을 하며
지구력 훈련을 하면서 암벽과 빙벽에 붙어살았다.
-히말라야 도전은 집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1985년 겨울 D데이가 열흘 앞으로 다가왔다.
“저 얼마 있으면 네팔에 갑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셨다.
죽을지도 모른다며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다.
“저는 정상까지는 안 가요. 꼭대기는 선배들이 오르고
저는 그냥 심부름 정도만 하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차마 사실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지금처럼
원정대 스폰서가 흔치 않아서 그동안 모아둔 돈
500만원을 고스란히 털어 넣었다. 그렇게 떠난 첫 도전에서
에베레스트는 나를 품어 주지 않았다. 히말라야 16좌 중 10번째 등정.
고1 때의 다짐으로부터 20여년 만이었다.
어쨌든 안나푸르나 4차 등정 실패 후 병원에서
“다시는 산에 오를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11번째 봉우리를 앞에 두고 평생의 여정이 끝나는가 싶었다.
어둠 속의 고통을 말해 무엇하겠나. 10개월간 고통 속에서
도봉산을 오르내리며 재활했고 다시 몸을 만들 수 있었다.
이듬해 5번째 안나푸르나로 향했고 결국 정상에 섰다.
그곳에서 배운 겸허함은 16좌 완등을 무사히 마치게 해 준 힘이었다.
-많은 사람이 히말라야 16좌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봉우리가 무엇인지 묻는다.
안나푸르나(8091m)다. 네 번을 실패했다.
1998년 네 번째 도전에서는 동료를 3명이나 잃었고
나 자신도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7600m 지점 급경사에서 미끄러지는 셰르파를 구하려다
함께 굴러떨어졌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발목이 완전히 꺾여 돌아가 있었다.
사고 지점에서 4600m의 베이스캠프까지
그 다리를 하고 2박 3일 동안 내려왔다.
유독 그 봉우리만 실패를 거듭한 이유를 떠올려 보면
젊은 날 그 산에서 떠나간 정양근 선배가 떠오른다.
언제나처럼 자만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2007년 16좌 등반을 완료하자
기쁨과 함께 허탈함이 밀려왔다.
주변에서 “이젠 편하게 살라”고 했다.
목숨을 건 사투가 그들에게
꽤나 힘겨워 보였는가 보다.
엄홍길휴먼재단을 만들기로 했다.
네팔의 산골 오지 학생들에게
학교를 지어주는 프로젝트인데
16개를 짓는 것이 목표다.
현재 13개가 착공되어 있다.
2013년 말 영화 ‘해운대’, ‘국제시장’을
만든 윤제균 감독이 연락을 해 왔다.
감독이 아닌 영화 제작자로서였다.
에베레스트 8750m 지점에서
조난당한 후배들의 시신수을 위해
2005년 휴먼원정대를 꾸린 것을
영화로 만들자는 거였다.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고
자문을 해 달라고 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가까스로 치유한 유족의 상처를
다시 건드리게 됩니다.” 완강히 거절을 했다.
사실 앞서 2005년에도
여러 영화 제작자가 연락을 해 왔다.
그때도 같은 이유로 모두 거절을 했다.
그러나 윤 감독의 집요함은
이전 제작자들과 달랐다.
“산과 사람의 역사를 함께 조명하자”고 했다.
고민을 거듭했다. 결국 마음을 바꿨다.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메시지를
영화를 통해 전하기로 했다.
초고속 성장을 하면서 추락한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휴먼원정대를 통해 일깨우고 싶었다.
‘배려와 양보가 사라진 이기적인 사회에서
우리가 지키고자 했던 동료애와 희생정신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인가. 정신이 황폐화된 채 맞는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해서 영화 ‘히말라야’(2015년·황정민 주연)가 탄생했다.
-나는 지금도
히말라야에 오르고 싶다.
도시는 너무 답답하다.
야생마처럼 멋대로 천지를
달리다가 갇힌 기분이다.
열정을 불태우던 절이 그립다.
체력적으로
아직 8000m 산에
오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없는게 가장 큰 문제.
매월 많게는 10번 정도 강의를 한다.
말하는 것을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군부대, 경찰, 관공서, 기업체, 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강연 의뢰를 받는다.
-지금도 웬만하면 오전 스케줄은 비우고 북한산을 오른다.
내 산책 코스는 북한산 백련사 입구에서 진달래 능선을 지나
대동문까지 오른 후 아카데미 하우스로 내려오는 길(10㎞)이다.
1시간 30분 정도면 완주하는데
요즘은 나를 알아보는 분들이 많아서
이렇게 저렇게 인사를 하다 보면
2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한다.
-산에 오르는 길은
‘이러다 죽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상황의 연속
산은 사람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곳곳에 크레바스가 도사리고 있다. 눈사태도 감수해야 한다.
8000m 고봉에서는 산소가 해수면의 3분의1밖에 안된다.
두세 발짝 움직이고 나서 3~5분간 숨을 거칠게 쉬어야
다음 한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유일한 동반자는
시련을 참아내는 내 안의 용기와 인내뿐이다.
정상을 위해 모든 것을 쏟아내고
완전히 탈진이 된 후 하산을 한다.
오를 때는 정상이라는 결과에 몰입해 두려움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내려올 때는 정신이 돌아오면서 겁이 나기 시작한다.
사고도 내려올 때 더 많이 일어난다. 우리 인생과 비슷하다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