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성현(功城縣) 본래 신라 대병부곡(大幷部曲)인데, 고려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상주목에) 내속(來屬)하였다.
(『고려사』권57, 지리지2 공성현)
자료2)
성종 2년 6월 주(州)·부(府)·군(郡)·현(縣)·관(館)·역(驛)의 전(田)을 정하였다. 1,000정(丁) 이상 주(州)·현(縣)은 공수전(公須田)주1) 300결, 500정 이상은 공수전 150결 지전(紙田)주2) 15결 장전(長田)주3) 5결, 200정 이상은 결락, 100정 이상은 공수전 70결 지전 10결, 100정 이하는 공수전 60결 장전 4결, 60정 이상은 공수전 40결, 30정 이상은 공수전 20결, 20정 이하는 공수전 10결 지전 7결 장전 3결이다.
향·부곡(鄕·部曲)은 1,000정 이상은 공수전 20결, 100정 이상은 공수전 15결, 50정 이하는 공수전 10결 지전 3결 장전 2결이다.
(『고려사』권78, 식화1 공해전시)
자료3)
삼사(三司)주4)에서 말하기를, "지난해 밀성(密城)주5) 관내의 뇌산부곡(牢山部曲) 등 3곳은 홍수가 범람하여 전화(田禾)주6)를 손상시켰으므로 청컨대 1년의 조세를 면제하십시오." 하니, 이를 따랐다.
(『고려사』권80, 식화3 진휼 재면지제 정종(靖宗) 2년 6월)
자료4)
정종(靖宗) 11년 4월 판하기를, " 오역(五逆)주7)· 오천(五賤)· 불충(不忠)· 불효(不孝)· 향(鄕)· 부곡(部曲)· 악공(樂工)· 잡류(雜類)주8)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였다.
(『고려사』권73, 선거1 과목(科目)1)
자료5)
(최사위가) 아뢰기를, "향리(鄕吏)의 칭호가 혼잡하니, 지금부터 여러 주(州)·군(郡)·현(縣)의 이(吏)는 그대로 호장(戶長)이라 하고, 향(鄕)·부곡(部曲)·진(津)·역(驛)의 이(吏)는 다만 장(長)이라 칭하도록 하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
(『고려사』권94, 최사위(崔士威))
자료6)
삼사(三司)가 아뢰기를, " 동경(東京)주9) 관내(管內)의 주·부·군·현·부곡 19곳은 작년의 오랜 가뭄으로 인해 민이 많이 굶주리고 있습니다. 청하건대 영문(令文)에 의거해서 사분(四分) 이상의 손실에 대해서는 조(租)주10)를 면제하고, 육분(六分) 이상의 손실에는 조(租)와 조(調)주11)를 면제하고 칠분(七分) 이상의 손실에는 과역(課役)을 모두 면제하되, 이미 바친 자는 (이를) 듣고서 내년의 조세를 감해 주십시오."하니 제가(制可)하였다.
(『고려사』권80, 식화3 진휼 재면지제 숙종 7년 3월)
자료7)
왕이 명을 내리기를, '경기의 주현들에서는 상공(常貢)주12) 외에도 요역이 많고 무거워 백성들이 고통을 받아 나날이 점점 더 도망하여 떠돌아다니고 있으니, 주관하는 관청에서는 계수관주13)에 물어보고, 그들의 공물과 역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결정하고 시행하라. 구리 철 자기 종이 먹 등 여러 소(所)에서 별공(別貢)주14)으로 바치는 물건들을 너무 함부로 징수해 장인들이 살기가 어려워 도망하고 있다. 해당기관에 연락하여 각 소에서 별공과 상공으로 내는 물건의 많고 적음을 참작하여 결정한 다음, 왕에게 아뢰어 재가를 받도록 하라.
(『고려사』권78, 식화1 공부 예종 3년 2월)
자료8)
익안폐현(翼安廢縣) ... 충주의 다인철소(多仁鐵所)인데, 고려 고종 42년에 토착인이 몽고병을 막는 데 공이 있어 현으로 승격시켜 그대로 충주의 속현으로 삼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14, 충주목(忠州牧) 고적(古跡))
자료9)
귀화부곡소복별감(歸化部曲蘇復別監)을 두었다. 일찍이 대성(臺省)주15)이 밀성인(密城人) 조천(趙阡)이 수령을 죽이고 적주16)에 호응한 죄를 논하여 귀화부곡으로 강등시켰다. 밀성군인 박의(朴義)가 매를 길러 국왕의 총애를 받고 좌우에 뇌물을 바쳐 왕에게 이르기를, "밀성은 대읍으로 공부(貢賦)가 심히 많은데, 부곡으로 강등시켜 진무할 자가 없으니, 그곳의 민이 유산(流散)함을 막지 못할까 두렵다." 하니,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고려사절요』권19, 충렬왕 2년 4월)
자료10)
유청신(柳淸臣)은 초명(初名)이 비(庇)이며, 장흥부 고이부곡인(高伊部曲人)이다. 나라의 제도에 부곡리(部曲吏)는 비록 공이 있더라도 5품을 넘을 수 없다고 하였다. ... 몽고어를 익혀 여러 차례 원에 사신으로 가서 잘 응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충렬왕의 총애를 받아 낭장(郞將)주17)에 임명되었다. 교(敎)하기를, "청신은 조인규(趙仁規)주18)를 따라 힘을 다해 공을 세웠으므로 비록 그의 가세가 마당히 5품에 한정해야 하나 다만 그 본인에게는 3품까지 허용하며, 또한 고이부곡을 고흥현(高興縣)으로 승격하라."고 하였다.
(『고려사』권125, 유청신)
자료11)
(충렬왕 22년 5월 중찬 홍자번이 올린 글 가운데) 여러 주(州)·현(縣) 및 향·소·부곡의 인리(人吏) 가운데 1호도 없는 경우가 많으니, 외방의 향리로서 권세에 의탁해여 피역하는 자는 모두 귀향시키도록 하라.
(『고려사』권84, 형법1 직제(職制))
자료12)
군현인(郡縣人)과 진(津)·역(驛)·부곡(部曲)인이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모두 진·역·부곡에 속하게 한다. 진·역·부곡인과 잡척(雜尺)주19)인이 혼인하여 낳은 자식은 반씩 나누어 속하게 하고 넘치는 수는 어머니를 따른다.
(『고려사』권84, 형법1 호혼(戶婚))
자료13)
향·부곡·진(津)·역(驛)·양계주진(兩界州鎭)에 편호된 사람은 승려가 되는 것을 금한다.
