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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란(契丹), 본시 회흘(回紇)의 노예(奴隸)로 서방족(西方族)
2022년 12월 15일
○ 『글란(契丹)』 은, 『글란(契丹)』인데 『거란(契丹)』이라고 하며, 또 “요(遼)”라고도 한다. 이들은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일원(一員)이었던 “고구려(高駒驪)와 후고구려(後高句麗)를 표명(表明)했던 대진국(大震國) 발해(渤海)와 또한 고려(高麗)” 와는 떼래야 뗄 수 없는 관계(關係)에 있었는데,
이들은 쉽게 말해 글란(契丹) 초기(初期)는, 옛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속국(屬國)이었다하는 편이 이해(理解)가 빠르다. 즉(卽) 돌궐(突厥)에 밀리자 고구려(高駒驪)에 의탁(依託)하기도 했고, 뒤에 강성(强盛)해지자 “발해(渤海)”를 쳐서 멸(滅)【내란(內亂)이라는 주장(主張)도 있다.】하였고, 40만 대군(大軍)을 동원(動員)해 “고려(高驪)”를 치기도 했으나, 고려(高麗)에 대패(大敗)하고, 건국(建國)된지 겨우 218년 만에, 여진족(女眞族)에게 멸망(滅亡) 당한 자(者)들이다.【AD 907-1125 : 計 218年】
작금(昨今)의 21세기(世紀) 오늘, 누가 이들의 후손(後孫)인가? 후예(後裔)들인가? 극소수(極少數) 인민(人民)들이 그들의 후손(後孫)이라고 자칭(自稱)하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글란(契丹)족 자체(自體)가 진화(進化)에 실패(失敗)해 소멸(消滅)된 것인가?
➨ 이건 결코 아니라고 본다. 즉 본디 “글란(契丹)”이 망(亡)하고 난 뒤, 그곳 땅을 점령(占領)한 민족(民族) 또는 부족(部族)들에게 동화(同化)되어, 자신(自身)들의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전혀 다른 이름(異名)으로 21세기(世紀)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동구라파(東歐羅巴)와 서아세아(西亞細亞)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의 수많은 민족(民族)과 부족(部族)들을 보면 이해(理解)될 수 있는 사안(事案)이다. 여진족(女眞族) 또한 똑같은 경우(境遇)다.
이들에 대한 ‘고려(高麗)’ 때를 보면 《“글란장(契丹場)”【고려(高驪) 때 글란(契丹) 포로(捕虜)들을 수용(收容)했던 곳, 즉(卽) 수용소(收容所)】이라는 말이 있고, 또 고종(高宗) 6년의 김취려(金就礪)에 의한 강동성(江東城)이 함락(陷落)당한 뒤, 항복(降服)한 글란(契丹) 포로(捕虜) 5만(萬) 여명을 여러 주군(州郡)에 분산(分散)시켜 살도록 했다》고 하였는데,
‘고려(高驪)’를 보면 : “고려(高麗)”에서는, 많은 ‘글란(契丹)’족들은, 당시(當時) 함께 유입(流入)된 ‘달단(韃靼)’족과 ‘여진(女眞)’족들을 전국(全國)의 주군(州郡)으로 분산(分散)시켜 살 수 있도록 했으나,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문집(文集)등에 의하면 : 특히 “강남(江南)”의 여러 주현(州縣)으로 보내어 살 수 있도록 하였다는 기록(記錄)을 볼 수 있다. 강남(江南)이 어딘가? 한강(漢江) 이남(以南)의 강남, 서초, 송파구 땅인가???】일반(一般) 백성(百姓)과 융합(融合)되지 못하고, 수초(水草)를 따라 다니며, 고리[柳器]를 만들고 수렵(狩獵)생활을 하는 등 ‘방랑(放浪)·유랑(流浪)’생활(生活)을 하며, ‘도살(屠殺)·육상(肉商)·창우[倡 優:배우]’를 업(業)으로 삼아 살아가던 이들이 바로 “백정(白丁)·양수척(揚水尺)·화척(禾尺)·재인(才人)”등으로 불리던 무리들인데,
이들의 생활방식(生活方式) 자체(自體)가 “반도(半島) 고려(高驪)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삶의 방식(方式)이다. 이들은 수초(水草)를 따라 가축(家畜)과 함께 이동(移動)하며 살아가던 전형적(典型的)인 유목족(遊牧族)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후예(後裔)들은 오늘날에도 ‘서남(西南)아세아(亞細亞)∼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서 수천(數千)년 전(前) 삶의 방식(方式)을 그대로 이어받아 살아가는 무리(衆)들이다. 이들의 삶의 방식(方式)은, 농경생활(農耕生活)과는 전혀 다른 이질적(異質的)인 삶의 방식(方式)이기 때문에 쉽게 동화(同化)되기 어렵다. 오늘날에도 일부(一部)들은 옛 방식(方式) 그대로 이어가며 살아가고 있다. 이건 누구도 부정(否定)할 수 없는, 인류(人類)의 수천 년(數千 年) 삶의 방식(方式)이다.
● 《생각해 보면 :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의 논리(論理)라면 : 『오늘날 “반도(半島) 땅에 살고 있는 7,700만 국민들 속에는【스스로 자각(自覺)할 수 없더라도】, 옛 글란(契丹)·달단(韃靼)·여진(女眞)족들의 많은 자손(子孫)들과 그들과 토착민(土着民)들의 혼혈(混血)인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째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정(認定)할 건가? 아니면 인정(認定)할 수 없다는 건가?’ 그러나 아쉬운 이야기지만,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논리(論理)로 철저(徹底)하게 무장(武裝)된 오늘날의 한국사(韓國史)에서는, 인정(認定)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것들에 대한 문제(問題) 제기(提起)는 없었고, 오늘도 없다는 사실(事實)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한반도(韓半島)인들은 백의민족(白衣民族)인가? 단일민족(單一民族)인가? 한마디로 웃기는 이야기다! 무엇이 백의민족(白衣民族)이요, 단일민족(單一民族)이란 이야긴가?
➨➨➨ 이들 “글란(契丹)·달단(韃靼)·여진(女眞)”종족(種族)들은 『이민족(異民族)이며, 서방족(西方族)이며, 또한 황인종(黃人種)과는 전혀 다른 체형(體型)을 가진 무리들』 이라는 사실(事實)이다. 이건 5-6천년(千年) 전(前)의 기록(記錄)에서도 말해주고 있는 사실(事實)이다. - 여기서 백인(白人)과 색목인(色目人)과는 또 다르게 구분(區分)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건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므로 생략(省略)한다. -》
“글란(契丹)이면 글란(契丹)”이지 “거란(契丹)”은 뭐고, “요(遼)”라는 것은 또 뭔가? 원래는 글단(契丹)이다. 또는 한글의 변음(變音)이니, ‘걸안이 거란이 되었다’는 등 여러 설이 있지만 누구도 확실하게 설명(說明)하자 못한다. 글란(契丹)이면, 글란(契丹)이지 무슨?
