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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선암사와 그 학풍
차 차 석 / 동방대학원대학교 불교문예학과 교수
목 차
1. 머리말
2. 근대 선암사의 사자상승1) 근대 선암사의 법맥2) 근대 선암사의 강맥
3. 근대 선암사의 학풍과 그 특징1) 화엄중심의 융합정신2) 유불회통과 현대화에 적응하는 전통
4. 맺는말
국문 요약
선암사는 전라남도 승주군에 있는 명찰이다. 일천여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사상의 산실이 되었으며, 한국 정신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선암사의 학풍과 그 전개과정은 태고보우를 시발점으로 삼아 전개되는 법맥 중에서 부용영관에 와서 부휴와 청허의 양대 계열로 분파되며, 청허계열은 다시 편양언기와 소요태능의 두 계열을 중심으로 선암사의 법맥과 강맥이 이어진다. 이들 가운데 청허파가 선암사를 주도했다. 특히 18세기 이후 수선사 계열인 침명한성의 제자인 함명태선을 시발점으로 경붕익운, 경운원기와 금봉기림의 4대강맥을 확립한다.
선암사의 학풍은 화엄과 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조불교의 전통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으며, 이교회통론을 당연시하는 고승들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불교라는 종교가 지향해야할 대중화라는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화엄과 선, 염불의 융합이며, 진여심과 중생심의 이해를 둘러싼 심성론에 관한 논쟁이기도 했다.
20세기에 접어들면 선암사의 학풍은 전통과 근대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천주교의 전래, 근대문명의 유입 등은 기존의 불교계에 던져진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조선불교 전체의 교단조직의 정비, 외세의 침략에 따른 전통의 보호와 적응, 유교적 가치의 퇴조와 그에 따른 포교방법의 변화 등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따라서 선암사를 고집하지 않고 송광사와 손잡고 새로운 교육시설이나 포교소, 포교사 양성 등에 나서게 된다. 무집착의 가풍 속에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주제어
선암사, 학풍, 법맥, 강맥, 회통, 화엄, 선
1. 머리말
선암사는 전라남도 승주군에 있는 명찰이다. 일천여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문화와 사상의 산실이 되었으며, 현재도 수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정신문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더구나 필자가 늘 관심을 가지고 있는 대각국사 의천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며, 현재 가장 오래된 대각국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기도 하다.
그렇다고 선암사가 천태종에 속하는 사찰은 아니다. 아니 천태종에 소속된 적도 없다. 대각국사가 화엄사상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화엄학의 전통과 유관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각국사 이래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선암사는 호남불교계를 주도하는 한 축이었으며, 그 중심에 선과 화엄사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대각국사와의 인연도 우연은 아니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는 대각국사 의천에 관한 글을 발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근대에 접어들어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고승들의 학풍을 중심으로 어떠한 전통이 계승되고 있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대략 18세기에서 20세기 초엽에 걸쳐 활동했던 고승들 중에서 선암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강백 내지 선사들을 중심으로 사상적 특징과 흐름을 파악하려는 것이다.
물론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형성되는 선암사의 강맥은 함명태선(1824-1902), 경붕익운(1836-1915), 경운원기(1852-1936), 금봉기림(1869-1916) 등으로 사자상승되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사상적 특징을 살펴보는 한편, 이러한 강맥이 형성되는 과정과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도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한 것이 선암사라는 사찰의 학풍과 문화적 정체성을 보다 명확하게 밝혀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 선암사는 한국불교태고종(이하 태고종)의 사상적 본산이라 평가할 수 있다. 해방 이후 전개되는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열 속에서도 태고종이 사수한 유일한 본산이기도 하다. 태고종의 강원과 선원이 이곳에 있다. 태고종 승려들은 언제나 이곳에서 수행할 수 있으며, 사찰을 에워싸고 있는 조계산의 풍광과 어우러져 천년의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의 자태 속에 얼룩진 근대화의 상처는 현재진행형이다. 모습은 예전과 다름이 없건만 활발발했던 僧風과 전통은 현대사회의 흐름에 뒤처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아쉬움을 느끼게 된다.
필자는 선암사가 새로운 승풍을 진작하고, 현대사회를 주도하는 사상적 진원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니고 있다. 더하여 졸고가 선암사의 정체성을 재확립하고 발전하는데 조금의 보탬이라도 되었으면 한다. 지난 역사가 단순히 지식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선암사의 역사를 창조하는 동력인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 발원을 이면에 전제하고 본고를 기술하고자 한다.
2. 근대선암사의 法脈과 講脈
선암사의 사자상승 관계를 통해 그 사상적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선암사의 법맥을 살펴보는 것이다. 불교의 전통 속에서 법맥은 피의 상속처럼 사자상승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다. 따라서 선암사의 계보나 전통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다. 둘째는 선암사의 강맥을 살펴보는 것이다. 강맥을 살펴보는 것은 사상적인 전통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법맥과 달리 강맥은 문중과 무관하게 사상적으로 적당한 인물이 아니면 傳講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물론 강맥과 법맥이 중첩되는 경우도 있지만 별도로 전승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을 감안한 접근 방식이다.
1) 근대 선암사의 법맥
선암사에 대한 종합 조사보고서로 1992년도에 전라남도 승주군에서 발간한 선암사란 책이 있다. 이 책에 의하면 선암사와 유관한 고승으로 신라말기의 道詵(827-898)이 있으며, 고려 중기에 활동한 대각국사 義天(1055-1101)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枕肱懸辯(1616-1684)과 栢庵性聰(1631-1700), 護岩若休(1664-1738), 霜月璽篈(1687-1767), 환허대사(1690-1742), 訥庵識活(1752-1830), 海鵬展翎(?-1826), 枕溟翰醒(1801-1876), 錦岩天如(1794-1878), 碧波贊英(1807-1887), 鏡潭瑞寬(1824-1904), 虛舟禪師(?- 1888), 幻月大師(1819-?), 鐵鏡永寬(1819-1889), 函溟太先(1824-1902), 景鵬益運(1836-1915), 擎雲元奇(1852-1936), 錦峰基林(1869-1910), 雲岳頓覺(1872-1922) 등이 있다. 이들이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고승들이다.
