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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문제를 보며...
쌍용자동차 의 해고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등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노동자들이 정신질환, 우울증, 자살 등 절박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TV를 통해 접하면서 나는 그들의 선배로써 아주 복잡하게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한다.
그리고 20대에 경험했던 처절한 기억들을 50이 지나 세상에 처음으로 공개 한다.
첫 번째는 그들의 지금 모습이 나의 과거 모습이다.
남쪽 시골벽지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서울에 상경한 가방끈 짧은 나는 86년부터 서울 경기, 공장 지역의 벽보에 붙어있는 구직광고 전단지를 보면서 떠돌다 일당 이천삼백원에 가슴 설레며 취직한 세 번째 회사가 구로공단의 대한광학이었다.
88년봄 입사7개월째 경남 창원으로 회사의 지방이전과 함께 약 900명의 사원중 450명을 해고하겠다는 회사와 노조의 비밀 합의내용 일부를 내가 공개하면서 노동자들의 파업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은 지금과는 다른 기존 어용노조의 방해와, 회사, 국가 정보기관, 노동부, 경찰서, 관할구청이 합심하여 만들어진 이른바 관계기관대책회의, 심지어 군 정보기관인 보안사 까지 개입한 노동자탄압의 시절이었으니...
아무런 조직력도 없이 즉흥적 철야 농성으로 시작된 파업을 이끌면서 배고픔에 쓰러질 것을 가장 두려워하며 나 혼자 위원도 없는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선포하고 일주일가까이 버텨낸 이후에야 노동자들이 대책회의에 함께했고 62일 동안의 길고긴 철야농성 끝에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에 합의하여 승리한 것이다.
말이 승리이지 파업 과정에 구사대, 경찰 등의 폭력으로 팔다리가 탈골 또는 부러진 부상자가 일곱 여명, 두뇌 함몰로 뇌손상의 중상, 화상, 척추손상이 네명 등 약 40여명의 환자가 발생한 이후의 결과였고 난 경찰이 직접 지휘하는 구사대 약13~15명의 손에 야구방망이와 쇠파이프의 무자비한 구타로 척추손상과 함께 기절, 병원에서 의식이 돌아오자 온몸이 피투성이인체로 치료도 없이 곧바로 구속이 되었다.
파업의 승리로 석방 후에 난 복직이 되었고 척추의 병원치료와 회사생활을 병행하던 4개월 후 근처에 있는 여성사업장 지원 싸움에 함께 하다가 구사대가 던진 벽돌에 오른쪽 눈을 맞아 한쪽 눈을 실명하여 병원에서 삼일 만에 마취에서 깨어나 의식을 찾게 된다.
여성단체 연합에서 안구 교체 비용을 부담하겠다는 제의를 나는 고맙게 마음으로만 받고 나보다 더욱 필요한 사람에게 돌아가기를 바란다고 거절하였다.
척추는 당시 27%의 노동력상실 감정평가를 받았다.
대한광학의 파업승리직후 구로공단에 20여개의 민주노조가 결성되고 서울지역 노조 협의회가 결성되었고 이후 전노협을 거쳐서 민노총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민노총의 탄생과정에 대한광학사건 또한 노동자들의 중요한 흐름의 중심에 함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노동조합이 구사대폭력으로 인한 피해 보상을 외면하고 오히려 방해했다.
당시 19세였던 두뇌함몰의 피해자는 현재 뇌기능장애로, 나는 사건 당시 26세 였고
50이 넘은 지금도 척추의 통증으로 밤잠을 설치고 있다.
당시 피해보상 및 부상자치료 문제를 노동조합이 일괄 합의 처리해달라는 부상자들의 요구에 의하여 노동조합 간부총회가 소집되었고 공식회의에서 노조 간부는 공개적으로 “돈 밝히는 모습이 보기에 그렇다” 또 한 간부는 “노동력상실이 있음에도 100%의 임금이 정년까지 지급되면 피해가 없는 것이다” 라는 칠판에 설명까지 하면서 열변을 토하는 논리에 40여명이 넘는 노동해방과 결사 항전을 외치던 동지들 중에 단 한명만이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라는 이의 제기를 하였고 나머지는 침묵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거수투표는 조합의 입장에 단 1명의 반대로 부결되었다.