(『고려사』권85, 형법2, 금령(禁令))
자료14)
신라가 주군을 설치할 때 그 전정 호구가 현을 이룰 규모가 아니면 향이나 부곡을 설치하여 소재읍에 소속하게 했다. 고려 때는 '소(所)'라는 것이 있는데, 은소 동소 철소 사소(실) 주소(비단) 지소(종이) 와소(기와) 탄소(땔감) 염소(소금) 묵소 곽소(콩) 자기소 어량소(물고기) 강소(생강) 등 그 공납하는 물품에 따라 구별되었다. 또 '처(處)' '장(莊)'이라는 것이 있어 각 궁전 사원 내장택에 예속되어 세금을 내도록 했다. 위와 같은 곳에도 모두 토성의 아전과 백성이 있었다.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주20) 지리지는 모두 싣지 못했고, 정인지가 편찬한 『고려사』도 마찬가지다. 이제 이미 저명한 성씨는 그 본관을 싣지 않을 수 없으므로 『주관육익』주21)에 의거하여 정했다. 지금 상고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열에 한둘이고 모두 각 고을의 고적조에 들어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登神莊))
자료15)
{신증동국여지승람} 소재 군현 기타 구역의 도별 통계
경기
충청
경상
전라
강원
황해
평안
함경
합계
主邑數
37
54
66
59
26
24
42
22
330
屬郡數
5
7
44
2
12
0
0
2
72
廢縣數
18
13
19
65
8
5
2
11
141
鄕數
11
21
32
50
3
7
6
0
130
部曲數
18
69
209
78
10
0
3
0
387
所數
7
61
42
90
33
10
0
0
243
處數
14
9
2
3
3
4
0
0
35
莊數
4
2
1
0
1
1
0
0
9
驛數
54
71
158
60
82
31
39
54
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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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향촌지배질서와 신분제
발제자
9745036 박 성 언
참고문헌
채웅석 <고려시대 향촌지배질서와 신분제><<한국사>>(6) 한길사
1. 머리말
지배질서는 지배층이나 국가권력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지만, 그것들은 일방적으로 관철되는 것이 아니라 민과의 상호관계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게 볼 때 이글의 과제와 관련하여 고려전기의 전후, 즉 신라말기와 12,13세기에 전국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민의항쟁이 일어났던 사실을 특히 주목해야 한다. 더욱이 항쟁의 결과로 국가질서가 교체되었는데, 이러한 항쟁은 사회모순이 극대화되고 그에 대한 기존질서의 억지력이 약화되면서 일어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항쟁의 위상파악을 구심점으로 삼고 당시 재편되어간 향촌사회를 바탕으로하여 구축되었던 지배질서를 살피게 될 것이다. 향촌사회는 모든 사회관계가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장(場)으로서 국가권력과 지배층, 민 사이의 역동적 관계가 향촌사회에서 어떻게 질서화되고 변동되었는가 하는 점이 이 글의 주요 검토사항이다.
신라하대 민의 항쟁은 농민층의 분화가 심화되는 속에서 수취체제의 모순을 기폭제로 하여 일어났으며 항쟁에 참여한 계층들 사이의 이해관계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따라 사회변동을 수렴하여 새롭게 만들어지는 질서에서는 항쟁에 참가하여 무리를 이끌었던 계층들에게 정치.사회적인 참여를 상대적으로 개방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의 사회질서를 논의할 때 그 자체속에 내포된 모순과 변동의 계기를 아울러 고려해야 할 것이다.
2. 고려전기의 향촌상태와 본관제의 지배 질서
1) 나말여초의 사회변동과 본관제 성립의 배경
신라하대에는 골품제의 해체로 대표되는 지배질서의 붕괴와 함께 민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고양되었다. 생산력이 발전하였지만 그 성과를 민들은 자기 몫으로 누릴 수 없었고, 권농기능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수취부담이 가중되자 민들은 저항으로 나설 수 밖에 었었다. 그 당시 저항은 유망의 형태로부터 초적(草賊)활동, 적고적(赤袴賊), 양길(梁吉), 기훤(箕萱) 등의 활동처럼 대규모로 조직된 항쟁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권력은 사치를 금지하고, 지방제도를 비롯한 통치조직을 개편하는 등 수습대책을 시도하였지만 자체 모순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민의 저항이 일어나면서 자위조직도 각 지역에서 만들어졌다. 이들 자위조직에 토대를 제공하는 것은 호부층(豪富層)과 소농민들이었으며, 이 둘 사이에는 계급적 대립관계가 내포되어 있었으나 공동의 이해관계에서는 상호 결합했다.
삼국시기 4-6세경에 철제농기구와 우경, 수리시설이 널리 보급되면서 농업생산력이 증대되었고 이에 따라 사적소유가 진전되면서 이를 바탕으로 농민층이 분화되어갔다.
호부층은 신라하대 민의 항쟁으로 중앙통제력이 약화된 상황 속에서 이를 계기로 하여 지방세력으로서 분립적인 경향을 현실화하고 강화해나갔으며,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 몰락농민들과 계급적 대립관계를 이루었다. 호부층은 민과의 사이에 계급적 대항관계를 첨예화시키는 것 보다는 그들과 연대하여 일정한 정치적 지향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고, 그 과정에서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관계를 새롭게 재편해 나갔다.
지방세력가들은 자기지역에 있어서나 다른 세력과의 관계에 있어서 자신들의 지위가 지역사회에서의 지배력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또 호부층들은 공동제례의식을 행함으로서 지역사회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기능을 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점은 향도(香徒)의 조직과 역할을 살펴보아도 잘 드러나는데, 그 활동내용은 주로 불상과, 종, 석탑, 사찰 등의 조성과 법회 등에 대규모의 노동력. 경제력 등을 제공하고 그것을 매개로 신앙활동을 하였으며, 호부층이 주도하는 공동체적 유대강화를 현실적인 계기로 작용시켰다..
나말여초의 사회변동을 위와 같이 파악한다면, 신라 골품제사회가 붕괴되고 후삼국기를 거쳐 고려라는 새로운 정치체제가 성립되었으며, 고려왕조는 "인민을 법도있게 수취한다'고 표방하면서 조세압박에 대한 저항이나 새로운 정치적 지향이라는 호부층과 소농민들의 공동의 목표는 일정하게 성과를 거두었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동안 호부층과 소농민층간에 부차적으로 처리되었던 계급적 대립관계는 그대로 온존되고, 오히려 표면으로 부상되면서 고려의 지배질서 속에서 새로운 외피를 걸치게 되었다.
2) 적의 작성과 본관제의 향촌지배질서
고려의 본관제(本貫制)는 위와 같은 나말려초의 사회변동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성립하였고 그 내용들은 籍(적)의 작성을 통하여 조정되고 실체화되었다.
고대국가에서도 양전(量田)과 호구(戶口)파악이 이루여져 적이 작성되었으나 나말려초 변동기를 거치는 동안 토지소유관계와 군현의 영역이 많이 변화하였다. 그와함께 고려는 재편된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관계를 국가적 지배질서 속으로 편제하는 조치가 필요하였는데 그것은 치읍(置邑)의 형태로 나타났다.