물론 이상에 열거한 고승 이외에도 수많은 고승이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각종의 佛畵에 나타난 畵記나 상량문, 비문 등을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선암사를 중심으로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고승들의 법명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그 법맥은 동일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는 특정한 계열의 승려들이 중심이 되고 있지만 조선 중기에는 크게 두 계열의 승려들이 중심이 되어 활동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청허휴정의 계열과 부휴선수의 계열이다. 두 계열이라 했지만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의 스승이 부용영관이란 점에서 본다면 동일한 계열에 속한다. 즉 태고보우 – 환암혼수 – 벽계정심 – 벽송지엄 – 부용영관으로 이어지는 법맥이기 때문이다.
이상에 열거한 선암사의 고승들은 결국 부용영관을 기점으로 분화된 청허휴정과 부휴선수의 계열에 속하며, 그 이래 번성한 가지에서 나온 법맥에 속한다. 다만 부휴선수 계열은 선암사 보다는 송광사를 중심으로 번성하고, 청허휴정의 계열은 선암사를 중심으로 번성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특히 선암사에 화엄학의 전통이 수립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보면 대각국사 의천까지 소급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백암성총이 선암사에서 화엄강회를 크게 열었으며, 뒤이어 상월새봉이 화엄법회를 진작시켰다. 이후 선암사는 화엄과 선이 융합된 종풍을 형성하게 되었다.
먼저 부휴선수 계열의 스님으로 대표적인 인물은 백암성총과 해붕전령, 침명한성, 화산오선 등이 있다. 특히 해붕전령과 침명한성은 대둔사의 蓮潭有一(1720-1799)과 심성논쟁을 전개하는 순천 송광사의 默庵最訥(1717-1790)의 법맥에 속한다. 해붕전령은 묵암최눌의 제자이며, 침명한성은 묵암최눌의 제자인 幻海法璘의 法孫이고, 화산오선은 침명한성의 제자이다. 또한 침굉현변의 제자였지만 그의 권유로 백암성총의 제자가 된 無用秀演(1651-1719)이 있다. 이들의 법계를 정리하면 영해약탄(1668-1754) – 풍암세찰(1688-1758) – 묵암최눌(1717-1790) – [환해법린, 해붕전령] - 영봉표지 – 침명한성 – 화산오선으로 이어진다.
청허휴정 계열의 스님으로는 부휴 계열의 스님을 제외하면 대다수가 여기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청허휴정 이래 鞭羊彦機派와 逍遙太能派로 大別할 수 있는데, 소요태능파로는 침굉현변과 그의 제자인 호암약휴가 있으며, 침굉의 제자인 桂陰浩然(1704년 선암사중수비 음기 작성)의 문하이자 법손이 되는 東岳在仁(18세기 초 활동)과 西岳等閒(18세기 중반 활동)이 있다. 편양언기파는 선암사를 주도하는 세력이라 말할 수 있는데, 편양언기의 제자인 楓潭義諶를 기점으로 분파하여, 그의 제자인 月渚道安 - 雪巖秋鵬 - 상월새봉으로 이어진다. 상월새봉의 제자인 龍潭慥冠에서 분파하여 (혜암윤장) – 눌암식활 - (성총확준) - 溪峰心淨 - 幻月時憲(1819-1881)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선암사의 4대강맥을 형성하여 이름을 떨치게 되는 것은 용담조관 아래로 (규암낭성 - 서월거감 - 회운진환 - 원담내원 - 풍곡덕인) - 함명태선 – 경붕익운 – 경운원기 – [금봉기림과 운악돈각]으로 이어지는 법맥이다. 또한 풍담의심 아래로 (月潭雪霽 - 환성지안 – 호암체정 – 설파상언 – 낭송유화 – 연서설환 – 연월안평) - 벽파찬영 – [청호화일 – 월영처관, 자암경순 –신봉기정]로 이어지는 계열이 있어서 선암사 문중의 3대 법맥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환성지안의 제자인 涵月海源 아래로 (완월궤홍 - 한봉체영 - 화악지요 - 화담경화 - 수월묘행 - 고경성윤) - 철경영관 – 원경연준으로 이어지는 법맥이 있다. 최근세까지 이상의 3대 계파가 선암사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속하지는 않지만 선암사의 고승으로 소개된 경담서관은 설파상언 – 백파긍선 – 도봉국찬 – 정관쾌일 – 환응탄영 – 호명가성으로 이어지는 법맥에 속한다. 그는 백파긍선의 3대法孫이었지만 선암사에서 고명을 날리고 있던 침명한성을 찾아와 공부하고 傳禪제자가 되었기 때문에 선암사의 일원이 되었다고 본다.
2) 근대 선암사의 講脈
근대 선암사의 강맥은 4대에 걸쳐 그 명성을 날리게 된다. 이미 이상에서 언급한 바가 있듯이 함명태선 – 경붕익운 – 경운원기 – 금봉기림으로 이어지는 강맥이 그것이다. 이들은 법맥과 강맥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채를 발하고 있다. 그러나 함명태선의 강맥은 거슬러 올라가면 침명한성으로 이어진다. 함명태선은 침명한성의 전강제자인 것이다. 그리고 침명한성은 부휴선수스님의 10세 법손이고, 영해약탄 스님의 5세 법손이란 점을 고려하면 선암사의 법맥은 청허휴정 계열이지만 강맥은 부휴선수 계열과 중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침명한성은 1801년 태어났다. 출가 이후 침명은 운흥사의 大雲스님에게 교학을 배우고, 구암사의 白坡스님에게 선을 공부했으며, 영봉혁원 법사에게 법인을 전수받았다. 스님은 동리산 태안사, 조계산 송광사 등지에 거주하며 20여년간 학인을 지도하다가, 만년에는 선암사 대승암에서 10여년간 후학을 가르쳤다. 전법제자에 화산오선, 보운기준, 설저묘선, 영암상흔, 만암대순 등이 있다. 전강제자에 함명태선이 있으며, 전선제자에 선원소류를 저술한 설두유형(1824-1889), 선문증정록을 저술한 우담홍기(1822-1881), 경담서관, 용호해주 등이 있다. 설두유형과 우담홍기는 白坡亘璇(1767-1852)의 선문수경에 대해 찬반의 입장을 달리하고 있지만 모두 침명한성의 전선제자였다. 침명한성이 백파긍선에게 선을 공부했다는 점에서 본다면 둘 다 백파긍선과 무관하지 않다.