피해자들은 회사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피해보상을 당사자들이 알아서 하는 것으로 공식입장을 정리한 것이다.
회사측은 사표를 제출하는 조건으로 피해에 대한 보상을 하겠다는 공식입장을 밝히고 있는데도 말이다...
더군다나 병원에서는 생명이 하루하루를 다툴 만큼 위독한 상태이니 빨리 병원에서 퇴원해서 좋은 곳으로 요양을 가라는 사형선고에 가까운 판결을 받고 회사에서 치료비 전액을 부담하던 상황에서도 병원에서 등 떠밀려 퇴원해 있던 나였다.
이미 세상에 알려진 위험인물? 인내가 회사를 그만두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이런 살벌한 사회를 만드는 주범이 누구인가? 난 그때부터 사회를 보는 시각이 분명히 달라졌다.
일부 환자들은 피해보상을 포기하고 회사에 남았고 나와 몇은 결국 동지들에 의해 등떠밀려 해고 아닌 사퇴를 결정해야만 했다.
이런 황당한 일들이 발생한 이유를 나는 관계기관 대책회의의 논리에 매몰된 가방끈 긴 동지들의 결정이라고 본다.
그 이후 난 예상했듯이 취직이라는 것이 불가능했고 보안사의 사찰 대상자였고, 지금까지 취직은 생각하지 않고 농사를 짓는다.
구로공단이 생긴 이후 파업을 통한 첫 번째 노동자들의 승리이고 구사대 폭력문제가 소송을 통해 최초로 배상 판결이 주어진 여러 의미를 갖는 노동운동계의 영웅이었던 내가 가장 비참하게 동지들에 의해서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던 나의 처지가 어떠했을까?
지금도 2종의 운전면허 자격증과 장애인 자격증?.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명함이다.
난 3년 가까운 세월을 여기저기 떠돌며 잠자리를 해결하고 밥을 얻어먹는 거지 생활을 했다. 그리고 사회단체에 10여년 넘게 얹혀 있다가 지금은 독립하여 농사를 짓는다.
국민참여 정권 때 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의 피해보상을 국가가 추진하여 전화도 없는 산골에 살고 있던 나에게도 노무현 정권 때 추가 접수 소식이 전해져 한줄기 희망을 안고 상경하였다. 어떤 선배는 차관급의 정부 고위직에도 있었고 여당 당직자 등등 곳곳의 국가 기관에 자리를 잡고 있어서 든든함도 있었다.
당시 노무현 국회의원은 눈의 실명사건 항의 집회에 이름을 걸고 함께 하였고, 이회찬 당시 국회의원은 남부서에 항의 방문하여 수감자인 내가 서장실에서 함께 차를 마셨던 특혜?도 누렸던 그런 분들이 대통령, 국무총리 등이 되었으니 가슴 벅찰 일이 아닌가...
정부 기관에 있는 한 친구를 만나 보상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물었더니 우리가 보상받으려고 싸웠느냐는 첫마디의 대답이었다.
난 그 자리에서 약 10분을 쉬지도 않고 욕설을 퍼부었다.
뇌가 함몰 되서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동지, 치료비가 없어서 거지로 근근이 목숨만 부지하고 있는 동지, 고문후유증으로 증거 자료도 없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
너희가 월급 받아서 단 한번이라도 그들을 찾아가 봤던가?
단 1원이라도 그들을 위해 써봤던가?
이 두 가지 질문에 한 가지만 이라도 실행하고 그런 말 하면 난 진정으로 욕 안하겠다.
그러고도 민주화?. 국가의 발전?. 노동운동? 그런 말을 너희들이 입에 담을 자격이 있냐?
난 민노총 정책실장도 찾아갔다.
정부의 부당한 폭력으로 인한 피해자들의 실태파악이라도 하고 있나요? “아니요”
민노총의 예산중에 정당한 노동운동 과정에 부당한 피해로 치료나 생계 대책이 없는 피해자들을 위해 무슨 예산이든 집행되는 내용이 있나요? “아니요”
정부에서 보상하겠다는데 피해자들 에게 필요한 조건을 정부에 요구할 내용은 준비하고 있나요?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보상자체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난 오래전 당시 심각한 부상을 당했던 정신장애 동지 등 몇 달을 수소문해서 찾은 6명의 피해자들 대부분 정부의 보상 정책내용도 모르던 부상자들의 자료를 만들고 서류를 만들어 보상신청을 하게 했다.