"읍을 둔다"의 조치는 읍사(邑司)의 구성, 즉 재편된 지역사회의 내용을 국가에서 파악하여 지배질서 속으로 편제시키는 것으로서, 적(籍)의 작성과 그것을 토대로 한 치읍조치를 통해 영역확정과, 내부의 사회경제적 관계들이 국가에 의해 직접적으로 파악되었다. 또 치읍은 보통 호구의 파악과 동시에 이루어졌고, 995년(성종14)경에 완결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당시 국가. 호부층, 민 사이에 적의 작성을 둘러싸고, 그 각 계층들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민족시킬 수 있었고, 이런 관계 속에서 이 시대 특징적인 국가권력, 토지분급제도, 신분계층질서 등이 형성되었는데 위와 같은 과정을 통해 구성된 본관제에 의한 향촌지배질서는 다음과 같은 몇가지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당시 지역사회에서는 자위체제를 운영하면서 의식상으로 형성된 지역내의 결속과 타지역에 대한 개별성이 강하게 작용하여, 동일한 군적에 오른 백성으로서의 일체감에 기초를 두었다는 의미의 "군백성(郡百姓)으로 인식을 하여, 그 자신들이 결집을 이룰수 있었다.
또 호부층을 중심으로 직역체계를 수립하고 토성(土姓)을 분정(分定)하였는데, 이것을 영역내의 계서적(階序的)지배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
본관제의 지배방식은 영역간에도 계서적인 지배형태를 채택하였는데, 군현제와 부곡제, 주현(主縣)과 속현(屬縣)의 구별이 그것인데, 주민에 대한 법제적인 차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군현의 일반촌락과 부곡제지역 사이에는 다방면에 걸친 차별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영역간의 계서적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영역규제가 실시되었는데, 영역규제는 호구와 전정(田丁)모두에 실시되었다.
국가로부터 향리의 직역을 분정받은 호부층은 나말려초 관반조직을 계승하여 읍사를 구성, 그 지역을 지배하였다. 읍사에는 향리직제가 마련되고 행정조직이 설치되어 행정실무를 총괄하였다. 또한 이 계층은 지방군의 지휘자가 되어 지역사회를 지배하였다.
또 읍사의 하부단위에는 촌장. 촌정의 직임이 있어 촌성이 분정되는 지역촌단위의 영역에서 지배를 담당하였다. 이처럼 국가에 의한 촌락지배는 재지의 유력계층, 즉 향리층이나 촌장, 촌정계층을 통하여 실현되었다.
고려 전기의 향도조직과 성격을 살펴보면 신라 하대의 그것을 기본적으로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호부층들이 주도하는 본관의 정치적 공동체, 즉 읍사가 전면에 부각되었으며, 향도조직은 이 조건에 일정하게 제약받고 역으로 그 것을 보강하기도 하였다.
고려 전기 향도의 규모는 영역적으로 군현 또는 지역촌 규모였으며, 지역민들을 포괄하든지 유력계층으로 구성되면서 호부층 중심의 지역사회운영을 보완하였다.
다음에 고려 전기 국가질서의 일환으로서 팔관회.연등회와 향도의 관련성이 주목되는데, 즉 지방의 지배세력들이 향도조직을 통해 지역내 통합을 강화하려 한 것처럼, 국가적 차원에서는 팔관회와 연등회가 지방세력을 포섭.지배하는 장치로서 의미를 가졌던 점이 지적되고 있다.
3. 본관제와 신분계층질서의 관계
1) 본관제의 지배방식과 양천제
고려시대 신분제는 양천제(良賤制))를 바탕으로 하였고, 그에 따라 신분이 법제적으로 양인과 천인으로 크게 나뉘었다. 이와는 달리 고려시대 신분체계를 관료귀족, 중간계층, 양인, 천인의 4계층으로 구성하는 견해도 있지만, 이글에서는 기본적으로 신분제의 기본구조를 양천제로 파악하려 하며, 특히, 고려 전기 국가권력은 국역부과를 중심으로 전체주민을 양천제라는 기본틀로 파악했다.
사회의 내적 질서가 법제화된 한 측면은 노비제를 통하여 살펴볼 수도 있는데, 노비는 개인 또는 기관의 재산으로 인정되어 천인신분이 되었다. 노비신분은 원칙적으로 양인과의 혼인이 금지되었고, 국역을 부담하지도 않았으며, 본관제에 편성되지도 못하였다.
노비신분과 같이 본관제에 편성되지 않고 국역을 부담하지도 않던 존재로서 양수척(楊水尺)을 들수 있는데, 이들은 적에 올려져 파악되지도 않고, 이동하는 생활을 하며 부역의 의무도 지지 않았다.
그러면 본관제질서 속에 편제된 양인신분 내부의 계층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고려시대에 천인(노비)에게는 사환권이 부정되었지만 양인에게는 인정되었다. 그렇지만 사환권(仕宦權)이 양인신분의 보편적 권리로 인정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고려시대 관료층과 중간계층 사이에는 계선이 분명하게 존재하면서도, 관료층의 하부와 중간계층의 상부가 서로 중첩되어 연결되었던 점이 밝혀지는데, 비록 별도의 신분으로 구분하기는 어렵지만 양인신분내에서도 중간계층과 그 이하 계층 사이의 계선이 부각된다.
고려전기 양인층 내부에서 현실적인 경제력의 차이를 기반으로하여 국가에 대한 역부담의 구분으로 발전하고, 계층적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되어갔던 모습은 정호와 백정의 구분으로 찾아볼 수 있다.
정호는 고려 전기 백정보다 우세한 조건을 가지고 있던 부강한 계층이었고, 정호층이 변방수비와 농지개간이라는 이중목적을 위한 변방 사민(徙民)의 대상으로 차정(差定)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정호층의 부강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면 정호와 백정의 관계는 어느 정도로 계서화되어 있었을까?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정호는 국가에 직역을 지면서 전시과제도에 의해 군인전. 외역전 등의 분급대상이 되고 정치적으로 지배계층 범주의 하한을 이루었던 중간계층들이었으며, 백정은 일정한 직역과 전정을 받음이 없이 다만 국가에 대해 조세를 부담하는 피지배층이었다.
정호와 백정층 각각의 내부에는 그 존재형태가 다양했는데, 정호의 경우 같은 지역 사회 내에서도 직역의 종류와 직의 높고 낮음에 따라서, 또는 가문의 우열을 따라서 차이가 났으며, 영역간의 계서적 지배방식하에게 그에 따른 차이가 존재하였다.