함명태선은 1824년 9월 화순의 적천리에서 출생했으며, 14세에 풍곡덕인스님의 문하로 출가했다. 뒤에 침명한성이 선암사에서 開堂할 때 그의 문하에서 5-6년간 삼장을 두루 섭렵했다. 그의 학덕은 널리 알려져 “얼마 전에는 왼편에 형암, 오른편에 양악이고, 근래에는 오른편에 백파, 왼편에는 침명이 있다. 요즘에는 오른편에 설두, 왼편에는 함명이라 일컫는다.”고 할 정도로 칭송을 받았다. 그리고 고종3년인 1866년에 경붕익운에게 전강했으며, 경붕익운은 경운원기에게, 경운원기는 금봉기림에게 전강해 4대에 걸친 강맥을 형성하게 되었다.
3. 근대 선암사의 學風과 그 특징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선암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고승들의 면모는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인적 구성이 다양했다는 것은 사상적으로도 매우 열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양한 사상적 스펙트럼이 조화를 이루어 선암사 특유의 學風을 창출했던 것이다. 필자는 그것을 융합과 조화의 전통으로 이해하고 싶다. 융합과 조합 속에서 불교적 가치의 구현과 깨달음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두 가지의 커다란 특징을 느낄 수 있으며, 그런 점을 통해 선암사의 학풍과 그 특징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는 화엄학을 중심으로 선, 염불, 계율사상 등을 회통하는 점이며, 둘째는 유교와 불교의 회통정신을 기반으로, 진일보하여 고집하지 않는 열린 자세 속에서 근현대의 시대적 변화에 능동적으로 적응하고자 하는 점 등이다. 이하에서는 이상의 두 가지를 중심으로 근대 선암사의 학풍에 대해 점검해 보기로 한다.
1) 화엄중심의 융합정신
선암사의 화엄학 전통은 매우 오래되었지만 그것은 조선불교의 전반적인 흐름과 궤적을 함께하고 있다. 즉 이지관의 논문에 의하면 조선전기에 해당하는 벽송지엄이 활동하던 시기까지만 하더라도 선종의 각 문파는 화엄경이나 법화경을 별도의 학과목으로 개설하지 않았으며, 月潭雪霽(1632-1704)에 이르면 종파의식이 사라지고 태고의 법맥에 속하는 선종만 독야청정하게 되었으므로 선종의 승려들이 화엄이나 법화 등 교종에서 숭상하는 경전을 기탄없이 강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화엄종의 소의경전이었던 화엄경과 원각경, 천태종의 소의경전이었던 법화경, 원효의 발심수행장이 선종의 교과목에 편입되며, 뒤에 四敎 중에 들었던 법화경을 빼고 대승기신론으로 대체하게 되었다. 바로 현재까지 한국의 강원에서 이수해야하는 교과과정이 설제스님 때 완성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사실은 선과 화엄이 융합되어 한국불교사상의 기저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선과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치열한 교학논쟁을 전개하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하였다.
이조시기에 들어 선암사에서 화엄학의 터전을 다지고, 화엄학의 깃발을 드날리게 된 것은 백암성총(1631-1700)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이씨이며, 남원이 고향이다. 13세에 조계산으로 출가했으며, 취미수초를 만나 9년간 공부하고 그의 법을 계승했다. 30세부터 개강했으며, 숙종 15년(1689) 봄에 낙안의 징광사에서 화엄연의초, 대명법수간정기, 정토보서, 영험록 등을 간행에 보급했다. 그의 저술로는 무용수연이 편집한 백암집2권과 성총 자신이 纂輯한 정토보서, 사권지험기, 정토찬백가, 치문경훈주3권, 대승기신론필삭기회편4권 등이 있다. 그는 숙종 18년(1692)년 봄 선암사에서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전국에서 학승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學德을 존중받게 되었다. 이러한 기록들을 참고하면 화엄경 내지 화엄학과 유관한 疏鈔를보급하거나 직접 화엄경을 강의해 화엄사상을 널리 현양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화엄법회를 개강했다고 하지만 선이나 정토를 배제했던 것은 아니란 사실을 간행한 저서의 목록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오히려 화엄사상을 중심으로 한 교학을 연마하되 선종의 종지를 탐구하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