(1) “글란(契丹)”이면 “글란(契丹)”이지 “요(遼)”란 또 뭔가? “요택(遼澤)”에서 대대로 살아왔기에 만들어진 이름일 뿐이다. 요지(遼志)를 보면 :
요지(遼志) :《遼國其先曰契丹,本鮮卑之地,居遼澤中:去榆關一千一百三十里,去幽州又七百一十四里 : 요(遼)나라의 그 선대(先代)는 글란(契丹)이라고 칭했는데, 본래 선비(鮮卑)의 땅인 요택(遼澤)가운데에서 살았다. : 유관(楡關)이 1천1백30리 떨어져 있으며, 유주(幽州)는 또 714 리를 가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구절(句節)에서 중요(重要)한 곳은 “요택(遼澤)과 유관(楡關)과 유주(幽州)”다.
➊ 〈요택(遼澤)은 요해(遼海)다〉 : 盛京疆域考 [淸, 杨同桂. 孙宗翰 辑] : 三萬衞【今開原縣治】中略. ➨《原注洪武二十四年建韓王府永樂二十二年遷於陝西平涼西北有金山東有分水東嶺北有分水西嶺西有大清河東有小清河流合焉.下流入於遼河又北有土河東北有艾河流合焉.謂之遼海即遼河上源也. : 명(明) 홍무(洪武) 24년에 한왕부(韓王府)를 두었는데, 영락(永樂) 22년에 섬서(陝西) “평량(平涼)”서북으로 옮겼다. “금산”이 있는데, 금산(金山)의 동(東)쪽에서 물길이 동(東)으로 나누어지며, 령북(嶺北)에서는 물길이 서(西)쪽으로 나누어지며, 령서(嶺西)에 대청하(大淸河)가 있고, 그 동(東)쪽으로 소청하(小淸河)가 흘러 합류(合流)한다. 하류(下流)에서 요하(遼河)에 들어간다. 또 북(北)쪽에 “토하(土河)”가 동북(東北)에서 애하(艾河)와 합쳐진다. 이곳이 즉 “요해(遼海)”라고 부르는데, 요하(遼河)의 상류(上流)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금산(金山) : 알타이산【Altai Mt : 아이태산(阿爾泰山) : 금산(金山)】으로, 오늘날의 벨루하산【Belukha Mt : 4,506m】이다. 동(東)벨루하 봉(4,506m)과 서(西)벨루하 봉(4,440m)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수많은 빙하(氷河)가 자리 잡고 있는 산(山)으로 옛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태백산(太白山)”【阿爾泰山:亦作阿勒壇.又作阿爾但.蒙古爲金爲阿爾但.故又稱金山.天山北出之脈.】이다.
이곳에서 발원(發源)하는 여러 개의 하천(河川)이 모여 합류(合流)하는 그곳에 넓게 자리 잡고 있는 『‘늪’지대를 “요해(遼海) 즉 요택(遼澤)”이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그곳 즉 ‘요해(遼海)=요택(遼澤)’은 본시(本是) 선비(鮮卑)들의 고지(故地)였으나, 선비(鮮卑)족들이 분산(分散)되어 없어지지 글란(契丹)족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사니, ‘글란(契丹)의 고향(故鄕)이 요택(遼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곳 “요택(遼澤)=요해(遼海)”는 본시(本是)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그래서 요사(遼史)에서 말하기를 : “요(遼)는 본시(本是) 조선(朝鮮)의 땅에 있었다.”라고 한 것이다.
※ 1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14’ : 《通典唐乾封二年薛仁貴破髙麗於金山進拔夫餘城(案夫餘城東接挹婁西接鮮卑在遼為通州金為威平府地). : 明統志金山在開原西北三百五十里遼河北岸又西北三十里曰東金山又二十里曰西金山三山緜亘三百餘里與烏梁海接境 : 명통지(明統志) ; 금산(金山)은 개원서북 350리 요하(遼河)의 북안(北岸)에 있다. 또 서북(西北) 30 리에 동금산(東金山)이 있고, 또 20 리에 서금산(西金山)이 있는데 이 세 산(山)의 뻗친 줄기가 3백 여리에 달하는데 “오량해(烏梁海)”와 접경(接境)을 이루고 있다고 하였다.】
※ 2 :【또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왈(曰) : 《遼 金 所 置 眀 屬 烏 梁 海 其 稱 故 建 州 者 : 요(遼), 금(金)나라 때두었던, 명나라 때에 속해 있던 “오량해”는 옛 건주(乾州)에 있는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건주(建州)는 오늘날의 요녕성 심양(瀋陽)이 아니라, 오량해(烏梁海)들이 살고 있었던, 외몽골 서북방(西北方)과 카자흐스탄 동북방(東北方), 러시아 알타이(Altai) 주변일대(周邊一帶)에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記錄)이다.】
➋ 유관(楡關) : 요지(遼志) 남경도(南京道)편을 보면 : 《南京道 : 灤州,永安軍,中,刺史。本古黃洛城。灤河環繞,在盧龍山南。齊桓公伐山戎,見山神俞鬼,即此。 : 본시(本是) 옛 황낙성(黃洛城)이다. 란하(灤河)가 빙 돌아 에워싸고 있는, 노룡산(盧龍山) 남(南)쪽에 있다. 제(齊) 환공(桓公)이 산융(山戎)을 벌한 곳으로, 산신(山神) 유귀(兪鬼)를 봤는데 즉(卽) 이곳이다. 秦為右北平。漢為石城縣,後名海陽縣,漢水為公孫度所有。晉以後屈遼西。石晉割地,在平川之境。太祖以俘戶置。: 진(秦)의 우북평(右北平), 한(漢)의 석성현(石城縣)이며, 뒤에 이름이 해양현(海陽縣)으로, ➨한수(漢水)를 공손도[公孫度: 공손탁]가 소유(所有)하고 있었다. 灤州負山帶河,為朔漢形勝之地。有扶蘇泉,甚甘美,秦太子扶蘇北築長城嘗駐此;臨榆山,峰巒崛起,高千餘仞,下臨渝河。統縣三. 中略. : 란주(灤州)는 산(山)을 등지고 하천(河川)이 띠를 두른듯하며, 한(漢) 북(北)쪽의 형승지지(形勝之地)이다. 부소천(扶蘇泉)이 있는데, 그 맛이 대단히 감미롭다. 진(秦)의 태자(太子) 부소(扶蘇)가 북(北)쪽의 장성(長成)을 쌓은데 상주(嘗駐)한 곳이 이곳이다 : 림유산(臨楡山)은, 봉우리의 뫼가 우뚝 솟아 일어나, 높이가 일천(一千)여인(餘仞)【1 인(仞) : 7-8척(尺) = 1仞) : 2m∼2.4m이므로, 천여인(千餘仞)이면, 높이가 2,000-2,400m를 넘는다.】에 이르며, 아래에는 림유하(臨楡河)가 흐른다. 통현(統縣)이 셋이다.》라고 하였는데,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이곳을 하북(河北)성 “란주(灤州)”라고 주장(主張)한다. 그러나 『“2,000-2,400 여 미터[m] 높이의 산봉우리가 삐쭉삐쭉 뛰어나온 림유산(臨楡山)과 그 아래를 흐르는 림유하(臨楡河)”가 없다는 것은 “옛 란주(灤州)가 아니다”라는 것이고, 이에 따라 ‘유관(楡關)’ 또한 있을 수 없고, ‘유주(幽州)’ 또한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當然)한 이치(理致)다.