동일 장소의 동일 사건이니 자료 또한 이름 주소 외에 글씨하나 다르지 않은 동일 서류다.
보성의 TV도 없이 산골에 처박혀 농사짓는 내가 했다.
한데 척추 부상 1명은 탈락이다.
보상 심의위원들의 자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들을 그 자리에 앉혀놓은 자들이 누구일까? 다름 아닌 국민들이다 그러면서 세상이 잘못됐다 욕한다.
난 서류접수 5~6년 만에 척추의 보상으로 약 5백만원 치료비로 약 5백만원 그것도 예상 치료비를 치료도 안하고 어떻게 산출해 주냐는 의사법에 위배되는 조건을 정부에서 요구하니 제발 발급해달라고, 정부에서 보상 않겠다는 의도를 왜 모르십니까? 의사의 목을 내놓으라는 겁니까?
라는 데도 한나절을 매달려 사정해서 불법진단? 으로 가까스로 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다시는 이의제기 않겠다는 각서에 도장을 찍고...
기 치료비의 증거 영수증 등 자료를 제출했으나 인정 못하면 행정 소송하던지 라는 안내문 외에 무슨 이유인지도 설명이 없는 감액 제시금액으로...
눈 실명 문제는 약 2년동안 국가를 상대로 행정 소송을 하여 현장 사진에 원본 필름까지 있음에도 결국 불인정 판정을 받았고 너무나 잘못된 판결이라 생각되어 변호사 사무실에서 경비를 지급하고 항소해도 되겠느냐는 확인후 항소도 패소 했다. 변호를 담당했던 변호사는 법률인 이라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라는 고백을 나에게 하였고 난 1차 패소후 승소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리도 자랑스런 대한민국에 민주화운동 유공자라는 종이딱지 한 장 내 평생 처음 받아본 상장으로 내주변의 누구하나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종이딱지를 내 집의 가보로 보관 중이다.
깡패들도 패싸움하다 다치면 병원에 업고간다.
해야할 근본적인 문제들은 제껴 놓고 호텔에서 총회를 한다는 민노총의 소식을 들었을때 난 씁쓸하고, 정년 근무자의 자녀들을 우선 채용해달라는 대기업노조의 단체 협상요구 내용소식을 접하면서 난 그들이 참으로 딱한 생각이 든다.
전화도 없는 산속에 사는데도 고압철탑이 내집의 인근에 지나가서 알고 보니 토지의 주인도 모르게 사업이 진행되고 주민 설명회가 서류상으로만 하자가 없는데 사실과 다르니 사기사건인데도 절차상 아니 정확히 서류상 하자가 없으니 문제가 없다는 그것도 민주화운동의 선배가 차관으로, 내가 직접 자료를 들고 세 번씩이나 설명을 하고 개인적 부탁이 아닌 정당한 일처리를 부탁한 정부기관의 최종 판결이다.
이문제로 공사방해 업무방해 기물파손등 손해1억500만원을 배상하라는 집과 토지에 가압류 설정을 하는등 3년을 시달렸고
노무현 정부에서 진행된 농업 지원사업중 저온 저장고를 일부 보조, 자부담, 융자를 들여 공사를 했다.
5년 만에 자료제출 하라는 검찰의 통지로 검찰청에 불려가 커피를 마시며 화기애애? 하게 조사가 다 끝나고 조사관 이야기가 당신은 사기죄의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한 것이란다.
나는 행정소송으로 6개월을 농사를 접고 7회의 재판 및 검찰청을 드나들었는데 현장을 한번 와서 보면 될 것을 단한차례의 현장 방문도 없이 최종판결에 담당 판사님, 난감해 하면서 “왈” 황천수씨는 죄가 없는 것 같은데 유사 사례들이 많으니 벌금 150만원을 깍아 그냥 50만원 벌금에 처합니다. 난 일해야 살아가니 항소를 포기하고 사기꾼이 되었다.
나는 말이 안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난 회사도 아닌, 정부도 아닌 민주노조라 일컷는 동지들이 처절하게 짖 밟았고 단한번 사과도 없는 그들을 지금은 진심으로 미워하지 않는다.