백암성총의 뒤를 이어 선암사의 화엄학풍을 드날린 고승은 상월새봉(1687-1767)이다. 선암사에 남아 있는 대사의 비문에 의하면 대사의 휘(諱)는 새봉(壐篈), 자는 혼원(混遠)이며 상월은 그 호이니 속성(俗姓)은 손(孫)씨이며 순천인(順天人)이다. 어머니 김씨가 꿈에 밝은 구슬을 받고 임신하여 정묘년(1687) 정월 18일에 출생하였다. 어려서도 모래와 돌을 모아 솔도파(窣堵波:탑)를 만들며 놀더니 11세에 조계산(曹溪山之) 선암사(仙巖寺)의 극준장로(極俊長老)에게 출가하였다. 15세에 머리를 깎아 스님이 되고 이듬해에 다시 세진당(洗塵堂) 화악문신(華岳文信)스님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18세에 설암추붕(雪巖秋鵬)에게 와서 학문의 길에 들어 마침내 의발을 전수받았다. 도를 이미 통하고는 벽허(碧虛), 남악(南岳), 연화(蓮華) 등을 두루 찾아뵙고 그들에게 모두 인가를 받았다. 계사년(1713)에 고향에 돌아와 어버이를 뵈었다. 책 보따리를 가지고 오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자 무용수연(無用秀演) 스님은 한번 보고서 탄식하기를 “지안(志安)스님 이후의 제일인자다.”라고 찬탄했다. 상월새봉은 영조 10년(1734) 봄과 동왕 30년(1754)에 각각 선암사에서 대대적인 화엄법회를 개강했다. 이 때 법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이 해주록이란 책에 수록되어 있는데 대략 1287명이며, 이 중에는 파일현간, 연담유일, 용담조관, 용암증숙, 두월청안 등의 고승이 참석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당시 강론의 과목은 다섯인데 화엄경 중에서 「세주묘엄품」은 파일현간이, 「십지품」은 연담유일이, 「염송」은 용담조관이, 「묘법연화경」은 용담증숙이, 「금강경」은 두월청안이 맡았다. 상월새봉의 융회적인 자세를 알 수 있다. 그는 화엄이나 선을 고집하지 않았고, 중요한 대승경전을 대중에게 널리 강의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당시 법회의 상황에 대해 연담유일(1720-1799)은
“아무개는 삼가 선암사에서 화엄대회를 열고, 지금 갑술년 3월 15일에 開經을 시작했습니다. 三聖을 융합해 동일한 몸을 나타내고 비로자나를 모든 부처의 근원으로 삼으며, 만법을 모아 一心으로 돌아가니 화엄은 모든 경전의 근본이므로 衆妙를 포함하고 있으며, 말과 생각을 초월해 있습니다, ...말법시대에 큰 법회를 열어 만년의 성대한 행사로 삼으라 했더니, 여론이 함께 일어나 모의하지 않아도 모두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보배로운 자리 위에서 울려 나오는 말은 普慧에서 나오는 보현보살인가 의심했고, 화엄법회 아래 겹겹이 둘러싼 것은 異生과 同生이 섞인 듯 했습니다.”
라 표현하고 있다. 당시 법회가 얼마나 대단한 감명을 주었는가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영조 24년(1748)에 ‘禪敎兩宗都摠攝國一都大禪師’에 임명되었다. 영조43년(1766) 가벼운 질병을 보이다 열반했는데, 세수 81세였다. “물은 흘러 바다로 돌아가지만 달은 저도 하늘을 떠나지 않는다(水流元歸海 月落不離天)”는 열반송을 남겼다. 저서로 상월대사시집1권이 현존하고 있다. 그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상월새봉은 선사이지만 화엄사상을 현창했으며, 기타 법화경 등 다른 대승경전도 공부한 학승이었다. 선과 화엄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대승경전을 중시했고, 더하여 염불 등의 수행을 방편으로 활용한 융합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동사열전에 의하면 해붕전령의 출생연도는 명확하지 않지만 조선 순조 26년(1826) 10월 6일 입적했다. 선암사로 출가했으며 默庵最訥(1717-1790)의 법인을 전수받았다. 선과 교에 날카로운 안목을 지니고 있었으며, 문장은 구술과 같이 뛰어났다. 따라서 호남 7高朋의 한 명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스승이 역시 화엄학에 뛰어난 고승이었다는 점에서 그 역시 화엄의 가풍을 계승했다고 본다. “만상 중에 오직 法身佛만이 드러나 있다.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있는 것이니 마음이 곧 부처이다. 남녀의 부처도 있고, 소나 말인 부처도 가능하며, 온 우주 모든 것 역시 부처가 가능하다.”고 말해 화엄 性起論의 입장에서 현상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붕전령의 스승인 묵암최눌 역시 심성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피력해 연담유일(1720-1799)과 논란을 일으킨 것은 한국불교사상사에 특기할 사건 중의 하나로 남아 있다. 그는 화엄과도, 제경문답반착회요, 내외잡저 등의 저서가 있다. 특히 제경회요는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반야경 등 제경의 요점을 추려서 정리한 것이지만 기신론의 영향이 강하게 배여 있는 책이다. 心性論에 있어서 연담과 묵암은 각각 다른 견해를 지니고 있었다. 연담의 임하록에 수록되어 있는 「心性論序」에 의하면 묵암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따로 원만하며 아직 하나가 된 적이 없다”라는 견해를 밝혔으며, 이에 반해 연담은 “부처와 중생의 마음은 각각 원만하게 있지만 본래는 하나”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묵암이 말한 “未曾一個者”를 ‘원래 동일하지 않다’라고 해석했다는 점에서 일원론과 이원론으로 이해할 여지를 만들었다.