“조물주(造物主)가 그러한 지형지세(地形地勢)를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형지세(地形地勢)는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할 수 없다는 것, 이건 불변(不變)의 진리(眞理)다.
더불어 하북성(河北省) ‘발해(渤海)’ 바닷가에 유관(楡關)이 없으니, ‘산해관(山海關)=투관(渝關)’이 존재(存在)할 수 없다는 것 또한 확증(確證)을 말해준다. 유관(楡關)에서 남(南)쪽으로 730 리에 있다는 “유주(幽州)”는 또 뭔가? 산동성(山東省) 동(東)쪽의 황해(黃海)바다 용왕(龍王)님이 계신 용궁(龍宮)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일까?
또한 “한수(漢水)”는 어디에 있다는 말일까? 이곳 “하북성(河北省)과 요녕성(遼寧省) 등지(登地)” 어디에도 『한수(漢水)』라는 이름을 가진 하천(河川)이 없다. 더더구나 『공손도(탁)가 한수(漢水)를 차지하고 나서 이곳에서 강성(强盛)해지자 참칭(僭稱)했다』는 역사서(歷史書)의 말에 따르면 : “한수(漢水)”를 통한 교역(交易)이 활발(活潑)하니 공손도(公孫度)가 이곳을 통해 부(富)를 축적(蓄積)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헌데 이러한 하천(河川)이 어디에 있었다고 말하는 건가?
● 『림유하(臨楡河), 림유산(臨楡山), 유관(楡關), 투관(渝關)=산해관(山海關)=림유관(臨楡關), 유주(幽州), 한수(漢水)등은,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 땅에 없었다.』는 것은 확실(確實)하다. 자연환경(自然環境)적 요소(要素)들은 가공(加工)한다거나 조작(造作)할 수 없다는 것은, “수억(數億)년 또는 수천(數千)만년, 수백(數百)만년, 수십(數十)만년 전(前)부터 지구(地球)의 ‘지각변동(地殼變動)=지각운동(地殼運動)’으로 만들어지고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부인(否認)한다는 것은, 인류(人類)를 부인(否認)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냐? 즉(卽) 창조주(創造主)나 조물주(造物主)가 고심(苦心)하여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結局),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때부터 100년이 넘는 오늘까지도, 그 오랜 세월동안 “엉터리 조선사(朝鮮史), 조작(造作)된 한국사(韓國史)”를 진짜처럼 믿으며, 가르치고 배워왔다는 것이고, 이러한 잘못된 교육(敎育)의 밑바탕에는 신생국(新生國) 대한민국(大韓民國) 정부(政府: 敎育部)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긴가?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이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을 만들면서, 얼마나 “정통성(正統性)”이 없으면,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이 한반도(韓半島) 식민지(植民地) 땅을 통치(統治)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2등 국민(國民)들의 “조선사(朝鮮史) 이야기책 보따리”를 펼쳐 놓고, 자국민(自國民)들에게 강제(强制)로 암기교육(暗記敎育)을 시키겠는가!
자국민(自國民)을 상대(相對)로 엉터리 역사(歷史), 조작(造作)된 역사(歷史)를 강요(强要)시켜 세뇌(洗腦)시키는 정권(政權)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존재(存在)”일 것이다. 일제(日帝) 제국주의자(帝國主義者)들을 대변(代辨)하고 있다고 하면 잘못된 표현(表現)일까? 근저(根底) 즉 밑바탕에는 ‘한반도(韓半島)가 본래(本來) 왜(倭)의 땅이었다’는 것을 간접적(間接的)으로 표현(表現)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뭔가???
➨➨➨ 『대한민국(大韓民國) 정권(政權)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움직여지는, 알 수 없는 정부(政府)요, 미스터리[mystery]한 존재(存在)다.』 어떻게 자국민(自國民)을 상대(相對)로 제대로 검증(檢證)한 번 하지도 않은, 조작(造作)된 역사(歷史), 식민사관(植民史觀)을 강요(强要)하며, 의무교육(義務敎育)이라는 이름하에 주입식(注入式) 암기교육(暗記敎育)으로 세뇌(洗腦)를 시키고 있는 것일까? 천만(千萬)번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처사(處事)다.
➌ 유주(幽州) : 유주호마객가(幽州胡馬客歌)를 보면 : 유주(幽州)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즉(卽),
幽州胡馬客歌 [李白 唐] : 《 幽州胡馬客,綠眼虎皮冠 : 오랑캐 말 탄 유주(幽州) 객(客) , 녹안【綠眼: 색목인(色目人)을 말한다.】에 호랑이가죽 갓. 笑拂兩隻箭,萬人不可干 : 웃음 띠며 화살 두 대 뽑아들자, 여러 사람 누구도 얼씬 못하네. 彎弓若轉月,白雁落雲端 : 만월처럼 시위를 한껏 당기자, 백안(白雁: 흰 기러기) 구름 가에 떨어진다네. 雙雙掉鞭行,游獵向樓蘭 : 나란히 말채찍을 휘두르면서, 누란(樓蘭)으로 사냥하러 길을 떠나네. 出門不顧後,報國死何難 : 문을 나서면 뒤 돌아볼 생각 않고, 보국(報國)에 죽음 어이두려우리. 天驕五單于,狼戾好凶殘于 : 오만한 오랑캐 다섯 선우(單于), 흉포하고 잔인하기 그지없거늘, 牛馬散北海,割鮮若虎餐 : 북해(北海)에 소와 말을 흩어놓고는, 산채로 찢어서 범처럼 먹으며 雖居燕支山, 不道朔雪寒 : 연지산(燕支山)에 모여 살아도, 북풍한설을 춥다 안 하네. 婦女馬上笑,顔如赬玉盤 : 말 위에서 미소 짖는 부녀자들, 마치 붉디붉은 옥쟁반 같은데, 飜飛射鳥獸, 花月醉彫鞍 : 몸을 날려서 조수(鳥獸)를 쏘아 잡고, 꽃 피고 달 뜰 적에 안장에서 취한다네. 旄頭四光芒,爭戰若蜂攢 : 모두성(旄頭星) 빛이 사방에 가득하고, 싸우러 모인 것이 벌떼와 같네. 白刃灑赤血, 流沙爲之丹 : 서슬이 번쩍이는 칼로 붉은 피를 흩뿌리니, 흐르는 모래사막 온통 붉어 끔찍하네. 名將古誰是, 疲兵良可嘆 : 예로부터 명장(名將)이 누구더냐, 지친 병사들 너무나 안타깝구나. 何時天狼滅,父子得安閑 : 어느 때나 천랑(天狼) 별이 사라지고, 부자(父子)와 함께 편히 살거나》하였다.