2) 사회적 분업과 계층질서
사회적 분업과 유통구조는 국가권력과 지배층에 의해 조직되는 면이 강하였다. 특히 국가질서 의 차원에서 業(업)이 고정화되었으며, 거주지와 복색, 교육과 입사(入仕)의 기회 등 사회적 위신이 차별적으로 규정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 농민은 조(租), 포(布), 역(役), 삼세(三稅)의 주요부담층이었고, 이 시기의 공물생산은 농민의 다양한 생산활동분야에 걸쳐 강요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농업을 기초로 하는 한편 공물생산과 관련하여 본관제하에서 특수하게 편제된 소(所)지역이 존재하였는데, 소는 특정공물을 생산하면서 소리(所吏)라는 그 자체의 관리조직을 갗추고 군현제에 의해 행정적 통치를 받았다. 이처럼 군현의 일반농민과 소의 주민으로 양자를 구분하여 이루어진 공물수취는 군현규모, 크게는 국가규모에서 통일적으로 이루어지고 조정되었다. 같은 부곡제에 포괄되는 향(鄕), 부곡(部曲), 장(莊), 처(處), 역(驛), 진(津) 등의 지역들도 소의 경우처럼 실상 농업에 종사하면서 국역체계 속에서 특정역을 부담하기 위하여 설정된 단위들이었다.
또 농.공.상업 등 여러 직업에 종사하는 개개인의 존재형태는 다양하였지만, 그에 대한 차이는 고려되지 않은 채 모두 공장. 상인 등의 범주로 파악되었다.
이상에서 본관제에 긴박된 양인을 바탕으로 한 국가의 국역체제는 각종 사회적인 역의 부담층에 대해 각각 분리 설정하였고, 같은 본관 지역내에서도 정호와 백정, 잡류, 공장과 상인 등의 사회적 지위가 달리 규정되었다.
3) 차대정책 합리화의 논리
신분계층 질서가 표현되는 정치적, 사회적인 차별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분식되면서 고정화되고 세습화 되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 분식의 대표적 형태는 형벌과 관련시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대한 계서적 지배를 합리와하기 위한 근거로서 왕조국가질서에 대한 불복종에 따른 형벌을 들었다. 특히 건국당시의 상황을 문제로 삼았는데 이때 본관제가 전국가적 규모로 질서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국가질서에 대한 협력여부를 명분으로 하여 차별이 합리화되었던 점이 주목된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부곡제지역민은 영역적으로 규제되어 계서적 차대(差待)를 받고, 자녀에 대한 귀속률이 노비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염격하게 적용되었다.
이렇게 본다면 양천제의 큰 테두리 속에 부곡제지역민이 양인에 포함되지만, 양인내에서 다른 계층과는 다시 분명한 계선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이 점이 고려시대 신분계층질서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곡제지역민을 제외한 양인신분내의 다른 계층들에 대한 차대는 대개 본말관(本末觀)의 입장에서 합리화되었는데 이는 농업이 본업이 되고 수공업과 상업은 상대적으로 말업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면 고려시대에 말업관의 토대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권농과 토지긴박이라는 국가적 필요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수공업의 경우 신라시기에는 공장이 관등위계를 받았으며 지역사회내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는데, 민의 분화가 진전되면서 개별적이고 사적인 성격의 수공업자가 나타나게 되고, 그에따라 국가권력은 이러한 경향에 대해 농업에 기초한 국가질서를 위협하는 현상으로 파악하여 소위 말업관에 따른 차대에 의한 제한을 강화했다. 그리고 이러한 차대정책은 기본적 생산인 농업으로부터 일탈하여 상공업으로 전신하는데 대해 일정한 제한을 하는 것인 동시에 업(業)의 강제, 즉 역(役)의 징발체제의 유지라는 국가의 필요에 기초한 것이기도 하였다.
4. 고려 후기 향촌지배질서와 신분제의 변화
1) 민의 항쟁과 관 주도 향촌통제의 모색
본관제에 의한 향촌사회의 지배질서는 12세기 이후 점차 변화하였는데 주목되는 변화의 모습을 살펴보면 속현지역에 감무(監務)를 비롯한 지방관이 많아지고, 부곡제지역이 군현으로 승격되거나 군현내에 흡수되면서 감소되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망민이 대규모로 발생하고 항쟁으로 발전하면서 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충격이 가해졌다.
이 시기 민의 유망은 경제적으로 진전(陳田)의 대규모적인 발생에서 표현되었는데, 주된 원인은 사회경제적인 경작조건의 악화에 있었다.
지배층들이 소유지와 수조지를 집적시키는 경향이 많아지고, 토지를 탈점(奪占).겸병(兼倂)하는 풍조가 예종. 인종때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농업뿐 아니라 수공업이나 상업을 통하여 소농민들의 잉여를 축적할 가능성도 권세가, 사원, 지방관, 향리 등에 의한 강제적 상행위 결과 축소되었다.
이처럼 난숙한 귀족문화는 수취량을 늘리고 농장의 확대나 피지배층을 상대로 한 강제적 상행위, 고리대 등을 통해 그 물적 기반을 확보하려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지배질서를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상과 같은 사회변화 속에서 팔관회와 국선(國仙)의 유풍이 원래의 격식을 잃고 쇠퇴되었는데, 이는 전대의 신앙활동보다 향촌공동체적 모습이 부각되는 향도의 모습이다. 이는 12세기 이후 농민층의 분화과정에서 몰락농민이 발생하는 한편, 상대적으로 자립성을 확보해나가는 소농민들이 자신들의 기반을 보장할 수 있도록 향촌공동체를 재구성할 필요에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회변화 속에서 지배질서도 재편되었는데, 고려후기에는 현거주지에 적을 붙여 수취대상으로 삼는 공호제(貢戶制)가 실시되었다.
지방관 주도로 향촌사회의 운영이 이루어지도록 추구되면서 향례도 개편되었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일련의 정책들은 사회변동에 대응한 것이었지만, 기존의 질서를 전면적으로 개혁한 수준은 아니였다.
2) 신분계층질서의 변화
12세기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사회질서가 전반적으로 동요하게 되었으며, 신분계층 질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12세기 이후 공호제가 실시됨으로써 몇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영역간에 실시되었던 계서적 지배질서가 무너지면서 부곡제 지역민과 일반 군현민 사이의 신분적인 동질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부곡제지역이 해소되어 군현으로 상승하거나, 부곡제민들의 항쟁이 계속되어 더 이상 차대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둘볁로는 '중간계층'의 계서적 지위의 변화를 들수 있다. 12세기 이후 향리들은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향촌질서를 주도하기 어려워지고 향역부담자들로 지위가 하락해갔다. 그리하여 차츰 향리들의 피역(避役)현상이 심해져 더 이상 향촌사회운영이 어려웠고, 직역부담에 따른 반대급부로서 전정(田丁)의 분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것도 한 이유가 되었다.