그러나 김용태의 이해처럼 개체의 圓滿性을 중시한 점에서 묵암을 이해한다면 보다 불교적인 이해에 접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기신론의 사상적 영향에서 중생과 부처를 일심이문의 발현으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화엄사상의 입장에서 사물을 인식하고자 했던 것이 연담의 입장이었다면, 반면에 현상의 입장에서 일체의 사물을 이해하고자 했던 것이 묵암의 입장이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개체의 원만성은 불성의 현현이란 점에서 그 자체로 이미 최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 원만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중생이 중생인 이유는 이미 불성과 유리되어 중생의 존재 이유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 중생을 무명의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했던 것이 일반적인 이해였다. 동일한 차원의 연장선상에서 묵암은 중생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중생 그 자체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하고자 했던 것이라 보는 것이다. 화엄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사무애의 입장과 상통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현실을 적극적으로 긍정한다는 점에서는 장점이 있지만 현실 속에 내포되어 있는 무수한 모순과 부조리조차 적극적으로 긍정하지 않을 수 없는 논리적 한계가 성기론에 내재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한 결과일 수도 있다. 여하튼 해붕전령은 이상과 같은 묵암최눌의 사상적 계승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선암사의 화엄학풍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키워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해붕전령을 지나 선암사의 화엄강맥이 수립되는데 초석을 다지게 되는 침명한성 역시 묵암최눌의 법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에 의하면 “근래에 화엄강주로 이름난 사람을 보면 사불산 용호가 있고, 구월산에 하은이 있으며, 조계산에 침명과 함명 등 여러 스님이 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능화가 언급하고 있는 화엄강주 중의 중심인물은 침명한성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침명한성(1801-1876)은 선암사 4대강맥이 탄생하는데 산파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강제자 중의 한명인 함명태선이 선암사 4대강맥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교학뿐만 아니라 선학에도 출중해서 설두유형(1824-1889)과 우담홍기(1822-1881), 경담서관, 용호해주, 응화(1813-1885) 등의 선장을 傳禪 제자로 두고 있다. 용호스님은 문경 청화산 백련암의 대강사였다. 침명은 15세에 팔영산 능가사에서 勤敏長老에게 축발했으며, 17세에 화엄종의 대운성홍 화상을 찾아가 징관, 종밀의 疏와 설담, 연파의 註記를 배웠고, 선법은 구암사 백파긍선에게 받았다. 28세에 송광사 보조암에서 개강하였으나 이듬해인 29세에 선암사의 요청으로 대승암으로 옮겨 30여년간 주석하며 개강했다. 제자에게 강석을 물려주고 조용히 선지를 참구하다가 고종 13년(1876)년 10월 2일 입적했다. 세수 76세, 법랍 61년이었다. 微疾로 자리에 누워 제자들을 불러 모았을 때 어떤 제자가 誦經하려고 하자 침명은 손을 내저으며 “진정한 송경은 소리가 없고, 진정으로 듣는 것은 들리는 소리가 없는 것”이라는 무설설의 설법을 하며 제자들을 경책했다. 침명스님은 계율을 철저하게 지켰으며, 매일 밤 자시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 목탁을 치며 미타를 10여차례 염불했다. 화엄학장이요 대선장이면서도 염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은 조선 후기의 사원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선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신규탁은 “화엄교학 – 간화참선 – 정토염불은 솥의 세 발처럼 조선 후기에 확고하게 자리 잡으며, 이런 수행 가풍은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전통일 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는데, 이러한 평가에 가장 전형적인 인물이 침명스님이라 할 수 있다.
침명한성의 강맥을 계승한 것은 함명태선(1824-1902)이다. 그의 속성은 박씨이며, 본관은 밀양이다. 순조 때인 갑신년(1824) 9월에 화순의 적천리에서 태어났다. 14세에 화순 만연사의 풍곡덕인선사에게 의탁했으며, 15세에 축발하고 백양사 도암화상에게 수계하였다. 선암사에서 침명한성 스님에게 5~6년간 三藏을 두루 섭렵했으며, 이 무렵 함명의 탁월함에 감탄한 침명스님이 그에게 대승계를 주었다. 그는 계율을 청정하게 지켰으며, 학인들을 지도한지 30여년에 고명이 사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선암사에 남아 있는 「화엄종주함명당대선사비명」에는 화엄종으로 강석을 主持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선암사의 요청을 받아들여 남암과 북암에서 開堂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南庵에 있을 때 성이 강씨인 자기문위(慈屺文瑋)라는 스님이 스님을 찾아와 나눈 선문답이 남아 있다. “묻건데, 대지가 다하면 비로자나부처님은 어느 곳에서 오줌을 눕니까? 선사께서 拂子를 세우고 慈屺의 모자를 건드리며 말했다. ‘훌륭한 뒷간이구먼’ (이에)자기가 껄껄거리며 웃었다.”고 한다. 남아 있는 문답을 통해 함명 스님이 지녔던 선풍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나의 선사는 선교를 竝隆하고 福慧를 兩足했다”는 평을 통해 함명스님의 학풍과 인품이 어떠한가를 알려주고 있다. 여기서 선교를 함께 융성시켰다는 것은 화엄과 선을 동시에 중시했다는 의미로 파악하는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선암사의 주류는 되지 못했지만 함명태선과 함께 침명한성에게 동문수학한 경담서관(1824-1904)이 있다. 순조24년(1824) 태어나 15세에 장성 백양사에서 삭발하고 출가했다. 경담은 순창의 구암사로 백파긍선을 찾아가 학문을 시작하며, 그의 문하에서 내외전을 두루 섭렵하고 백파긍선의 3대법손이 되었다. 또한 선암사에서 학풍을 날리고 있던 침명한성을 찾아가 수계하고 선법을 전수받았다. 화엄학과 선학에 조예가 뛰어났으며, 계율을 엄수하고 만년에는 염불에 전념했다. 고종 광무8년(1904) 세수 81세, 법랍 66세로 열반에 들었다. 경담 역시 화엄학과 선, 염불을 병행한 수행자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함명태선의 전강 제자인 경붕익운(1836-1915)은 속성은 김씨이고 본관은 김해이다. 1836년 2월 24일 순천군 주암면 접지에서 태어났다. 