이 시(詩)의 구절(句節)에서 보듯이 : 『당시(當時)의 “유주(幽州)”를 찾아온 객(客) 즉(卽) 사나이들은 “호마(胡馬)를 탄 녹안(綠眼)을 가진 색목인(色目人)들이었다” 는데, 이들은 누란(樓蘭)으로 가 사냥을 하고, 되놈(胡)과의 싸움중에 뿌린 피가 유사(流沙)에 가득해 끔찍하다』고 하였는데,
∼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 땅에 유사(流沙)가 흐르는가?
∼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 땅에서 누란(樓蘭)까지 사냥을 가나?
∼ 하북성(河北省)과 북해(北海)가 뭔 상관(相關)?
∼ 흐르는 모래 즉(卽) 유사(流沙)는 특정(特定)지대에 있는 특이지형(特異地形)이다.
∼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 땅이 “유주(幽州)가 될 수 없다”는 것이며, “유주(幽州) 땅은, 색목인(色目人)들과의 접경(接境)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해주는 시(詩) 구절(句節)이란 것을, 이 글을 읽는 독자(讀者)라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 『유주(幽州)』는 “장안(長安) 즉 중원(中原)” 중심(中心)으로 볼 때, 동북방(東北方)이 아닌 “서북방(西北方)”지대(地帶)에 자리 잡고 있어야 5천년(千年) 역사(歷史)를 “사실(史實)”이라고 이해(理解)할 수 있게 된다.
(2) 遼史 禮志 一 古儀 편을 보면 :
《遼本朝鮮故壤,箕子八條之教,流風遺俗,蓋有存者. : 요(遼)는 본시 조선(朝鮮)의 옛 땅이다. 기자(箕子) 8조의 가르침을 받고, 후세(後世)로 이어진 풍속(風俗)이 되었으며, 모두를 보존하고 있다.》고 하였다.
도대체 『조선(朝鮮)의 옛 땅이 어딘가?』 그럼 ‘글란(契丹)’들이 ‘한반도(韓半島) 땅에서 시원(始源)했다는 말인가?’ 이 얼마나 웃기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인가? 이제는 꿈에서 깨어나자!
『‘글란(契丹)’ 즉(卽) ‘요(遼)’ 역시(亦是) 조선(朝鮮) 태왕(太王)의 땅에서 살아가던, 의탁(依託)하여 의지(依支)하여 살아가던 많은 제후(諸侯) 중의 한 제후국(諸侯國)이었을 뿐이다.』 이걸 무슨 대단하다고 황제국(皇帝國)으로 만들어 버린 것은, 조선(朝鮮)을 제후국(諸侯國)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조작(造作)된 역사(歷史) 애기다.
요(遼)나라의 역사서(歷史書)라는 “요사(遼史)”에서 스스로 말해주고 있잖은가! “요(遼)는 본래(本來) 조선(朝鮮)의 땅이며, 기자(箕子)의 8조지교까지도 모두 받들고 살았다.”라고 하고 있잖은가! 더 설명(說明)해 볼까?
➨ 〈왜 우리는 우리들의 선조(先祖)들의 영광(榮光)스러운, 광영(光榮)스러운 역사(歷史)를 깍아내리기에 바쁘고, 깍아내리는 자(者)들에게 국민(國民)들의 피와 땀이 서린 국고(國庫)까지 지원(支援)해주며, 먹여 살리기에 바쁠까? “우리가 옛 왜(倭)인가?” 참 알 수 없는 한국사(韓國史)요, 알 수 없는 7,700만(萬) 국민(國民)들 속셈이다. 아니 관심(關心)조차 없다는 것이 진솔(眞率)한, 솔직(率直)한 표현(表現)일 게다.〉
(3) 遼 史 卷 32 志 第 2 營 衛 志 中 / 部 族 上 : 《北齊文宣帝自平州三道來侵,虜男女十餘萬口,分置諸州.又為突厥所逼,以萬家寄處高麗境內 :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가 평주(平州) 의 세 길로 와 쳐서, 남녀(男女) 십여(十餘)만구(萬口)를 사로잡아 여러 주(州)에 분산시켰다. 또 돌궐(突厥)이 핍박(逼迫)하자 일만(一萬) 가(家)가 고려(高麗)땅 안으로 들어와 의탁하였다.》고 하였는데,
요사(遼史)의 이 구절(句節)은, 아래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돌궐(突厥)편에서 “글란(契丹)이 왜 고구려(高駒驪)에 의탁(依託)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를 설명(說明)해 주고 있다. 즉(卽),
➊ 해동역사(海東繹史) : 양원왕(陽原王) 9년 문선제【北齊 文宣帝】가 북쪽으로 거란(契丹)을 토벌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그 뒤에 다시 돌궐(突厥)에게 핍박당하자, 거란은 1만여 가를 거느리고 고구려에 부쳐 살았다. 【문헌통고(文獻通考)】
➋ 동사강목(東史綱目) 3 : 고구려(高駒驪) 양원왕(陽原王) 9년 [북제 문 선제 천보 4, 553年] : 이해에 거란(契丹)에서 1만여 세대가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이때에 제왕(齊王)이 거란을 쳐서 크게 깨뜨렸는데, 그 뒤에 다시 돌궐(突厥)에게 핍박당하여 부락 1만여 세대가 고구려에 의탁하여 왔다. 그들의 풍속은 말갈(靺鞨)과 같아서 도둑질을 좋아하고 예(禮)가 없으며, 사나움이 모든 오랑캐 중에서도 으뜸이다. 수(隋)의 문제(文帝) 때 이르러 별부(別府)ㆍ출복(出伏) 등이 고구려를 배반하고 수(隋)에 붙었다. 【통고(通考)에서 보충】
➌ 通典 契丹 : 《其後為突厥所逼, 又以萬家寄於高麗 : 그 뒤, 돌궐(突厥)이 핍박하자, 그 중 『1만(萬) 여가』가 고려(高句驪)에 위탁(寄)하였다.》고 하였다.
➍ 讀史方輿紀要 山西 편의 돌궐(突厥) 편을 보면 : 《梁敬帝紹泰初,突厥木杆可汗擊滅柔然,因西破擫噠,東走契丹,北並契骨.其地東自遼海,西至西海,長萬里,南自沙漠以北五六千里皆屬焉. : 양(梁) 경제(敬帝) 소태 초, 돌궐(突闕)의 ‘목간가한(木杆可汗)’이 유연(柔然)을 쳐 멸하고, 인하여 서(西)쪽의 엽달(擫噠)을 깨뜨리니, 글란(契丹)은 동(東)쪽으로 달아나고, 북(北)쪽으로는 글골(契骨)을 아울렀다.》하였다.