셋째로는 공호제실시가 민의 유망에 대응한 것이면서 또한 양인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인데, 국가는 조세부담층을 확보하기 위해 양수척이나, 사적으로 예속된 양민들을 노비변정사업 등을 통해, 추쇄(推刷)하여 공호에 충당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공호제의 실시를 통한 공역부담층의 확보노력에도 불구하고 노비제 자체는 사회질서의 근간으로 고수되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고려 후기에는 양인에서 천인으로 뿐만 아니라 노비가 양인으로, 나아가서는 지배계층으로까지 상승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충렬왕 이후에는 결핍된 국가제정을 보충하기 위해 제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도 실시되었으며, 일반평민이나 향리층들도 과거제를 이용하거나 이러한 기회들을 이용하여 상급지배계층인 품관으로 지위를 상승시켰다.
또한 호구를 위조하든지 권귀와 연결되어 불법적으로 관직을 받는 등 비정상적인 방법에 의해 양반으로 상승하기도 하였다.
지배질서의 차원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양인농민층이 몰락하고 품관층(品官層)이 확대되는 현상인데, 고려후기 신분제 정비는 노비변정과 양반호적의 정리를 통해, 대체로 지배층을 양반에 한정시키되, 한편으로 천인을 노비에 한정시켜 양인을 확보하고, 양인내부의 계층적 동질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고 파악되고 있다.
정약용도 두손 두발 다 들다
병역비리 역사I- 끝까지 군역 요리조리 피한 조선양반들…힘없는 농민은 성기 잘라 기피
이회창 후보의 아들 정연씨의 병역면제를 둘러싼 의혹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이 후보 지지자들은 또 그놈의 병풍을 꺼내 재탕·삼탕하고 있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러는 와중에 18년 만에야 진실이 밝혀진 허원근 일병 사망 은폐·조작사건은 우리의 가슴을 친다. 신의 아들은 형제가 군대를 면제받는데, 어둠의 자식은 라면 맛이 없다고 총 맞아 죽고, 그 죽음조차 자살로 은폐되어야 하다니. 병역기피 문제가 나올 때마다 많은 사람들, 특히 현역으로 복무한 사람들은 속된 말로 꼭지가 돈다. 아니, 돌 수밖에 없다. 군대 갔다 온 사람들만 바보가 되는 사회에서 ‘자랑스럽게’ 군대 빼먹은 것들을 위해 3년 가까운 세월을 썩어야 했다니.
조선시대, 번상(番上)과 봉족(奉足)
사진/ 양인과 천민으로 신분이 갈렸던 조선시대. 군역의 부담이 무겁다 보니 양인의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양반 가문의 노비가 되는 것을 자원하는 일도 많았다. 단원 김홍도의 <기와이기>. (조선시대 풍속화)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이래 군대가 없는 적은 없었다. 군대의 역사만큼 역사가 오랜 것이 병역기피의 역사다. 군에 복무하는 것이 하나의 신분적 특권이고, 군복무에 대한 대가가 정당하게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병역기피가 심하지 않았지만, 부담만 있고 개인에게 돌아오는 것이 불이익뿐인 사회에서 병역기피나 거부가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병역기피에도 뿌리깊은 역사가 있다.
고대사회에서는 귀족이 전사계급였기 때문에 귀족들의 군복무는 당연한 일이었다. 서양에는 이런 전통이 남아 있다 보니 지배층 젊은이들이 군복무를 해야만 지배층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 즉 지도층의 의무를 이야기할 때 군복무가 꼽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까지는 이와 비슷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려가 창건되고 사회가 안정화되면서, 고려의 지배층은 무신 성향을 버리고 유학을 배우는 문신귀족으로 변화했다. 고려의 문신귀족들은 점차 숭문천무(崇文賤武), 즉 문을 숭상하고 무를 업신여기는 풍조에 빠졌다가, 무신과 군인들의 반발을 자초해 무신의 난이라는 호된 대가를 치른다. 고려시대에 군인은 전시과 체제 아래 편입되어 군인전(軍人田)을 지급받았다. 군역과 함께 군인전은 세습되었기 때문에 군인전을 부여받고 군인으로 나가는 특정집단이 형성되었는데, 이들을 군반씨족(軍班氏族)이라고 했다. 이들의 지위는 문신이나 무신에는 못 미치지만, 평민농민보다는 더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평화가 계속되면서 군인들은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되는 천역으로 변해갔고, 군인전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군반씨족 체제의 와해는 불가피했다. 무신의 난 이후 정권을 잡은 최씨 가문은 삼별초를 만들었는데, 형식은 정부군이었지만, 내용으로는 최씨 가문의 사병(私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별초가 해체된 뒤 왜구의 침략 등 외침이 있으면 농민에서 병사를 징발해 대응하고 전쟁이 끝나면 군대를 해산했다. 상비병 체제의 붕괴 속에서 고대 병농일치의 군사제도로 돌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창건 이후 태종은 개국공신들이 두었던 사병을 혁파하고 군제를 개혁했다. 조선 전기의 군제는 기본적으로 병농일치에 입각한 국민개병제로,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천인을 뺀 모든 사람들이 군역(軍役)의 의무를 지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시대의 군역은 16살에 시작해 환갑상을 받을 때가 된 60살에야 면하는, 평생에 걸쳐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부담이었다. 병농일치의 국민개병제가 원활히 운영되기 위해서는 농민들에게 토지가 지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조선왕조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급해줄 수 없었다. 따라서 조선의 국민개병제는 성립과 동시에 붕괴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의 군역은 서울로 올라와 현역으로 근무하는 번상(番上)과 번상하는 군인의 생계를 돕는 보인(保人) 또는 봉족(奉足)으로 구분된다. 고려시대에도 봉족을 두었는데, 고려의 봉족은 주된 임무가 군인전을 경작하는 것인 데 비해, 조선시대의 봉족은 번상을 하는 정군(正軍)들에게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포(布)를 바쳐야 했다. 봉족들이 군역으로 바쳐야 하는 포는 정군의 역종에 따라 달랐지만 대체로 1년에 2필(돈으로는 2량, 쌀로는 6두)로 상당히 무거운 부담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번상하는 일도 점차 포를 바치는 것을 바뀌어 국방력은 매우 약화했다.
승병은 군역기피의 전통?
양반이나 공신의 자제들은 조선 초기에는 충순위(忠順衛)·충의위(忠義衛)·충찬위(忠贊衛) 등 특수한 성격의 보충대에 편입되었다. 이들 부대들은 군사적 성격보다는 문무과에 합격하지 못한 자들이 관직에 진출하기 위한 대기소 역할을 하는 것으로써, 국민개병제의 본래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조선 초기의 양반 자제들은 이런 식으로나마 군역의 의무를 졌다.