허위 서류로 문제가 생기면 푼돈으로 해결하는 전략의 한전 관계자들을 욕하지 않는다.
손바닥처럼 훤한 문제를 현장 확인도 없이 죄인 만드는 검찰, 판사들 욕하지 않는다.
국가를 전복 하려는 세력쯤으로 이해하는 심의 위원들을 욕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이 사회의 일반적인 모습이기고 사회는 어느사회나 완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글을 읽는 당신은 그렇지 않은가? 내 자식은 좋은 대학가서 경쟁우위를 점해야 하니 학원에, 고액의 과외에, 좋은 학군에... 시골에서 학원도 안다니며 다니는 내 자식들을 사회의 찌꺼기쯤으로 생각하는 선생님들에게 난 더 이상 교육을 맡길 수 없었다.
나처럼 돈 없는 사람은 자식들 또한 불공정한 시합 아닌가? 정년퇴임을 내가 못했으니 내 자식들의 기업취직은 2순위로 밀려야 되는가?
난 먹는 음식에 맹독성의 농약을 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내가 농사짓다 실감하고 15~6년 전부터 모든 농사에 농약 비료사용을 않는다.
농사짓는 농민에게 농약 비료를 사용치 않는 농사는 돈의 개념으로 얼마나 무모하고 농민들도 이해 못하는 일인 줄 아는가?
그런 무모함 때문에 무공해 쌀을 먹고 살고 나를 믿어주는 회원들은 매월 10만원씩 보내온다. 내가 알아서 있는 것 보내주고... 난 그 회원들에게 좀 더 많은 좋은 것을 보내고 싶다.
다른 사람을 짓밟고 경쟁에서 무조건 이기라는 국가 교육이념을 거부해 아이들 셋을 초등학교 과정도 2년 가까이 안보내면서 초졸 외에 정규학교를 그만두었다.
인간이 살아가는 사악한 세상이 아니길 바란다면 내 자식은 지식보다 겸손과 인간의 모습이 우선되는 교육을 해야 하는 이유이다.
학교를 보내놓고 내가 겪은 선생님들의 황당함은 내 개념에선 도를 넘어섰다.
솔직하고 정직하게 자라가는 내 자식들이 난 자랑스럽고 다행스럽다.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문제의 주범은 누구일까? 세상은 풍요로워 졌는데 도대체 문제를 어디서부터 찾아야 될까?
나는 그 주범이 경쟁논리에, 이기주의적 사고에 찌들어있는, 나하고 알고 있으면 내 지역의 사람에게 권력을 안겨주는 표를 던지는 집단 패거리 주의의 폐해, 깡패 집단보다 못한 동지애를 부르짖으며 민주화를 외치는 그쪽의 주류세력들....
결국 국민의 51%가 타락한 결과 아닐까?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모두가 좀 더 인간다워 지려는 노력을 할 때 사회는 밝아지지 않을까?
가방끈이 짧은 내가 바라보는 사회의 모습이다.
난 지금 무지무지 행복하다 이제는 민주화니 운동이니 안한다.
내 자식들 에게도 사회는 네 자신의 삶을 바르게 살려는 노력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뼈아프고 목숨 걸고 얻은 나의 결론이라 며 싸움에 나서지 말고 네 자신을 바르게 하라 이른다.
나에게 몇 번 만나지도 않았던 환갑이 훌쩍 넘은 가난한 노인이 내가 없는 집에 농사지은 쌀과 100만원의 돈을 놓고 간 일이 이곳에서 있었다.
난 급한대로 우선 쓰고 100만원을 가까스로 만들어 돈은 돌려받으시라고 찾아갔다가 오히려 혼나고 돌아온 일도 있다.
굶어 죽을 지경인 나에게 몇 만원부터 몇 백만원 까지 건네주며 아껴 쓰라던 친구들에게 눈물 나도록 고마움을 느낀다.
귀농한 칠순 노인네는 5백만 원을 아무런 조건 없이 선뜻 빌려준다.
그들은 하나같이 평범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 이었다.
나도 이제는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내가 가난하지만 밥 굶지 않고 농사지어 좋은쌀 먹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
평생 허리띠 졸라 모은돈 전부 긁어모아 30억짜리 아파트 단지내에 진입하여 경차 몰고 명품옷 없는 사람보다 내가 더 여유롭고 덜 외소 하지 않을까?