➎ 陽原王[陽崗上好王] : 七年【AD 551】,秋九月,突厥來圍新城,不克,移攻白巖城. 王遣將軍高紇,領兵一萬,拒克之,殺獲一千餘級 : 7년, 가을 9월, 돌궐이 신성을 포위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군대를 이동하여 백암 성을 공격하였다. 왕이 장군 ‘고흘’에게 군사 1만을 주어 그들을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고 하였다.【北齊 文宣帝 천보 2, 551年】
이때의 돌궐(突厥)은 서방(西方)족이었다. 즉(卽) 서방(西方)에서 동(東)쪽으로 세력(勢力)을 확장(擴張)할 때의 이야기로, 오늘날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에서 벌어진 사건(事件)이다. 글란(契丹)은 소국(小國)으로, 이리 밀리고 저리 밀려, 일부(一部)는 여기저기로 분산(分散)되고, 일부(一部)는 항복(降伏)하고, 동(東)쪽으로 달아난 일만(一萬) 여가(餘家)의 글란(契丹)족들은 고구려(高駒驪) 땅내로 들어가 투항(投降)한 것이다.
➨ 이때 “고구려(高駒驪) 땅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까지 뻗쳐있었다”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증거(證據)해 주고 있는 것이다. ‘유연(柔然)=연연(蠕蠕)’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이 고향(故鄕)이다.
(4) 遼史國語解 : 世宗, 穆宗紀 : 《蹛林 上音帶 。 地名, 即松林故地 : 대림(蹛林)은 지명(地名)이다. 곧 송림(松林)의 옛 땅이다.》라는 기록(記錄)을 볼 수 있는데, 이게 아주 웃기는 결과(結果)가 도출(導出)된다. 즉(卽),
蹛林 : 松林故地 : 千里松林 / 蹛 : 地名 蹛
史記 匈奴傳 : 秋, 馬肥, 大會蹛林.
駰案 : 漢書音義曰 : 匈奴秋社八月中皆會祭處. 蹛音帶. 索隱 : 鄭氏云, 蹛林, 地名也. 晉灼曰 :吏陵與蘇武書云, 相競趍蹛林. 案 :遼史 國語解 : 松林故地. 新唐書太宗以鐵勒部思結爲蹛林州, 隷燕然都護府. 中略. 或蹛林在匈奴右方也.
● 위의 여러 ‘주석(注釋)’편에서 설명하고 있는 중요(重要) 포인트(Point)는 신당서(新唐書)에서 말하는 “태종(太宗) 때에 철륵(鐵勒)의 한 부족(部族)인 사결(思結)에 대림주(蹛林州)를 두고, 연연(燕然)도호부(都護府)에 예속케 했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사결(斯結)=사결(思結)” 부족은 어디에 있었을까?
통전(通典) 철륵(鐵勒) : 사결(思結: 斯結) : 《獨洛河北有僕骨·同羅·韋紇·拔野古·覆羅,並號俟斤. 蒙陳·吐如紇·斯結·渾·斛薛等諸姓,勝兵可二萬. : 독낙하(獨洛河) 북(北)쪽에 복골(僕骨)·동라(同羅)·위흘(韋紇: 回紇)·발야고(拔野古)·복라(覆羅)와 있었고, 나란히 사근(俟斤)이라고 불렀는데, 몽진(蒙陳)·토여흘(吐如紇)·사결(斯結)·혼(渾)·곡설(斛薛)등의 여러 성(姓)이 있었으며, 뛰어난 병사 가히 2만이다.》하였는데, 여기서,
➊ 동라(同羅)는 : 설연타(薛延陀)의 북(北)쪽에 있었는데, 장안(長安)까지 17,500 리(里)를 가야한다【在薛延陀之北, 去長安萬七千五百里】고 하였으며,
복골(僕骨)은 : ➊의 동라(同羅)와 오랫동안 두터운 이웃인데, 가장 북쪽에 치우쳐 있다【與同羅宿敦鄰好, 最居北偏】고 하였으니, 동라(同羅)보다 더 멀리에 있었다는 것이고,
➋ 위흘(韋紇)=회흘(回紇)은 : ‘회흘(回紇)=위흘(韋紇)’은, 설연타(薛延陀)의 북(北)쪽에 있는데, 파릉수(婆陵水)에 연해 산다. 장안(長安)까지 16,900리를 가야한다【迴紇在薛延陀北境, 居延婆陵水, 去長安萬六千九百里】고 하였으니, ➊의 동라(同羅)보다는 동남(東南)쪽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장안(長安)까지의 거리(距離)로 볼 때 그렇다는 것이다.
➌ 설연타(薛延陀)는 : 去長安萬四千餘里 : 장안(長安)에서 만 사천여리 떨어져 있다. 後鐵 勒僕骨,同羅共擊薛延陀,大敗之.太宗以其破亡,遣江夏王道宗,左衛大將軍阿史那社爾為瀚海道安撫使. : 뒤 철륵의 복골, 동라가 함께 설연타를 쳤는데, 대패하였다. 태종(太宗)이 그 나라를 쳐서 망하게 하고는, 파견사 “강하왕 도종”, 좌위대장군 ‘아사나 두이“를 한해도(澣海道)안무사로 하였다.》
➍ 위의 글 ➊+➋+➌를 보면 : “대림(蹛林)”이란 곳은 서북방(西北方)의 흉노(匈奴)들이 모여 천신(天神)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란 이야기고, 그곳은 “장안(長安)으로부터 14,000 이상(以上) 떨어진 곳에 있었다.”는 말해주고 있으며,
이러한 서북방(西北方) 먼 곳에서 『“글란(契丹)”부족(部族)들이 “회흘(回紇)”에 예속(隸屬)되어 즉 노예(奴隸)가 되어 노역(勞役)을 했다』는 것인데, 오늘날의 지도(地圖)로 16,900리(里)를 찾아보면 “러시아(Russia) 모스크바(Moscow) 서(西)쪽의 북구라파(北歐羅巴) 땅이다” 이건 역사서(歷史書)에서 기록(記錄)한대로 거리(距離)를 측정(測定)해 본 결과(結果)다.
이러한 땅에서 회흘(回紇)에 예속(隸屬)되어 노예(奴隸)로써 노역(勞役)을 하였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설명(說明)은, 곧 “글란(契丹)은, 최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던 흉노(匈奴)였다”는 사실(事實)이다.
이러한 이들이 돌궐(突厥)의 압박(壓迫)과 핍박(逼迫)에 못 이겨 일부는 항복(降伏)하고, 일부는 여기저기로 흩어져 버렸는데, 그 중에서도 1만(萬) 여가(餘家)가 동(東)쪽에 있었던 고구려(高駒驪) 경내(境內)로 들어와 투항(投降)하고 의탁(依託)하였다는 것이 역사서(歷史書)에서 말하고 있는 사실(史實)이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史實)’을, ‘글란(契丹)과 고구려(高駒驪)’를 한반도(韓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 만들어 놓는다면 ‘이해(理解) 불가능(不可能)’한, 인간(人間)의 역사(歷史)가 아닌 ‘신(神)들의 이야기가 되어버린다.’