조선의 법제상 양반이란 신분의 개념이 아니라 문반과 무반의 관료를 뜻하는 것이며, 법제상의 신분은 양반을 포함한 양인과 천민만을 구분하는 양천제(良賤制)였다. 그러나 제도는 하나의 이상이었을 뿐, 시간이 흐르면서 양반은 특권귀족화하였다. 양반들은 자신들이 일반 평민들이 져야 하는 군역을 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니, 달가워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군역을 지지 않는 것이 양반의 상징으로 여기게 되었다. 조선 초기의 인구 구성에서 양반이 10% 미만이고, 노비 등 각종 천민이 40∼50%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전체 인구의 절반 정도만이 군역을 전담한 것이다.
포 2필이라는 만만치 않은 군역을 거의 평생 져야 하니 농민들 사이에 군역을 피하는 일이 일반화되었다. 엄격한 신분제 아래서 양인의 신분은 노비보다 높은 것이었다. 그러나 군역의 부담이 무겁다 보니 양인의 신분을 스스로 포기하고 세도가나 힘 있는 양반 가문의 노비가 되는 것을 자원하는 일이 많았다. 스스로 노비의 길을 택해야 할 만큼 군역의 부담은 무거운 것이었다. 또 하나의 방법은 승려가 되는 길이었다. 조선시대 승려의 지위는 고려시대와는 달리 천인에 속하는데, 양인인 농민이 사회적 신분을 낮춰 승려가 되는 데는 불심의 발동보다 군역의 무서움을 피하기 위한 것이 더 중요한 요인이었다. 농민들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승려가 되는 일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승려들은 국가에서 토목공사에 동원하는 요역 대상이 되었고, 임진왜란 당시 승병이 출현한 것도 호국불교의 전통보다 승려집단이 군역기피자의 소굴이라는 인식과 더 관련이 깊다. 이도저도 안 되는 농민들은 도망을 쳐서 군역을 모면했다. 또 당시에는 대립(代立)이 공공연히 인정되어 돈 있는 사람은 자기가 번상해야 할 차례에 돈을 주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현역근무를 하게 했다.
양인들 가운데서 그래도 여건이 좋은 사람들은 향교에 입학하는 것으로 군역을 피했다. 해방 이후 대학생에게 징집을 연기해준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는 향교에 입학해 교생(校生)이 되면 군역을 면제해주었다. 여기서 특기해야 할 점은 서양과는 달리 유교문명권에서는 평민도 여건이 허락되면 교육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평민 가운데도 드물기는 하지만 문과나 생원, 진사과에 합격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향교의 교육 기능은 매우 취약했다. 이미 중종대에 이르면 당대의 권신 김안로(金安老)가 향교는 군역을 피하려는 자의 소굴이라고 개탄했을 정도로 향교는 교육적 기능울 상실했다. 더구나 이미 군역면제의 특권이 있는 양반들은 평민들이 군역을 피하려고 득시글대는 향교에 자제들을 보내는 것을 치욕으로 여겼다. 17세기 이후 사교육기관인 서원이 발달하고, 공교육기관인 향교의 교육 기능이 붕괴한 것도 군역제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갓난아기도 군역, 죽은 사람도 군역
사진/ 벼슬을 산 사람은 군역을 면제받지 못하도록 중앙정보가 곡물이나 돈을 받고 판 공명첩. 그러나 별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임진왜란 이후인 인조대에 이르면 전국의 교생 수가 4만명을 넘었다. 교생들이 향교에 적을 두는 이유가 유학 공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역 기피에 있었고, 평생을 교생으로 있으면서도 글 한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정부에서는 낙강충군법(落講充軍法)이라는 것을 제정해 일정한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면 교생들에게도 군역을 지게 하는 방안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아직 향교에 빈한한 양반 자제들이 적지 않게 다니는데다가, 군역을 지느냐의 여부가 양반층의 신분의 상징이 되어버린 마당에 이 법을 시행하는 것은 곤란했다. 결국 “민심은 잃어도 좋으나 선비들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民心可失 士心不可失)”라는 명분 아래 이 법은 시행 6개월 만에 폐지되었다.
효종은 청나라의 침략에 굴복한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에 힘을 기울였다. 민족주의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북벌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지만, 이 당시의 군비 확충은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 이른바 양역변통(良役變通)의 논의를 낳았다. 여기서 양역이라 함은 곧 군역을 말하는 것으로, 양반들이 전혀 군역을 지지 않아 양인들만 지게 된 사정을 반영한다. 좁은 지면에 복잡한 논의를 소개할 수는 없지만, 과도한 군역 부담을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유일한 방안은 양반을 포함한 모든 가호에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戶布法)을 실시하는 데로 모아졌다. 그러나 군역을 지지 않는 것을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던 양반들은 이 제도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영조는 호포법이 실시되면 자신이 가장 먼저 호포를 바치겠다고 선언하며 양반들의 양보를 촉구했으나, 양반들은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호포법은 시행되지 못하고 대신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었다. 균역법은 종래 포 2필인 군역의 부담을 1필로 반감하는 조치였다. 균역법은 호포법만큼 강력하지는 못했어도, 잘만 시행되면 농민들의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균역법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세율을 줄인 대신, 세원을 넓히고자 한 정부는 군적에 올라 군역을 져야 하는 사람들의 총원인 군액(軍額)을 크게 늘린 것이다. 영조의 전 임금인 숙종대에 30만이던 군액은 영조대에 이르면 50만으로 크게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흔히 삼정(三政)의 문란이란 말을 많이 쓴다. 삼정이란 정부 수입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토지세인 전정(田政), 군역을 포(布)로 받는 군정(軍政), 정부의 구휼미 제도로 사실상 고리대금업이 돼버린 환곡(還穀)을 말한다. 이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부담이 군정이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세율은 낮아졌지만, 세원을 확대하다 보니 16살 이상 60살 이하의 장정이 아니라도 군역의 부담을 져야 했다. 갓난 아이도 군적에 올려 군포를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은 사람도 살아 있는 것으로 꾸미거나 체납액을 이유로 군적에서 삭제해주지 않고 가족들로부터 계속 군포를 거둬가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도망간 사람의 군포를 친척이나 이웃에 부과하는 족징(族徵)·인징(隣徵) 등은 군역이라는 이름 아래 농민들을 쥐어짜는 고전적 수법이었다.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도망갈수록 남아서 땅 파고 있는 농민들의 부담은 더욱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학질은 떼도 첩역은 못 뗀다”
사진/ 담뱃대를 문 조선시대 양반. 조선 후기 신분제의 문란 속에 양반 인구가 전체의 40%가 넘는다는 통계가 나온 것도 다 군역기피자들 때문이다.