母兄인 화산스님이 출가를 했는데, 그를 따라가 책을 읽다가 方外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15세에 화산스님이 권유하여 출가했으며, 이듬해 선암사 침명한성 스님의 문하에 들어갔으며, 호운선사에게 삭발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내외의 서적을 두루 탐독하고 19세부터 사방으로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능엄경, 기신론, 반야경, 원각경은 應月和尙에게 배웠으며, 화엄과 염송은 설두유형에게 배웠다. 25세에 조계산에 돌아와 그해 가을에 무등산 원효암에서 建幢했는데 학인이 稻麻처럼 늘어섰다. 함명이 마침내 拂子를 보내면서 말하길 “나는 이제 비로소 다리를 펴고 잠잘 수 있겠다”고 하였다. 35세에 함명의 뒤를 이어 대승암에서 개당하고 설법하길 10여년. 무인년에 이르러 송광사로 옮겨 강설하다가 己卯年에 돌아와 경운원기를 上足으로 삼았다. 이후 좌선과 熟香을 하며 미타를 염송했다. 스승인 함명이 병들자 옷을 풀지 않고 5년을 모셨는데 하루와 같이 하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스님을 空門의 大孝師라 불렀다. 乙卯年(1915) 여름인 6월 28일 微疾을 보이고 右脇으로 서쪽을 향해 누워 조용히 示寂했다. 세수 80세, 법랍 66세였다. 경붕스님에 대한 전기는 동사열전에는 보이지 않는다. 스승인 함명태선의 전기에 이름이 보이며, 선암사에 건립된 「경붕당대종사비명」을 통해 상세한 것을 알 수 있다. 선교양종을 겸수했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학풍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비명의 말미에 예운산인 최동식이 묘사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스님의 학풍을 짐작하게 할 따름이다. “眞俗을 雙融했으니 대체로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저 진제를 벗어나 속제를 말하는 것은 본래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러나 속제를 벗어나 진제를 말한다면 어느 것이 有爲이고 어느 것이 無爲일 것인가? 내가 나의 스승을 새기는 것이 아니라 스승의 무리들이 이미 그 스승을 새기는 것이다”라 밝히고 있다. 先師들의 학풍을 계승해 중도적 세계관을 수립했으며,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으되 필요한 경우 다양한 방편을 시설해 중생을 啓導했다는 표현이 아닐까 짐작하게 한다. 전법제자에 경운원기가 있으며, 기타 많은 학인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경붕익운의 사법제자인 경운원기(1852-1936)는 철종 3년(1852) 정월 3일에 태어났으며, 17세인 고종 5년에 지리산 연곡사의 환월화상에게 출가하였다. 순천 선암사의 대승강원에 들어가 경붕익운의 가르침을 받다가 30세 되던 해에 강석을 물려받았다. 1911년 정월 15일 영호남 승려들이 순천 송광사에서 총회를 열어 조선불교임제종을 결의하고, 임시 종무원을 송광사에 설치했을 때 임제종관장에 선출되었다. 1929년에는 조선불교선교양종교무원이 설치되자 교정으로 추대되었다. 스승인 경붕익운의 사상을 충실하게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경운원기의 사법제자인 금봉기림(1869-1916)이 출현하여 화엄교학과 선을 竝重하는 선암사의 강맥을 계승하게 된다.
이상에서 선암사의 학풍을 중요한 인물 중심으로 고찰했거니와 그 핵심은 화엄교학과 선을 동시에 수학하는 전통이다. 그 위에 더하여 염불을 배제하지 않고, 수행의 방편으로 채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敎學과 修禪에 뛰어나 宗匠들이라도 말년에는 염불과 주력을 통해 수행을 한 것은 고집하지 않고 실질을 숭상하는 가풍이었다. 중도적 관점에서 수행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성찰하고, 그렇기에 조화와 원융 속에서 다양한 수행자들이 동거할 수 있는 선암사라는 수행도량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2) 유불회통과 현대화에 적응하는 전통
조선 후기 불교계에는 선학이나 화엄학의 이론을 토대로 유교와 불교의 會通을 강조하는 주장이 대두된다. 이러한 사상적 경향은 억불정책으로 침체되어 있던 교세를 회복하기 위한 목적이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진단하기도 한다. 물론 병자호란 이후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 유교적 입국을 강화하면서 상대적으로 불교를 핍박하게 되자 그에 대한 반발이 불교계 안팎에서 일어나게 된다. 실권을 장악한 성리학자들과 정면으로 대립할 수 없었던 승려들은 과거부터 있어왔던 儒彿會通論을 통해 본질적인 동일성을 주장하며 탄압의 고삐를 늦추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주장에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유교와 불교의 회통이나 융합, 혹은 본질적 차원에서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이론은 이미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등장한다. 즉 도생은 佛性이나 一乘을 理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玄學의 太極이나 道의 개념을 수용하고 있다. 유식사상의 소개와 화엄사상의 전개, 그리고 선종의 발전은 道나 理의 개념 대신 心이나 一心이란 용어로 대체한다. 송대의 성리학은 오히려 불교의 유식사상이나 화엄학 내지 선학의 사상적 영향 속에서 성립했다는 기존의 연구결과에 의거한다면 유교 내지 성리학과 불교는 이미 사상적으로 회통의 여지를 잉태하고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현재의 입장에서 본다면 유교독존주의에 직면한 불교의 융화적 자세, 나아가 새로운 문화의 유입에 따른 유교와 불교의 문화적 융합과 재창조, 현상의 차별을 초월해 존재하는 근원적인 통일성 내지 원만성의 인식이라는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성도 있다.
문화사상적인 배경은 여하튼 불교와 유교의 회통에 대한 주장은 이미 그 연원이 오래되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오면 함허득통을 비롯해 서산휴정의 三家同根論 등이 있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蓮潭有一과 仁嶽義沾은 유교와 불교의 회통을 강조한다. 그러나 유교와 불교의 회통을 주장한 승려들은 이들 뿐만이 아니었다. 선암사를 대표하는 학승들 역시 二敎의 회통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선암사를 대표하는 고승들의 이교회통론과 그 특징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선암사를 대표하는 고승 중에서 이교회통론의 선봉은 상월새봉이라 말할 수 있다. 상월새봉은 “儒家에서 말하는 未發氣像은 佛家의 如如理이다. 이른바 太極은 우리 불가의 一物이다. 이른바 理一分殊는 우리 불가의 一心萬法이다. 이로 말미암아 引證하면 전후와 상하에 一貫하는데 어찌 儒釋의 차이가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상월은 太極과 一物, 理一分殊와 一心萬法을 대비시켜 유교와 불교의 회통을 시도하고자 한다.