➨➨➨ 이러한 사실(史實)은 『한반도(韓半島)로부터 20,000 리(里) 이상 떨어져 서북방(西北方) 땅에서 벌어졌던 역사적 사실(歷史的 事實)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글란(契丹)” 부족(部族)들이 한반도(韓半島) 북방(北方)에 있었다고 한다면 : “서방(西方)과 서북방(西北方) 20,000 리에서 벌어졌던 역사적(歷史的) 사실(史實)”들이 “모조리 한반도(韓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 일부(一部)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의 논리(論理)다.
한국사(韓國史)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 죽어야 살아날 수 있다. 이건 결코 과장(誇張)된 말이 아니다. 오늘의 현실(現實)이다.
(5) 契丹國志 卷之二十五 : 胡嶠陷北記【同州郃陽縣令胡嶠,居契丹七年,周廣順三年,亡歸中國,略能道其所見。호교(胡嶠)는 동주(同州) 합양현 현령(縣令)이다. 글란(契丹)에서 7년을 살았다. 회동10년(947년), 선무군절도사 소한의 장서기로 거란에 들어간다. 소한은 모반으로 고발되어 피살당하고, 호교(胡嶠)도 연루되어 7년간 억류된다. 후주(後周) 광순3년(953년)에 돌아왔다. 함북기(陷北記: 陷虜記)는 호교(胡嶠)가 글란(契丹)에 7년간 붙잡혀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기록(記錄)한 것이다.】
《云契丹之先,常役回紇,後背之,走黑車子,始學作車帳。又北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河,夏秋冰厚二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글란(契丹)의 선대(先代)에 대해 이르기를, 항상 회흘(回紇)의 노역(奴役)을 하였는데, 뒤쪽에 있던 흑거자(黑車子)에게로 달아나, 처음으로 수레로 집 만드는 법을 배웠다. 또 북(北)쪽에, 우제돌궐(牛蹄突厥)이 있는데, 사람들의 신체(身體)가 소다리와 같다. 그 땅은 심히 추운 곳이다. 물은 호하(瓠河)라고 하는데,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 두께가 2척이나 되고, 가을과 겨울에는 더 철저하게 얼음이 얼어, 항상 얼음을 그릇에 넣고 불에 데워, 이에 녹은 물을 마신다.》고 하였다.
➨ 이 구절(句節)은 新五代史 四夷附錄 第二 의 것과 똑같은데, 이는 신오대사(新五代史)를 찬한 학자(學者)들이 인용(引用)했기 때문이다. 즉(卽) 《雲契丹之先,常役回紇,後背之走黑車子,始學作車帳.又北,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河,夏秋冰厚二尺,春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 : 글란(契丹)의 선대(先代)에 대해 이르기를, 항상 회흘(回紇)의 노역(奴役)을 하였는데, 뒤쪽에 있던 흑거자(黑車子)에게로 달아나, 처음으로 수레로 집 만드는 법을 배웠다. 또 북(北)쪽에, 우제(牛蹄)돌궐(突厥)이 있는데, 사람들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다. 그 땅은 심히 추운 곳이다. 물은 호하(瓠河)라고 하는데,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 두께가 2척이나 되고, 가을과 겨울에는 더 철저하게 얼음이 얼어, 항상 얼음을 그릇에 넣고 불에 데워, 이에 녹은 물을 마신다. 》고 하였다.
여기서 그 주(注)에서 말하기를 : 《瓠蘆河 注 : 胡嶠曰:黑車子之北,有牛蹄突厥,人身牛足.其地尤寒,水曰瓠蘆河,夏秋冰厚二尺,秋冬冰徹底,常燒器銷冰,乃得飲. : 호로하(瓠蘆河) 주(注) : 호교(胡嶠)가 이르기를 : 흑거자(黑車子)의 북쪽에, 우제돌궐(牛蹄突厥)이 있는데, 사람들의 신체가 소다리와 같다. 그 땅은 심히 추운 곳이다. 물은 호로하(瓠蘆河)라고 하는데, 여름과 가을에도 얼음 두께가 2척이나 되고, 가을과 겨울에는 더 철저하게 얼음이 얼어, 항상 얼음 그릇에 널고 불에 데워, 그리고 물을 마신다. 余按唐書劉仁軌傳.此瓠蘆河當在高麗南界,新羅七重城之北. : 당서 유인괘전을 보면, 이 호로하(瓠蘆河)는 고려(高麗)의 남계(南界)에 있는데, 신라(新羅) 칠중성(七重城)북쪽에 있다.》고 하였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이해(理解)해야 할까? 여기서 본래(本來) 글란(契丹)족들이 살던 곳을 찾을 수 있는 단서(端緖)가 바로 “회흘(回紇)”이다. 『왜냐하면 “글란(契丹)”족들은 상시(常時) 회흘(回紇)에 억매여 있어[奴隸] 항상 그들의 노역(勞役)을 했기 때문이다.』
상역(常役) 즉 항상 회흘(回紇)을 위해 노역(勞役)을 마다했다면 “회흘(回紇)”과 인접(隣接)한 곳에 자리 잡고 있어 이들에게 복속(服屬)되어 이들의 노예(奴隸)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회흘(回紇)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 당(唐) 재상(宰相)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 의하면 : 회흘(回紇)은 장안(長安)【오늘날의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부터 16,900리(里) 떨어져 있다“고 하였다.
➨ 通典 回紇 : 《迴 紇 在 薛 延 陀 北 境 , 居 延 婆 陵 水 , 去 長 安 萬 六 千 九 百 里. : 회흘(回紇)은 설연타(薛延陀) 북쪽 지경에 있는데, 파릉수에 연하여 산다. 장안(長安)까지 16,900리를 가야한다.》고 하였고,
➨ 通典 : 薛延陀 : 《中略. 於 大 唐 貞 觀 中 遣 使 朝 聘 , 封 為 毗 伽 可 汗 , 居 大 漠 之 北 , 俱 淪 水 南 , 去 長 安 萬 四 千 餘 里 。: 대당(大唐) 정관 중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비가가한(毗伽可汗)으로 봉 받았으며, 대막(大漠)의 북(北)쪽, 구륜수(俱淪水)의 남(南)쪽에서 사는데, 장안(長安)에서 1만 4천 여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며,
➨ 通典 同羅 : 同 羅 者 , 鐵 勒 之 別 部 也 。 在 薛 延 陀 之 北 , 去 長 安 萬 七 千 五 百 里 ,戶 萬 五 千 , 俗 與 突 厥 略 同 。: 동라(同羅)는, 철륵의 별부로, 설연타의 북쪽에 있는데, 장안(長安)까지 17,500리를 가야한다. 1만5천호가 있다. 풍속(風俗)은 돌궐(突厥)과 대략 같다.》고 하였다.
