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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해문학아카데미KMA 원문보기 글쓴이: 香率
잊혀질 권리, 어떻게 할 것인가
2014.06.13
그리스 신화의 레테강은 죽은 사람이 하데스가 지배하는 저승으로 갈 때 건너야 하는 다섯 개 강 중 하나입니다. 망자는 그 강물을 한 모금씩 마시면서 과거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전생의 고뇌를 잊게 된다고 합니다. 문학을 비롯한 많은 예술작품에서 레테강은 이승과 저승의 단절을 알려주는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망각은 완전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기제(機制)입니다.
아날로그시대에는 이런 망각이 일반적이며 기억이 예외였던 반면 디지털시대에는 기억이 일반적인 일이며 망각이 예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정보를 걸러내는 망각이라는 사유과정을 통해 과거에서 벗어나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망각이 없으면 우리는 과거에 묶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디지털 기기에 기록되고 전파된 기억이 망각을 불가능하게 합니다. 죽은 뒤에도 흔적이 지워지지 않는 인터넷시대에 레테강은 없습니다.
죽음과 함께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디지털 장례식을 거행합니다. 인터넷 동호회 활동을 활발히 했던 남성이 시한부 암 선고를 받자 가족들에게 디지털 장례를 의뢰한 뒤 삶을 마감한 것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생전에 가입한 모든 사이트를 일일이 찾아가 탈퇴하고, 그곳에서 활동한 흔적을 지워주는 대가는 50만~100만 원이라고 합니다.
디지털 장례식 대행업체의 실적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의뢰인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고액의 수임료를 받고 연예인 기업인 정치인들의 게시 글을 관리해 주는 업체도 있다고 합니다. 철이 없을 때나 흥분상태에서 써 올린 글 등이 삭제 대상입니다. 미리 설정한 시간이 지나면 인터넷에서 데이터가 자동 소멸되는 ‘디지털 소멸 시스템(Digital Aging System)’이라는 특허도 출원돼 상용화를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가 될 만한 과거 발언이나 알리고 싶지 않은 행적을 지우고 싶은 사람들은 한국인터넷진흥원이 운영하는 KISA(http://clean.kisa.or.kr/mainList.do) 주민등록클린센터를 이용해도 됩니다. 주민등록번호와 공인 인증서만으로 자기가 가입한 홈페이지를 모두 검색하고 한데 모아서 탈퇴할 수 있습니다. 국번 없이 118로 전화를 걸어 한국인터넷진흥원 상담센터와 상담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내 흔적을 스스로 지우거나 남의 도움을 받아 삭제했다 해도 다 지워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나도 모르는 새 다른 사람들이 내 흔적을 복제하거나 퍼 날랐을 개연성이 큽니다. 스마트폰 등 각종 디지털 기기가 발달하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다양해지면서 누군가 올린 글은 대량 복사가 가능해져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적 현안이 되고 있는 게 ‘잊혀질 권리(The right to be forgotten)’입니다. 인터넷에서 생성·저장·유통되는 개인의 사진이나 거래 정보 또는 개인의 성향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 소유권을 강화하고 이에 대해 유통기한을 정하거나 삭제, 수정, 영구적인 파기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유럽사법재판소(ECJ)가 5월 13일에 내린 ‘잊혀질 권리판결’은 개인정보 침해 불만이 접수될 경우 당위성을 따져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해당 콘텐츠를 검색결과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명시했습니다. 유럽 28개국에서만 유효하지만 인터넷 정보에 대한 개인의 삭제권리를 인정한 첫 판결이라는 점에서 파장이 큽니다.
이 판결에 대해 유럽 지역에서 그동안 전개돼온 ‘사생활과 투명성’에 관한 토론의 긴장을 무너뜨린 성급한 판결이라거나 “유럽에서 인심을 잃은 구글을 겨냥한 것”이라고 의미를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이미 2012년 1월 25일 잊혀질 권리를 명문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정보보호법(Data Protection Law) 개정안을 확정했습니다. 유럽연합은 이 개정안을 개인과 법인을 포함한 전체 회원국에 직접 적용되는 최고 수준의 규범인 ‘규정(regulation)’ 수준으로 격상해 법적 구속력을 강화했습니다.
온라인에서 특정인의 사생활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 이른바 ‘신상털기’가 기승을 부리면서 우리나라에서도 4~5년 전부터 ‘잊혀질 권리’ 도입 필요성이 제기돼 왔습니다. 그러나 정보통신망법에 의하면 개인이나 기관이 인터넷 상의 게시물 등으로 명예훼손 같은 피해를 보더라도 법원 판결 없이는 삭제가 불가능합니다. 또 잊혀질 권리만 중시하다 보면 알 권리, 표현의 자유 등의 가치가 침해될 수 있습니다. 이 상충을 어떻게 해결하거나 조정할 것인가가 논의의 초점입니다.