또한 해붕전령 역시 불교, 유교, 노장의 회통을 주장한다. 동사열전에 의하면 그는 “공자는 方內의 聖者이고, 老子는 方外의 仙者이며, 부처는 方內外의 佛者라 전제”하며, 유불도 삼교의 설을 광범위하게 섭렵한 학문적 바탕 위에서 “하늘이 부여한 것은 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道라 한다. 하늘이 부여한 성을 불교에서는 확 트인 부처라 하는 것이다. 하늘이 부여한 확 트인 부처의 속성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걸림이 없지만 인정에 뒤덮인 것이 마치 구름이나 안개가 맑은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대장경을 설하시어 모든 사람의 가려져 있는 人情을 제거하고 확 트인 天性을 찾도록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유불도 삼교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를 性이란 단어로 파악하고, 그 단어를 통해 삼교의 회통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유교의 窮理盡性, 도교의 修眞練性, 불교의 明心見性의 性은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것이라 인식하는 것이다. 해붕의 이상과 같은 의식은 그의 스승인 묵암최눌의 영향일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묵암최눌 역시 「廢紙上疏」를 통해 불교의 처지와 부당한 대우, 과중한 부역 등에 대해 13가지 조목을 들어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에 백곡처능이 작성한 「간폐석교소」와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유교와 불교는 하나의 도로 통한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귀천은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儒釋의 교유는 오랜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昌黎는 太顚에게 옷을 남겨주었고, 東坡는 佛印禪師에게 띠를 풀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동방에 근래의 일을 말하면, 晦堂大師는 친히 豊元君의 堂에 올랐고, 影海法師는 歸鹿翁의 門에 글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그 예입니다. 山人을 혜원이 아니라고 해서 물리치지 않는다면 참으로 다행이겠습니다.”
라 말한다. 儒釋이 교유했던 역사적 사례를 통해 유석의 친밀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불교적인 세계관에 의거해 융합과 상생의 의식을 드러낸다.
“골짜기 하늘 아래 서로 만나 이야기 할 때/ 종일토록 온화하여 세속인연 멀어졌네.
儒釋이 다른 길로 나뉘었다고 누가 말했나/ 함께 形跡을 잊으면 같은 곳에 이른다네.”
라고 말한다. 형상의 차별에 의거하지 말고, 두 가르침이 추구하는 본질적 바탕 위에서는 귀착지가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말해 두 가르침의 회통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침명한성의 전기에는 유석의 회통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법제자인 함명태선에게는 이교의 회통에 대한 견해를 찾아볼 수 있다. 그것도 함명의 전기에는 이교의 회통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으며, 그의 비명에 새겨진 내용을 통해 단편적이지만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의 비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 先師는) 두루 유학의 性理와 고금의 治亂과 得失에 대해 통달하였다. 일찍이 ‘유교의 智, 仁, 勇은 곧 불교의 悲, 智, 願이다. 불교에는 三寶가 있는데 이는 일찍이 전해오는 三綱領에 가깝다. 불교에는 五戒가 있는데 鄒經(맹자의 가르침, 즉 유교)의 四端과 誠實의 信에 가깝다.’”
고 하였다. 그러면서 비명을 쓴 여규형은 “학문이 미천한 자들이 서로 다투니 이것은 성인의 진면목을 모르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대개 선인들이 개발치 못한 탓이다. 나는 儒者이지만 불교를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비명에 나오는 내용은 마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될 초기의 격의불교를 연상하게 한다. 그러나 표현상의 문제를 떠나 이교의 회통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승지라는 벼슬을 한 여규형의 말처럼 淺見末學의 무리들이 아무 것도 무르고 분란을 조장할 뿐인 것이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전개되는 시기는 조선 말기의 사회 역시 사상적으로 전환의 시기 내지 혼돈의 시대라 말할 수 있다. 성리학에 대한 절대적 시각이 허물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추사나 다산, 혹은 이건창이나 여규형과 같은 많은 지식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지니는 시기이기도 하다. 천주교의 전래와 서양과학문명의 전래, 실학의 대두 등은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한 시기였다. 따라서 연담, 인악과 같이 儒釋의 회통을 주장하는 소리도 개항과 함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는 것이다.
三敎鼎立의 시대는 가고 새로운 서양의 문물이 홍수처럼 밀려오면서 교단 자체의 조직과 운영에 있어서도 일대 혁신을 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교양의 습득, 새로운 문명에 대한 적응의 문제 등은 피할 수 없는 과제로 다가왔다. 경붕익운이나 경운원기, 금봉기림과 같은 강백들은 이러한 시대사조와 함께 혼돈의 시대를 유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명확하게 이교회통에 대한 입장을 천명하기 보다는 새로운 시대사조에 적응하기 위한 실천적 활동 등에 참여하면서, 이에 대한 이론을 개발하는데 몰두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화엄이나 선학의 이론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가 하는 등의 문제였다. 경붕익운이 내외의 서적을 두루 읽고 불교에 몰두했다는 碑銘 속의 표현에는 이미 유교나 노장에 관련된 기본적인 교양서적을 탐독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선암사의 학풍이자 당시의 일반적 흐름이었다는 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이교회통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오히려 시대의 변화 속에서 이교회통에 대한 언급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라 추측할 수도 있다. 이러한 점은 경붕의 제자인 경운원기가 계율을 진작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나 혹은 송광사와 손잡고 순천에 도심포교당을 개설하는 일, 이회광의 원종에 맞서 조선불교임제종을 결의하고 관장에 선출되는 일, 서울에 각황사(지금의 조계사)가 건립되자 포교사가 되어 상경하는 일 등,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경운원기의 제자인 금봉기림 역시 유학자들과 교유하는 한편으로 27세 때인 1895년 대승암에서 개강하여 10여년 교편을 잡는 일이나 1914년 순천군 선교양종강연소 포교사를 겸임하는 일 등으로 나타난다.
