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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천하신 예수님(눅24:49-53)-2024.4.7
부활하신 예수님은 사십일 동안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습니다. 그중에 가장 큰 핵심은 장차 오실 성령님에 대한 언약이라고 생각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완전히 교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해를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우리 곁을 떠나 아버지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실 것입니다. 승천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마무리가 되고 새로운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승천에 대한 비밀을 제자들에게 이미 알려주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6장62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가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전 있던 곳은 아버지 품속이요, 보좌우편입니다. 오신 곳으로 돌아가시겠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20장17절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을 만지려는 마리아를 향해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네 형제들에게 가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승천하신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에베소서4장10절입니다.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입니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승천하신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베드로전서3장22절입니다.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부활하시고 성경대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교회가 승천에 대해서는 크게 다루지 않습니다. 아마 승천이 신화인 것처럼 다루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이라는 곳에서 승천하셨습니다. 올리브 산이라고도 부르는 감람산은 예수님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산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재림을 가르쳐주시던 산입니다. 마태복음24장을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종용히 나아와서 묻습니다. 제자들의 질문은 어느 때에 예루살렘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는 일이 있겠으며,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 날의 징조가 어떤 것이냐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대환난을 통한 재림의 징조를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감람산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곳입니다. 스가랴서14장4절에 보면, 여호와의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편 감람산에 서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중요한 산이 감람산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분명히 감람산이라고 소개되어 있습니다(행1:12). 그런데 누가복음 24장 50절을 보면, 베다니에서 올라가신 것처럼 소개되어 있습니다. 두 지역이 다른 곳이 아닙니다. 베다니는 감람산 기슭에 있습니다. 감람산 아랫자락에 벧바게라는 동리도 있고, 베다니라는 촌도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감람산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승천하신 것입니다. 사실 교회가 예수님의 승천의 비밀을 가르쳐야 합니다. 승천도 예수님의 구속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는 의사요, 이방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네 가지 관점에서 소개합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부활하신 예수, 그리고 승천하신 예수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서 마지막을 예수님의 승천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도행전을 예수님의 승천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도 누가가 기록한 것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승천을 매우 심도 있게 다룹니다.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의 승천을 가볍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승천도 예수님의 구속사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시간 예수님의 승천이 주는 의미를 알아보려고 합니다.
(1) 성령님을 통한 임무교대를 알리심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셨음은 가장 먼저 십자가의 죽으심을 위함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함인 것이지요. 그리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은 의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의의 옷을 입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보좌 우편으로 돌아가신 것입니다. 바로 그곳은 예수님이 오셨던 자리입니다. 그 영광스러운 자리로 복귀하신 것이지요. 예수님의 지상사역이 마무리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승천으로 죄의 문제와 의의 문제가 다 해결된 것입니다. 이제는 이 땅에 사는 당신의 자녀들을 위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새로운 방식입니다. 이른바 우리 곁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방식인 것이지요. 임마누엘 하나님의 임재방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승천하사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성령을 선물로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성령이 오시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미안하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시지 않으시면 성령은 우리에게로 보내심을 받으실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승천은 성령을 선물로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인 셈입니다. 예수님은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아버지 보좌 우편으로 승천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은 오직 성령이셨습니다. 성령이 임해야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은 반드시 승천하셔야만 했습니다.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의 관심이 승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보내리니 이 성을 떠나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49절). 성령을 받을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 주님이 승천하실 것을 암시하는 것임과 동시에 성령이 강림하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인 것이지요. 예수님의 승천이 있어야 성령이 강림하시거든요. 승천이 주는 또 하나의 유익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2)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여기심
사실상 예수님의 승천으로 제자들과 추종하는 무리들이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여긴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예수님의 승천을 기점으로 예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여겼다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본문 52절과 53절을 보십시오. 승천하신 주님을 향해 그들이 본격적으로 경배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가서도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표현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지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는 주님을 볼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부활도 신기한 것이었지만, 예수님의 승천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친히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배우면서 그들의 신앙에 새로운 눈이 뜨였을 것입니다. 사실 승천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겠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그분으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무려 사십일 동안 다시 듣고 배움으로 인하여 믿음이 자랐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만큼 성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승천을 받아 들일만큼의 믿음으로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승천은 대단한 축복이요, 대단한 선물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이 승천하시는 주님을 보면서 경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승천하신 주님이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믿었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찬송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공생애기간을 지나면서 예배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뛰어난 스승이나 최고의 랍비정도로는 여겼을는지 몰라도 예배의 대상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제 제자들의 믿음이 달라졌습니다. 물론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완전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맛보기 전의 믿음과는 분명히 다른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진짜 사십일 동안 제자들의 믿음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을 보면서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쁨은 아주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만큼 제자들이 성숙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십일 동안의 사역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집중교육기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도 학교 다닐 때 평상시에 공부하는 것과 시험을 앞두고 며칠간 집중 공부하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었지요. 그런 정도로 이해하셔도 될 것입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예수님의 승천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그들 가운데 두려워하거나 염려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혹은 섭섭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마치 금방이라도 주님 곁으로 따라 갈 것 같은 분위기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손을 흔들면서 배웅해드리는 모습처럼 말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올라가시면서 무리들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셨습니다(50절). 마지막 작별을 고하는 축복기도였겠지요. 마치 내가 지금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처소가 다 준비되면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고아같이 버리지 않고 반드시 데리러 오실 것입니다. 승천은 성령을 약속하심과 동시에 반드시 오리라는 언약입니다.
(3) 하늘로 올라가심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는 약속을 주심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심대로 다시 오십니다. 사도행전1장11절을 보면, 하늘로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육체이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의 육체와 부활하신 이후의 육체는 다릅니다. 그것은 우리 믿는 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기 전의 육체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은 이후의 육체는 다릅니다. 물론 우리 몸의 화학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의미가 다른 것이라는 말이지요. 믿기 전의 육체는 육신의 지배를 받는 그야말로 고깃덩어리에 불과할 뿐이었지요. 그러나 믿은 이후의 육체는 성령의 전이 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주변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영으로 부활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승천도 영으로 했고, 재림도 영으로 하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 주 예수님은 육체를 입으신 상태로 부활하셨고, 그 몸으로 승천하셨으며, 다시 오실 때도 육체를 입으신 상태로 재림하십니다. 물론 신령한 몸을 입으신 것이지요. 지금 우리 주님은 승천하셔서 아버지 보좌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그분은 보혜사로서 우리를 위해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시는 것이지요.
지금은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물론 예수님의 일을 대신하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십니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의 일은 하나인 것입니다.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일인 것이지요. 누군가는 질문하기를 주님은 지금 하나님 보좌에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고 묻습니다. 성경대로 말씀드리면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아버지께로 가시는 목적을 요한복음에서는 우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말씀하십니다(요14:2-3). 그리고 처소가 예비되면 우리를 데리러 오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승천을 진심으로 기뻐해야 합니다. 요한복음14장28절을 보면,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면 나의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고 계십니다(히11:16). 지금 누군가가 들어가서 영원히 살아야 할 처소를 예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는 건설중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시민이 채워지면 주님이 승천하신 모습대로 우리 가운데 강림하실 것입니다. 믿는 자를 데리러 오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승천을 기뻐해야 합니다. 본문 52절도 예수님의 승천을 본 무리들이 큰 기쁨을 갖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승천이 주는 유익을 알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예수님께로 승천할 것을 믿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지요.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유익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역시 주님께로 승천할 것을 믿는 소망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승천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한 것처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히4:14).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을 바라보는 우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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