원문(原文) : 통전(通典) : 契 丹 之 先 與 庫 莫 奚 異 種 而 同 類 , 并 為 慕 容 氏 所 破 ,俱 竄 於 松 漠 之 閒 。 其 俗 頗 與 靺 鞨 同 。魏 太 武 帝 真 君 以 來 , 歲 貢 名 馬 , 於 是 東 北 群 狄 悉 萬 丹 部 、 阿 大 何 部 、 伏 弗 郁 部 、羽 陵 部 、 日 連 部 、 匹 黎 部 、 比 六 于 部 各 以 其 名 馬 文 皮 入 獻 , 皆 得 交 市 於 和 龍 、 密 雲 之 閒 。 其 後 為 突 厥 所 逼 , 又 以 萬 家 寄 於 高 麗 。: 그 뒤, 돌궐(突厥)이 핍박하자, 그 중 『1만가(萬家)』가 고려(高句驪)에 위탁(寄)하였다.
(6) 契丹國志 / 卷七 聖宗天輔皇帝 : 《統和二十八年, 冬十一月,契丹伐高麗國。高麗與女真合兵拒之,契丹兵敗。: 통화 28년【통화(統和) 28년(年)은, AD 1,010 年이다】, 동(冬) 11월, 글란(契丹)이 고려(高麗)를 쳤다. 고려(高麗)는 여진(女眞)과 합병(合兵)하여 대항하여 글란이 패하였다.》고 하였다.
➨ 이때가 고려(高驪) 顯宗元文大王 경술(庚戌) 원년(元年)(AD 1,010), [송(宋) 대중상부(大中祥符) 三年ㆍ글란(契丹) 통화(統和) 28년] 인데, 성종(成宗)이 보기(步騎) 40만과 함께 친정(親征)하였다고 역사서(歷史書)는 기록(記錄)하고 있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三 / 顯宗元文大王[庚戌元年 宋 大中祥符三年,契丹 統和二十八年] : 辛卯,契丹主,自將步騎四十萬,號義軍天兵,渡鴨綠江,圍興化鎭,巡檢使,刑部郞中楊規,與鎭使,戶部郞中鄭成,副使,將作注簿李守和,判官,廩犠令張顥,嬰城固守。: 신묘일에 거란주가 친히 보병과 기병 40만 명을 거느리고 의군 천병(義軍天兵)이라 칭하고 압록강을 건너와서 흥화진(興化鎭 평북 의주군(義州郡))을 포위하니, 순검사(巡檢使) 형부낭중 양규(楊規)가 진사(鎭使) 호부낭중 정성(鄭成)ㆍ부사(副使) 장작주부(將作注簿) 이수화(李守和)ㆍ판관(判官) 늠희령(廩犧令) 장호(張顥)와 함께 농성하여 굳게 지켰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22 編書雜稿 二 : 《송사전(宋史筌) 요열전(遼列傳) : 2년, 소배압 등이 고려와 다하(茶河)ㆍ타하(陀河)에서 전투하였으나 크게 패하였다.》【천희(天禧 송 진종의 연호) 2년(1018, 고려(高麗) 현종(顯宗) 8)】
(7) 遼史 30 : 《二月,至應州新城東六十里,為金人完顏婁室等所獲. : 2월, 응주(應州) 신성(新城) 동(東) 60리에서, 금(金)나라 장수 누실(婁室)등에게 사로 잡혔다. 八月癸卯,至金.丙午,降封海濱王.以疾終,年五十有四,在位二十四年.金皇統元年二月,改封豫王.五年,葬于廣寧府閭陽縣乾陵傍. : 강등되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해졌으나, 병(病)으로 죽으니, 54세요, 재위 24년이었다. 금 황통(皇統) 원년(元年) 2월에, 예왕(豫王)으로 고쳤다. 5년에, 광녕부(廣寧府) 여양현(閭陽縣) 건릉(乾陵) 곁에 장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➊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22권 編書雜稿 二 : 《송사전(宋史筌) 요열전(遼列傳) : 至應州.爲金將婁宿所獲.後降封海濱王.以疾殂.年五十四.僭位二十四年.改元曰乾統曰天慶曰保大.自號天祚皇帝.金改封豫王.葬于閭陽乾陵旁. : 그 뒤 응주에 이르러 금(金)나라 장수 누실(婁室)에게 잡혔는데, 뒤에 강등되어 해빈왕(海濱王)으로 봉하여졌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4세이고 위에 있은 지 24년 만이었다. 연호를 건통(乾統)ㆍ천경(天慶)ㆍ보대(保大)라 고쳤으며 스스로 천조황제(天祚皇帝)라 하였는데, 금에서 예왕(豫王)으로 고쳐 봉하고 여양(閭陽) 건릉(乾陵) 곁에 장사지냈다.》하였는데, “요사(遼史)”의 내용(內容)과 거의 같은 설명(說明)을 하고 있다.
➋ 그런데 위의 “요사(遼史)”와 “글란국지(契丹國志)”의 내용은 이와는 조금 다르게 설명되어 있다. 즉(卽)
契丹國志 / 卷十二 天祚皇帝 下 : 《跪於天祚前曰:「奴婢不佞,乃以介冑犯皇帝天威,死有餘罪。」因捧觴而進,遂俘以還。削封海濱王,送長白山東,築室居之。踰年乙巳而殂,遼國遂滅。: 전(前)에 천조제(天祚帝)가 무릎을 꿇고 앉아 말하기를 : 노비(奴婢)는 불녕(不佞), 갑옷과 투구로 황제(皇帝)천위(天威)를 범한 것은, 죽을 수 있는 여죄(餘罪)다. 이로 인해 받들며 나아가, 사로잡혀 돌아왔다. 해빈왕(海濱王)으로 강등하여 봉하고,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으로 보내어, 집을 지어 사게 하였다. 해를 넘겨 을사(乙巳)에 죽었다. 요(遼)나라가 마침내 없어졌다.》고 하였다.
➨ 글란국지(契丹國志)에서는 “요(遼) 마지막 황제였다는 천조제(天祚帝)”를 사로잡아,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으로 보내어 집을 지어 살게 하였는데, 병(病)으로 죽었다는 것이고,
“송(宋) 휘종(徽宗)”과 수백(數百), 수천(數千)의 왕족(王族)과 궁녀(宮女)등을 사로잡아 장백산(長白山) 동(東)쪽, 두만강(豆滿江) 변에 살게 하였고, 죽으니 이곳에 장사(葬事)를 지냈다고 하였다.
➌ 문제(問題)는 바로 이거다. 역사서(歷史書)에서는 위와 같이 황제(皇帝)들의 죽음과 관련(關聯)된 여러 기록(記錄)을 남겨 놓고 있음에도 ‘장백산(長白山)=백두산(白頭山)’ 동(東)쪽 그 어디에서도 이러한 흔적(痕迹)이나 전해오는 이야기나 정황(情況) 또는 유물(遺物)유적(遺跡)조차 전혀 발견(發見)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 말하기를 : 또한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의 “始祖定三姓之亂建國鄂多理城即以滿洲”라고 하였고, 按滿洲本部族名恭考 : “發祥世紀長白山之東有布庫哩山其下有池曰布勒瑚里”이라고 하였으며, “貝勒居長白山東鄂多理城建號滿洲”하였는데, 도대체 그곳이 어디냐?