20세기를 전후로 시대적 환경의 변화는 새로운 사안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二敎會通의 문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 사조를 선도하는 일에 경도되었던 것이다. 이런 변화는 1906년 설립하여 운영해 오던 선암사승선학교를 개편하게 되는데, 1913년 선암사에서 운영하는 보통학교와 전문강원이 각각 2곳이나 운영되고 있었으며, 1914년에는 광주부에 포교당을 건립하게 된다. 1917년 당시 선암사의 본말사에서 양성하고 있던 학생수는 모두 65명이었는데 지방학림 학생 20명, 불교전문학생 10명, 보통학교 학생 35명 등이었다. 변화된 시대사조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암사 승려들의 의식이 나타나 있다. 화엄과 선, 염불, 유교 등을 고집하지 않고 본질을 추구하는 선암사의 학풍이 20세기에 적응해서 새로운 움직임으로 표출된 것이다.
4. 맺는말
이상에서 선암사의 학풍과 그 전개과정을 고찰했다. 태고보우를 시발점으로 삼아 전개되는 법맥은 부용영관에 와서 부휴와 청허의 양대 계열로 분파되며, 청허계열은 다시 편양언기와 소요태능의 두 계열을 중심으로 선암사의 법맥과 강맥이 이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법맥을 중심으로 청허파가 선암사를 주도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지극히 학문적인 접근이라 밖에 말할 수 없다.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구도자들의 열정은 법맥과 강맥을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재동자와 같이 무수한 선지식의 지도를 받으며 사상을 계승한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선암사를 주도한 고승들의 구도행각 역시 마찬가지라 볼 수 있다. 따라서 필요한 경우는 계열이 다른 스님이라도 거리낌 없이 초빙하여 학생의 지도를 맡기게 되었다. 禪脈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스승의 가르침 속에서 悟道의 인연을 함께 하는 스승을 법사로 삼았던 것이다. 바로 고승들의 삶 자체가 融會的이었으며, 걸림없는 무집착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암사는 화엄과 선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조불교의 전통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으며, 이교회통론을 당연시하는 고승들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그것이 설혹 이조의 유교입국에 따른 자위적인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두 가르침은 회통의 여지가 많다는 점에 동의했던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는 이미 현학과 불교의 융합, 격의불교의 전개, 성리학의 탄생과정에 미치게 되는 불교의 영향 등에서 본다면 會通論의 등장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따라서 二敎會通論이 단순히 국면을 모면하기 위한 승려들의 자구책으로 이해하는 것은 일면적 고찰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서도 불교라는 종교가 지향해야할 대중화라는 명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화엄과 선, 염불의 융합이며, 진여심과 중생심의 이해를 둘러싼 심성론에 관한 논쟁이기도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접어들면 선암사의 학풍은 전통과 근대의 융합이라는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천주교의 전래, 근대문명의 유입 등은 기존의 불교계에 던져진 문화적 충격이었지만 동시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적인 문제였다. 따라서 조선불교 전체의 교단조직의 정비, 외세의 침략에 따른 전통의 보호와 적응, 유교적 가치의 퇴조와 그에 따른 포교방법의 변화 등에 능동적으로 대처한다. 따라서 선암사를 고집하지 않고 송광사와 손잡고 새로운 교육시설이나 포교소, 포교사 양성 등에 나서게 된다. 무집착의 가풍 속에서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암사는 20세기 중후반에 들어와 과거의 활발했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참고문헌
상월대사시집(한국불교전서 제9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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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담집3권(한국불교전서10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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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academic traditions with
a modern times Seonamsa
Cha, Chaseok
Dongbang Graduate University
The Seonamsa is the famous temple at Seung ju kun in Jeonlanamdo. It was that providing the various culture and thought in the history of the being few days old year which are charging the one axis of Korea spirit culture.
The academic traditions and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Seonamsa evolved from the initial setting the Taego-Bou. The lineage of dharma branched in the two systems which are Bu-hyu and Cheong-heo in the Bu-yong-yeong-kwan.
The Cheong-heo system has again Pyeo-yang-eon-gi and So-yo-tae-neung which the two systems were connected the lineage of dharma and lecture of the Seonamsa in the central.
It led the Cheong-heo sect among the Seonamsa. In specialty 18th century after that Su-seon-sa system established the lineage of recitation of the fourth generation which are the initial setting the Ham-myeong-tae-seon with Gyeong-bung-ik-un, Gyeong- un-won-gi and Geum-bong-gi-rim.
The academic traditions of the Seonamsa have the tradition of the Joseon dynasty Buddhism perfectly to develop in centering the Avatamska and Zen. The preaching outline have been to succeed the scholastic mantle of high priests built on the fusion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On the other hand, the religion of Buddhism was striving to solve the proposition which was popularization with intention. it is fusion of Zen, Buddhist invocation and the Avatamska. The mentality theory to understand around Jin-yeo-sim[眞如心] and Jung-saeg -sim[衆生心] were about dispute.
To begin in the 20th century, the academic traditions of the Seonamsa is faced with tradition and the fusion of the modern times. Transmission of Catholicism, such as the influx of modern civilization thrown into the traditional Buddhist culture shock, but at the same time was a real problem that must be adapted.
Thus, according to the traditional protection of foreign invasion and adaptation, the joseon Buddhism was full maintenance of the religious order organization, The change of the propagation method with the subsequent decline of Confucian values managed the activity. So, it came out the Seonamsa without being particular about Songgwangsa hand in hand with new training facilities, missionary workand missionary work training. It is showing the appearance to deal with the change to the activity in the family tradition of the nothing attachment.
*Key words
Seonamsa, The academic traditions, The lineage of dharma, The lineage of lecture, The fusi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