우선, “잊혀질 권리가 과연 누구의 기억으로부터 무엇을 잊혀지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논의부터 해야 한다”는 주장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합법적이고 적법적으로 공개된 정보에 대해 ‘잊혀질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문제입니다. 이미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해 등에 대한 관련 법규가 있는데 ‘잊혀질 권리’를 추가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주장, 이 권리는 명예훼손과 사생활 침해를 포괄하는 상위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새누리당 이노근 의원이 지난해 2월 발의한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은 개인이 삭제 요청을 하면 즉시 처리토록 하는 내용이지만 시민의 ‘알 권리’와 게시자의 ‘표현의 자유’를 해친다는 반론에 부딪혀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국내에서도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습니다.
비영리 사단법인 오픈넷은 지난 9일 ‘인터넷의 자유와 개인정보 보호’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이어 10일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보인권포럼’ 행사를 통해 ‘구글 판결과 잊혀질 권리’를 조명했습니다. 16일에는 방송통신위원회가 ‘온라인 개인정보 보호 콘퍼런스’를 열어 이 권리의 적용문제와 새로운 법제화 가능성에 대해 다각도로 논의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잊혀질 권리’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권리는 내가 수집을 동의한 개인정보를 삭제할 것을 요구하는 ‘개인정보 삭제 청구권’이기도 합니다.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법한 정보가 ‘잊혀질 권리’에 밀려 반복적으로 삭제될 경우 정보 접근성 차단과 ‘알 권리’ 침해라는 심각한 문제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개인의 권리만 중시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인터넷에는 ‘승자의 기록’만 남게 되거나 법 권력을 보유한 소수의 사람들만 좋아지는 ‘정보의 비대칭성’이 더 심해질 수 있습니다.
잊혀질 권리에 대해 적극적인 판결을 한 유럽과 달리 거대 포털 사업자들의 이익이 걸린 미국은 소극적입니다. 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면 미국의 위키피디아,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유튜브, 트위터, 링크드인 등 첨단 기업들이 국내외에서 대규모 소송에 휘말릴 수 있습니다.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특히 중시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일반인들과 포털 사업자들의 이해는 당연히 충돌합니다. 포털 사업자들은 삭제 요청이 들어오면 피해 사실의 개연성 등을 따져 해당 게시물을 ‘임시 게재 중단’하지만 정해진 기간인 30일이 지나면 합의나 손해배상 청구 등 법정 싸움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잊혀질 권리(Delete)>의 저자인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새로 생성되는 모든 정보에 ‘정보 만료일’을 부여해 일정 기간만 유통되도록 하자고 주장했습니다. 디지털정보 저장에 사용되는 모든 기기에 정보 만료일을 지원하는 코드를 포함시키고, 사용자들이 디지털 정보를 저장할 때 만료일 정보를 입력해 정보 수명이 만료되면 자동 폐기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런 기술적인 논의에 앞서 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입법이 필요한지 여부부터 광범하게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과 사회, 사생활과 투명성 문제, 언론의 자유와 저널리즘 영역의 정보 처리문제 등 논의해야 할 사안이 많습니다. 국회 청문회에 나와 과거의 행적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고위 공직자 후보들은 아마도 잊혀질 권리가 하루라도 빨리 확립되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사회 전체가 참여한 신중하고 진지한 논의가 계속되기를 기대합니다. 잊혀질 권리는 존중돼야 하지만 그 권리를 존중함으로써 파생되는 문제점과 부작용을 경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한글맞춤법에 의하면 ‘잊혀질 권리’는 표준어가 아닙니다. ‘잊다’의 피동형은 ‘잊히다’이며 여기에 ‘~ㄹ’어미를 붙여 조어를 할 때는 ‘잊힐 권리’라고 써야 합니다. 그러나 이 용어가 국내에 번역 소개될 때부터 ‘잊혀지다’로 통용되고 있어 혼란을 줄인다는 취지에서 이 글에는 본의와 달리 ‘잊혀질 권리’라고 썼습니다. 이 점은 국가인권위 포럼에서 잊혀질 권리에 대해 주제 논문을 발표한 가톨릭대 이민영 법학 전공 부교수의 입장과 같습니다. 이 교수는 다행스럽게도 논문의 각주를 통해서 바른 한글맞춤법에 관해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필자소개
임철순
1974~2012년 한국일보 근무. 문화부장 사회부장 편집국장 주필 및 이사대우 논설고문을 역임했다.
한국기자상,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수상.
현재 한국일보 논설고문, 자유칼럼 공동대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