장백산(長白山) 동(東)쪽이 본시의 “만주(滿洲)”였다는 얘기다. 그곳이 어디냐? 하는 반론(反論)이나 질문(質問)은 기본(基本)인게, 누구도 이를 설명하지 못한다. 왜?
➍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황두실위(黃頭室韋) 또는 황두여진(黃頭女眞)”과 관계되는 것인데, 이들은 말 그대로 전형적(典型的)인 몽고족(蒙古族)과 같은 즉 색목인(色目人) 부족(部族)이다. 즉(卽) 이들 지칭(指稱)하여 글란국지(契丹國志)에서 말하기를 “髭 髮 皆 黃,目 睛 多 綠,亦 黃 而 白 多. : 머리털(髭)과 수염(髮) 모두 금발(黃)이며, 눈(目)의 눈동자(睛)는 녹색(錄)이 많고, 또한 누렇고(黃) 흰(白)것도 많다.”라고 하였다.
이들은 누군가? 이들은 어디로 사러졌는가? 진화(進化)하지 못해 도태(淘汰)되어 소멸(消滅)되었는가? 아니면 오늘날의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의 바이킹(Viking)종족들인가?
○ “글란족(契丹族)”,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건가? 작금(昨今)의 21세기(世紀) 오늘, 누가 이들의 후손(後孫)인가? 후예(後裔)들인가? 극소수(極少數) 인민(人民)들이 그들의 후손(後孫)이라고 자칭(自稱)하고 있다고 전해지는데, 글란(契丹)족 자체(自體)가 진화(進化)에 실패(失敗)해 소멸(消滅)된 것인가?
이건 결코 아니라고 본다. 즉 본디 “글란(契丹)”이 망(亡)하고 난 뒤, 그곳 땅을 점령(占領)한 민족(民族)과 부족(部族)들에게 동화(同化)되어, 자신(自身)들의 것을 다 잃어버리고, 전혀 다른 이름(異名)으로 21세기(世紀) 오늘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동구라파(東歐羅巴)와 서아세아(西亞細亞)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땅의 수많은 민족(民族)과 부족(部族)들을 보면 이해(理解)될 수 있다. 여진족(女眞族) 또한 똑같은 경우(境遇)다.
그래서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이 도태(淘汰)되지 않도록, 소멸(消滅)되지 않도록 국민(國民)들 스스로 민족의식(民族意識)을 자각(自覺)해야 하며, 특히 무능력(無能力)한 지도자(指導者)의 무능력(無能力)이 국가(國家)와 민족(民族)의 미래(未來)에 장애물(障碍物)이 되지 않도록 철저(徹底)한 감시(監視)와 견제(牽制)가 필요(必要)한 것이다.
2022년 12월 15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 글은,
우리와는 가깝고 먼 나라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일본(日本)과 왜(倭)에 대해 한 번 논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래는 倭였는가?
아니면 日本이었는가?
사서속에서 말하는 것처럼 倭라는 말이 역겨워 해뜨는 가까운곳에 있다는 말로 일본이라고 했는가?
아니면 倭와 日本은 본시 다른 국가였는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倭와 日本!
어떤 분들께서는 西倭(서왜)도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이건 맞는 말이라고 보아집니다. 왜냐하면 본시 倭는 오늘날의 해상을 표류하며 살아가던 종족들을 총칭했다고 보아지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조선의 낙랑 땅에 왜가 함게 살았다는 기록도 있고, 삼한의 남쪽 땅에 왜와 接해 있다고 했기 때문에 조선과는 떼래야 뗄 수 없는 악연을 갖고 있다고 보아집니다.
日本과 倭는 본시 서로 다른 종족? 부족? 나라였다고 기록한 사서도 있다는 것, 시사하는 바가 끕니다.
글란ㆍ글안ㆍ거란ㆍ거단 ㆍ요ㆍ케세이ㆍ키타이는 게르맨?, 게르만 일까요?
요즘은 왠지 고구려.발해는 유럽자체이고 장백산ㆍ백두산은 우랄산..그동쪽은 몽골 타타르 그서쪽은 흑수말갈ㆍ마자르ㆍ흉노ㆍ여진ㆍ청ㆍ카자크ㆍ코사크ㆍ훈 ㆍ고구려ㆍ발해ㆍ대진 또 그 서쪽은 게르만ㆍ거란ㆍ요ㆍ속말말갈로 여겨집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럽은 만주 자체가 아닌가 봅니다
안녕하세요! "러브 선'님!
고생 많으시죠. 조선사 즉 한국사는 다시 쓰여져야 한다. 이건 필연이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헌데, 옛 조선의 후손 또는 후예라고 하면서 족보를 들이대며 몇 대 할아버지께서 영의정을, 우의정을 또는 판서를 하는 등 우린 늘 사대부가로 양반가였다며 눈을 부라리며 입에서 침을 튀기며 열을 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주장하고 항변하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어디에서 영의정을 했는지, 우의정을 했는지를 알고 있을까요? 이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어디에서 양반가로, 사대부가로 있었다는 것인지를 무엇으로 증명한다는 것일까요?
족보! 그건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특히 1980년대에는 이 족보가 유행을 탔습니다. 이때 엄청나게 많은 족보들이 탄생되고 새롭게 만들어지곤 했답니다. 웃기는 이야기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한 점 검증도 없이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일제제국주의자들의 '식민사관 조선사'를 그대로 인수받아 국민들에게 강제 암기교육을 시킨 것은 바로 대한민국의 정부였고,지금도 그 세뇌작업은 그칠 줄 모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미친짓일까요?
조선사는 한국사죠.
최소 "동구라파로부터 중앙아세아, 대륙과 한반도, 열도까지 조선사의 영역입니다"
사가들은 말합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민족이나 종족들을 입에 달고 삽니다.
허나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종족과 부족, 민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고, 주변의 종족과 부족들에 동화되어 살고 있습니다.
사라져버린 것이 것이 아니라, 후대의 사가들에 의해 전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러한 종족과 부족들이 대거 있는 곳이 바로 '동구라파로부터 중앙아세아, 서남아세아 땅'입니다.
특히 '옛 오손족과 몽고족과 황두실위(황두여진)'과 그 생김새가 똑같은 자들이 오늘날의 화란과 볼랑기등등입니다. 바로 유럽의 몇 개 국가의 국민들과는 판박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이러한 것들에 대한 이의제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고, 패자는 말할 수 없는 것이죠.
대하민국은 뭔가? 냉전시대에 냉전국가들 틈 사이에서 어부지리로 남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신생국!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 오늘의 정쟁사는 바로 역사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좋은 논문 감동의 연속입니다 2023년도 기대가 됩니다
추운 날씨 편안하시고 건강하게 보내셔요
"대진"님!
안녕하세요.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올해도 며칠이면 안녕이군요! 세월은 참 빠릅니다.
후회없는 삶을 이루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추위가 계속되는데, 몸관리를 잘해야 될 것 같습니다.
댁내 늘 평안하시고, 건강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