두 번째는 죽음처럼 어두운 세상에서 눈물을 흘리는 노동자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다.
나는 위의 상황들을 겪으면서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게 많은 실망을 했었다 그러나 비극적 결론을 보면서 눈물이 난다.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을까?
그런 사람들이 죽을 각오로 살면 조금 더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난 땅도, 돈도, 돌아가신 부모도, 건강도, 어디에도 기댈 언덕이 없이 그 사건이후 거지를 현실로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 당시 거지였던 나에게 막노동해서 번 돈으로 밥을 먹여주고 잠재워주고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상경하여 살고 있는 친구에게 용돈 타서 생활한 고향친구들에게 아직도 밥한 끼 대접할 겨를 없이 50이 넘었다. 그들도 밥한 끼 먹자고 하루를 제낄 수 없다.
이제 그런 사람들에게 암울한 현실의 벽앞에 좌절하는 젊은이들에게 그래도 나처럼 죽지 말고 살아가라고 부탁하고 부탁한다.
내가 긴 세월을 죽음과 씨름하며 살아왔으니 어찌 그들의 마음을 모를까?
하지만 당장 배고프지 않고 잠자리 있으면 기본 생명유지는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글을 보고 정말 갈 곳이 없고 절망적인 가정은 연락 바란다.
내가 책임질 수는 없지만 농사 짖고 살려는 맘으로 새 출발 할 생각이 있으면 나처럼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아주 넉넉지는 않으니 현재 노동력이 있는 최대 2가정 이상은 곤란하다.
농장의 직원 개념으로 내가 채용해서 함께 먹고사는 문제만은 해결해 가겠다.
망가진 내가 삶의 무게에 눈물 흘리는 한 가정이라도 함께 하면서 행복해 질수 있다면 나로서는 대단한 사회 운동가 인 것이고 이것이 점차 늘어 마을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내 새로운 목표이다.
그래서 내가 사는 골짜기 이름을 “남도평화마을”이라 이름 붙였다. 나도, 남도, 평화롭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한달전 함마 망치로 쇠를 내리치다 빗맞아 손가락을 쇠에 함께 내리쳐서 왼손 검지가 완전히 부셔졌다. 피범벅인 손가락을 옆으로 움직여보니 부러진 손가락 중간이 따로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고 부러진걸 알았는데 옆에 있던 사람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한다.
악 소리도 인상을 쓰는 일도 없이 무덤덤하게 손가락이 부러졌다니 그럴 수 밖에...
동내 의원에 가서 기브스? 해달랬더니 병원가서 수술후 치료를 받으란다.
난 붕대만 사가지고 집에 와서 종이 박스 오려 붙여 손가락을 고정하고 그냥 생활한다.
쇠에 맞은 순간을 제외하고 내가 느끼는 고통은 척추가 열배 백배는 더 고통스럽다.
자다가 척추의 통증으로 몸부림을 하는데 그래도 내 얼굴은 항상 즐겁게 웃고 산다.
어쩌면 평생을 이런 고통에 시달리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지만 난 행복하다. 꽃이 피는 봄날의 향기가 좋고 따스한 햇살이 좋다.
내 경험에 의하면 행복은 아주 가까이 없을 것 같은 곳에도 있다.
부디 더 이상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이기를 간절히 기도 한다.
2011년 4월 보성에서 황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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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대적인 아픔이 한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를 보냅니다.
세상은 다 그렇지라고 포기하지만 그 시대나 현재도
대부분의 우리들에게는 너무 힘겹기만한 세상입니다..
난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이란 단어를 무척 좋아합니다
아니 무지무지 사랑합니다..
처음엔 평생동지라고 굳게 맹세하고도
그 시대상황에 적절하게 변해가는 위선자...
결국 길바닥 경력을 어깨위에 짊어지고
권력을 위해 다른 길을 걸어가는 변절자...
다 이 시대가 낳은 아픔이지요..
님의 아름다운 생각과 결정에 한 없는
감동의
모든 것은 변해 갑니다...
나도 물론 변해 갑니다...
하지만 어떻게 변해가는가가
중요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