또 조선 후기에는 군제가 복잡해지면서 농민들도 자신이 어떤 군영의 군역을 지는지 알 수조차 없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의 이 군영, 저 군영이, 또는 지방의 군영에서 각각 군역을 부과해 한몸으로 여러 곳에 군역을 져야하는 첩역(疊役)의 폐단도 자주 일어났다. 때문에 농민들은 학질은 뗄 수 있으나 첩역은 뗄 수 없다고 탄식했다.
농민의 부담이 이렇게 무겁다 보니 아전들에게 뇌물을 바쳐 군역을 면제받으려는 사람들은 자꾸 늘어났다. 아니, 아전을 탓할 것이 아니라 중앙정부에 더 큰 책임이 있다. 임진왜란 이후 정부는 부족한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납속책(納粟策)을 써서 곡물이나 돈을 바치는 사람들에게 벼슬을 팔았다. 벼슬 임명장인 교지에 이름을 비워놓은 이른바 공명첩(空名帖)인데, 이 벼슬을 산 사람은 호적에 납속, 즉 돈으로 산 것임을 밝혀 군역을 면제받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지켜질 리 없었다. 돈 주고 공명첩을 살 정도의 재력가라면, 아전들에게도 돈을 먹여 호적에 납속 두 글자를 빼고 기록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가난한 양반들은 조상이 받은 여러 장의 교지 가운데서 중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를 팔아먹고, 이를 산 사람은 교지의 주인공이 자기 조상이라 우기고, 또 족보를 위족하고 해서 조금 힘 있는 사람들은 다 군역을 빼먹었다. 이렇게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꿔가며(換父易祖) 얻은 양반 지위는 실제 양반 사회에서 양반으로 대우받을 수 없었지만, 국가를 상대로 군역을 면제받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문란과 관련해 호적을 분석해 양반 인구가 전체 인구의 40%가 넘는다는 통계가 나오는 것도 다 이들 군역기피자들 때문이다.
그러면 호적을 정리하고 인구를 파악해 군정을 닦는 군정수(軍政修)를 해 이를 바로잡아야 하지 않았을까?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비꼬는 말이 아니라 진지하게 차라리 그대로 두는 것이 더 좋다고 말했다. 아전이라는 것들은 일이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일이 있어야 먹을 것이 생기니, 군정을 닦는다고 호적을 재정리하면 아전의 이익이 될 뿐 오히려 농민에게 부담이 될 뿐이라서, 군정수는 현명한 수령이 할 짓이 못 된다는 것이다. 다산 같은 철저한 개혁가도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가 된 것이다.
천민의 다수가 조선 후기에 가면 양인에 편입되었다고는 하지만, 어떤 사회도 특권층이 40%를 넘는다면 유지될 수 없다. 경제적·사회적 형편이 좋은 상위 40% 정도가 군역을 지지 않고, 또 노비 등 천민들을 빼고 나니 중하위층 30, 40%의 양민들만 군역을 부담하게 된 것이다. 정약용이 ‘애절양(哀絶陽)’이란 끔찍한 시를 쓴 것은 이런 상황에서였다. “시아버지 돌아가 벌써 상복을 벗었으며/ 갓난 아기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3대의 이름이 첨정되어/ 군보에 올랐네/ 하소연하러 가니/ 호랑이 같은 문지기 지켜 섰고,/이정(里正)이 호통치며/ 외양간에서 소마저 끌어갔네/ 칼 갈아 방에 들어가/ 자리에 피 가득한데/ 스스로 한탄하는 말/ 애 낳아 이 고생당했구나.” 이리저리 다 군역을 피하는데, 그럴 힘도 주변머리도 없는 불쌍한 농민이 군역의 부담을 견디다 못해 자신의 성기를 자른 것이다. 피임수술도 기구도 없던 시절, 아이 하나 더 태어나면 군포 2필씩 부담이 되니 그곳에 칼을 댄 것이다. 정력에 좋다는 것은 모두 다 잡아먹어 멸종위기에 놓인 정력공화국 대한민국의 아아, 가련한 조상의 끔찍한 군역기피여!
보수적 대원군조차 실각시킨 호포법
1862년 대기근이 들고 삼남지방은 흔히 민란이라고 하는 농민들의 항쟁에 휩싸였다. 삼정의 문란, 특히 군정의 문란은 농민항쟁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대원군이 집권한 것은 안으로는 거센 농민항쟁에, 밖으로는 서양의 동아시아 침략에 직면한 상황에서였다. 안팎으로 조여오는 위기상황에서 대원군은 나름대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해 국가의 재정을 튼튼히 하고, 국방력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보수적 개혁가인 대원군의 여러 정책 가운데서 군역과 관련된 것은 17세기 말부터 양역변통 논의 때마다 대안으로 제기됐으나 양반들의 저항으로 시행되지 못한 호포법의 시행이다. 보수적 실용주의자인 대원군은 정부의 재정을 확충하기 위해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호포법을 시행했지만, 결코 양반들의 신분적 특권을 약화하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군포를 부담하지 않는 것을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던 양반들의 입장을 고려해 양반가에서 호포를 낼 때는 노(努)의 이름으로 내게 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양반들은 대원군을 용납하지 않았다. 병인양요·신미양요 등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와 미국 함대를 ‘격퇴’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다)하고,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보수적 양반의 지지를 받은 대원군이 실각한 결정적 요인은 민감한 호포법의 시행, 곧 양반들이 자신의 신분적 특권의 상징이라 여기는 군포를 부과했기 때문이다.
조선은 초기에는 국민개병제를 표방해 양반들도 군역을 져야 했지만, 세월이 흐르자 군역면제는 양반의 특권으로 자리잡았다. 이회창 후보 일가의 병역면제 의혹을 둘러싸고 많은 사람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거론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유교가 뿌리내린 근 천년의 세월 동안 우리나라 지배층의 덕목에 군복무는 포함되지 않았다. 일반인과 똑같이 군역을 지는 것은 오히려 치욕적인 일이었다. 조선시대였으면 상류층의 병역면제는 전혀 문제가 될 일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이회창 후보는 시대를 잘못 만난 불행한 지도자다. 그러나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조선시대의 지배층에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런 유의 글을 쓰다 보면 당연히 지배층에 대해 비판적일 수밖에 없지만, 조선시대의 지배층들은 나름대로 매우 엄격한 자기관리의 잣대가 있었다. 엄청난 문제점을 안고 있었음에도 조선왕조가 5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당시 지배층이 그들 나름대로 엄격한 책임감으로 사회를 지탱해왔다는 점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것을 선비정신이라 부르든, 유교 지식인들의 자기성찰이라 부르든 불행히도 오늘날의 상류층은 그런 전통사회 지배층의 책임감과는 전혀 무관하다. 그렇다고 무(武)의 전통을 이은 서구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체현하는 것도 아니다. 이 땅의 주류는 정녕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려 하는가?(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의 병역기피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노동력을 징발하는 역(役)은 요역( 役)과 軍役(軍役)으로 구분되었다. 요역은 부역(賦役)이라고도 하였는데 1년에 일정한 일수를 지는 소경지역(所耕之役)과 수시로 필요할 때마다 동원되는 잡역(雜役)이 있었으며, 軍役은 직역이 없는 모든 백성(노비제외)이 지는 국방의무였다. 軍役은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신분의 남자들이 지는 군 복무였다. 조선시대의 신분제는 양천제(良賤制)이다. 양신분에는 兩班과 良人 農民들이 속하고 천신분에는 노비나 천한 직업의 종사자들이 속했다. 이러한 신분제하에서 원칙적으로 양신분에 속하는 兩班과 良人 農民은 모든 軍役을 부담해야 했다. 그러나 兩班은 이런 저런 이유로 軍役을 면제받았다. 당연히 軍役은 良人 農民들만의 몫이었다.
이 軍役을 부담하는 형태는 군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조선 초기의 군제는 중앙은 오위(五衛), 지방은 진관체제였다. 軍役을 부담하는 良人은 각각 직접 군영에 나아가 軍役을 담당하는 정군(正軍)과 軍役은 담당하지 않고 농사활동을 하면서 정군의 군사비를 부담하는 보인(保人)으로 나뉘어 있었다. 군정과 보인은 3정(三丁)이 1호(一戶)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평화가 오랜 기간 지속되자 군제의 성격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즉 점차 군제가 문란해지면서 軍役을 피하려는 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들은 직접 軍役을 부담하는 대신 다른 사람을 돈으로 사서 대신 자신의 軍役을 부담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고가대립(雇價代立) 반대로 軍役이 고되었기 때문에 도망하여 이를 피하려는 자들도 생겨나게 되었다. 따라서 국가도 점차 이러한 변화를 감안하여 軍役 대신에 포를 받는 대역납포(代役納布)로 방향을 수정하였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제도변화는 군사력의 약화를 가져와 壬辰倭亂 때 쓰라린 패배를 당하게 되었다.
壬辰倭亂을 경험한 조선은 유명무실한 오위제 대신에 訓練都監 등 오군영(五軍營)체제로 군제를 개편하였다. 訓練都監이란 국가가 전문 군인을 양성하고 그 재정을 良人의 포로 충당하는 군영이었다. 5군영에 속하는 다른 군문도 그 재정은 軍役을 지고 있는 良人이 군포를 냄으로써 충당하였다. 이제 良人은 몸으로 軍役을 부담하는 대신 1년에 군포 2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그러나 軍役은 공평하게 부과되지 않았다. 또한 良人 신분의 숫자가 바뀌지 않았다면 軍役을 둘러싼 문제는 심각하게 발생하지 않을 수 이었다. 그러나 관직매매와 족보·호적위조로 良人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良人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壬辰倭亂에서 전공을 세워 空名帖 등을 받아 신분상승을 하는 자들도 증가하였다. 반대로 軍役을 피하기 위해 奴婢로 자청하는 경우도 증가하였다. 그 결과 良人의 숫자는 줄어들었다. 반면에 국가가 걷어야만 하는 軍役의 양은 고정되어 있었다. 均役法을 주장했던 홍계희의 표현을 빌리면 당시 軍役은 50만 호에 해당하는데 실질적으로 부담하는 숫자는 10만 호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 부족분은 나머지의 良人들에게 가외로 부과되었다. 그 부족분을 징수하기 위하여 백골징포(白骨徵布)·황구첨정(黃口簽丁)·족징(族徵)·인징(隣徵)등과 같은 가혹한 착취가 자행되었다.
백골징포란 죽은 사람에게 포를 부과하는 것이다. 본래 죽거나 60세가 넘은 자는 軍役을 면제시켜 주게 되어 있었다. 황구란 어린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니깐 황구첨정이란 16세 이하의 아이들에게 군포를 징수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와 같은 부담을 견디다 못한 良人들은 도망하거나 奴婢가 되어 軍役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제 관리는 그 부족분을 도망자의 친족이나 그 마을에 부과하는 족징과 인징을 통해 충당하고자 하였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던지 양역을 부담하고 있던 자식의 죽음을 부모가 다행으로 여기는 사태가 일어났다. 또 현종 때 평양에서는 族徵을 피하기 우해 일족이 자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사태는 윤리를 무너뜨리고 국가의 지배력조차 위협하는 심각한 사태를 유발하였다.
국가에서는 이러한 폐해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첫째 방법으로는 역을 면제받고 있던 사람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兩班들에게도 군포를 내도록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번번히 兩班의 이해관계에 걸려 시행될 수 없었다.
英祖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종래 2필씩 부담하던 군포를 1필로 줄이는 均役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군포의 액수를 1필로 줄이게 되면서 군포의 부족분을 충당하는 방법이 문제로 대되었다. 그래서 조선은 그 부족분을 魚鹽稅를 징수하고 선무무관 및 결작의 징수로서 충당하고자 하였다. 종래 魚鹽稅는 왕실이나 국가기관이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군포를 충당하는 재원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결작이란 모든 토지에 대해 1결당 2두씩 별도로 부담하게 한 세목을 지칭한다. 이것은 토지를 가지고 있는 모든 이들이 부담해야 하는 몫이었다.
선무군관(選武軍官)이란 軍役을 부담하지 않고 있던 한유자(閑游者)들을 군관으로 삼아 포를 징수하자는 제도였다. 한유자란 良人신분으로서 재력이 있는 자들을 지칭한다. 이들은 兩班과 비슷한 복장을 하고 호적에 유학이라고 칭하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에 대해서는 軍役을 부담하지 않았던 층이었다. 이러한 층들이 점차 확대되는 추세였기 때문에 국가는 이들에게 선무군관이라는 명칭을 주는 대신에 군포를 징수하도록 한 것도 특이할 만한 일이다.
이처럼 均役法은 군포의 액수를 줄였다는 점에서 良人에 대한 국가의 양보를 의미한다. 또한 왕실이나 국가기관의 세원이었던 魚鹽稅를 군사재정으로 전환시킨 점도 주목된다.
그러나 여전히 역부담이 형평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그 후에도 兩班들은 여전히 軍役을지지 않았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들이 부담해야 할 결작을 良人들에게 전가시켰다. 그러므로 軍役으로 인한 역부담의 불균형은 均役法 시행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는 개선되었으나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와같은 세금제도의 개선은 중앙의 지방행정 통제능력이 뒷받침될 때 가능한 조치다. 이 때문에 英祖년간에는 이후 강력한 지방통제政策이 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